바라볼 망(朢 望)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 동쪽으로 쫓겨난 후 고개를 돌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것을 나타내고 있는 글자.
[갑골문자해설] 바라볼 망(朢, 望) » 송태정 박사 » 에덴동산에서 추방 당한 후에 그곳을 바라보며 돌아갈 것을 간절히 소망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바로 바라볼 망(朢,望)자인 것이다.
벌써 2025년 새해가 된 지도 한 달이 되었다. 사람마다 다 자기가 바라는 소망(所望)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망이란 글자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위의 갑골문자를 보면 바라볼 망(朢)자는 사람(人)이 높은 흙 언덕(土) 위에 서서 고개를 돌려 눈(臣)으로 그들의 본향 에덴동산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글자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망(望)자는 갑골문 이후 월(月)자가 추가되어 완성된 글자이다.
사람들의 특징은 있을 때는 소중한 줄을 모른다. 아담도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그랬다. 그런데 추방당한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여 나가면서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의 글자가 바로 바라볼 망(朢)자인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수메르 우루크(성경 에렉)의 왕 길가메시는 그의 친구 엔키두가 죽는 것을 보고서 영생을 갈망하여 찾아 헤매지만 결국 얻지 못한다.
고대중국의 가장 오래된 전승기록인 《산해경》에는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는 나라 불사국(不死國)의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죽음이 없었던 에덴동산 시대를 말하고, 그리고 곤륜산에는 사람이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 불사수(不死樹)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전설의 곤륜산 즉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일컫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제카리아 시친은 ‘고대이야기는 물론이고 역사 속에서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땅(에덴)에 가서 생명의 나무를 찾아 하늘과 땅의 신들 사이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자 했던 영생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핵심 주제이며 그것은 모두 수메르에서 기원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엄밀히 말한다면 에덴이 그 기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인 A.D 100년경에 기록된 허신의 《설문해자》에는 유교적 내용과 음양오행에 의거하여 해석한 것도 많지만, 그 당시 전부터 고대 근동과 페르시아와 인도를 통해서 끊임없이 전해져 온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승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옷 의(衣)는 두 사람을 덮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가죽 옷으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을 덮어 주었던 사실을 증거하고 있고, ‘신(神)은 하늘의 신으로써 천지만물을 이끌어내신 분’이다. 이것은 신(神)자가 귀신이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창조해 내신 하늘의 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등 굉장히 많은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A.D 100년 허신은 ‘소망하다는 망(望)’자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을까? “집을 나가 밖에서 떠돌고 있으니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는(望)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집을 떠나간 인류가 방황하며 떠돌고 있는데,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눅 15장).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한 이후에도 회개는 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아주 잠 시동안 에덴동산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보지 않는 순간을 이용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그런데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창세기 3장 22절에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는 그들을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지키게 하셨지만, 그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품고 가게 하신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들어간 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림자일 뿐이지 진짜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고 큰 흉년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들어간 그곳에서 눈을 들어서 하늘에 있는 참된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셨다. 이것을 성경은 증거 한다. 그들은 땅에 있는 본향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본향과 하늘에 있는 성(새 예루살렘)을 바라(望)보았다고 히브리 성경은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히 11:16절).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셨지만 특별한 감격은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담도 그 아내를 데리고 왔을 때만 감격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창조되어 아담의 아내가 되었던 하와에게서는 어떤 감격의 고백도 찾아볼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계속적인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던 중 뱀(사탄)이 와서 겨우 선악과도 먹지 못하게 한 인색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자, 하와는 자기를 가장 사랑하고 위하는 존재가 사탄으로 착각하여 당장 자신의 주인을 바꾸고 만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인데, 최초의 에덴에서처럼 감격이 없는 관계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범죄 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가 상하게 될 것과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박살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아담의 원죄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형벌 받고 심판 받고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위해서 그분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로 영원히 살게 하셨다. 이것만 생각하면, 우리 안에는 십자가 사랑의 감격이 물밀듯이 밀려오게 된다. 은혜로 구속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되고, 그분이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사랑을 완전히 깨닫게 될 때의 감격은 마치 천국에 갔던 바울이 사람이 가히 일지 못할 말이었다(고후 12:4)고 했는데, 정말 그럴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겨우 맛본 사랑도 우리를 그분의 사랑에 미치게 하고, 감격하게 하는데, 그분이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랑에 영원토록 복받쳐 오르는 감격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도 없고 소망(所望)도 없는 자들이었다(엡 2:12).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썩지 않을 영생의 소망(朢)을 주셨다. 이것만 생각해도 평생토록 감격하며, 이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바울은 우리가 소망(所望)으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고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 진정한 소망이라고 한다.
필자소개: 송태정 박사/ 박사논문-갑골문자의 신학적 해석 연구, 성경적 갑골한자해석연구소 대표, 순복음해남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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