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십자군, 잘못 낀 첫 단추

민중 십자군은 대부분이 당시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빈민과 빈농의 가난한 집단이다. 이들을 이끌고 길을 나선 것은 선 듯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구나 군사적 조직이 없이 수만의 군중을 이끌고 먼 길을 떠나왔기에 배고픈 군중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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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주도하는 십자군이 출발하기도 전에 벌어진 라인라트에서 유대인 학살사건은 큰 충격의 파장을 일으켰다. 피에르의 추종자들이 일으킨 학살의 이야기는 십자군운동에 참여를 선언한 사람들과, 십자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모두는 감당이 안 되는 충격을 받아야했다. 특히 지도부인 교황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파장의 여파는 에미코의 부대가 휩쓸고 간 라인라트지역에 멜룬(Melun) 자작 (Viscount of Melun)인 윌리엄 (William)이 그 뒤를 이어 다시 한 번 확인 사살하듯이 유대인 지역을 약탈을 행했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Alfonso VI)를 도와 스페인 영토수복 전쟁 (레콩키스타,Reconquista)에 참여할 정도로 민중 십자군 중 몇 안 되는 전투 경험자이다.

보름스의 유대인 공동체와 마인츠의 유대인들은 에미코 부대에 의해 전멸을 당했기에 목수 윌리엄의 부대는 메츠(Metz)와 슈파이어(Speyer) 지역 유대인 공동체를 약탈한 기록들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윌리엄은 멜룬의 자작이 그의 작위이다. 그러나 그는 작위보다도 그의 별명이 언제나 이름과 함께 등장한다. 목수 윌리엄 (William the Carpenter) 진짜 목수가 아니라 윌리엄은 전투에 나서면 적의 등을 마치 목수가 나무를 찍어내는 것처럼 적을 죽임으로서 얻어진 별명이다. 에미코와 목수 윌리엄의 이름은 십자군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이미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권선징악이라고 할까 이들의 마지막은 초라하게 끝이 난다.

먼저 에미코(Emicho of Flonheim)는 라인라트에서 학살로 한몫 잡은 후 몇 명의 부하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에미코는 남은 지지자들과 함께 다뉴브 강을 따라 오늘날 세르비아 지역인 당시 헝가리 영토로 접어든다. 하지만 먼저 출발한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영토인 제문에서 벌인 학살사건에 헝가리의 군대는 긴장 속에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른 에미코의 부대는 이들은 가진 자금과 식량이 떨어지자 다시 약탈을 시도하지만 헝가리 군대의 반격으로 그의 군대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아주 적은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에미코는 귀향했지만 사람들은 십자군 서원 미이행자 또는 살인자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생사조차 불투명한 악당으로 역사에 남겨졌다.

또 다른 악당(villain)인 목수 윌리엄은 헝가리 군대에 그의 부대가 패배한다. 그는 전투 경험자답게 살아남아서 1차 십자군에 흡수되어 안티오크 공성전 중 탈영과 복귀를 반복하며 흘릉한 전사 목수라는 별명 뒤에는, 마음에 맞지 않아서 자주 탈영을 한, 신뢰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상반된 모습을 남겼다.
그리고 1102년 이후 그의 기록은 소멸되었다. 1102년 이후로는 어디에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에서 벌인 약탈사건

앞서 언급했듯이,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은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이 떠난, 참으로 기이한 순례의 무리였다. 귀족과 기사들이 일부 함께했지만, 그 대부분은 농민과 도시의 빈민, 나이든 노인들과 어린아이,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었다. 군대라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는,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이들이 처음 헝가리에 들어섰을 때, 많은 이들이 이곳이 벌써 예루살렘인 줄 알고 묻기도 했다. 그만큼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던 이들이었고, 신에 대한 믿음 하나로 낯선 땅까지 걸어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었고, 체계적인 보급이나 지도력도 없었다. 어느 도시에서도 쉽게 도움을 주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굶주림과 피로 속에서 주변 마을과 도시에서 식량과 물자를 요구했다. 이를 얻지 못했을 땐, 절망은 곧 약탈과 폭력으로 번져갔다. 헝가리에서는 그런 충돌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헝가리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목이었고, 민중 십자군에게는 반드시 지나야 할 관문이었다. 흥미롭게도, 고티에 생자부아(Gautier Sans-Avoir)가 이끌던 선발대 약 1만 명은 헝가리 국경을 질서 있게 넘었고, 국왕의 호위를 받으며 비교적 평온하게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피에르가 이끄는 본대였다. 수만 명에 달하는 민중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서 몰려왔고, 그 뒤를 에미코가 이끄는 또 다른 무리가 따랐다. 헝가리 국왕 칼만은 이들의 통과를 허락하되, 철저한 질서 유지와 무기 소지를 제한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갈 길은 멀고,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약탈은 결국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피에르의 무리는 헝가리 당국과의 심각한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오늘날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인근, 당시 헝가리 국경 도시였던 제문(Zemun)에서 일어났다. 시장에서 신발값을 두고 벌어진 사소한 다툼은 삽시간에 폭동으로 번졌고, 지도자들은 이를 말렸으나 이미 군중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민중 십자군은 성 안으로 몰려들어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살해하고, 창고를 약탈했다. 결국 제문은 함락 당했고, 도시는 침묵 속에 무너졌다.

이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문의 주민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 영토인 베오그라드로 피난하자, 민중 십자군은 그들을 뒤쫓아 또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베오그라드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군사적 요충지이자, 비잔틴 제국의 강력한 통제가 미치는 행정의 중심지였다. 이제 이 무질서한 순례자 무리는 제국의 냉엄한 질서와 마주하게 되었다.

좌로부터/ 민중 십자군을 이끄는 은둔자 피에르, 피에르 동상, 유대인을 학살하는 십자군들

민중 십자군 니시(Nis)에서 비잔틴 군대와 충돌

베오그라드에 이르렀을 때,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은 이미 모든 것을 소진한 상태였다. 먼 길을 걸으며 굶주림과 피로, 갈증과 절망에 짓눌린 이들은 더 이상 “성지로 향하는 신의 군대”라 부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길 위에서 아이들은 울음을 멈췄고, 노인들은 더는 일어설 힘이 없었다. 신을 향한 신앙은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그 믿음은 이제 그들을 따뜻하게 위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 거칠어졌고, 절망은 공동체의 연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베오그라드의 성문 앞에서 이들은 간절히 구했다. 식량을 조금만 나누어 달라고, 지붕 아래서 하룻밤만 쉬게 해 달라고. 하지만 비잔틴 당국은 이들을 “성전의 순례자”가 아닌 “통제 불능의 무리”로 보았다. 제문에서 벌어진 약탈 소식은 이미 이곳에 퍼져 있었고, 베오그라드의 행정관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결국 폭발은 예고된 운명이었다. 일부 굶주린 자들이 시장을 습격했고, 저장고 문을 부쉈다. 이에 분노한 베오그라드 주둔군과 민병대가 무기를 들었다. 성 안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민중 십자군과 도시의 수비대는 서로를 향해 피를 흘렸다. 사방에서 비명과 절규가 울려 퍼졌고, 수많은 시신들이 돌바닥 위에 쓰러져 갔다. 그렇게 베오그라드는 점령당했다. 그들은 승자가 아니었고, 구원자도 아니었다. 오직 생존만을 위해 싸운, 굶주린 자들이었다.

베오그라드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 내부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기독교인 대 기독교인’의 무장 충돌이었고, 민중 십자군의 순수한 이상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더 이상 그들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민중 십자군의 몰락을 알리는, 피로 적신 분기점이었다.

헝가리 왕 칼만은 이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그는 더 이상 민중 십자군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비록 피에르의 본대가 이미 헝가리 땅을 벗어났지만, 왕은 강경하게 움직였다. 헝가리 동부 국경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민중 십자군의 후발대를 전면 거부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은 에미코를 비롯한 라인란트 출신의 후발대에게는 재앙이었다. 이들은 헝가리 국경을 강제로 넘으려 했고, 기다리고 있던 왕실 기병대는 단호하게 그들을 진압했다. 들판은 순례자의 꿈을 안고 떠났던 수천 명의 시신으로 뒤덮였고, 그중 살아남은 자는 극히 소수였다. 살아남은 에미코 자신도 더 이상 기록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비잔틴 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이들을 환대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보급과 경로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민중 십자군을 사실상 ‘제국의 내부 질서를 위협하는 불청객’으로 간주했다. 베오그라드에서 벌어진 충돌은, 제국이 행동에 나설 명분이 되었다. 보급은 끊겼고, 제국은 이들을 남쪽의 니시(Nis)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피에르 역시 점점 분열되어가는 무리를 통제하기 위해 니시로 이동한다. 니시는 비잔틴 제국의 남부 국경 요충지였고, 이곳엔 제국 장군 니케포루스 브리엔니우스(Νικηφόρος Βρυέννιος)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피에르에게 말했다. “너희가 이 도시를 조용히 통과한다면, 물과 식량 정도는 제공할 수 있다.” 피에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충돌을 원하지 않았고, 지금 그의 바람은 단 하나 이 무리를 어떻게든 콘스탄티노플까지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민중 십자군 내부의 균열은 이미 너무 깊었다. 독일계 무리 중 일부가 니시 주민들과 다툼을 벌였고, 그 사소한 충돌이 도시 방화로 이어졌다. 불길은 곧 군사 충돌로 확산되었고, 니시 주둔군은 반격에 나섰다. 피에르의 호소는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전투는 격화되었고, 민중 십자군은 병력의 사분의 일을 잃었다. 만여 명이 니시에서 쓰러졌고, 고티에 생자부아 역시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 이상 이 무리는 군대도 아니었고, 신앙 공동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해체 직전의 난민 떼에 불과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피에르와 잔존 병력은 오늘날 불가리아의 소피아 인근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은 이들을 마지막으로 받아들여 콘스탄티노플로 호송한다. 8월 1일, 그들은 성벽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처음 출발했던 8만 내지 10만의 인원 중, 이곳에 도달한 자는 불과 3만도 채 되지 않았다. 수많은 이름과 얼굴이, 수많은 기도와 맹세가, 그 길 위에 흩어져 사라진 것이었다.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상은 이미 무너졌고, 신의 도시는 더 이상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스러운 순례자이자,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이름은 기억되지만, 그것은 신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꿈의 붕괴를 증명하는 서글픈 기록으로 남는다.

민중 십자군, 콘스탄티노플의 불청객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기가 막혔다. 보통의 상상을 뛰어넘은 군중을 모습을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몰골과 그들이 가진 무기, 그리고 그들이 행한 악한 약탈과 방화, 살인 등을 생각할 때 황제는 이것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자신이 원한 것은 좋은 무기를 가진 훈련된 군대였지, 머리 아픈 도시의 불량패 집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황제가 원한 것은 보스포루스 해협건너에 수도를 세운 룸 술탄국(Rum Sulta nlığı)왕조로부터 방어해 줄 군대였지, 언제 어느 상황에서 어떤 일을 일어 킬지 모르는 무리들은 아니었다.

이들이 성안에 머물 때 생길지도 모를 치안 문제는 다시 생각만 해도 그의 머리가 아파왔다. 교황이 약속한 8월 15일 출발해서 도착해야만 해결될 식량문제역시 황제를 힘들게 했다. 아직은 곡식이 익어가는 시간이다. 결실은 10월에나 추수를 할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이 자칭 십자군이라는 불량스런 무리를 성안에 둘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3만 명의 무리를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너서 그들이 원한 이교도들인 투르크인들의 땅에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지 5일 만에 이들은 이슬람 영토에 내려졌다.

정말 잘 훈련된, 그리고 전투에 최적화된 룸 셀주크 군대와의 전투는 안 봐도 뻔한 결과였다. 이를 너무도 잘 알면서도 황제는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들을 안내할 길잡이도 없이, 소아시아 니케아 부근의 해안에 이들을 내려놓았다.

어떤 이들은 이 상황을 황제가 고의로 이들을 사지로 보냈기보다는 이들이 고집을 부려서 전장에 간 것 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기록에는 황제가 피에르에게 1차 십자군이 도착할 때 까지 싸우지 말고 전투를 피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던지 이들은 죽음의 전장에 내려졌다.

좌측 위/ 피에르, 좌측 아래/ 콘스탄티노플의 피에르, 피에르의 말 탄 모습

사분오열의 민중 십자군

은둔자 피에르는 자신의 부대보다도 한 달 전에 이곳에 도착한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자칭 십자군 부대를 만났다. 이들은 작은 농촌마을들을 점령하면서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의 라 코메디아 라고 불리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그의 부대는 사분오열이 되는 분란이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출발한 그룹과 이탈리아사람들, 프랑스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분쟁과 잦은 싸움이 일어났다. 어느 누구도 피에르의 말을 듣는 그룹은 없었다. 이제 피에르의 말은 령이 서지 않았다. 피에르를 무시한 그들은 서로의 지도자를 세우면서 민중 십자군은 분리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와 독일 그룹을 무시하고 프랑스인 고프리 브루엘(Geoffrey Burel)을 그들의 지휘관으로 세웠다.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 레이날도(Rainald)를 그들의 지도자 새웠다.

피에르는 십자군 본영이 올 때까지 싸우지 말고 서로 기다리자고 사정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피에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서로가 니케아를 점령해서, 공을 먼저 세우기로 약속이나 한 듯이 이슬람 진영을 향해 진격해 나갔다. 먼저 고프리 브루엘의 프랑스인들은 룸 셀주크의 수도인 니케아 부근까지 근접하였다.

이곳에서 터키인 마을들과 그리스인 거주지를 약탈했다. 레이날도의 독일인 무리들은 니케아 동쪽으로 행군하여 니케아 동부지역인 제리골돈(Xerigordon) 지역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룸 셀주크의 클르츠 아르슬란 1세(Clutz Arslan I)의 군대는 제리골돈을 포위하였다. 민중 십자군들은 포위를 벗어나지 못하자, 심한 갈증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포위한지 8일 만에 제리골돈은 튀르크의 수중에 탈환되었다.

이슬람으로 개종된 포로들은 살아남아 오늘의 이란지역인 호라산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개종을 거부한 포로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그리고 제리골돈의 전멸을 모르는 프랑스인 지역에 침투한 튀르크인들은 독일 십자군들이 니케아까지 함락시켰다는 사보타주를 행하자 수도 니케아를 약탈할 생각에 들뜬 십자군들이었다. 그러나 제리골돈이 튀르크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이들에게 다시 전해지자 이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민중 십자군의 종말과 마지막 시베토트 전투(Battle of Civetot)

피에르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움을 구하려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민중 십자군들은 피에르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전투를 하자고 주장했지만, 다수가 지금 당장 전투를 주장하는 군중의 심리에 2만 여명의 민중 십자군은 니케아로 행군했다.

이들이 머물렀던 주둔지에는 병든 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여자들뿐이었다. 니케아 5킬로미터 전방의 숲속에서 민중 십자군은 숨어있던 튀르크의 복병들에게 당하고 만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곳을 벗어났다. 주둔지에서 남은 사람들 역시 도망가거나 죽거나 사라지고 말았다.

은둔자 피에르를 비롯하여 살아남은 민중 십자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1차 십자군에 흡수되어 죽거나 살아남은 얼마는 결국 예루살렘의 수복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은둔자 선동가 피에르의 열광적인 연설에 감동을 받은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빈민들과 농사지을 땅도 없었던 대부분의 빈농들이 듣도 보도 못한 예루살렘을 향해서, 십자군이라는 그들의 종교적 열정에 서로의 몸을 의지하여 수많은 지역을, 거쳐 왔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은 성지 예루살렘을 보지도 못하고 그들은 죽어갔다.

정말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믿음으로 길을 떠나왔지만 굶주림에 강도가 되었고, 많은 무리의 군중 심리에 도취되어 학살자가 되기도 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가 그들의 무기라고 믿었다. 함께 부르짖는 기도가 그들의 무기라고 믿었던 민중 십자군은 이름 모를 낮선 땅에서 대부분 죽어야 했다. 마지막 주둔지에서 살아남은 어린것들이, 병든 노인들이, 젊은 여인들이, 노예로 팔리거나 죽어갔다.

민중 십자군의 마지막 전투인 1096년 시베토트 전투(Battle of Civetot)는 민중 십자군의 종말을 고한 대참사였다. 최소의 군사적 훈련도 받지 못한 군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무질서한 종교 열정이 군사적 준비 없이 전쟁에 투입될 경우 어떤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이 일련의 전투들은 민중 십자군이 종교적 열정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이어질 십자군들은 이 귀한 교훈을 너무도 가볍게 여겨 다시금 큰 재앙을 초래한다.)

그러나 은둔자 피에르 자신은 살아남아서 1차 십자군과 함께 예루살렘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의 역할은 전투적인 인물이 아니라 그의 특기인 설교를 통해서 종교적으로 병사들에게 힘을 주는 오늘날 종군 신부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그의 마지막이 아니다. 예루살렘 수복 후 그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희박하지만 몇 가지 전승은 오늘까지 이어져 온다. 수도원 은거 설은 예루살렘 함락 후, 유럽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벨기에 혹은 프랑스에서 수도원에 은둔했다는 전승이다. 또 다른 전승은 프랑스 루아르 계곡 지역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연도는 모르고 다만 1115년경으로 추정할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후기 문헌에서 피에르를 신의 예언자 또는 종교적 열정의 상징으로 미화한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적 평가는 그는 신앙과, 종교적 열정과 대중 선동적인 연설은 탁월했으나, 군사적 역량과 전술 조직력은 전무했으며, 군사 지도자로는 부적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은둔자 피에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그는 민중 십자군의 비극적 선동자였지만, 자신은 살아남아 예루살렘까지 도달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실패한 전쟁 지도자였으나 성공한 종교 선동가였다, 라고 말이다. 은둔자 피에르가 이끈 군중 십자군에 대한 평가는 그가 전쟁에 참여한 시기와 오늘의 평가는 몇 가지 면에서 나누어진다.

대부분이 당시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빈민과 빈농의 가난한 집단을 이끌고 길을 나선 것은 선 듯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구나 군사적 조직이 없이 수만의 군중을 이끌고 먼 길을 떠나왔기에 배고픈 군중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을 저질렀다. 그가 직접 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신성로마 제국의 라인라트(라인 강변)지역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 사건 등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 부정적인 요소이다. 이는 민중 십자군이 초래한 최초의 반유대주의적 폭력으로, 중세 내내 이어질 박해의 서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변명이라도 해주고픈 생각에서는 당시 가난하고 할 일 없는 기층 빈민들을 인솔하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예루살렘을 향한 신앙적인 요소는 그것이 집단적인 열풍이던, 종교적 소망이던 한번은 생각해야 할 작은 긍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둔자 피에르에 대한 평가도, 그에 대한 시각도 종교적인 사기꾼, 종교적인 선동자, 또는 빈민의 지도자라는 여러 평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라인라트에서 유대인 학살을 생각하면… 첫 단추가 잘못되면 계속해서 잘못되는 것이… .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표지 사진/ 민중 십자군을 이끄는 은둔자 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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