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저널] 제4차 십자군과 인류 최대의 문명 파괴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26) »
필자는 시오노 나나미(Shiono Nanami)의 《십자군 이야기》를 읽기 전에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를 먼저 읽었다. 이 책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해 일방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긍정적인 시각을 보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해상 무역의 실리와 합리성을 앞세운 베네치아를 그녀는 일관되게 ‘역사의 승리자’로 묘사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제4차 십자군을 “신앙의 붕괴가 아니라, 이탈리아 상업 문명의 승리”라고 평가한다. 그녀는 이를 단순히 타락한 십자군의 일탈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강조하는 핵심은 제4차 십자군이 중세 봉건 기사도의 몰락이 아니라, 지중해 상업 문명이 정치·군사 권력을 직접 장악한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이 사건의 주인공은 교황도, 프랑스 기사단도, 망명 황태자 알렉시우스도 아닌, 베네치아라는 ‘상업 국가’ 그 자체였다.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에 대한 시오노 특유의 평가는 이러한 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단돌로를 악마적 인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규정한다.
“그는 신앙을 배반한 노인이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선 ‘계산하는 정치가’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본 단돌로의 핵심 특징은 그가 눈먼 노인이라는 사실이 상징적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집요한 의지’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녀는 신앙이 아니라 국가 재정과 상업 구조 전체를 동원한 ‘국가 프로젝트’가 자라 공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침공으로 이어졌다고 해석한다. 그것은 약속된 채권의 회수이자, 베네치아 해상 제국 완성을 향한 첫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는 단돌로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는 십자가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십자군이라는 거대한 종교 에너지를 국가 이익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알아버린 최초의 정치가였다.”
그는 확실히 냉철하고도 현실주의적인 평가라 할 수 있다. 신앙이라는 껍질을 벗겨내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경제와 권력의 논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냉정한 현실 정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사건의 본질적 잔혹함과 역사적 죄악성까지 희석시킬 수는 없다. 엄연한 현실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십자군의 힘을 이용해 같은 기독교 국가였던 동로마제국, 즉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이 행위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성스럽게 포장될 수 없다. 베네치아 해상 상인들의 탐욕과 프랑스 기사들의 욕망이 결합하여, 기독교 역사상은 물론 인류 역사 전체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파괴와 학살을 초래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의 약탈은 단순한 도시 점령이 아니라, 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온 로마 제국과 로마 문명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린 사건이었다. 거룩한 신의 이름을 내건 십자군이 신의 도시를 약탈한 이 비극은, 중세 기독교 세계가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자기부정이었다. 이로 인해 동서 교회의 균열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 상처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4차 십자군이 시작될 즈음, 예루살렘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현실은 더없이 절망적이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레반트 해안을 누비며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를 압박하고, 성지의 패권을 놓고 이슬람과 당당히 맞서던 예루살렘 왕국은 이미 영광의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쪼그라든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는 이제 아크레(Acre)를 비롯한 몇몇 해안 도시만 남아 있었다.
그 도시들은 거대한 이슬람 세력권 속에 섬처럼 떠 있는 작은 잔존지에 불과했다.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기적처럼 보일 정도로 왕국의 상황은 고립되고 취약했다. 이웃한 트리폴리 백국과 안티오키아 공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엔 십자군 국가들 사이에 위계와 연합의 틀이 있었지만, 이들 국가들 역시 사실상 각자 살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군대가 주둔한 주변만 가까스로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방어선은 좁아졌고, 내일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 시대에는 적극적으로 서방 세력을 견제하며 십자군에게 군사·재정적 지원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그와 같은 도움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로마제국의 내부문제로 인한 정치적 불안과 외부의 공격이 겹쳐져 동로마제국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이 의지하며 잡으려고 했던 동아줄이 썩은 밧줄이 되었다.
이제 예루살렘 왕국은 더 이상 존재 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제3차 십자군이라는 거대한 원정을 통해 아크레를 되찾는 데 성공했었다. 그때 잠시나마 희망이 생기는 듯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리처드 1세가 복귀한 직후 오스트리아에서 포로가 되는 사건은 십자군 국가들의 정신적 중심을 잃게 만들었고, 그 이후 왕국의 미래는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결국 예루살렘 왕국은 또다시 유럽에 손을 내밀어 지원과 구원을 요청해야만 했다. 이 절박함이 결국 4차 십자군이라는 새로운 원정의 불씨를 붙이는 결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4차 십자군 원정이 어떤 비극을 낳았는지는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원정은 출발부터가 예루살렘을 향한 성지 수복이 아니라, 신앙이냐, 국가 이익이 우선이냐 라는 질문 앞에 놓여있었다.
교황, 4차 십자군을 기획한 권력의 자리
1198년,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는 서른일곱이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교황 직에 올랐다. 로마교회사에서 중세의 교황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가진 교황으로 인정받지만, 그는 교황이 될 즈음 교회에서 그의 직위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위기라면 위기인 시대에 교황에 올랐다. 그리고 그 시대는 위기를 기위로 만들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교황권은 무력감에 빠져있었다.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3세(Celestine III)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Henry VI)의 권력아래에 놓여있었다. 황제의 군사적인 영향력 앞에 교황으로서 신성로마 제국 황제에게 굴종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교황의 모습은 ’교황은 더 이상 기독교 세계를 호령하는 권력이 아님을 알게 만들었다. 이제 교황권력은 유럽 기독교의 정치를 조율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에 즉위 한 것이다.

왼쪽 상단/ 베네치아, 오른쪽/ 교황 인노첸시오 3세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인노첸시오 3세가 즉위하자 그에게 중요한 기회가 그에게 다가왔다. 하인리히 6세가 급사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의 공백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신성로마 제국은 불안정한 정치권력 속에서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아직 나이가 어리기에, 실질적인 통치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교황 권력을 짓누르던 신성로마제국이 무주공산 상태는 신임 교황에게 덧없는 기회와 힘을 제공한 것이었다.
자연스레 인노첸시오 3세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이자 보호자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교황의 권력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권력을 견제할 뿐만 아니라, 교황의 권력을 다시 신성로마제국과 유럽에서 교황의 권력을 모든 정치의 한 가운데로 끌어 모으는 권력의 복귀를 선언하는 선포였다.
또 다른 변수는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이자 슈바벤 공작이던 필리프(Philip of Swabia)역시 신성로마제국 황위 계승 과정에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필리프는 이탈리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을 회복하기를 원했지만, 교황의 승인이 없는 상황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상황은 신임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는 제국의 황제 선정에 핵심을 가진 권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에서는 교황의 권력이 단 시일에 자리를 잡았다.
권력의 균형이 교황에게로 기울었던 시점에 중동에서 전해진 소식은 교황에게 새로운 의미와 도전을 주었다. 기울어져가는 성지 예루살렘 왕국을 회복시킴으로 교황의 권력을 확고히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회였다. 십자군 파병은 약화되었던 교황의 권력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 십자군을 통해서 기독교 세계를 진두지휘 할 수 있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십자군이 교황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조직되어서 움직인 사실은, 교황권의 회복을 가장 강력한 외적인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군파병은 유럽 군주들의 정치권력을 외부로 분산시키는 역할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인노첸시오 3세를 위협하던 위험 요소 중 하나는 신성로마제국 내부의 황제 계승 문제와 제후들 사이의 권력 투쟁이 언제든지 교황 권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이 조직되어 파병한다면, 유럽 군주들과 영주들의 권력의 힘이 성지회복이라는 외부 세계로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서유럽 내부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동시에, 교황이 국제 정치의 조정자로 군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교황이 만든 십자군, 교황이 통제하지 못한 전쟁
성지 예루살렘의 회복은 이전의 교황들이 완수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였다. 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이것은 교황권의 한계를 표출한 상징적인 실패의 교훈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인노첸시오 3세가 이 과제를 완수한다면, 그는 강력한 교황이 아니라 성지를 수복한 교황, 중세 교황권력을 절정의 위치에 올려놓은 교황으로 기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성지 회복은 단순한 신앙적 열망이나 종교적 의무의 차원을 넘어, 교황권 강화, 제국 권력 견제, 국제 질서 재편, 그리고 기독교 세계 지도력 회복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정치적·신학적 기획이었다. 4차 십자군파병을 통해 분열된 기독교 세계를 자신의 권위 아래 다시 묶고, 교황의 권력이 모든 제국과 왕권 위에 서 있다는 중세적 질서를 재확립을 꿈꾸었다. 하지만 교황의 이 원대한 꿈은 곧 베네치아공화국의 상업적인 이해관계와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혼란, 그리고 제 2차 3차 십자군과 달리, 내부의 구조적 병폐와 맞물리며 다르게 흘러갔다.
제 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이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하게 되었고, 교황이 의도했던 교황 중심의 성지 회복 전쟁은 점차 경제적인 관계를 앞세운 해상무역세력과 채무 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군사용병 집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제4차 십자군은 인노첸시오 3세의 정치적 야망과 가장 극적으로 어긋난 십자군이었다. 그는 성전을 통해 유럽을 통합하고 교황 권력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고자 했지만, 실제로 십자군 파병은 이해관계가 분면한 상인과 귀족, 망명 황태자의 이해가 얽힌 통제 불가능한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제 4차 십자군을 통해 유럽을 하나로 묶고자 했으나, 그 십자군은 오히려 기독교 세계를 내부에서 찢어놓은 전쟁이 되었다. 교황이 시작한 십자군은 결국 교황조차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 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4차 십자군 전쟁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기독교 문명의 심장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이렇게 인노첸시오 3세의 권위가 가장 높이 치솟아 있던 시대에, 동시에 그 권위가 가장 깊은 상처를 입은 사건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4차 십자군을 파병할 수 없었던 유럽, 영국의 현실
제4차 십자군이 준비되고, 베네치아의 항구에 군대가 집결하던 13세기 초, 잉글랜드와 프랑스 역시 외형적으로는 왕국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부 상황은 균열과 불안 속에 놓여 있었다. 4차 십자군의 이름으로 모인 기사들의 상당수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왔지만, 그들이 떠나온 고국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두 나라의 정치적 혼란과 왕권의 위기는, 4차 십자군 파병이 신앙에 근거한 전쟁이 아닌, 현실 도피와 권력 투쟁의 연장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배경이었다.

왼쪽/ 영국의 존 왕
먼저 영국의 상황은 리처드1세(Richard I)의 유산과 존(John)왕의 몰락이었다. 영국은 제3차 십자군의 영웅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1199년 갑작스럽게 전사한 이후, 급격한 불안정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왕위에 오른 사람은 리차드 1세의 동생 존이었다. 훗날 존 라클랜드(John Lackland,영지 없는 무능왕)으로 불리게 되는 이 군주는, 형과 달리 군사적 재능도, 정치적 카리스마도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
존이 왕위 즉위와 동시에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대립하게 된다. 영국왕은 단순히 섬나라의 군주가 아니라, 프랑스 대륙에 광대한 영지를 가진 대지주이기도 했다.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에 이르는 넓은 영토는 단숨에 프랑스 왕권의 최대 위협이자, 동시에 영국 왕권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었다.
1122년 제4차 십자군이 출발하던 해, 존 왕은 필리프 2세와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노르망디 지역은 프랑스 왕의 손으로 넘어갔고, 영국 왕은 대륙의 핵심적인 영토를 잃어버렸다. 이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손실이 아니라, 영국 왕권의 체면과 재정, 귀족들과의 신뢰 관계까지 함께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존 왕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고, 이는 귀족과 시민들의 격렬한 반발로 이어졌다.
영국 사회는 성지회복의 전쟁보다도 더 절박한 현실의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봉건 귀족들이 4차 십자군을 위해 군대를 내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존은 내부 반란과 국경 방어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 결과 제4차 십자군에는 영국 왕가의 차원에서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4차 십자군의 영국 출신 십자군들은 있었지만, 영국은 4차 십자군을 감당할 힘이 없었다.
팽창하는 왕권과 기사들의 출정
프랑스의 상황은 영국과 정반대였다. 같은 시기 프랑스 왕위에 있던 필리프 2세 아우구스투스(Philippe II Auguste)는 중세 프랑스 왕권을 사실상 근대적 국가 권력으로 끌어올린 인물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왕들의 대륙 영토를 하나씩 잠식하며 왕실 직할령(直轄領)을 확대했고, 봉건 귀족들을 점차 왕권 아래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필리프 2세는 제3차 십자군에 직접 참가했던 군주였고, 십자군의 정치적 가치와 위험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제4차 십자군에 대해 노골적으로 냉담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4차 십자군에 대규모로 참여할 경우, 국내 귀족들이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프랑스의 왕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필리프 2세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프랑스의 핵심 전력을 중동의 레반트로 보내는 것은 극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국왕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기사들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4차 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들의 많은 수는 프랑스 북부, 특히 샹파뉴와 플랑드르 지방의 봉건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왕실의 직접적인 통제를 비교적 덜 받던 외부지역의 영주들이었으며, 4차 십자군 원정은 그들에게 신앙이자, 명예였고, 동시에 새로운 영토와 전리품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프랑스왕은 국가 차원의 4차 십자군을 원하지 않았지만, 지방 귀족들의 자발적 성전까지 막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제4차 십자군은 왕이 아닌 귀족 주도의 군대라는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이 훗날 4차 십자군 원정의 향방이 되었다. 그리고 베네치아와 같은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하는 해상무역세력에게 주도권을 내주게 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적대하며 싸우고 있었지만, 제4차 십자군 시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왕국 모두 성전을 떠받칠 만큼 안정된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국은 패전과 재정 위기로 인한 귀족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왕권 강화와 대륙 패권을 놓고 대내외 전쟁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4차 십자군은 이전의 십자군처럼 왕이 인솔하는 국가적 원정이 되지 못했다. 대신 귀족들과 군사용병이, 이해타산적인 상인들과 베네치아라는 거대한 해상무역의 권력이 결합한 불안정한 공통체가 되었다. 바로 이 불완전한 성격이 4차 십자군을 신앙의 궤도에서 이탈시켜, 결국 동로마제국의 파국을 부른 구조적 원인이었다.
영국은 내전에 가까운 혼란 속에서 4차 십자군을 바라보았고, 프랑스는 팽창하는 왕권을 위해 4차 십자군을 거리 두기하였던 것이다. 두 왕국은 모두 제4차 십자군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았고, 그 공백 속에서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와 소수 귀족들의 손에 의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표류하게 된다.
분열된 제국, 신성로마제국의 내전
제4차 십자군이 베네치아에서 준비되었고, 자라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궤도를 이탈하고 있던 그 시기, 신성로마제국의 중심부에서는 치명적인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슬람과의 전쟁도, 외국과의 국경 분쟁도 아닌, 황제의 왕관을 둘러싼 제국 내부의 내전이었다. 이 내전은 제4차 십자군이 국가가 파송한 십자군이 아닌, 자발적으로 모인 귀족과 군인들의 십자군으로 변경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197년, 신성로마제국의 강력한 황제 하인리히 6세(Henry VI)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제국은 한순간에 지도자를 잃었다. 하인리히 6세는 호엔슈타우펜 왕가(Hohenstaufen)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었고, 독일과 이탈리아, 시칠리아까지 광대한 세력권을 신성로마제국 아래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쌓아 올린 권력의 탑은 갑자기 균열을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후계자문제였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는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제국의 왕관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은 두 개의 진영으로 급하게 갈라졌다. 한편에는 하인리히 6세의 혈통을 계승한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이들과 숙명적으로 대립해 온 벨프(Welf) 가문이 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영을 선택했다. 제국의 황제의 자리는 더 이상 신의 뜻이 아니라 귀족들의 표로 결정되는 정치적 전리품이 되어버렸다.
신성로마제국에서 1197년부터 1208년까지 이어진 제국 내부의 권력 투쟁은 투쟁이 아니라 사실은 내전이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에서는 슈바벤의 필리프를 황제로 추대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렸다. 그리고 벨프 가문에서는 영국 존왕의 조카인 오토 4세를 황제로 추대하여 오토4세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동시에 두 명의 황제를 갖게 되는 표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제후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충성심을 바꾸었다. 그리고 도시는 내전으로 약탈되었다. 교회는 서로 분열되어갔다. 이제 신성로마제국은 하나의 제국이 아니라, 서로의 이해관계로 쪼개진 공간이 되었다.
야심만만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 상황을 그냥 구경만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내전을 제국을 교황권력의 아래로 끌어들이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먼저 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벨프 가문의 오토 4세를 적극 지지했다. 오토 4세를 합법적 황제로 승인한 것이다. 교황의 승인 여부는 곧 국제 정치와 사회에서 합법 그 자체였기에, 오토 4세는 교황의 축복 속에 제국 전역에 그의 영향력을 펼쳐갔다.
이 같은 승인 역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한 정치적인 계산속에 이루어 진 것이었다. 교황은 강력한 황제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분열된 제국, 교황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약한 황제를 원했다. 4차 십자군은 이 같은 구도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를 둘러싼 내전이 계속되는 동안, 신성로마제국은 4차 십자군에 국력을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와 군대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병력을 레반트지역으로 보낸 사이 경쟁하는 상대진영이 빈 공간을 파고들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즉 황제의 십자군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나누어진 신성로마제국에는 하나의 명령도, 하나의 군대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로마 제국의 분열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황제파 (기벨린파, Ghibellini)와 교황파(겔프파, Guelfi)로 나누어져 끊임없이 충돌했다. 밀라노와 베로나 그리고 파도바 같은 도시들은 황제와 교황 중 누구의 깃발을 세울 지를 두고 거리마다 시위가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혼란은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한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장악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었다.
결국 제4차 십자군이 출발하던 무렵의 신성로마제국은, 더 이상 신성한 제국도, 로마의 계승’도 아닌, 제후들의 이해와 교황의 정치가 뒤엉킨 거대한 분쟁 지대에 불과했다. 황제는 있었으되 권력은 없었다. 왕관은 있었으나, 통일된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공백 속에서 4차 십자군은 황제의 통제를 벗어나 귀족과 상인의 손에 맡겨졌고, 결국 베네치아와 실제적인 주권자 단돌로, 그리고 망명 황태자 알렉시우스의 계산 속으로 스며들게 된다.
예루살렘 수복이라는 이름의 정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제4차 십자군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이야기한대로 당시의 유럽은 기독교 세계권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었지만, 그 내부는 이미 깊이 찢겨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 중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은 내전에 빠져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파와 황제파로 갈라져 끊임없이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 같은 분열을 예루살렘 성지 회복이라는 초월적 목표로 꿰어 하나의 질서로 봉합하려고 했다.
그의 생각은 십자군에 참여하는 순간, 왕도 귀족도 모두 ‘그리스도의 병사’가 된다. 적어도 이론 속에서는,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향해 칼을 들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인노첸시오 3세는 바로 이 상징적 질서를 정치의 언어로 끌어왔다. 그는 유럽 내부의 전쟁을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잠시 봉인하고, 교황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상했다. 십자군은 그에게 순수한 신앙 행위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외교 장치였다.
십자군에 참여한 군대의 신앙은 곧 법이 되었고, 법은 경제를 움직였으며, 경제는 다시 전쟁을 떠받치는 구조로 편입되었다. 4차 십자군은 더 이상 단순한 종교적 열정이 아니었다, 믿음과 질서가 하나로 결합된 거대한 정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동력의 중심에 반드시 강력한 교황권이 존재해야 했다.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인노첸시오 3세는 약화된 교황권을 회복하고, 왕과 황제들의 권력을 견제하며, 기독교 세계의 지도력을 다시 교황에게 집중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도구는 그의 손을 떠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이해관계에 얽히고 설킨 상업적인 논리와 동로마 제국의 내부 붕괴, 그리고 십자군 자체가 지닌 구조적 한계가 서로 맞물리면서, 십자군은 점점 교황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왼쪽/ 알렉시오스 4세, 오른쪽/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따라서 제4차 십자군은 우연한 일탈이나 단순한 역사적 사고로 이해되기 어렵다. 이 충돌은 중세의 교황 중심 세계 질서가 조용하지만 되돌릴 수 없이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특히 인노첸시오 3세의 정치가 가장 뚜렷한 한계에 부딪힌 곳이 바로 베네치아였다. 교황에게 베네치아는 언제나 불편한 존재였다. 형식 상 기독교 국가였지만, 실제로는 신앙보다 무역을 통한 이익이 우선인 도시였고, 교황의 권위보다 항로와 자신들의 손익을 더 중시하는 상업 공화국이었다. 교황은 자라 공격을 명백히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교황이 가진 가장 강력한 정치적 무기였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총독 단돌로는 그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파문보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선택했다. 그 순간, 교황의 권력은 땅 위에서는 절대적이었을지 모르나, 바다 위에서는 더 이상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사이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복음서 속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세속의 권력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라는 이 단순하고도 날카로운 선언은, 믿음과 정치의 경계를 오늘까지도 끈질기게 묻는다. 그러나 중세의 역사는 이 말씀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시대에 복음은 삶을 뒤흔드는 진리라기보다, 전쟁과 권력을 장식하는 언어가 되었다.
복음은 낮아짐과 나눔, 자기 부인과 희생을 말했지만, 중세는 지배와 정복, 축적과 팽창을 향해 멈추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시대의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보다 권력과 금을 더 귀하게 여긴 인간의 선택이었다. 십자군의 깃발 아래 울려 퍼지던 “하나님의 뜻(La volonté de Dieu)”은 신앙의 고백이라기보다 권력의 구호에 가까웠다. 신앙은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복음은 정복의 명분이 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성지를 향한다던 군대는 상업과 패권의 이해관계 속에서 같은 기독교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다. 성당은 파괴되고, 신자들은 학살되었다. 중세의 비극은 신앙이 사라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이 정치와 이해관계의 옷으로 치장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중세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치의 언어를 신앙의 언어로 쉽게 바꾸며, 편리한 쪽에 서서 복음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그리스도는 가이사를 섬기라고 말하지 않았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라고 말했다.
그 구분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언제나 손해 보는 자리, 중심이 아닌 변두리, 십자가가 서 있는 자리로 우리를 부른다. 베네치아공화국처럼 이해관계를 속으로 계산하면서, 우리는 4차 십자군의 만행을 정죄할 수 있을까?
표지사진: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대결을 묘사한 상상화, 13세기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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