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십자군 시대와 3차 십자군 사이의, 서유럽, 동로마, 이슬람 그리고 예루살렘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은 항복했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도시는 피로 물들었고, 주민은 무차별 학살되었다. 그러나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되찾았을 때 그는 자비를 명령했고, 속죄금만 지불한다면 누구든 떠날 수 있었다.

[미션저널] 2차 십자군 시대와 3차 십자군 사이의, 서유럽, 동로마, 이슬람 그리고 예루살렘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24) »

1175년에서 1185년 사이의 10년은 중세 세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의 시기였다.

서유럽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왕이 즉위하며 정치적 역동성이 커졌고, 동로마 제국은 황제의 사망으로 권력의 공백에 빠졌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는 살라딘이 세력 통합과 외교적 안정에 나섰으며, 예루살렘 왕국은 내부 분열과 외부 위협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 시기 네 지역의 움직임은 제3차 십자군의 서막이 될 긴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폭발직전의 진공의 상태를 만들었다.

이 상태를 깨뜨리는 것은 예루살렘 왕국과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의 충돌이 잦아들며 두 왕국의 긴장은 더욱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시기에 당시 교황 알렉산더 3세는 로마교회 개혁과 이단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제3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예루살렘의 나병환자왕인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왕국을 대표로 대주교 기욤 드 티레를 로마에 파견하였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Concilium Lateranense III)

1179년 3월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주재한 이 공의회에서는 남프랑스에서 확산 중이던 카타리파가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카타리파라는 명칭은 그리스어 ‘순수한 자들이라는’(Καθαροί)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름은 교황과 로마교회가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 마치 종교개혁당시 개혁자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하는 사람들’ 교황의 권위에 저항을 뜻하는 사람들로 불렀던 것처럼, 자신들은 단순히 참된 기독교인 또는 좋은 사람들(boni homines)이라 불렀다.

카타리파는 전통적 가톨릭교회가 부패하고 세속화되었다고 비판했으며, 순수한 신앙·무소유·금욕을 지향했다. 이 부분은 단순한 교황이 말하는 이단이 아니라 대안적 교회 조직으로 기능했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이러한 운동은 유럽 중세 교회 권력 구조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금욕과 청빈의 반 성직주의운동이었다. 의식보다 개인의 영성 강조하는, 이들은 이후에 왈도파, 프란체스코 운동 초기, 개신교 종교개혁 전통에 직 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로마교황청은 카타리파 진압 과정에서 종교재판 체계(Inquisition)를 강화하고 이단 심문 절차를 법제화했다. 즉, 카타리파는 십자군의 전선이 예루살렘에서 서유럽 내부로 이동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서유럽 이야기, 프랑스 루이 7세의 죽음과 필리프 2세의 즉위

2차 십자군 이후 유럽 정치의 변화는 2차 십자군이 단순한 군사 원정의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그 여파는 레반드의 정치적 재편뿐 아니라, 유럽 내부의 권력 관계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1180년 9월 18일,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Louis VII)가 사망하였다. 그는 제2차 십자군을 이끈 군주로, 중세 프랑스 왕권을 회화시킨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필리프 2세(오귀스트)는 즉위 당시 겨우 스무 살 남짓의 젊은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영국의 리처드 1세(사자심왕)와 경쟁하면서도,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고 프랑스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등, 유럽 정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할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서유럽은 세대교체를 맞이하며 새로운 정치적 활력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다름 아닌 루이 7세와 그의 전부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의 가정사이다. 앞서도 짧게 이야기했듯이, 이 두 사람은 2차 십자군 운동의 주역이었고 함께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2차 십자군 참전과 귀국한 뒤 두 사람은 이혼을 한다. 엘레오노르는 이혼 후 2개월 만에 노르망디 앙제(Angers)의 앙주백작가문인(Angevin House) 플랜태저넷 가문(House of Plantagenet)의 앙주 백작, 헨리 플랜태저넷(Henry Plantagenet)과 결혼한다. 그리고 2년 후 에 헨리는 영국 왕 헨리2세로 즉위 한다. 헨리가 엘레오노르와 결혼은 헨리의 노르망디와 엘레오노르의 아키텐지역을 통합한 앙주 제국 (Angevin Empire)이 성립되었다.

이 사건은 유럽 세력의 균형을 뒤집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자기 봉신인(헨리 2세)보다 군사력과 영토가 더 작아졌다. 나아가 프랑스 왕이 프랑스 땅에서 잉글랜드 왕과 맞서 싸우는 모순적인 구조가 발생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의 원인이 된다. 앙주는 단순한 지역이 아니라, 유럽 국제질서를 뒤바꾼 플랜태저넷 왕조의 출발점이었고, 영국과 프랑스 대립의 기원이 되었다.

결국, 2차 십자군의 실패는 군사적 좌절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정치 지도와 왕가 간의 관계를 재편한 전환점이었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 파탄은 그 상징적인 결과로, 십자군의 이상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왕권 경쟁과 국가 간 긴장이 자리 잡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엘레오노르는 재혼하자마자 헨리2세와 사이에서는 리처드 1세 (사자심왕)과 존 (John Lackland)영국 왕을 포함하여 8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리고 엘레오노르는 루이7세 사이에서도 샹파뉴 백작 부인이 된 마리 드 프랑스 (Marie of France)와 알릭스(알리스) 드 프랑스 (Alix) 두 명의 딸을 두었다.

루이 7세 역시 엘레노르와 이혼 후 콘스탕스 드 카스티야 (Constance of Castile)와 결혼한다. 결혼 후 6년을 살다 콘스탕스는 아이를 출산 중 사망한다. 이 둘 사이에는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 (Margaret)라는 딸을 하나만 두었다. 마르그리트는 루이의 전부인인 엘레노르와 헨리2세 사이에 태어난 헨리(젊은 왕)와 결혼한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휴전합의 조건으로 혼인한 것이었다. 이 결혼은 얼마가지 못했다. 오늘날 복잡한 성윤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루이 7세는 두 번째 아내가 죽자 곧바로 아델 드 샹파뉴 (Adèle of Champagne)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결혼은 그나마 첫 번째 부인과의 이혼으로 힘들었던, 그의 결혼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가 그렇게 원했던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처가인 샹파뉴 가문과의 결혼은 2차 십자군 참전과 이혼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그의 권위를 되찾는 동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유일한 후계자인 필리프 2세 (오귀스트)에게 아버지와 다르게 안정된 프랑스를 정치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해준 것이다.

필리프 2세의 즉위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의미했다. 그는 이후 중앙집권화 정책과 외교적 현실주의를 통해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 국가로 만들었고, 리처드 1세(사자심왕)와 함께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게 된다. 즉, 필리프 2세의 즉위는 루이 7세의 죽음이후 서유럽 정치 질서의 세대적 전환점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2차 십자군 참전의 루이7세 부부의 자녀들인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3차 십자군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교황청의 문제들

한편, 교황청 내부에서는 여전히 정통 교황과 대립 교황이 공존하는 분열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정치적 지원을 받았던 대립 교황 칼리스토 3세(Antipope Callistus III)는 이 시기 교회 질서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1178년, 칼리스토 3세가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에게 공식적으로 복속하면서 수십 년 간 지속된 서방 교회의 대립교황(對立敎皇, Antipope) 문제는 마침내 종결되었다. 이 복속은 단순한 개인적 항복이 아니라, 교황 권과 신성로마 제국권력 간의 장기적 갈등에서 교황권이 우위에 섰다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알렉산더 3세는 이 승리를 기점으로 교황권의 제도적 재정비에 착수하였다. 그는 교황령 행정 체계를 안정화하기 위해 베네벤토(Benevento)의 총독 임명은 전략적인 지역의 총독을 교황이 직접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동시에 유럽 전역의 성직자 및 주교회의와의 관계 정비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3세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 소집을 선언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사절단을 각 지역 주교좌와 수도회로 파견하였다.

이 공의회는 특히 교황 선출 규정을 확립하여, 추기경단의 3분의 2 이상 찬성이 있어야 교황을 선출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대립교황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차단한 조치였다. 로마교회 질서 전체를 위협하는 교리적 위기로 재규정하는 과정의 출발점이었다.

동로마 제국, 마누일 1세 콤네노스 (Μανουήλ Α΄ Κομνηνός)의 죽음과 제국을 뒤흔든 제국의 혼란.

유럽에서는 십자군 국가의 쇠퇴와 봉건 귀족 세력의 재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는 튀르크 세력이 점차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동로마 제국은 마누일 1세 콤니노스의 치세 아래 비교적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마누일 1세는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중재자였다. 그는 서유럽의 기사 문화와 라틴 세계에 강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제국이 수 세기 동안 유지해 온 동방 세계의 패권과 우월성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이중적인 지향성은 제국을 보다 풍요로운 외교·문화 교류 속으로 이끌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라틴계 이민자와 전통 비잔틴 귀족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을 이어갔다.

1180년 9월 24일, 마누일 1세가 사망한다. 후계자는 그의 어린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니노스(Ἀλέξιος Β΄ Κομνηνός)였다. 겨우 열 살 남짓 된 어린 황제는 자연히 스스로 통치할 수 없었고, 대신 섭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섭정으로 임명된 이들이 제국 내부의 복잡한 귀족 세력 구조를 조정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마누일 1세가 유지하던 균형은 곧 무너지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에서부터 불만과 음모의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동로마제국은 이미 황제 마누일1세 생전부터 잠재적 불씨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해 9월, 오늘날 흑해지역 폰토스 사령관 니키포로스 팔라이올로고스(Νικηφόρος Παλαιολόγος)가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Ανδρόνικος Κομνηνός)와 그의 아내를 체포한다. 안드로니코스는 황제 마누일의 사촌이었지만,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 있던 인물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경계 조치에 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누일 1세는 놀랍게도 그들을 용서한다.

훗날 이 관대한 결정은 제국의 운명을 뒤흔들 역사적 오판으로 평가된다. 안드로니코스는 권력과 복수심을 동시에 품은 인물이었다. 그는 귀족들의 방만함, 라틴 세력의 영향 확대, 섭정 정치의 무능을 강하게 비난하며 점점 더 많은 지지자를 끌어 모았다.

동로마 제국의 섭정 알렉시오스 콤니노스(Αλέξιος Κομνηνός)는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강화하고자 쿠데타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그 결과 마누일 1세의 딸 마리아 콤니네(Μαρία Κομνίν)와 그녀의 남편 케사르 레오니데스(Ρενιέρος του Μομφερράτου)는 성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한다. 성 소피아성단은 제국의 신성한 중심이었으며, 그곳으로 피신한다는 것은 도시 전체에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하는 행위였다. 이것은 섭정 정부가 더 이상 정당하지 않으며 제국의 권위는 무너지고 있다는 선언과 같았다.

이 사건은 귀족 사회 내부의 균열을 가시화했고, 민심은 점차 섭정 체제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란과 음모가 이어지는 가운데, 안드로니코스는 타락한 귀족을 처리하고 제국의 질서를 바로 세울 개혁자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수도로 진군한다. 그는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독재자였고, 마침내 1183년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다. 결과적으로 제국은 한때 강력한 지도자의 사후, 후계 체계의 불안과 귀족 간 분열, 그리고 대중 선동을 통한 권력 장악이라는 구조적 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마누일 1세의 시대는 제국이 서방과 동방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던 마지막 찬란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지도자의 부재와 미성년 황제의 즉위, 그리고 내부 귀족 간의 권력 투쟁은 제국을 혼란과 피로 물든 시대로 이끌었다. 이 소용돌이는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라는 가장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역사적 길의 출발점이었다.

이슬람 세계, 살라딘의 조용한 전략 속 성지 재정복

12세기 후반, 이슬람 세계는 수십 년에 걸친 십자군의 침공과 점령으로 인해 분열과 재편의 시간을 겪어왔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낱낱이 흩어져 있던 정치 세력들을 하나의 이슬람 질서 속으로 재조직하려는 지도자가 등장한다. 바로 살라딘, 살라딘 즉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유브(Ṣalāḥ ad-Dīn Yūsuf ibn Ayyūb)이다. 살라딘은 단순한 장군이 아니라 국가 건설 자이자 사상적 통합 지도자이며, 장기적인 전략가였다.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즉각적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무력보다 정치와 외교, 그리고 개혁된 행정 체계를 우선시하며, 전쟁이 가능한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1180년 6월 29일, 모술의 아미르 사이프 앗 딘(Amir Saif ad-Din of Mosul)의 사망은 북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지역의 미묘한 긴장 관계를 다시 흔들었다. 그 동생 이즈 앗 딘 (Izz ad-Dīn)이 후계자로 오르긴 했지만, 주변 군벌과 부족 세력은 이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모술은 살라딘의 아유브 왕조와 시리아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던 주요 세력이었다. 그러나 살라딘은 무력을 즉시 동원해 이 지역을 압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술 내부 갈등을 ‘조정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관찰하며 장기 개입의 여지 확보라는 점진적 세력 확장 전략을 취했다. 그의 목표는 정복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종속과 종교적·정치적 권위의 확대였다. 이 전략은 그가 단순한 군사 지휘관이 아닌 국가 경영자였음을 잘 보여준다. 같은 해 10월 2일, 살라딘이 사모사타(Samosata)에서 아르투크(Artuqid), 룸 셀주크(Rum Seljuks)그리고 아르메니아(Armenia)세력과 2년 휴전 협정을 체결한다.

이 지역은 북시리아와 소아시아 남단의 전략적 경계 지대였고, 십자군 세력과 맞닿은 전진기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이 휴전은 단순한 안전장치가 아니라 전략적 의미를 가진 정치적 포석이었다. 그리고 이 회의는 이슬람들이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전쟁의 서막이기 이전에, 전쟁을 가능케 할 내정 정비의 기반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도 극적으로 등장하는, 1181년 여름 르노 드 샤티용(Raynaud de Châtillon) 기독교 세계에서도 무모함과 잔혹으로 악명 높던 봉건 영주는 아라비아 북부를 침공해 메카로 향하던 이슬람 대상(商隊)을 약탈한다. 이 행위는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이슬람 성지 순례의 신성한 안전을 침해한 모독 행위였다. 이는 이슬람 세계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살라딘은 다음과 같은 즉각적 대응을 보인다. 요르단 남부 지역을 급습하여 르노의 영지를 파괴한 후, 지나던 기독교 순례 단을 구금하며 정치적 경고 메시지 발신한다.

이 사건을 성스러운 보복과 정의 회복의 명분으로 이슬람 세계에 선전했다. 이 사건은 이슬람 내부 결집을 완성한 결정적 촉매제였다. 6년 후, 1187년 하틴 전투(Battle of Hattin), 그리고 곧이어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역사적 대전환으로 이어진다.

살라딘의 시대는 전쟁의 시대가 아니라, 전쟁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준비와 통합의 시대였다. 살라딘은 전장을 지배한 사나이였지만, 그가 진정으로 승리한 곳은 정치의 영역이었다. 그가 예루살렘을 되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터에서가 아니라, 전쟁 이전의 정치와 외교에서 이미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왕국, 권력의 불안정과 교회의 분열

1180년대에 접어든 예루살렘 왕국은 외부의 적보다 더 치명적인 내부 해체의 위기를 안고 있었다. 겉으로는 성묘 성당을 수호하고 성지의 신성한 질서를 유지하는 기독교 왕국처럼 보였다. 왕궁과 교회, 그리고 귀족 사회 내부에서는 서로 다른 이해와 야망이 충돌하고 있었다. 이 시기 예루살렘 왕국의 위기는 한 가지 사건만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왕권의 불안정, 교회의 권위 약화, 귀족 파벌의 경쟁이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난 구조적 위기였다.

왕 보두앵 4세(Baldwin IV)는 청년기부터 나병을 앓고 있었다. 그 정신은 뛰어나고 정치적 판단도 예리했으나, 병세가 악화할수록 그는 장기적으로 왕국을 통치할 수 없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하여,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는 국가의 생존 자체를 좌우하는 문제였다. 한쪽은 안정과 왕실 전통을 강조하는 귀족 파벌 다른 한쪽은 보두엥 4세의 모후인 아그네스 드 쿠르텐네(Agnes de Courtenay)를 중심으로 한 실용적・세속 정치 파벌이 대립하여 권력은 이미 균열을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중재자, 혹은 도덕적 지도력이 될 기회가 있었으나, 정작 교회 역시 이 권력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된다.

1180년 10월 6일, 총대주교 애므리(Aimery of Limoges)가 사망했다. 총대주교직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 자리가 아니라, 왕실과 귀족을 중재하는 상징적 권위의 균형추였다. 그러나 보두앵 4세의 어머니 아그네스는 이 자리를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확보에 사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헤라클리우스(Heraclius)를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Patriarch of Jerusalem)로 지명된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왕의 조언자였던 기욤 드 티레(Guillaume de Tyr)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위줄) 아크레에 도착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오귀스트, 리차드 1세(사자심왕), 아크레 점령 전 (아래 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아모리 드 리모주 고문, 영화 속 르노 드 샤티용, 기 드 뤼지냥, 아크레 공방전

“총대주교직이 파벌의 도구가 되는 순간, 예루살렘 왕국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묵살되었고, 1180년 10월 16일, 헤라클리우스는 공식적으로 총대주교로 선출된다. 1181년 4월, 헤라클리우스는 자신을 비판하던 기욤 드 티레를 파문한다. 이 일은 단지 개인에 대한 탄압이 아니라, 지식과 개혁을 지향하는 제도적 교회 전통의 축출로 종교적 권위를 도덕적 기준이 아닌 파벌 통제 수단으로 전락시킨 사건이자 신앙 공동체 내부에서의 상징적 단절이었다.

교회는 더 이상 도덕적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 조직으로 인식되었고 귀족들 간의 협력 체계는 신뢰를 기반으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왕국은 점점 누가 옳은가가 아닌 누가 이길 것인가의 논리로 돌아가게 된다. 내적 붕괴는 외적 침략보다 위험하다. 살라딘이 세력을 공고히 하던 그때, 예루살렘 왕국은 정치와 종교, 지도력 모두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다.

훗날 1187년 하틴 전투에서의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이미 내부에서 진행 중이던 국가 구조의 붕괴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하틴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부터 이미 내부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성지는 군사력이 아니라 믿음과 결속으로 지켜진다. 예루살렘 왕국이 잃은 것은 단순한 영토가 아니라 공동체를 묶어주던 신앙과 정신적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칼날이 아니라, 불신과 분열이 가져온 붕괴였다. 성지의 상실은 전장에서가 아니라, 성당과 궁정에서 시작되었다.

1175년에서 1185년은 겉보기에 각 지역의 별개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중세 지중해 세계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왕이 즉위하며 서유럽의 역학이 바뀌었고, 동로마 제국은 권력 공백 속에서 내전에 빠졌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살라딘이 통합과 휴전을 통해 세력을 정비했으며, 루살렘 왕국은 내부 분열과 종교 갈등으로 약화되었다. 모든 흐름은 불과 2년 뒤, 1187년의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함락, 그리고 제3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거대한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하틴 전투와 살라딘의 예루살렘 탈환

1187년, 레반트 전역(Levant)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슬람 세계를 하나로 결속시킨 살라딘은 이제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결정적인 반격의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서둘러 싸우지 않았다. 그는 전쟁에서의 승리는 칼끝이 아니라, 준비된 질서와 결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예루살렘 왕국 내부는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왕권은 약하고 귀족 간 권력 투쟁은 심화되었으며 이미 르노 드 샤티용의 사막 대상 약탈 사건 이후, 정전의 신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양측은 피할 수 없는 대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187년 여름, 살라딘은 십자군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갈릴리 지역의 티베리아(Tiberias)를 공격한다. 티베리아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십자군 영주 레몽의 가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상징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위협한다는 것은 곧 십자군 전체의 명예를 자극하는 도전이었다.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은 군사 전략보다는 명예를 선택했다. 조언자들은 물 부족 지역으로 군대를 이끌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그는 전사들을 버릴 수 없다는 명목으로 한여름의 사막으로 군을 진군시켰다.

살라딘은 정확히 그 점을 노렸다. 십자군 이동 경로에 우물과 수원지 폐쇄한 후, 군대가 지칠 때까지 기동전으로 괴롭힌다. 이것은 전쟁이라기보다 목마름과 피로를 무기로 한 심리전이었다. 7월 4일, 하틴 언덕에서 결정적 전투가 벌어졌다. 십자군은 이미 피폐해 있었다. 말들은 지쳐 쓰러졌고, 병사들의 갑옷은 뜨거운 태양 아래 달구어진 고통의 감옥과 같았다. 레반트의 여름은 너무도 뜨거운 곳이다. 반면 살라딘의 군대는 물 공급이 유지되고 있었다. 신선한 말들을 배속 받았으며, 이것은 이동과 후퇴가 자유로운 기병 전술로 무장되어 있었다.

전투의 클라이맥스는 성 십자가 (십자군이 전장에서 들고 다니던 성 유물)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 상징의 붕괴는 십자군에게 영적 패배를 의미했다. 그리고 전투는 살라딘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예루살렘 왕 기 드 루지냥(Guy de Lusignan)은 생포되었다. 그리고 템플 기사단과 병원기사단은 상당수가 처형되었다. 그리고 르노 드 샤티용(Renault de Chatillon)은 살라딘의 손에 직접 처형되었다. 르노의 처형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메카 대상 약탈에 대한 신성한 정의의 실현으로 기록된다. 살라딘의 이슬람들은 예루살렘으로의 진군한다.

하틴 전투 이후, 십자군 국가의 군사적 기반은 붕괴되었다. 크고 작은 요새들이 연이어 항복했다. 살라딘은 점령지에서 학살과 약탈을 금지했으며, 이는 그가 정복자가 아니라 성지를 되찾는 회복자 였음을 드러낸 정책이었다.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은 항복했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도시는 피로 물들었고, 주민은 무차별 학살 되었다.

그러나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되찾았을 때 그는 자비를 명령했고, 속죄금만 지불한다면 누구든 떠날 수 있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정책 차이를 넘어, 십자군과 이슬람 세계가 각기 어떤 성스러움을 추구했는지를 대비시키는 역사적 장면이었다. 사실 이 장면은 영화 ‘킹덤 오븐 헤븐’ 에서도 분명히 클로즈업 되어 등장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자심왕 리차드 1세가 발리안에게 하는 말로 영화는 끝난다. 필자도 그 대사로 이번 이야기의 끝을 맺고 싶다.

영국의 리처드 1세(사자심왕)가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원정을 떠나는 길에 발리안을 찾아온다.

리처드 1세는 발리안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바로 예루살렘의 구원자 발리안인가?”

그러나 발리안은 자신을 낮추며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대장장이입니다.”

리처드 1세는 발리안이 자신을 따르기를 바라지만, 발리안은 십자군에 다시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선택한다.

영화는 다음 문구로 마무리된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분쟁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영화가 끝난다.

표지사진: 케라크-성채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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