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스 세속 칼리파 왕조와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사라센 세력)

필자가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시아지역에 잠시 머문 날들은 밤에는 비가 왔고 낮에는 대부분 청명한 날들이었다. 노란 유체 꽃이 들판에 만개하여 길가는 나그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노란 색감에 취하게 된다. 푸른색의 작은 언덕과 벌판은 마치 컴퓨터 속에서만 보았던 윈도우즈의 배경 화면이 현실 세계로 나온 것 같았다. 이러한 풍경과의 만남은 여행 중 작은 보석같은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던 것이 생각났다.

[미션저널] 아바스 세속 칼리파 왕조와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사라센 세력) » 김수길 선교사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12) »

옛부터 이베리아 반도의 뜨거운 태양과 충분한 수분은 맛있는 과일과 곡식을 생산하기에 넉넉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석류와 무화과 그리고 지천에 널린 올리브와 와이너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왔다. 이렇게 풍성한 곳에서 태어나고 오랫동안 살았는데 그들의 거주지가 아주 오랜 시절 조상들이 침략한 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사실 마음이 어떠했을까? 라는 싱거운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근래에 귀한 분들과 이베리아 반도를 다녀왔다. 코르도바를 방문하고 싶었으나 일정 상 그곳을 가지 못하고 대신 그라나다를 다녀왔다. 코르도바의 이슬람 왕국의 마지막 칼리파를 이야기하므로 마치려던 이야기가 본의 아니게 늘어지게 된 것 같다. 왜냐면 스페인의 영토 수복 전쟁인 레콘키스타까지 언급을 해야만 하기에, 그래서 이번호의 이야기는 생각지 않게 조금 길어지는 것이 아닐 까 하는 조바심이 생기는 것이다.

스페인만 그런지 모르겠다. 가는 곳곳마다 입장권은 이미 매진되었고,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려고 해도 멀리는 2주 또는 3주 후의 표를 구입 할 수 있다고 했다. 넘치는 관광객의 (Over tourism)의 피해가 극에 달한 느낌이었다. 시민들은 관광객 버스를 막아서고 ’관광객들 때문에 우리의 도시가 죽어간다‘ 플래카드를 걸었다. 경찰은 관광객을 지키고 데모대를 막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오늘의 그 곳의 현실에서, 그 땅의 과거의 영광과 굴욕의 역사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아바스 왕조의 설립과정

지난 10호 ’세속 칼리파, 우마이야 왕조‘에서 이미 이야기했던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겉으로는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같은 이슬람이라도 아랍인이 아닌 다른 종족들에게 차별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차별은 비(非)아랍인들을 대표할 수 있는 페르시아계 작가와 시인들이 참여한 슈우비야(Shuubiya) 운동, 즉 페르시아 민족운동으로 번졌다.

이 민족 운동은 페르시아계 뿐 아니라 마왈리(Mawalli)라 불리는 비아랍계 무슬림들의 동조 및 투쟁을 유발했다. 이것은 우마이야 왕조의 태생적인 약점이 이었다. 정통 칼리파 시대를 이어 등장한 세속 칼리파 시대였지만 무하마드가 활동한 이슬람의 핵심인 아랍부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를 보호한다고는 하였지만, 아랍부족 외 모든 이슬람들은 비이슬람이 납부하는 종교세인 지즈야(Jizuya)를 동일하게 납부를 하도록 했다.

특히 우마이야 왕조는 무하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따르는 시아파를 정권 투쟁 시 일어난 일로인해 증오해 왔다.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점령한 후 그들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모든 권위를 지워버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우마이야 왕조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자신들보다도 시아파와 가깝게 지낸 것이 눈에 거슬린 것이다. 이들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해도 힘든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자 우마이야 왕조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은 자연스럽게 시아파와 같이 반 무아위아 왕조의 투쟁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우마이야 왕조의 또 다른 문제는 왕조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이슬람 인구 비율이 극도로 낮았다는 것이다. 적은 인원으로 제국의 모든 민족 제어와 통제하기에는 그들의 능력은 과부하에 걸려 언제든지 셧다운 될 준비가 된 상태였던 것이다. 특히 우마이야 왕조가 가장 아끼는 군대는 아랍부족의 군대가 아니라 대부분이 기독교 교인들로 구성된 시리아인 부대였던 것도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의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된 왕조의 몰락에 한 사람이 등장한다. 아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아바스( Abu al Abbas)이다. 그리고 내전이라고 부르는 3차 피트나가 진행 중이었지만 아부 알 아바스가 참여하여 내전은 4년 동안 더 이어진다. 아부 알 아바스는 현재 요르단 유적지인 후메이마(Humeimar)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혈통이었다.

그는 창시자 무하마드의 삼촌인 아바스 이븐 압둘 무탈립(Al-Abbas ibn Abd al Muttalib)의 고손자였다. 아버지인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라(Muhammadus ibn Abdullah)가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연결하는 지역인 아무다리야 강 남부의 호라산(Khorasan)으로 이주하자 그곳에서 성장한다. 그의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족장이었던 형마저 죽자 아부 알 아바스가 아바스 가문의 새 족장이 되었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아바스 가문의 우마이야 왕조에 반란은 쿠라이시 부족의 반란에 페르시아인 들의 봉기로 이해하였지만, 사실은 이 반란에는 페르시아뿐 아니라 정통 칼리파 시대를 원하는 수니파와 비 아랍민족과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민족의 종교들까지 합세한 거대한 혁명적인 반란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그동안 받아왔던 차별과 멸시에 대한 분노의 폭발을 드려냈다.

또한 이들은 로마제국시대부터 축적해온 부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동참은 아부 알 아바스가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 큰 도움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많은 민족의 동참을 생각한 아부 알 아바스는 종교의 자유와 평등을 주창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이슬람 신자들에게는 자신이 무하마드의 친족인 것을 알림으로써 그들의 적극적인 지지까지 받게 되었다.

아부 알 아바스는 군대의 장군들은 대부분 아랍부족으로 채웠지만, 병사들은 페르시아인들을 비롯한 많은 민족들이 골고루 섞인 부대였다. 민족적으로 다양한 부대였기에 군대의 균형과 분열에 대해서 아부 알 아바스는 극도로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그는 749년 라마단 기간에 그의 거주지 호라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트리고 역사학자들이 이슬람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아바스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아부 알 아바스의 별명인 알 사파흐(Al Safah)라고 부르는 이유는 알 사파흐는 ‘피 흘리는 자’ 라는 의미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적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살육을 행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마이야왕조의 마지막 칼리파인 마르완 2세(Marwan II)를 처형했다. 그리고 마르완 2세의 아들 압둘라(Abdullah)는 에리트레아(Erythraea)지역에서 끈질긴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 전사했다. 남아있던 우마이야 왕족들에게 ‘연회의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신변의 보장과 재산을 유지 할 것이다.’ 라는 통보에 그렇게 믿고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 우마이야 왕조의 10대 칼리파 히샴(Hisham ibn Abd al Malik)의 손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Abd al Rahman I)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도망을 쳐서 아바스 왕조의 영향력이 없는 이라크에서 먼 거리인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시아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코르도바에서 754년 후 우마이야 왕조의 깃발을 걸었다.

어떻게 보면 아바스 왕조와 후 우마이야 왕조가 비슷한 시기에 동서에서 왕조를 열었지만 코르도바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아바스 왕조의 눈치를 보는 망명국가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대

이슬람역사가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아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의 시대는 이슬람 역사상 문화의 최고의 시대였다고 이슬람 사회에서는 오늘날도 자랑한다. 대표적인 인물인 8세기의 하룬 알 라시드(Haroon Al Rashid)의 즉위로부터 아바스조가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기 전까지 약 500년이 이슬람의 최고의 전성기였다.

칼리파 알 마문(Al Mamun)은 전 세계의 학자들을 바그다드로 불러 모아 그들이 마음껏 연구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식의 집(Domus Sapientiae)을 세워서 오늘의 대학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라크 바그다드의 지식의 집/ 인도식 문양이 첨가된 아라베스크 문양

이곳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서적들과 로마시대의 서적을 수집하는 학자들과 이를 번역하는 학자 그룹이 있어서 그레코로만(Graeco-Romana) 시대의 지식을 흡수 하였다. 이 시기는 어느 시대보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었다고 한다. 그리스 정교회의 신자들이 그리스의 고전들을 번역하고, 로마 가톨릭의 신자들이 줄리어스 시저(Iulius Caesar)의 서적들을 번역했다고 하니 오늘의 시각으로도 부러울 정도이다.

그리고 슈우비야(Shuubiya) 운동을 일으킨 페르시아 문인들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설화를 중심으로 하여, 인도와 이집트 등 당시 여러 민족의 이야기를 편집한 아라비안나이트(Arabian Nights) ’천일야화’는 오늘까지 전해저온 아바스 왕조의 문학의 최고봉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일야화’의 내용은 페르시아의 어느 왕과 결혼한 여인들은 다음날 죽음을 맞이하는데, 지혜로운 셰에라자드라는 여인은 왕에게 밤마다 한 가지의 이야기를 전해줌으로 천 날을 넘긴 천 하루의 이야기다.

이야기 속에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신드바드의 모험 , 알라딘 외에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탄 느낌을 오늘까지 전수하고 있다. 이것들은 아바스 왕조가 우리에게 전해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구전문학은 이슬람의 우월론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든다면 이슬람에게 반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리스도인의 공주 이야기 등이다.

앞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이슬람인 남편을 따라서 非이슬람 여인이 개종하여 이슬람 공동체 움마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지만, 이슬람 여인이 타 종교인과 결혼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하기에 이와 같은 내용이 구전 문학 속에서 나타나지 않았을 까? 이외에도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을 나타낼 때 이슬람은 정의이고 기독교는 비열한 세력이라는 흑백논리도 등장한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칼리파 알 무타와킬(Al Mutawakil)은 이슬람 외에 모든 종교와 민족을 탄압한 경우도 있다. 이들은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인들에게 ‘딤미‘(Dimmi)라고 부르면서 이슬람과 엄격한 구별을 하였다. 모든 사회생활에서 차별을 하였다. 나아가 법률을 만들어 이슬람 외에 사람들은 노란색의 옷을 입히므로 차별을 표시로 삼기도 했다.(마치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마긴 다비드의 유대별을 표식을 한 것처럼) 그러나 대부분의 칼리파들은 차별보다는 관용으로 이민족을 포용했다. 특히 유대인들은 다른 곳에서는 반유대주의 정책에 정착이 힘들었지만 아바스의 바그다드에 살던 유대인들은 아랍인 공동체에 속해서 약간의 차별을 제외하고는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당시 바그다드에는 10개가 넘는 랍비 회당과 23개의 유대교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우마이야 왕조가 아랍인들과 이슬람들을 차별한 결과 반발로 왕조가 무너진 것을 기억하였기에 아바스 왕조는 이들을 포용과 관용의 정책을 펼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아바스 왕조가 내전이나 내부 분열로 멸망한 것이 아닌 이민족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는 것은 어느 이슬람왕조보다 사회적 안정을 중심으로 정치를 해왔다는 것을 입증 한 것이다. 아바스 왕조의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였으면 한다. 본래 이야기의 주제와 멀어지는 것 같아서이다.

코르도바 왕조( Caliphatus Cordubae)가 남긴 이베리아의 흔적들

이번에 보지 못한 코르도바의 ‘산타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Córdoba)을 메스키타(Mezquita)라고 부른다. 지금은 안달루시아(Andalucía) 지역의 스페인 가톨릭 주교가 시무하는 성당이기도하다. 메스키타는 아랍어 모스크인 마스지드의 안달루시아식의 표현이다. 메스키타는 현재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뿐 아니라 전역에서 제일 큰 모스크이기에, 코르도바 대 모스크라고 불렸다. 이 모스크를 건축한 사람은 앞서 이야기한 코르도바에 후(後)우마이야왕조를 세운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785년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여러 번의 증축 공사가 있었다.

사라센들이 이베리아 반도(Península ibérica)에 발을 내딛기 전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시아 지역은 서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서고트족(Regnum Visigothorum)들이 살고 있었다. 서 고트 왕국은 수에비족(Suebi), 반달족(Vandali)과 치열한 전쟁 끝에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얻었다. 서고트족은 7세기에 들어오면서 빈발한 정치적 내분과 외부와의 전쟁에 휩싸이면서 쇄락의 길을 간다.

메스키타는 코르도바 토후국의 최초의 아미르였던 아브드 알라흐만 1세의 명으로 785년에 건설되었으며, 이후 10세기 후반까지 여러 차례 증축 되었다./ 962년 세워진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훗날 가톨릭 대성당으로 개조 되었다.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 타리크 이븐 지야드(Tariq ibn Ziyad)는 서고트인들이 자신들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보내오자 이것을 빌미로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앞 장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듯이 타리크 이븐 지야드는 무어인 그리고 베르베르족을 동원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침략하였다.

오늘날 스페인 카디스(Gades)주의 과달레테(Guadalete)강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서고트족의 왕 로데리크(Rodericus)를 비롯한 전원이 전멸하고 만다. 서고트족은 내분 때문에, 그들의 땅을 검은 옷으로 모든 것을 가린 무어(Moor)인들과 파란색으로 휘감은 베르베르(Berber)인들에게, 눈뜨고 그들의 영토를 내어주고 말았다.

이 전투의 승리를 배경으로 사라센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메리다(Merida)와 코르도바(Cordoba) 그리고 사라고사(Zaragoza)까지 점령했다. 피레네 산맥의 남쪽 지역을 대부분 장악한 사라센들은 피레네를 넘어 현재 프랑스 중부의 투르까지 넘보게 된다. 교황 자카리아(Zacharias)로부터 무능하다고 여김을 받았던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힐데리쿠스 3세(Childeric Ⅲ)는 투르의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에서 사라센을 몰아낸 궁재인 피핀 마르텔(Pippin Martel)에게 왕조를 물러준다.

피핀 마르텔은 교황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아니 교황의 적극적인 동조 아래 메로빙거(Merowinger) 왕조를 대신하여 카를링거(Carolingian dynasty) 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카를링거 왕조를 승인한 교황 자카리아는 더 이상 비잔틴 제국의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사라센의 프랑크 왕국의 침략은 481년 클로비스 1세(Clovis I)가 약 3000명의 부하와 함께 랭스의 주교 레미기우스(Remigius)로부터 가톨릭 세례를 받음으로 세워진 메로빙거 왕조가 사라진 것이다.

사라센은 피레네를 넘어 예전처럼 대규모의 침략을 하지는 않았지만, 피레네 산맥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의 코르도바(Cordoba)에 수도로 삼고, 후 우마이야 왕조를 세워 이베리아를 통치하였다.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코르도바에 왕국의 수도를 삼은 것은 물론 아바스 왕조의 본거지인 바그다드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우마이야조의 칼리파였던 히삼이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Abd al Rahman)을 시켜서 현재 프랑스 보르도(Bordeaux)지역을 약탈했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친족인 베르베르족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바스 왕조의 군사력은 지브롤터(Gibraltar) 해협 건너인 마그레브 지역과 북아프리카 아틀라스 산맥(Atlas mountains)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달루시아 지역은 아바스 왕조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기에, 아바스 왕조가 멸망시킨 우마이야 왕조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왕조를 세운 것이다. 그의 지위는 이슬람 왕조의 칼리파가 아닌 아미르(amīr)라고 한 것은 아바스 왕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도시 국가 아랍에미리트(Arab Emirates)를 연상시키는 작은 도시국가의 수장 정도인 아미르라고 부르게 했다. (아랍에미리트는 추장이 다스리는 아랍의 도시 국가라는 뜻의 영어의 표기법이다.)

이렇게 시작한 코르도바의 사라센들(이슬람 왕조)은 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뿐 아니라 기독교 사회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관계 수로를 건설한 사라센들은 너무 귀하여 수입에만 의존하던 과실들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석류, 체리와 같은 과실과 당시로서는 새로운 농산물인 대추야자와 사탕수수 같은 농작물을 생산함으로서 경제가 안정되었다.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서 몰려든 유대인들은 코르도바로 집단 또는 개인적으로 줄을 이어 이주했다. 유대인들은 손재주를 이용한 금속 세공업과 상공업을 발전시켰다. 이들이 납부하는 세금은 코르도바 이슬람국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북부 기독교 동맹의 왕국들을 침략하여 그들로부터 가져오는 재물들과 노예들 역시 슬프지만 코르도바 이슬람 토후국을 안정되게 하였다. 사회적 안정은 사라센의 언어인 아랍어가 현지 이베리아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이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개종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은 이베리아와 아랍의 혼합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아랍어가 중요한 언어가 되었고, 코르도바의 인구는 수십만 명이 넘는 안달루시아 지역 최고의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를 중심으로 아라베스크(Arabesque)라는 불리는 이슬람 문화가 오늘까지 거미줄처럼 엮기고 엮기여 있는 것이다.

파티마 왕조(Dynastia Fatimidarum)와 세 명의 칼리파 시대

코르도바의 이슬람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앞서 말했듯이 ‘아미르’ 또는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뜻의 술탄이라고 240여년 가까이 불러왔다. 그러나 무하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인 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 ibn Abi Talib)의 혈육인 이스마일 빈 자파르(Ismail bin Jafar)를 7대 시아파 이맘으로 인정하는 분파가 이스마일 시아파이다.

이슬람에도 메시아 개념의 구원자가 있는데 그를 ‘마흐디’(Mahdi)라고 한다. 마흐디는 지구의 종말 전에 이 땅에 와서 참된 이슬람의 신앙과 이슬람들을 구원하는 사람이 마흐디이다. 이스마일파의 10대 이맘인 후세인 알 라디(Hussein Al Radi)는 이슬람권의 각지에 사람들을 파견하며 마흐디의 재림을 설파하였다.

아부 무함마드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Abu Muhammad Abdullah Al Mahdi Bila)는 그의 긴 이름 속에 ‘알 마흐디‘라는 뜻처럼 자신이 선지자의 딸 파티마의 후손인 알 마흐디 (메시아)로 칭하며 파티마 왕조의 설립을 공식화 했다.

그리고 그들의 정적인 아바스 칼리파는 정식이 아닌 무력으로 칼리파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라고 격하시켰다. 오직 자신 만이 진정한 칼리파라고 주장했다. 그는 909년 아글라브 왕조(Dynastia Aghlabidarum)를 전복시키고 현 튀니지와 알제리에 자칭 파티마의 후손인 파티마 칼리파 왕조를 세웠다.

알 마흐디는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지역인 마그레브 지역 전역을 그의 통치 아래 두었다. 튀니지 해안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자신의 이름인 ‘알 마흐디아'(Al Mahdia)로 불렀다. 도시를 만들고 자신을 이름을 붙인 그리스 로마의 지도자 흉내는 다 내는 중이었다. 알마흐디는 아바스조의 이집트를 공격하는 한편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 아미르국을 침략했다. 파티마 왕조는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여 수도를 카이로(Cairo)로 옮기고 도시를 건설했다.

카이로의 알 하킴 모스크는 990년에 알 아지즈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1013년 알 하킴에 의해 완공되었다. (이후 1980년에 다우디 보라에 의해 개조됨)

카이로는 북쪽으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3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사는 도시로 바뀌게 된다. 코르도바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Abd al Rahman III)는 파티마 왕조의 알 마흐디가 칼리파라고 불렀기에, 이슬람 세계에서 아미르는 칼리파를 존중해야하는 군주로서는 한 끗발 높은 파티마조의 칼리파와 싸우기는 어려웠다. 929년 코르도바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스스로를 칼리파로 자칭했다. 이베리아 반도에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수립되어진 것이다.

코르도바의 후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그리고 카이로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로 한동안 이슬람 세계는 3명의 칼리파가 존재하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아바스왕조를 계속해서 공격했으나 멸망은 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장군 살라딘에게 멸망당함으로 살라딘의 아유브 왕조가 이집트에서 파티마 조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는다. 할 이야기는 너무도 많은데 본말이 아니기에 파티마의 칼리프는 이쯤에서 마치려고 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의 영토 재수복운동

이미 이야기 한대로 711년 과달레테 전투는 이슬람의 대승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세력은 종말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에서 출반한 엘 까미노(El Camino)순례 길을 가다보면 만나는 지역이 카스티야(Castella), 레온(Leon), 칸타브리아(Cantabria), 아스투리아스(Asturia), 갈리시아(Gallaecia)등 스페인 북부 지역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이 지역의 중심인 아스투리아스 역시 이슬람에 항복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심한 압박과 박해는 기독교인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이 저항에 앞장선 사람이 펠라요(Pelayo)라는 인물이었다.

스페인 기독교의 고대 역사는, 서 고트족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스투리아스 산속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펠라요를 그들의 왕으로 선출했다고 한다. 펠라요는 아스투리아스 산맥의 칸가스 데 오니스(Cangas de Onis)를 수도로 정하고 이슬람에 저항했다고 한다.

우마이야 왕조는 아스투리아스 산악 지대에서 일어난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프랑크의 툴루(Toulu)지역에서 패배 한 후, 군사들의 사기 저하를 막기 위해 이슬람은 721년 대규모 토벌군을 아스투리아스 산맥으로 보내어 기독교 세력을 진압했다. 그러나 722년 코바동가 (Covadonga))전투에서 토벌군의 지휘관 알 카마와 무누자(Al Kama et Munujah)를 비롯하여 이슬람 군대가 괴멸 당한다.

이 소식은 모든 기독교 지역에 펴졌고, 펠라요의 휘하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팰라요는 19년간을 통치하다 사망했다. 그의 아들 파빌라(Pavilio)가 2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왕이 되었다. 왕국의 3대 왕인 알폰소 1세(Alphonsus I)는 펠라요의 사위였다. 알폰소 1세는 갈리시아 산맥의 저지대 및 레온 지역을 탈환했다. 스페인 북부 지역과 이슬람의 중심지인 안달루시아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아스투리아스의 왕국은 영토를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으로 점차적으로 넓혀갔다.

알폰소 2세의 통치하던 기간에 성 야고보의 유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당시 유럽의 많은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이 이곳으로 순례를 시작했다. 이들이 가져다 준 많은 수입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주 수입원이 되었다. 필자도 다녀온 순례이다. 오버 투어리즘으로 몸서리를 치는 오늘날까지 성행하는 순례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안달루시아의 사라센 세력들이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역점적으로 강화할 때 북부 기독교 지역은 카스티야, 갈리시아, 레온 등은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기독교인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안전한 지역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몰려들었고, 이베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의 인구는 늘어만 갔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라센들은 분열을 거듭하면서 혼란에 휩싸인다. 후우마이야조의 3대 칼리파인 히삼 2세(Hisam II)는 총리인 알 만수르 이븐 아비(Al-Mansur ibn Abi)에게 정권을 빼앗기는 등 이슬람 왕조의 내분은 결국 코르도바 칼리파국의 종말로 달려갔다.

1031년 칼리파 히샴 3세(Hisham III)의 사망은 코르도바 후우마이야 왕조는 타이파(Typha)라고 불리는 각 지역의 군소 제후들이 다스리는 도시국가 수준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사라센의 약세와 반대로, 기독교 왕국들인 포르투갈, 레온, 카스티야, 아라곤 왕국 등은 경쟁적으로 영토 재 수복 전쟁에 돌입한다.

스페인 최고 수석 주교좌 성당인 톨레도 대성당 내부 모습. 대놓고 천장 장식이 이슬람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061년 코임브라(Coimbra)재정복이 포르투갈 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이 된 것처럼, 1085년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에 의해서 서 고트족 왕국의 수도였던 톨레도(Toletanum)를 되찾자, 스페인 전역에 대한 영토 재 수복운동인 레콘키스타(Reconquista)에 대한 열망이 불 붓기 시작했다. 레콘키스타라는 역사적인 사명은 이데올로기가 되어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을 하나로 묶었다.

la-reconquista 그림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II)는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를 돕는 것은 레반트 지역인 예루살렘 정복운동과 동일하다고 선언한다. 교황의 이러한 선언은 십자군 운동의 몇 안 되는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베리아 지역 기독교 왕들은 십자군 운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다.

사라센의 타이파들은 현재 모로코 지역인 아틀라스 산맥에 자리 잡은 베르베르계 왕조인 무와히드 칼리파조(Muwahid Khalifa)에 도움을 요청하자, 무와히드 왕조는 군대를 보냈지만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괴멸 당한다. 그리고 1236년의 코르도바 수복전쟁과 1248년 세비야(Seville)공방전에서 기독교는 승리를 거둠으로 그라나다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전역을 탈환했다.

그라나다는 1491년 1월 무함마드 12(Muha mmadus XII)세가 항복하면서 레콘키스타는 완료되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에 살던 유대인 20만 명이 테살로니키 지역 등으로 추방당함을 시작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역시 개종 또는 추방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 중 이번 이야기가 가장 긴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본래의 목적이 십자군 이야기이기에 역사적인 부분을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 작은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다. 특히 메르빙거 왕조의 몰락과 피핀 마르텔의 카를왕조의 이야기가… .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 할 수 없는 이슬람의 흔적은 알 안달루스라고 불렀던 안달루시아 지역 곳곳에 스며져 있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그라나다의 카를 5세의 궁전과 알 함브라 궁전을 통해서 들어다보니 아라베스크의 실낱같은 문명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작은 전율을 혼자 느껴야 했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표지 사진/ 안달루스에서 ‘도시의 여왕’이라 불린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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