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십자군 그리고 살라딘

무슬림 세계는 장기를 중심으로 점차 정치적 통합을 이룩해가고 있었고, 십자군 국가들은 내부 분열과 유럽 본토와의 거리라는 구조적 한계에 시달렸다. 1130~1140년대는 십자군 전쟁사의 분수령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승리 이후 유지되던 낙관적 기세는 이 시기를 거치며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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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올드시티의 자파 게이트(Jaffa Gate)를 따라 들어서면, 제법 오래된 건물들이 여행자를 맞는다. 그중 하나가 내가 머물렀던 뉴 임페리얼 호텔(New Imperial Hotel)이다. 지금은 이 호텔이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팔레스타인인 주인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필자가 머물던 당시, 이 호텔은 이름이 뜻하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내 이슬람지역(Muslim Quarter)의 팔레스타인 일반 하숙집보다도 가격이 저렴했다.

한 때는 빌헬름 황제가 머물렀다는 호텔이다. 필자가 그곳에서 생활한 것은 봄부터 그 다음해 2월까지였다. 수리를 하지 않아서 삐걱거리는 계단, 나무 문짝들이 내는 낡은 소리, 그리고 공동 취사장에서 풍겨 나오던 음식 냄새까지, 모두가 생활의 흔적이자 이 호텔의 정체성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 앞에는 손으로 쓴 한편의 영어시가 먼지를 가득 쓴 액자에 담겨져 있었다. 하루에 최소 두 번 이상을 읽었기에 36년이 지난 지금도 호텔 건물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 시는 기억에 뚜렷이 남아 암송 할 수 있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지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I do not think about what happened yesterday. I do not ask about what will happen tomorrow. What is important to me is what is happening today, at this very moment.)

훗날 알고 보니 이 시는 희랍인 조르바의 독백이었다. 오래된 호텔의 저렴한 가격처럼, 겨울에는 난방이 없어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았다. 아내가 보내준 전기장판은 하루 밤에도 수 없이 전기 스위치가 차단되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겨울 내내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잠도 설치기가 일수였다. 밤이 오면 두터운 옷들을 껴입고서 자야하는 그런 곳이었다. 한참 어린 후배가 이곳에 유학 왔을 때 소개하여 그 추운 겨울을 함께 보냈다. 이런 환경의 호텔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재정적 사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곳에서 머물던 시간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심장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성 밖으로 가는 자파 게이트를 지나 조금만 걸어가면, 다윗의 탑(Tower of David) 앞에 세워진 두 개의 기마상이 있었다. 바로 살라딘과 리처드 1세가 마주 선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모습은 유명한 아서스프 전투 (Battle of Arsuf)의 한 모습을 상징화했다고 한다.

동상들은 12세기 십자군과 이슬람의 치열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청동상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품은 역사의 무게와 화해의 필요성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장치였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풍경은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스라엘에 전쟁이 끝나고 여행이 본격화 되면 다시 가고 싶다. 이유는 예루살렘은 늘 그렇듯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라마에서 전투, 예루살렘 왕국의 불안한 생존

예루살렘에 십자군 왕국이 세워졌을 때, 그 왕국의 운명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내륙에서는 셀주크 튀르크가 위협했고, 남쪽에서는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가 끊임없이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이때 라마(Ramla) 오늘날 이스라엘 벤구리온 국제공항 부근의 로드 시이다. 예루살렘과 지중해 항구 야파(Jaffa)를 연결하는 관문이었으며, 이곳을 지키는 것은 왕국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1101년부터 1105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라마 전투는 바로 그 불안한 왕국의 심장을 두드린 사건들이었다.

1101년 9월 파티마 왕조의 대재상 알-아프달 샤한샤(Al Afdal Shahanshah)는 그의 아들 샤라프 알-마울라(Sharaf al Maula)를 사령관으로 선두에 세웠다.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보낸 대군의 병력은 약 20,000명에 이르렀다. 이에 맞선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의 병력은 2천여 명에 불과했다. 극심한 전력 차이를 극복한 것은 보두엥 1세의 전술이었다. 십자군의 중무장 기병을 중앙으로 한 전술은 적중했다.

보두엥 1세는 라마 근처 평원에서 적을 기습했고, 수적 우위를 가진 파티마군은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십자군은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예루살렘 왕국의 초기 생존을 가능케 한 기적 같은 전투였다. 그러나 파티마 왕조의 위협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1102년, 파티마 왕조는 다시 대군을 보냈다. 이번에도 알 아프달(Al Afdal)이 원정을 준비했고, 예루살렘을 압박하기 위해 라마 인근에 진을 쳤다. 파티마 군의 사령관은 알 하팔리드(Al Hafalī)였다. 당시 보두앵 1세는 갓 도착한 신참 십자군 기사들과 함께 라마로 향했으나, 상황은 치명적으로 불리했다.

보두앵은 약 500~1,000명 남짓한 소수 정예를 가진 것에 비해서, 파티마군은 그 10배 이상이었다. 전투는 곧 십자군의 참패로 이어졌다. 많은 기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보두앵 자신도 간신히 탈출해 야파 항구로 몸을 피했다. 만약 그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예루살렘 왕국은 그만큼 위태로웠다.

1105년, 파티마 왕조는 세 번째로 라마를 공격했다. 이번에도 대재상 알 아프달의 군대가 북상했고, 샤라프 알 마울라가 전투를 지휘했다. 십자군은 또다시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보두앵 1세는 서방에서 도착한 제노바 함대와 연합할 수 있었고, 십자군 병력도 전보다 안정되게 조직되었다.

라마 근처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파티마군은 대규모 기병 돌격을 퍼부었지만, 십자군의 중기병과 보병 방어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마침내 십자군이 반격을 가하자, 파티마군은 대패하며 퇴각했다. 이 승리로 예루살렘 왕국은 최소한 몇 년간은 파티마의 직접적 위협을 면할 수 있었다.

라마에서 전투들은 십자군 초기 왕국의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라마는 단순한 전투의 무대가 아니라, 예루살렘 왕국의 생존을 결정짓는 시험장이었다. 패배와 승리가 교차하는 이 세 차례의 전투는, 신생 왕국이 어떻게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거울이 된다.

십자군의 트리폴리 공략과 베이루트 함락

예루살렘 왕국은 세 번에 걸친 파티마 왕조와 전쟁을 통해서 힘들게 왕국을 지키고 있었다. 예루살렘 왕국과 안디옥공국, 에데사 백국은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이슬람 세력과의 대립 속에서 생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십자군 국가인 트리폴리 백국이 탄생했고, 동시에 예루살렘 왕국은 해안 도시 베이루트를 확보하며 전략적 기반을 강화했다.

트리폴리(현 레바논)는 예나 지금이나 지중해 연안의 요충지로, 항구 도시이자 상업의 중심이었다. 제1차 십자군 때부터 툴루즈 백작 레몽드 드 생질(Raymond de Saint Gilles)은 트리폴리 확보를 목표로 삼았으나, 성이 견고하고 지원이 부족해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1105년 레몽드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베르트랑이 뒤를 이어 공략을 준비했다. 1109년,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와 안디옥의 보에몽드, 에데사의 조셀랭 등의 십자군 지도자들이 연합하여 트리폴리를 포위했다. 결국 트리폴리는 1109년 함락되었다. 이름은 트리폴리 백국(County of Tripoli)으로 십자군 제후의 영토가 되었다.

트리폴리 백국은 십자군 국가 중 마지막으로 세워진 네 번째 국가였으며, 예루살렘 왕국과 안디옥공국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또한 지중해 해상무역을 통하여 십자군 국가들의 경제적 기반을 넓혀주었다.

트리폴리 함락 다음 해,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는 북쪽으로 시선을 돌려 베이루트(Βηρυτός, Beirut)를 공략했다. 베이루트는 트리폴리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한 항구로, 이 도시의 확보는 해안선 전체를 연결하는 전략적 완성을 의미했다.

1110년, 보두앵은 베네치아 함대의 지원을 받아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공격을 전개했다. 파티마 왕조의 수비군은 저항했지만, 해상 봉쇄와 십자군의 집중 공격 앞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베이루트는 1110년 여름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십자군은 지중해를 통한 보급로와 유럽과의 연결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이는 예루살렘왕국의 존속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트리폴리 공략과 베이루트 함락은 십자군 초기 국가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였다. 두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이었다. 그것은 십자군 국가들이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뿌리내리고, 서방 세계와의 연결망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동시에 십자군 국가들이 지중해 연안 중심의 좁은 영토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뿌리 깊은 취약성, 즉 내륙을 차지하지 못하고 해안에 매달린 구조적 한계도 이때부터 더욱 분명해졌다.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는 이미 아르수프(Arsuf), 카이사리아(Caesarea), 아크레(Acre), 하이파(Haifa), 베이루트(Beirut) 등 지중해 연안을 점령하면서 유럽과의 보급로를 강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몇몇 중요한 항구 도시, 특히 시돈(Sidon) 오늘날 레바논 사이다 항구는 파티마 왕조와 무슬림 세력의 손에 남아 있었다. 시돈은 지중해 무역의 거점이자, 십자군 왕국을 위협할 수 있는 해상 기지였으므로 반드시 함락시켜야만 했다.

1110년 가을, 보두앵 1세는 강력한 해상 지원군을 얻게 되었다. 노르웨이의 왕 시구르드 1세(Sigurd I Magnusson)가 성지 순례 차원에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도착한 것이다. 이 노르드인(바이킹 후손) 함대는 이미 지중해 곳곳에서 무슬림 세력을 공격하며 내려온 상태였다.

보두앵은 시구르드의 함대와, 또한 베네치아·제노바·피사 등 이탈리아 해상 도시국가의 함선을 연합한 연합함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바다를 봉쇄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동시에 육지에서는 예루살렘군이 성을 포위했다.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 공략이 이루어지자, 시돈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1110년이 지나기 전에 시돈은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시돈 함락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베이루트와 티레(Tyre) 사이의 연안 도시를 장악하며 해안선 확보를 거의 완성했다. 북유럽까지 십자군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은 십자군 운동이 지중해 세계를 넘어 유럽 전역에 파급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시구르드 왕의 참여는 정치적·종교적으로 큰 상징성을 지녔다.

시돈은 상업 도시로, 이후 제노바 상인들에게 많은 특권이 주어졌다. 이는 십자군 국가가 서유럽 상업 네트워크와 더 밀접히 연결되는 기초를 마련했다. 시돈 함락은 단순한 성 하나의 점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십자군 국가가 해안 지중해 무역로를 장악하며 국가의 기반을 강화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또한 노르웨이 왕의 직접 참전은 십자군 운동이 전 유럽 기독교 세계의 공동 사업임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이슬람세력들로 부터 언제든지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보두앵 1세의 죽음과 예루살렘 왕국의 위기

예루살렘 왕국의 초기 역사에서 보두앵 1세는 십자군의 예루살렘 왕국을 정치적 기초를 다진 군주로 평가된다. 그는 십자군 지도자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동생으로, 형이 성묘의 수호자라는 종교적 칭호를 사용한 것과 달리 명확히 왕(rex)이라는 칭호를 받아들였다. 이는 예루살렘 왕국이 단순한 성지 점령을 넘어, 서유럽 봉건 군주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후사도 없이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국에 커다란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다.

보두앵 1세는 왕위에 오른 이후, 앞서 이야기 했듯이 레반트의 해안 도시들을 정복하여 유럽과 교통의 통로를 확보했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에 대한 원정과 전쟁은 그가 왕이 된 후 일상적이었다.

1118년 그는 이집트 원정을 떠났다. 시나이 반도를 통과하던 중 병에 걸렸다. 빌름스 전승기록(William of Tyre)에 따르면 그는 심한 열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병의 정체는 이질(dysentery)이나 말라리아 혹은 전염병으로 추정된다. 그는 시나이 반도의 알아리시(Al Arish) 근처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성묘 교회에 안장되었다.

보두앵 1세는 자식이 없었고, 명확한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게 쉽게 죽을 줄 몰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곧바로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하였다. 한편에서는 그의 형 에우스타시우스 3세(Eustasius III)가 서유럽에서 합법적 계승자로 거론되었다. 십자군 내부에서는 실질적으로 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물을 원했다. 그래서 에데사 백국의 군주 보두앵 훗날 보두앵 2세이었다.

결국 예루살렘 귀족들은 보두앵 2세를 왕위에 추대한다. 이 결정은 단순히 혈통적 명분보다 군사적 경험과 정치적 역량을 중시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 계승이 당시 유럽의 봉건적 혈통 원칙보다 귀족 합의(consensus baronum)에 크게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보두앵 1세의 죽음은 예루살렘 왕국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정복과 확장의 군주였으나, 후계자 부재는 왕국의 불안정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보두앵 2세의 즉위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게 한 정치적 합의의 산물이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존속을 가능케 했다. 즉 보두앵 1세의 죽음은 확장기에서 방어와 제도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형성한 사건이었다.

보두앵 2세와 방어적 군주로서의 통치

이 가운데 보두앵 1세의 사후 왕위에 오른 보두앵 2세는 전임자인 보두앵1세와 달리 정복과 팽창보다는 방어와 균형을 통해 왕국의 안정을 추구했다. 보두앵 2세의 치세는 본질적으로 방어적 성격을 띠었다. 그는 셀주크와 파티마 왕조의 반복되는 공격 속에서 국경 방어에 주력했다. 1125년 모술과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셀주크 군대가 시리아 북부 아조트(Azaz) 알레포 북쪽의 요충지를 포위하자, 십자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벌인다.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 안디옥 공작 보에몽 2세, 트리폴리 백작 퐁스(Pons), 에데사의 요슬랭 1세 등 주요 군주들이 연합했다. 약 1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모술의 군주 아크손코르 알부르수키(Aq Sunqur al Bursuqi)의 군대, 약 2만 명의 군대가 동원된, 전투에서 십자군국가들이 대승을 거두었다.

십자군은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이 승리는 십자군 국가들에게 큰 사기 진작을 주었고, 보두앵 2세의 지도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단순한 전투 승리에 머물지 않았다. 이 시기 보두앵 2세는 프랑스 귀족 위그 드 파앵(Hugues de Payens)이 설립한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과 같은 신흥 군사·종교 조직의 성장을 적극 후원하였다.

기사단은 성지 순례자 보호를 명분으로 등장했으나, 곧 십자군 국가들의 상비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보두앵 2세의 지지는 왕국이 제한된 인구와 자원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만든 제도적 전환점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단순한 점령지가 아닌, 중세적 군사 국가로 재편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보두앵 2세는 또한 십자군 국가들 사이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중심적 지위를 확보했다. 그는 안디옥 공국의 내분에 개입하여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문을 넘어선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의 딸 멜리장드(Melisende)와 앙주의 백작 풀크(Fulk d’Anjou)와의 결혼은 단순한 왕위 계승 문제가 아니었다. 서유럽 유력 귀족 가문과의 예루살렘 왕국간의 동맹을 의미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고립된 국가가 아니라, 서방과 긴밀히 연결된 정치적 실체였음을 보여주었다.

보두앵 2세의 통치는 예루살렘 왕국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보두앵 1세가 정복과 팽창을 통해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면, 보두앵 2세는 방어와 제도화를 통해 그 기반을 안정시켰다. 공격보다도 더 안정된 수비를 말이다. 마치 이탈리아 축구처럼, 그의 통치는 화려한 영토 확장은 없었다. 성전 기사단 지원, 귀족 합의에 기반한 통치, 외교적 동맹 체결 등을 통해 왕국의 장기적 존속을 더욱 가능하게 만들었다.

즉 보두앵 2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수호자적 군주’라 할 수 있다. 그는 위기의 시대에 군사적 지도력과 정치적 균형 감각을 발휘하여, 왕국을 단순한 십자군 거점에서 하나의 국가적 실체로 이끌었다. 그의 리더십은 십자군 국가들의 생존 전략 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으며, 후대의 군주들에게도 중요한 유산으로 작용하였다.

풀크의 즉위와 이슬람의 반격 그리고 2차 십자군의 서막

보두앵 1세와 보두앵 2세의 통치기에 왕국은 공격과 수비를 통해 기반을 다졌으나, 1131년 보두앵 2세가 사망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의 뒤를 이은 보두앵 2세의 사위 풀크는 멜리장드와의 결혼을 통해 왕위에 오른 서유럽 출신 군주였다. 현장의 십자군출신이 아닌 서유럽 도련님의 즉위였다. 풀크가 왕이 된 이후 십자군 국가들의 공격이 멈춘다. 대신 이슬람세계가 공격을 시도한다.

풀크는 안주(Anjou) 출신의 강력한 봉건 영주로서, 군사적 경험과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즉위 초반부터 왕비 멜리장드와의 권력 분점 문제로 귀족들과 갈등을 겪었고, 이는 왕권 강화에 제약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크는 왕국 방위를 위해 북쪽 국경과 안디옥 공국 문제에 집중하였다. 그는 특히 1130년대 이후 알레포, 모술 등지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이슬람 장군 장기(Zengi)에 대응해야 했다.

1137년 일어난 바르인 전투는 단순한 국지전이었으나, 전략적 의미는 컸다. 알레포의 무슬림 장군 자파르 앗딘(Jawali al Din)이 십자군 세력을 공격해 방어적 입장으로 몰아넣은 사건이었다. 이전까지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이용하여 주도권을 쥐었으나, 이 전투는 무슬림 지도자들이 점차 세력을 통합하며 조직적 대응을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십자군 국가들이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는 시발점이었다.

이슬람 반격의 절정은 1144년 인지(Edessa) 함락에서 드러났다. 모술의 아타베그 장기(Imad ad Din Zengi)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정치적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무슬림 세력을 규합하였다. 그는 십자군 국가 중 가장 취약했던 에데사 백국을 목표로 삼았다. 에데사는 최초의 십자군 국가로 상징적 의미가 컸으나, 내부적으로 인구가 적고 방비가 허술했으며, 안디옥, 예루살렘으로부터 원활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결국 1144년 12월, 장기의 군대는 인지를 함락시켰고, 에데사 백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는 십자군 국가 중 최초의 멸망 사례로, 기독교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에데사의 함락 소식은 곧바로 서유럽으로 전해졌다. 교황청은 이를 단순한 국지적 패배가 아니라, 기독교 세계 전체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규정하였다. 특히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는 1145년 칙서를 발표하여 새로운 원정을 호소했다. 이는 프랑스의 루이 7세(Louis VII), 신성로마 제국의 콘라트 3세(Conrad III)등이 참여한 제2차 십자군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역학 구도는 달라지고 있었다. 무슬림 세계는 장기를 중심으로 점차 정치적 통합을 이룩해가고 있었고, 십자군 국가들은 내부 분열과 유럽 본토와의 거리라는 구조적 한계에 시달렸다. 1130~1140년대는 십자군 전쟁사의 분수령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승리 이후 유지되던 낙관적 기세는 이 시기를 거치며 무너졌다. 바르인 전투(Battle of Barin)는 십자군의 공세적 우위가 끝나고 있음을 알렸고, 1144년 에데사의 함락은 십자군 국가들이 더 이상 신의 절대적 보호를 받는 존재가 아님을 드러냈다.

이 사건은 십자군 운동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서유럽 사회는 위기의식 속에서 제2차 십자군을 결집했지만, 무슬림의 정치적·군사적 반격은 이후 누르 앗딘(Nūr al Dīn), 그리고 살라딘(Salāh al Dīn)으로 이어지는 장기적 흐름의 시작이었다.

이제 다시 영화의 대사로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버지 고드프루아가 죽음의 순간 아들 발리앙에게 남기는 서약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주제를 압축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와 맞서 싸우라. 진실을 말하고, 신앙을 지키며, 언제나 정의를 위해 행동하라.’

이 대사는 단순히 한 기사의 덕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이념을 넘어선 보편적 인간의 윤리를 제시한다. 영화가 다루는 시대적 배경이 십자군 전쟁이라는 종교 갈등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지는 신앙의 우위나 승리의 정당화를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생명과 존엄, 그리고 공존이라는 보편 가치를 더 크게 강조한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발리앙이 반복해서 말하는 문장이다.
‘예루살렘은 돌과 벽일 뿐, 진정한 가치는 사람에게 있다.’

이 말은 성지라는 물리적 공간이나 종교적 상징보다,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선언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종교적 이념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의 모습은 또 다른 대비를 보여준다. 한쪽은 나병에 시달리며 병든 육체를 지녔지만 관용과 정의를 잃지 않은 왕이었고, 다른 한쪽은 적국의 지도자이지만 전쟁 속에서도 자비와 명예를 지켰다. 이 두 인물은 시대적 한계를 넘어선 이상적 지도자 상으로 제시된다. 반대로, 권력욕과 탐욕에 휩싸여 전쟁을 부추기는 귀족 기 드 루지냥은 인간 사회의 추악한 면을 상징한다.

결국 킹덤 오브 헤븐은 종교 자체가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 그리고 그 선택 속에 어떤 도덕성을 담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너무도 잔혹하고, 종교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폭력은 너무나 무겁다. 단순한 역사 재현으로는 관객에게 오직 절망 만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그 속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발굴하려 한 것이 아닐까. 갈등과 전쟁이 끝나지 않는 오늘의 세계에서, 이 영화는 과거를 빌려와 종교가 아닌 인간성, 파괴가 아닌 공존이라는 교훈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킹덤 오브 헤븐은 역사 영화이자 동시에 윤리적 선언문이다. 현실은 언제나 모호하고 불확실하며, 때로는 희망조차 찾기 어렵지만, 인간의 선택 속에는 여전히 정의와 관용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큰 울림이다.

표지사진: 트리폴리의 십자군 요세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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