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도 집시가 아닌 로마라고 기록해야 옳지만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서 집시라는 표현으로 기록한 것을 모든 로마 형제자매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처음 그리스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 그리스의 성지와 그리고 사역 현장을 기록하는 것이 목표였다. 글을 쓰다 보니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아서 나 스스로도 당황을 하곤 했다. 그래도 부족한 사람의 글을 읽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면서 마지막으로 내가 섬기는 종족의 이야기로 마치게 되어 감사할 뿐이다.
[미션저널] 로마족(집시) 두 번째 이야기 » 김수길 선교사 » 그리스 이야기(36회) » “망가바 켈릴라 헴 길야벨라”(Mangaba Kelila Hem Gilyabella, 나는 춤추고 노래 부르기를 원한다.)
아내와 내가 27년 전 그리스에서 로마(집시) 사역을 시작할 때는 주로 알바니아에서 그리스로 넘어온 알바니아계 집시였다. 그리스에는 1990년대 알바니아 내전과 경제적 혼란으로 그리스에 온 집시종족들과 2차 대전을 전후로 해서 루마니아에서 온 집시 족 그리고 1920년대 터키와 전쟁을 전후로 해서 터키에서 온 집시종족, 그리고 오래전부터 살아온 집시종족이 그리스에 살고 있는 집시 족들이다. 쉽게 말해서 모두가 그리스에 정착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자연과 환경이 글로써 표현이 부족할 정도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땅에 이들이 사는 곳은 쓰레기와 오물이 흘러넘치는 곳이다. 아내와 나는 처음 집시 마을을 찾으러 갈 때 면 차의 창을 열고 숨을 쉬면 멀리서도 풍겨져 오는 냄새를 맡으며 마을을 찾아가면 숨겨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떠도는 부평초처럼 정처 없는 그들의 삶이라고 인정했지만, 처음 그들의 삶이 내게는 너무도 충격적으로 부딪쳐 왔다.
열 네 살 여자아이가 만삭의 몸으로 을씨년스러운 날 구걸하는 것을 본 이후로는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이들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열다섯 살의 남자 아이는 그의 아이가 추울까 바 허름한 겉옷 속으로 아이의 손을 꼭 넣고 오는 것을 보면 이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외적인 모습에 한 사람의 한 인간의 생애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리스 집시 생활 ◙ Photo&Img©ucdigiN
10대 초반의 조혼과 근친혼으로 농아와 맹아, 정서 장애 발달 현상을 보이는 장애 아이들이 많다. 그들의 땅에는 그들만의 언어와 풍습과 생명을 살아냄만이 의라는 다른 법을 갖고 있다. 그들은 거기에 갇혀서 산다. 그것이 전부이며 진리라고 믿으며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 누가 나에게 원죄의 모습을 볼 수 있냐고 묻는 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이들의 소개 할 것 같았다.
초창기, 집시 마을을 찾아갈 때마다 우리를 조롱하던 그들을 보고, 바보처럼 웃었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았다. 사람들이 버린 험한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사납게 헐키는 바람들만이 주인인 습한 그 땅. 그곳에서 교회를 개척해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현지어를 배우던 시절부터 교사 출신 아내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거리 학교를 열어 교육 계몽을 도왔다. 그런 환경에 맨발로 뛰어 다니던 아이들을 위해 기초 의료사역과 굶주리는 그들을 위해 물품이 생길 때마다 구제사역도 병행하였다. 글을 읽을 줄 모르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집시들을 위해 찬양 사역을 육성하여 500 여 곡의 현지어, 집시어 찬양악보를 단기 사역자들의 도움으로 그려서 보급하였고 사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 청년들의 도움으로 그리스, 집시어 찬양 시디를 5 집까지 제작하여 많은 집시 마을에 수천 장을 보급하였고 다른 집시 교회에도 지속적으로 나누었다. 이것들은 믿음이 성장하도록 할 뿐 아니라 교회가 없던 집시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기 전, 거짓의 견고한 진을 허무는 강력한 병기 역할을 했다. 또 문맹자인 집시들을 위해 듣는 시디 성경과 어린이 성경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급하여 진리의 실체가 그들에게 가까이 있도록 도우고 있다. 왜냐면 집시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망가바 켈릴라 그리크 길야벨라 Mangaba Kelila Hem Gilyabella”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춤추고 노래 부르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이다. 이들의 표현처럼 대부분의 로마들은 춤추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가 집시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영화라는 간접 경험 일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들은 대부분 점치는 일이나, 마법이 주를 이루는 주술적인 직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음악과 춤을 공연해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기도 한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집시들의 이런 직업은 그들이 유랑생활을 하고, 탄압을 받았던 역사와 연관되어 있다. 즉, 이들이 여러 지역을 유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름대로의 생활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는 마을주민들이 요구하는 위락을 제공하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주술 및 마법부리기를 그들의 생업으로 삼을 수 밖 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의 생업이 놀이 문화를 형성하고 전파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당시 유럽의 농노제 사회에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한걸음 나아가서는 유럽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런 점은 러시아 문학이나 프랑스의 소설들이 집시들을 유대인들처럼 이기적이지 않고 음악적이며 자유로운 민족으로 묘사한 점에서 이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영국의 DH 로렌스는 〈집시와 처녀들〉에서 집시들을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망가바 켈릴라 그리크 길야벨라” 지금부터 26년 전 아내가 간이 학교를 열어서 집시 아이들에게 복음송을 가르칠 때이다. 당시 6살도 안되었던 로라는(이름을 기록하여 미안하지만,,)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마도 세례요한의 목을 원하며 추었던 살로메의 춤이 이렇게 선정적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린 로라의 춤 솜씨는 성인 댄서를 무색할 정도로 춤을 추었다. 이 꼬마 집시의 춤을 보면서 스페인의 기마병 돈 호세를 한순간에 불살라버린 그래서 그를 탈영까지 하게 만들었고, 그녀를 사랑하기에 스스로 집시가 되게 하였던, 카르멘의 플라멩고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플라멩고의 기원과 약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할 수 있다. 일단의 집시 그룹이 지금의 터키 남부를 경유하여 이집트를 거쳐 오늘날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 들어갔다. 처음 이들이 이 지역에 정착할 당시에는 여러 문화를 수용하여 문화적 융화를 도모했던 무어인이 세운 나스르 왕조였다. 당시의 집시들은 자신들을 Roma-Calk(평원의 도망자)라고 소개하였다. 그래서 “플라멩꼬”의 어원은 아랍어인 “felag (농부)”와 “mengu(도망자)”라는 단어의 잘못된 발음에서 온 것이라 여겨진다고 한다. 그리고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안달루시아의 집시”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여 지기 시작했다.
1492년 스페인 군대에 무어 왕조가 무너지고 로마 카톨릭은 유대인과 회교도 그리고 집시들을 약 200년 동안 박해 한다. 산속의 토굴과 광산에서 그리고 농노로 고달픈 삶을 사는 집시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둘러 앉아 그들만의 음악 축제를 벌이는데, 여기서 쓰였던 음악이 바로 플라멩고였다.
이것은 노래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삶에 대한 절규였고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빼앗기고 착취 당하는 자들의 슬픔과 한이 서린 부르짖음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에 대한 핍박도 완화되고 집시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도 점차 생겨났다. 조금씩 음악적 교류가 이루어졌고 집시의 음악을 수용하고 해석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플라멩고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낮 집시문화로 괄시받던 플라멩고를 스페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한 사람은 1913년 바르셀로나의 집시촌에서 출생한 까르멘 아마야 (Carmen Amaya)이다. 글조차 읽지 못했던 아마야는 플라멩고를 배운 적도 없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조상들의 플라멩꼬를 전수 받아 예술로 승화시켰다. 1965년 세상을 떠났지만 까르멘 아마야가 심겨놓은 플라멩꼬는 집시의 음악이 아닌 스페인 최고의 관광 상품이자 전 세계를 향해 내어 놓을 수 있는 국민적인 예술이 되었다.

그리스 집시 결혼식 ◙ Photo&Img©ucdigiN
그러나 집시라고 해서 모두가 카르멘처럼 플라멩고를 추고 노래를 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역 초기 나의 동역자인 간띠 형제는 플라멩고는 전혀 모른다고 했다. 오히려 내가 터키에 간다고 하니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터키 가수의 테이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왜냐면 그의 노래가 너무 좋다고 하였다. 한번 들어보니 전형적인 아랍문화권의 노래였다.
현재 그리스에서 활동하는 집시 출신 가수로는 소띠스 볼라리스(Σώτης Βόλαρης), 마키스 크리스토(Μαρκήσιος Χρήστο), 둘로스(Ντούλος), 자파니스 멜라스(, Ζαπάνης Μελάς),니꼴라 로마노(Nicola Romano),니쪼 로마노(Nizzo Romano)외에도 많은 집시가수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노래는 스페인 계통의 노래가 아니라 언 듯 들으면 터키노래가 아닌가 하는 터키풍의 노래이다. 아마도 이곳 발칸 반도가 오랫동안 터키에 지배당했던 역사의 산물이 아닌가 한다. 어찌되었던지(망가바 켈릴라 그리크 길야벨라,,,) 터키풍이나 스페인 스타일이든 이들은 어느 민족보다도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민족인 것이다.
동유럽에서 집시 음악의 원형은 헝가리 민요 300여 편에서 찾을 수 있다. 집시 음악과 헝가리 민속 음악은 둘로 하나를 만든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18세기 말 헝가리 군대가 집시 악단을 앞세워 병사들을 모집 한 것이, 이후에 헝가리 음악은 곧 집시 음악으로 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상상력을 무한대로 펼친다 는 뜻의? 광시곡? 자체가 집시의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리스트의 “헝가리안 광시곡”, 브람스의 “헝가리안 무곡”등이 집시풍의 헝가리 음악으로 큰 족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러시아의 집시들은 헝가리에서처럼 부유한 지식층의 후원을 받으면서 러시아에 새로운 음악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집시 고유의 음악보다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농민 음악을 많이 다루었다. 좀 더 많은 자료가 없어서 현재 동유럽에서 활동하는 집시 출신 음악가들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집시들은 그들의 문화를 살고 있는 지역에 접목시켜 독특하고 이국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유럽에서는 성악과, 바이올린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타와, 템포 빠른 춤으로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달랬다. 사실 오늘날도 그 예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차별과 서러움을 당하고 있기에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피울음의 표출 인 것이다.
우리는 집시들이 영화 속의 아름다운 에스메랄다가 아닌 다산과 심한 노동으로 너무도 빨리 노화 되어가는 집시여인들의 삶과, 플라멩고의 정열적인 리듬 속에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그들의 춤과 노래를 이해 하리라고 본다.
(이번 글에도 집시가 아닌 로마라고 기록해야 옳지만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서 집시라는 표현으로 기록한 것을 모든 로마 형제자매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처음 그리스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 그리스의 성지와 그리고 사역 현장을 기록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글을 쓰다 보니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아서 나 스스로도 당황을 하곤 했다. 그래도 부족한 사람의 글을 읽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면서 마지막으로 내가 섬기는 종족의 이야기로 마치게 되어 감사할 뿐이다. 이제 그리스 이야기를 마치면서 다시금 감사를 드린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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