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저널] 신비주의 선동가와 초기 유대인의 홀로코스트(Holocaust)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15) »
교황 우르바누스 2세나 우르바누스 2세 에게 ‘우리를 도와 달라고’ 도움을 요청한 알렉시우스 1세 등은 자신들은 당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할 정도의 작은 생각들이 나비효과가 되어 역사에 나타났다. 이상하리만큼 확대되었고, 이것은 그들이 결코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 갈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모여진 사람들은 군대가 되었고, 그들의 상징적인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지난 호까지의 이야기이다.
이제 이 십자군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 또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개념으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왔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간 이야기이지만 1차 2차 걸프 전쟁이 일어날 즈음 당시 이라크의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과의 전쟁은 성전이며 현대판 십자군과의 전쟁이라고, 아랍 여러 나라들의 전쟁 참여를 부추겼다.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반 아랍세력을 십자군이라고 부른 것은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십자군의 이름 만큼은 아랍지역에서 쉽게 반응할만한 적대적인 표현임에는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필자가 처음 십자군 이야기를 시작할 때 밝힌 것처럼 정말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군 전쟁의 참상과 비인간적인 문제는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라는 명칭 앞에 십자군 전쟁은 침략이 아닌 성지회복을 위한 신앙으로 뭉친 군사적 원정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은 일반적인 이성으로 생각 할 수 없는 살인과 강간, 방화, 등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들을 우리에게 맨 얼굴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해 놓았다. 특히 종교적인 옷을 입은 광신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범한 범죄의 기록들 앞에 간절한 회개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은둔자 피에르라고 불린 사람이 모집한 민중 또는 빈민 십자군의 행위들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Contents
은둔자 피에르 (Pierre l’Ermite)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프랑스 산악 도시인 클레르몽에서 성지인 예루살렘 수복을 위한 거룩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 때 은둔자 피에르도 이곳에 있었다. 고한다, 피에르에 대한 출생 정보는 정확하지 않다. 좌우간 은둔자 피에르는 당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자신의 꿈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해라는 말을 했다고 이탈리아 지역과 프랑스 전역을 다니면서 십자군 모병을 설파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황의 설교보다도 더 설득력이 있었다고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은둔자 피에르는 교황이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해서는 기록이 없기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간추려 본다면 그는 1050년경 태어났다고 한다. 정확하지 않지만 그는 리옹 부근의 에베르뉴(Auvergne) 출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클레르몽 출신인 기베르 드 노장(Guibert de Nogent)은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도사이자 역사학자 그리고 가톨릭 신학이며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한 저자이다.
이 사람의 저서에 피에르가 제법 자세하게 기록되지만 이 또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의 주장은 피에르는 아미엥 출신이며 젊은 시절에는 성직자를 꿈꾸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가 아닌 군인이 되었고, 전투에 참여하여 적의 포로가 된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베아트리체 드 루시(Beatrice de Russi) 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 3년 만에 그의 부인이 죽자 그때부터 그는 세상을 등진 은둔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은 비잔틴 제국 알렉시우스 1세의 딸이자 서양 최초의 여성 사학자로 인정을 받는 안나 콤니니(Άννα Κομνηνή)가 비잔틴 제국의 관점으로 본 십자군과 자신의 아버지 알렉시우스 1세의 통치역사를 기록한 알렉시아드 (Alexiad)에는 은둔자 피에르는 십자군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성지 순례를 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지를 정복한 셀주크 튀르크의 반대로 순례를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진위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피에르에 관한 모든 말들을 종합해 보면 피에르가 “은둔자”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성격이나 생활 방식이 외부와 거의 접촉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살아가는 모습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은둔자”라는 별명은 일반적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은둔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에, 피에르가 그런 생활을 선택하거나 그런 특징을 갖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붙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떤 이들은 은둔자(l’Ermite)가 그의 성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억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피에르가 왜 십자군을 모집에 열성적이 되었는지는, 여러 이유들 중 그의 종교적 열정을 꼽을 수 있겠다.
십자군은 외향적으로는 종교적 신념과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모집되었기 때문에, 피에르 역시 신앙심이나 종교적 의무감에서 비롯되어 십자군을 조직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당시 영토 방어 또는 교회 사역의 확장, 또는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가 은둔생활을 들어가기 전 군 생활을 한, 경험은 전쟁의 영광과 모험심 때문에 참여를 독려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끄는 자들의 힘을 증명함과 동시에 권력이나 명성 또한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십자군을 모집했을 수 도 있지 않을 까?
은둔자 피에르의 신앙과 민중 십자군(People’s Crusade)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의 신앙심이 아니었을 까 한다. 다시 기베르 드 노장(Guibert de Nogent)의 기록에 의하면 피에르의 외형적인 모습은 수도를 오래한 사람답게 바싹 마른 몸매에 항상 맨발의 상태로 다녔다. 그리고 양털로 짠 검은색의 수도복과 모자가 둘러진 망토를 겉옷으로 입었다. 말이 아닌 당나귀를 탄체로 원근 각지를 다니면서 십자군에 가입하라는 연설을 했다. 외모에서 풍기는 카리스마와 그의 뜨거운 설교는 많은 지원자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특히 도시 기층빈민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뒤쫓았다. 지주들로부터 힘들게 살았던 빈농들 역시 도시빈민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설교를 듣는 즉시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고 한다.
피에르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게 주는 계시라고 설교를 할 때면 이제는 빈민과 농민이 아닌 영주들과 지주들 그리고 귀족들까지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더 나아가 정신병환자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 나음을 받았고, 흉악한 범죄자들 역시 피에르의 설교를 들으면 순한 양이 되어 십자군 무리에 함께했다고 한다.

십자군 운동 그림과 은둔자 피에르 (Pierre l’Ermite)
그럼 피에르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으로 준 계시는 무엇인가?
“성지를 정복한 튀르크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수복하라”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계시의 말씀이라고 했다. 피에르는 군중들에게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여 그곳에서 성경의 예언과 전통에 따라 라틴계와 그리스계 즉 서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하나가 되어 사라센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적그리스도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는 피에르의 설교에 고무된 군중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를 쫓은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길을 나선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어쩌면 식상한 십자군 이야기에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이미 피에르는 당대의 최고 인기인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만 듣고도 사람들은 모여들었다고 한다. 가장 핫한 연예인(Entertainer)이었다.
고티에 생자부아(Gautier Sans- Avoir)의 민중 십자군 선봉대
이제 피에르를 추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의 무리는 교황의 권고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교황 우르누스 2세는 십자군 원정을 1096년 8월 15일 성모 승천일에 각 지역에서 출발하기로 선포 했다. 그러나 피에르를 따르는 사람들은 8월 15일 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이유는 피에르의 열성적인 설교에 몰려든 추종자들은 다시 옛날의 농민으로 또는 도시빈민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기에 8월까지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로 생각했다.
은둔자 피에르는 그의 추종자들과 4월에 프랑스를 출발하여 독일 서부 지역으로 들어갔다. 피에르는 들리는 지역마다 연설을 하였다. 그의 연설에 감동받은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사실 수많은 민중 십자군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기본적인 군사 훈련은 고사하고 마치 다른 사람들이 가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리에 휩싸여서 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기에 갈등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갈등 등을 해결할 지휘부나 중간 간부들도 재대로 구성되지 않은 채 출발한 것이다.
무리의 대부분은 농민과 도시빈민들이었기에 이들을 가리켜서 민중 십자군(People’s Crusad e)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 중 고티에 생자부아 같은 소수의 귀족과 기사들이 있기도 했다. 가난뱅이 또는 무일푼의 발터(Walter Penniless)로 불리던 프랑스 귀족 출신 고티에 생자부아(Gautier Sans- Avoir)의 출신지는 파리 근교의 포아시(Poissy)이고 그는 이곳의 영주라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 프랑스 사람들을 이끌고 은둔자 피에르는 1096년 4월 12일 쾰른에 도착했다. 쾰른에서 피에르는 사람들을 좀 더 모병하고 져 했다. 하지만 많은 민중들은 기다리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래서 고티에 생자부아의 지도아래 먼저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출발했다.
민중 십자군에 참여한 다른 귀족으로는 네슬레 백작 드로고(Nestles greiva Drogo), 딜링겐 키부르크 백작 하르트만 1세(Hartmann I, Dillingen-Kyburg greiva), 마를과 라 페르의 영주이자 아미앵 백작 토마스(Marl and La Pere, Count Thomas of Amiens)와 밀룬 자작 목수 윌리엄(William the Carpenter, Viscount Milun) 등과 같은 귀족출신의 인물들도 있었다. 이들 귀족들은 은둔자 피에르의 연설에 감화를 받아서 참여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라이닝겐의 백작 에미코 (Countess Emiko of Leiningen)는 라인라트의 유대인 학살의 주도자로 악명을 떨친 인물도 있다.
중세 유대인의 고리대금업
오래전부터 유럽은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은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유럽 사회 전반에 걸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얽혀왔다. 중세 교회법에서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했다. 이유는 신명기 23:19-20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독교인들 사이의 고리대금은 죄로 간주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법은 유대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기독교인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유대인은 대부분의 토지 소유와 길드(조합) 가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금융, 특히 고리대금업이 유대인 공동체의 주요 생계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향해서 고리대금업자라는 타이틀은 당시 금리는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높았다. 일반적으로 20~50% 이상의 이자가 붙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탐욕이 아니라, 위험 부담 (박해, 채무불이행)과 직업의 불안정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왕족, 귀족, 상인, 심지어 교회에도 돈을 빌려주었다. 예를 든다면 영국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루이 9세도 유대인 대금업자들에게서 자금을 빌려 정권을 유지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은 결국 반유대주의의 제공과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일부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의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가끔 교회와 신학자들은 유대인을 탐욕스럽고 비윤리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낙인을 함께 씌웠다. 돈이 필요할 때나 아니면 페스트와 같은 질병이 창궐할 때 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살았던 당시영국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 가운데 악당들은 대부분이 유대인들이다. 막스 아이 디몬트 (Marx I Dimont)는 오래전부터 만연한 반유대주의(안티 세미즘)의 결과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악당은 샤일록이라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오직 돈 밖에 모르는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경제적 부채가 쌓이거나 정치적으로 불안할 때마다 그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1190년 잉글랜드 요크에서의 유대인 대학살, 프랑스와 스페인의 강제 추방, 흑사병 시기의 유대인 학살 등은 고리대금업과 관련된 적개심의 결과였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은 때로는 왕의 보호 아래 있었으며, 왕실 재정의 주요 자금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호는 언제나 임시적이고 정치적 목적에 따른 것이었으며, 권력자들은 때때로 부채 탕감을 위해 유대인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은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니라, 차별, 생존, 종교적 금기, 정치적 도구화라는 복합적 맥락 속에 자리한 활동이었다. 이것은 유대인을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자”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이 처했던 사회적·역사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글들을 늘어놓는다.
십자군 운동 초기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지도자들은 이들을 먹이고 이들에게 무기를 만들어줄 많은 금액이 필요했다. 필요한 금액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일반적으로 고리대부업을 운영하는 유대인 밖에 없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유대인들은 돈을 빌려주는 대신 상응하는 담보물을 요구했다. 피에르와 민중 십자군은 그들에게 담보물을 맞길 수 없었기에, 강제적으로 돈을 갈취했다. 그러나 피에르의 무리는 살인까지는 행하지 않았다. 피에르의 본진에 이어 도착한 에미코와 그의 부하들이 오늘의 독일인 신성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유대인 학살의 참극은 약 천년이지난 후 일어날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데자부 (Dejavu)라고 할 수 있겠다.
라인라트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
주도자는 라이닝겐의 백작 에미코(Count Emicho)와 그의 부하들이다. 이들은 십자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억울한 종교적 열정과 반유대주의, 약탈 욕심이 섞인 폭도 집단이었다. 이교도와 싸우려고 모인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기 전 유럽 내 비기독교인, 특히 유대인을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하고 박해를 한다. 사실 이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목적은 그들이 가진 재신이었다. 1096년 5월 3일 독일의 라인 강변의 도시인 슈파이어(Spier)의 유대인 공동체를 에미코의 부대가 공격했다. 그러나 주교들의 간곡한 호소와 설득으로 많은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에미코의 민중 십자군은 메츠, 트리에, 퀼른 에서 학살과 약탈을 진행했다.

사진 상단 왼쪽: Speyer Jewry-Court, Synagogue/ 사진 중앙: 유대인을 학살하는 십자군들 – 유대인 특유의 모자로 이들이 유대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1250년 프랑스 성경에 실린 삽화로 당시 중세 시대에 유대인 학살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사진 하단 왼쪽: Old Jewish Cemetery Mainz, “New Section” of the Cemetery/ 오른쪽: 예루살렘의 유대인
보름스(Worms), 그리고 마인츠(Mainz)는 이들 도시보다 더 큰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기 때문에 보름스의 유대인 공동체는 거의 전멸 했다. 시민들과 십자군이 연합하여 최소한 800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 마인츠의 유대인들은 다른 라인란트의 도시들에서 자행된 동족의 학살과 강제 개종을 이미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두려움과 압박감속에서 유대인들은 많은 재산을 모아서 십자군의 학살로부터 자신을 구해달라고 영주들에게 호소했다.

사진 상단 왼쪽: 보름스 대성당/ 사진 하단 왼쪽: 보름스의 유대인 회당/ 사진 오른쪽: 마인츠 역사박물관
신성로마 제국의 마인츠 대주교는 독일 가톨릭교회에 있어서 최고위 성직자(primas Germaniae)이며,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 교황을 대리한다. 이 같은 마인츠의 대주교 로타르트(Rothart)가 유대인들을 자신의 궁전에 숨긴 후, 성문을 봉쇄하고 십자군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나 마인츠의 성문역시 유대인을 증오한 사람들의 협력으로 성문은 열렸다. 주교의 군대와 에미코의 부하들과 전투가 벌어졌다. 병력 수에 밀린 주교와 군대는 패배한 후 산속으로 숨어야했고, 그다음 잔인한 학살이 일어났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살을 한다.
독일 출신 유대 율법학자이자 시인인 엘리에제르 바르 나탄 (Eliezer bar Nathan)의 연대기 (Sefer Eliezer bar Nathan)와 솔로몬 바 시몬(Solomon bar Simson)의 연대기와 는 1096년 라인란트 학살(Rhineland Massacres)에 대한 가장 중요한 유대인 측 기록이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마인츠 유대인 공동체 전체가 거의 전멸되었다. 그리고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자살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왜 이들은 자살을 택해야 했는가?
키두쉬 하솀 (קידוש השם)
키두쉬 하솀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죽음’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위해 자살(순교)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즉 키두쉬 하솀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개종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영혼의 멸망으로 인식되었다. 공동체 내부에서도 개종자는 사회적으로 추방당하거나 정신적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이슬람 공동체 (움마) 제도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주로 영주들의 보호아래 있던 부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마인츠에서도 결국 주교의 보호가 뚫렸고, 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거라면, 스스로 순수한 방식으로 죽자’는 심리도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공동체로서의 선택이기도 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매우 강한 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았으며, 개별 생존보다 전체의 신앙과 명예를 중요시했다. 집단 자살은 공동체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나중에 후손들에 의해 순교자(martyr)로 기려진다.
시인 엘리에제르 바르 나탄의 연대기는 유대인 학살과 자살을 ‘신에게 드리는 탄식과 호소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왜 이런 고통이 우리에게 임했는가? 욥의 친구들의 질문과 예레미야 애가와 같은 절규가 담긴 시적이고 예전적인 언어로 기록했다. 구체적인 숫자보다는 종말적 이미지, 성경적 은유, 고통의 상징 강조 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유대인을 “하나님의 신부”, 학살을 “혼례 날의 찢김”처럼 표현 한 것이다. 그리고 고통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서 시험과 속죄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 기록물보다‘신앙고백’에 가까운 표현으로 유대인 학살과 자살을 기록했다.
그러나 솔로몬 바 시몬의 연대기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기록한 기록물이다.
“남편이 아내를 찌르고, 부모가 자녀를 찌르고, 마지막으로 남은 자가 스스로를 찔렀다”
“그들은 살아남아 이방 신을 섬기는 수치를 당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죽음을 택했다”
마사다 에서 로마군대에 항쟁한 유대인의 기록물과 아주 습사하다. 이 기록은 좀 과장일 수 있지만, 그러나 당시 공동체가 느낀 절망과 신념의 깊이를 잘 보여준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살아있는 것이 절망일 때 가지는 감정, 절망을 넘어선 상황에서 인간이 취한 행동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십자군 운동의 시작점에서 이방인과 비 기독교인에 대한 폭력과 살인으로 쉽게 전이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나중 유럽지역 외 예루살렘 등에서 학살을 예고한 라인라트의 학살은 유럽 유대인 공동체들에게 깊은 트라우마(Trauma)를 남겼다. 이 내상(內傷)은 역사에서 지워지지도 않고 끊임없이 우리의 시야에 확대되어 나타난다.
아침뉴스에 이란과 이스라엘 상호폭격과 전쟁 상황이 도배되었다. 상황이 묘하게 오버렙 되어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필자의 글은 유대인을 옹호하는 뜻의 글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란을… .
혹자들은 십자군의 만행이라고 하면 십자군과 베네치아인 연합하여 같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 왕국의 자라시의 침략과 십자군이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한 정도 알고 있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십자군이 출병하기도 전에, 오합지졸의 집단들인 민중 십자군이 벌인 학살 등의 결과가 십자군의 미래를, 그들의 열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복음서의 말씀이… .(누가복음 6:43-45) 이번호에 다하지 못한 민중 십자군의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계속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표지 사진/ People’s-Crus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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