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라는 조금은 무거운 주제를 학문적으로 설명함보다는 이야기 형태(Story telling)로 썰을 풀면 많이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하리라 필자는 믿어왔다. 그래서 필자 글의 주제는 이야기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지난해까지 필자의 글들은 ‘그리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그리스의 지역과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풀어왔었다. 이제 그것은 내려놓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십자군 운동과 선교의 문제를 대비시켜 마치 한쪽이 찌그러진 양푼 속에 두 개의 주제를 비벼 먹는 비빔밥 같은 십자군 이야기를 말하고자 한다.
[미션저널] 십자군 이야기를 시작함에 대하여 » 김수길 선교사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1회) »
지금도 내 서재 한쪽 귀퉁이에는 내가 청년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오래된 십자군(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전 기사단) 피규어와 청동으로 만든 십자군 기념물이 자리하고 있다. 막연하게 십자군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 나의 상상력과 이상을 심어준 대상이었다. 필자가 십자군(성전 기사단)을 이상향으로 여긴 것은 이들은 기사이기 전에 수도자였고, 이들에게 요구되는 정결과 청빈 그리고 순종은 성경 말씀이 요구하는 세 가지 덕목이었고, 이것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기사도였다. 이 같은 십자군의 생활이 한때 내게는 크나큰 동경의 대상이던 것이다.
붉은 십자가에 흰옷을 입은 성전 기사단은 전사 이전에 수도사였다. 기사단에 입각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모두가 총각으로 살아야 했던 이들의 삶이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 보다는 그들이 삶이 부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랬던 내가 십자군에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이곳 선교지인 그리스에 와서이다.

그리스 방문 교황 ◙ Photo&Img©ucdigiN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2001년 5월 4일 81세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는 성치 못한 노구를 이끌고 아테네를 방문했다. 교황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성지를 수호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이 신앙의 형제들(동방정교회)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것은 비극적인 일로 심히 유감스럽다” 고 말했다. 그리고 교황은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인 65세의 크리스토 둘로스 (Christo doulos)를 면담한 후 “과거와 현재 수차례에 걸쳐 가톨릭교회의 아들과 딸들이 행실과 태만으로 그리스 정교회 형제들에게 죄악을 저질렀으니, 주께서 용서해 주소서”라고 공표했다. 크리스토 둘로스 총대주교는 “한마디 사과가 두 교회 간 모든 갈등을 해결하지는 않겠지만 미래의 공동사회를 이루는 데는 도움을 줄 것”이라는 답을 했다. 교황은 이어 “과거의 기억은 특히 고통스러운 것이며, 먼 과거의 사건은 오늘날 인류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라면서 “콘스탄티노플 약탈은 비극”이라고 말했다.
교황 바오로 2세가 그리스를 공식 방문하여 용서를 구한 것은 가톨릭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날 교황의 사과는 그리스 정교회 지도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것으로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오랜 시간 갈등과 분열을 치료하는 시간이었다. 이날 오후 영국의 BBC 미국의 CNN등 세계 유수의 방송은 ‘천년의 용서와 화해’라는 제목으로 특집 보도하기도 했다. 1054년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분리된 이후 관계가 끊겼던 양측이 1천여 년 만에 화해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이탈리아 로마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 20여 분이면 가는 곳이다. 그리스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이탈리아이다. 그러나 로마 교황의 그리스 방문은 양 교회가 분리된 이후 1천여 년 만에 처음으로 온 것이다. 교황은 2001년 5월 5일 아레오바고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스티스 스테파노풀로스(Stys Stephanopoulos) 당시 대통령과도 만남을 가졌다. 그리스 정교회 측은 스테파노풀로스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뤄진 교황의 그리스 방문을 마지못해 추인했기에 정교회 신도 사이에선 여전히 반감이 높았던 것이다. 그래서인가 교황이 그리스에 머무는 동안 각종 반대 집회와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필자는 1054년 당시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서로마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던 이유와 원인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분열이 십자군 운동과는 어떤 연관성과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은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엄마보다 예쁜 딸’이라는 슬로건으로 동쪽의 고기잡이 비자스 (Visas)사람들이 살던 비자스 지역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다. 그는 이 도시를 ‘네아 로마’(Nea Roma) 즉 새로운 로마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신하들이 역사상 어느 군주(君主)가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라는 설득으로 그 도시는‘네아 로마가 아닌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즉 콘스탄틴 대제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 도시의 태동부터 중동의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그리고 북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 주교 좌를 두었다. 초대교회 당시 다섯 개의 주교관구 중 서쪽의 로마를 제외한 네 곳의 영향력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은 동방기독교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종착역이자,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연결해 주는(Integrated Cultural) 상업의 수도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서쪽의 로마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왕정 체제와 동일한 교황 1인 단일 체제의 교회(Christemdom)로 발전해 왔기에 동방교회와는 체제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당시 기독교 세계의 동전의 양면 같았던 동로마 제국의 동방정교회와 서로마 가톨릭의 분열 원인은 무엇일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흔히들 알고 있는 원인으로는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필리오케(The Filioque Controversy) 논쟁이라 한다. ’필리오케‘라는 단어의 의미는 “성령은 아들로부터라는” 성령의 기원을 말하는 당시 신조어(라틴어)이었다.
AD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채택된 니케아 신경에 기록된 단어이다. 단성론 자들인 아리우스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발원한다”라는 당시 교회의 규범이 되었다. ’필리오케‘는 성경 헬라어 원문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당시 누구나 알고 있던 단어였다. 그러다 589년 제3차 톨레도 회의에서 스페인에 남아 있었던 아리우스파를 경계할 의도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라틴어로 번역한 니케아 신경에 처음으로 사용하자, 당시 네 개의 주교좌를 가진 동방정교회는 반발하게 된다. 당시 교회의 표준 성경언어는 코이네(Κοινη) 헬라어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는 코이네가 아닌 라틴어 성경을 사용하므로 언어의 불일치를 가져왔다,
헬라어 니케아 신경 원문 중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發)하시고(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라는 구절은 라틴어 번역본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바뀌었다. 마치 오늘날의 많은 성경 번역상의 오류가 발생하여 동방과 서방교회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게 되었다.그러나 필리오케가 삽입된 니케아 신경은 스페인 내에서만 사용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황 레오 3세(Leo III)는 필리오케가 신학적 문제보다는 번역상의 문제와 동방과 서방의 교회의 하나 됨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809년 라틴어 번역본에 필리오케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필리오케‘가 삽입되지 않은 니케아 신경을 헬라어 원문과 라틴어 번역문으로 각각 작성한 후, 성 베드로 사도 묘지의 은제 탁자 2개에 새겨 넣었다. 그러나 베네딕트 8세(Benedict VIII)는 ’필리오케‘가 널리 사용되기에 신학적인 문제 또한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1013년 ’필리오케‘가 삽입된 라틴어 니케아 신경을 재 거론한 후에 승인한다. 콘스탄티플 총대주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필리오케”를 니케아 신경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베네딕트 8세를 이어 교황 레오 9세(Leo IX)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 키룰라리오스(Μιχαήλ Α΄ Κηρουλάριος)가 그의 관할지역에서 라틴전례의 관습을 금지한 것을 계기로 특사 훔베르트 추기경(Cardinal Humbert)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여 총대주교에 대한 ‘세계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라는 칭호를 폐기할 것과, 필리오케가 들어간 신경을 공식 채택할 것을 정식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양측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자 총대주교는 교황 특사인 추기경을, 특사는 총대주교를 서로 파문한다. 이것이 교과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분열의 원인이다.
이 부분을 이야기로 재구성한다면,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Constantine IX)는 자신이 다스리는 자국 내에서도 온전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1043년 자신이 임명한 동방교회 총대주교 미하일 1세 키룰라리오스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성직자가 아닌 관료 생활을 한 사람이다. 자신의 전임 황제인 미카엘 4세(Michael IV)에 대한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유배 생활 중에 성직자의 길을 가게 된 사람이다.
황제는 총대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비밀리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연락을 취했다.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의 총대주교를 흔들어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교황 레오 9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응답을 보냈다. 그렇잖아도 교황을 “아버지” (Papa)가 아닌 “형제”(Brother)로 묘사한 편지를 보낸 총대주교에게 교황 수위권 문제와 필리오케 논쟁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강직한 세 추기경은 반 정교회 적이었다. 무르무티에르(Murmoutier)의 추기경 훔베르트외 2인으로 구성된 이들을 사절로 보내어 공의회(The Council)를 개최하도록 했다. 이들은 1054년 4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총대주교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었기에 만나기 전부터 불만이 많았다. 총대주교 역시 교황의 사절에 대한 예의 없는 행동에 분노를 참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교황 레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교황의 부재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감정은 더욱 악화 되었다. 훔베르트 추기경과 사절단은 1054년 7월 16일 아기아 소피아 성당의 강단 위에 총대주교를 파문한다는 파문장을 두면서 그들의 발에 먼지를 터는 행동을 보이므로 콘스탄티노플을 자극했다.
화가 난 총대주교는 그들이 두고 간 파문 장을 불태우고 세 명의 교황사절단을 역으로 파문해 버렸다. 중요한 사실은 사절단을 보낸 교황 레오 9세는 이미 4월 19일에 사망했다. 후임 교황 빅토르 2세는 1055년 4월 13일에 선출되었다. 파문 사건이 벌어진 1054년 7월에 교황은 공석이었다. 즉 이들은 레오 9세의 대리자로 파견되었기에 죽은 교황의 문서는 이미 파문서로서의 효력이 상실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총대주교인 미카엘 케룰라리오스가 직접 파문한 것은 서 로마교회도, 교황도 아닌 훔베르투스 추기경과 2명의 사절단이었다.

그리스 방문 교황 ◙ Photo&Img©ucdigiN
’동서 대분열‘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헤프닝이었다. 조금만 마음을 가다듬고 화해의 편지만 보냈어도 ’천 년 동안 용서와 화해‘라는 말은 없을 것이다. (다음 이야기에는 십자군과 관계없는 초기 동서 교회 분열의 배경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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