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시대든지 기득권 세력과 개혁을 원하는 세력 간의 대립은 언제나 있어왔다. 대부분은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에 대해서 혁신세력이 혁명에 가까울 정도의 능력치가 아니라면 권력 다툼에서 기득권 세력이 혁신세력을 꺾어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권력을 지키려는 욕구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근저에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 역시 동일했다. 기득권을 가진 자와 정의와 순수를 부르짖은 사람들의 힘의 논리가, 이번 이야기의 주된 썰이 아닌가 한다.
- 시핀(Siffin) 전투와 카와리즈(Kawariz)파
- 칼이냐 쿠란이냐?
- 무아위야의 세습후계자
- 야지드1세의 즉위와 제2차 피트나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시대든지 기득권 세력과 개혁을 원하는 세력 간의 대립은 언제나 있어왔다. 대부분은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에 대해서 혁신세력이 혁명에 가까울 정도의 능력치가 아니라면 권력 다툼에서 기득권 세력이 혁신세력을 꺾어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권력을 지키려는 욕구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근저에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 역시 동일했다. 기득권을 가진 자와 정의와 순수를 부르짖은 사람들의 힘의 논리가, 이번 이야기의 주된 썰이 아닌가 한다.
[미션저널] 세속 칼리파, 우마이야 왕조 » 김수길 선교사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10) »
무아위아 역시 그의 6촌 형인 우스만 못지않은 부잣집 자제였다. 무아위야 1세(무아위야 빈 아비 수피얀(Muawiya bin Abi Sufyan)는 쿠라이시 부족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아부 수피안(Abu Sufyan)은 메카에서 부유한 상인이었다. 수피안가는 당시 메카의 대부분 사람들처럼 메카의 다신교 신자였다.
처음에는 무함마드와는 종교적으로 반대의 입장이었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할 때, 무아위야 1세의 수피안 가문은 메디나로 무함마드를 추격하여 이슬람 군대를 해체시키려고 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무함마드가 이겼다. 이 때 수피안 가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족들은 강제든 비강제적이든 다신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무아위야 1세는 아버지와 함께 무슬림이 되었다. 나중에는 무함마드의 비서장이 되어 최측근 자리까지 오른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무아위야는 그의 형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얀(Yazid bin Abi Sufyan) 과 함께 이슬람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636년 비잔틴 제국의 연합군대와 요르단 국경의 야르무크 강(Yarmouk River)전투에서 이슬람군의 대승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이슬람은 시리아와 레반트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었다.
637년 칼리프 우마르와 함께 무아위야의 부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그리고 2년 후 다마스쿠스와 요르단의 총독이었던 무아위아의 형 야지드가 전염병인 페스트로 사망하자 640년 그는 형을 대신해서 총독이 된다.
칼리파 우마르는 시리아 지역에서 계속되는 전염병으로 인해 메디나 출신의 무아위야를 대신할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한 칼리파에 화답이나 하듯이 무아위야는 그 해에 비잔틴 제국의 팔레스타인의 수도인 카이사리아를 점령한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이슬람화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브드 알 말리크가 2차 내전을 종결 기념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폐허에 지은 바위 돔 사원, 바위돔 천장, 바위 돔 내부, 바위 돔의 무함마드가 승천했다고 주장 하는 바위
이제 우마르가 암살 당하고 무아위야의 6촌 형 칼리프 우스만(우스만 이븐 아판(Uthmān ibn ‘Affān)이 즉위함으로 무아위야가 관리하는 지역은 다마스쿠스와 요르단,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대된다. 우스만은 646년 말에 지금의 시리아 북부지역인 홈스자지라 지역을 무아위야의 시리아 정부에 귀속시킨다. 이제 무아위야의 통치 범위는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전체를 통치하게 된 것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군사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처럼 그가 통치하는 지역을 중앙 집중적인 시스템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디완(Diwan)’ 이라는 권력구도를 통해서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화였다. 한 사람의 총독이 가질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무아위야는 시리아 총독으로 20년간 활동했다. 이 기간에 그는 그의 6촌 형인 3대 칼리파 우스만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황제 못지않은 안정적인 삶을 유지한다. 칼리파 우스만이 살해되고 무함마드의 혈육인 알리가 칼리파가 되어 모든 총독의 지위를 내려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늘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온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알리가 칼리파 우스만을 암살하는데 주모자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알리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 ibn Abi Talib)가 칼리파에 즉위한 뒤 우스만을 살해한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아위야는 자신과 전쟁 중이던 비잔틴제국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기진영으로 모은다. 이 같은 상황은 자연스럽게 내전으로 발전된다. 이 전쟁이 제1차 피트나(Prima pitna) 내전이다.
시핀(Siffin) 전투와 카와리즈(Kawariz)파
칼리파 알리의 군대와 무아위야의 군대가 657년 유프라테스 강변의 시핀(Siffin)에서 전투를 치른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무아위야는 군사들의 창 끝에 쿠란을 매달은 후 전투에 앞서 쿠란의 문구들을 외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알리는 쿠란이 피에 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더 이상 전쟁을 원치 않았다. 무아위야는 알리와 협상을 통해서 시리아와 이집트의 통치를 인정받았다. 그 외 다른 영토는 칼리파 알리가 다스리는 것으로 한다.
이 회담에서 알리의 강경파들은 회담 자체를 인정 할 수 없었다. 알리가 강경파의 의견을 동의하지 않자 앞에서 말했듯이 알리와 결별을 한 후 이들은 카와리즈(Kawariz)파를 형성한다. 이 사건으로 카와리즈파는 이슬람 공동체에서 발생한 최초의 분파가 된다. 이들이 무아위야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알라 외에 심판은 없다’, 그런데 왜 알리가 무아위야에게 협상을 했는가? 이다. 그래서 알리와 같은 지도자의 권위보다는 움마의 합의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은 신의 뜻이기에, 신의 뜻을 반대한 칼리파 알리를 661년 1월 쿠파의 대사원에서 살해한 것이다.
무아위야는 알리의 암살 소식과 알리의 장남 하산(하산 이븐 알리Hassan ibn Ali)이 후임 칼리파로 선출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무아위야는 먼저 하산에게 ‘네가 칼리파의 지위를 양도하면 신변 보장뿐만 아니라 이맘(Imam)으로 지위를 인정해준다’는 편지를 보냈다. 하산이 제안을 거부하자 6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라크 쿠파(Koopa)로 공격한다. 하산 역시 4만의 병력으로 남하하여 사바트 인근에 진을 친다.
무아위야가 하산에게 편지를 보내 칼리파 양도를 요구한 것은 무력으로 칼리파를 탈취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산 역시 이슬람의 내전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부하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신의 명령에 따라 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한다. 하산의 아버지 알리 때처럼 일부 강경파 군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하산은 몸에 자상을 입는다. 이 반란은 하산의 다른 부하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하산의 신복장군인 우바이드 알라 이븐 아바스(Ubaid Allah ibn Abbas)는 자신의 군대가 자중지란을 일으킨 것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무아위야에게 귀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수니파 史家들은 ‘하산은 무아위야가 코란과 순나를 지켜야 하며, 그리고 하산의 추종자들에게 어떠한 복수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무아위야는 수락했고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을 사면함과 동시에 년 간 200만 디르함의 돈을 하산 이븐 알리에게 지급한다는 것까지 약속했다.
시아파 史家들은 ’하산은 무아위야가 죽은 후, 하산이 생존하고 있다면 칼리파를 자신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무아위야보다 하산이 먼저 죽는다면 칼리파를 동생 후세인 이븐 알리(Hussein ibn Ali)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했다. 무아위야는 이를 받아들임으로 칼리파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무아위야는 661년 예루살렘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수도를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다마스쿠스로 정하고 궁전을 확장시켰다. 이라크 쿠파에 있던 국가 시스템을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이로써 전통 칼리파 시대인 라시둔 칼리파(al-Khulafā’u r-Rāshidūn)시대가 끝나고 세속 칼리파 시대인 우마이야 왕조시대로 접어든다. 하산은 스스로 양보했기에 칼리파 족보에 이름도 올리지 못했다. ‘아 이름은 올렸구나! 온전한 칼리파가 아닌 스스로 사퇴한 칼리파라고… ’
무아위야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칼리파답게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그의 핵심지지 세력인 쿠다(Kuda)족과 킨드(Kind)족의 귀족 2,000명에게 영구상속이 가능한 영지를 하사했다. 또한 이들에게 중요한 주요 결정들을 협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까지 주었다. 무아위야를 위한 개인 경호부대 칼리팔라(Caliphala)와 근위부대 슈르타(Shuruta), 다마스쿠스 방위부대 마쿠라(Makura)를 설치했다. 기존의 영토 외에 마그레브(Maghreb)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 (paenin sula Hiberica), 신드(Sind) 페르가나(Fergana), 트란스옥시아나 (Transoxiana), 지역의 더 넓은 지역을 확장시켰다. 무아위야는 그의 제국이 아무리 넓어도 다마스쿠스를 중점으로 한 중앙 집정정치 시스템을 원했기에 그는 총리(알 카담Al Qaddam)와 각 지역을 담당하는 연락 담당관(바리드Barid)를 두어 일사불란한 정치를 했다고 한다.
칼이냐 쿠란이냐?
이슬람의 사가들은 ‘칼이냐 쿠란이냐?’는 존재 하지도 않았는데 상대(기독교)가 만들어낸 마타도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무아위야가 결혼을 할 즈음은 그의 형편이 힘든 시기였다. 시리아에 주둔한 이슬람의 군대는 대부분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살아남은 병사들 역시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점령 지역의 주민들은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도들이었다. 이슬람의 군대는 약간의 두려움과 들을 회유할 의도로 무아위야는 칼브(Kalb)지역의 족장의 딸인 마이순(Meamox)과 결혼한다. 그는 기독교들인 주민들에게 관용정책을 펼친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과중한 세금 때문에 폭동을 일으켜야 했던 주민들에게 세금을 대폭 삭감했다. 그러자 무아위야에 대한 주민들의 지지와 찬양은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알 아크사 모스크/ 무아위야가 663년 하마트 가데르에 있던 로마 시대의 목욕 시설을 복구한 것을 인정하는 그리스어 명문으로, 그의 칼리프 중심지인 시리아에서 무아위야의 통치를 보여주는 유일한 서/ 시리아 하미디에 시방의 제우스 신전
무아위야는 기독교의 중심도시인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정했다. 동로마 제국의 관리였던 기독교도인 만수르 이븐 사르준(Mansur ibn Sarjun)을 그의 재무관으로, 동일한 관리들을 이슬람 정부에 그대로 등용했다. 그리고 기독교도 병사들을 친위대에 배속시켰다. 앞서 말했듯이 기독교도인 마이순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고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아들 야지드(Yazid)가 무아위야의 후계자로 등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야지드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대한 정책을 펼치게 된다.
우마이야 왕조는 급조된 제국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슬람 인구는 적었고 통치해야 할 비 이슬람 인구는 많은 수였다. 더구나 그들은 거대한 제국을 통치한 경험이 아주 없었기에 제국을 다스려본 경험자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무아위야 왕가는 지배 민족들을 상대로 동화정책 또는 유화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제국을 다스리는 기술이 쌓여감에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인 우선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슬람이 아닌 타 종교인들과 민족에 대해서 차별을 시작한다. 종교 및 민족 차별은 큰 반발을 일으킨다. 비(非)아랍인들은 이슬람으로의 개종 여부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자 페르시아 계를 비롯한 비 아랍계 민족의 저항이 당시 페르시아 계 작가와 시인들이 참여한 슈우비야(Shuubiya) 운동, 즉 민족운동으로 번진다. 그리고 종교세 납부를 강요받은 마왈리(Mawalli)라 불리는 비 아랍계 무슬림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같은 무슬림인데도, 그렇다면 다른 종교는 어떠했을까?
칼이냐 쿠란이냐? 당근이냐 채찍이냐? 말장난 같은 소리이다. 필요에 의해서 일시적인 유화정책만 있었을 뿐이지 차별은 필자가 경험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아도…. .
무아위야의 세습후계자
무아위야는 알리를 반대한 이유 중 하나가 ‘무함마드의 혈육이라고 조건 없이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아들 야지드1세 (야지드 이븐 무아위야 아비 수피얀Yazid Ibn Muawiyah Abi Sufyan)를 후계자로 삼아 세습을 강행하기로 했다. 그는 먼저 야지드의 정적들을 축출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홈스의 총독인 압드 알 라흐만 이븐 칼리드(Abd al-Rahman ibn Khalid)는 여러 전투에서의 승리와 총독으로 선한 통치로 인해 많은 시리아의 이슬람들은 차기 칼리파로 이 사람을 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666년 압드 알-라흐만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다. 사람들은 무아위야가 사주하여 그를 죽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유는 야지드의 경쟁자였기에. 그리고 670년 칼리파 직위를 이양 한 후 메디나에서 생활하던 하산 이븐 알리가 사망했다.
시아파 사가들은 하산의 사망이유가 야지드 1세가 양위를 받으면, 하산과 맺은 계약 즉 ‘내가 살아 있을 때 당신이 죽으면 칼리파를 내게 양위한다는’ 내용이 차후에 문제가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무아위야는 극비로 하산의 아내인 자다 빈트 알 아샤트 이븐 카이스(Jada bint al-Ashat ibn Qais)와 접촉한다. 하산을 독살하면 큰돈을 줄 뿐 아니라, 야지드 1세와 결혼을 시켜 평안한 삶을 약속했다. 하산의 아내는 끝없는 권유와 설득 끝에 남편 하산에게 꿀을 섞은 독약을 먹인다. 남편을 죽이는데 성공한 자다는 무아위야에게서 돈과 결혼을 원했지만, 무아위야는 그녀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수니파의 사가들은 하산이 자연사했다고 주장한다.
676년경 무아위야는 제국의 모든 지방의 대표단을 다마스쿠스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대신 중 한 사람인 이븐 알 아티르만(Ibn al-Athirman)이 무아위야의 업적과 그의 아들 야지드의 뛰어난 지도력 등을 설명하면서 야지드만이 후임 칼리파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바스라 귀족 알-아흐나프 이븐 카이스(Al-Ahnaf ibn Qays)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지지를 표했다.
무아위야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하면서 동의를 표시 했다. 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자 반대하는 인사들을 무아위야를 지지하는 많은 회중이 모인 사원에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군중의 힘에 놀란 반대자들은 하나같이 찬성했다는 것이다.
680년 4월 26일, 무아위야는 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원했던 그의 아들 야지드 1세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에 대해서 수니파 사가들은 후세인 이븐 알리와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아의 주장은 무아위야가 야지드에게 한 유언은 ‘후세인이 너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조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야지드1세의 즉위와 제2차 피트나

아슈라 행사와 아슈라 때 사용되는 시아파의 깃발이 달린 사원
필자는 이란을 비롯한 서남아시아의 시아파 나라들에서 후세인 알리 가족이 살해 당한 날을 기억하는 행사에서 쇠가 달린 채찍으로 자신들의 몸을 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아슈라’ (Ashura)행사를 국내 모 텔레비전 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 기억이 난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반 지금도 생각나는 핏빛 장면들이 그냥 영상만 보아도 끔직한 장면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역사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동안 원로들 가운데서 선출해오던 칼리파 선출을, 부자 세습의 형테로 바꾸자, 세습제는 이슬람의 전통이 아닌 비잔틴 제국이나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전해오는 전제군주주의이지, 이슬람의 전통과는 먼 제도라는 논리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엄연히 알리의 아들이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인 후세인이 살아있는데도 야지드가 칼리파에 오른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아위야가 아무리 협박으로 또는 회유로 아들 야지드를 칼리파로 세웠지만 그가 죽자 후세인에게 칼리파를 양위하라는 목소리들이,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폭동에 가까울 정도로 반대세력들이 등장했다.
야지드 1세는 ‘만약에 후세인이 도전하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진압하라’는 유언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촌인 메디나 총독에게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후세인의 충성 서약을 받으라고 했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소환에 응하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서약을 해야 한다는 요구를 했다. 후세인은 끝까지 야지드1세가 원하는 충성 서약을 하지 않고 메디나에서 메카로 떠났다.
알리가 칼리파로 있을 때 새로운 수도인 현재 이라크의 쿠파 주민들은 후세인에게 충성과 새로운 칼리파로 모신다는 편지를 여러 차례 후세인에게 보냈다. 고무된 후세인은 당시 가장 유명 인사 중 한 명인 자신의 사촌 빈 아킬(Bin-Akil)을 쿠파에 먼저 보내어 사실 여유를 확인코자 했다. 그러나 빈 아킬은 야지드 1세의 회유에 굴복한 도시 쿠파에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후세인은 모든 가족을 동원하여 쿠파로 출발한다.

카르발라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는 참여자들의 모습과 시아파 3대 성지 중 하나인 후세인의 순교지 카르발라에 모인 순례객들.
후세인의 친구들은 위험하니 가족들만이라도 두고 떠나라고 여러 번 강조했지만 후세인은 모든 가족과 그리고 사병들을 포함한 200여명을 데리고 쿠파로 떠났다. 아라비아 반도 북부에 도착했을 때 사태가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세인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 합류한 지지자들은 돌려보냈다. 그러나 메카에서 출발한 인원은 모두 후세인과 함께 행동했다, 쿠파를 50킬로 정도 남겨놓은 카르발라에 도착했을 때 라이 총독 우마르 빈 사이드(Umar bin Said)의 4,000명 군사들과 조우를 한다. 후세인의 병력은 남성 80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부녀자들이었다. (전투 내용은 이야기 하지 않겠다. 끔찍한 학살이었다고 한다.)

알 악사 사원과 후세인 일가가 살해 당한 카르빌라의 이맘 후세인 성지
무함마드의 혈육인 후세인을 죽이는 것에 부담이 되었던 군사들은 모두가 얼굴을 가린 채 수십 명이 한 번에 칼질을 하므로 후세인은 살해되었다. 다만 몸이 아파서 뒤처진 후세인의 셋째 아들 알리(알리 자인 알 아비딘 Ali Zain Al Abidin)만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 일가의 학살 소식은 순식간에 알려지고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아파의 결집이 일어났다. 시리아로 이송된 후세인의 3남과 살아남은 가족들을 야지드 1세가 석방한다.
유일한 아들인 알리 4대 이맘이 되어 메디나에 머물면서 시아교리를 설파한다. 1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외손자인 아브드 알라 이븐 알주바이르(Abd Allah ibn al-Zubayr)가 친 알리의 세력을 규합했다. 그리고 자신은 후세인 다음으로 칼리파 자격이 있음을 선포한다. 야지드 1세는 메디나에서 반란이 일어났음 알고 군사를 보낸다. 야지드 1세가 보낸 군대는 메카를 포위하고는 투석기로 성벽을 포격했다. 무아위아와 같은 가문인 쿠라이시 부족으로 이루어진 메카 수비대는 결사 항전을 한다.
한 달 동안 공방전이 벌어지다가 카바 신전이 포격으로 전소된다. 이슬람의 성물인 흑석 역시 불타서 세 조각으로 조각난다. 나중에 은실로 봉합되었다고 한다. 카바 신전이 불에 탄 지 11일 후, 야지드 1세는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져 40세로 죽었다. 이 죽음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신의 형벌이라 고했다. 야지드의 사망 소식은 메카를 포위한 그의 군대에게도 알려졌다.
야지드 1세의 아들 무아위야 2세(Muawiyah II)가 신임 칼리파로 즉위한 뒤 메카의 군대를 다마스쿠스로 철군시켰다. 그러나 야지드 1세 사후 이슬람권의 분열은 더욱 심화 되었다. 아버지 야지드 1세와 달리 병약한 무아위야 2세는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 칼리파직을 포기한다. 라쉬둔 칼리파 시대처럼 슈라(Shura) 위원회에 칼리파 선출權을 넘긴 후 잠적했던 20대의 칼리파는 684년 의문의 죽음으로 무아위야의 친족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무아위야가 그렇게도 소유하고 싶었던 기득권과 모던 것들도, 인생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 것을,,,
무아위야 세습 칼리파 왕조는 무아위야 1세를 시작으로 90년간 왕조를 이끌었다. 그가 그렇게도 지키려고 했던, 혈육과 기득권은 그의 손자 무아위야 2세까지였다. 무아위야가의 세습 칼리파 우마이야 왕조는 무아위야 1세를 시작으로 25년 통치가 전부였다. 그의 후손이 왕위를 이어가지 못하고, 그의 친척인 마르완 1세(Marwanus I)부터 마르완 2세까지 10명이 다스린 시대가 65년간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무아위야의 제위부터 90년간 통치를 한 셈이다.
친척인 마르완 1세는 무아위야 왕조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아위야家 3대가 벌려놓은 뒤치다꺼리인 내전 종식에 온 힘을 써야만 했다. 마르완 1세를 이어 6대 아브드 알 말리크(Abd al-Malik)는 제2차 피트나를 종식 시킨다. 그 기념으로 705년 예루살렘 성전 산에 바위 돔 알 아크사(Al-Aqsa) 사원을 설립했다. 무함마드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그 전설의 바위 위에. 이 사원이 오늘날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의 중심인 것을 그는 알고는 있었을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아들인 왈리드 1세(Walid I)의 통치 기간이 이 왕조의 최고의 전성기였다. 호라산(Khorasan)을 재정복 한 것과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지역, 페르가나(Fergana)지방, 정복과 신드(Sinda)지역을 정복 한 것 뿐 아니라 서부 마그레브(Magreb)과 이베리아(Iberia)반도를 정복하여 당대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칼리프였다. 그러나 모든 영화가 영원하지 않듯이 우마이야 왕조 역시, 시간이 지나자 칼리파들은 사치와 향략에 따르는 폭압 정치는 무아위야 왕조가 세락을 길을 걷게 한다.
우마이야 왕조를 설립한 무아위야는 무함마드에게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메카의 부자 수피안의 아들이다. 모두가 이슬람 황금시대로 말하는 정통 칼리파 시대를 세속 군주주의 시대로 전환시킨 인물이다. 이 같은 사실은 진정한 이슬람인 칼리파 시대로의 복귀를 염원하는 알리의 지지자들인 시아파는 분열과 피투성이 ‘아슈라’로 상징되는 깊은 갈등의 골을 파놓은 사람이라고 그를 비판한다.
오늘까지도 시아파에서는 칼리파를 찬탈하여 순수한 이슬람을 훼손시킨 사람이라는 악명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아위야에 대한 다른 평가는 이민족을 품었고, 그들의 재능을 활용하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을 포용한 관대한 지도자라고 말한다.
이제 정리를 한다면 십자군이 태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우마위야 왕조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본격적인 십자군 이야기를 위해서는 앞으로 한두 번 더 이슬람의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표지사진/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심판의 날에 예수가 왼쪽 첨탑에 강림한다는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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