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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의 본말 앞에 서술적으로 역사적 배경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많이 길어지는 것 같다. 본말이 전도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하는 중이다.
[미션저널]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위한 변론 » 김수길 선교사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7) »
필자가 선교학 학위(D. Miss)논문으로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 관하여 쓰고 싶었다. 문제는 논문자료가 부족했다. 원하는 자료 중 많은 부분을 찾지 못했다. 찾다가 나온 자료는 그의 신앙에 공감하는 후예들이 어떻게 장안까지 가서 경교를 선교했는가에 대한 내용들이 주였다. 필자가 원한 자료들은 아니었다. 결국 다른 주재의 논문을 썼었다. 오래 전 이야기다.
독자들은 아래의 글들을 해석서를 보지 않고 읽는 즉시 이해가 되는가?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는 신성과 인성의 두 개의 휘포스타시스 (υποστασις)를 가진 위격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인간적 인성을 낳았을 뿐이다.’ 키릴로스는 ‘그리스도의 피시스(φυσις), 즉 본성은 신성과 인성으로 구별되지만 위격으로서는 유일하다.’ 위격적인 연합(Υποστατική Ένωση) 이다.”
오늘에 읽어도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글이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다. 그래서 성당에는 글을 모르는 신도들을 위해서 벽이나 천정에 성경의 중요한 부분들을 그림을 그려서 성경을 이해시켰다. 문맹의 많은 신도들은 에베소 공의회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이유로, 그들의 신부들이, 주교들이 재산과 지위를 박탈 당하고 귀양 갔다는 사실을, 당시 성도들은 객관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을까?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 기독교가 강력하게 꽃을 피운 동방의 모든 주교 지역의 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하고 하나같이 신흥 이교인 이슬람에 흡수된 것이다. 갑작스런 이슬람화가 그동안 진행된 일들의 결과라고 말한다면 이해와 답이 될 수 있을까?
네스토리우스는 정말 이단인가?

네스토리우스 풀케리아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읽다보면, 이 제국은 황제가 대주교를 임명하는 황제 교권주의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에베소 공의회 사건은 앞서 자주 이야기한 크리스텐덤(Christendom) 또는 콘스탄티누스주의(Constantinianism)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급의 상징적인 사건이 아닌가 한다.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재임했던 시기와 테오도시우스 2세의 관계를 전후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아니 테오도시우스 2세의 할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 까지 확장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독자들은 나름의 답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
테오도시우스1세(Theodosius I)와 암브로시우스(Ambrosius)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 또는 테오도시우스 대제(Flavius Theodosius)로 불렀고, 평범한 군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라티아누스(Gratianus)황제가 동로마 지역의 황제로 테오도시우스1세를 발탁하였다. 테오도시우스1세는 그라티아누스의 이복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 ntinianus II)가 죽자 동로마와 서로마를 통치한 최후의 황제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다시 동로마와 서로마로 완전히 분리된 후 다시는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80년 테오도시우스는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그해 2월 28일 세례를 받고 데살로니가에서 기독교만이 로마의 유일한 종교라는 칙령을 반포한다. 그러나 390년 그리스 데살로니가에서 로마 수비대장 중 한 명이 주민들과 작은 시비 끝에 집단 폭행을 당한 후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테오도시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데살로니가 주둔 사령관에게 이 사건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보복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호소했지만 테오도시우스는 끝까지 보복을 진행시킴으로 인해 약 7,000명의 테살로니키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비난했다. 황제가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반대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을 시인하고 왕관을 쓰지 않고 베옷만 입은 체 밀라노 성당으로 가서 용서와 회개를 간구했다. 그럼에도 부활절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성당으로 들어 갈수 없었다. 겨우 성탄절이 되어서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용서를 받은 후 예배에 참석 할 수 있었다. (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성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에게 사흘간 용서를 구한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과 너무나 다른 사건이다. 왜냐면 당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권력은 주교가 감히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교회를 국교로 인정한 황제를 감히 주교가 벌을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마도 황제의 겸손과 신앙심을 보여주기 위한 한 방편이 아니었을 까 생각한다.

암브로시스와 데오도시우스1세 오벨리스크 하단의 데오도시우스 1세 부조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밀라노에서 죽는다. 장남 아르카디우스를 제국의 동부 황제 그리고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를 서부 황제로 임명한 후 아들들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 그는 당시 야만인 출신으로 제국의 총사령관에 오른 스틸리코(Stilicho)에게 아들들을 부탁하고 그는 395년 1월 17일 48세를 죽음을 맞이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키 칙령으로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은 반면 비 기독교인들은 공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기독교가 이교도들에 대한 역차별이 시작된 것이다.

에베소 마리아 교회 히드포름의 오베릴스크
이스탄불 히드포롬(Hydroform)한쪽에 오벨리스크가 흔적만 남은 전차 경주장의 옛 부귀와 영화를 말해주는 듯이 자리하고 있다. 오벨리스크 하단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전차경주에서 승리자에게 월계관을 수여하는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이 부조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당신은 이 도시를 설립했지만 나는 이 도시를 강력하게 부흥 시켰소. 당신은 밀란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인정했지만 나는 데살로니가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로마의 유일한 국교로 만들었소!”라고 말하는 것 같은 조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테오도시우스 1세를 콘스탄티누스처럼 대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기독교를 로마의 유일한 종교로 만든 이유 때문이다.
아르카디우스(Arcadius)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모스(Ἰωάννης ὁ Χρυσόστομος)
아르카디우스는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 죽자 17살의 나이로 제국의 동방을 통치했다. 사가들은 “그는 키가 작고 말과 행동이 느리고 성격은 유약하고 지성도 부족한, 늘 졸린 듯한 표정”이라고 그를 표현하고 있다.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보호해주던 스틸리코를 환관이었던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의 모함에 속아서 친동생이 다스리는 서로마로 쫒아 보낸다. 에우트로피우스는 프랑크족 미녀 아일리아 에우독시아(Aelia Eudoxia)를 아르카디우스와 결혼시킨다. 그러나 이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역시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 아르카디우스를 컨트롤하기 위해 자신을 황후로 세워준 에우트로피우스와 정치적 선을 그을 정도로 정치적 야심이 가득한 여인이었다. 허수아비 황제 아르카디우스를 대신하여 황후 에우독시아가 제국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선천적으로는 방탕한 그녀의 성품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요하니스 크리소스토무스와 대립 할 수밖에 없었다.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는 요하니스 크리소스토모스는 이 시기의 교부이자 유명한 설교가였다. 그리스 정교회는 그의 설교집까지 거룩한 문서들 속에 포함시킨 성인 반열의 인물이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름이 아니라 그의 별명이다. ‘황금’크리소스(Χρυσοs)와 ‘입’ 스토마(στομa)가 합쳐진 말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서 황금의 입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영성 깊은 설교와 경건한 그의 삶은 많은 시민들의 신뢰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사망하자 그는 398년 2월 26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로부터 주교의 서품을 받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Patriarcha Constantinopolitanus)가 된 그는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적인 생활을 강하게 비판한다. 성직자들의 윤리와 절재의 준수를 요구했다. 그리고 성직을 매매한 에베소 지역 주교 6인을 면직 시킨다. 황후는 총대주교가 강단에서 사치와 부도덕을 여러 차례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권력에 대한 도전과 규탄으로 받아들였다. 황후는 총대주교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총대주교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인 인물은 다름 아닌 주교서품을 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총대주교였다.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교 퀘르치아(Quercia)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테오필루스는 그의 조카 키릴로스와 함께 참석한 후 근거 없는 모략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총대주교를 고발한다. 요하니스 크리스토모스는 그 자리에서 면직된다. 허수아비 황제는 그를 소아시아 북부에 있는 비티니아(Bithynia)로 유배시켰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총대주교의 면직과 유배에 반발했다.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폭동은 테오필로스 대주교의 지지자들과 시가 전 양상으로 변했다. 사상자가 발생하자 황후와 황제는 유배를 취소 시켰다. 그는 수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가 대성당 바깥 광장에 자신의 은상(銀像)을 세우려고 하자 또다시 황후와 요하네스 대주교는 대립하게 된다. 계속된 알렉산드리아 총대 주교와의 불화, 황후에 대한 비판 등으로 요하네스 대주교에게 다시 퇴임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불복했다.
그러나 404년 부활절 예배 중에 황제의 군대가 교회 안으로 침입하여 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요하네스는 다시 해임을 당하고 현 알바니아 지역인 쿠쿠수스(Cucusus)로 유배를 간다. 이번에는 요하니스 크리소스토무스를 만나보려는 신자들이 순례를 시작한다. 순례행렬이 연래행사가 되자 황후와 황제는 다시 흑해 동편의 험지인 피티우스(Pityus)로 유배지를 바꾼다, 요하네스 크리스무스는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년 9월 14일 코마나(Comana)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Δόξα στον Θεό για όλα)”이었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는 405년 아이를 낳다 죽고 말았다. 무기력한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408년 30세에 죽자, 7살의 나이로 로마 제국 동부의 황제가 된 사람이 테오도시우스 2세이다. 아르카디우스가 임종할 즈음 어린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게 된다. 친동생인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문제로 갈등의 골은 깊어 질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그의 신하들이 놀랄만한 상대를 후견인으로 삼는다. 오랫동안 전쟁을 한 사산조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Yazdegerd I)에게 후견인을 부탁한다. 야즈데게르드는 아르카디우스의 결정에 감격하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침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궁 안에서 아들을 도와줄 인물로는 집정관(consul) 안테미우스(Anthemius)를 선택했다. 동시에 자신의 9살 난 장녀 풀케리아(Pulcher ae)를 같이 선정하였다.
친위대장 안테미우스는 정말 신실하게 왕궁의 안위를 보살피다가 414년 사망하고 새로운 섭정으로는 황제의 누나 풀케리아에게 단독으로 넘어갔다. 강단진 성격의 풀케리아는 ‘여황'(Augusta)이 되어 권력을 독점한다. 그녀의 나이 16세였다. 나름 신앙심이 깊고 정신력이 강한 풀케리아는 섭정이자 아우구스타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동생 테오도시우스 2세를 직접 교육하기 시작했다.
풀케리아는 공식적으로 테오도시우스 2세가 15세 생일을 맞은 날부터 섭정으로써 임무가 끝났지만, 그녀는 그 뒤에도 오랫동안 실세로 남았다. 어쩌면 테오도시우스 2세를 평생 컨트롤하기에 이른다. 풀케리아는 그녀의 어머니의 전철을 따르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평생 동정녀로 살 것을 서약하고 그녀의 여동생들에게도 동일하게 서약시켰다. 황궁 안에서 간소한 옷을 입고 모든 예배와 기도에 힘쓰는 마치 수녀원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제단에 덮는 포에 수를 놓는 일에 전력했다. 풀케리아는 남동생을 위해 아테네 출신 아름다운 여인을 배필로 골랐다.
그녀의 이름은 아테나이스(Athenais)였다. 그러나 아테나이스가 아테네 철학자 가문의 사람이었기에 콘스탄티노플 궁전은 갑자기 그리스의 철학과 문화의 열풍에 들뜨기 시작했다. 또한 황후 역시 야심이 있었기에 그녀는 이름을 왕이 어릴 때 죽은 그녀의 시어머니의 이름인 아일리아 에우도키아(Aelia Eudoxia)라고 개명한다. 그리고 종교 역시 기독교로 개종한다. 당연히 데우도시우스 2세의 누나와 정치적인 대립관계로 궁전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테오도시우스 2세를 조종하려는 황후를 풀케리아가 분개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내보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누나의 의견에 많은 힘을 실어준다. 남편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황후는 443년에 왕궁을 나가서 460년 죽을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왕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황후 에우도키아의 지지자였던 파울리누스(Paulinus)가 황후와 간통 혐의로 참수 당했다. 황실친위대 사령관 키루스(Cyrus)가 황후 에우도키아를 지지하다가 결국 축출된다. 사람들은 풀케리아의 술수라고 하지만 자세한 자료는 없고 다만 추측할 뿐이다. 이 같은 황실의 상황은 총대주교에게도 힘든 날들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황궁 안에서 여인의 소리가 적게 났으면 좋겠다는 설교 한다. 그리고 풀케리아가 늦은 밤에 궁 안을 다니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이른다.
풀케리아는 황제인 동생에게 에베소 공의회를 열라고 촉구했다. 이유는 자신과 대립관계인 총대주교의 신학과 파문문제였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2세는 누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431년 에베소 공의회를 소집했다.
네스토리우스는 381년에 시리아의 속주에서 태어났다. 안디옥에서 사제와 설교자로 활동을 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 때인 428년 시신니우스 1세(Sicinius I)의 후임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안티오키아의 아타나시우스 교부(Athanasius Pater Ecclesiae)를 지지함으로 아리우스파를 반대했다, 이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릴루스 등과 갈등을 빚는다. 네스토리우스가 총대주교로 취임할 때 아나스타시우스(Athanasius)를 전속 사제(Mon seigne ur)로 임명했다.
아나스타시우스가 11월 22일 설교에서 마리아의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 반대했다. 이 명칭은 오랫동안 관용적으로 사용해오던 명칭이기에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의 편을 들어 그해 성탄절에 마리아가 왜 테오토코스가 아닌 크리스토토코스(Χριστοτόκος)인지를 설교를 통해서 주장했다. 이후에도 여러 번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처녀 황후였던 풀케리아의 종교적 신념인 동정녀를 소망하는 그녀의 생각과 상충되는 일이었기에, 네스토리우스와 풀리케아는 서로가 종교, 정치적인 적대자로 발전하면서 갈등은 깊어진다.
삼촌의 뒤를 이어 알레산드리아 총대주교인 키릴루스는 429년 부활절 직후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를 반대하는 서신을 각 지역에 보낸다. 그는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은 신성과 인성으로 구별되지만 위격으로서는 유일한 위격적인 연합을 부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신학적인 이유이고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는 다른 이유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던 그는 자기의 전임인 테오필루스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에게 느꼈던 감정과 동일한, 열등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경쟁 교구인 콘스탄티노플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자신의 교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키릴루스는 429년 가을에 네스토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라고 한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키릴루스에게 “웃기는 짬뽕정도의” 짧은 답장으로 응답했다.
이미 이야기 한대로 에베소 공의회에서 풀케리아의 지지를 받는 키릴로스와 그의 지지자들로 가득 찬 공회의장은 네스토리우스를 파면한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처음에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했지만 그를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황제를 지지하는 풀케리아의 원대로 파면한 것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다. 이 정도의 이야기면 네스토리우스를 위한 변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토양 위에 생겨난 이슬람의 신관은 이해하기 힘든 기독교 신관이 아닌 유대교의 신관을 채택했다. 복잡한 삼위일체론보다 쉬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로 정한다. 수없이 이어진 공의회 소식을 이슬람세계도 알고 있기에,,, (다음 이야기는 이제 이슬람에 관한 이야기가 … .)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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