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그토록 탐을 낸 껠끼라 (Κέρκυρα) 코르푸 섬은 흔히 그리스 속의 영국이라고도 불린다. 테살로니키 그리스 복음주의 교회의 담임인 구다스 목사는 나를 만날 때 마다 “킴 지금까지 그리스 섬 어디 어디를 보고 왔니? 그리고 껠끼라 다녀왔니?”라고 물었다. ‘아니’ 라는 나의 답변에 “너는 아직 그리스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하곤 했다.
[미션저널] 그리스 속의 영국 “껠끼라 (Κέρκυρα) 코르푸 섬” » 김수길 선교사 » 그리스 이야기(28회) » 아테네 출신 구다스 목사가 그렇게 자랑하던 그리스 서부 최북단 섬인 껠끼라(코르푸)섬을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사실 껠끼라는 유명한 산토리니 섬이나 같은 해역인 자킨토스 섬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섬이기도 했다. 그리스 서북부의 이오니아 해에 위치한 섬. 면적 610.9km2로 이오니아 제도에서 게팔로니아 다음으로 큰 섬이다.
그리스에서 7번째로 큰 섬이자 지중해에서 13번째로 큰 섬이기도 하다. 인구는 11만 명으로 이오니아 해의 섬 가운데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고대 그리스 시대와 15세기 이후 지중해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기도하다. 껠끼라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껠끼라 타운(corfu town)이다. 국제공항이 있고 본토 이구메니짜에서 시간별로 왕래하는 부두도 이곳에 있다.

껠끼라(Κέρκυρα)코르푸 섬 전경 ◙ Photo&Img©ucdigiN
내륙의 그리스인들보다도 좀 더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점심시간을 지나서 도착했기에 겨울철 시내의 식당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거리에 서서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낮선 이방인에게 보여준 친절함은 오래 걸어서 아픈 다리의 통증마저 잊게 해주었다.
그리스어로 엄마의 도시 미떼라 뽈리(μητέρα πόλη)는 해외에다 아들 도시인(해외 거류지)를 두면 아무리 작은 도시국가라고 할지라도 그 도시는 엄마의 도시가 되는 것이다. 오늘 날 미떼라 뽈리(μητέρα πόλη)는 주변에 베드타운을 거느린 광역시(Metropolitan City)라고 부른다. 미떼라 뽈리의 영어 형이다.
기원전 730년 경 당시 가장 작은 도시국가인 고린도는 이곳에 아들 도시를 두면서 엄마의 도시로 태어난다. 고린도 사람들은 원래부터 이 섬을 껠끼라로 불러왔다. 고린도를 시작으로 에비아 섬에서도 많은 수의 이주민들이 이 섬에 합류 한다. 껠끼라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큰 함대를 소유한 폴리스 중 하나가 된다. 제 2차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 섬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되며 역사적으로 유명해진다.
기원전 299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의 왕인 아가토클레스(Αγαθοκλής)에게 점령되었다. 아가토클레스는 자신의 딸 라나사의 결혼 지참금으로 섬을 사위인 에피로스 왕 피로스 1세(Πύρρος Ι)에게 주었고, 기원전 255년에 그의 아들이자 에피로스의 마지막 왕인 알렉산드로스 2세가 죽자 껠끼라는 다시 독립하였다. 그 후 기원전 229년, 북쪽의 일리리아(Illyria 알바니아)인들과 그리스 연합군 (케르키라, 아카이아 동맹) 군이 대결한 팍소스 해전(Μάχη των Παξών)에서 승리한 일리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일리리아 인의 지배도 몇 년 가지 못하였고, 섬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어 해군 기지로 쓰이다가 마케도니아 전쟁 후로는 마케도니아왕국의 속주에 포함되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누리던 코르푸는 동로마 제국시대에는 에피로스 남부의 항구 도시인 니꼬뽈리에 가려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1197년부터 1207년까지 제노바 공국이 섬을 지배했다, 1207년부터는 그들을 격퇴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 섬을 지배한다. 여러 혼란을 거치면서 섬은 유럽 최초의 집시(인도 구자라트 출신의 유랑민) 정착지가 되었다. 그 후 프랑스의 앙주 가문 등 여러 지배를 받았다, 1386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가 되어 400여 년간 베네치아 만 (아드리아 해)의 입구를 지키게 된다.

껠끼라(Κέρκυρα)코르푸 섬 전경 ◙ Photo&Img©ucdigiN
오스만 제국은 14 ~ 15세기에 걸쳐 동남부 유럽을 평정하였고 16세기부터는 중부 유럽과 지중해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프레베자 해전에서 베네치아를 격파한 후 아드리아 해 진출을 시도한다. 1537년에서 1573년에 세 번에 걸쳐 섬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코르푸 섬이 포함된 이오니아 제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유일한 그리스 영토이다. 대신 베네치아 제국에 점령당했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 전쟁 와중인 1797년, 베네치아는 프랑스에게 멸망하였고 캄포포르미오 조약(Συνθήκη του Campo Formio)의 결과 코르푸를 비롯한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령이 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파리 조약으로 이오니아 제도는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 껠끼라 (코르푸)가 영국 통치령의 중심이 되었다.
1824년, 코르푸에는 첫 그리스 대학이 세워졌고 1864년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 빌헬름이 그리스 왕국의 요르고스 1세(Γιώργος Ι)로 즉위하는 대관식의 선물로서 이오니아 제도는 그리스의 영토가 되었다.
정체성과 복음
이곳에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사도 바울의 제자인 다소의 출신의 야손(Ιάσονας)과 이고니온의 주교이자 사도 안드레아의 제자인 소시파트로스(Σοσιπάτρος) 에 의해 전파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두 전도자는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다 투옥되어 당시 이교도였던 섬의 왕에 의해 순교했다고 한다.
두 순교자의 유해는 대성당에 보관되었다가, 그후 약 100개의 사원이 세워진 후 곳곳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섬 주민들에게 정교회가 아닌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주민 대다수는 정교회교인으로 남았다. 오늘날에는 5%만이 가톨릭 신자이다.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는 몰타에서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다.
종교를 제외하고는 음식과 문화, 그리고 건축은 베네치아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이 섬의 건축물은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과 전혀 다른 형태이다. 베네치아 표준으로 건축물을 지었기에 베네치아보다도 더 베네치아답다.
이탈리아어는 20세기 중반까지 섬 전체에 널리 사용되었다. 주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는 코르푸 방언으로 많은 베네치아 언어를 체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온 많은 유대인들 역시 이곳에 정착했고, 이들은 그리스어와 함께 히브리어, 이탈리아어가 혼합된 방언을 사용했다.
영국 통치 시대에는 베네치아적인 색체 위에 영국적인 그림을 완성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은 도시 전체를 런던이나 파리의 어느 지역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큰 광장인 스피아나다 광장(Πλατεία Σπινάδας)과 신 구 성채, 시청 등의 건물들이다.
이러한 이야기 외에도 이곳이 가진 이야기는 너무도 많이 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부군이었던 필립공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이곳에서 보내고 그이 아버지가 망명하기 까지 이 섬에서 살았다. 필립공 생전에 해마다 여름이 되면 영국 왕실의 요트가 그리스에 왔다는 뉴스를 종종 보았다.
뮤지컬과 영화로 유명한 시씨(Sissi)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엘리자베스(Ελισάβετ) 황후의 별명이다. 오스트리아의 최고 미녀인 그녀는 프란츠 요제프( Franz Josef)황제와 결혼 한다. 시씨의 아들인 서른 살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가 1889년 자살을 한다. 아들의 죽음 이후 그녀는 검은 옷만 입을 정도로 깊은 고통에 빠진다. 그녀는 힘들 때 이곳의 하얀 대리석 궁전인 아킬레온(Το παλάτι του Αχιλλέα)에서 평안을 찾았다고 한다.
황후는 1989년 제네바에서 살해 당하기 전까지 아킬레온 궁전을 자주 방문했다. 그녀는 자기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처럼 말을 했지만 그녀의 시신은 합스부르크 왕실 묘지(Βασιλικό νεκροταφείο των Αψβούργων)에 묻혀있다. 그녀의 소망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했던 이 궁전은 그녀를 대신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저녁놀이 깊어 갈 즈음 광장 맞은 편 고성위에 세워진 커다란 십자가의 불빛은 별빛과 함께 나에게로 쏟아져왔다. 왜 구다스 목사가 나를 볼 때마다 껠끼라를 다녀왔느냐고 물은 그 의미를 이제는 알 수 있겠다.
사실 지난 두주간은 너무도 바빴다. 일정에 없었던 본인이 속해있는 AETA(아에타 국제교육 훈련 연합)가 지난 20일부터 3월 1일 까지 터키에서 열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터키의 강진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도시인 테살로니키로 변경이 되었다. 계획에 없었던 손님들과 장소와 모든 일정을 맞춘다고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리스 이야기 28을 써놓고서는 오늘 손님들을 다 보내고 이제야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한국을 다녀와야 한다. 아내 혼자 두도 가는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앞으로 3주 정도 그리스 이야기는 잠시 멈추려고 한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필자의 지난 글 보기: 신화와 역사의 고향 델피(Δελφο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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