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예루살렘

천 년 전 예루살렘 함락과 학살의 기억이 여전히 이슬람 세계의 집단적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학자 모리스 할브왁스(Maurice Halbwachs)가 말한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의 개념처럼, 특정 집단은 과거의 사건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 정체성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미션저널] 황금의 예루살렘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20) »

필자는 아주 오래전에 여권을 만들었다. 여권 신청 이후 최소한 15일 이상 걸리던 시절, 반공회관에 가서 여러 시간 안보강연을 들은 후 손에 여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탔다. 이스라엘까지 직항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집트 카이로에 내려서 텔아비브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비로소 필자의 유학 시절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당시는 이스라엘에 한국 대사관이 없었다. 이집트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이스라엘 교민들을 관리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교민들은 대사관 업무를 한 번에 모아서 이집트에 갈 사람이 생기면 인편으로 업무를 보던 시절이었다. 이집트에 갈 사람이 없을 때 한 사람에게 교통비와 경비를 지원하여 카이로를 다녀오게 했다. 당시 필자는 혼자 유학 시절이었기에 두 번 정도 그 일을 감당했다.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까지의 1번 도로는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다. 당시 필자의 기억에는 도로 곳곳에 7일 전쟁과 여러 전쟁에서 파괴된 전차들이 곳곳에 전시물처럼 녹슨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대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운행하는 에게드(Egged)버스로 벤구리온 공항을 지나 산악지대를 올라가면 예루살렘 서쪽으로 진입하게 된다. 노을에 물든 황금 빛 예루살렘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 오는 감동에 한동안 쳐다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랜 시간 성지회복과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다가왔던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필자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안디옥에서 마라로

1098년 겨울, 제1차 십자군은 막 안디옥을 함락한 뒤였다. 수 개월 동안 이어진 공방전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극한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굶주림은 병사들의 영혼을 할퀴었고, 전염병은 피보다 빠르게 병사들의 몸을 파고들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십자군은 식량이 바닥나자 말 가죽을 삶아 먹거나 풀뿌리를 뜯어 허기를 달래야 했다. 일부는 심지어 적의 시체까지 손에 대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지 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러나 이 발걸음은 더 이상 영광이나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약탈의 유혹, 그리고 “예루살렘을 되찾으면 모든 죄가 사라진다”는 교황의 약속이 이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이들이 향한 곳은 마라트 알 누만(Maʿarrat al-Nuʿman). 오늘날 시리아 이들리브 주의 도시에 해당하는 이곳은 고대에는 마라타(Μάρατα)라 불렸다. 북쪽의 안디옥과 남쪽의 다마스쿠스를 잇는 길목에 자리 잡아 교통과 군사적으로 요충지였고, 비옥한 땅 덕분에 곡식이 풍족한 곳이었다. 십자군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식량 창고’였으며, 동시에 전략적 거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 안에 갇힌 주민들에게 십자군의 등장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미 안디옥에서 자행된 학살과 잔혹한 행위들은 빠르게 소문으로 전해졌다. 어머니들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떨었고, 노인들은 주저앉아 성벽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병사들은 무기만 잡고 버티고 있었으나, 지쳐가는 기세로는 오래 버틸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12월 12일, 마침내 성벽 밖에서 제안이 왔다. 노르망드의 영웅이라 불리던 보에몽(Bohemond)이 항복 조건을 내걸었다. ‘성문을 열면, 주민들의 목숨은 살려주겠다.’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있던 마라의 주민들과 수비대는 그 약속에 희망을 걸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그들은 성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배신과 학살

성문이 열린 순간, 약속은 산산조각 났다. 보에몽의 말은 거짓이었다. 성 안으로 밀려들어온 십자군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노인도, 아이도, 여인도 피할 수 없었다. 거리마다 비명이 울려 퍼졌고, 붉은 피가 돌길을 적셨다. 불길은 집집마다 번져나갔다. 성 안에서 삶의 흔적을 쌓아왔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무너져갔다.

일부 젊고 건강한 주민들은 노예로 끌려갔으나, 그것은 살아남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더 끔찍한 운명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날 마라는 피와 재로 뒤덮였다. 그러나 역사가 기록한 가장 큰 충격은, 학살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굶주림에 시달리던 십자군 병사들이 저지른 행위였다. 그들은 시신을 삶아 먹고, 불에 구워 먹었다. 십자가를 앞세운 군대가,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던 그들이, 굶주림 앞에서 인간성을 저버리고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적대적인 이슬람 측 연대기의 왜곡된 고발이 아니다. 함께 원정에 나섰던 십자군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이다. 노르망드계 사제 라울 드 캉(Ralph of Caen) 은 자신의 저서 『예루살렘 원정에서의 탕크레드의 업적(Gesta Tancredi in expeditione Hierosolymitana)』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저들은 이교도의 어른들을 솥에 삶아 먹었고, 아이들을 꼬치에 꿰어 구워 먹었다.”

또 다른 연대기 작가 알베리크(Albert of Aachen) 역시 『예루살렘사(Historia Hierosoly mitana)』에서 증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기근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불에 익힌 시체들을 먹었고, 자신들이 죽인 사라센뿐 아니라 개까지 잡아먹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기록이 당대의 그리스도인들 자신에 의해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그 자체로도 십자군이 처했던 절망과 잔혹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불타버린 도시와 정치적 갈등

1099년 1월, 마라는 결국 불태워졌다. 돌로 쌓은 집들은 무너져 잿더미가 되었고, 거리는 폐허로 변했다. 사람들의 웃음과 노랫소리가 있던 도시는 이제 비명과 침묵만 남은 땅이 되었다. 마라는 단순한 점령지가 아니었다. 신앙의 이름 아래 자행된 배신과 야만, 그리고 인간성 상실을 증언하는 무덤이었다.

보에몽은 학살로 얻어낸 이 도시를 자신의 영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지도자 레몽(Raymond)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여전히 십자군의 ‘최고 지도자’라는 권위를 지키고 싶었고, 보에몽드의 세력 확장을 좌시할 수 없었다. 마라의 폐허는 곧 십자군 내부의 권력 다툼의 불씨가 되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두 지도자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섰으나, 더 이상 한마음으로 뭉친 군대가 아니었다. ‘성지 회복’이라는 대의는 권력과 영토라는 현실 정치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마라는 역사 속에서 네 단어로 기억된다. 거짓, 함락, 학살, 식인. 이 네 단어는 제1차 십자군의 어두운 초상을 드러낸다. 십자가를 앞세운 그들이 신앙을 외쳤으나, 그들의 행위는 신앙의 길과 거리가 멀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덕과 인도주의조차 무너뜨린 마라의 사건은,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전쟁이 얼마나 쉽게 야만으로 타락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비극의 상징이었다.

폐허가 된 마라는 지금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거룩한 이름을 외친 그들이 결국 인간성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1099년 1월, 마라를 불태운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 속에서 이미 신앙은 한 차례 무너져 있었다.

레몽의 부대가 선봉에서 십자군을 이끌었다. 후속 부대인 탕크레드와 노르망디의 로베르 같은 주요 지휘관들이 합류하면서 다시 강력한 부대가 되었다. 하지만 성지 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모였지만 제후들의 속사정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충돌을 피한 도시들, 제1차 십자군 남하의 또 다른 얼굴

1099년 1월, 제1차 십자군은 참혹한 마라의 기억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향했다. 흔히 십자군의 행군은 무력과 정복의 이미지로만 그려지지만, 실제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그 이면에는 협상과 외교가 중요한 축으로 자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길을 열었던 도시들이 있었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오론테스(Orontes)강변의 샤이자르(Shaizar)였다. 이곳을 다스리던 무르시드 가문은 십자군의 위세와 잔혹한 행적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정면으로 맞섰다간 도시와 백성이 무참히 사라질 것을 예견한 태수는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 그는 십자군에게 통행을 허용하고, 식량과 보급품을 제공했으며, 심지어 길잡이까지 붙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샤이자르는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고도 주민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는 십자군에게도 이득이었다. 불필요한 충돌 없이 행군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도착한 마시아프(Masyaf) 역시 같은 선택을 했다. 훗날 암살단으로 악명을 떨칠 하심파의 본거지가 될 산악 요새였지만, 이곳 또한 전투 대신 협정을 택했다. 이 도시의 태수는 안전과 식량을 내주는 대가로 도시를 지켜냈다. 이처럼 일부 도시들은 군사적 충돌보다 외교적 실리를 앞세워 십자군과의 공존을 꾀했다.

그러나 모든 곳이 평화롭게 열리지는 않았다. 1월 23일 십자군이 라파니아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이미 도시를 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풍족한 식량과 보급품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굶주렸던 병사들은 오랜만에 배부른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잠시 사기가 살아났지만, 불안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닷새 뒤인 1월 28일, 십자군은 히슨 알 아크라드를 공격했다. 훗날 중세 최고의 성채로 이름을 떨칠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였다. 십자군은 가축을 약탈했으나 현지 농민들의 거센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결국 어둠 속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십자군이 언제나 승리만을 거둔 무적의 존재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은 십자군 내부의 분열을 틈타 연안 도시 회복에 나섰다. 길리키아 지역의 요충지인 코리쿠스를 점령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는데, 이는 곧 안디옥 공국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동로마와 십자군 제후들 사이의 긴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처럼 1099년 초 십자군의 남하는 단순한 군사적 진격이 아니었다. 협상과 외교, 약탈과 충돌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도시와 주민들의 운명은 군사력보다도 정치적 판단과 외교적 지혜에 의해 좌우되었다. 샤이자르와 마시아프가 보여주었듯,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길을 열 수 있었고, 히슨 알 아크라드에서처럼 무모한 공격은 패배로 돌아왔다. 십자군의 행군은 전쟁의 기록일 뿐 아니라, 중세 세계에서 전쟁과 외교가 어떻게 교차 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다.

그해 3월 알렉시우스 2세는 그의 외교관이자 장군인 마누엘 부투미테스 (Μανουέλ Μπουτουμίτες)를 안디옥으로 파견했다. 십자군이 정복한 안디옥을 동로마 제국에 넘기라는 통보였다. 보예몽은 결코 안디옥을 넘겨줄 수 없었다. 오히려 동로마령인 라타카이 항구를 포위했다. 그 동안 누적되어 온 동 로마제국과 십자군의 관계는 이제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늦은 봄 십자군은 트리폴리 인근을 천천히 행군했다. 트리폴리의 카디 파크르 알 물크는 십자군 포로를 석방하고 식량·황금·말과 길잡이를 제공했다. 이는 현실적인 타협이자, 십자군이 강대한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인정한 조치였다.

5월 13일, 병사들의 반발 속에 레몽은 끝내 아르카 포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기로 했다. 대신 고드프루아의 부대가 남아서 아르카를 포위한뒤 함략 시켰다. 이제 십자군내부에서는 레몽 보다는 고드프루아의 지지가 상대적으로 크게 상승했다.

남하하는 길에서 십자군은 연안 도시들을 지나며 세를 과시했다. 나흐르 알 칼브(Nahr el Kalb 개의 협곡)를 지나며 베이루트 통치자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시돈의 파티마 수비대가 기습했으나 패배해 십자군에게 과수원과 마을이 약탈당했다. 이어 티레(Tyre)수르, 아크레(Acre) 역시 조공을 바쳤다. 5월 26일, 십자군은 하이파를 지나 남하한다. 이 행군은 단순한 군사적 이동이 아니라, 십자군의 압도적 위세를 드러내는 과시이자, 지역 권력자들에게 조공을 강요하는 정치적 시위였다.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행군

1099년 여름, 십자군은 마침내 성지를 향한 최종 행군에 돌입했다. 수년간의 긴 여정, 수많은 전투와 분열, 기근과 협상의 끝에서 그들은 처음 출발할 때의 목표였던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여정은 단순한 군사적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앙과 정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운명의 길이었다.

6월, 십자군은 해안을 따라 내려오던 길을 버리고 아르수프 부근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닷길을 계속 따른다면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 함대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륙 행군은 곧장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동시에 물 부족과 기근이라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6월 7일 화요일,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곽 앞에 도착해 포위를 개시했다. 그러나 성은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다.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 알 아흐달(Wazir Al Ahdal)은 구원군을 약속했고, 총독 이흐티카르(Ikhtikhar)는 성안의 기독교인들을 추방하여 내통의 가능성을 제거했다. 그는 또한 성 밖의 수자원에 독을 풀어 십자군을 고립시켰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신앙과 권력의 운명이 걸린 요새가 되었다.

포위 초기에 병사들의 신앙은 곧 전쟁의 동력이 되었다. 한 은둔 수도사가 그들에게 다음 날 공격하라는 신탁을 전했고, 십자군은 이를 단순한 군사 명령이 아니라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6월 13일, 병사들은 북쪽의 다마스쿠스 문을 향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파티마 수비대와 유대인 민병대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공격은 완전히 격퇴되었다. 첫 공세의 실패는 십자군 진영에 큰 충격을 안겼다. 보급은 여전히 불확실했고, 물과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성벽 앞에서

십자군들이 그렇게도 기대하던 제노바 함대가 자파(Jaffa),텔아비브에 입항했으나 곧바로 파티마 해군에게 거의 전멸당하고 단 한 척만 살아남았다. 십자군은 바다로부터의 보급과 지원이라는 희망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진영에는 절망이 드리웠지만, 그럼에도 병사들은 포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절망의 끝에서 전환점이 찾아왔다. 살아남은 제노바 선원들이 십자군 진영에 합류하면서 기술적 돌파구가 열렸다. 제노바인들은 숲에서 베어낸 나무로 거대한 공성탑과 투석기를 제작했고, 이는 십자군의 군사적 능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던 병사들은 이제 새로운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다.

7월 13일, 십자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성벽은 여전히 견고했고, 수비대의 저항도 완강했지만, 공성탑은 점차 성벽에 가까워졌다.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행군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지는 지도자들의 권위, 현지 기독교인들의 기대, 파티마 왕조의 결사항전, 그리고 병사들의 신앙적 열망이 한데 뒤엉킨 거대한 사건이었다. 절망과 희망, 굶주림과 열광이 교차하는 가운데 십자군은 마침내 성곽을 돌파할 준비를 끝마쳤다.

예루살렘, 신의 도시, 피의 도시

1099년 7월 15일, 제1차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그러나 그날은 신앙적 해방의 절정이 아니라, 곧바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장면으로 변했다. 성안의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들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고, 거리는 시체로 뒤덮였다. 십자군은 이 참극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했으나, 후대의 역사적 시선은 그것을 명백한 학살로 기록한다.

예루살렘은 세 종교가 공존하는 성지였다. 유대교에게는 솔로몬의 성전과 다윗의 도시였고, 기독교에게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이었으며, 이슬람에게는 무함마드의 승천 전설이 깃든 곳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이 성을 점령했을 때, 이 세 신앙의 공존은 무너졌다.

십자군 병사들은 성안의 무슬림들을 가차 없이 학살했다. 칼과 창에 쓰러진 시신들이 거리를 메웠고, 성전은 피로 물들었다. 특히 유대인 공동체는 끔찍한 운명을 맞았다. 많은 이들이 시나고그(회당)에 몸을 숨겼으나, 십자군은 불을 질러 그들을 산 채로 불태웠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기도의 집”이 아니었다. 그날, 성지는 피와 불이 뒤엉킨 지옥으로 변했다.

당시 십자군 병사들에게 이 학살은 단순한 잔혹행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를 종교적 의무, 곧 “이교도와 배교자를 제거하여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한다”는 신앙의 완성으로 여겼다. 일부 연대기는 병사들이 “발목까지 피가 차올랐다”고 묘사하며, 그것을 승리의 표징처럼 기록했다. 신앙의 열광은 곧 인간적 잔혹함과 섞여, 거대한 폭력으로 폭발했다. 탕크레드(Tancred)가 일부 주민에게 안전을 보장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병사들은 금과 은을 약탈했고, 가옥은 불탔다. 예루살렘은 해방의 도시이자 동시에 참극의 도시로 기억되었다.

역사적 아이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군의 이러한 폭력은 그들이 내세운 성지 해방이라는 이상을 무너뜨렸다.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는 본래 신앙의 순수한 열망으로 시작되었으나, 성 안에서 벌어진 학살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피의 증거가 되었다.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스러운 도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공포와 증오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이 학살은 또한 이후 수세기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 간 갈등을 격화시키는 불씨가 되었다. 무슬림 연대기 작가들은 십자군의 잔혹함을 자세히 기록했고, 이는 후대의 지하드 서사에 활용되었다. 예루살렘의 피바다는 단순한 순간적 비극이 아니라, 중세 세계사의 긴 충돌과 전쟁을 예고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예루살렘 함락은 중세 기독교 세계에게는 신앙의 승리로 선포되었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생명이 희생된 비극이었다. 신의 도시는 피의 도시가 되었고, 그 기억은 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집단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예루살렘의 학살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신앙이 폭력과 결합할 때, 그것은 어디로 향하는가? 십자군의 칼이 남긴 상흔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관계를 왜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099년의 예루살렘은 신앙의 도시이자 피의 도시였다. 그리고 그날의 아이러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

예루살렘 함략, 교황의 부재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은 십자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소식은 원정을 처음 호소했던 인물에게 닿지 못했다. 불과 2주 뒤인 7월 29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하나님의 무기를 들어 예루살렘을 해방하라”고 외쳤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사망한 것이다. 그는 제1차 십자군의 출발을 이끈 주역이었지만, 정작 그들의 가장 위대한 성취인 성지 탈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는 분명한 역사적 아이러니였다. 그의 설교와 호소가 불러일으킨 거대한 원정은 수년간의 고난과 분열, 수많은 희생 끝에 마침내 성지를 탈환했지만, 교황 자신은 그 결실을 목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승전 소식은 곧바로 유럽 전역에 퍼졌고, 교황청과 기독교 세계는 환희에 휩싸였다.

병사들은 황금과 보물을 약탈했다. 성지는 해방의 도시이자 참극의 도시로 동시에 기억되었다. 그러나 학살의 소용돌이가 잦아든 뒤, 십자군 지휘관들은 성묘 교회로 향했다. 그들은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며 승리를 신의 뜻으로 정당화했다. 이 순간, 예루살렘은 단순히 한 도시의 정복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 전체의 신앙적 승리로 선포되었다. 더 이상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의 영토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 기독교 세계의 상징적 수도, 곧 신의 도시가 된 것이다.

성지 수복 후 지도자들은 새로운 통치 체제를 세워야 했다. 보에몽은 안디옥에 머물렀고, 레몽은 명성을 잃어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결국 십자군 지휘관들은 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추대했다. 그러나 그는 왕(king)이라는 세속적 칭호를 거부하고, 대신 성묘의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라는 직함을 받아들였다. 이는 예루살렘이 단순한 세속 왕국이 아니라, 신의 소유 도시임을 강조하려는 상징적 선택이었다.

그의 선택은 봉건적 질서와 종교적 이상이 결합된 새로운 체제를 예루살렘에 세웠다. 십자군 국가는 단순한 영토 지배가 아니라, “성지 수호”라는 신앙적 명분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예루살렘 함락과 교황의 부재는 십자군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앙적 열망이 현실에서 폭력과 학살로 나타났고, 원정을 촉발한 지도자는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이를 신의 뜻으로 해석하며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다. 예루살렘은 신의 도시이자 피의 도시였고, 승리와 아이러니, 신앙과 폭력이 교차하는 역사의 무대였다.

오늘의 이슬람 세계가 가진 십자군의 기억

2015년 일시적이었지만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 국경지역인 이도메니에는 난민 캠프(Idomeni refugee camp)가 있었다. 유럽으로 향하는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거쳐 가던 관문이었다. 필자는 이곳에서 1년 넘게 난민 사역을 하며, 전쟁과 박해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다. 농민들이 경작하던 땅은 난민 캠프의 컨테이너 가건물로 대체되었고, 국경 지대는 곧 갈등과 상처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캠프에서 만난 난민 리더들은 영어에 능통했지만, 대부분 강한 이슬람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은 기독교, 특히 서방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비난이 단순히 현대 정치 상황에 국한되지 않고, 종종 중세 십자군(Crusades)에까지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의 서방 개입을 십자군적 사고의 연장선으로 규정했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 세계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표현했다.

천 년 전 예루살렘 함락과 학살의 기억이 여전히 이슬람 세계의 집단적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학자 모리스 할브왁스(Maurice Halbwachs)가 말한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의 개념처럼, 특정 집단은 과거의 사건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 정체성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십자군의 폭력은 이슬람 세계에서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서방과 기독교 세계를 바라보는 기억의 렌즈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이도메니에서의 경험은 단순한 난민 사역의 현장이 아니라, 역사의 지속성과 기억의 힘을 목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십자군의 그림자는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슬람 강경파들이 가장 사용하기 쉬운 증오의 무기라는 것을 말이다.

표지사진: 십자군 1차 원정의 전쟁 이미지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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