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십자군, 왕들의 십자군(Kings’ Crusade)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제3차 십자군이라는 거대한 원정에 함께 나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왕이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위대한 신앙적 목표를 공유하며 나란히 행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동행은 실상 협력이라기보다는 협력과 경쟁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불안한 균형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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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함락 이후의 충격

1187년,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유럽 전역을 거대한 충격 속에 빠뜨렸다. 그 소식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마치 세계의 종말이 도래한 듯한 절망으로 받아들여졌다. “하나님의 도시가 이교도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신앙·정치·문화 모든 영역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충격 속에서 즉시 회칙 Audita tremendi를 발표했다. 이 회칙은 예루살렘 회복을 단순한 복수전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의 원정, 즉 성지를 되찾기 위한 신앙적 순례로 규정했다. 이 문서는 유럽 전역의 왕과 귀족, 기사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이 되었고 곧 제3차 십자군 파병의 도화선이 되었다.

교황의 요청에 응답한 이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들이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Richard the Lionheart)사자심왕이라는 별명답게 용맹과 전투 감각에서 뛰어나며, 중세 기사도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오귀스트 (Philippe II Auguste) 그는 프랑스 왕권을 확립하고 파리를 왕국의 중심으로 성장시켰으며, 유럽 내 프랑스의 주도권을 구축한 군주였다. 별칭 Auguste는 숭고한 자라는 뜻으로, 그의 정치적 성공이 반영된 칭호였다. 전왕 루이 7세 시기 잃었던 노르망디·앙주 등 주요 영토를 되찾았고,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 왕가와 깊은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다.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바르바로사(Barbaro ssa)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Redbeard) 을 뜻하는 별명으로, 이탈리아인들이 그를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 부르던 이름이다. 그는 제국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유럽에서 강력한 위상을 확립한 절대 군주였다.

이 세 명의 군주는 그야말로 중세 유럽의 최고 권력자들, 즉 당대 최고의 “영웅들”이었다. 이들이 결집해 십자군을 조직했으니, 제3차 십자군은 규모와 권력 면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십자군이라 불린다. 그들의 면면만 보면 오늘날로 치면 어벤져스(Avengers)급의 ‘지상 최강 드림팀’이었다.

유럽 최강 3왕의 동맹, 드림팀이었지만 결과는 용두사미였다. 리처드 1세, 필리프 2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이 세 군주는 중세 유럽에서 힘과 명예, 권력 모두를 손에 넣은 절대 군주들이었다. 그들이 함께 출정한 제3차 십자군은 병력·자금·권위 모두에서 전례 없는 규모였다. 그러나 이 드림팀 같은 조합은 협력보다는 경쟁, 합심보다는 각국의 이해관계, 공동 명분보다 정치적 계산이 더 크게 작용하며 결국 갈라지고 만다.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의 제3차 십자군 출정과 죽음

프리드리히1세 원정에 동행한 작가인 안스베르투스(Ansbertus)가 쓴 기록이다. 그의 저서(Historia de expeditione Friderici)에 기록을 보면, 황제의 출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황제께서는 신의 뜻에 따라, 군대를 일으켜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향하기로 결정하셨다. 황제의 군대는 질서정연하였고, 독수리 깃발은 교황의 십자가와 함께 세워졌다.’ 사실이다. 1189년 5월, 프리드리히 1세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에서 공식 출정식을 거행했다. 약 10만 명의 군대(신성로마제국의 기사, 바이에른·슈바벤 병력 등)가 참가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당시 약 67세, 젊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직접 통솔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 길을 허락해 달라 하였지만, 동로마제국은 불신과 시기로 그의 행군을 방해하였다. 황제는 분노하였으나, 피를 흘리지 않으려 하여 참았다.
동로마제국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안겔로스(Isaakios II Angelos)는 신성로마 제국의 대군이 동로마 제국을 통과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몰래 살라딘과 협약을 맺었다는 기록이 유언비어처럼 떠돌았다.

프리드리히1세는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진군했지만, 협상을 통해 통행을 허락받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넌다. 그들이 갈라티아와 리디아의 산악을 지나면서, ‘더위와 갈증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황제는 병사들보다 먼저 일어나 물을 찾고, 그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연대기 작가는 기록하고 있다. 고령인 황제는 하루 30km 이상을 직접 행군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여러 곳에서 룸 셀주크의 기습을 격퇴했고, 오늘날 터키의 코냐(이고니움)를 점령하기도 했다.

1190년 6월 10일 터키 남부 살레프(Saleph River)강의 비극 “황제는 더위 속에 강가에 이르렀다. 그는 말을 타고 물을 건너려 하였는데, 갑자기 말이 미끄러져, 황제는 물 속으로 떨어졌다. 신하들이 그를 건지려 했으나,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고 안스베르투스는 기록하고 있다. 살레프강은 오늘날에도 강의 물살은 빠르게 흐르는 곳이다. 강의 물살은 빠르고 깊었으며, 중무장을 한 노인 황제는 강을 건너다 그 자리에서 익사한다.

황제의 시신은 뜨거운 태양 아래 빠르게 부패하였다. 충성스러운 기사들은 황제의 내장은 타르수스(Tarsus)에, 살은 안디옥(Antioch)에, 뼈는 예루살렘 근처 티르(Tyre)에 안장하였다.
황제의 죽음 이후, 신성로마 제국 십자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6세(슈바벤 공작)가 잠시 지휘를 이어갔지만, 군의 대부분은 본국으로 귀환하고 만다.

앞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그의 죽음은 전설로 남는다. 14세기의 독일 민간전승에서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오는데 ’황제는 죽지 않았다. 그는 독수리 깃발을 곁에 두고 키프하우저 산 속 동굴에서 잠들어 있으며, 독일이 위기에 처하면 깨어나 제국을 구원할 것이라는 키프하우저 전설(Kyffhäuser Legend)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전설은 훗날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부활한다. 19세기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잠자는 황제 바르바로사 동상이 세워지면서, 독일 통일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다. 십자군에서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그는 죽어서 훗날 독일 통일의 전설을 남겨놓은 것이다.

리처드 1세(Richard I of England)와 필리프 2세(Philip II of France)의 출정, 협력과 경쟁이 공존한 불안한 동맹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제3차 십자군이라는 거대한 원정에 함께 나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왕이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위대한 신앙적 목표를 공유하며 나란히 행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동행은 실상 협력이라기보다는 협력과 경쟁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불안한 균형에 가까웠다. 종교적 대의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 아래에는, 서로를 경계하며 지켜보는 두 강대국의 권력 관계가 깊게 흐르고 있었다.

이미 십자군 출정 이전부터 양국은 프랑스 본토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었지만, 동시에 아키텐과 노르망디 같은 광대한 영지를 프랑스 땅에 소유한 대지주였다. 봉건 질서 아래 그는 ‘프랑스 왕의 붕신’이라는 법적 지위에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필리프와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진 군주였다. 필리프 2세의 입장에서 리처드는 자신의 영토와 영향력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존재였고, 리처드에게도 필리프는 언제든 영지를 흔들 수 있는 위험한 경쟁자였다.

이처럼 두 왕은 십자군 출정 전에 이미 정치적 긴장과 영토 경쟁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갈등이 성지로 향하는 원정길에서도 그대로 따라왔다. 거기에 두 사람의 성격 차이는 협력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리처드 1세는 전쟁을 사랑한 ‘전사 왕’이었다. 그는 기사도와 용맹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두었고, 빠르고 대담한 돌파를 즐겼다. 반면 필리프 2세는 철저한 계산과 행정적 통솔력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인 왕’이었다. 그는 장기 전략·외교·행정 정비에 능했고, 직접 전장에 뛰어드는 행동보다는 안정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 기질의 차이는 원정 과정에서 전략적 결정마다 충돌을 낳았다.

어디를 먼저 공격할지, 포위를 지속할지 철수할지, 병력을 어떻게 유지할지, 이 모든 문제에서 두 왕은 서로의 판단을 불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두 왕의 동행은 협력하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필요와 상대의 세력 확장을 경계해야 한다는 정치적 본능이 충돌한 복합적 동맹이었다.

십자군의 연합군대는 외형적으로는 하나였지만, 내면에서는 경쟁·질투·계산이 흐르고 있었다. ‘하나의 군대’가 아니라, 서로를 이용하면서 동시에 견제하는 두 나라의 연합체였다. 제3차 십자군은 신앙의 이름으로 출정한 원정이었지만, 이름 아래에는 유럽 내 권력경쟁과 봉건 질서의 재편이라는 정치적 현실이 자리했다.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의 불안한 동맹은 바로 그 복잡한 역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들은 함께 싸워야 했지만, 동시에 서로를 가장 경계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세 왕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의 선교와 교회에서도 우리는 같은 상황을 볼 때가 많이 있다. 입으로는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한다. 고 말하지만, 때로는 겉으로 협력하면서도 속으로는 경쟁하거나 서로를 경계하는 모습이 있다. 두 왕의 동맹은 우리에게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 연합이 언제나 진정한 연합은 아니다. 참된 협력은 같은 길을 걷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같은 목적을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아크레(Acre)와 아르수프(Arsuf), 제3차 십자군의 방향을 결정지은 전투

동상이몽, 십자군의 첫 전선은 아크레(Acre)였다. 예루살렘이 1187년 살라딘에 의해 함락된 뒤, 아크레는 이슬람권의 가장 중요한 해안 도시로 부상했다. 1189년, 예루살렘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던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이 먼저 아크레를 공격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십자군이 도시를 포위했지만 곧 살라딘이 십자군을 역 포위하는 형세가 되었다.

두 진영은 도시와 해안에 갇혀서, 식량 부족과 병사들 사이에 퍼진 질병 확산으로 인해서 병력은 나날이 고갈되어갔다. 양측 모두 고립된 채 소모전이 이어졌다. 이라는 동일한 고통 속에서 소모전으로 시간을 보냈다. 1191년 봄, 리처드와 필리프 2세가 해상과 육지에서 합류하자 전쟁의 흐름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강력한 해군과 최신 공성무기를 총동원하여 성벽을 지속적으로 압박했고, 필리프는 공성전을 지휘하며 돌격로를 확장했다.

이에 살라딘도 수차례 반격을 시도했지만 십자군의 지속적인 화력 앞에 도시를 지키기 어려웠다. 1191년 7월, 마침내 아크레는 십자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살라딘은 몸값과 포로 교환을 약속했지만 시간을 끌었고, 리처드는 이를 협상의 지연뿐 아니라 군사적 기만으로 보았다. 결국 그는 2,700명의 이슬람 포로를 처형하는 강경책을 단행했다. 이 사건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살라딘의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십자군이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냉정하고 폭력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냈다.

이후 전투의 긴장도는 한층 더 높아졌다. 필리프 2세는 이듬해 여름 병을 이유로 귀국했고, 그 순간부터 십자군 전체의 작전은 사실상 리처드 단독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아르수프 전투, 아크레 함락 이후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살라딘은 정면 승부를 극도로 꺼려했지만, 리처드의 진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기병 기습과 화살 공격을 반복했다. 이 전투에서 두 사람의 기질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살라딘은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대를 활용하여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전략을 주사했다. 이에 반해 리처드는 대열 유지와 규율을 중시하며, 반격의 정확한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으로 전투에 임했다. 살라딘의 끊임없는 공격은 십자군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리처드는 군대를 단단히 묶어두고 절대 무리한 돌파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정적 순간은 오후에 찾아왔다.

리처드는 나팔 신호를 통해 중앙 돌격 명령을 내렸고, 갑작스러운 전체 돌파로 살라딘의 군대는 무너졌다. 이 승리는 십자군에게 큰 사기 상승을 가져왔으며, 리처드의 전사적 명성은 이 전투로 절정에 이르렀다. 살라딘조차 그의 용맹과 기사도를 높이 평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르수프 전투 이후 리처드는 자파(Jaffa)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할 수 있는 길목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병력과 보급이었다. 장기 포위전을 유지할 병력이 부족했고, 아크레와 자파를 잇는 해안 방어선도 안정적이지 않았으며, 유럽 본토에서는 필리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리처드는 두 차례 예루살렘 외곽까지 진군했지만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지금 예루살렘을 점령하더라도 유지할 힘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사로서의 용기와 왕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내린 매우 현실적인 결정이었다.

라믈라 조약(Treaty of Ramla), 3차 십자군 전쟁의 마지막과 부분적인 성공

1192년의 여름, 지중해의 바람은 전쟁으로 지친 군대들의 숨결처럼 무겁게 불어왔다. 살라딘은 리처드 1세가 잠시 전선을 떠난 사이를 노려 자파를 기습했고, 도시는 순식간에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리처드는 마치 전설 속 영웅처럼 놀라운 속도로 되돌아와 도시를 다시 확보했다. 하지만 이 극적인 승리조차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양측 모두 너무 오래 싸웠고, 각자의 나라 또한 더 이상 끝없는 원정에 자원을 쏟아붓기 어려운 상태였다. 승리의 여지보다 고통의 무게가 더 커지던 시점에서, 결국 1192년 9월 라믈라 조약(Treaty of Ramla)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단순한 전쟁 종결 문서가 아니었다. 십자군은 티레에서 자파에 이르는 해안선을 유지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통치 아래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 기독교 순례자와 상인이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이 열렸다. 표면적으로 보면 십자군은 성지를 되찾지 못했지만, 해안 도시들의 회복과 순례의 자유라는 현실적 이익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부분적인 성과를 남긴 셈이었다. 영광과 패배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듯한, 절반의 승리였다.

3차 십자군의 영웅 리처드1세와 살라딘

중세 십자군 시대는 분열과 갈등의 시기였지만, 동시에 인간의 위대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걸출한 지도자들이 등장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기억되는 두 인물은 서유럽 기독교 군대를 이끈 영국의 리처드 1세(Richard the Lionheart)와,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며 성전을 주도한 살라딘(Salāḥ ad-Dīn)이다. 둘은 서로를 적으로 맞섰지만, 그 대립은 오히려 두 영웅의 성품과 능력, 그리고 역사적 위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리처드 1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기사도의 정신과 무력의 가치를 깊이 내면화했다. 그는 정치적 이상이나 행정보다는 전장의 명예와 개인적 용맹을 중시했다. 프랑스 문화권에서 성장한 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정치가’라기보다는 ‘전사’의 성향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반면 살라딘은 쿠르드계 군인 가문 출신이지만, 젊은 시절은 전쟁보다는 학문과 신앙, 행정적 감각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는 처음부터 영웅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으나, 꾸준한 충성과 실력을 통해 누르 앗 딘의 지도 아래에서 군사적·정치적 능력을 키워나갔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한 뒤 그는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정치적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두 인물의 차이는 전쟁관(戰爭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리처드는 개인적 명예와 기사도의 전통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 전형적 전사 군주였다. 그의 대담한 전술과 직접적인 전투 능력은 아크레를 비롯한 주요 전투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전쟁은 그에게 국가 경영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으며, 그 결과 그의 통치는 잉글랜드 내부에 막대한 부담을 남겼다.
살라딘은 전쟁을 신앙과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회복하려는 이슬람 세계의 염원을 중심 가치로 삼았고, 군사력뿐 아니라 외교·행정·종교적 통합을 활용해 그 목표를 실현했다. 그의 관대함은 특히 1187년 예루살렘 재탈환 이후 민간인을 보호한 행동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로 인해 그는 서방 세계에서도 ‘품위 있는 무슬림 군주’로 기억된다.

사진 위/ 아크레에 도착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사진 아래/ 이사키오스 2세 안겔로스, 리차드 1세, 메시나에서 탕크레드와 만나는 필리프 2세. 사진 오른쪽/ 필립2세와 리차드왕.

제3차 십자군에서 두 영웅은 직접적인 일대일 결투를 벌이진 않았지만, 전장을 매개로 수차례 간접적으로 맞섰고 서로의 능력을 인정했다. 리처드1세는 전장을 지휘하는 전술가로 빛났고, 살라딘은 병력 조율과 외교 전략으로 전쟁의 균형을 유지했다. 두 지도자는 서로를 증오하기보다 ‘존경할 만한 적’으로 대했다는 기록이 많다. 살라딘은 병든 리처드에게 의사를 보냈고, 리처드는 살라딘의 기사도와 인품을 칭찬했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의 대립을 단순한 종교적 충돌이 아니라 두 이상주의자 사이의 독특한 만남으로 바라보게 한다.

리처드 1세는 사후에도 ‘사자심왕’이라는 명칭으로 기려지지만, 실제로는 영국 국내 정치에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그의 에너지는 거의 전적으로 전쟁에 집중되었고, 원정 비용은 잉글랜드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중세 기사도의 순수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살라딘은 이슬람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관용·품위·정의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는 예루살렘의 군주였지만, 그 도시를 피로 물들이기보다는 질서와 신앙, 인도주의를 선택한 지도자였다.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삶은 서로 다른 세계관 속에서 태어난 두 영웅이 어떻게 시대의 갈등을 체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 사람은 기사도의 이상을 구현한 전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통합과 신앙의 정치를 실현한 군주였다. 그들의 만남은 전쟁의 잔혹함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상호 존중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그들의 대립은 중세 국제질서 속 충돌과 교류를 동시에 반영하는 사건이며, 오늘날에도 서로 다른 문명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존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비유로 남아 있다.

영화와 소설이 불러낸 살라딘과 리처드1세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이야기는, 역사의 먼 페이지보다도 오히려 소설과 영화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들의 만남은 실제 기록보다 문학과 영상 예술의 상상력 속에서 더 빛났고, 두 영웅의 이름은 세기를 넘어 수많은 이야기의 원천이 되었다. 마치 중세의 밤하늘을 밝히는 두 개의 별처럼, 그들은 작가와 감독의 상상 속에서 끝없이 재해석되고 다시 태어났다. 특히 이 두 인물은 중세 인물 가운데서도 유난히 많은 작품의 영감을 제공했다. 실제 역사적 기록보다 영화와 소설을 통해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쟁, 명예, 종교, 그리고 기사도라는 거대한 테마를 이 두 영웅만큼 드라마틱하게 풀어낼 수 있는 인물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1954년 제작된 영화 리처드 왕과 십자군(King Richard and the Crusaders)은 월터 스콧의 소설 The Talisman(부적)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흑백 영화이며, 케네스를 연기한 로버트 더글러스(Robert Douglas), 리처드 1세 역의 조지 샌더스(George Sanders), 그리고 살라딘 역의 렉스 해리슨(Rex Harrison)의 연기가 시대적 무게를 더한다. 감독은 데이비드 버틀러(David Butler)였다.

영화는 예루살렘 탈환을 향해 나아가는 십자군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전장의 혼돈 속에서 리처드 1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그 사실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 진영 내부에서는 은밀한 음모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왕의 병세는 군의 운명을 뒤흔들 수 있는 비밀이 되었고, 그 어둠 속에서 권력을 노리는 자들은 조용히 기회를 엿본다. 바로 그때 케네스는 사막에서 한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의사는 사실 적국의 왕 살라딘이 변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리처드를 죽일 수 있는 순간에도 칼을 들지 않고, 오히려 적인 리처드 1세의 생명을 살린다. 이는 복수나 증오가 아닌, ‘인간을 존중하는 고귀함’이라는 깊은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리처드1세가 치료를 받고 다시 눈을 뜬 순간, 두 사람은 칼 대신 ‘존중’이라는 눈빛을 나누었다.

사진 왼쪽/ 아크레 공방전, 사진 오른쪽/ Richard_coeur_de_lion (사자심왕 리차드)

전쟁이란 서로를 상처 입히기 위한 것이지만, 그 순간 만큼은 두 영웅의 마음에 기사도라는 조용한 언어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인간의 어둠을 드러내는 법. 십자군 내부의 배신과 음모는 다시 고개를 들었고, 케네스는 왕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음모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된다. 이러한 극적 요소들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감정적 깊이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결국 영화는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명예·존중·기사도라는 중세의 빛을 말하고자 한다.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서로의 목을 겨누던 적장이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인간으로 존중했다. 리처드 1세가 살라딘의 정체를 알게 된 뒤 남긴 말은 그 핵심을 드러낸다. “내 적이라도 용기와 명예를 지닌 자는 나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이 대사는 그가 얼마나 큰 품을 가진 왕이었는지, 그리고 기사도 정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또한 영화 속에서 리처드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계속되지만, 우리는 서로를 적 이상의 존재로 기억한다.” 이 말은 두 영웅이 서로 다른 신을 믿고 서로 다른 전장을 걸었지만,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배신을 꾸짖는 장면에서 그는 말한다.

“나의 기사들은 칼보다 명예를 앞세우는 자들이다.” 이 순간 리처드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싸우는 기사도의 화신으로 서 있다. 또한 유명한 대사, “이교도인 당신이 나의 동료들보다 더 진실하다.” 이 대사는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 역사 기록 속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리처드–살라딘의 상호 존중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낸다.

역사의 무대에서 리처드 1세는 유럽을 호령한 기사였으며 전장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는 유럽 전체에 충격을 남겼다. 십자군 원정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유럽의 권력 균형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1192년, 리처드는 귀국길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5세에게 체포되었다.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져 약 1년 반 동안 억류되었는데, 이는 유럽 전체를 뒤흔든 국제적 사건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한 왕이 잡혔다’가 아니다. 리처드 1세는 과거 예루살렘 전투에서 레오폴드의 깃발을 성벽에서 내던져 모욕한 적이 있었다. 전리품 분배 과정에서도 레오폴드를 무시했다. 레오폴드는 이 개인적 모욕을 복수하려 했다.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의 억류를 유럽 정치판을 재편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고 막대한 몸값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몸값은 무려 15만 마르크. 당시 유럽 최대 규모였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이 기회를 기다리던 사람처럼 움직였다. 리처드가 억류된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 균형은 뒤흔들렸고, 리처드 1세의 동생 존은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다. 리처드1세가 1194년에 돌아왔을 때, 영국은 이미 정치적·재정적으로 큰 상처를 입은 뒤였다. 유럽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는 리처드의 영지를 공격했고, 신성로마제국은 몸값 사건을 계기로 권력을 확대했다.

리처드의 부재는 결국 영국 왕권 약화와 귀족들의 반발, 그리고 존 왕의 실패로 마그나 카르타 라는 중세 유럽사 최대 전환점 중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또한 리처드의 포로생활은 십자군의 사기에도 큰 타격을 줬다. 십자군의 중심인물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병사들에겐 희망의 상실을 반대로 이슬람에게는 자신감을 주었다. 이 사건은 십자군의 전쟁 지속 가능성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1991년 10월 이스라엘의 욤 샤부옷(Yom Shavuot)오순절, 방학 때였다. 필자는 몇몇 학생들과 터키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이스탄불의 한 극장에 있었다. 그날 우리가 본 영화는 이날 개봉한 로빈 후드, 도둑들의 왕자(Robin Hood, Prince of Thie ves1991)였다.

영화는 로빈 록슬리(케빈 코스트너 Kevin Costner)가 십자군 전쟁 중 예루살렘에 포로로 잡힌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는 같은 감옥에 있던 무어인 전사 ‘아지즈(Azeem, 모건 프리먼 Morgan Freeman)와 함께 탈출에 성공한다. 이 둘의 동행은 영화 전반의 상징적인 축이 되며, 중세 영국에서 ‘이교도 무슬림과 기독교 기사’가 형제를 이루는 독특한 구조를 만든다. 마치 살라딘과 리처드1세처럼, 다른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지즈 역의 모건 프리먼이 활약을 할 때 터키인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친 것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또 다른 기억은 이 영화에 카메오로 나온 리처드 1세역의 숀 코네리(Sean Connery)였다.

리처드 1세는 1189년에 왕이 되었지만, 재위 10년 중 영국에서 보낸 시간은 6개월도 되지 않는다. 그 이유 십자군원정으로 2년 반을 보냈다. 그리고 귀국길에 포로가 되어 1년 반을 잡혀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전쟁에서 3년을 보냈다. 그리고 영국 방문은 단 한 번, 그것도 짧게 즉, 영국의 왕이지만 영국 백성들은 거의 왕을 본 적이 없다. 이런 왕을 로빈훗이라는 영화에서 전설의 왕으로 등장하게 한 것이다. 마치 신성로마제국에 많은 몸값을 지불하고 겨우 풀려난 왕을 영화와 소설에서는 전설의 왕으로, 왕의 귀환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이야기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십자군 이야기도 끝을 향하여 다가가는 느낌이 들어서 약간의 아쉬움마저 드는 것은 너무 이야기 속에 몰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표지사진: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대결을 묘사한 상상화, 13세기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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