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루마니아 선교보고: 우리 곁에 다가선 루마니아 교회 » 글 이창배 발행인
평택순복음교회 담임 강헌식 목사님과 동교회의 협동목사로 사역 중인 이창배 목사는 지난 8월 18일 새벽 1시 20분 출발하는 카타르 항공 QR859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해 카타르 도하공항에 현지시간 05:05분에 도착했습니다. 비행시간으로 9시간 45분이 걸리는 중동의 카타르 도하공항을 경유해 4시간 15분을 대기하고, 다시 카타르 항공 QR0221편으로 루마니아 오전 09시 20분에 출발해 4시간 55분 만인 오후 14시 15분에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카레스트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 경유 대기 시간을 포함한 장장 18시간 55분만에 선교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 부카레스트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강헌식 목사님의 경우는 교회에서 저녁예배를 마치고 출발한 저녁 9시 40분부터 계산해 보자면, 22시간 반 만에 선교 현장으로 발을 딛게 된 것이니, 그 길이 참으로 멀고 먼 길인 샘이다.
부카레스트 공항에서 정홍기 선교사님의 마중을 받으며, 준비된 숙소로 이동해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1시간여를 휴식한 다음, 일행은 루마니아 현지 교단 연합회인 오순절교단, 침례교단, 형제교단의 교단장 및 총무와 회동하고 저녁 만찬을 가지기 위해 JW 메리어트 부쿠레슈티 그랜드 호텔로 이동했다. 그러니 잠시 쉴틈도 없는 숨가쁜 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오티 부나치우 박사(침례교 신학대학 교수), 치프리안 교르게 박사(순복음 미션 스쿨 대표), 넬루 보케안 목사(임마누엘 교회 목사), 니꾸 오로스 목사(필라델피아 교회 목사), 커털린 바실레 교수(IT 전문가), 코르넬 하워드 목사(복음주의 협회 회장), 단 미트라(형제들 교단 총무), 디모티 미트로판(바이블 리그 대표) 이외 4명 등 총 13명의 루마니아 교회 개신교 지도자들과 첫 회동을 가졌다.
Contents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 40년 역사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9년 공산주의 국가인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자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스탈린주의 정권하에서 여러 요직을 맡았으며, 나중에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서열 2위에 오르게 된다. 그 후 1965년 3월 게오르기우데지의 사망 이후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를 승계받았으며 1967년에는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취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방문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마오쩌둥의 문화 대혁명에 감명을 받았다. 루마니아로 돌아온 그는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으로 우상화하면서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 체제를 모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문화 대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사회가 획일화된 모습에도 영향을 받았다. 1971년 7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7월 체제를 선포하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귀환했음을 알렸으나, 이는 종교적인 색채가 가득한 원시적 선동에 불과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차우셰스쿠가 이오시프 스탈린의 후계자이자 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부활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대체적으로 과장된 것이며, 사실이라고 받아드려지지 않는다. 소비에트 연방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국가의 주인이자 정부의 지도 세력으로 생각했지만, 차우셰스쿠 정권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를 그저 수단으로만 취급했다.
1974년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직분에 대통령직을 추가하여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차우셰스쿠의 정치는 심각한 공포 정치로 이어졌다. 특히 도청을 통한 불만세력 색출을 통해 국민들을 행동과 말 모두 통제했다. 당시 루마니아에는 인구 2,000만명이었는데 각 도시 및 마을에 300만 개의 도청기와 1,000여 개의 도청 센터가 설치될 정도로 빈틈없는 감시 때문에 차우셰스쿠 치하의 루마니아 국민들은 집안에서 조차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다. 차우셰스쿠의 정부는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전체주의 정권이었으며, 시대착오적이고 비상식적인 개인숭배, 기형적인 전체주의로 거세게 비판받았다.
1980년대에는 신격화까지 더해지며 차우셰스쿠의 개인숭배 현상은 세속 종교에 가까워졌다. 이런 현상은 날이 갈수록 극심해져 결국 영부인인 엘레나 차우셰스쿠까지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더욱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되었고 그들은 점점 더 자신들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과 맹목적인 숭배를 강요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에게 영감을 받은 차우셰스쿠는 ‘지도자(Conducător, 콘두커토르)’나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Geniul din Carpați 지뉼 딘 카르파티)’와 같이 온갖 숭배와 미사여구들로 가득한 명칭을 제작하여 자신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차우셰스쿠 정부는 대규모 재개발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루마니아의 교회와 기타 여러 역사적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철거했다. 부쿠레슈티의 전 수석 건축가인 알렉산드루 부디스테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를 보는 것만으로도 차우셰스쿠는 괴로워했습니다. 철거하든 옮기든,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면 상관없었습니다.”— Alexandru Budistenu, 2019년 1월 9일
1989년 티미쇼아라에서 발생한 시위는 정부가 인종 간 증오를 조장한다는 혐의로 기소된 헝가리계 목사 라 슬로 퇴케시(László Tőkés)를 퇴거시키려는 시도를 지원하면서 촉발되었습니다. 그의 헝가리계 신도 들은 그의 아파트를 에워싸고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루마니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지만, 이 시위는 곧 초기 목적과의 연관성을 거의 잃고 더욱 일반적인 반정부 시위로 변질되었다. 1989년 12월 17일, 정규군, 경찰, 그리고 세쿠리타테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1989년 12월 18일, 차우셰스쿠는 티미쇼아라 반란 진압 임무를 부하들과 아내에게 맡기고 이란으로 국빈 방문을 떠났다 12월 20일 저녁 루마니아로 돌아온 차우셰스쿠는 더욱 긴박해진 상황 속에서 중앙위원회 건물(CC 빌딩) 내 TV 스튜디오에서 TV 연설을 통해 티미쇼아라 사태를 “루마니아 내정에 대한 외국 세력의 간섭”과 “루마니아 주권에 대한 외부의 침략”으로 규정했다.
티미쇼아라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정보가 전국 언론을 통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던 차우셰스쿠는 다음 날인 12월 21일, 부쿠레슈티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12월 21일 혁명 광장 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는 차우셰스쿠가 수년간 해왔던 여러 연설과 비슷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과와 루마니아의 “다자간으로 발전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티미쇼아라 폭동의 책임을 “사회주의를 파괴하려는 파시스트 선동가들”에게 돌렸다. 하지만 차우셰스쿠는 군중의 분위기를 오판했다. 연설을 시작한 지 약 8분 만에 몇몇 사람들이 야유와 야유를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은 “티미쇼아라!” 를 외치기 시작했다. 군중을 통제하지 못한 차우셰스쿠 일당은 루마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 안으로 숨었다.
1989년 12월 22일 아침까지 반란은 이미 전국의 모든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그와 엘레나, 그리고 다른 네 명은 헬리콥터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곳까지 따라온 시위대보다 불과 몇 초 앞서 있었다. 수도를 떠나 헬리콥터를 타고 차우셰스쿠의 스나고프 자택으로 갔다가 다시 트르고 비슈테로 도피했다. 군대의 착륙 명령으로 헬리콥터를 트르고비슈테 근처에 버려둔 채, 차우셰스쿠 부부는 경찰에 붙잡혀 있었고, 경찰은 결국 그들을 군대에 인계했다.
198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차우셰스쿠 부부는 루마니아 임시 정부인 민족구국전선의 명령에 따라 작은 방에서 소집된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들은 불법적인 재산 축적과 집단 학살을 포함한 혐의에 직면했다. 재판이 끝난 후, 차우셰스쿠 부부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함께 죽기를 요구했다. 두 사람이 성벽에 기대어 서자마자 총살형 집행대는 사격을 시작했다. 그날 늦게, 처형 장면도 루마니아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서둘러 진행된 쇼 재판과 처형된 차우셰스쿠의 모습이 비디오로 녹화되었고, 그 영상은 처형 이틀 후 여러 서방 국가에서 공개되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자료 인용)
공산 독재 정권을 경험하며, 순교자를 낸 루마니아 개신교 지도자들
한국에서 방문한 우리 일행을 환영하고, 따뜻하게 맞이한 루마니아 교회 개신교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이미 미션 루마니아 행사를 통해 한국을 방문했던 몇몇 목사들이 있어서 그 분위기는 참으로 화기애애한 가운데, 매우 친밀하며 좋았다. 특히 이들과 한국과 루마니아 간의 선교협력을 논의하고, 함께 공산주의 정부 수립인 1945년부터 독재자 차우세스코 정권의 붕괴를 맞이한 1989년 12월 25일까지 근 45년 간에 걸친 철권 통치를 경험하면서 수많은 순교자와 함께 교회와 복음을 지키기 위한 교회 지도자들의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간증을 들었다.
2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부크레스트에 도착 하자마자 루마니아 교회 지도자들과 간담회를 통해 공산주의 기간동안 경험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개신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간증을 들으며, 우리 일행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루마니아는 정교회가 주류를 이루는 국가이다. 그런 가운데 개신교회는 그 어디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는 열악한 상황 가운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성경을 보급하고, 또한 공산주의의 극한 감시를 뜷고 성경을 전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펼쳐온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값진 복음의 역사를 그냥 듣고 넘기기엔 너무도 아쉬운 나머지 우리는 이들의 간증을 수집해 이들이 겪은 감동의 드라마를 보존하고, 세상에 특히 우리 한국에 알려야겠단 다짐을 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안연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닐지. 풍요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우리 자신도 모르게 고급지며, 윤택이 나는 멋진 교회생활에 취한 것이나 아닐지, 공산독재를 경험하고 어느덧 36년이 지났음에도 이들에게 공산주의 시절의 신앙과 뜨거운 복음전도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김일성 주체사상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북한 동포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싶어한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어디에서든 루마니아 기독교인들은 진심으로 기도한다. 이번 루마니아를 방문하면서, 그 첫 만남을 가진 교계 지도자들에게서 고스란히 전해지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러한 예비된 복음의 증거자들을 만나도록 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루마니아까지 올 수 있도록 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마음에 닿았다.
우리에게 없는 순수한 복음 전도의 열정, 그들은 오늘날 루마니아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부와 성공을 거두면서 나약해진 믿음을 곧추 세우려는 의지가 돋보였다. 오늘날 루마니아는 기회의 땅이다. 루마니아인들에게는 여전히 복음의 역사가 진행된다. 적어도 유럽 땅에서 루마니아만큼 역동적으로 개신교가 부흥하는 나라는 없다, 적어도 필자가 알기에는 그렇다. 소위 순복음이라 불리는 오순절 교단은 전 루마니아에 3천개의 교회, 50만여 명의 성도를 가진 최대의 교단이다. 해외에 디아스포라 교회가 300여 개가 된다 한다. 침례교회의 경우, 2000개 정도의 교회를 가졌다. 30만 명 정도의 성도가 있다 한다. 그리고 형제들 교회의 경우도 1500개의 교회, 20만 명 이상의 성도가 있다고 하니, 놀랍다. 그 뿐이 아니다. 이 교회들이 지금도 부흥하는 중이다. 전체 2천만 명 인구 가운데 개신교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100만 명이 넘는 약 6.5% 정도의 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티투스 코르러쩨안 상원의원과의 만남
루마니아 부크레스티에서의 둘째 날 아침, 호텔에서 조식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부지런히 서둘러야 했다.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루마니아 상원의사당을 겸한 헌법재판소로 사용하는 상징적인 건물 인민궁전을 둘러보기 위해서 이다. 티투스 코르러쩨안 상원의원이 특별히 배려해서, 의사당 내부를 둘러보는 공식적인 투어에 초대를 해줬다. 다행히 교통 트래픽을 피해 10시까지 국회의사당에 도착해, 티투스 의원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공식 가이드를 소개 받았고, 근 한 시간에 걸친 건물 내부를 둘러봤다.
세계에서 단일 건축물로는 두 번째로 큰 건물이라 했다. 내부에는 루마니아의 각 양 특산품으로, 특히 대리석으로 건축이 됐으며, 그 웅장함과 거대함이 압도적이라 할만했다. 독재자 시절 루마니아를 세계에 자랑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답게 각 통로마다, 각 방마다 그 장식이 달랐으며, 카페트에 상들리에까지 어느 것 하나 고급스럽게 요소 요소 꾸며지지 않은 곳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정작 차우세스코 자신은 이 건물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운명을 마쳤다 한다. 오늘날은 루마니아 최고의 입법, 사법부가 자리하고 있는 정치의 1번지이다.
이렇게 1시간 가량 내부를 둘러본 뒤, 우리는 예상치 못했던 티투스 코르러쩨안 상원의원의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우리를 위해 바쁜 일정을 조절해 커피 타임을 만들었다는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감사했다. 그만큼 이 분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정치인은 아니다. 루마니아 외교부 장관, 법무부장관을 역임하고, 상원의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정치/외교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곧, 루마니아 집권 여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는 선거를 앞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한국에서 루마니아를 방문한 교회 지도자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에 감동이 밀려왔다.
이렇게 만난 티투스 코르러쩨안 상원의원은 기독교인 답게 매우 겸손하고, 검소해 보이는 첫 인상을 풍겼다. 그의 집무실도 검소했다. 커피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개신교인으로 지금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는 성도 100여 명이 모이는 부카레스트의 교회란다. 그러며, 자기는 이 교회가 교회당을 찾고는 중이며, 마침 오늘 부카레스트 시장을 통해 교회가 사용할 예배처를 소개 받기 위해 금식 하며 기도하는 중이라 했다. 교회에서 청년들과 만나며, 그들에게 교사로서 봉사도 한다고 했다. 신실한 한 사람의 성도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를 존중하고, 그를 위해 기도를 쉬지 않고 있다고 했다. 특히 최근 집권 여당의 당 대표로 추천을 받아서 출마하게 됐는데, 자신이 개신교인이라는 이유로 이런저런 방해와 모함과 비방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항상 악한 영과 흑암의 권세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이 크리스챤으로써 당연한 것이니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라며, 이러한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일행은 티투스 코르러쩨안 상원의원은 루마니아 정치지도자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종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지도자가 되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했다. 오히려 이렇게 정치인으로서 최정상의 자리에 있는 정치지도자가 순수하고, 또 순결한 마음으로 나라의 미래와 국가의 청렴한 청지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음에 일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진솔하게 신앙을 실천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이러한 훌륭한 나라의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리라 마음의 소원을 가지며 국회의사당을 나섰다.
함께 동행한 정홍기 루마니아 선교사님은 “정치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대중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담대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편견과 공격들을 마주 하지만 우리의 구원이시요, 산성이시며, 요새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부르심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라며, 오늘 아침에 만난 루마니아 상원 정치/외교 위원회 위원장 “티투스 코르러쩨안” 의원의 신앙고백을 듣고는 “가슴이 뭉클하게 격려와 도전을 받고 한국 목사로서 뜨거운 기도를 하였으며, 특별히 루마니아의 오랜 전통 정당의 대표로 출마한 의원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의 모습이 특별한 감동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티투스 코르러쩨안 의원에게 지혜와 담대함을 주시기를 기도해 달라”며 부탁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섬세하신 인도함이란 믿음의 확신이 들었다.
2일차/ 트란실바니아 왕국의 역사탐방에 나서다
루마니아 방문 이틀째, 오전에 티투스 코르러쩨안 상원의원을 만난 후 우리 일행은 곧바로 루마니아 중부의 넓은 평원과 산을 지나 수체아바에 가는 장정에 올랐다. 처음 와 본 루마니아의 자연에 피곤한 몸과 마음이 어느듯 힐링이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먼길을 가야한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지나는 길에 위치한 트란실바니아 왕국의 역사를 탐방할 겸 먼저 중부 산악지대에 시나이에 위치한 왕궁을 둘러보기로 했다.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어: Transilvania 또는 Ardeal, 헝가리어: Erdély 에르데이[*])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중서부에 해당하는 역사적 지역이다. 중세 기간에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성립해 있었다(위키백과). 오늘날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 중부와 서북부의 16개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면적은 103,600 km2이다. 2002년 센서스에 따르면 트란실바니아의 인구는 722만 1733명으로, 루마니아인이 다수이나, 헝가리인(141만 5718명) 및 로마인, 독일인 등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으나, 이후 루마니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까지도 다수의 헝가리인이 거주한다. 1938년 빈 중재 당시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 북부를 헝가리에 할양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다시 루마니아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어: Regatul României 레가툴 로므니에이[*])은 1881년 3월 13일 ~ 1947년 12월 30일 사이에 존재했던 입헌 군주국이었다. 1861년에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병합하여 세워진 루마니아 공국은 1877년 독립전쟁(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의 일부)을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전쟁의 결과로 1878년 베를린 조약에서 루마니아는 독립이 공인되고 도브루자도 얻었다. 1881년 3월 15일, 루마니아 의회는 완전한 독립의 증표로서 국가를 왕국으로 승격시킨다. 같은 해 5월 10일 독일 호엔촐레른 가의 카롤 1세가 초대 국왕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역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카롤 1세’의 즉위로 시작되어, 1947년 12월 30일 동맹국들의 암묵적 동의 하에 (얄타 비밀 협정의 결과) 소련이 강요한 ‘미하이 1세’의 퇴위와 함께 종료된 역사를 가졌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라는 두 종속 공국의 동군연합으로 시작된 루마니아는 1859년부터 1877년 사이에 호엔촐레른 왕가가 지배하는 완전한 독립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말미인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는 트란실바니아와 동몰다비아(베사라비아), 부코비나가 루마니아 왕국에 통합되어 대루마니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는 베사라비아, 북부 부코비나와 북부 트란실바니아, 남부 도브루자가 각각 소련, 헝가리, 불가리아에게 양도되었으며, 종전 후 북부 트란실바니아만 다시 회복하였다. 1947년 마지막 왕이 퇴위를 강요당하면서 루마니아 공산당에 의한 사회주의 공화국이 왕정을 대체하게 되었으며, 그 후 1965년 3월 사회주의 공화국의 서기장 게오르기우데지의 사망 이후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를 승계받아 전체주의 독재 국가로 이어지디가, 1989년 12월 혁명으로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로 회복됐다. (출처: 위키미디어 자료 인용)
3일차/ 수체아바에 도착해 첫 예배를 드리다.
둘째날에 우리 일행은 시나이의 왕궁을 거쳐 드라큐라성으로 유명해 진 브란성을 둘러봤다. 그리고 인근 팬션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그 이튿날에는 수체아바까지 장장 9시간 넘게 차를 타고 산과 계곡을 지나는 대장정이 시작됐다. 끝이 보이질 않는 드넓은 평야지대와 강과 산야를 넘나들며, 마주친 “비카즈” 호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푸른 하늘에 비추는 호수는 장엄하면서도 포근해 보이는 산들에 둘러 쌓여있었는데, 마치 스위스의 풍경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듯 했다. 루마니아라는 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이 숨겨져 있다라는 사실에 놀랐고, 하나님 창조의 대자연의 걸작을 보게 될 줄이야! 우리 일행이 모두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사를 연발해야 했다. 하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듯, 수체아바에 언제 당도하게 될 지 마음도 조급해 졌다. 아침에 호텔을 나선지 어느덧 8시간 가까이 자동차로 계속 이동해 왔다. 이렇게 먼 길이었나 싶을 정도로 깊은 산지를 벗어나는데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그런데 수체아바에 가까이 올수록 계곡을 따라 깊이 파여진 홍수의 흔적이 나타났다. 엄청난 홍수가 휩쓴 흔적이 불과 3~4일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에 수해가 집중되어 지역 교회들이 복구작업에 자원해 연일 바쁘게 봉사하고 있다는 연락도 접했다. 막상 그 현장의 한복판을 지나오면서 느낀 점은 수해를 입은 수재민들이 큰 어려움을 당했다라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연락이 왔다. 수요일 저녁 예배시간이 오후 8시라는 것이다. 숙소로 정한 스체아바의 “파벨 클립파” 목사님 게스트하우스에 여정을 풀고나서, 우리는 급히 복장을 갈아입고는 다시 교회까지 1시간을 달려갔다. 그곳은 시레트로 알려진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국경이 있는 지역이다.
2500여 가구가 형성된 지역의 가장 오래된 침례교회인데, 107년 전 제1차 세계대전에 군대에 나갔던 한 청년이 전쟁 중에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전도를 하여 세운 임마누엘 침례교회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체험한 청년이 마을로 돌아와서 전도를 하자 그 마을 주민 대부분이 교회에 나오게 됐다는 교회 역사를 들었다. 지금엔 그 마을에 다른 교회가 세워져 교인들이 분산되었지만, 마을 주민 50% 정도가 모두 기독교인이란 이야기에 절로 감동이 되었다. 이렇게 루마니아에 들어와 첫 집회는 수요일 오후 8시에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의 시레트에서 열렸다. 약 50여 명의 현지인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사인 강헌식 목사님의 힘찬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었다. 특별히 멀리 동방의 한국에서 목사들이 방문해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 동네 꼬마 아이들도 예배에 참석해 연일 신기한 듯 바라보는 눈빛에 깊은 호기심이 담겼다.
예배 후 만난 성도들도 무척 반가워했다. 대부분 나이든 노인 성도들이었지만, 그들의 모습에선 신실한 기독교인다운 정감이 느껴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수요일 저녁집회는 매우 은혜롭게 마쳤고, 우리 일행은 교회의 입구에 서서 일일이 교회를 나서는 성도들과 악수하며 축복 인사를 나눴다. 마침 이 임마누엘 침례교회 담임목사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수해복구작업을 위해 현장에 가야한다며, 봉사팀 조끼를 걸치고, 우리를 마중했다. 지난해 겨울 유난히 춥던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로 국경을 수없이 넘어온 피난민들을 위해 숙소를 마련해 주고, 따뜻한 음료를 나누어주던 마을 주민들의 봉사를 뉴스를 통해 접했던 필자에게도 감동이 남달랐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참으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욕심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순수한 루마니아 크리스챤들이란 생각에 절로 마음에서 감동이 우러났다.
4일차/ 루마니아 개신교 부흥의 현장 수체아바 현지 교회 방문
Mission Romania 사역 동역자인 “파벨 클립파” 목사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맞이한 첫날 밤은 몹시 피곤했다. 전날 하루 종일 비좁은 자동차 안에서 보낸 9시간의 드라이브가 끝내 김기 몸살로 찾아들었다. 이런저런 약을 먹고 잠에 들고자 했지만, 몸에 오한이 들어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체 아침을 맞았다. 수체아바에서 맞이한 새 날은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에 완연한 가을 날씨였지만, 몸은 여전히 노곤했다. 기침이 끊이질 않았다. 일행 가운데 정홍기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첫날 루마니아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된 지도자 가운데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서 많은 시간 담소를 나눈 교수가 마침 자신의 조카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했다며, 이 목사님도 코로나에 감염되신 것 같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최소한 코로나라면 감염 즉시 고열과 두통, 호흡 곤란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잠복기를 거쳐야 하는데, 바로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것도 아니라, 단지 피로에 지쳐서 일어난 몸살감기란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 아침 무렵에는 몸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됐고, 이러 저런 상비한 약들을 복용하면서, 기침도 많이 잦아들었다. 무엇보다 강사로 동행한 강 목사님에게 감기 기운이 감염 안 되도록 하는 게 급선무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빨리 내 몸이 회복되는 것이 중요했다. 마침 강 목사님이 내 상태를 아시고, 교회의 중보기도팀에게 알려서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메시지가 연속해 카톡창에 올랐다. 많은 위로와 힘이 됐음이다. 오늘 오전에는 루마니아 부코비나 지역의 개신교 리더들과 교제를 나누기로 계획되었다. 10시 쯤 모여서 세미나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몇 일 전 휩쓸고 간 홍수 피해 가정들을 돕는 일에 모두 동원 되어 계획대로 진행이 되질 못한 체 그나마 잠시 참석했다 현장으로 떠난 이들을 제외하고, 참여한 7명 정도의 소그룹과 미팅이 진행됐다.
마침 필자에게는 이 시간이 조금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숙소로 들어가 약을 먹고 누웠다. “사람이 마음으로 그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처럼, 강 목사님과 정 선교사님은 루마니아 복음주의 협회 회장과 몰도바에서 온 형제들의 간증을 듣는 시간으로 모임의 성격을 변경해 진행을 하였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뜻하지 않게 몰도바에서 6시간에 걸친 운전을 하고 참석한 너무 귀한 형제들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간증은 정말 놀라운 메시지가 되어서 우리 일행에게 들려졌다.
구 소련 공화국의 한 나라인 몰도바 공화국에서 가장 위험한 마피아 두목이 되어서 마약과 폭행을 일삼다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은 형제였다. 어느 날 독방에서 벽에 피로 쓰여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성구를 읽었다” 거의 3일 동안 의도적으로 그 벽에 쓰여진 글씨를 읽지 않으려고 등지고 외면했지만 끝내 하나님은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도록 강권하셨다. 결국 그 자리에서 형제는 회개 하고, 세례 받고, 전도 하기 시작했고, 옥중 결혼까지 하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무기징역에서 28년, 다시 12년으로 감형 된 후 14년 만에 출소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누구보다 신실 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다. 이 간증을 듣는 동안 일행들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강 목사님은 이 형제의 간증을 한국의 성도들에게 나누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책으로 출간하고자 약속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다른 여러 형제들의 간증이 있었다. 나이 든 세대의 목회자들은 전체주의 독재 정권 하에서 겪은 루마니아 성도들의 고난과 역경을 간증했다. 이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는 지금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모습을 보게 할만한 진솔하고도 중요한 내용을 담았다. 무릇 이러한 놀라운 이야기들은 차후, 간증을 추가적으로 수집해 국내에서 책으로 발행하게 될 예정이다.
이날의 저녁 예배는 어제 참석해던 침례교회와는 다른 형제들 교회에 속한 교회인데, 이 교회 또한 성령의 역사가 충만했으며, 성도 가운데 한 가정에서 준비한 저녁 식사 대접은 그야말로 풍성했다. 각종 바베큐를 준비했고, 그들의 깊은 사랑과 정성을 느끼게 할만한 배려가 담겨졌다. 넓은 정원을 가진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근처에 있는 형제들 교회에 참석했고, 이날 특별히 북한의 복음화를 위한 뜨거운 기도가 있었는데, 이 기도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마음을 뭉클하게 할만큼 진정이 담긴 기도였다. 우리 같은 한국인도 할 수 없는 북한 복음화를 위해 루마니아인들이 드리는 기도라니, 자신들이 겪었던 자유 없는 세상에서 살았던 피폐해졌던 삶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도록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루마니아 성도들의 진심 어린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런 기도를 루마니아에 와서 직접 들을 수 있다니,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날 강 목사님의 복음메시지는 매우 강력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루마니아에서도 강력하게 일어나기를 소망 했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성장에는 교회의 역할과 기도가 있다고 하는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이어 이창배 목사는 독일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특히 문서선교 사역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전했고, 이어서 정홍기 선교사님 아내인 이에스더 사모님의 특송이 있었다.
5일차/ 정홍기 선교사님 부부가 감기에 걸리다
5일차가 되는 금요일에는 결국 일행 가운데 강 목사님을 제외한 모두가 감기에 걸려서 콜록 콜록 기침이 심해졌다. 다행스럽게 강목사님이 건강하시다. 물론 본인 스스로 약을 미리 드시고 준비한 부분도 있겠지만, 특히 우리 일행이 방문한 수체아바 지역이 수해로 말미암아 감기가 유행병으로 확산되고 있다란 현지 목사님의 우려가 있던 차에 먼저는 필자가 가장 먼저 감기를 겪었고, 이제 좀 차도가 생겨서 나아질 때 쯤 정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감기로 고생을 하게 됐는데, 곧장 이어서 정 선교사님까지 기침 감기로 목 상태가 안 좋아졌다. 마음 한 켠에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면역력이 약한 나로 시작된 감기, 특히 기침이 한 자동차로 이동 중인 일행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미 감기를 겪었던 나는 지금 고생하는 정 선교사님 부부가 안쓰럽다. 특히 사모님은 예민해서 밤에 잠을 못 이룬다고 하니, 많이 미안했고 또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금요 저녁예배로 수체아바 순복음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 날이다. 설교 시간 전에 수체아바 담임목사님의 아들이 운영하는 고속도로 인근의 대형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대접 받았다. 성대한 식사였다. 교회의 중직자들도 이 자리에 참석해 교제를 나눴다. 교회의 규모도 꽤 있는 중형교회였다. 예배당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성도들이 참석한 에배의 말씀 증거에서 강 목사님은 한국의 일제치하, 625전쟁, 현재 한국의 성장과 부흥을 전하며, 아울러 평택순복음교회가 어려운 경제적 여건 가운데 오늘날 대형교회 규모를 갖추게 된 성장을 간증하는 설교를 했다. 이어서 본인의 간증까지 하는 복음적 메시지를 전했고, 성도들의 반응도 매우 뜨겁게 진행됐다. 하지만 마무리 하는 가운데 설교를 통역하던 정 선교사님이 감기 기운을 견디지 못한 채 쓰러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는 동일하게 성도들에게 임재하셔서, 모두가 뜨겁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루마니아에서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기도했다. 평택순복음교회에서 이뤄진 놀라운 교회성장과 건축의 역사를 자신의 교회에서도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를 뜨겁게 외쳤다. 이어 한반도 평화를 위해, 특히 북한에 복음이 들어가고, 공산주의 독재가 무너지고, 북한 백성이 자유를 얻는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뜨거운 기도를 했다. 이에 파벨 클립파 목사님이 정 선교사님을 대신해 운전한 차로 숙소로 돌아와 다음 날 아침 떨기나무 생명교회가 있는 토플레아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정말로 힘들고 고된 강행군이었다. 부카레스트에서 시작된 일정이 수체아바로 이어지고, 지난 3일간 수, 목, 금요일에 매일 저녁 열린 저녁예배가 무척 신기했다.
특히 이 시즌이 여름 휴가가 절정인 시기이다. 그런데 수체아바에는 큰 수해까지 입게 되어 사실 상 저녁집회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멀리 동방에서 온 한국 목사님의 말씀과 간증을 듣고싶은 성도들은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 받고, 교회와 지역 사회 그리고 국가의 귀감을 이뤄내는 진정한 복음의 역사가 루마니아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이 이곳까지 이르도록 이끄신 성령님의 역사가 아닌가. 몸은 비록 약하고, 피곤하지만 남은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한 각오를 내심 깊숙히 다지며 잠을 청했다.
6일차, 7일차/ 드디어 토플레아 (Toflea), 기적의 땅에 도착하다
지난 3일간 머물렀던 수체아바 지역, “파벨 클립파” 목사님 게스트하우스를 오전 10시경 출발해 근 6시간 정도를 달려서 토요일 오후 4시 경 테꾸치 (TECUCI)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해 미리 정해 둔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여기는 그나마 토플레아 (Toflea)에 위치한 떨기나무 생명교회와 가까운 도시로 유일하게 호텔이 있기 때문이다. 이 호텔도 주인이 집시라고 한다. 그래서 이 교회를 찾는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호텔이라고 했다. 도착한 시간, 우리 일행은 호텔 로비와 리스토랑을 가득 메운 집시들의 잔치를 처음 경험했다. 누군가의 결혼식이 있었는지, 집시 전통 복장을 갖추거나, 말쑥한 정장차림의 남여노소가 호텔을 가득 메운 체 담소를 나누고 있어, 처음 좀 낯이 설었지만, 거기서 우리를 마중나온 커피타누 바실레 목사를 만났다.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했던 모습 그대로 반갑게 맞이해 주는 모습에서 우리 일행은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주일날 아침 우리는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교회를 향해 출발했다. 다행히 그곳을 이미 방문했던 정홍기 선교사님이 길을 잘 알기에 찾아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처음 그런 지역을 가보는 우리 일행에겐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근 1시간 가량 들어가야 하는 외떨어진 곳이다. 주변에는 마을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과 구릉지대가 펼쳐진다. 이런 외딴 곳애 사람이 살고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지만, 막상 토플레아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근사한 집들이 밀집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형색색이라고 하기엔 나름대로 고급스러운 주택의 외형을 갖추고, 공사 중이거나 수리 중인 집들도 눈에 띠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거의 주택지이다. 가게도 한 두 곳 외에는 보이질 않고, 여타 도시처럼 보이는 상가가 없는 단순 주택가로 형성된 마을이라 아주 특이했다.
사실은 루마니아 도착하고 둘째 날, 오전에 만났던 티투스 코르러쩨안 상원의원이 마침 이곳 교회의 초대를 받아 다녀왔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이 마을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원래 집시동네라면, 그 동네 사람 약 85% 정도는 범죄자들이라는 게 사회 통설인데, 이 마을엔 전부가 예수를 믿는다. 그래서 이곳엔 회개한 사람들이 살고있다. 거기 중심에 떨기나무 생명교회가 있다며, 집시 동네가 복음화된 곳은 여기가 유일무이하다. 이러한 역사가 기적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토플레아(Toflea), 예전 루마니아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던 그 황량했던 벌판 한 가운데 섬처럼 존재했던 집시촌에 33년 전 한 명의 복음전도자가 들어왔다. 그가 바로 커피타누 바실레 목사이다. 실제로 당시 마을 인구의 85% 정도가 범죄자들 투성인데, 그들에게 온갖 비방과 협박을 당하면서도 불모지와 같은 땅에 교회를 개척했다. 천막 교회가 세워지고 그로부터 집시촌 사람들 한 두 명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종래엔 마을 인구 전체가 복음화 됐다. 전성기 한 때는 이곳에 1만 2천 명 이상이 거주했다가 지금은 5천여 명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이 교회를 중심으로 변화된 사람들 7,000명이 범죄없는 평화로운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유럽의 주요 도시에 디아스포라로 떠난 이들이 23곳에 교회를 개척했다.
이곳으로 들어온 한 명의 복음 전도자에 의해서 33년이 지나는 동안 성령의 역사와 복음의 능력으로 5천 2백여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된 기적의 현장이 바로 떨기나무 생명교회이다. 우리가 드디어 이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마음이 설레였다. 이렇듯 마을의 입구를 지나 동네를 한참 통과해 맨 꼭대기 언덕에 올라보니 거대한 그리스 신전과 같은 모습의 교회당이 우뚝 서있고, 교회에는 이미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오전 9시반, 예배가 10시부터라 아직 예배당이 가득 채워지진 않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히 오늘 세례를 받게 될 청년들이 흰색 세례복장을 갖추고 그들에게 지정된 자리에 하나 둘씩 앉기 시작했다. 오늘 세례를 받을 대상자가 120명이라고 했다. 루마니아 교회는 특성상 예배당에 남녀의 자리가 구별되어 있다. 예배당이 채워지기 시작하며, 어린이들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정장을 입거나, 깨끗하게 차려입은 복장으로 삼삼오오 입장했다. 비교적 질서적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 앉는데, 어림잡아 예배실 좌석의 수가 근 2,500석 정도가 족히 되어 보인다. 어느 재직의 말로는 거의 3천명 정도가 예배실에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방문한 주간이 여름세미나 기간이었고, 오늘 주일이 그 피날레로 세례식을 진행한다고 한다. 이번 여름세미나 기간에 약 8,500명 정도의 집시들이 전 유럽에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들에겐 여기가 성지였다. 처음부터는 아니겠지만, 교회를 중심으로 변화된 집시들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지로 디아스포라고 떠나며, 곳곳에 집시들의 복음화를 위해 교회를 세웠는데, 그 지교회 수가 23곳이라고 했다. 이들이 8월 두번째 주간에 토플레아로 모여서 여름수련회를 갖게 되는데, 해마다 9천명 가량이 평균 참석한다고 하니,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이다.
이들의 한결같은 꿈은 동족인 집시 민족의 복음화이다. 유럽 곳곳에 흩어져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온갖 범죄에 연루되어 살아가는 집시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 이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주는 복음전함이 이들에게는 비전이며, 목표이다. 매년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연도별로 화면에 나타났다. 어떤 해에는 600명이 넘었고, 적게는 90명 정도였다. 그러게 세례를 받은 숫자가 5,200명을 넘겼다. 예배는 찬양과 기도, 성경과 짧은 메시지, 찬양과 기도 등으로 그 넓은 예배실 가득히 울려퍼지는 찬양이 프로급 성악가 중창단의 기름지고, 아름답게 화성을 갖춘 찬양으로 너무 은혜롭게 들려진다. 정말 대단했다.
이러한 예배가 시작되고, 1시간 정도가 흐른 뒤 강단에 오른 강헌식 목사님과 정홍기 선교사가 성령 충만의 복음 메시지를 증거했다. 열정적인 집시 성도들의 예배 집중도도 높았다. 주일 예배가 근 2시간 넘게 이어지는 가운데, 50여명의 아기들 헌아식이 진행됐고, 이어서 오늘 세례를 받게 되는 이들 120명이 소개가 되고, 세례 증서가 수여됐다. 1부 예배를 실내에서 마친 뒤 곧 이어 교회 정문에 마련된 남녀 세례장 주변으로 성도들이 가득 메우고, 이번에는 세례자들을 위한 메시지와 찬양과 기도가 이어졌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찬양이 넘쳐나는 가운데 남녀 따로 마련된 세레장에서 침례가 진행됐으며, 이 세례식이 마쳐질 즈음 오후 3시가 넘어섰다.
우리 일행은 안내를 받아, 교회 장로님의 가정에 준비된 만찬 장소에 초대를 받아 갔다. 지난 4월에 한국에 다녀간 9명 제직들이 모두 참석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국 방문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너무 좋아서 매년 한국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며, 평택순복음교회를 방문하는 것을 정례화해서 두 교회 간 선교적 교류를 갖자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한편 떨기나무 생명교회 커피타누 바실레 목사는 미리 준비한 양 교회 협력 감사패를 강목사님에게 전달했으며, 이에 대해 강목사님도 내년에 한국을 방문할 때 감사패를 전달하며, 선교협력 MOU를 맺자고 화답했다. 이로써 이번 루마니아 선교 방문의 대단원을 맺는다.
마무리/ 미션 루마니아 프로젝트 ONE 2025를 마치며
사실 이번 행사는 면밀한 사전 계획 없이 어쩌면 즉흥적이다할만큼 단 기간에 이루어진 선교지 방문 성격이었다. 몇 년 동안 루마니아에서 한국을 찾아오는 매해 약 40명 정도의 그룹들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 언제고 꼭 루마니아를 방문해보고 싶다는 마음의 기대가 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올 4월 한국을 4차 방문한 루마니아 팀에 색다른 그룹이 참여하게 됐다. 이들이 바로 떨기나무 생명교회 사역팀이다. 바로 커피타누 바실레 목사와 교회 장로 및 사역자들 9명이었다. 그런데 같은 루마니아 팀이지만, 이들은 루마니아 현지인들로 구성된 그룹과 엄연히 구별이 됐다. 다른 이들에 비해 복장과 행도, 문화적 스타일이 달랐으며, 심지어 잘 어울리질 않았다. 그래서 이들을 전체 루마니아 팀에서 분리해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제주 국제순복음교회 (박명일 목사님 시무) 로 보내고, 한 미션루마니아프로젝트팀은 필자가 사역하는 평택순복음교회로 안내하게 된 일이 생겼다.
이렇게 평택순복음교회에서 참석한 이들은 먼저 한국교회의 주일예배를 난생 처음 드리게 되는 감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에게 늘 따랐던 집시 민족이라는 차별과 눈총 없이 오히려 따뜻한 환대와 믿음 안에서 형제로 받아 들여지는 분위기에 큰 감동을 받게 된 것이다. 더구나 강헌식 목사님의 배려로 이들을 이끌고 방한한 커피타누 바실래 목사를 강단에 세워, 그들의 교회를 소개하도록 해 준 그 시간이 너무도 고마웠던 모양이다. 왠지 경계심이 가득하던 이 팀원들의 얼굴이 펴지고, 눈에는 따뜻한 정감이 생겨났다. 얼마나 진심으로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지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들이 집시라는 이유로 유럽과 루마니아에서 받는 차별과 경멸은 유럽에서 사역을 해 본 필자로서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다른 유럽인들과 섞일 수 없는 오랜 역사적 차별과 박해가 그들을 마이너리티로 내몰았고,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져 늘 범죄와 연관된 불명예를 안고 살아온 마음의 응어리를 한국 땅에 와서, 한국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차별 없는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여 졌으니 그들의 감격과 기쁨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인연으로 바실래 목사가 자신들의 여름수양회 기간에 강헌식 목사님과 필자를 꼭 참석해 달라며 초대를 한 일이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 또한 이러한 초대를 가볍게 넘길 수 없어서 8월 루마니아 방문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단순 방문 일일지라도 결코 쉬운 일 만은 아니었다. 몇 가지 기획한 일이 어긋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8월 여름철의 한복판에 해외를 다녀온다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무엇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란 생각이 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메인 강사로 참가할 강헌식 목사님 (평택순복음교회 담임)의 결단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바쁜 여러 일정을 조율해 루마니아를 방문하는 일정과 항공 스케줄이 최종 확정하게 되어서 성사가 된 것이다. 할렐루야~ 하지만, 사실 이 일이 진행되면서 우리 일행 모두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왜 이런 시국에 우리가 루마니아를 가야 했고, 하나님께서 예비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됐는지 깨닫게 되는 연속된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린다.
우리 방문팀은 몇 가지 사역을 추진하기로 뜻을 정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신앙적 귀감과 도전을 줄 수 있도록, 차우세스코 정권의 공산 전체주의 국가, 유일 독재 체제를 감내하면서, 그 안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경을 비밀리에 보급하다가 순교를 당한 그 후손들과 핍박과 박해, 고난 속에서 복음을 잃지 않고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부흥을 일궈낸 신앙의 사람들의 간증을 발굴해 역사적 기록에 남기도록 책 발행하고 보급하는 일, 또한 떨기나무 생명교회와 같은 케이스의 기적의 드라마를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제작해서 세계와 특히 한국 교회에 널리 알리는 일, 그들의 북한 주민을 위한 특별한 사랑과 기도를 통해 북한의 복음화와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위한 전략과 정책을 업그레이드해 가는 일 등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루마니아에서 현재도 일어나고 일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수없이 많다. 특별히 유럽에서 루마니아라는 나라를 통해 개신교의 부흥과 약동 하는 부흥의 역사가 집중된다. 또한 이 중대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 가운데 이름도 빛도 없이 집시들의 복음, 영혼 구령을 위해 유럽 각지에서 디아스포라로 활동하는 집시 사역자들이 그 예이다. 또한 루마니아 사람들이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와 유럽으로 흩어져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등 이 점은 어느 면에서 우리 나라 디아스포라들과도 매우 유사하다. 또한 루마니아의 어두운 시절, 공산주의 전체국가, 개인 독재와 우상화를 경험한 이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그들 스스로가 북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일상적이다. 동병상련이랄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들은 북한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기도를 줄기차게 하는 유일한 국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한국 교회를 배우기 위해 매년 선교 방문단을 이끌고,이미 4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또한 내년에도 이어진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북한을 위한 기도회와 복음을 전할 기회를 추진하는 중이다. 한국 교회가 기회가 닿을 때 루마니아 교회와 협력을 통해 유럽 지역의 복음화와 북한 선교의 효과적 전략을 마련해 가는 계기를 삼도록, “하나님께서 이번 루마니아 미션 프로젝트 ONE을 이루게 하셨다.”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오디오/팟캐스트 방송 듣기: https://youtu.be/UQoipL05n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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