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단? 이교? 의도래

이번 회부터는 십자군 운동의 근원이 된 이슬람교의 태동과 그리고 당시 기독교의 관계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기독교는 외부의 적이 없었기에 오늘의 시각으로 보자면 선교를 할 이유도 명분도 없던 시절이었다. 가만히 만 있어도 본전이라고 말할 수 있던 시절,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에 찾아와 기독교인 되는 시절. 아니 교인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기에 교회는 외부적인 문제에는 별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내부의 문제로 공의회로 모여 머리 싸움을 할 때 주후 570년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 메카(Mecca)에서 한 사람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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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메카에서 몇 안 되는 명문가인 쿠라이시(Quraysh) 부족의 하심(Hashim)가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가 죽음으로서 유복자로 태어났고 이름은 무하마드로 명명되었다. 무함마드(Muhammad)가 여섯 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 아미나(Amina)가 사망한다. 그래서 그는 조부의 손에서 자란다. 하심가의 장로격인 그의 조부는 메카의 가장 신성한 건물인 카바(Kaaba)신전 관리인이었다고 한다. 조부 역시 무함마드가 8세가 되던 해에 죽고 만다. 그래서 그는 낙타 무역상(카라반Caravan)으로서 장사를 하던 그의 삼촌 아부 탈리브(Abu Talib)밑에서 성장을 하게 된다.

지금부터 이야기는 필자의 글이 아니라 많은 부분을 이슬람 학자들의 글을 빌려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사실 이슬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카바 신전이 있는 메카와 예루살렘은 머나먼 곳은 아니지만 당시의 메카는 이교적 우상숭배가 만연했다고 한다. 그들이 숭배하던 이방신의 수는 약 360개에 달했다고 한다. 이슬람 학자들은 무함마드는 어릴 때부터 우상숭배를 혐오했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믿고 안 믿고는 독자의 생각) 필자는 그의 삶의 결과를 보면 그리 도덕적이지 않은 것에 한 표를 던진다. 그럴 듯한 이유가 나중에 나온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부터 무역에 종사했기에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가 장사한 지역은 주로 초생달 루트라고 불리는 지역과 왕의 대로 지역이었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기독교도 지역이었기에 비잔틴 제국, 동로마 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열린 종교회의에 대해서 그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것이다. 삼위일체와 성육신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지만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Platone) 과 그의 형이상학(idea)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Incarnation)삼위일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신관은 “하나님은 한분이시다”라는 유대교 신관을 그대로 가져온다. 그러나 구원관에 대해서는 유대교는 오직 선택된 선민 유대인만이 구원받는다는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 앞에서 그는 커다란 벽에 부딪힌다.

필자는 그가 장사를 다니면서 기독교인 지역에서 들은 이야기인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 기독교의 구원관을 도입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해 본다. 이슬람은 가장 뒤에 나온 종교답게 유대교와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부분 만을 채용하여 당시에는 가장 참신한 종교로 대중들에게 어필 되었을 것이다. 누구든지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이슬람의 공동체인 움마(Ummah)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빠르게 신흥 종교는 발전해 나간 것이다.

무함마드의 가족들

사실 무함마드의 사생활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먼저 밝힌다. 그리고 이슬람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지 필자의 논쟁적인 의도의 글이 아니기에 그냥 편하게 이야기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 이야기는 필수적이어서 꼭 해야 만하기에 필자 역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대상((隊商)의 주인이자 과부였던 카디자(Khdijah)의 밑에서 일했다. 그리고 그녀의 신임이 쌓이면서 후에는 전체 무역을 관리하는 지위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때 그의 이름은 무함마드보다는 신뢰할만한 자라는 뜻인 ‘알 아민(Al-Amin)’으로 불렸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25살 되던 해에 40살 카디자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 둘은 어린 나이에 죽었고 딸 파티마(Fatima)만 살았다고 한다. 무함마드가 종교에 심취하여 메디나(Medina)로 이주한 지 얼마 후에 무함마드를 키워준 삼촌의 아들인 알리(Ali)와 파티마를 결혼시킨다. 사실 이 결혼이 중요하기에, 언급할 필요가 굳이 없다고도 할 수 있는 무함마드의 가족 이야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리는 무함마드 사후에 4대 칼리프(무함마드의 후계자)오른다. 그러나 알리는 살해되고 알리를 추종하는 세력인 시아파(Shia)가 만들어지게 된다. 알리는 시아파 이슬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2세(Abdullah II)

현재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2세(Abdullah II)는 바누 하심(Banu Hashim)즉 하심 가문 출신이다. 그리고 그냥 요르단 왕국의 정식 명칭은 ‘요르단 하심 왕국’ 이다. 이는 무함마드의 증조부 하심가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무함마드의 혈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 모르코 왕국의 알라위 왕조의 제3대 국왕인 모하메드 6세(Mohammed VI)역시 하심 가문의 사람이다. 알리의 후손들이 펼친 이야기만 해도 엄청난 분량의 글들이, 책들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무함마드와 카디자의 결혼생활은 25년 동안 유지됐으며 카디자가 죽자 무함마드는 일부다처제를 실행했다. 어떤 자료에는 무함마드는 15명의 여인과 결혼했고, 그 중 13명과만 동침했다고 한다. 이 외도 몇 명의 정부를 두었다. 그러나 한 번에 9명 이상의 부인은 거느리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무함마드에게는 하나님이 수많은 부인을 둘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양능력에 따라 최대 4명의 부인만 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 난민 사태 때에 그리스 국경에서 몇 자칭 진실한 무슬림이라는 사람들과 어눌하고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함마드의 가족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은 성경에도 “다윗 그리고 그의 아들 솔로몬을 비유로 들면서 필자에게 무함마드를 옹호하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무함마드의 친구인 아부바크르(Abu Bakr)와 그의 딸(아이사)이 10살 되던 해에 무함마드에게 시집 보낸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이슬람은 이교인가? 이단인가?

근래에 와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이슬람을 타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태동기부터 지켜보아 왔던 비잔틴 제국과 교회는 이슬람을 기독교 이단으로 생각해왔다. 이 같은 생각의 흐름은 중세 종교개혁 시대까지도 이어진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존 칼빈(John Calvin)은 이슬람을 기독교 이단으로 보았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루터의 생각을 좀 더 들어가 보면 루터는 이단인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불의의 채찍’ 이라고 말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타락이 이슬람이라는 이단을 통해서 교회의 죄를 벌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 자체보다도 이슬람이 생기게 된 교회의 부패와 성직자의 타락을 더 크고 책임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루터는 이슬람은 교회가 회개하여 회복하시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루터의 마음속에는 모든 것이 가톨릭교회의 부정과 부패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이슬람에 대한 그의 판단이 당연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슬람이 생기기 전부터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고 피신한 네스토리우스파들은 초기에는 사산조 페르시아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신을 갔다. 그들의 지식과 기독교를 그곳에서 전파하면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터(Zoroaster)교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생 이슬람은 파르티아( Parthia)제국의 토대위에 생겨난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트리면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종교를 흡수하고 그리고 이슬람을 확장시켰다.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는 이슬람을 이교도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아브라함과 성경(구약)을 믿는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 이단들을 무함마드가 자주 빠졌다는 명상은 초기 기독교의 영지주의(Gnosticism)적인 영향력을 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젊은 대상 시절에 만났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을 기억했을 것이다. 또한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잘못된 이데아론까지도 배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더 나아가 초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부인하는’ 에비온(Ebion) 파의 영향력도 받았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에비온 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을 받음으로 선지자가 됐다‘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들 같은 한 선지자로 보았다. 또한 구원을 받으려면 구약의 율법과 할례를 지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 이단이었던 에비온파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시 바울 사도를 가장 힘들게 했던 이단들의 영향력을 말이다.

성서의 형제들

632년 무함마드가 병으로 죽는다. 그를 따르던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는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유한한 인간인 무함마드를 영원한 존재로 착각했던 공동체의 혼란은 보지 않아도 비디오처럼 선명하다. 더 이상 예언자가 나오지도 않는 상황 아래서 예언자를 대리하는 지도자가 이슬람을 이끌어야 했다.

무함마드가 사망할 당시 이슬람 공동체는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를 비롯하여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는 통치세력으로 성장해있었다. 무함마드의 동료들인 움마의 원로들은 부족 간 회의체인 ‘사끼파(Saqqifa)를 통해서 1대 지도자를 선출한다. 이러한 지도자를 그들의 언어로 ‘칼리파(Khalīfah)라고 불렀다. 즉 ‘알라의 사도인 대리자’라는 뜻을 가진 ‘칼리파 라술 알라칼리파트 알라 (Khalīfat rasul Allah)’의 줄임말이다.

무함마드의 오랜 친구이자 나중에 칼리프가 되는 아부 우마르(Abu Umar)는 무함마드가 죽지 않았고, 이슬람이 모든 종교를 지배 할 때 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부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도자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울 수 없었기에, 사끼파(부족회의)를 통해 1대 칼리프로 선출된 인물은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바크르다. 그는 무함마드의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하자 무함마드보다 세 살 어린 것으로 알려진 아부바크르는 그 당시 여섯 살 된 자신의 딸인 아이샤(Aisha)를 무함마드에게 아내로 주는 것을 허락했다. 이 둘의 혼인은 623년 또는 624년에 정식으로 이루어졌고, 아이샤의 나이는 약 10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부바크르는 이로써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 됐었다.

필자는 이러한 그들의 윤리를 이해하고 수용하기 많이 힘들었다. 그리고 세상을 소동케 한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 단체인 ISIS가 어린 여아들을 강제로 결혼한 사건들을 뉴스를 통해 보았기에 이슬람에서 아무리 무함마드를 신성시하고 고귀한 사람이라고 해도 동의하기가 힘들다.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바크르는 2년 동안 칼리프로 있다가 죽는다. 그리고 이슬람의 바울이라고 불리는 2대 칼리프인 아부 우마르(Abu Umar)역시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었다. 아부바크르와 마찬가지로 무함마드는 과부가 된 우마르의 딸 하프사(Halfsa)를 네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아부 우마르가 칼리프로 있었던 시기는 10년 동안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그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향해서 성서의 형제들이라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결과 당시 시리아와 이집트 중동지역을 이슬람의 색으로 바뀌게 된다.

우마르는 천성적으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부하 장군들이 화려한 옷을 입거나 사치를 부리면, 그는 강한 분노와 함께 심한 벌을 주었다. 한 예로 637년 우마르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그는 낙타를 타지 않고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가는 모습에서 겁에 질려있던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성서의 형제들 이라고 우대하면서 보호를 해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칼리프로 있었던 기간은 짧다면 짧은 10년 동안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교구의 대부분 교회들을 이슬람의 보호라는 명목아래 흡수해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교회의 입장은 이슬람의 보호를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심한 소외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다시 한 예를 든다면 중앙정부(콘스탄티노플)에 많은 불만을 가진 안티오키아(Αντιόχειας) 지역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및 네스토리우스(Νεστόριος)의 종교 문제이전에도 중앙 정부로부터 정치적, 재정적인 홀대를 당해왔다. 당시 안티오키아에는 대주교가 세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대주교들은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자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는 결론과 판결을 내려 한 사람을 선택하게 했다. 셋을 따르는 신자들 중 3분의 2는 당연히 황제의 판단에 불만을 품었다. 이 와중에 고트(Goths)족과의 전쟁으로 인한 평화 비용자금 마련으로 세금까지 대폭 인상되자 안티오키아 시민들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고트족과 전쟁은 제국의 유럽지역인데도 그 비용을 안티오키아와 아시아 지역에서 지불했다. 불만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시민들이,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거리를 끌고 다녔다. 하지만 폭동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화가 난 테오도시우스황제는 안티오키아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그리고 모든 권리를 박탈시킨 후 공중 목욕탕과 원형 경기장, 대극장을 폐쇄 시켰다. 주모자들을 체포했고 심한 고문을 통해서 그들의 재산을 모두 경매에 붙인 후 국가에 귀속시켰다. 안티오키아 대주교 플라비우스(Flavius)가 찾아가 자비를 간청하자 테오도시우스가 겨우 사면령을 내렸다. 이러한 차별을 받아온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아시아와 중동지역의 교회들이, 성경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고 손을 펴는 이슬람의 품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필자는 오래전에 부다페스트(Budapest)를 다녀온 적이 있다. 도나우 강을 두고 강북 지역인 부다(Buda)와 강남 지역인 페스트(pest)로 나누어진 도시가 부다페스트다. 페스트 지역은 합스부르크(Habsburg)가문인 가톨릭 왕국의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종교 개혁 전의 개혁자인 얀 후스(Jan Hus)파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비엔나 공방전을 앞두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술래이만(Suleiman)의 부대는 강 하나를 두고 오랫동안 대치했다. 건너편 합스부르크의 군대와 서로가 대치하는 가운데서도 얀 후스 파의 개혁 형제단. 의 교회를 박해하지 않아다. 아니 오히려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필자에게 부다페스트를 안내해준 현지사역자의 이야기다.

아마 아부 우마르가 이러지 않았을까? 이슬람의 전략가들은 요샛말로 심리전을 통해서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하는 인지 전쟁(Cognitive War)또는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의 선구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호부터는 이슬람 내부의 이야기가 아마도 나와야 할 것 같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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