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나아감에 대하여

‘오아시스 타임’을 보내며 우리는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재확인할 수 있다. 내면의 나침반을 다시 설정해 중요한 일을 기억하고 실행할 수 있다. 쉬면서 목표와 꿈을 향한 방향감각을 되찾고, 열의와 건강을 빼앗는 피로와 번아웃의 악순환을 끊는다. 다른 사람과 다정하고 느긋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한마디로 오아시스 타임은 당신의 삶을 구한다. – [책 내용 중에서]

[북스저널] 쉼과 나아감에 대하여 » 마릴린 폴 지음/ 김태훈 옮김/ 출판사: 북플레저 »

책의 원제는 “An Oasis in Time”인데, 작가가 말한 ‘오아시스 시간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정해진 규칙보다, 가치를 따르는 삶을 더 우선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를 찾아야 할 시간을 지켜나가는 것이 오아시스의 시간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너무나 터무니없이 많은 것에 연결돼 있습니다. 이런 문명의 이기가 생산성을 높여주고, 우리의 생활을 크게 개선해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연결망 때문에 갈수록 단점이 명확해 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디지털 기기가 같이 사는 가족 사이의 소통과 유대를 막는 장벽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기에, 대화를 잃어버린 가족은 인간에게 결코 좋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저자가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면역결핍질환으로 죽음과 마주 대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저자는 유대인의 지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고, 여기에 저자만의 성찰을 더 해서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도록 이끄는 휴식법을 고안했습니다. 그래서 책에는 저자가 발견한 오아시스 시간을 누리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매뉴얼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 자신만의 시간을 찾겠다고 말하는 것은 저자의 표현처럼 무척 ‘도발적인 행동’입니다. 이는 정보산업사회에서 자신이 생산자와 소비자 이상의 존재라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산업사회로 접어든 후, 인간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됐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항하듯 마음과 영혼을 돌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선언한 후, 공동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긴장의 속도를 늦춰 공동체와 함께 어울리며, 삶의 축복을 경험해서 좋은 하루를 보내는 일이, 궁극적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더 행복한 길로 이끕니다.

우리는 흔히 안식일 혹은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사회 시스템이 유대교에서 나온 후 기독교를 거쳐 전 세계로 퍼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수천 년 동안 존재했던 사회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최초로 휴식일을 가진 곳은 7일마다 광범위한 활동이 금지됐던 바빌로니아고, 헬레니즘과 그리스 문화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각각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안식일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 기원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의 일요일과 이슬람교의 금요일에 관한 시스템은 그 기원이 명확합니다. 그러나 7일마다 광범위한 활동을 금지했던 바빌로니아와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기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거기에 편승해서 일요일과 금요일을 예배의 날로 삼은 면도 있습니다.

책에는 오아시스 시간을 누리는 삶이 가져다주는 이점에 관한 사례가 여럿 나옵니다. 저자가 소개한 덴마크 사람들의 경우 일상생활의 속도를 늦춰서 안락하고 포근한 행복감을 창출하고, 삶의 보편적인 부분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을 즐기는데, 이런 일이 주는 느낌을 그들은 ‘휘게(hygge)’라고 합니다.

그런데 덴마크 사람들에게 ‘휘게’는 뜨거운 코코아와 맛있는 케이크, 난롯불 같은 요소도 있지만, 핵심은 이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이런 여건을 조성한 후, ‘가까운 사람이 자주 모이면서 만드는 편하고 친근한 분위기를 천천히 즐기는 것’을 ‘휘게’의 핵심으로 봅니다.

멈춤의 시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자는 거기에 덧붙여 그런 ‘멈춤을 멈추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휴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육체적 차원뿐 아니라 정신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쉬어야 한다는 신호를 계속 무시하고 살아가면서, 일중독에 빠져 오히려 생산성이 더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론 일중독에 빠지고 싶어서 빠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삶의 다른 영역에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한 생존 본능에 충실하다고 보니 일중독에 빠집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궁극적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으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일에만 매달려서 삶의 다른 영역을 소홀히 하면, 그는 결국 고립으로 자신을 이끌게 된다고 합니다. 또 저자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만 일중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가정주부, 학생, 예술가, 임시직 종사자, 자영업자, 심지어 무직자도 일중독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로 들어 우리 삶의 속도가 계속 빨라졌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행동에 취해 있으며, 디지털 기기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만들기에, 무직자마저도 일중독에 빠진다고 합니다.

넘치도록 일과를 채워서 일을 잘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두지 않고 마감일을 정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관행입니다. 또 어떤 경영주는 이렇게 해야 고용인이 일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번 일을 조속히 매듭짓고 다음 일로 급하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공을 들이는 장인이나 미술가처럼 살아갈 때 기분이 더 좋아지고, 경영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생산성과 효율이 더 높아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경영자가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불량률이 적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오아시스 시간을 갖는 것은 일중독과 그 이면의 불안을 건설적으로 드러내고 대응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기에, 경영자들이 원하는 불량률을 줄이는 탁월한 비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확실한 오아시스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변화 저항(immunity to change)’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는 변화를 원하면서도 종종 그런 노력을 방해하는 인간의 습성입니다. 우리는 어떤 변화가 우리에게 좋은지 알면서도, 속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해물을 만들고 이를 꾸미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안에 두 존재가 공존하는 것처럼, 휴일에 쉬고 싶어 하면서도 항상 다른 일거리를 찾습니다. 이처럼 ‘상충하는 의지’는 변화에 대한 욕구가 무엇이든,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로 가는 발걸음을 막습니다. 그러니 저자의 제안대로 변화 저항을 넘어서서, 여러분만의 오아시스 시간을 가꿔 보시기 바랍니다.

필자 정이신(以信) 목사/ 본지 북스저널 전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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