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1950년대 자유주의자와 1960년대 혁명가의 차이는 전자가 진지하고 회의적인 성향이 있었다면, 후자는 낙관적이며 즐길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사회를 더 변화시켰을까요??? 내 생각에는 후자입니다. 존 케이지가 ‘진지한’ 유럽 미학을 내던지면서, 1960년대 초부터 해프닝과 팝아트 그리고 플럭서스 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1970년대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의심의 여지 없이 ‘비디오’입니다. ‘비디오Video-비디아Videa-비디어트Vidiot-비디올로지Videologie.’ 이제는 비디오가 ‘시’처럼 될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 [책 내용 중에서]


[북스저널]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 백남준 글/ 에디트 데커•이르멜린 리비어 편집/ 임왕준•정미애•김문영•이유진•마정연 옮김/ 출판사: (재)경기문화재단 백남준 아트 센터 »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둬야 할, 이 책에 관한 정보가 있습니다. 이 책은 백남준이 발표하지 않았던 에세이, 악보, 편지, 팸플릿, 기사, 인터뷰, 시나리오를 한데 모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발행한 곳에서는 일부러 백남준이 남긴 글의 장르에 구속되지 않고, 자료 간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연대의 역순으로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 방법이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잡지를 능숙하게 넘기는 손길에 따라 뒤에서부터 천천히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청년 백남준이 자신의 길을 열어가는 연대기적 흐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는다면,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백남준 예술 세계 기원의 ‘즐거운 계보’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임의접속으로 페이지를 펼치면, 우연한 마주침을 즐길 수 있습니다.

책을 이렇게 제작한 이유는 독자가 이미 주어진 지식과 역사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 바람이 백남준이 그의 예술 세계를 통해 추구했던 일이기에, 책을 이렇게 구성했습니다.

책에서 백남준은 20세기를 우스꽝스러운 오류를 수없이 범한 세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오류 중에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첫째, 벨기에 국경까지 닿지도 않은 프랑스의 마지노선 방어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치의 속성을 파악한 드골의 혜안은 인정했습니다. 둘째, 영국의 싱가포르에서 방어 작전에 들어간 비용을 비판하면서, 처칠이 이에 대한 오류를 밝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셋째, 당대 최고의 지식인, 가장 지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장 의식 있는 사람들까지 자기비판과 자기 분석도 없이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를 지지했던 일을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백남준이 뽑은 20세기의 세 가지 오류를 들여다보는 것도, 그의 예술 세계를 짐작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됩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그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100년이 걸렸다고 백남준은 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백남준의 유산 중 40%를 들여서 만들어 주기를 바랐던 아담한 규모의 비디오아트미술관은, 그의 죽음과 상관없이 2010년에 문을 열어 2032년에 닫아달라고 했습니다. 백남준이 ‘22’를 고집한 이유는 그의 작품을 처음 전시한 갤러리의 주소가 독일 뒤셀도르프의 카이저가 ‘22번지’기 때문입니다. 백남준은 2032년 전에 사람들이 그가 제시한 ‘엉성하고 엉망인 미학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 책의 발간으로 그가 말했던 2032년까지의 시간을 조금 줄여볼 수 있게 됐습니다. 백남준이 남긴 글과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해설이 그의 세계를 일반 사람들이 조금 편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예술과 이데올로기가 서로 얽혀서 풀어가는 역사의 현장은 백남준에게도 슬픈 기억의 파편을 남겼습니다. 백남준은 그가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던 선생 둘이 1951년 1ㆍ4후퇴 때 북한으로 넘어간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백남준에 따르면 그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가르쳐 줬던 ‘순진한’ 두 젊은 작곡가는, 북한에 지옥 같은 스탈린 정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월북한 두 선생에게 ‘순진했다’라고 말한 백남준의 글에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그의 생각을 읽습니다. 백남준은 그가 만약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다면, 1951년에 한국에서 죽었거나, 그도 월북해서 교사가 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백남준이 책에서 말한 그의 옛이야기는 이 책이 주는 특별한 효용입니다. 백남준은 ‘방 안에 앉아 혁명가라고 떠들어대는 위선자는 되지 않겠다’라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 그는 예술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혁명’을 완결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21세기 들어 백남준의 입지는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현재 주류 미술사학계와 미디어 이론 영역, 그리고 소위 ‘옥토버’ 학파에서는 백남준을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더 나아가 서구 백인 중심의 헤게모니 쟁탈전 때문에, 백남준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에서조차, 그를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준이 했던 말이 우리에게 사무치게 들려옵니다. “예술은 텃세다. 보편성이 아니다!”

백남준은 신라가 자국의 노래를 ‘향가(鄕歌)’라고 부른 것을 두고 사대사상의 실마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백남준은 ‘鄕’이 고을, 시골을 의미하고, ‘歌’는 노래를 뜻하기에, 이를 풀이하면 신라의 노래는 ‘지방의 노래’가 된다고 했습니다. 신라가 자국의 노래를 ‘향가’로 부른 것은 중국이 나라의 중심이고, 신라는 지방이란 의식이 반영된 호칭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신라가 겸손하게 자국의 노래를 ‘시골의 노래’라고 말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백남준은 신라가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시골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자신의 이런 견해를 한국사에 대한 이단적 견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것을 한국에 대한 백남준의 애정이라고 봅니다.

1984년 1월 1일에 뉴욕-파리 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공연할 때, 사람들이 백남준에게 물었습니다. ‘모든 걸 보존할 수 있는데, 왜 생방송 공연을 하려고 하느냐?’ 이에 대해 백남준은 통조림 음식과 신선한 음식을 비교할 수 없듯이, 생방송 공연과 녹화 공연을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방송의 장점을 쌍방향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백남준은 TV를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이 전화처럼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기에, 쌍방향 TV 방송을 원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인터넷이 어느 정도 보편화 됐기에, 발신자와 수신자가 같이 진행하는 쌍방향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1984년은 그런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백남준은 쌍방향 TV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 생방송으로 TV 공연을 했습니다. 이처럼 앞선 세대를 살았던 백남준의 혜안은 그가 염려했던 대로 ‘예술이 보편성이 아니라 텃세’기에, 그에 대한 몰이해로 차츰 빛이 바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진스러운 백남준의 유산이 담긴 이 책이 그의 염려를 넘어서서, 여러 사람에게 널리 회자 됐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필자 정이신(以信) 목사/ 본지 북스저널 전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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