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한 여인(pericope adulterae) 이야기와 예수님의 할라카 완성-12

예수님의 손끝에서 태어난 침묵의 글씨는 인간의 정죄를 멈추고, 하나님의 자비를 시작하게 했습니다. 유대의 할라카와 로마법이라는 거대한 이중 법 질서 속에서 예수께서는 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정죄하지 않으셨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면죄부가 아니라, 회개의 길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영성계발] 간음한 여인(pericope adulterae) 이야기와 예수님의 할라카 완성-12 » 요한복음 8장을 중심으로 본 복음의 새로운 질서와 하나님의 나라 » “The Story of the Woman Caught in Adultery and the Fulfillment of Halakha by Jesus: A New Order of the Gospel and the Kingdom of God in Light of John 8”

Contents

<글을 시작하면서: 복을 다시 묻다 – 누구의 언어인가?>

역사의 한 복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주의 한 장면은 오랜 율법의 권위와 당시 종교 질서, 제국의 법률, 그리고 인간의 내면이 충돌하는 무대를 보여줍니다. 그 중심에 한 여인이 끌려옵니다. 이름 없는 그녀는 돌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해 있지만, 오히려 그녀의 침묵이 역사의 가장 강력한 외침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셨고, 글을 쓰셨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마디는 인간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본 글은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단순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대 할라카, 로마법, 그리고 예수님이 성취하신 새로운 하늘의 법 질서와 연결하여 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조명하려는 시도입니다.

<나를 향해 던져진 돌들 앞에서: 요한복음 8장과 ‘우리’의 이야기>

백주 대낮, 햇살은 뜨겁고,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습니다.
그날, 그 여인이 끌려온 자리는 단지 한 사람의 재판장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숨겨진 내면이 드러나는 법정이었습니다.
나는 그 여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여인입니다.
죄가 드러난 자이든, 아직 들키지 않은 자이든, 우리 모두는 돌 맞아야 할 마땅한 죄인입니다.
예수님 앞에 끌려간 여인—그녀는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를 쫓아온 자들은 할라카를 외쳤습니다.
“모세는 돌로 치라 명하였거늘, 랍비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그 입술엔 정의가 있었지만, 그 심장엔 계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 현장은, 종교법과 세상법, 도덕과 정치, 정죄와 긍휼, 인간과 하나님의 마음이 모두 부딪히는 성전과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시고, 잠시 침묵 속에 몸을 굽히셨습니다.
그분은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손가락이 다시 땅을 어루만지는 듯했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새기신 그 손가락,
바벨론 궁중의 벽에 심판을 새기신 그 손가락,
이제는 죄와 정죄 사이에 무너진 영혼을 위한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정적.
그리고 하나씩 떨어지는 돌들.
하나씩 사라지는 발자국들.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열심당원—모두 그 자리를 떠납니다.
정죄를 외친 자들이 가장 먼저 자신들의 죄와 마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포세크처럼 ‘묶고 푸는’ 권한을 갖고 계셨지만,
그분은 이 여인을 묶지 않고 푸셨습니다.
율법을 폐하지 않으시되, 자비로 성취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보다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여인을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율법과 복음 사이, 나의 자리는 어디에 있나요?
나는 종종 그 돌을 든 자들처럼 말합니다.
누군가를 정의의 이름으로 규탄하며 내 죄를 숨깁니다.
그러나 그 앞에 서면, 예수님 앞에 서면,
나는 그 여인과 같습니다.
내 모든 숨은 죄가, 드러나고도 남을 죄가,
그분의 침묵 앞에서 무너져 내립니다.

할라카와 로마법, 그 사이에 선 예수님

• 할라카는 분명히 말합니다: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일 것.
• 그러나 로마법은 사형 집행의 권한을 유대인에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 바리새인은 할라카의 절대성을 믿고,
• 사두개인은 현실 정치와 타협하며 성전 권력을 유지하고,
• 서기관은 글자를 숭배하며 자비를 잊고,
• 열심당원은 로마법을 부정하고 칼을 들었으며,
• 제사장은 그 모든 질서를 유지하며 예수님을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전혀 다른 법, 곧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법은 오직 긍휼과 회복을 통해 죄인을 의인으로 세우는 법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받은 복음, 그리고 나의 복음
그 여인은 율법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그날,
그녀는 죽음이 아니라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정죄가 아니라 은혜를,
심판이 아니라 회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물러나던 걸음이 어땠을까요?
돌을 맞아 죽을 뻔한 여인이 아닌,
살아서 구원을 받은 자의 걸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날 처음 복음을 몸으로, 마음으로, 눈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지금 이 글을 쓰며,
그녀와 같은 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할라카적 관점에서 본 이 사건>

간음한 여인에게 주신 그리고 그녀를 정죄하려던 사람들에게 주신 예수님 말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돌을 들지 않으시고,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신 해법 즉 포세크(פוסק)가 주신 말씀입니다.
그 순간 땅 위의 침묵이 하늘의 자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할라카(Halakha) 는 레위기 20:10과 신명기 22:22을 근거로 간음한 남녀 모두를 사형에 처해야 함을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 이 여인은 단독으로 잡혀 왔습니다 (남성은 없음).
• 공정한 재판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을 요구합니다.
• 예루살렘 산헤드린이 아닌 길거리에서 판결을 유도합니다.
• 로마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독자적으로 사형 집행 권한이 없었습니다 (요 18:31 참조).

예수님은 이 불완전한 법 적용과 위선적 의도를 간파하고, 심판의 자격과 자비의 원칙을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이 사건에서 그들은 여인만 데려왔습니다. 남성은 없습니다. 이미 이 재판은 편향되었습니다.
할라카적 절차에 따르면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며, 산헤드린의 재판과 공적 판결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공의가 아닌 정략적 의도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불완전한 율법 집행을 지적하지 않으시고, 단 한 문장으로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예수님은 단순히 할라카를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본질적 정의와 자비를 포세크 할라카(Posek, 법 해석자, פוסק הלכה)로서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향한 회복의 율법, 용서의 할라카였습니다.

<로마법과 사형 집행의 한계>

로마법 하에서 유대인들은 자의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8:31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총독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도 바로 사형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을 돌로 쳤다면?

• 로마법상 무단 사형은 폭동이나 치안방해로 간주되어,
• 돌을 던진 자들은 반란 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었고,
•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분노를 불러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침묵하시고, 땅에 글을 쓰십니다. 그것은 신중한 침묵이자, 자비의 기초 위에서 정의를 재구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부당한 처벌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 사회는 여성에게 율법을 가혹하게 적용했습니다. 증언권, 교육권, 법적 평등성은 대부분 제한되었고, 간음 사건에서도 여성이 훨씬 더 무겁게 비난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구조적 불의의 중심에서 여인을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
이것은 단지 용서가 아니라, 존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통치 행위입니다.

스테반의 돌에 맞아 죽음 ― 법의 틈에서의 순교

사도행전 7장에서 스테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습니다.
이 사건은 법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 산헤드린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죄가 선고되지 않았음에도,
• 격분한 군중이 율법을 빌미로 집단 린치를 가했습니다.
• 이는 로마법을 어긴 것이었으며, 엄밀히 말해 불법 처형이었습니다.

스테반의 순교는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이중 법 체계(할라카 vs. 로마법) 속에서 신자의 고난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율법과 율법 외부, 양쪽 모두에서 박해받는 예수님의 뒤를 따른 첫 순교자였습니다.
누구도 돌을 들 수 없다
결국 아무도 돌을 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하늘의 포세크 선언이었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인간을 정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자비가 만나는 장이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오래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누군가의 죄를 폭로하며, 돌을 들고 싶은 손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손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도 정죄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새 삶으로 걸어가라.”
우리 모두는 그 여인이다
그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자리는 오늘날 우리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법 앞에 죄인이며, 그 죄값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그 돌을 맞으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법을 폐하러가 아니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의 현장에서,
가장 낮은 자, 가장 정죄받은 자가
가장 먼저 구원의 주를 만나게 됩니다.

<간음한 여인이 시사하는 사항들>

현장에서 붙잡힌 간음한 여인은,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유대 지도자들의 의도적인 계략에 의해 희생양으로 몰린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여러 계층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함정이 교차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먼저 죄란 무엇인가요?

• 할라카가 말하는 죄
• 로마법이 말하는 죄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무엇인가?

죄에 대한 형벌은 무엇인가?

• 할라카가 주는 형벌
• 로마법이 주는 처벌
• 예수님이 주시는 해법은 무엇인가?

죄의 형벌이나 처벌대신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 할라카는 형벌 대신 어떤 다른 좋은 해법이 있는가?
• 로마법은 처벌대신 다른 해법이 있는가?
•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가 그 해법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있는가?

할라카를 진행할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수장도 아니고 로마의 총독이 아님에도 예수님이 포세크로 내린 해법과 이에 대한 구조적 이해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시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 할라카, 로마법, 그리고 예수님의 법>

1. 죄란 무엇인가? 율법, 로마법, 그리고 예수님의 시선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죄성, 율법의 한계, 그리고 구속의 은혜가 맞물리는 극적인 계시의 장입니다. 당시 유대의 할라카는 간음을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는 심각한 도덕적 범죄로 간주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과 신명기 22장 22절은 남녀 모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현장에서 붙잡혀 온 이는 여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남성은 사라졌고, 그 책임조차 묻지 않았습니다. 이는 율법의 공정한 적용이 아니라, 특정한 의도를 가진 왜곡된 사용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반면, 로마법에서 간통은 형사범으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개인 가정의 문제, 곧 가장의 권리와 명예에 속한 문제로 간주되었고, 사형으로 처리될 수 없는 사적 사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돌로 여인을 쳐 죽이려 했다면, 이는 로마법을 어긴 중대한 폭력 범죄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이 둘을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란 단순한 율법 조항이나 로마의 민법에서 다루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의 내면, 하나님과의 관계, 공동체적 존재의 왜곡에서 비롯되는 본질적 단절을 ‘죄’라고 보십니다. 그리고 그 죄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실존임을 선언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모든 이의 양심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이었습니다.

2. 형벌과 해법: 세 법 체계의 충돌과 초월

유대 할라카는 죄에 대한 형벌로서 돌로 침, 추방, 금식 등의 제재를 규정했지만, 간음죄는 특별히 엄중하게 다뤄졌습니다. 돌로 치는 사형이 원칙이며, 이는 공동체 정결의 명목으로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식 재판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여인을 몰아세운 형태였고, 이는 할라카의 원칙에서도 벗어난 행위였습니다.

로마법은 유대인의 종교적 사형 집행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돌을 던지는 것은 불법이었으며, 돌을 든 자는 반란죄로 다스려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18장 31절에서도 언급되듯,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허가가 필요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형벌로서의 응징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회개를 촉구하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 속에는 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동시에 새로운 생명으로의 초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할라카와 로마법의 경계를 넘어서는 법, 즉 회개와 자비의 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포세크(Poseq)적 해석과 권위

예수님은 공식적인 산헤드린의 판결자도, 로마 제국의 행정관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해석하고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는 권위로 등장하셨습니다. 유대 랍비 전통에서 포세크(Poseq)란 할라카의 해석자이자 새로운 적용을 판단하는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포세크의 역할을 하시되, 단지 법률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사랑과 긍휼의 해석을 내리십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각각 다른 율법 해석의 노선을 취했지만, 예수님의 해석은 그 어떤 전통보다도 더 급진적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문자적 적용보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해석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자비’와 ‘회복’에서 찾으셨고, 이로써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오셨다’(마 5:17)는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4. 예수님이 땅에 쓰신 글의 신학적 해석

간음한 여인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두 번 땅에 글을 쓰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 6절과 8절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는 장면은 신약 전체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예수님의 ‘글쓰기’ 행위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그 내용이나 글자의 정확한 의미를 밝히지 않지만, 이 침묵 속 행위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신학자들과 교부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A. 예레미야 17:13과의 연결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약 배경은 예레미야 17:13입니다:
“여호와를 떠난 자는 흙에 기록되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라.”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글을 쓰셨다는 행동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이름이 흙에 기록된다는 상징적 심판 행위로 해석됩니다. 이는 율법의 이름으로 여인을 정죄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떠난 이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B. 초대 교부들의 해석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장면을 모세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받은 율법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손가락이 “은혜의 새 율법”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율법이 돌판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은 새로운 법 곧 자비와 용서의 법을 땅에 기록하신 것이라 말합니다. 그는 이 글쓰기를 통해 예수님이 사람들의 양심을 건드리는 ‘침묵의 설교’를 하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리겐(Origen)은 이 글쓰기 장면을 “심판의 지연”으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멈추고 글을 쓰심으로써 청중의 양심을 자극하고, 그들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도록 여백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장면을 그리스도의 침묵의 권위로 보았으며, 말보다 더 큰 메시지를 전하는 신적 묵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땅에 쓰신 글이 율법을 대신하는 새로운 계시의 상징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이 구절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루터는 인간의 율법이 모래 위에 세워진 불완전한 것임을 상징한다고 해석했고, 칼빈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 내용을 숨기셨다고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성령이 각성시키는 과정을 보았고, 말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침묵의 능력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예수님의 글쓰기 행위가 단지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 신학적 메시지와 구약적 상징이 함축된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5. 복음의 중심: 죄인인 우리 모두와 예수님의 새로운 질서

이야기의 핵심은 그 여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단지 간음한 여인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정죄 받고 두려움에 갇힌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모든 권력 집단의 위선과 법의 이중 잣대를 드러내십니다. 여인을 통해 예수님은 단지 율법을 재해석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선언하십니다.

그 질서는 인간이 만든 회당의 벽, 산헤드린의 심문, 로마법의 권위를 모두 넘어섭니다. 그것은 “너도 죄인이다”라는 공동체적 자각에서 시작되어, “그러나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무리됩니다. 여인은 율법에 따라 사망선고를 받아야 할 자였지만, 예수님의 손끝에서 자유와 생명, 회개의 기회를 선물 받았습니다.

스테반의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은 이 간음한 여인의 사건과는 반대로, 복음을 위해 돌에 맞아 순교한 사건입니다. 스테반은 할라카와 로마법 모두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하늘에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여인은 죽어야 마땅했으나 살아났고, 스테반은 살아 있어야 마땅했으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안에서 새 생명을 입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간음한 여인의 회복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비와 해방을 얻는다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손끝에서 흙에 써 내려간 그 침묵의 메시지는 지금도 각자의 마음 속에 울립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어떤 법보다, 제도보다, 심판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오셨고, 지금도 죄인을 향해 말없이 땅에 글을 쓰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응답: 새 할라카의 성취>

이와 같은 예수님의 반응은 율법을 무효화하거나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 죄 없는 자만이 정죄할 수 있다: 이는 재판의 순수성, 공정성,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할라카 딘(הלכה דין, 법적 해석)의 본질을 되묻는 행위입니다.
•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 (호세아 6:6, 미가 6:8): 예언자적 할라카의 흐름.
• 정죄하지 않음은 새로운 질서, 하나님의 나라 법정을 선포합니다.

4. 12년 혈루병 여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공통점

신약복음서에는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율법적 기준으로는 배제와 정죄의 대상이었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경험한 인물들입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 마가복음 5장의 열두 해 혈루병을 앓은 여인,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각각 다른 배경과 죄책 속에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자비와 진리 앞에서 변화되었습니다.

첫째, 율법적 상태에서의 세 여인의 위치는 극도로 열악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신명기 22장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사형 대상이었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레위기 15장의 정결법에 따라 ‘부정한 자’로 간주되며, 그녀가 닿는 모든 것도 부정해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단순한 이방인일 뿐 아니라, 다섯 명의 남편을 거쳐 지금의 남편도 합법적 관계가 아니었던 도덕적 낙인의 대상이었습니다.

둘째, 할라카의 적용 아래 이들은 모두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제거되어야 할 존재였고, 혈루병 여인은 접촉 자체가 금지되어 인간관계에서 완전히 소외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 회당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고, 랍비와의 대화도 금지된 존재였습니다. 세 명 모두,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혈루병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고, 그녀를 회복시키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가장 깊은 계시를 나누시며, 그녀의 상처와 외면 너머로 인격적으로 다가오십니다.

넷째, 이 세 만남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드러냅니다.

율법의 판단과 정죄가 아닌 자비의 법정, 믿음으로 회복되는 통로, 참된 영적 예배자의 탄생. 이 모든 사건들은 단지 한 개인의 회복을 넘어서, 예수님의 사역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계시합니다. 이는 정죄와 배제가 아닌 용서와 회복의 공동체, 혈통과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진리 위에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여인 모두를 율법적 경계선에서 만나시며, 하나님의 나라 질서로 초대하십니다.

5. 복음서 전체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대안적 법 질서

• 예수님은 율법(모세의 할라카)을 폐하지 않고 성취하십니다 (마 5:17).
• 그러나 그 성취는 긍휼, 자비, 회복의 길로 나타납니다.
• 하나님 나라는 심판과 배제의 질서가 아닌, 용서와 새 생명의 질서입니다.
• 이 법은 회당, 산헤드린, 로마법으로 대표되는 제도적 경계를 넘어서 작동합니다.

예수님은 이중 법체계 안에서 메시야로 등장하셨으며, 율법(할라카)의 참된 완성자로서 유대법을 재해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 이야기는 예수님의 법적 혁신성과 복음의 해방력이 살아나는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창문이 될 것입니다.

<성전 안의 긴장: 돌과 침묵 사이의 율법>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 중 가장 급진적이며, 동시에 랍비적 전통과 로마법의 틈새에서 빛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불륜 사건의 판결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의 본질’, ‘공의와 자비의 충돌’, 그리고 ‘참된 재판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심연의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입니다.

1. 간음한 여인을 둘러싼 법적 구조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인을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나이까?”(요 8:5)
이 질문은 단순한 시험이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복잡한 율법적, 사회적, 정치적 긴장이 얽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세 율법(레위기 20:10, 신명기 22:22)에 따르면 간음은 사형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에는 유대인에게 사형 집행 권한이 없었고(요 18:31), 로마 총독의 승인 없이는 돌로 치는 일도 불법입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은 단순한 율법의 질문이 아니라, 로마법과 유대 율법의 충돌 속에서 예수를 고소할 수 있는 법적 함정을 포함합니다.

2. 침묵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땅에 쓰신 글

예수께서는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요 8:6). 고대 랍비 문헌에서는 판결 전에 잠시 침묵하며 앉는 것이 재판관의 태도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탈무드 바빌로니아, Sanhedrin 7b), “말보다 무게 있는 판단은 먼저 마음에 새긴다”는 격언과도 통합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랍비적 권위를 품은 동시에, 그 침묵 속에서 모든 눈은 그분의 입이 아닌 손끝을 주목합니다.
예수께서 무엇을 쓰셨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레미야서의 “여호와를 떠난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라”(렘 17:13)는 말씀과 연결하여, 자칭 정결한 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3.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은 단순한 회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죄의 권한을 다시 공동체 내부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내면, 즉 자기도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을 시험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는 단순히 법적 공방을 피한 것이 아니라, 할라카적 정신의 본질—하나님의 공의와 자비(חֶסֶד, chesed)—를 구현하십니다.

이 구절은 랍비 문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과 깊이 공명합니다.
“율법은 자비를 부르짖는다. 자비 없는 심판은 하늘의 심판을 부른다.” (미드라쉬 베레쉬트 라바 12:15)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의 마지막 말은 율법을 폐기한 말이 아닙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는 말은 테슈바(תְּשׁוּבָה, 회개)의 명확한 선포이며, 진정한 정결과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이는 단지 율법의 문자에 의한 정죄를 넘어서, 율법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회복에 있음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산헤드린과 포세크: 할라카의 법과 판결의 구조>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의 사건은 단순한 윤리적 논쟁이 아니라, 예수 시대 유대의 법 구조와 그 법 구조 안에서 예수께서 어떤 ‘권위’로 행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번 글에서 우리는 산헤드린(Sanhedrin)의 역할, 유대 법의 적용 범위, 그리고 ‘포세크(Poseq)’로서의 율법 해석자의 기능을 알아 보고자 합니다.

1. 산헤드린의 구조와 기능

산헤드린은 고대 유대사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종교-법적 회의체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대산헤드린이 있었고(70인+대제사장), 지방마다 소산헤드린(23인 구성)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은 다음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1. 율법의 해석과 집행: 토라를 근거로 한 판결과 해석을 제공.
2. 형사·민사 사건 재판: 특정 사건에 대해 심문하고 판단함.
3. 대제사장과 랍비의 회의체: 사두개인(제사장 중심)과 바리새인(할라카 중심)의 권력 균형.

하지만 로마의 통치 하에서는 산헤드린이 사형 선고를 할 수 없었고, 예수님의 사건처럼 사형이 요구되는 범죄는 반드시 로마 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요 18:31). 이로 인해 산헤드린의 권위는 종교적·도덕적 영역에 집중되었고, 그 법적 집행력은 제한되었습니다.

2. 포세크(Poseq)와 묶고 푸는 권세

‘포세크’는 히브리어로 “결정자, 법 해석자”를 뜻하며, 할라카를 상황에 따라 해석하고 적용하는 율법 판결권자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 바리새인 중 일부는 포세크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랍비 힐렐과 샴마이처럼 서로 다른 법 해석을 제시한 사례들이 많았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포세크의 개념을 배경으로 합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18–19)

여기서 “묶고 푸는”(אסור ומתיר, asar u-mattir) 아사르와 아티르는 랍비들이 율법적으로 금하거나 허용할 권세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권세를 베드로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교회 공동체에 위임하심으로, 유대 할라카 공동체 바깥에서 새로운 포세크적 권위를 형성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개인의 해석이 아닌, 공동체의 성령 안에서의 판단권을 의미합니다.

3. 간음한 여인의 사건과 산헤드린의 한계

율법에 따라 간음한 남녀는 모두 처벌받아야 했습니다(레 20:10). 하지만 본 사건에는 남성은 등장하지 않으며, 이는 형평성의 결여를 드러냅니다. 이는 율법의 ‘정의’가 특정 권력 구조 안에서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예수님은 이 지점에서 율법 해석자로서의 권위를 발휘하셨고, 단지 산헤드린의 판단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목적(공의와 자비의 조화)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분은 포세크로서 “정죄하지 않음”이라는 결정적 선언을 통해 새로운 기준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단지 산헤드린의 구조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법적 공동체를 열어 가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포세크로서, 참된 판단권을 가진 분으로서, 단지 법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완성하고 성취하셨습니다.

<할라카와 로마법의 충돌 속의 복음>

예수님의 공생애는 단순한 종교적 설교가 아니라, 당대의 법과 권력 구조 한가운데서 벌어진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법(할라카)과 로마의 국가법 사이에서 신앙과 삶의 정체성을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 두 법체계의 경계를 넘어설 뿐 아니라, 충돌을 유발했습니다.

1. 로마법의 지배와 유대인의 자치

로마 제국은 피지배 민족의 종교와 문화는 부분적으로 허용하되, 정치적 통제는 결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법은 질서, 조세, 치안, 반란 진압, 그리고 형사권(특히 사형권)을 포함한 통치 전권을 행사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종교적·도덕적·의식적 영역에 대해서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로마의 총독은 황제의 대리자로 사형 선고를 포함한 최종 판결권을 행사.
2. 유대의 산헤드린은 율법 해석과 일부 민사·종교적 재판권을 유지.

요한복음 18:31은 이 긴장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요 18:31)
이 구절은 유대 산헤드린이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정죄했지만, 실제 집행은 로마 권한 없이는 불가능했음을 보여줍니다.

2. 할라카의 의도와 제도화의 모순

할라카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대에는 이미 그 본래 의도가 형식주의와 권위주의로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랍비와 바리새인들은 세세한 규정들을 강조하며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할라카는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사람의 전통’으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셨습니다:
“너희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패하는도다.” (마가복음 7:13)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셨지만(마 5:17), 그 성취는 기존의 법 제도 안에서의 순응이 아니라, 본래의 정신으로의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막 7:13)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당시 유대 종교 체계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 전통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강한 경고였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바리새인들만을 향한 비난이 아니며, 유전(traditions)이라는 이름으로 율법의 본래 정신이 희석되어 가는 종교 구조 전체를 향한 예언적 외침이었습니다.

3. 미쉬나와 예수님의 충돌: 법보다 해석이 우선될 때

미쉬나(משנה)는 주후 2세기경 유대 랍비들이 구전 율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토라의 구체적 적용을 위한 법률적 코멘터리로 기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미쉬나가 형식주의적이고 해석 중심으로 흐를 때, 예수님은 그것이 율법의 본래적 정신에서 벗어났음을 지적하십니다.

예: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고르반’(하나님께 드렸다는 서원)이라는 미쉬나적 해석으로 무력화한 경우(막 7:10–13).

이 사례는 예수님의 비판이 단지 행위가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는 권위와 그 해석이 가진 실제적 영향력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4. 미드라쉬와 아가다: 성경 해석의 자유와 위험

미드라쉬(מדרש)는 히브리 성경에 대한 해석과 주석이며, 아가다(אגדה)는 그 중 도덕적, 설화적, 신화적 이야기들을 포함하는 부분입니다. 미드라쉬적 전통은 본래 율법을 풍성하게 조명하고 공동체의 삶에 스며들게 하는 목적이 있었지만, 때로는 본문보다 해석이 우선되며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크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사람의 유전과 전승이 율법의 권위 자리에 앉아 있는 현상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5. 탈무드와 게마라: 법적 체계의 완성과 영적 무게의 이동

탈무드는 미쉬나와 그에 대한 논의인 게마라(גמרא)를 포함하는 방대한 율법 해설서입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유대 공동체의 법과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며 할라카의 중심이 되었지만, 예수님의 시선에서 보면, 이 모든 구조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멀어질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법의 형식과 제도를 넘어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마 9:13)는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율법의 본래 목적은 사랑, 정의, 자비임을 다시 천명하셨습니다.

6. 예수님의 율법 성취: 본래적 회복의 길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마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새로운 법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의 율법이 지닌 생명력과 본래의 목적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할라카의 틀 안에서 자유를, 미쉬나의 구조 안에서 본질을, 미드라쉬의 상상력 안에서 진리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율법의 정신과 생명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거룩한 성취였습니다.

7. 살아 있는 말씀,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비판은 단순히 랍비 전통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중심에 두기 위한 선포입니다. 율법의 형식은 존중되되, 그 형식이 생명을 억압하거나 왜곡할 때, 예수님은 그 중심을 돌이키게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모든 미쉬나와 탈무드, 미드라쉬의 본질을 초월하여 말씀 자체가 육신이 되신 로고스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분 안에서 율법은 죽은 문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 되며, 해석은 권위가 아니라 회개의 길이 됩니다.

8. 예수님의 법적 위치와 새로운 권위

예수님은 자신을 ‘율법의 완성자’로 자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바리새인처럼 할라카를 조항별로 해석하지 않았고, 로마의 법학자처럼 제국 질서에 협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법적 권위는 다음 세 가지에서 비롯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 세속 정치나 종교 체계를 넘어선 새로운 통치 질서(마 4:17).
3. 포세크(Poseq): 묶고 푸는 권세를 지닌 참된 율법 해석자(마 16:19).
4. 인자(人子)로서의 심판자: 단지 인간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하는 자(요 5:27).

이러한 권위는 로마와 유대 양쪽으로부터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결국 두 법 체계가 협력하여 예수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9. 복음의 법적 선언: 정의, 긍휼, 믿음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가장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가 율법 중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리고…” (마 23:23)

이는 단지 법적 조항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본질, 곧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의 문제였다. 예수님이 제시한 복음의 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닙니다:

• 정의 (Mishpat, משפט): 억울한 자를 돌보는 공의
• 긍휼 (Chesed, חסד): 율법보다 앞서는 자비
• 믿음 (Emunah, אמונ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충성

이 법은 유대인의 할라카도, 로마의 법전도 담을 수 없는 새로운 ‘하늘의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단순한 종교 운동이 아니라, 당시의 두 법체계—할라카와 로마법—사이의 갈등과 충돌 속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분은 두 체계의 모순을 드러내고, 새로운 권위와 새로운 법, 새로운 공동체(에클레시아)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법은 문자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는 생명의 법이었습니다(렘 31:33, 고후 3:6).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일명 페리코페 아둘테라, pericope adulterae)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법 이해, 그리고 그 법이 가져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와 긍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간음한 여인과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

요한복음 8장 1–11절은 예수님의 법 해석이 얼마나 심오하고도 급진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붙잡혀 예수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의 운명은 인간의 법으로는 명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상황을 통해 율법의 본질과 하나님의 정의, 그리고 은혜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드러내십니다.

1. 유대율법의 적용: 돌에 맞아 죽을 죄

율법은 간음한 자에 대해 명확한 판결을 내립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위기 20:10)
또한 신명기 22장 22–24절에 따르면, 이러한 죄는 공동체의 정결함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이므로 공공연하게 돌로 처형해야 합니다. 이 근거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여인을 예수께 끌고 오며 말합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요 8:4–5)
이 장면은 단순한 율법 적용이 아니라, 예수님께 율법과 긍휼, 정의와 자비, 할라카와 하나님의 마음 사이의 선택을 묻는 시험이었습니다.

2. 로마법의 한계와 이중권력의 함정

한편, 로마법은 유대인의 사형 집행을 제한하고 있었습니다(요 18:31 참조). 즉, 돌로 치는 형은 산헤드린의 판단만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두 법체계 사이의 간극을 이용해, 예수님을 율법을 어긴 이단으로 만들거나 로마법을 위반한 반역자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간음의 문제가 아니라, 할라카와 로마법 사이의 충돌 지점이자,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3. 예수님의 응답: 침묵과 말씀

예수님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6)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무엇을 쓰셨는지 성경은 명확히 말하지 않지만, 예레미야 17:13을 참조하면 “여호와를 떠난 자는 흙에 기록되리니”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율법의 문자를 넘어, 심판의 기준을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이 말씀은 단순한 심리적 전환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의 원리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심판의 잣대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율법 아래 자기 자신도 정결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 정죄가 아닌 회복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고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여인과 예수만 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0–11)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그 본래 목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단죄가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 이전에 자비를 통한 회복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정의(Mishpat)는 단순한 법적 공정함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과 긍휼(Chesed)이 만나는 자리가 되어야 함을 봅니다.

5. 교회의 시작과 복음의 확장

이 장면은 훗날 교회(에클레시아)가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율법의 외적 규범이 아닌, 죄인을 품고, 회복시키며, 다시는 죄에 돌아가지 않도록 새 삶을 선포하는 공동체입니다.

• 회당이 정죄와 배제의 장소였다면,
• 예수의 공동체는 회복과 긍휼의 장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세우고자 하신 교회(마 16:18)이며, 그 공동체는 묶고 푸는 권세(마 18:18)를 지닌 포세크 공동체입니다. 즉,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권위를 부여받은 새 이스라엘의 시작입니다.

간음한 여인의 사건은 단지 한 여인을 살린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율법 이해와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가 집약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이중 법체계를 넘어, 회복과 긍휼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법은 단지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새롭게 하는 법입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대안적 법 질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마태복음 5:17

이 구절의 원어인 그리스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Μὴ νομίσητε ὅτι ἦλθον καταλῦσαι τὸν νόμον ἢ τοὺς προφήτας· οὐκ ἦλθον καταλῦσαι ἀλλὰ πληρῶσαι.
(Mē nomisēte hoti ēlthon katalysai ton nomon ē tous prophētas; ouk ēlthon katalysai alla plērōsai.)

여기서 “τὸν νόμον” (ton nomon)은 일반적으로 “율법” 혹은 “법”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유대 문맥에서 이 표현은 분명히 토라 (Torah)—즉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율법”이 ‘할라카’를 직접 지칭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면 부분적으로 예라고 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토라”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율법” (ho nomos)은 단순히 법 조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 전체와 그에 대한 삶의 길(halakhic life)을 포함합니다.
• 히브리어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은 식이 됩니다:

אַל-תַּחְשְׁבוּ שֶׁבָּאתִי לְבַטֵּל אֶת הַתּוֹרָה אוֹ אֶת הַנְּבִיאִים… (Al-tachshvu sheba’ti levatel et haTorah o et haNevi’im…)

여기서 “הַתּוֹרָה (haTorah)”는 보통 율법으로 번역되지만, 할라카의 원천이자 뿌리입니다.
예수님의 문맥에서 “율법”은 할라카를 포함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율법”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문자적 규범이나 규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율법은 랍비 전통에서 말하는 할라카를 포괄하면서도, 그 이상의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토라(Torah)는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모세오경을 뜻하며, 이는 단순한 법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시된 말씀이며, 하나님의 뜻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다음으로, 할라카(Halakha)는 이 토라에 근거하여 형성된 유대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단순한 문자적 명령이 아니라, 구전 율법과 랍비 전통을 통해 토라를 실천하는 실제적인 길이며, 일상과 종교적 실천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체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율법 이해는 문자적 명령의 준수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은 하나님의 의와 자비, 공의의 완성된 뜻을 드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셨으며(마태복음 5:17), 그 성취는 인간의 심령과 삶에 스며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사랑과 긍휼, 회복과 새 창조의 실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율법” 개념은 단지 토라나 할라카로 국한되지 않고, 그것들이 지향하던 본래의 정신—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마 22:37–40)을 온전히 회복하고 성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할라카를 넘어선 하나님의 본래 뜻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plērōsai)”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지향하는 본래의 뜻, 즉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의 질서를 온전히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바리새적 할라카를 비판적이고 선지자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율법”은 할라카를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더 넓은 개념의 토라, 그리고 그 성취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번역될 경우, “토라” 또는 “다트 모쉐” (모세의 법)라는 표현이 사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할라카를 폐한 것이 아니라, 그 깊은 본래 뜻을 회복하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 구절은 예수님의 법에 대한 이해를 가장 명확히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 곧 할라카를 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히려 그 율법을 “성취”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성취는 문자적 적용을 넘어, 율법이 지향했던 하나님의 본심, 곧 긍휼과 자비, 회복과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1. 성취된 율법: 글자의 법에서 생명의 법으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신다는 말은 단지 율법의 조항을 완수하셨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율법의 목적을 밝히 드러내고, 그것이 가리키던 최종적인 의도—곧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만나 하나 되는 자리—를 몸소 실현하신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는 이 성취의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 안식일의 재해석: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 죄인의 용서: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3)
• 율법의 핵심 요약: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마 12:7, 호세아 6:6 인용)

율법의 본질은 정죄가 아니라, 죄인을 회복시키고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당시의 랍비적 형식주의나 사두개인의 제의 중심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질서: 심판이 아닌 회복의 법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기존의 사회와 종교 질서, 특히 심판과 배제, 정결과 부정, 율법적 기준에 의한 서열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1. 병든 자, 죄인, 세리, 여성, 이방인, 아이와 같은 주변인들이 중심에 서 있습니다.
2. 죄는 단죄되기보다, 회개와 긍휼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인도됩니다.
3. 법은 공동체의 경계를 고립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상처입은 자를 품는 울타리가 됩니다.

이러한 질서는 율법의 본래 목적,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회복이 만나 이루는 샬롬(שלו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3. 제도 밖에서 작동하는 예수의 법

예수님은 그분의 율법을 성전 제사 체계나 산헤드린의 입법 절차, 혹은 회당의 판결 구조에 종속시키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의 법은 이러한 제도적 구조를 넘어서 작동하였다.

• 회당 밖의 가르침: 산상수훈, 바닷가에서의 설교, 길 위에서 행하신 치유
• 산헤드린 밖의 권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선언은 예언자와 메시아로서의 권위에 근거한다
• 로마법 밖의 심판: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

예수님의 법은 결코 무정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통치, 곧 하나님 나라의 법이었으며,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마 6:10) 하는 것이었습니다.

4. 교회와 이어지는 묶고 푸는 권세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은 새로운 공동체의 법 질서를 예고합니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리니…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19)

이는 회당이나 산헤드린이 갖던 율법 해석 권한, 즉 포세크(Posseq)의 기능이 이제 교회(에클레시아)로 위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종교적 권력의 이양이 아니라, 하늘의 법을 땅에서 풀어내는 공동체적 책임의 위임입니다.

5. 지금과 아직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

예수님의 법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성령 안에서 교회는 그 법의 유기체가 되며,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요 13:34)은 복음의 윤리적 심장을 이룹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법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는 율법이 없는 삶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마음판에 기록된 새 언약의 법(렘 31:33; 히 10:16)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대안적 법 질서는 정죄와 배제, 형식주의와 권위주의로 가득 찬 인간의 법 구조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긍휼과 자비, 회복과 생명을 중심으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이 법은 회당도, 산헤드린도, 로마도 담아내지 못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진정한 법이며, 오늘도 교회를 통해, 성령 안에서, 사람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예수 시대의 이중 법체계: 할라카 공동체와 로마법의 긴장>

시대와 문명에 따라 법의 개념과 적용 방식은 크게 발전해 왔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은 왕의 권위를 기반으로 한 법이면서도 공정한 기준을 제시하며 성문법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법은 헌법, 민법, 형법 등으로 정교하게 분화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법 체계로 이어졌습니다. 고대 사회의 법은 대부분 위계적 구조를 가졌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법의 발전 과정은 대체로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권위 구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높은 법적 권위인 헌법(constitution)을 정점으로, 그 아래에 일반 법률(laws), 대통령령(presidential orders), 시행령(regulations), 조례(local ordinances), 판례(case law) 등이 계층적으로 위치합니다. 이 구조는 로마법(Ius Romanum), 함무라비 법전, 그리고 모세 율법(Torah)과 같은 고대 성문법 전통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함무라비 법전처럼 일반법이 아닌 종교법을 기본으로 모든 삶과 제도에 고루 각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를 살펴보면, 이러한 단일 체계가 아닌 두 개의 법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던 복잡한 구조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유대인의 할라카 공동체적 법체계(Halakha),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의 통치 법체계(Roman law)입니다. 두 체계는 서로 다른 기반과 목적, 주체와 권위를 갖고 있었으며, 이는 세상법과 종교법이 공존하는 이중 체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둘 사이의 충돌과 긴장은 예수님의 사역과 재판, 죽음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중 법 질서 체계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 두 법 체계의 충돌과 긴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재판,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1. 유대인의 법 체계: 할라카와 토라 중심의 종교적 자치

유대 사회의 법은 토라(תּוֹרָה, Torah)를 기반으로 하여,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할라카(הֲלָכָה, Halakha)라는 구체적 생활 규범으로 구현되었습니다. 할라카는 단순한 종교 규칙을 넘어, 도덕, 제사, 식사, 정결, 가족 관계, 민사 및 형사 사건에 이르기까지 포괄하는 종교적 ‘공동체적 삶의 법’이었습니다.

할라카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토라(Torah): 모세 오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된 법. 율법의 헌법적 기초.
• 미쉬나(משנה, Mishnah): 구전 율법의 체계화. 실천적 지침의 중심.
• 토세프타(תוספתא, Tosefta): 미쉬나를 보완하는 부속 자료.
• 게마라(גמרא, Gemara): 미쉬나에 대한 해설. 탈무드로 발전함.
• 할라카(Halakha):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법적 실천의 집합.
• 탈무드(Talmud): 미쉬나와 게마라의 결합으로, 후대의 법적-해석적 유산.

이러한 법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권위는 산헤드린(Sanhedrin)이라는 유대 최고 종교재판기관을 통해 집행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제사장(כֹּהֵן), 서기관(סוֹפֵרִים), 장로들로70인 회의체로, 율법 해석, 율법 재판, 분쟁 해결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형벌, 특히 사형 선고와 집행은 로마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했습니다(요한복음 18:31).

2. 로마법 체계: 제국 권위와 통치 구조

로마는 유대를 식민지로 다스리면서 로마법(Ius Romanum)을 중심으로 정치·군사·세속 통치를 시행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 자치를 허용했지만, 정치적 반역, 세금, 사형 등 핵심 영역은 총독(Praefectus)을 통해 철저히 관리했습니다. 그러나 핵심 정치권력, 특히 사형 집행의 권한은 오직 로마 당국만이 갖고 있었습니다.

• 총독의 권한: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정치·군사 권한을 위임받은 자입니다. 조세 징수, 치안 유지, 사형 판결 및 집행, 반란 진압.
• 주요 관할 분야: 조세 징수, 군사 및 치안 유지, 정치적 반란 진압, 사형 집행.
• 대표 인물: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예수 재판 당시 유대 총독.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이 로마법의 권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유대 산헤드린이 신성모독 혐의로 예수를 정죄했지만, 정치적 반역죄로 로마 총독에게 송치함으로써 로마의 사형권을 활용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은 유대를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기본적으로 로마법을 시행하되 종교적 사안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허용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바로 이 종교법과 세상법의 이중 법체계가 충돌하는 대표적 장면입니다. 유대 산헤드린은 예수를 신성모독 혐의로 정죄했지만, 실제 십자가형은 로마 총독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요한복음 18:31). 결국 산헤드린은 종교적 혐의를 정치적 반란 혐의로 바꾸어 로마법의 사형 권한을 끌어냈습니다.

3. 법의 이중 구조와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

유대의 율법은 하나님의 주권, 로마법은 황제의 절대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중 법체계 사이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태복음 22:21)는 말씀으로 두 법의 질서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응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7장)은 율법의 형식주의를 넘어 율법의 정신과 본질을 회복하는 선언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는 말씀은 예수님의 율법 이해가 단지 종교개혁이 아닌, 율법의 성취자(Mashlim haTorah)로서의 자기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중 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법도, 당시 랍비들이 설정한 할라카의 형식주의도 넘어서는 ‘성취된 율법’(마태복음 5:17)으로서, 참된 정의와 긍휼, 하나님의 통치를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법과 종교의 법이 타협하거나 억압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열심당의 무력 저항도, 랍비적 형식주의도 아닌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 윤리의 제시였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징했고, 로마법은 황제의 절대 권위를 반영했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와의 타협 속에서 자치권을 유지했지만, 갈릴리 지역과 같은 곳에서는 열심당(젤롯, Zealots)과 같은 독립운동 세력이 로마법을 거부하고 율법 중심의 하나님 나라 회복을 추구했습니다.

이 법의 이중성 속에서, 우리는 복음서의 메시지와 초대교회가 직면한 갈등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은 단지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당대의 법과 질서, 권위의 중심을 재정의하는 급진적 선포였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이중 법 체계 안에서 메시야로 등장하셨으며, 율법(할라카)의 참된 완성자로서 유대법을 재해석하고, 동시에 로마법 아래에서 부당한 정치적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복음서의 메시지가 율법, 은혜, 정의, 권력, 구속에 대한 깊은 대화를 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율법의 성취자이자 하나님의 통치 실현자

예수님의 사역은 단순히 유대 율법을 개혁하거나 로마법에 저항하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유대인의 법 공동체(카할 קָהָל)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로마의 십자가 아래서 세상의 죄와 부정을 짊어지심으로 모든 법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몸소 실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법의 이중 구조 속에서 참된 메시야로 등장하셨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법—즉, 사랑, 자비, 정의, 구속—을 통해 율법을 온전히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복음서와 초대교회의 메시지가 단순한 종교 개혁이 아닌, 당대의 법과 권력 질서 전체를 재정의하는 신적 선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법과 유대법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들>

예수님의 말씀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마태복음 22:21; 마가복음 12:17; 누가복음 20:25)는 단순한 세금에 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이 짧은 문장은 당시 로마법과 유대 할라카(Halakha)의 긴장, 충돌, 공존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적 통찰을 드러냅니다.

1. 예수님은 로마법과 유대법의 이중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대,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라(תּוֹרָה)와 할라카(הֲלָכָה)를 따라 신앙과 공동체의 법을 지켰지만, 총독(예: 본디오 빌라도)이 파견되어 로마법(Ius Romanum)을 최종적으로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법은 황제의 권위와 정치·군사·세금·사형권을 통제했고, 할라카는 하나님과의 언약에 따라 종교, 도덕, 정결, 제사, 안식일, 가정 등 공동체의 생활 전체를 규율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체계가 단순히 병존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과 충돌 속에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셨습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로마법의 정치적 통치 질서 인식

로마제국의 세금은 식민 지배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함으로써 정치적 함정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세금을 지지하면 민중에게 배신자로 보이고, 반대하면 로마에 반역하는 죄가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데나리온을 보여달라”고 하신 후,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 가이사의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 22:20–21)

이 대답은 단지 세금을 내라는 의미를 넘어,

• 정치적 권위와 신적 권위를 구분하고,
• 속한 것에는 순복하되, 하나님의 영역은 가이사도 침범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분은 로마법의 실질적 구조와 정치적 속성을 깊이 이해하고 계셨고, 정치적 민감성과 신학적 진리를 동시에 포괄하는 지혜로운 해석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할라카에 대한 깊은 통찰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부분은 단지 예배나 제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대 율법 전통에서 모든 소유와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צֶלֶם אֱלֹהִים, tzelem Elohim)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데나리온 동전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듯,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의 것이다 ― 이 신학적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한 세금 논쟁을 넘어서,

•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께 향한 충성과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 예수님은 할라카의 근본 정신, 즉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 공동체의 본질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4. 예수님의 법 해석: 단순한 균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

예수님은 단순히 로마법과 유대율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외교적 입장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제시하셨습니다.

• 로마법은 황제의 명령에서 출발했지만,
• 예수님의 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순종’(예: 산상수훈)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할라카의 외적 준수를 넘어 내면의 변화와 은혜와 진리의 성취로 법을 완성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5. 예수님의 메시야적 재판: 두 법의 교차점에서 이루어진 십자가

예수님의 체포와 재판 과정은 유대율법과 로마법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산헤드린은 신성모독 혐의로 예수를 고발했고(유대 율법),
• 빌라도는 정치적 반란 혐의로 그를 심문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로마법).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두 법체계 모두의 부패와 왜곡,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완성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율법을 아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자’이시다
예수님은 단순한 율법 선생이나 로마 법을 피하는 지혜자가 아니라,
율법의 진의를 꿰뚫고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며,
모든 인간 권위 체계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재정립하신 메시야이셨습니다.
그분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은
단지 교묘한 회피가 아닌, 당시의 정치·종교적 권위 체계를 모두 아우르며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여시는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할라카 딘(Din)의 적용과 법집행 구조: 산헤드린과 포세크의 기능>

1. 할라카 딘(Halakha Din, הֲלָכָה דִּין 또는 בֵּית דִּין): 해석된 율법의 법적 판결

‘할라카 딘’은 단순히 율법(Torah)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해석해 실제 사건에 적용하는 법적 판결입니다. 이는 미쉬나(Mishnah)와 게마라(Gemara)를 포함한 구전 율법 전통에 따라 형성된 법해석의 체계를 말합니다.

• 예수님 시대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 ― 대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 등은 할라카 딘에 따라 사건을 판단하고 재판했습니다.
• 그러나 사형과 같은 형벌 집행 권한은 로마법 아래에서는 제한되었기에, 실질적 판결은 산헤드린에서 이루어졌지만, 최종 집행은 **로마 총독(예: 본디오 빌라도)**에게 의뢰해야 했습니다 (요 18:31).

2. 산헤드린(Sanhedrin)의 구조와 기능

▸ 지방 산헤드린 (Sanhedrin Ketana): 23인 회의체
• 각 유대 도시나 회당 단위로 설치
• 민사, 도덕, 일상적 율법 판단에 대한 재판 가능
• 사형 언도는 할 수 없고, 중대한 죄는 예루살렘 산헤드린으로 이첩

▸ 예루살렘 산헤드린 (Sanhedrin Gedolah, סַנְהֶדְרִין גְּדוֹלָה): 70인 + 대제사장
• 최상위 재판 기관.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고 총 71인 구성
• 성전과 제사의 문제, 율법 해석의 최종 결정
• 사형에 대한 선언은 가능하나, 집행은 로마의 승인 필요
• 당시 대제사장(사두개파 중심)은 정치적 동기에서 바리새인들과 협력하거나 갈등함

▸ 기능
• 할라카의 해석 및 적용 (포세크 기능 포함)
• 새로운 상황에 대한 법적 판례 결정
• 율법에 대한 ‘공식적 묶음(Binding)’과 ‘풀음(Loosing)’의 권위 행사

3. 포세크(Posek, פוסק)의 역할과 ‘묶고 푸는’ 개념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포세크’란 히브리어로 “결정하는 자, 판결자”라는 뜻이며, 할라카를 해석하고 특정 상황에 적용해 법적 판결을 내리는 율법학자를 말합니다.

• 이처럼 포세크는 토라와 미쉬나, 탈무드 전체를 해석하는 권위를 갖습니다.
• 어떤 행위가 금지(אסור, assur)인지 허용(מותר, mutar 또는 아타르)인지, 혹은 새 상황에 어떤 법이 적용되는지를 결정합니다.
• 이 포세크의 결정을 통해 유대 공동체 전체가 실천할 규범이 정해집니다.

✦ 신약과 연결: “내가 네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 16:19; 18:18)

• 이 ‘묶고(δεσμεύω, desmeuō)’와 ‘푸는(λύω, luō)’ 표현은 바로 할라카 포세크의 율법적 선언 행위입니다.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단지 개인적인 권위를 준 것이 아니라, 신적 공동체를 세우는 율법적 권한을 위임하신 것입니다.
• 이는 새로운 산헤드린적 공동체, 곧 ‘내 교회’(ἐκκλησίαν μου, ekklesian mou)에 할라카적 권위가 위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4.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리라’와 산헤드린의 재해석

예수님의 이 선언은 단지 ‘교회 설립’ 이상을 뜻합니다:

• “반석(Petra)” 위에 세운다는 것은 율법적 기반 위에 세워지는 언약 공동체를 의미하며,
•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클레시아)는 율법을 성취한 할라카의 재해석 공동체입니다.
즉,
• 예루살렘 산헤드린이 구속력 있는 율법 판결을 내렸듯이,
• 예수의 제자 공동체는 복음에 입각한 ‘풀고 묶는’ 새 포세크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5. 예수님은 새로운 할라카 해석 공동체를 세우신 ‘포세크 메시아’

예수님은 당시 법체계(유대-로마 법 이중 구조)를 정확히 인식하고 계셨으며,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한계를 넘어, 율법의 성취자로서의 포세크적 권위를 제자 공동체에 위임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선언(눅 17:21)은 곧 법적·신학적 공동체의 재편을 의미하며, 묶고 푸는 권세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나 기존 산헤드린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새로운 공동체에 주어졌습니다.

<로마법체계와 유대법 체계의 운영과 공존>

1. 예수 시대 유대의 법체계: “이중 법체계” 구조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자치적으로 할라카(Halakha)를 중심으로 한 율법 중심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법 체계는 다음의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법 체계는 유대율법과 로마법이라는 두 법률 체계가 병존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둘은 각각 독립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늘날의 현대 법 체계로 비유해볼 때 다음과 같은 구조적 대응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헌법(Constitution)에 해당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법령은 로마법에서는 ‘로마법전’(예: Lex Julia 등)이며, 유대율법에서는 ‘토라(תּוֹרָה, Torah)’입니다. 이는 각각 로마 제국과 유대 공동체의 최고 법규로서, 모든 하위 법과 제도는 이 토대 위에 세워집니다.

다음으로, 일반법(Statutes/Laws)에 해당하는 법은 로마에서는 민법과 형법이고, 유대에서는 미쉬나(משנה, Mishnah)입니다. 미쉬나는 토라의 계명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규범들을 구술로 정리한 것으로, 후에 문서화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시행령(Regulations) 수준의 법은 로마에서는 총독령이나 황제 칙령과 같은 행정 집행 명령이며, 유대율법에서는 토세프타(תוספתא, Tosefta)가 이 역할을 합니다. 토세프타는 미쉬나를 보완하거나 확대 해석하는 실무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네 번째, 판례법(Case Law)의 수준에서는 로마의 법정 판례와 유대의 게마라(גמרא, Gemara)가 대응됩니다. 게마라는 미쉬나의 논평과 판례 토론을 모은 것으로, 유대 전통의 법 해석과 적용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례/지방규칙(Local Ordinances)에 해당하는 영역에서는 로마의 경우 지방 행정 명령이, 유대율법에서는 지방 산헤드린의 해석 및 회당 규율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는 지역 공동체 내에서 적용되는 규율과 지침으로, 각 회당의 실제 운영과 해석 권한을 포함합니다.

이와 같은 법 구조의 병행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단순히 종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유대율법의 가장 깊은 구조—특히 할라카의 중심을 꿰뚫는 새로운 포세크(Posek, 율법 판결자)의 권위로 작동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유대 할라카 체계: 위계적 법 해석과 집행 구조

(1) 토라 (Torah) – 헌법적 권위

• 모세 5경으로 구성
• 하나님의 직접 계시이자, 율법의 근본이 되는 최고 권위
• 예: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토라는 규정만 있으나 해석은 후속 전통에 맡김

(2) 미쉬나 (Mishnah) – 실정법적 해석 체계

• 토라의 계명을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구성된 구전 전통의 집대성
• 랍비 유다 하나시(Yehudah haNasi, 기원후 200년경)가 편집
• 예: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행위 분류 등

(3) 토세프타 (Tosefta) – 미쉬나 보충

• 미쉬나에서 생략되거나 배제된 전통을 보완하는 설명서
• “보충 율법집”

(4) 게마라 (Gemara) – 해석 판례와 논쟁 기록

• 미쉬나에 대한 라삐들의 해석과 토론
• 이를 통해 탈무드(Talmud) 완성: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 두 전통 존재
• 게마라는 사실상 판례법 기능을 수행하며, 상황에 따른 율법 적용을 명확히 함

4. 할라카의 집행 구조: 포세크(Posek)와 유대 재판 체계

유대교의 율법 체계인 할라카(Halakha)는 단순한 종교적 규범을 넘어서 실제 재판과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작동하는 법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체계는 포세크(율법 해석자이자 판결자)의 권위 아래 계층적인 구조로 집행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법 집행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 예루살렘 산헤드린 (Sanhedrin Gedolah) — 최상위 법정

예루살렘에 위치한 산헤드린 대법정은 71인의 장로들로 구성된 유대 최고 사법기관으로, 가장 권위 있는 법 해석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포세크의 권한을 지녔습니다. 이 법정은 신성모독,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 등 국가적, 종교적 중대 사안을 판결하며, 구약 율법의 최종적인 해석자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기관은 유대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법적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습니다(참조: 마 26:59).

2. 지방 산헤드린 (Sanhedrin Ketana) — 지역 법정

지방 산헤드린은 각 유대 지역별로 세워진 중간 법정으로, 통상 23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법정은 일상적인 민사 사건, 도덕적 범죄, 중간 수준의 형사 재판을 다루었으며, 할라카를 지역 공동체에 적용하는 핵심 기관이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생활 속 율법 문제는 대부분 이 수준에서 다뤄졌습니다.

3. 회당(Synagogue)의 장로와 랍비 — 공동체 내부 규범과 교육

가장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법 적용은 각 회당에서 장로와 랍비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이들은 할라카적 교육과 설교, 공동체의 예배 규칙, 가벼운 분쟁 조정을 담당하였으며, 신앙 공동체의 실제적 운영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율법은 단순한 법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속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으며, 회당은 그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내는 공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중심 산헤드린에서부터 지역 산헤드린, 그리고 회당의 장로·랍비에 이르기까지, 유대 율법은 엄격한 계층 구조 속에서 집행되었으며, 각각의 수준은 포세크적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각기 다른 범위의 책임과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재판 구조의 모든 수준을 의식한 가운데, 각 단계가 간과한 본래의 율법 정신—즉, 자비, 회복,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현하는 대안적 포세크로서의 선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포세크 (Posek, פוסק)의 역할:

• 토라-미쉬나-게마라를 바탕으로 새로운 상황에 대한 법적 결정을 내리는 자
•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 라삐들이 대표적인 포세크 역할을 수행
• “이것은 금하고(אסור), 이것은 허용한다(מותָר)”라는 결정이 핵심

4. 로마법과 유대법의 이중 적용 예시

✦ 사형 집행 문제

• 유대법상 신성모독은 사형감 → 산헤드린에서 유죄 판결
• 그러나 로마법상 사형 집행은 총독(Praefectus)의 승인 없이는 불가
•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승인 하에 이뤄진 대표적 사례 (요 18:31)

✦ 조세 문제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마 22:21)
• 로마 조세법(tributum)은 황제의 권위와 연결 → 예수님은 로마법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
• 이는 율법과 로마법 모두를 이해하고 계셨음을 보여줌

5. 역사적 자료 인용 및 참고

1. 요세푸스(Josephus) – 『유대 고대사(Antiquities)』와 『유대 전쟁사(The Jewish War)』

o 산헤드린의 정치적 역할과 로마 총독과의 관계 기술
o 예루살렘 성전과 대제사장이 로마에 의해 임명됨을 지적

2. 필로(Philo of Alexandria) – 『On the Embassy to Gaius』

o 유대인의 율법 체계가 로마의 ‘법 허용 정책’(leges permissae) 하에 운영됨을 설명

3. 탈무드(Talmud, 예루살렘/바빌로니아)

o 산헤드린의 구조와 포세크의 기능을 자세히 기술 (예: Sanhedrin 1a-11b)

6. 로마 제국 당시의 법제도 정리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유대인 공동체 내부에서 할라카(Halakha) 중심의 자치 율법을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토라 → 미쉬나 → 토세프타 → 게마라는 헌법-법률-시행령-판례와 유사한 위계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 모든 법은 포세크(Posek)와 산헤드린을 통해 해석되고 집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중 법 체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공동체(에클레시아)의 묶고 푸는 권세를 통해 하늘의 율법을 땅에 구현하는 권위를 제자 공동체에 부여하셨습니다.

<할라카의 구성과 발전: 모세의 율법에서 미쉬나, 탈무드까지>

– 묶고 푸는 포세크의 역할과 권위의 흐름 속에서 –

1. 모세오경(토라)의 법적 구조: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

모세의 율법, 즉 토라(תּוֹרָה, Torah)는 유대 법의 최고 근원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헌법적 권위를 지닌다. 이 토라는 세 가지 법적 범주로 분류됩니다:

• 도덕법 (Moral Law): 십계명과 같은 윤리적 명령 (예: 살인 금지, 간음 금지)
• 의식법 (Ceremonial Law): 제사, 정결, 절기, 음식법 등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규례
• 시민법 (Civil Law): 분쟁 해결, 소유권, 형벌 등에 관한 공동체 운영법

하지만 이 모든 규례는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기 위한 세부 해석이 요구되었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포세크(Posek)의 기능이 나타납니다.

2. 613개 미츠봇(Mitzvot)의 체계와 구분: 긍정계명과 부정계명

랍비 전승은 토라 안에 613개의 계명(Mitzvot, מִצְווֹת)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나뉩니다:

• 248개 긍정계명 (עשה, Aseh): “하라”의 명령
• 365개 부정계명 (לא תעשה, Lo Ta’aseh): “하지 말라”의 명령

이 계명들은 삶의 모든 측면—기도, 음식, 정결, 경제, 공동체 정의 등—에 관여하며, 포세크는 이 계명들을 시대와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3. 미쉬나, 토세프타, 탈무드의 등장과 할라카의 정착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 해석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고, 이에 따라 구전 율법이 정리되었습니다:

• 미쉬나 (Mishnah, משנה): 기원후 200년경 유다 하나시(Yehuda haNasi)에 의해 편찬된 율법 체계. 6권(Sedarim)으로 구성되어,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법률을 체계화하였습니다.
• 토세프타 (Tosefta): 미쉬나를 보완하며 누락된 전통과 랍비들의 견해를 포함한 보충적 법령 모음집
• 게마라 (Gemara, גמרא): 미쉬나에 대한 라삐들의 해석과 논쟁을 기록. 이를 미쉬나와 결합하여 탈무드(Talmud)가 형성됩니다.

이 과정에서 포세크란 용어는 더욱 정교화되어, 특정 율법 문제에 대한 최종 법적 판결자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미쉬나와 게마라의 방대한 전통 안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해석하고, 공동체 내에서 “묶고 푸는(אסור/מותָר, 금지/허용)” 판단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땅에서 무엇이든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마 16:19)—는 당시 포세크의 권한을 가리키는 랍비 전통을 반영합니다.

4. 마흐조르(Machzor)와 유대 절기 내 법의 순환 구조

마흐조르(מחזור)는 유대 절기(대속죄일, 유월절, 초막절 등) 예배를 위한 특별 기도서로, 매 절기마다 정해진 율법, 기도, 행동 규범이 순환적으로 낭송되고 실행됩니다. 이 절기들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율법을 시간 속에 재현하는 의례적 구조이며, 포세크는 이를 상황에 따라 해석하고 적절한 예배 형식과 규범을 제시하였습니다. 즉, 시간에 따라 갱신되는 율법의 순환적 적용은 법의 살아있는 적용(Living Halakha)이었으며,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역시 절기의 맥락 안에서 (예: 유월절 십자가 사건, 오순절 성령 강림 등) 법의 완성자로 드러납니다.

묶고 푸는 권위와 공동체

포세크는 단지 법을 적용하는 법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 현실 속에 번역하고 해석하여 공동체를 이끄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권위를 제자들에게 위임하시며, 새로운 공동체(에클레시아, קָהָל, Kahal) 안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 실현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권위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사명이자, 유대 할라카의 정신을 사랑과 정의 안에서 성취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새롭게 창조되는 질서: 하나님 나라>

로마의 지배는 로마법의 존재를, 랍비 유대교의 할라카는 종교법의 존재가 이중 구조로 공존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임을 앞서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법과 제도를 통해 통치하는 제국 또는 왕국이 있고, 그리고 통치자와 백성, 주권과 영토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한 주권과 영토, 백성과 제도 그리고 법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으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이 땅에 교회(카힐라)를 세우심으로 대행하게 하십니다.

유대교의 할라카적 종교권력이 공존하던 시대에, 전혀 다른 질서—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이는 단지 영적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 질서에 대한 새로운 통치 구조의 도입을 뜻합니다. 그 통치는 다음의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합니다:

• 주권자(Sovereign): 하나님 자신
• 영토(Domain): 물리적·영적 세계 모두
• 백성(People): 회개하고 믿는 자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 법(Torah): 예수께서 완성하신 하나님의 뜻 (내면화된 토라, 마 5–7장)

2. 하나님 나라와 타나크(구약)에서의 예언적 기초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신약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타나크 전체에 걸쳐 준비되고 점층적으로 계시되어 왔습니다.
구약 성경, 곧 타나크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메시야 왕국에 대한 강력하고도 분명한 예언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그 중 몇 가지 핵심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사야 9:6–7에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영원한 평강의 왕으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다윗의 보좌 위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라는 말씀은 메시아 왕국의 정의와 안정, 그리고 영속성을 강조합니다.

다니엘 2:44에서는 바벨론의 꿈 해석 가운데,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리니… 그 나라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제국들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이 등장할 것을 예언합니다.

시편 2편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왕을 시온에 세웠다” 하시며, “내 아들을 입맞추라”는 표현을 통해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왕으로 세워질 존재임을 밝힙니다. 이는 메시아의 권위와 통치를 상징합니다.

미가 4:1–3은 마지막 날에 여호와의 산, 곧 성전이 열방 가운데 높아지며 모든 민족들이 율법을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을 말합니다. “그가 많은 민족을 판결하리라”는 표현은 메시아가 열방을 공의로 다스릴 재판장이 되실 것을 예언합니다.

이러한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그 분의 재림 때 완성될 새 창조의 왕국을 바라보게 합니다. 타나크 전체를 통해 흐르는 메시야 왕국의 비전은 정의와 평화, 진리와 은혜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약의 예언은 예수님의 오심에서 성취되며, 그는 다윗 언약과 새 언약을 성취하는 메시야 왕으로 등장합니다.

3.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 지금(Already)과 아직(Not Yet)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도래했지만 완성되지 않은 구조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Already and Not Yet” 신학입니다.

1) Already (이미)

•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며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는 공적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임했습니다(마 12:28).
•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심으로 그 나라의 백성인 새 공동체를 출범시켰습니다 (마 16:18, 엡 2:19).

2) Not Yet (아직)

• 그러나 세상의 악과 고통, 그리고 사망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 재림 때, 하나님 나라는 완전한 심판과 새 창조의 질서로 완성될 것입니다 (계 21–22장).
•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 왕국은 전적 정치적 통치만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포함한 총체적 구속의 비전입니다.

4. 교회(카힐라 קהילה)와 하나님 나라의 대행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 (마 16:18–19)
여기서 교회(헬라어: Ekklesia, 히브리어: Kehilah)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세상에 대행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죄를 묶고 푸는 권세(포세크 역할), 공동체적 윤리 실현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표지로 존재합니다.

5. 회당–산헤드린–교회(kahal, ekklesia)의 신학적 전환

A. 카할(Qahal)과 회당(Synagogue)의 뿌리

유대 전통에서 카할(קהל)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의미하며, 민수기 16장이나 신명기 31:30 등에서 회중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회당(Synagogue)은 바벨론 포로 이후 성전이 없는 상황 속에서 생겨난 말씀 중심의 공동체 예배 공간으로, 토라의 낭독과 해석, 기도와 교육이 중심이었습니다.

B. 산헤드린(Sanhedrin)의 역할

산헤드린은 유대 사회의 최고 재판기관이자 종교 권위체로, 율법 해석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형벌 및 토라 해석의 최종 권위를 갖는 기관이었습니다. 할라카적으로 보면 이들은 포세크(posseq, 법적 판단자)의 역할을 하며 율법을 묶고 푸는 권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C. 에클레시아(Ekklesia)의 등장

예수님은 마태복음 16:18에서 “내가 내 교회(Ekklesia)를 이 반석 위에 세우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구약의 카할, 유대의 회당, 산헤드린의 구조를 포괄하고 변혁시키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선포였습니다. 이 에클레시아는 물리적 성전이나 사법기관의 권위가 아닌, 예수님의 말씀과 은혜의 다스림 아래 있는 제자 공동체로서 작동합니다.

D. 묶고 푸는 권세의 이전

예수님은 마태복음 16:19과 18:18에서 제자들에게 “천국 열쇠”와 “묶고 푸는 권세”(binding and loosing)를 위임하십니다. 이는 원래 산헤드린과 랍비들이 가졌던 율법 해석과 판결권(Poseq)을 제자 공동체와 교회로 이양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단지 믿음의 공동체를 넘어, 하늘 권위 아래 새로운 할라카의 대리기관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 성경적 시간선과 본질에 따른 통합적 개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는 단순한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사적 핵심 주제이며, 창세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드러났으며, 현재는 교회를 통해 확장되고, 장차 새 창조와 함께 완성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입니다.

1. 기원 – 창세 전 하나님의 뜻 (에베소서 1:4–10)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시간 속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계획하셨고,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들을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는 시간 이전부터 존재한 거룩한 목적의 표현입니다.

2. 시작 – 예수님의 공생애, 십자가, 부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시작부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막 1:15).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사건이자 실질적 시작입니다.

3. 현재 – 교회를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표현이자 도구로 존재합니다.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으며, 정의와 평화, 회복과 용서, 공동체적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이자 그 영광을 미리 맛보는 장소입니다.

4. 미래 – 예수님의 재림과 새 창조의 완성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써 최종적 심판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고(계 21–22장),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실현될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완성은 창세 전부터 계획된 뜻의 성취이며, 모든 악과 죽음이 제거된 영원한 나라로서 실현됩니다.

5. 본질 – 정의, 평화, 은혜, 진리, 영생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단순히 장소나 시간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구현되는 통치 질서입니다. 정의와 공의, 평화와 샬롬, 은혜와 자비, 진리와 생명이 충만한 공간이며, 그것은 영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이러한 가치들을 살아내며, 이 땅에서도 이미 하나님 나라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 제국의 법과 질서를 넘어서는 창조 질서의 회복이며, 이 땅에 잠정적으로 존재하는 교회를 통해 나타나고, 종말론적 완성 속에서 영원히 실현될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할라카 풍경: 다양성과 충돌의 지형>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시대는 단일한 종교 체계가 아닌, 서로 다른 할라카 해석과 실천이 공존하고 충돌하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유대교 내부에는 다양한 종파와 학파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율법(Torah, תֹוָרִה)을 해석하고 적용하였습니다. 이 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1세기 유대 땅의 할라카적 풍경을 다양한 종파와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보며, 그 안에서 예수의 독특한 위치를 조망합니다.

1. 종파별 할라카 해석의 차이

A. 바리새인들 (Perushim, פְּּרוּשִׁים)

바리새인들은 구전 토라(Torah Shebe’al Peh, תורה ששבעל פה)와 문자 토라를 함께 중요시하며, 실생활에서의 율법 적용에 탁월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회당 중심의 종교생활을 통해, 민중 교육과 경건 생활을 강조하며 다수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미쉬나(Mishnah, מִשׁנָה)의 기반을 제공한 그들의 해석은 이후 랍비 유대교의 근간이 됩니다.

B. 사두개인들 (Tzeduqim, צְדוּקִים)

사두개인들은 문자 율법만을 고수하며, 부활이나 천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 보수적 사제 계층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그 제사 시스템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할라카는 성전 중심 제의와 정치적 권위에 기반했습니다. 로마 제국과의 협력을 통해 제사장 계급을 유지했으며, 종교보다 정치적 세력 유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C. 에세네파 (Essenes)

사해 문서(Dead Sea Scrolls)를 남긴 에세네파는 사두개인의 부패와 바리새인의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광야 공동체(Qumran Community)를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철저한 준수와 함께 공동체적 생활, 정결법의 엄격한 적용, 두 메시아 사상(제사장과 왕적 메시아)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할라카는 『Damascus Document』, 『Community Rule』 같은 문헌에서 구체화됩니다.

D. 젤롯당 (Zealots)

율법과 성전을 위한 열정으로 무장한 이들은 로마의 식민 통치와 타협하는 모든 유대 종파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단지 종교적 규율이 아니라 민족 해방의 원칙이었습니다. 이들은 메시아적 정치 혁명을 꿈꾸며 할라카를 민족주의와 연결시켰습니다.

E. 서기관들 (Scribes, Soferim, סוּפֶרִים)

율법을 필사하고 해석하던 전문가들로, 주로 바리새인 그룹과 협력하여 구전 전통을 정리하고 확대했습니다. 이들은 미쉬나와 탈무드 형성의 핵심 인물들로, 예수 당시에는 종교적 권위자로서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2. 할라카의 복수성과 충돌

이처럼 다양한 종파는 동일한 토라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상이한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절기의 규정, 정결법의 적용, 안식일 규례 등에서 뚜렷한 입장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심지어 미쉬나 자체도 복수의 랍비 견해를 병렬적으로 제시하면서 토론의 장을 열어둡니다. 이러한 복수성과 충돌은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3. 예수님과 할라카 종파들과의 관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가장 많은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그분은 종종 바리새인의 위선(Hypocrisy)을 책망하셨지만, 동시에 바리새인들이 강조한 율법의 핵심 정신—긍휼, 정의, 믿음—을 더 깊이 성취하려 하셨습니다(마 23:23). 사두개인과는 부활 논쟁(마 22:23–33)에서 치열하게 맞섰고, 에세네파처럼 외적 정결보다 내면의 정결을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젤롯처럼 열정적이었지만 폭력을 거부하고 사랑과 희생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특정 종파에 속하지 않으시고, 모든 종파의 부족함을 꿰뚫으며 토라의 본질과 하나님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당대 할라카의 분열된 풍경을 관통하는 새로운 권위로 등장하였습니다.

4. 사해 문서와 예수 연구의 연결

사해 문서의 발견은 예수 당시 할라카의 풍경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미크차트 마아세 하토라(Miqsat Ma’ase Ha-Torah, 4QMMT)』는 율법의 적용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담고 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는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 규칙에 나타나는 메시아 사상, 정결 규례, 종말론적 기대는 복음서의 사상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점들입니다.

5. 예수, 할라카 지형을 재구성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분열되고 경쟁적이던 할라카 지형 속에서 새로운 통합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단순한 종파적 율법 해석의 대안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태복음 5:17의 선언—”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할라카적 갈등의 중심에서 새로운 제자 공동체를 향해, 토라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할라카적 삶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분은 왜 당시 모든 종파들과 충돌하셨는가?” 다음 장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예수님의 구체적인 가르침과 그 안에 담긴 할라카의 재해석을 살펴보려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예수의 성취로: 할라카와 예수의 구속신학>

할라카(Halakhah, הלכה)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토라(Torah, תורה)이며, 이는 구약의 다섯 권, 곧 모세오경에 해당합니다. 토라는 유대인 삶의 법적, 윤리적, 의례적 중심이 되며, 이로부터 수많은 미츠봇(Mitzvot, מצוות)이 파생됩니다. 랍비 전통에서는 총 613개의 계명(타르야 미츠봇, תרי”ג מצוות)을 규정하며, 이는 긍정명령과 부정명령으로 나뉘어 일상의 모든 측면을 규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17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완전하게 하다’는 헬라어로 “plērōsai” (πληρῒσαι), 즉 성취하고 충만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단순한 법의 준수가 아니라 그 본래적 의도와 목적을 실현한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토라의 핵심은 제사, 속죄, 절기, 정결법, 희생제도 등의 상징과 의례들을 그분 자신 안에서 완성하신 데에 있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반복되던 짐승의 희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atonement)과 구속(redemption)을 통해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로 실현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9:12).

1. 절기의 성취와 예수: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유대 절기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게 만듭니다. 유월절(Pesach, פסח)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성취되며 (고전 5:7), 오순절(Shavuot, שבעות)에는 성령의 강림을 통해 새 언약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행 2:1-4). 속죄일(Yom Kippur, יום כיפור)과 장막절(Sukkot, סוכות)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 안식과 영원한 임마누엘의 삶으로 성취됩니다.

2. 미츠봇의 성취와 삶의 윤리: 예수는 미츠봇을 단순히 외적인 준수로 보지 않으시고, 그 내면의 동기와 마음의 정결을 강조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까지 포함되며,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음욕을 품는 것까지 확장됩니다 (마 5:21-30). 이는 할라카가 외적 행위 중심이라면, 예수의 가르침은 내적 성결과 동기의 정화까지 아우르는 ‘하늘의 할라카’라 할 수 있습니다.

3. 성문법에서 은혜로의 전이: 마흐조르(Machzor, מחזור)는 절기 예배용 기도서로, 율법의 반복과 기념을 돕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반복되는 형식보다 진정한 은혜와 자비를 강조하십니다. 요한복음 1:17은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 ‘은혜’(헬라어: χάρις, charis)는 율법의 목적이 아니라 그 초월적 성취로서,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는 복음의 중심입니다.

4. 예수 안에서의 할라카적 완성: 예수님은 단순한 교사나 선지자가 아니라, 율법의 모든 의례와 계명의 실체이자 목적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전이나 제사보다 더 크신 존재로서,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히 10:20). 그 길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삶, 사랑과 긍휼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롬 13:10) 제자도의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지 구약 율법의 반복이 아니라, 그 율법의 모든 기대와 예표를 넘어서 완성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 안에서 할라카는 단지 유대 공동체의 법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도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며, 진정한 복음입니다.

<예수의 할라카 해석: 구약의 성취인가, 새로운 권위의 선포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종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마태복음 5:17)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이는 단순한 율법의 수용이나 수정이 아니라, 예수가 당대 할라카(Halakhah, הלכה)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떤 권위로 해석했는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번 글에서 예수님이 당시 할라카적 전통 속에서 어떤 해석자였으며, 어떤 점에서 기존의 랍비적 해석들과 충돌하거나 발전시켰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할라카 해석 방식: 구약(토라)의 심화와 내면화

예수님은 단지 외적 행위를 규범으로 삼았던 당시의 할라카를 넘어서, 토라(Torah, תורה)의 본래 정신과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에 대한 계명을 단순한 육체적 행위가 아닌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마 5:21-22)까지 포함하여 해석함으로써, 율법의 내면화를 선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미쉬나(Mishnah, משנה)의 문자적 규범에서 벗어나 예언자적 윤리와 깊이 연결됩니다.

2.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충돌: 정결법과 안식일 논쟁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정결법(taharah, טהרה)과 안식일(Sabbath, שבת) 관련 해석에 자주 도전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은 사건(막 7:1-23)이나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사건(마 12장)은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할라카 해석이 충돌하는 대표적 예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외부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정결의 본질을 재정의하였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인간 중심의 할라카를 강조하였습니다.

3. 예수의 권위 있는 선언: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산상수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당시 율법 교사들의 전통적 인용 방식(예: “랍비 누구누구가 이르기를”)과는 전혀 다른 독립적 권위의 표현입니다. 예수는 선지자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자신을 율법의 해석자이자 성취자로 위치시킵니다. 이는 랍비 전통에서 감히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해석 권위의 선포로, 신적 정체성과 연결됩니다.

4. 예수님의 할라카와 예언자 전통의 연결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종 이사야(Isaiah, ישעיה), 예레미야(Jeremiah, ירמיהו), 아모스(Amos, עמוס) 등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일치합니다. 그들은 율법의 외적 형식보다는 정의(mishpat, משפט), 긍휼(chesed, חסד), 겸손(tzeniyut, צניעות)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는 이 전통을 계승하며 할라카의 심판적 기능보다는 회복과 구속을 강조하였습니다.

5. 예수님은 할라카의 혁신자인가, 본래 정신의 회복자인가?

예수님은 당시 다양한 할라카 흐름 속에서 독립적이며 권위 있는 해석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율법 준수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자비를 중심에 둔 내면화된 율법의 성취를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기존 규정의 폐기나 개혁이 아닌, 토라의 본질을 새롭게 조명하는 신적 권위자의 선언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할라카를 넘어선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고 회복시키는 메시아적 해석자였습니다.

<예수님의 할라카 이해와 비판: 랍비 문헌과의 대화>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종 당시의 랍비적 할라카(Halakhah, הלכה)와 충돌하거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본 장에서는 미쉬나(Mishnah, משנה), 토세프타(Tosefta, תוספתא), 탈무드(Talmud, תלמוד), 미드라쉬(Midrash, מדרש),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등과의 비교를 통해 예수님의 할라카 이해를 돕기 위해 글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할라카 해석 방식: 토라의 본래 의도 회복

예수님은 할라카를 파기하거나 폐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의 의도와 본질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마태복음 5장)는 선언은 기존의 랍비적 전통을 전면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토라(Torah, תורה)의 본래 목적을 회복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예컨대 살인이나 간음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행위 이전의 마음과 동기를 중요시하며, 겉모습보다 내면을 강조하는 율법 해석입니다.

2.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할라카 해석과의 대조

사두개인들은 오직 모세오경(토라)만을 권위 있는 성전으로 인정하였으며,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마 22:23). 반면 바리새인들은 구전 전통을 할라카의 근간으로 수용하였고, 이로 인해 일상의 세부 규정까지 정교하게 율법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적 의(Righteousness) 중심의 할라카를 강하게 비판하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장)라는 강도 높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질타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려는 예언자적 비판이었습니다.

3. 랍비 문헌과의 직접적 대조 사례

• 안식일 논쟁: 미쉬나 샤밧(Mishnah Shabbat)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노동을 열거하지만, 예수는 안식일의 목적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 선언하며(막 2:27), 회복과 생명 구제를 위한 안식일의 본래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 정결법에 대한 관점: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는 손 씻지 않음에 대한 비판을 받았을 때, 외적 정결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미쉬나 타하롯(Mishnah Taharot)과 정결 규례에 대한 신학적 전환을 의미합니다.

• 이혼에 대한 해석: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는 “처음부터 그렇지 아니하니라”며 창세기의 창조 질서를 인용함으로써, 신명기 24장에 대한 당시의 해석(히렐 학파 vs. 샴마이 학파 논쟁)을 넘어서는 새로운 권위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 성전세 논쟁과 새로운 성전 이해: 마태복음 17장에 기록된 성전세 논쟁은 예수님의 할라카가 단지 율법 조항에 머물지 않고, 성전과 예배에 대한 깊은 신학적 해석으로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에게 동전이 있는 물고기를 낚게 하신 사건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의 중심이 되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2장의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말씀과 연결되며, 제사 제도와 성전 중심의 율법이 이제 메시아를 통해 완성되고 변혁된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4. 사해문서와의 연관성: 공동체 중심의 할라카와 예수

사해 공동체의 규칙서(Community Rule, 1QS)는 극도로 정결과 공동체 규율을 강조했습니다. 예수의 산상수훈(마 5–7장)과 팔복은 이들과 유사한 공동체 윤리성을 갖고 있지만, 훨씬 더 포용적이며 개인의 내면 변화와 긍휼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입니다.

5. 예수님의 할라카와 선지자 전통의 연속성

예수님의 할라카는 단순한 규범적 윤리를 넘어서 선지자들이 외쳤던 “극률과 정의”(미가 6:8),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호세아 6:6)는 선포와 깊은 연결성을 가집니다. 이는 율법을 문자보다 생명의 도구로 바라보는 해석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6. 신학적 의의

예수님은 랍비 유대교의 할라카를 철저히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권위와 통찰로 새롭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할라카를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토라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극률, 정의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단지 랍비적 전통과의 논쟁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창조적 행위였습니다.

예수의 할라카 이해는 당시 청중에게는 충격이었지만, 이후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다시금 율법의 깊이를 재조명하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하는 귀중한 신학적 자산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할라카의 재해석>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תּוֹרָה, Torah)이나 선지자(נְבִיאִים, Nevi’im)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 선언은 단순한 오해 해명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전통의 핵심인 할라카(הֲלָכָה, Halakhah)에 대한 예수의 신적 권위에 기반한 선포였으며, 실천을 삶의 본질로 회복시키는 변혁 선언이었습니다.

1.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예수님의 산상수훈에는 반복되는 구조가 있습니다. 바로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מַתֵּי שֶׁשָּׁמַעְתֶּם… אֲנִי אוֹמֵר לָכֶם)라는 선포입니다. 이는 전통적 할라카 전통을 존중하되, 그 표면적 실천을 넘어서 근본 동기와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회복하려는 내적 할라카의 갱신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לא תרצח)는 단순한 금지 규율을 넘어서, 형제에게 ‘라가’(רֵיקָא, ‘빈 머리’)라 욕하는 행위조차 심판받을 행위로 보십니다. 이는 외형적 죄가 아닌 마음의 분노와 존재의 멸시까지 하나님의 심판 영역에 포함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2. 할라카의 ‘행동 규범’에서 ‘존재 윤리’로

랍비들은 할라카를 걷는 길, 즉 삶을 통제하는 윤리적 지침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길을 더 깊은 차원으로 확장하십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לא תנאף)는 율법조항은 예수에 의해 마음의 음욕까지 확대됩니다(마 5:28). 여기서 예수는 윤리의 내면화를 강조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행동의 규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존재 전체를 향한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는 단지 기준을 높인 것이라기보다, **거룩함(קְדֻשָּׁה, kedushah)**의 본래 의미—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윤리—를 회복하는 운동이었습니다.

3. 예수님의 의도: 율법의 완성(πληρῶσαι, plērōsai)

예수님 율법을 ‘폐하러’(καταλῦσαι, katalysai)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plērōsai)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Torah가 지닌 궁극적 목표—하나님의 뜻이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것—을 당신의 가르침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온전하게 이루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완성’이라는 개념은 또한 메시야적 할라카(הֲלָכָה שֶׁל מָשִׁיחַ)를 가리키며, 단지 조항의 정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한 길로서의 할라카를 의미합니다.

4. 예수님과 선지자적 전통의 연속성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새롭거나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언자적 전통의 연속이자 정점이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등의 예언자들은 이미 외적 종교 의식의 무의미함을 꾸짖고, 정의(צֶדֶק, tzedek)와 인애(חֶסֶד, chesed), 그리고 하나님과의 겸손한 동행을 강조했습니다(미가 6:8).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보여준 가르침은 이런 예언자적 흐름을 계승하며, 유대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언어와 패턴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5. 할라카의 중심: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으라”

산상수훈의 마지막 절정은 마태복음 5:48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는 단순한 완전주의 윤리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하신 온전함(תָּמִים, tamim)은 성부 하나님의 자비, 인내, 용서, 사랑의 삶을 본받으라는 제자도적 초대입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을 “사람 되신 하나님의 뜻”으로 현현시키신 분이시며, 이 가르침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삶의 길이자 인격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윤리적 할라카와 새로운 공동체 윤리의 형성>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지 율법(토라, תורה)을 반복하거나 개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고, 내면화하여, 공동체적 삶으로 확장하는 창조적 성취였습니다. 유대인 청중들은 할라카(halakhah, הלכה)를 ‘걷는 길’ 또는 ‘행함의 길’로 이해했고, 바리새인들과 같은 그룹은 이 길을 세부적인 규정으로 세분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외적 규정보다 더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마음 중심을 겨냥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윤리적 할라카: 마음에서 시작된 길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율법은 단지 행위의 규제가 아니라 내면의 상태, 곧 마음(לב, lev)에서 출발하는 윤리적 감수성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부터 시작되는 ‘들었으나 나는 말하노라’는 공식은, 전통적인 할라카 해석을 넘어 예수의 윤리적 할라카를 드러냅니다.

• 살인에 대한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까지 확대됩니다 (마 5:21–22).
• 간음에 대한 계명은 ‘음욕을 품는 마음’까지 파고듭니다 (마 5:27–28).
• 복수는 ‘오른뺨을 돌려대는 것’으로, 원수 사랑은 적극적 은혜로 승화됩니다 (마 5:38–44).

이러한 윤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심(תמים, tamim)을 따르는 존재적 소명을 담고 있습니다 (마 5:48).

2.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충돌

권위의 문제 당시 바리새인들은 구전 율법(Torah Shebe’al Peh, תורה שבעל פה)을 토대로 한 세부적인 할라카를 발전시켜왔으며, 미쉬나(Mishnah, מ֤נה)와 토세프타(Tosefta, תוספתא)의 형태로 후대에 편찬되었습니다. 그들의 권위는 종교적 해석자(Rabban, רבן)로서의 위치에서 비롯되었고, 예수님은 이 권위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을 제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기록된 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태복음 5장)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해석의 최종 권위가 율법 자체가 아니라 그 정신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4. 바리새적 할라카와의 비교

바리새인들은 정결법, 안식일 준수, 십일조와 같은 세부 규정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할라카는 경건의 외형과 공동체 분리를 추구하였으나, 예수는 내면의 동기와 하나님 사랑 및 이웃 사랑(ואהבת לרעך כמוך, ve’ahavta l’re’acha kamocha)이라는 토라의 핵심 명령을 회복하려 하셨습니다 (마 22:37–40).

예수님은 외적인 의식보다 내면의 순전함을, 민족적 정체성보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산상수훈 전체에 흐르며, 기존의 할라카를 성취(pleróō, πληρόωσαι)하는 방식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마 5:17).

5. 예수님의 공동체 윤리: 새로운 할라카의 형성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존의 회당 공동체(בית כנסת, beit knesset)를 넘어선 새로운 윤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민족, 계층, 성별, 정결의 경계를 넘어 사랑과 정의, 긍휼로 움직이는 ‘하늘 시민권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 제자들은 선악의 기준을 단순한 율법 조항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인격에서 찾았습니다.
• 원수를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며,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은밀히 자선을 베푸는 생활 윤리가 공동체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마 6장 참조).
• 이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는 교리보다 삶의 방식이 중심이 되는 실천적 공동체였습니다.

6. 좁은 길을 걷는 새로운 백성

예수님의 윤리적 할라카는 회당에서 가르쳐지던 바리새적 경건을 넘어섰고, 공동체를 새롭게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더 높은 윤리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의 길을 보여주셨고, 그것을 제자들의 삶으로 실현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예수의 할라카를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적 할라카에 갇혀 있는가? 예수의 윤리적 할라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좁은 길, 그러나 생명의 길로.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 예수님의 할라카가 형성한 제자 공동체>

할라카의 목적은 단지 규율이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의 형성입니다
예수님의 내면 윤리적 할라카는 단지 개인의 영적 성숙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새로운 언약의 백성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근본 원칙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할라카가 어떤 공동체 윤리를 만들어 냈는지, 그리고 이것이 당시 유대 공동체 및 랍비 유대교의 할라카 공동체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 갈릴리 주변부에서 탄생한 새로운 공동체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엘리트 중심의 예루살렘 율법학자 공동체와는 달리, 갈릴리 어부, 세리, 열혈당원 등 사회의 여러 인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위계를 해체하고, 예루살렘 중심이 아닌 갈릴리에서 새로운 거룩 공동체(Qehillah Kedoshah, קְהִלָּה קְדוֹשָׁה)를 창출하려는 예수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2. 공동체 중심의 토라 해석: 사랑, 용서, 화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철저히 관계적이며 공동체적이다. 산상수훈에서 강조된 원수 사랑(마 5:43–48), 용서(마 6:14–15), 화해(마 5:23–24)는 모두 공동체 내에서 적용되는 구체적 실천 지침입니다. 이는 탈무드적 할라카가 보여주는 세부적 율법 적용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예수의 할라카는 관계의 회복을 중심에 둡니다.

3. 세속적 계급과 종교적 우열의 전복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크다”(마 18:4)라는 예수의 말씀은 랍비 체계의 위계적 질서를 전복시킵니다. ‘랍비’라는 칭호 자체를 사용하지 말라는 권면(마 23:8)은 권위의 탈중앙화를 말하며, 할라카 해석의 독점이 특정 계층에 있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4. 나사렛 회당 사건과 공동체의 배척

예수께서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사건(눅 4:16–30)은 예수의 공동체 이상이 당시 유대인들의 배타성과 충돌했음을 상징합니다. 이 사건은 유대교 내 할라카 공동체가 지닌 닫힌 정체성과, 예수가 제안한 열린 공동체 윤리 사이의 갈등을 드러냅니다.

5.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와 ‘세 사람의 법정'(Beit Din, בֵּית דִּין)

당시 유대 사회는 랍비 세 명이 모이면 유효한 법정이 구성된다는 할라카 규정이 있었고(미쉬나, Sanhedrin 1:1), 이 구조는 율법 적용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재해석하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고 하셨습니다. 이는 제자 공동체 안에 임재하신 예수 자신이 새로운 기준이자 토라 해석의 중심이 됨을 의미합니다.

공동체 윤리로 드러난 할라카의 성취

예수님의 할라카는 단순한 도덕 규범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실천 지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자, 세상의 빛이 되는 존재로서의 부름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유대 율법의 세부 규정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구별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려 한 공동체: 카할(קָהָל), 케네셋(כְּנֶסֶת),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할라카적 성취>

1. 히브리 성경에서의 공동체 개념: 카할(קָהָל)

‘카할’(קָהָל)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 단순한 군중이나 무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인 거룩한 공동체를 뜻하며,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신해산 언약 공동체(출애굽기 19장), 그리고 성회로서의 집회를 지칭합니다. 이 카할은 하나님의 말씀(토라, תּוֹרָה)과 계명(미츠봇, מִצְוֹת)을 삶의 중심에 두는 공동체입니다.

2. 제2성전기 유대 사회와 케네셋(כְּנֶסֶת): 회당 공동체의 역할

바벨론 포로기 이후 성전 중심의 예배가 제한되면서 등장한 또 하나의 중요한 공동체는 ‘케네셋’(כְּנֶסֶת)입니다. 이 말은 ‘모이다’라는 동사 ‘카나스’(כָּנַס)에서 유래했으며, 곧 회당(Synagogue)을 의미합니다. 이는 분산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한 공동체의 형태였으며, 예수 시대의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회당 공동체는 할라카적 실천과 토라 중심의 교육, 그리고 미드라쉬(מִדְרָשׁ)의 해석 활동이 이루어지는 핵심 장소였습니다. 이 구조 안에서 **할라카(Halakhah, הֲלָכָה)**는 공동체적 삶의 지침이자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의미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에클레시아를 세우리니…”(마태복음 16:18)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단어 ‘에클레시아’는 헬라어로 ‘불러낸 자들의 모임’,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공동체를 뜻합니다. 이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이지만, 그 배경은 분명히 히브리어 ‘카할’(קָהָל) 개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에클레시아는 단지 종교적 예배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Kingdom of God)을 땅 위에 드러내는 행동하는 공동체, 곧 할라카의 정신을 새롭게 성취하는 자들로 구성된 ‘하늘 시민권자들의 공동체’였습니다.

4. 할라카의 성취와 공동체의 윤리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할라카의 핵심을 재해석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이는 단지 율법의 세부 조항을 넘어서, 그 정신과 목적, 곧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실현하는 공동체 윤리로의 초대였습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 희생 없이 제사를 드리는 성전 종교를 넘어,
• 메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כָּפָר, kaphar)을 통해,
• 참된 속죄와 구속의 삶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동체는 미쉬나(משנה), 토세프타(תוספתא), 탈무드(תלמוד)에서 강조되는 인간의 해석과 규정의 축적을 넘어서, 하나님의 원래 의도, 곧 자비와 공의의 길을 걷는 카할의 회복을 뜻합니다.

5.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에클레시아의 정체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이 에클레시아는 단지 유대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근간은 여전히 토라와 선지자의 성취이며, 히브리 전통 속에서 완성된 은혜의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할라카의 성취로서의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지상 구현체로서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글을 맺으며>

예수님의 손끝에서 태어난 침묵의 글씨는 인간의 정죄를 멈추고, 하나님의 자비를 시작하게 했습니다. 유대의 할라카와 로마법이라는 거대한 이중 법 질서 속에서 예수께서는 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정죄하지 않으셨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면죄부가 아니라, 회개의 길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한 여인의 구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예수님의 법이 세상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는 생명의 법임을 증언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자비의 법 아래 살아가는 자로서, 정죄가 아닌 회복을, 죽음이 아닌 생명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2025년 6월 23일 월요일 이른 아침에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