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의 서사가 주는 메아리-24

이 글은 창조의 심히 좋음(Tov Me’od)과 진화의 변화 속에서 인간이 어디에 서 있는 지를 묻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며 창조를 기뻐하셨고, 그 기쁨은 천지를 넘어서 인간의 마음에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진화론이 말하는 생존과 적응의 이야기 속에서도 증거가 넘치는 하나님의 문자와 숨겨진 코드가 자연 속에서 넘치고 있음에도 여전히 소경이 되어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창조를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되는 참된 의미와 기쁨의 흔적을 보며...

[영성계발]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의 서사가 주는 메아리 » Tov Me’od(טוֹב מְאוֹד): Echoes of the Creation Narrat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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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면서: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는 지금, 내 삶의 기록이자 탐험의 고백이라 할 수 있는 글, 24번째 창조론과 진화론의 글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창세기의 첫날, 빛의 찬란한 울림에서부터 여섯째 날 생명의 경이로움까지—그 거대한 여정을 담은 나의 발자취이자, 이제 마침내 완성을 향해 내딛는 마지막 발걸음입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성경과 신학, 역사와 과학, 그리고 문학과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들을 넘나들며 창조의 서사를 탐구해 왔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고민하고, 찾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창조의 의미를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글을 쓰는 도중에 발생한 잦은 여행, 사역, 만남, 아픔으로 인해 비록 1주, 때론 2-3주를 중단해야 했지만 창조론 대 진화론의 관점에서 쓰는 창조 이야기는 이제 3개월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그 긴 여정의 끝자락에서 다시금 인간과 자연,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인간이 자연을 관찰하고, 의미를 찾고, 진리를 탐구하는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창조주의 손길을 향한 갈망임을 깨닫습니다. 이 글은 단순한 학문적 탐구를 넘어, 창조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진화의 메아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찾고자 하는 시인의 노래이며 철학자의 묵상이며 순례자의 자기 고백입니다. 나는 오늘, 다시금 글을 펼치며 창조와 진화, 존재와 의미의 노래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6일 창조가 주는 의미>

이 글은 지난 수많은 밤과 새벽을 거쳐, 창세기 첫째 날의 찬란한 빛부터 여섯째 날의 생명의 경이까지 걸어온 길의 마침표이자 새로운 서곡입니다. 나는 성경과 신학, 역사와 과학의 서로 다른 언어를 통해, 창조의 이야기를 다각도로 탐구해왔습니다. 이제는 마무리의 길목에 이르러,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시금 천천히 되새기며, 이 여정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흰 도화지에 그림 그리듯 글을 쓴 것이 어느새 24번째 글이 되었습니다. 화가의 작품이었다면 완성품으로 출품했을 것이요, 시였다면 시집으로 남겼겠지요. 그것이 글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과학이든, 학문이든, 또는 신학이든, 저는 이제 이 작업의 완성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 섰습니다.

도공은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무리 작은 흠이 있거나 완성도가 떨어지면 자신의 생살을 떼어내듯 공들인 도자기를 주저 없이 깨뜨립니다. 아마추어의 눈에는 완벽해 보일지라도, 도공은 자신만의 엄격한 기준을 따릅니다. 화가는 열정을 화폭에 쏟아내고, 건축가는 사람의 삶을 품을 집을 가장 이상적으로 설계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도공과 감히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시며, 결코 실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 분이 느끼는 만족도는 도공의 도자기의 완성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창조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 (וַיַּרְא אֱלֹהִים אֶת הָאוֹר כִּי טוֹב))는 창조의 본질적인 선함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 방식에 만족하시고, 세상에 지속적인 축복을 베푸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술가는 창조에 실패할 권리가 있지만, 완성에 실패할 권리는 없다.” – 마르셀 프루스트

테이아르 드 샤르댕은 인생을 알파에서 시작해 오메가 포인트, 즉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했지만, 멀리서 인생을 돌아볼 때, 우리의 삶은 결코 진화론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음 받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완전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고, 범죄와 타락은 그 형상과 모양을 깎아냈습니다. 인간은 온전하게 지음 받았지만, 죄가 그 안에 스며들어 인간의 모든 추구와 성취에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내가 한 일에 얼마나 만족하는가?”

하나님은 6일 창조의 마지막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만족의 선언. 동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이유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업, 예술, 문학, 과학, 교육, 사역 등에서 얼마나 만족하고, 흡족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개인의 작은 작업에서부터 인생 전체에 이르기까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3 개월 동안 23편의 글을 썼지만, 그 결과에 대해 만족스러운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담고자 하는 내용과 본질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한계, 그리고 타인이 그 글을 읽었을 때 저의 진의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 확연한 차이를 느낍니다. 하나님은 소소한 글쓰기나 장난감 수준이 아니라, 우주와 지구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기뻐하셨으며, 그 기쁨은 곧 존재의 축제였다.” – C.S. 루이스

나는 나의 삶과 작업을 돌아보며,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곱씹어봅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결과로 주어진 축복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토브(좋다)”라고 선언하심으로, 생명과 자연, 인간 존재 자체를 즐거움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기셨습니다. 반면 진화론은 이러한 즐거움을 생존과 번식을 위한 적응적 행동으로만 해석하며, 의미나 목적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모든 예술은 창조의 그림자이며, 모든 지식은 창조주의 발자국을 더듬는 일이다.” – 토마스 아퀴나

결국 저는 이 글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 존재가, 단순한 진화의 부산물이 아니라, 창조주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여정임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습니다. 우리의 모든 학문과 예술과 삶은 그분의 손길 안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파우스트』를 통해 본 인간: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비>

청년 시절, 내 영혼을 뒤흔든 문학 작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 였습니다. 진리를 향한 목마름, 그리하여 영혼을 악마에게 내어주면서까지 탐구를 멈추지 않으려는 그 열망은 내게도 어딘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라던 아가서의 8장 6절의 말씀처럼, 괴테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 (그것이 사랑이든, 지식이든, 쾌락이든)을 시적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잔혹할 만큼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내 청년 시절의 나는 학문, 철학, 역사, 인문학, 그리고 독일어로 표현된 Wissenschaft에 홀리듯 빠져 있었습니다. 단순한 지식의 수집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Wissenschaft는 자연과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과 창조적 탐구, 학문과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바다였습니다. 나의 학문적 탐구는 『파우스트』의 주인공처럼, 메피스토펠레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 앞에 흔들리는 영혼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진리와 즐거움은 거기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지식과 진리를 추구하지만, 그 끝은 허무였습니다. 순간적 쾌락과 권력, 사랑, 그리고 젊음조차도 그 허무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피스토펠레스가 부추긴 끝없는 욕망은 파우스트를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괴테는 말합니다. 인간의 참된 즐거움은 타인을 위한 헌신과 자기 초월, 창조주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고. 파우스트는 마지막에야 인류와 공동체를 위한 헌신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게 된다고 설파합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즐거움과 기쁨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토브(선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각 창조 행위를 마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선언하십니다. 빛이 어둠을 가르고, 물과 하늘이 나뉘고, 땅이 바다를 품고, 생명이 그 안에 숨쉬는 모습들—이 모든 것은 혼돈과 허무가 아니라 조화와 질서, 그리고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존재 자체를 즐거움과 축복으로 여기셨습니다. 인간의 창조 또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창조의 절정이며, 그 안에 자유와 사랑, 의미와 목적을 지니도록 하셨습니다.

반면 진화론적 관점은 즐거움을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형성된 뇌의 화학 반응으로 봅니다. 쾌락은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분비로 설명되고, 기쁨은 유전자와 환경이 만들어낸 일시적 착각일 뿐입니다. 진화론은 본질적으로 만족이나 선함, 목적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진화는 끝없는 변이와 선택의 과정, 적자생존의 투쟁 속에서 우연히 빚어진 생명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처럼 창조론은 즐거움을 하나님과의 관계, 질서와 사랑, 존재의 의미와 연결 짓는 반면, 진화론은 그것을 단지 생물학적 적응의 부산물로 여깁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바로 이 두 관점의 경계에서 인간의 갈망을 노래합니다. 파우스트의 여정은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진정한 즐거움은 자기 중심적 쾌락이 아닌, 창조의 아름다움과 타인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창조를 그대로 믿습니다. 진화론이 말하는 무목적의 변화 속에서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영혼, 사랑, 아름다움, 그리고 진리 탐구의 열망을 나는 봅니다. 괴테가 『파우스트』 를 통해 묘사한 것처럼, 인간은 영원히 무언가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갈망의 끝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깨닫는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선언 속에 숨겨진 창조주의 미소, 그 미학과 사랑, 그리고 영원의 기쁨입니다.

<창조의 노래 – 희락의 뜨락에서>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씨줄과 날줄로 엮인 내 삶의 기록은
어스름 새벽조차 잠들지 못하게 하는
깊은 밤을 부여잡은, 빛의 고백이었다.

첫째 날, 빛은 어둠을 가르고
여섯째 날, 우주는 거룩한 코드로 가득 채워지며
별들은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와
생명의 찬가를 쏟아내더라.
나는 글을 쓰다 그 노래를 듣고 말았도다.
지식은 나의 항해였고
의문은 나의 나침반이었으며,
진리의 파도는 더 깊은 진리를 드러냈고,
나는 그 물결 위에 시를 띄워
별빛과 흙먼지, 바람의 속삭임을 모아
창조주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를 토해냈도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지구와 태양계와 우주,
바다와 하늘의 흐름,
식물과 동물의 숨결,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깊은 노래,
그것은 신의 걸작품, 바로 인간이었다.

나는 묻노라.
내가 만든 세상의 파편들을 바라보며
과연 만족할 수 있는가?
도공처럼, 화가처럼, 건축가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시며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셨다.

나는 그 흔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숨결을 읽고,
독해하고, 깨달으며,
나의 작은 시와 글에 담긴 숨결을 따라
하나님의 기쁨을 닮으려 하였음이라.

그러나 진화의 시간은 속삭인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변화와 적응의 여정 속에서
진리도, 아름다움도 흩어진 그림자일 뿐.”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창조주와 진화의 메아리 사이를 응시하노라.

빛은 어둠을 이기고,
하늘과 물, 땅과 바다,
생명과 노래, 인간의 영혼 속 울림까지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는 영원의 서곡,
존재의 교향곡이었다.
C.S. 루이스가 속삭인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기뻐하셨으며,
그 기쁨은 곧 존재의 축제였다.”

나는 나의 모든 학문과 예술과 기도를
이 찬가 속에 담아,
창조의 노래를 완성하고자 한다.

밤이 깊어 가고 새벽은 다가오나,
내가 걷는 길
하나님의 설계도를 해독하며
그 설계도의 기쁨 속에 숨쉬며,
나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그 분을
어찌 찬양하지 않으리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조의 질서와 선함>

6일 창조 가운데 “바야르 엘로힘 키 토브 (וַיַּרְא אֱלֹהִים אֶת הָאוֹר כִּי טוֹב)”라는 구절이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번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창조된 모든 것이 그 본질의 일부인 “선(טוֹב)” 덕분에 지속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에게 좋았더라는 동사의 말씀이 히브리어로는 명사로 자주 쓰이며, 이는 한글로 말하면 선(善)이 될 것이며, 또한 선의 반대는 악(惡)이 되며 히브리어로는 “Ra” (רַע)라고 합니다. 라에 관한 부분은 토브를 조금 더 설명하고 바로 부연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그 안에 담긴 선(טוֹב)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선이 없는 것은 영속할 수 없습니다. 토라는 창조의 각 단계를 “바야르 엘로힘 키 토브 (וַיַּרְא אֱלֹהִים אֶת הָאוֹר כִּי טוֹב)”라는 말로 마무리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좋았다고 보셨습니다. 여섯째 날 인간과 동물들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וַיַּרְא אֱלֹהִים אֵת כָּל אֲשֶׁר עָשָׂה וְהִנֵּה טוֹב מְאֹד)” 이는 모든 창조물에 담긴 선이 창조 과정의 근본적인 요소였으며, 이러한 본질이 없다면 영속할 수 없고 멸망할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좋다 또는 선”으로 번역된 “토브”라는 단어는 “선”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좋다” 또는 “선”은 무엇일까요? 히브리어 “토브”의 어근은 테트-벳(tet-bet)으로, 무언가를 받을 준비를 한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하타바트 하네이롯(הַתְּבָת הַנֵרוֹת)”이 있는데, 이는 유대인의 하누카의 기원이 되는 것에 나왔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이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촛불/등잔의 심지를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것이 그 목적을 이루기에 적합하고 준비되었음을 보시고 “키 토브(ki tov)”, 즉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창조의 어떤 목적을 이룰 수 없다면, 그것은 “라(rah)”입니다. 이 어근은 미래와 연속성에 대한 감각이 없는 불안정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없고 멸종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미드라쉬(Midrash)에서 메오드(מְאֹד), 멤(מ), 알레프(א), 달렛(ד)이라는 단어의 철자를 재배열하여 아담(Adam), 즉 인간(man)을 만드신 후 “심히 좋았더라”의 “비히네이 토브 메오드(וְהִנֵּה־טוֹב מְאֹד)”라는 요약 구절에서, 동물과 다른 피조물들은 존재 그 자체로 그들의 목적을 성취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창조를 “토브(tov)”라고 쓰실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히브리어 “טוֹב”(Tov, 선)은 단순히 물리적 아름다움이나 기능적 적합성을 넘어서, 하나님 창조의 목적성과 조화를 내포합니다. 창조의 각 단계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וַיַּרְא אֱלֹהִים כִּי טוֹב)라고 선언하시며, 창조의 질서와 의미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함을 확인하십니다. 이 토브의 반복은 우주와 생명이 단순한 우연이나 혼돈의 산물이 아니라, 의도와 설계, 조화와 질서의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토브는 창조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질서를, 혼돈에서 조화를, 무의미에서 목적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 땅과 바다, 식물과 동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조물은 각각의 자리에 적합하게 창조되었으며, 그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얽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서사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신 후 단순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וְהִנֵּה־טוֹב מְאֹד)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창조의 완전성과 하나님의 기쁨,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창조물의 고귀한 위치를 강조합니다.

반면 진화론적 관점은 자연선택과 우연, 생존 경쟁과 돌연변이의 반복을 통해 현재의 생명체가 등장했음을 주장합니다. 진화론의 눈으로는 자연의 모습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산물이며, 무계획적이고 목적 없는 변화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좋았더라”라는 개념은 외부 설계자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한 유기체의 생존 능력으로 해석됩니다. 즉, 기능적 유효성은 강조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나 목적성은 배제됩니다.

창조론적 시각은 자연과 생명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설계 의도를 발견합니다. 빛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적 명령(레히 오르, “빛이 있으라”), 땅과 식물은 생명의 터전이자 하나님 자비의 현현, 해와 달과 별은 우주적 리듬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시계입니다. 새와 물고기, 동물과 인간은 각기 다르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상호 의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존재들입니다.

특히 인간 창조에서 토브는 더욱 심화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צלם אלהים)과 모양(דמות)대로 창조하셨고, 그 존재 자체를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존재가 단순히 지능적 동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창조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와 동역자로 부름 받았음을 뜻합니다. 창조론은 인간 존재의 고귀함과 목적성을 드러내며, 진화론의 무목적적 생존 개념과 구별되는 본질적 차이를 강조합니다.

창세기의 토브는 창조의 선함과 하나님의 기쁨을 드러내는 선언이자, 세상의 질서와 조화, 그리고 인간 존재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가입니다. 창조론적 관점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해하며, 모든 피조물이 본질적으로 “좋다”, 즉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 관점은 단순한 생존의 경쟁을 넘어, 창조 세계의 조화와 의미,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조명합니다.

<왜 창조의 결과가 좋은 것일까요?>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까지 창조를 따라가며, 창조의 ‘좋음’(tov)의 이유와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진화론적 관점과의 대비도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의 첫 장은 단순한 기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거룩한 선언입니다. 그 선언마다 마침표처럼 박힌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유대 전통과 기독교 신학은 이 ‘좋음’(טוֹב, tov)이 단순한 감탄이나 기능적 효율성을 의미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기쁨, 질서와 조화의 성취, 그리고 선한 목적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첫째 날 – 빛의 창조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혼돈과 흑암 속에서 빛은 하나님의 첫 창조물이었습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빛이 단순히 물리적 광선일 뿐 아니라, 질서와 삶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선한 질서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빛은 생명을 위한 첫 조건이며, 혼돈과 죽음의 상징인 어둠에 대한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있어야 생명이 움틀 수 있고, 창조의 나머지 단계가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날 – 궁창의 창조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물과 물 사이를 나누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궁창(רָקִיעַ, raqia)은 하늘의 돔처럼 물 위의 공간을 나누어 생명의 공간을 마련합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이 구분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분리가 아니라, 생명을 위한 질서의 확립으로 이해됩니다. 무한한 물의 심연(תהום, tehom)을 나누어 하늘과 바다, 공중과 대지를 마련함으로써 하나님은 혼돈을 제압하고 창조의 무대를 준비하셨습니다. 물과 공기, 기압과 온도의 조화 속에 생명은 숨쉴 공간을 얻게 되었습니다.

셋째 날 – 땅과 바다, 식물의 창조

“하나님이 물을 한 곳으로 모으게 하시고 뭍이 드러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과 바다가 나뉘고, 대지 위에 식물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신학은 땅이란 생명을 품는 터전으로, 식물은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지탱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봅니다. 물을 모으고 땅을 드러낸 것은 창조의 질서를 향한 하나님의 기획이며, 생명의 터전이 마련되었다는 의미에서 기쁨과 만족을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넷째 날 – 해, 달, 별의 창조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해와 달과 별은 단순한 빛의 점이 아니라, 유대 전통에서는 시간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의 도구로 여겨집니다. 낮과 밤, 계절과 절기를 구분 짓는 이들은 질서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시간 속에서도 드러난다는 표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보고 기뻐하신 이유는, 창조의 질서가 완성되었고, 인간과 만물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날 – 물고기와 새의 창조

“하나님이 바다의 생물과 공중의 새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늘과 바다에 생명이 깃들자, 창조는 한층 풍성해졌습니다. 유대 전통은 물과 하늘의 생물들을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이 생명체들은 단순히 먹이사슬의 일부가 아니라, 창조 세계의 찬양자이며,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을 드러내는 존재들입니다.

여섯째 날 – 땅의 생물과 인간의 창조

“하나님이 땅의 짐승과 기는 것, 가축을 만드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여섯째 날은 창조의 클라이맥스입니다. 동물들은 땅을 풍성하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인간의 창조를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부름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은 땅을 다스리며, 피조물을 돌보는 청지기적 존재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단지 인간의 존재에 있지 않고, 인간을 통해 피조세계가 더욱 온전해지며, 창조의 목적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토브는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기능적 적합성을 넘어, 하나님의 목적과 질서, 조화 속에서의 완전함을 뜻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선하고 완전한 행위이며, 각각의 창조 영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승인과 기쁨을 받습니다.

“토브 메오드”( טוֹב מְאוֹד, 매우 좋다)라는 구절은 창조의 마지막 단계, 특히 인간의 창조와 안식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는 인간 창조의 탁월한 선함과 안식일의 특별한 안식과 완전함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토브라는 개념은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함”으로 보시고, 그들이 번영하고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시며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본질적으로 “토브” 개념은 창조의 선함, 하나님의 자비로운 본성, 그리고 인간이 주변 세계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잠재력을 강조합니다.

“토브”라는 개념은 단순히 창세기 1장의 초기 창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세상을 창조하고 새롭게 하시며, 인간은 이 지속적인 창조 과정에 참여하여 세상에 “토브”를 가져오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히네 마 토브(הִנֵּה מַה טוֹב)입니다.

“히네 마 토브”(시편 133:1)라는 구절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가”로 번역되며, 세상에 “토브”를 가져오는 데 있어 공동체와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조

창조론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조의 질서와 목적,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만족을 의미합니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손길과 설계 속에서 존재하며, 각 단계마다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에서는 이런 만족의 선언이 없습니다. 진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생명은 단순히 생존과 적응의 결과로 여겨집니다. 진화의 과정에는 의도나 목적이 없고, 오로지 변화와 경쟁, 적응만이 있을 뿐입니다.

유대교적 관점과 기독교 신학은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기쁨과 승리의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빛은 어둠을 이기고, 질서는 혼돈을 제압하며, 생명은 무생물의 침묵 속에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반면, 진화론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진화는 “좋았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경쟁과 변화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은 그 완성의 노래를, 진화론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메아리를 남깁니다.

<좋았더라의 반대 개념>

창세기에 묘사된 하나님의 창조의 맥락에서 “라”(רַע), 즉 “악” 또는 “나쁨”을 탐구하고, 이를 진화론의 관점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창조 속의 라 (창세기와 신학)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라”는 최초의 창조 행위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반복되는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
이 구절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즉 빛, 하늘, 땅, 바다, 식물, 동물, 그리고 인류가 기능적으로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미적으로도 선함을 확증합니다. 창조는 처음부터 “라”로 인해 훼손되지 않습니다.

“라”(악)라는 개념은 이후 성경 이야기, 특히 창세기 3장에서 인류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틀에서 보면 창조는 전적으로 선했지만, “라”는 인간의 반역(타락)으로 인해 등장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טוֹב וָרַע)는 인간이 하나님의 선함(토브)과 그 선함에서 벗어날 가능성(라)을 동시에 마주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창조론적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라(Ra)는 창조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 발생한 타락으로, 조화와 신의 의도가 원래 가지고 있던 상태와 대비됩니다.

2. 라와 진화론

진화론은 자연 과정에 도덕적 범주(선 또는 악)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돌연변이, 자연선택, 그리고 적응에 의해 주도되는 맹목적이고 방향성 없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고통, 포식, 경쟁, 멸종, 적자생존과 같은 개념은 진화의 자연적인 메커니즘이며, 도덕적으로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서 창조론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투쟁, 죽음, 불완전함을 수반하는 진화의 과정은 신학적 의미에서 라(Ra)와 유사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의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토브(Tov)와는 거리가 먼 타락하거나 불완전한 세상의 증거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화론적 설명은 본질적으로 “좋았다”는 선언이 부족합니다. 진화는 창조가 결코 완전히 “완성”되지 않고 항상 우연과 변화에 따르는 연속적인 과정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3. 비교 성찰 (신학적 vs. 진화론적)

창조론(성경적) 창조는 선하고, 완벽하고, 완전하다고 선언됩니다. 태초에 라(Ra)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Ra)는 인간의 타락을 통해 들어왔으며, 창조의 기원이 아닙니다.
진화론 도덕적 선이라는 본질적인 개념은 없으며, 과정만이 존재합니다. 도덕적 악은 없지만, 고통, 투쟁, 죽음은 끊임없이 존재합니다.
본질적으로 창조론은 목적이 있고 조화로운 창조를 바라보는데, 라(Ra)는 인간의 죄로 인해 나중에 등장합니다.

진화론은 투쟁과 불완전함이 내재되어 있으며, 과정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도덕적 판단은 없는 세계를 묘사합니다. “선”이나 “악”의 선언은 없으며, 단지 지속적인 적응만이 존재합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토브(Tov)”는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완벽하며 조화로운 창조를 반영합니다. “라(Ra)”는 인간의 죄를 통해 이를 방해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화론은 이러한 도덕적 차원이 부족하며, 선이나 악이 내재되어 있지 않고 오직 생존만이 존재하는 자연적 과정의 세계를 묘사합니다.

지금부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인간이 어떻게 보아 왔는지, 그리고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묘사하고 탐구하고 얻은 결과는 무엇인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세상을 보는 고대인의 눈>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황하 문명, 인더스 갠지스 강 유역, 이집트의 나일 강과 사막, 마야와 아즈텍의 돌과 피의 도시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과 광장에 이르기까지—이들은 모두 하늘과 땅, 바다와 별들을 우러러보며 그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자연과 물질, 식물과 동물, 우주의 광대함 속에서 신과 인간의 자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본질을 향해 손을 뻗는 그들의 사유는, 인류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가장 오래된 학문적 몸짓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신(神)과 인간, 자연의 경계를 흐리며, 신들의 뜻을 점치는 점성술과 신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인식은 하늘의 별과 땅의 기운을 읽어내어 인간의 운명을 예측하는 신비주의적 인식론이었습니다.
황하 문명(중국)에서는 우주와 인간, 자연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며, 하늘(天)과 땅(地), 인간(人)의 조화를 강조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여기서 인식은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도덕적 삶을 조화롭게 엮는 윤리적 인식론으로 나타났습니다.

인더스-갠지스 문명은 베다와 우파니샤드 전통을 통해,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 너머의 브라만(Brahman)이라는 절대적 실재를 탐구했습니다. 인식은 곧 ‘아트만(Atman)’의 깨달음, 즉 자아와 우주의 합일을 통한 지혜로 이어졌습니다.

이집트 문명에서는 마아트(Maat, 진리와 질서의 여신)라는 개념 아래, 신과 인간, 자연의 질서를 읽고 해석하며 영원한 생명을 꿈꾸었다. 인식은 단순히 관찰이 아니라, 신성한 질서를 재현하고 유지하려는 의례적 행위였습니다.

마야와 아즈텍 문명은 하늘과 태양, 별, 달의 주기와 자연의 변화를 기록하며 신의 뜻을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인식은 수와 천문, 의례와 신화를 통합하는 순환적이고 우주론적인 사고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감각과 이성의 관계를 탐구하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본질(이데아)을 구분하고자 했습니다. 인식론은 감각 너머의 불변하는 진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과 논리적 탐구로 꽃피웠습니다.

로마 문명은 실용적이고 법과 질서 중심의 인식론을 발전시켰으며, 그리스 철학을 계승하고 일상과 정치, 법과 윤리에 그 인식을 접목시켰습니다.
이처럼 고대의 인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를 읽고 이해하려 했으며, 인간의 눈으로 본 세계와 신의 눈으로 본 세계는 언제나 긴장 속에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사유의 체계, 즉 인간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을 우리는 인식론(Epistemology)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단순한 인식론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철학적 울림과 신학적 깊이, 시적 감수성을 담은 창조론적 사유의 서사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그리하여 인간이 본 세계와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세계, 그 사이의 무한한 간극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담아내는 하나의 사색의 창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긴장 속에 숨겨진 진리의 파편을 모아, 창조와 진화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창조론은 이 모든 고대적 탐구와 철학을 넘어, 하늘의 근본적 명제를 제시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인간이 관찰하고 깨달으려 한 세계는 이미 그분의 손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의 사유는 그 창조의 언어를 해석하려는 시도이며, 모든 인식론적 노력은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에 귀결됩니다.

자연은 단순한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담은 시적 장엄이며, 인간은 그 거대한 서사시를 읽어 내려가는 작은 독자일 뿐입니다. 고대인들이 추구한 자연과학과 자연철학, 그리고 인식론의 길은 모두 하나의 진리로 향합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이며,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세계는 그분의 언어로 기록된 아름다운 책입니다.

<창조의 질서와 인간의 사유: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의 교차로에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며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의 씨앗을 동시에 심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눈에 보이는 하늘, 땅, 바다, 식물, 동물, 별, 달, 해 그리고 자연은 하나님이 그리신 한 폭의 완전한 창조 그림이며, 그 지극히 작은 부분을 본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지성과 감성을 통해 그려내고 인식하면 표현하려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물질의 세계를 탐구하는 지성과 보이지 않는 진리를 사유하는 영혼을 함께 부여 받았습니다. 이 두 갈래의 흐름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앎을 이끌어온 두 강물처럼 서로 교차하며, 창조의 웅대한 질서를 노래합니다.

자연과학: 창조의 법칙을 관찰하는 눈

고대 문명들은 자연의 거대한 무대 위에서 별과 바람, 꽃잎과 곤충을 바라보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별 점, 이집트의 천문관측, 인더스 강 유역의 수로 설계, 그리스의 생물학적 분류 등 헤아릴 수 없는 고대 자연과학의 학문들을 배태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질서를 관찰하고 기록하려는 본능의 발현이었습니다. 자연과학은 물질의 본질과 그 체계를 탐구하며, 창조주의 손길을 사실과 법칙으로 번역하고자 한 시도였습니다. 천문학, 의학, 생물학, 화학의 태동은 곧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겸허한 응답이었습니다.

자연과학은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분류하며, 그 법칙을 발견하려는 시도로 발전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연과학(natural science)과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두 가지 흐름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둘은 오늘날의 구분과 달리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자연을 관찰하고 그 의미를 사유하는 과정을 함께 담고 있었습니다.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의 태동

• 천문학(Astronomy): 별과 행성, 우주에 대한 관측과 이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마야 등에서 발전)
• 의학(Medicine): 인체의 구조와 질병, 치료법에 대한 경험적 연구 (이집트, 그리스)
• 생물학(Biology): 동식물의 분류와 해부, 생명의 관찰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학 등)
• 화학(Chemistry)의 초기 형태: 금속, 염, 약물의 혼합과 정제(연금술의 전신)
• 지리학(Geography): 대지와 강, 산맥, 기후의 관찰과 기록
• 수학(Mathematics)과 물리학(Physics)의 기초적 요소: 도형, 비율, 운동의 관찰

이러한 자연과학은 관측과 실험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며, 물질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고 법칙성을 정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자연철학: 창조의 신비를 사유하는 마음

인간의 지성은 단순한 관찰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에 숨겨진 의미와 원리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중국의 천인합일 사상, 인도의 브라흐만 사상 등 인류는 수많은 아이들을 낳듯 사상과 철학과 종교를 낳았습니다. 고대의 철인들은 창조 세계를 철학적 언어로 풀어내려 했습니다. 자연철학은 물질과 운동, 변화와 생성의 본질을 묻고, 그 배후에 계신 창조주의 의도와 질서를 헤아리려는 사변적 여정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에 새겨 두신 진리를 읽어내려는 인간의 깊은 사유였습니다. 자연철학은 자연과 인간, 우주와 신의 관계를 사유하고 그 의미를 밝히려는 철학적 탐구였습니다.

• 형이상학(Metaphysics): 보이는 세계 너머의 본질적 실재를 탐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인식론(Epistemology):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지를 묻는 학문
• 윤리학(Ethics): 인간의 삶과 자연의 조화 속에서 올바른 삶의 길을 탐구
•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자연 현상을 통해 신의 존재와 질서를 해석 (스콜라 철학 등)
• 우주론(Cosmology): 우주의 기원, 구조, 목적에 대한 사유 (고대 그리스, 중국의 천인합일 등)
•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 자체: 물질과 운동, 변화, 생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이들은 물질과 현상 너머의 의미와 원리를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 자연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구체적인 사실을 분류하고 법칙을 찾아가는 것.
• 자연철학은 세계의 의미와 존재의 근원,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사유하는 것.

고대인들은 이 둘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자연학(Physics)』은 물리적 운동과 원리를 다루면서도 철학적 의미를 담았고, 플라톤은 우주와 자연의 수학적 질서를 통해 형이상학적 진리를 탐구했습니다. 고대 문명 속에서는 자연과학이 관찰과 경험의 축적이라면, 자연철학은 그 관찰로부터 얻은 세계관과 존재론, 신학적 통찰을 포함하는 사변적 사유였습니다.

고대의 자연과학과 자연철학: 하나의 흐름, 두 가지 빛깔

고대인들은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별을 관찰하면서 동시에 별들의 배후에 숨어 계신 신을 상상했고, 식물을 분류하면서도 그 생명 속에 흐르는 창조의 숨결을 느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물리적 운동을 설명하면서도 철학적 사유를 담았고, 플라톤은 수학적 질서를 통해 우주의 형이상학적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그들에게 과학과 철학은 창조주를 향한 두 가지 시선이었습니다. 하나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사실의 기록, 다른 하나는 마음으로 보고 영혼으로 만나는 의미의 탐구였습니다.

창조론과 자연철학의 만남

창조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은 우연과 혼돈이 아니라, 창조주의 계획과 의도 속에서 존재한다고. 자연과학은 창조의 질서를 발견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며, 자연철학은 그 질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작업입니다. 현대 과학이 물질의 기원과 법칙을 밝히려는 동안, 창조론은 그 모든 기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결국,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은 창조의 신비를 향해 나아가는 두 발걸음이며, 그 길 끝에는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미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만물을 고찰하고 그 의미를 밝히려는 것을 자연과학을 통해서는 물질의 본질과 그 체계를 분류하였고, 이미 자연과학을 통해 구성된 사물의 인식체계를 통해서는 자연철학을 통해 그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창조론적 관점과 세계사적 시각에서 본 인체의 신비>

창조론적 관점에서 인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반영하는 신비로운 걸작으로 이해됩니다. 성경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하시며, 그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창 1:26–27). 이러한 창조 신앙은 인간의 존재와 인체의 존엄을 강조합니다. 이 관점은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인체를 단순한 생물학적 구조를 넘어선 신비의 대상으로 여겨오게 했습니다.

세계사적으로도 인체는 신비와 경이의 대상이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로 이해하였습니다. 장자(莊子)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노자(老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통해 인간의 몸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인체를 단순한 물질로 보지 않고, 우주 만물과 긴밀하게 연결된 생명체로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인체 연구는 철학과 의학, 예술의 융합으로 발전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와 갈레노스(Galenus)는 인체의 해부와 생리학을 체계화하여 의학의 기초를 마련했고, 아스클레피오스 (Asclepieion, 의술의 신전)는 치유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해부학적 연구는 산부인과, 정형외과, 안과, 소아과, 내과, 정신과 등 세분화된 의학 분야의 토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학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인체의 복잡성과 질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으로 발전했습니다.

유전학적 관점에서도 인체는 경이롭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혈통은 현대 유전체학(genomics)을 통해서도 조명됩니다. 모계 유전자 정보는 미토콘드리아 DNA (mtDNA)에, 부계 유전 정보는 Y 염색체에 담겨 있어, 인류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유전적 연구는 인체가 단순히 육체적 기계가 아님을, 창조된 생명의 신비로움과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예술과 음악에서도 인체는 영감을 주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해부학적 정밀함과 예술적 감각을 결합하여 인체를 예술의 정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인체를 통해 발현되는 소리—인간의 목소리—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독특한 음악과 성악으로 발전했습니다. 인간의 몸은 단순한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감각과 감정을 담아내고, 창조적 표현과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생명의 그릇이자 하나의 우주인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론과 세계사적 시각에서 인체는 물질적 구조를 넘어선 경이로움과 깊이를 지닌 존재로 이해됩니다. 과학의 진보는 인체의 세부적 구조와 유전자 정보를 밝혀내고 있지만, 그 신비로움은 여전히 다 밝혀지지 않은 신비로운 창조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과 음악: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아름다움의 언어>

인간은 창조주의 손길을 닮아, 소리의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아름다움을 노래해왔습니다. 이 소리는 단순한 음향의 집합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창의적 본능의 발현이며, 그분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입니다. 노래와 악기를 통한 음악은 단순히 인간의 즐거움이나 여흥을 넘어서, 창조주를 찬양하고, 그분의 창조 세계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통로였습니다.

성경은 노아 홍수 이전부터 악기가 존재했음을 기록합니다. 창세기 4장 21절에는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고 되어 있어, 음악과 악기의 기원이 창조의 초창기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악기들은 단순히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담아낸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소리—바람, 물결, 새의 노래를 모방하고 이를 악기로 재현하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입니다.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키며 각 문화마다 독특한 악기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타악기(탬버린 등), 현악기(수금, 하프), 목관악기(나무로 만든 피리), 금관악기(나팔 등)는 모두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소리로 창조 세계의 리듬과 질서를 반영했습니다. 시편 150편에서 다윗은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며,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하며,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인간의 음악적 창조성이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창조주를 향한 경배와 감사의 행위임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전통은 음악이론과 악보의 발전을 가져왔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오케스트라, 합창단을 탄생시켰습니다.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받은 창의성과 음악적 감각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적 언어를 만들어왔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음악들은, 바로 이 창조적 유산의 연속선상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음악은 창조주의 숨결이 깃든 자연의 리듬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람의 속삭임, 물의 흐름, 새의 노래, 뇌우의 울림까지, 모든 자연의 소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의 증거였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소리를 본받아 도구를 만들어내고, 노래하며 음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음악은 인간의 창의성과 감각이 단순히 진화적 우연에 의한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주어진 창조적 본능의 결과였습니다.

고대 문명에서는 음악이 종교와 의식, 사회적 통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을 기리는 의식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찬양가를 부르며 음악이 종교적, 사회적 행사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 이집트에서는 하프, 라, 플루트가 발달하여 신전 의식과 왕실 행사에 음악이 사용되었습니다.
•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리라, 키타라, 아울로스 같은 악기와 함께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음계 이론이 음악에 적용되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의 윤리적·정서적 힘을 철학적으로 탐구했습니다.
• 중국에서는 음악이 천지의 조화와 인간의 덕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음양오행 사상과 연결되어 음률은 우주의 질서와 사회의 안정에 기여한다고 보았습니다.
• 인도에서는 라가(raga) 체계가 발달하여 음악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신성에 닿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고대 한국음악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대 한국에서는 다른 고대 문명과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음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중국 고대 문서들은 한결같이 동이족이 흥이 많고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묘사합니다.

고대 한국의 음악의 종류

• 제례악(祭禮樂): 고대 한국의 음악은 주로 국가적 제사나 왕실 의례, 신을 섬기는 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까지 계승되었습니다.
• 종묘제례악은 공자와 유교 전통을 계승한 음악으로, 장중하고 격조 높은 선율과 춤(일무)을 포함합니다.
• 향악(鄕樂)과 당악(唐樂):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래된 고유 음악(향악)과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된 당악의 혼합이 특징입니다.

민속 음악과 구연 예술

• 무가(巫歌): 무속 신앙과 결합된 음악으로, 굿판 등에서 신과 소통하기 위한 노래와 춤, 음악이 어우러졌습니다.
• 농악(農樂): 농민 공동체의 협동과 농경 의례에 사용되던 음악으로, 장구, 꽹과리, 북 등 다양한 타악기가 사용되었습니다.
• 가야금(伽倻琴): 삼국시대 가야국에서 발명된 현악기로, 한국 고유의 선율과 울림을 전하는 대표적인 전통 악기입니다.
• 향비파(鄕琵琶): 향악에 사용되던 비파로, 중국의 비파와는 차별화된 한국식 연주법이 존재했습니다.

고대 음악의 특징과 타문명과의 비교

• 중국: 중국은 주나라 이래로 정교하게 체계화된 아악(雅樂), 속악(俗樂) 등의 궁중음악과 민간음악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한국은 이를 받아들여 발전시켰으나, 독창적인 향악과 가야금, 무속음악을 유지했습니다.
• 일본: 일본의 고대 음악은 한국과 중국에서 전래된 음악을 흡수(가가쿠)하여 독자적인 음악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음악은 더 오래된 전통을 바탕으로 자생적이며 무속과 공동체 중심의 음악을 유지했습니다.
• 서양: 서양의 고대 음악은 주로 그리스·로마의 리라와 키타라 등과 성악 중심의 구조가 특징적입니다. 한국 음악은 보다 타악과 현악이 발달하였고, 집단성과 의례성을 강조했습니다.

고대 한국 음악의 독창성

• 음계: 한국 고대 음악은 5음 음계(오음계)를 주로 사용하며, 자연의 소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 즉흥성: 한국의 전통 음악은 엄격한 작곡보다는 즉흥 연주와 공동체적 합주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 신화적 상징: 고대 음악은 신화적, 전설적 요소와 결합되어 창세와 세계관을 반영했습니다.

고대 한국 음악은 중국과 일본 등 주변 문명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지만, 고유의 무속 음악, 공동체적 농악, 전통 현악기의 발달 등 독창적인 음악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자연과 인간, 신을 연결하는 창조론적 시각에서 보면, 한국 음악은 자연의 소리와 조화를 추구하며, 인간의 내면과 신앙, 공동체를 음악으로 표현한 특별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한류를 보면 한국 민족의 예술적 소양의 풍성함과 독특성이 이제야 빛을 내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대 문명의 음악은 창조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감각과 해석을 담은 것이며, 인간과 신, 자연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에 이르러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음악이 더욱 신학적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성가(그레고리오 성가)와 같은 단성음악(monophony)이 교회의 예배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담아내는 신성한 음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후 다성음악(polyphony)의 발전으로 음악은 인간의 창조적 역량과 수학적 정교함을 드러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음악은 점점 세속적 영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창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심이 음악적 창작의 원천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바흐, 헨델과 같은 작곡가들은 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이 시기 음악은 점차 교회에서 궁정과 시민사회로 확장되었고, 오케스트라, 오페라, 협주곡, 소나타 등 다양한 장르가 탄생했습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 음악은 산업화, 대중문화의 확산과 함께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재즈, 블루스, 록, 팝, 전자음악 등 새로운 장르들이 등장하며, 음악은 인간의 감정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문화의 핵심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조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음악의 흐름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창의성과 문화적 소명을 드러내는 한 부분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음악가들이 영성과 신앙을 담아 음악을 창작하고 있으며, 음악은 여전히 인간과 창조주, 그리고 피조물 사이의 교감의 통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보는 제학문>

하나님은 인간이 거주하도록 우주라는 큰 배경 위에 지구라는 땅에 동산과 식물과 동물을 만드시고 화목하고 조화롭게 생존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큰 집을 지으셨고, 인간은 자신들이 살 집을 지으며 살아왔습니다. 이는 건축, 농업, 목축, 수렵, 항해, 탐험 등으로 점점 인간은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연구하고 조사하고 탐구한 진리를 문자에 닮으며 함으로 학문을 낳았습니다.

자연과학

• 고대: 천문학(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의학(이집트, 그리스), 생물학(아리스토텔레스).
• 중세: 신학적 틀 안에서 과학 연구 발전(연금술, 의학, 천문학).
• 근대: 갈릴레이, 뉴턴의 자연법칙 발견. 생물학과 화학, 물리학 급성장.
• 현대: DNA 발견, 우주론, 양자물리학 등 과학적 지식의 폭발적 발전.

창조론적 해석

•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관찰하고 법칙을 발견하는 여정.
• 생명과 우주의 복잡성은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와 창조주 존재의 증거.

진화론적 해석

• 생명은 무생물로부터 우연히 발생(아비오제네시스), 복잡한 생명은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로 진화.
• 우주의 법칙과 질서는 스스로의 물리적 법칙에 따라 형성됨.

인문학 (Humanities)

• 고대: 문헌학(성경, 한자), 철학(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역사학(헤로도토스).
• 중세: 신학 중심의 학문(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스콜라철학.
• 근대: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계몽주의, 근대 역사학과 철학의 분화.
• 현대: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디지털 인문학.

창조론적 해석

• 인간의 지성과 문화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 창조된 결과.
• 문헌학은 계시(성경) 탐구, 철학은 창조의 의미와 존재론 탐구.

진화론적 해석

• 인간의 언어, 문화는 진화의 산물(사회적 적응의 결과).
• 역사와 철학은 진화론적 사고(인간중심적, 상대주의적)로 전환.

사회과학 (Social Scinences)

• 고대: 공동체와 국가의 기원 탐구(플라톤의 『국가』).
• 중세: 신정 정치와 교회 중심 사회 이론.
• 근대: 사회계약론(홉스, 루소), 경제학(애덤 스미스), 심리학과 정치철학 분화.
• 현대: 글로벌화, 데이터 기반 사회학, 인공지능과 사회 윤리.

창조론적 해석

• 사회의 질서와 도덕은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와 질서에 근거.
• 가족과 국가 질서는 창조 목적에 따라 설계됨.

진화론적 해석

• 사회는 진화적 경쟁과 생존(사회진화론), 도덕은 유전자와 환경의 산물.

예술과 문학 (Arts and Literature)

• 고대: 종교적 예술, 신화와 상징 중심(벽화, 조각, 서사시).
• 중세: 성경적 주제 중심의 미술과 음악, 그레고리오 성가.
• 근대: 인문주의 미술, 오페라, 교향곡 등 음악 발전.
• 현대: 추상미술, 현대음악, 디지털 예술.

창조론적 해석

• 예술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인간의 응답(시편, 찬양, 교회 건축).
• 미와 조화는 창조의 속성 반영.

진화론적 해석

• 예술은 진화적 생존 도구(의사소통, 집단 결속), 무신론적 미학.
응용과학 (Applied Sciences)
• 고대: 의학(히포크라테스), 건축, 농업.
• 중세: 수도원 의학, 기술의 전파.
• 근대: 산업혁명, 기술공학, 현대 의학.
• 현대: AI, 바이오공학, 우주기술.

창조론적 해석

• 기술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이해하고 창조의 청지기로서 관리하는 사명.
• 의학은 인간 생명 보호의 도구, 생명 존엄성 유지.

진화론적 해석

• 기술 발전은 인간 생존 경쟁의 연장선.
• 의학은 생존과 적응력 강화를 위한 진화적 결과.

창조론은 학문 전체를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 질서의 반영으로 이해하며, 진리 탐구의 최종 목적이 창조주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진화론은 물질적, 자연적, 우연적 기원을 강조하며, 인간의 문화와 과학까지 진화적 사고의 산물로 설명합니다.

<형이하학과 형이상학>

인류는 자연과 물질의 본질을 탐구하는 동시에, 인간의 내면과 정신세계를 사유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러한 여정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시각에서 각각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창조론의 관점

창조론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기반으로, 인간의 존재 이유와 정신세계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고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에, 그 정신적·윤리적 본성과 창조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연적으로 신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 형이상학(Metaphysics): 고대 유대-기독교 사상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와 목적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전제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이후 중세 스콜라 철학자(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기독교 신학과 융합되어, 존재의 근원과 목적을 신적 창조로 해석했습니다.
• 철학과 윤리학: 고대 철학자들이 진리를 탐구하던 과정은 창조론에선 하나님의 법칙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었습니다. 윤리학은 하나님의 계명과 성경적 도덕률(십계명 등)에 근거하여 발전했습니다.
• 문학과 시: 성경의 시편과 잠언은 인간의 내면과 신과의 교감을 시적으로 노래합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단테의 「신곡」과 밀턴의 「실낙원」 같은 문학은 창조와 인간의 타락, 구속을 형이상학적·신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진화론의 관점

진화론은 인간의 정신세계와 문화의 발전을 자연적 과정과 진화적 적응의 결과로 설명하려 합니다.

• 형이상학: 진화론은 초월적 존재보다는 물질세계의 우연성과 법칙성을 강조합니다. 현대 철학(실증주의, 유물론 등)에서는 형이상학을 비판하거나 최소화하며, 인간의 정신세계 또한 진화적 적응으로 이해합니다.
• 철학과 윤리학: 진화론적 윤리관은 자연선택과 생존경쟁에서 비롯된 도덕성의 기원을 설명합니다(예: 생물학적 윤리학). 인간의 이타성이나 협력성도 유전자와 생존 전략의 산물로 해석됩니다.
• 문학과 시: 다윈 이후의 문학은 인간 존재의 우연성과 불확실성, 신의 부재를 주제로 다룹니다. 현대문학과 실존주의 문학(카뮈, 사르트르)은 인간의 고독과 부조리를 탐구하며, 창조론과는 대조적으로 신적 개입이 부정된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역사적 비교

• 고대: 창조론은 신의 창조와 질서를 전제로 철학과 시를 전개했습니다(예: 히브리 시편, 이집트 창조신화, 플라톤의 이데아론). 진화론적 해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중세: 기독교 신학과 형이상학이 결합해 인간과 우주의 목적을 신적 계획으로 이해했습니다.
• 근대~현대: 다윈의 진화론 이후, 철학과 문학은 인간의 위치를 자연 속의 일부로, 혹은 진화적 산물로 보고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 현대 과학과 문학: 진화론은 의식과 정신세계의 기원을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하고자 하며, 창조론은 여전히 인간의 정신과 예술을 신적 창조 질서의 반영으로 봅니다.

오늘 글의 중심 주제가 다룬 것은 바로 자연과 우주, 바다와 하늘, 땅과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각입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은 창세기 1장의 반복적인 선언—“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담겨 있습니다. 창조는 단순한 기원이나 생명의 탄생을 넘어, 조화와 목적, 그리고 절대적 미의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지식을 추구하고, 그 지식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더 깊은 차원에서 진리를 탐구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진리를 넘어서는 아름다움(미)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이 탐구의 여정을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비판》의 세 저서를 통해 철학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에게 미학은 단순한 감각적 즐거움을 넘어 이성적 판단과 감각의 융합, 존재의 목적과 조화를 탐구하는 최고의 지적 활동이었습니다.

창조론의 시각에서 인간의 존재는, 단순한 물질의 진화적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인간의 추구 (지식, 의미, 진리, 美)는 창조주를 향한 깊은 갈망의 표현이며, 하나님을 닮아 창조성을 발휘하는 삶의 본질로 해석됩니다. 이 관점에서는 미학조차도 우연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질서를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미는 곧 창조주의 성품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반면,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지성, 도덕성, 심미적 감각은 모두 자연선택과 생존경쟁의 결과로 형성된 진화적 산물로 이해됩니다. 진화론은 인간의 미적 감각조차도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특징의 산물로 보고, 우연과 자연법칙의 누적적 작용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예술과 미학은 본능과 유전자, 환경 적응의 산물로 해석되며, 존재의 목적이나 초월적 의미는 배제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인간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다릅니다. 창조론은 인간을 신의 숨결이 깃든 영적 존재로, 진화론은 진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고등 동물로 봅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인간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식에도 드러납니다. 창조론은 인간의 미와 창조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반사체로 여기는 반면, 진화론은 그것을 단지 우연한 진화적 결과, 지능과 감각의 산물로 바라봅니다.

이렇듯, 인간은 인식론적 탐구로부터 존재론적 깊이로 나아가며, 그 중심에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본능적 갈망을 품습니다. 창조론은 학문의 꽃으로서의 신학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예술, 미의 정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을 제시합니다. 이 여정의 끝은, 모든 피조세계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창조성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선언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글을 맺으며>

이 글은 창조의 심히 좋음(Tov Me’od)과 진화의 변화 속에서 인간이 어디에 서 있는 지를 묻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며 창조를 기뻐하셨고, 그 기쁨은 천지를 넘어서 인간의 마음에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진화론이 말하는 생존과 적응의 이야기 속에서도 증거가 넘치는 하나님의 문자와 숨겨진 코드가 자연 속에서 넘치고 있음에도 여전히 소경이 되어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창조를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되는 참된 의미와 기쁨의 흔적을 보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우주 속에서 그리고 인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빛은 어둠을 이겼고, 생명은 무(無)에서 솟구쳤으며, 인간은 창조의 정점으로서 하나님의 숨결을 간직했습니다. 나는 이제 이 모든 여정을 뒤돌아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가득 채운 창조주의 선언이었습니다. 나는 이 선언 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고, 내가 걸어온 학문과 문학, 과학과 신학의 길을 되새기며 마침표를 찍습니다.

2025년 5월 25일 주일 아침에 김종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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