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베 씨의 행복 여행

서양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싸워 쟁취해 내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 동양 사람들은 그 반대인 것 같아요. 행복에 대해서도 이 둘의 입장은 판이해요. 행복은 노승의 말처럼 쟁취해야 할 삶의 목적이나 대상이 아닌지도 모르지요. 변화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먼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해요. 거기서 정상적인 변화와 발전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 [책 내용 중에서]


[북스저널] 꾸베 씨의 행복 여행 »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출판사: 오래된 미래 » 자기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꾸뻬라는 이름의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영락없이 정신과 의사의 모습을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치료할 때 쓰는 심리 요법은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에 관해 대화를 나누면서 환자들을 돕는 방법이었는데, 꾸베 씨는 그만의 비결을 동원한 심리 요법으로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꾸뻬 씨를 능력 있는 정신과 의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꾸뻬 씨는 세간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사람들의 병을 완전하게 치료할 때도 있고, 병이 완전하게 치료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병이 더 악화가 되지 않도록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꾸뻬 씨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꾸뻬 씨의 치료 행위가, 그에게 진료받은 사람들을 진정한 행복에까지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갖고 있고, 엄청난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다른 곳에 비해 정신과 의사가 더 많은 것을 보면서, 꾸뻬 씨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꾸뻬 씨를 만나는 일을 좋아했고, 그에게 치료받기를 원했지만, 이런 일들이 그의 마음에 부담을 더 안겨줬습니다. 그래서 꾸뻬 씨는 그의 정신 건강을 위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세상 여러 곳에서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책에는 꾸베 씨가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메모 형식으로 ‘배움 1, 배움 2’ 등으로 기록한 행복에 관한 아포리즘(aphorism)이 등장합니다.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빠르게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꾸뻬 씨가 남긴 ‘배움에 관한 기록’만 읽어도 됩니다. 그러나 꾸베 씨가 남긴 ‘배움에 관한 기록을 얻게 된 과정’을 알고 싶으면, 천천히 그 과정을 음미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감각이 상대적인 것처럼 행복을 얻는 과정도 상대적이니, 내가 행복을 느끼는 최적의 상태를 꾸뻬 씨가 쓴 배움에 관한 기록을 통해 성찰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 매체에서 출고한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보면, 분명히 인간에게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리를 찾기가 꽤 어렵습니다. 조화옹(造化翁)이 내게 준 의무도 아니고 권리인데도, 내가 그걸 찾아보겠다고 하면, 나를 배부른 소리를 하는 사람처럼 쳐다보는 눈이 여럿 있습니다. 그렇지만 행복은 해 아래 세상에 태어난 내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천혜(天惠)의 권리입니다. 그렇기에 주변의 눈들이 나에게 보내는 질시의 감각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행복을 꿈꾼다면, 꾸베 씨처럼 행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만약 직접 여행을 갈 수 있는 돈, 시간 등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저처럼 꾸베 씨가 다녔던 여행 경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여행하는 것도 한 방편입니다. 먼저는 꾸뻬 씨처럼 여행을 가서 현지인과 만나고, 현지의 풍광(風光)을 몸소 느끼고 돌아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가능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저처럼 여행자가 거닐거나 겪어야 했던 지역의 향수와 사건을 되새기면서, ‘저럴 때 나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를 되뇌어 보는 일도 행복해질 권리를 찾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직접 경험이든 간접 체험이든,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꾸뻬 씨처럼 현지로 직접 여행을 갈 수 없다면, 저처럼 책을 통해 그가 겪었던 일들을 반추해 보시길 권합니다.

책에서 꾸뻬 씨는 여행 중에 돈을 노리는 인질범들에게 납치당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안위, 그를 죽일 것인지 살려서 보내줄 것인지를 놓고 서로 의논하는 인질범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꾸베 씨는 행복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이뤄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꾸베 씨는 유서로 남길 종이쪽지를 그가 입고 있던 와이셔츠 소매 속으로 밀어 넣은 채, 죽음 뒤에 다가올 이별의 슬픔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 행복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만약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행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가 한 말처럼 행복은 쟁취해야 할 삶의 목적이나 대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책의 뒷부분에 수록된 작가와 번역가의 만남과 그 둘이 그때 나눈 대화를 통해, 우리는 꾸뻬 씨가 작가의 자서전적 모습이 투영된 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꾸베 씨가 만난 사람 중에 위대한 교수가 있습니다. 위대한 교수는 행복에 관해 정의 내리는 일을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그 교수는 행복한 상황, 아주 슬픈 상황, 매우 두려운 상황에 어떤 사람이 처했다고 가정하게 한 후, 그 상황에 대한 피실험자의 반응을 통해 행복을 측정하는 법을 연구합니다. 그런데 그 교수가 꾸뻬 씨에게 보인 행동이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행복을 측정하는 연구를 하지만, 정작 자신은 행복하지 않은 교수! 꾸베 씨가 만난 교수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복이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거나, 아니면 내 안에 그것이 들어와 있는데도 우리와 나는 그것을 일부러 모르는 척하면서 살기도 합니다. 또 행복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서, 그것을 가져다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면 길을 걷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외로움과 불행, 그리고 허무의 무게에 짓눌려서 축 처진 어깨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꾸뻬 씨는 ‘배움 14’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기에, 행복을 목표로 여기는 실수를 자꾸 저지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꾸베 씨의 말에 따르면, 행복을 목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것보다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긴 여행이 끝나갈 무렵 꾸뻬 씨가 만난 노승(老僧)을 통해, 그리고 책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말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행복을 찾아 늘 과거나 미래로 달려갑니다. 그렇기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이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당신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사람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도, 먼저 이 순간에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필자 정이신(以信) 목사/ 본지 북스저널 전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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