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 뒤에는 언제나 돈이 있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상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힘센 적이 있으면 둘이 서로 손을 잡지만, 적이 사라지면 머지않아 그들 둘이 서로 싸운다. <중략> 돈으로 인간사를 바라본다는 것이 너무 비관적이지 않으냐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역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세상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지혜를 길러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정치는 복잡하지만 나름대로 규칙성이 있다. 이념과 사상이 달라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하는 행태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 [책 내용 중에서]
[북스저널] 역사는 돈이다(명분과 위선을 걷어내고 읽는 진짜 세계사) » 강승준 지음/ 출판사: 잇콘레저 »
책의 메시지처럼 인간의 역사에 돈과 이익이 작동하는 것은 옳고 그름과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과 욕구를 막는다고 해서 모두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돈에 대한 욕구는 끊임없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합니다. 특정한 종교 윤리적 신념으로 돈의 위력을 부정한다고 해서 돈이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지닌 인간의 본성에 비춰봤을 때, 저자의 말처럼 돈과 이익이 역사의 진짜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강조한 것은 세계사, 혹은 인간의 역사가 ‘힘의 논리’에 따라 흘러왔다는 것이고, 그 힘이 작동하게 끔 하는 동인(動因)은 ‘돈’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영토, 노예, 금과 은, 향신료, 교회세, 권력을 한 마디로 ‘돈’이라고 정의합니다. 종교의 움직임도 겉으로 드러난 교리, 윤리의식 외에 그 흐름의 기저에 돈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선교를 빙자했던 스페인 정복자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에서부터 포르투갈과 영국의 노예무역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속살에는 돈에 대한 갈망이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돈에 관해 사람이 보이는 행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중세의 가톨릭 교황의 행태가 고대 바리새파 유대인이 예수에게 한 짓과 비슷하고, 한국에서 보이는 일부 개신교회의 보수적인 행태도 그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는 해 아래 세상에 사는 우리가 돈에 관해 보이는 모습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 제목에는 서양의 세계관이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세태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과 은이 주화로 등장하기 전의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은 토지와 노예였습니다. 또 노예에 의해 유지되는 경제 구조는 필연적으로 영토 전쟁을 불러일으켰기에, 인류의 고대 역사에서 전쟁과 약탈은 경제행위면서 상업행위였습니다. 고대 중동과 그리스 · 로마 사람들은 ‘좀스럽게’ 교역하기보다는 멋있게 힘으로 뺏는 것을 더 영웅시 했고, 이로 인해 해적질과 교역은 그 경계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 로마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들이자 올림포스의 열 두 신 중 하나인 헤르메스가 상업의 신이면서 도둑의 신인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동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기에, 이 책에는 서구의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서양사의 뒷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토대로 발전한 사회 · 경제적 시스템이 이제는 세계의 표준이 됐다면서, 건너편에 사는 우리를 옥죄어 옵니다. 그러니 이런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된다는 말은, 이 책에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역사가 ‘반드시’ 되풀이되기에, 우리는 겉으로만 드러난 역사의 물결 뿐 아니라, 기저에 있는 돈의 흐름이 역사의 물결을 어떻게 굽이치게 움직였는지도,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겉으로는 역사가 고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정글의 동물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은 흐름이 역사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기에,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고, 우리가 건너야 할 파고(波高)를 결정하지 살펴야 합니다.
돈의 흐름을 잘 알고, 여기에 편승해서 승리한 나라들이 오늘날까지 벌이는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세계의 최강국 반열에 올라 세계 경제를 장악한 후에야, 비로소 자유무역주의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좋은 이념과 명분이라고 추앙해 왔던 것들을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버렸습니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럽에서 나름대로 강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거의 모두 이런 전철을 따릅니다. UN을 만들고, 다양한 국제기구를 만들어 ‘인류의 평화’, ‘공동의 번영, 공존’과 같은 숭고한 가치를 표방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런 가치를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곳까지만 인정합니다. 국가 간의 이해가 충돌하거나,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생기면, 과감하게 자국의 이익을 먼저 도모하는 방향으로, 돈의 흐름을 따르는 정책으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돈의 역사, 돈이 뒷전에서 주도하는 인류 역사는 앞으로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게 ‘반드시’ 되풀이될 것입니다. 그러니 돈이 어떻게 인간의 역사를 지배해 왔는지 알아보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에 편승에서 돈을 따르든지, 돈이 지배하는 영역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하며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저자는 청년들이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가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년들에게 공명심이나 애국심, 이타심을 발휘하라고 권하기보다, 그들이 추구하는 ‘건강한’ 사익(私益)이 국가에도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사회 · 경제적 시스템을 정비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아이를 낳아도 손해가 되지 않고 그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개인이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뛸수록 국가에도 이익이 되도록 사회 · 경제적 시스템을 정비해 놓지도 않은 채, 출생률 저하로 인한 인구절벽을 걱정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모르는 몽매한 행위입니다. 이제라도 명분보다 실리로 움직이는 세태의 흐름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사회 · 경제적 시스템을 정비해야 합니다.
돈의 흐름에 압박 당하지 않고, 윤리적으로 올바른 생각이 돈의 흐름과 별개의 길을 만들어가는 세상이 조금은 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돈의 위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불어 칼뱅(Jean Calvin)이 ‘양심을 지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부업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했던 것처럼, 청부(淸富)를 추구하게 해야 합니다. 청부는 건강한 사익추구가 국가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사회 · 경제적 시스템과 연결된 것이기에, 이런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면,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돈이 우리에게 주는 압박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 정이신(以信) 목사/ 본지 북스저널 전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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