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기나(Βεργίνα), 전설이 역사로 드러난 곳

“왕들의 무덤 (Royal Tombs)” 만약 이 표지판이 없었다면 베르기나는 그저 스쳐 지나갈 시골 마을에 불과했을 것이다. 길눈이 밝다고 자부하는 나 역시 이 마을을 지나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곳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첫 수도 아이가이, 왕조의 기원이자 기억이 머무는 자리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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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이 (베르기나Βεργίνα)의 전설과 역사

1977년 이전까지 아이가이(Aigai)는 전설과 신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도시였다. 이곳에 대한 고대 사료에 따르면 마케도니아 왕국의 첫 수도였고, 후에 수도는 펠라(Pella)로 천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기록만 있었을 뿐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은 터였다. 빌립 2세(Φίλιππος B)가 살해 되었고, 알렉산더(Αλέξανδρος ο Μέγας)가 그의 부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곳이 바로 이 아이가이였다. 이 도시가 가진 사실은 누가 보아도 예사로운 역사가 아니다.

이 도시의 위치를 일부 학자들은 어린소년 알렉산더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학했던 미에자 학사가 있던 에데사(Eδεσσα) 인근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아이가이(Αιγαί)는 아틀란티스처럼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신화적 공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도시의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전설 속에서만 존재해 온 것이다.

플루타르코스(Μέστριος Πλούταρχος)의 기록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의 빌립 2세와 에페이로스 출신 올림피아(Ὀλυμπιάς)는 사모트라케 섬에서 열린 제우스의 제의에서 처음 조우하였다. 필리포스는 올림피아에게 매료되어 혼인하였으며, 이 결합에서 기원전 356년 알렉산더가 태어났다. 어린 알렉산더는 어머니의 종교적 영향으로 자신을 단순한 왕자가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로 인식하며 성장하였다. 성장한 그가, 훗날 이집트 시와(Σίβα)의 아문 신전에서 받은 “너는 제우스의 아들이다”라는 신탁을 주저 없이 받아들인 것도 이러한 자기 인식과 밀접히 연결된다. 이와 같은 ‘신적 혈통’ 의식은 알렉산더가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종교적 정당성을 정초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알렉산더의 성장 과정은 안정적이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후계 지위는, 기원전 337년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 귀족 가문의 여성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Κλεοπάτρα Εὐρυδίκη)와 재혼하면서, 크게 위협을 받게 된다. 이 혼인은 단순한 가정사가 아니라 정치적 사건이었다. 만일 에우리디케가 아들을 낳는다면, ‘순수한 마케도니아 혈통’을 지닌 새로운 왕자가 합법적 후계자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결혼식에서 새 왕비의 삼촌인 장군 아탈로스(Άτταλος)가 “신들이 합법적 후계자를 내려주시길 바란다” 라고 발언하자, 알렉산더는 격분하여 술잔을 던지고 모욕을 퍼부었다. 이 일 때문에 알렉산더 모자는 일시적으로 마케도니아를 떠나 망명 생활을 하였다. 당연히 빌립2세의 부자 관계는 심각한 불화에 직면했다. 알렉산더는 주변 인물들에게 “진정한 나의 아버지는 제우스”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일화는 이러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원전 336년, 아이가이에서 빌립 2세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에페이로스 왕 알렉산드로스 1세(알렉산더 대왕의 외삼촌)의 결혼식이 열리던 도중, 근위병 파우사니아스(Παυσανίας)가 빌립 2세를 암살했다. 살해범은 현장에서 살해되었고, 배후를 규명할 기회는 사라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고대의 사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전한다. 알렉산더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적 원한 때문이라 설명했지만 설득력은 약했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Justinus)는 오히려 알렉산더와 올림피아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실제로 유스티누스는 올림피아가 파우사니아스의 시신에 월계관을 씌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한다.

오늘날 연구자들 역시 알렉산더 모자가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직접적인 증거는 여전히 없다. 일본 작가 아토다 다카시(阿刀田高)의 소설 사자왕 알렉산더에서는 올림피아를 필리포스 2세의 직접적인 암살자로 묘사한다. 이는 사료적 사실이라기보다, 올림피아를 권력욕과 모성적 집착의 화신으로 재해석한 문학적 상상에 가깝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렉산더 사후 벌어진 왕위 쟁탈 전쟁인 디아도히(Διάδοχοι) 전쟁과 로마의 정복 전쟁 속에서 이 도시는 전설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도시에서 일어난 비극적 암살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헬레니즘 시대라는 새로운 장의 첫 페이지였던 셈이다.

왕조(王祖)는 사라졌지만, 기억은 영원하다.

오늘날 북동부 그리스에는 터키 국경에서 출발해 이오니아 해의 항구도시 이구메니차(Ηγουμενίτσα)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있다. 네아 에그나티아(Νέα Εγνατία)라 불리는 길은 유럽 도로 E90이자 그리스 고속도로 A2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진짜 의미는 숫자에 있지 않다. 고대 로마가 제국을 동서로 잇기 위해 닦았던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가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길이기 때문이다. 테살로니키에서 이 길을 타고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뵈레아(Veroia)와 베르기나(Vergina)로 갈라지는 출구가 나타난다. 뵈레아는 도시이지만, 베르기나는 그저 과일이 풍성한 농촌일 뿐이다. 복숭아와 자두, 살구가 끝없이 이어지는 과수원 사이를 지나면, 마을 어귀에서 갈색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 전역의 고고학 유적지를 알리는 표지판, 그 위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다.

“왕들의 무덤 (Royal Tombs)”만약 이 표지판이 없었다면 베르기나는 그저 스쳐 지나갈 시골 마을에 불과했을 것이다. 길눈이 밝다고 자부하는 나 역시 이 마을을 지나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곳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첫 수도 아이가이, 왕조의 기원이자 기억이 머무는 자리임을 알린다.

마케도니아 왕들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했고, 죽은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신화에서 역사로

1977년 11월, 테살로니키 대학교의 고고학자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Μανόλης Ανδρόνικος)는 마케도니아의 고도 아이가이(Aigai, 오늘날 베르기나)에서 미발굴 상태로 남아 있던 대형 분구(大墳丘, the Great Tumulus)를 조사하였다. 발굴 과정에서 그는 “손상되지 않았다, 봉인되어 있다”라고 외쳤으며, 이는 도굴되지 않은 최초의 마케도니아 왕릉 발견을 의미하였다. 석관 내부에서는 불탄 유골과 함께 정교하게 세공된 금제 화관과 황금 관이 발견되었다. 특히 황금 관의 뚜껑에 새겨진 16개의 광선 문양은 오늘날 ‘베르기나의 태양’(Vergina Sun)으로 불리며, 마케도니아 왕조의 상징적 표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 발굴은 언론으로부터 “투탄카멘 무덤 발견에 비견되는 사건”으로 평가되었으며, 헬레니즘 이전 마케도니아 문화와 왕권의 위상을 재평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현재 이 발굴지는 ‘아이가이 복합 박물관’(Polycentric Museum of Aigai)으로 정비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관람객들은 발굴 현장과 유물을 현장에서 직접 접할 수 있다. 예전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근례에는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한다.

출토품에는 금관, 금제 화관, 정교한 무기와 장신구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참나무 잎과 도토리 모양으로 세공된 화관은 왕권의 신성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왕비의 무덤 벽화인 페르세포네(Περσεφόνη)의 납치 장면은 사후 세계와 재생의 신화를 표현하는 동시에, 현존하는 드문 고대 그리스 회화 사례로서 중요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 유물들은 단순한 장례 부장품을 넘어,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치·종교·예술적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평가된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부장품의 양식이 필리포스 2세 사후 시기와 더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무덤의 주인이 빌립 3세 아리다이오스(Ἀρριδαῖος,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동생)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와 다수의 학자들은 무덤의 장식 수준, 무기·장신구의 품격, 그리고 역사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해당 무덤을 필리포스 2세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장례 침대의 장식 조각에서 확인되는 인물상은 필리포스와 알렉산더의 생전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되며, 예술적 사실성과 기록적 가치를 동시에 지닌다.

이 논쟁은 단순히 고고학적 연대 측정의 문제가 아니라, 마케도니아 왕조의 정통성과 고대 정치사의 해석이라는 더 큰 맥락과 직결된다.

베르기나 왕릉 발굴은 “신화가 역사로 전환되는 순간”을 상징한다. 플루타르코스 등 고대 문헌 속 왕조 전승과, 발굴을 통해 드러난 고고학적 실체는 때로 불일치를 보이지만, 바로 그 긴장이 역사 연구의 생산적 동력이 된다. 아이가이에서 드러난 장례 유물과 벽화는 고대 마케도니아가 단순한 신화적 전설의 무대가 아니라, 실재했던 권력과 예술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하며, 동시에 헬레니즘 세계의 기원을 새롭게 조명한다.

이제 아이가이 즉 베르기나의 유적지에서 내가 느끼는 마지막 심정은 무엇인가?

황금 관과 벽화, 무기와 장신구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마케도니아 왕조의 권위와 헬레니즘 세계의 기원을 증명하는 증언이다. 동시에 이 발견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민족 정체성의 문제와 맞물리며, 고고학이 단순한 과거 탐구가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 시대가 남긴 권력의 장엄함과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 발굴은 단순히 고대 무덤의 발견을 넘어, 마케도니아 왕조의 역사적 실체와 정통성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전설 속의 도시 아이가이는 실재의 역사로 부활했다.

나는 박물관을 나서며 깨달았다. 베르기나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제국이 잠든 자리,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는 기억의 땅인 것을…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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