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능력

오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이 살아 있고(활력), 예리하여 영혼을 꿰뚫고, 우둔한 자에게 지혜를 주며, 축복의 근원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말씀의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종할 때 기적과 역사가 일어남을 강조합니다.

[스피릿저널] 말씀의 능력» 히브리서 4:12~13»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으신다면 모두 “아멘”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심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 나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진심 어린 마음으로 여쭙습니다. 여러분은 종교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모두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의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장성한 아비의 신앙, 곧 그리스도의 성숙한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입술로만 고백하지 마시고, 진정으로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의하면 요한은 신앙을 세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요한일서 2장에 어린아이의 신앙(자녀의 신앙), 청년의 신앙, 그리고 아버지의 신앙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기를 소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제임스 파울러는 신앙을 여섯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직관 투사 신앙, 둘째는 신화적 문자 신앙, 셋째는 관습적 합성 신앙, 넷째는 개별화 성찰 신앙, 다섯째는 통합 신앙, 여섯째는 우주적 신앙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혼돈스러운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종교인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숙한 신앙의 사람인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드린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 주변에 깔려 있는 영적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은 요즘 페미니즘에 의해 무너지고 있으며, 학교의 교권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노동계에 의해 노란 봉투법이 만들어지고 상법이 통과되면서 기업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기소권과 수사권을 가지고 있는 검찰이 수사권을 경찰로 이양했다가 이제 아예 폐지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여성가족부가 사라지고 성평등가족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 성평등가족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녀 간의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48가지의 성을 인정합니다. 국회의원들조차 이 차별금지법이 무엇인지 모르고 ‘차별하지 말아야지, 좋은 것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입법을 통과시켜 버립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징벌적 차별금지법에 심판을 받았을 때, 혐오감을 느꼈다며 신청하면 1인당 10만 원씩 벌금을 부과하여 아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게 하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할 사람이 없습니다. 짓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백성들을 깨우고 깨닫게 하며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비추어 바로 말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신은 우리를 혼돈케 하고 혼미케 하며 혼란하게 만듭니다. 거짓말을 일삼습니다.

영적 혼돈의 시대와 말씀의 필요성

지금 우리는 네오마르크시즘이라는 사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1820년대 이탈리아 공산당의 아버지 안토니오 그람시와 헝가리의 비트지 같은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생겨난 이념 사상입니다. 이것이 문화로 둔갑했습니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구조적 변화와 사회 운동을 통해 세상은 어지럽게 변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위계질서는 다 무너졌습니다. 그 결과, 부모가 자식을 훈계하고 채찍을 들 때 폭력으로 단정 짓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채찍은 아이들을 바르게 깨우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중학교 시절에 한 상업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연세가 예순 살 되신 분인데, 출석부와 함께 약 30cm 정도 되는 단단한 대나무 뿌리를 항상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그분은 “나는 너희를 때릴 힘이 없다. 너희 스스로 자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숙제를 안 해오거나 잘못을 행했을 때 교탁에 앉아 스스로 손바닥을 때리게 했습니다. 살살 때리면 수업을 하지 않고 바르게 때릴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은 대단히 무서웠습니다. 어떤 아이는 한 번 때릴 때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스스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 선생님의 말씀은 하늘과 같았고, 교권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의 혼돈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해 깊이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 4절은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낮과 밤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 하나님의 뜻하신 바, 하나님의 계획하신 대로 창조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 궁금했습니다. 창세기 1장 4절,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31절에 동일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심히 좋았더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원어 ‘엘로힘 키토브’를 깊이 파고들어 보니, 이 말씀은 두 가지 단어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직역하면 “그러자 그는 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좋았다”로 해석됩니다. ‘보았다’는 ‘와야르’라는 말로, 단순히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감찰하고 진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과 세심한 눈으로 살펴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좋더라’는 ‘토브’라는 말로, 선하고, 충실하며, 아름답고, 존귀하며, 복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충실히 반영된 실로 완벽하고 매우 놀라운 창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일곱 번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세상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좋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축물을 건축하기 전에는 수많은 미팅을 통해 설계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저도 교회 건축을 계획할 때 폭포수가 떨어지는 입구, 옥상에 청소년을 위한 무대, 강단에 무지개가 비치도록 물을 담수하는 등 다양한 구상을 했습니다. 전기 절약을 위해 건물을 흙 속에 짓고 공동묘지, 장례식장, 체육관, 학교까지 만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건축 철학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미팅과 수정 과정을 거쳐 완성된 건축물을 보며 설계자가 “멋있다”고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의도하신 바가 있었고, 뜻하신 바가 있었으며,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고 완벽하며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대할 때 그 아름다운 신비에 감탄사를 금치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설악산의 기암절벽,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산과 들, 푸른 바다와 그 속의 생물들을 보며 감탄합니다.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당시의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회복하실 때 그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도래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이 땅에서의 고통과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영광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도래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빛과 어둠, 그리고 말씀의 능력

전도서 3장 11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본문 4-5절에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는 말씀은 낮과 밤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 뜻하신 바, 계획하신 대로 창조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또한 빛과 어둠, 낮과 밤이 분명히 구별되고 결코 서로 연합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성경에서 빛은 흔히 진리, 선, 천국, 성도,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어둠은 거짓, 악, 지옥, 불신, 더러움, 추악함, 혼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어 명백하게 구분하신 것은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천국과 지옥, 성도와 불신, 질서와 무질서가 서로 연합하거나 조화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간섭받기를 싫어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넘어갑니다. 그러나 좋다고 생각한 것이 마지막에는 우리를 사로잡는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분별력을 갖지 못하면 안 됩니다. 이 시대를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마치 솥에 든 개구리와 같습니다. 따뜻함에 편안함을 느끼다가 점점 온도가 올라가 결국 죽게 되는 것처럼, 우리 시대도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는 교회 밖에서는 들을 수 없습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깨워야 합니다. 이런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대를 영적으로 깨우는 것은 목사의 역할입니다.

그동안 40년 동안 우리는 교육을 통해 많이 오염되었고, 그래서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설에 따르면 지금 세 가지 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둘째는 경제 위기, 셋째는 외교 위기입니다. 지금 경제가 심각합니다. 노란 봉투법이 통과되고 상법이 통과되면서 기업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윤청 장로님은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인데, 재생 에너지로만 하겠다는 것은 믿지 말아야 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는 대한민국에 최고입니다.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원자력 발전소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가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위험하다고요? 어떤 것이 안 위험합니까? 외교만 위기가 아니라 국방도 위기입니다. 어떻게 방위병 출신이 국방부 장관을 맡습니까? 교육도 위기이고, 문화도 위기입니다. 케이팝, 케이드라마가 전 세계를 날리고 있지만, 거짓과 위선이 만연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빛이면 빛, 어둠이면 어둠입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고, 어둠이 오면 빛이 물러갑니다. 중도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뚜렷하게 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빛의 세계, 복된 생애를 살아가려면 어둠의 일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전 것, 옛것, 어둠에 속한 것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바로 분별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이를 영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소속을 불분명하게 만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모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종교다원주의, WCC(세계교회협의회), WEA(세계복음주의연맹)가 바로 이러한 시도입니다. WCC는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한 종교 통합 운동으로, 이제는 모든 종교가 같다고 주장합니다. WEA는 복음주의 미명 아래 교회를 평화롭게 통합한다고 하지만, 기독교만 구원이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차별금지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하면 누가 고소 고발하여 1인당 10만 원씩 벌금을 때려도 만 명, 10만 명이 고소하면 엄청난 벌금이 되어 아예 입조차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징벌적 차별금지법입니다. 지금 나라가 그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를 수호하는 삶

국민들은 ‘성차별을 하지 않는 것은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이는 남녀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40가지가 넘는 성(젠더)을 인정하며 남자가 여탕에 들어가 “나 여자야”라고 말하면 막을 수 없게 만드는 식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영을 혼미케 하는지 모릅니다. 마귀는 우리의 소속을 불분명하게 만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모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을 나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태도를 취할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세상, 어느 한편에 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진리와 비진리는 같을 수 없고, 어둠과 빛이 혼합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흑백논리를 싫어하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며 중용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과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해야 합니다. 빛과 어둠을 나누신 하나님의 논리는 분명한 흑백입니다. 빛의 자녀가 아니면 어둠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구원이냐 멸망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그 중간에 서 있는 자는 이미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이며, 그러한 자는 하나님께 가증히 여김을 받아 영원히 버림받고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16절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경고합니다. 주님께 버림받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께 붙잡힌 바 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칭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1절부터는 “그러므로 너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이어집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15절에서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효도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학교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신뢰하기를 원하며, 어른들을 높여 드리고 세워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천지 가운데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신 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몰아내시고 이 세상을 생명과 활력이 넘치는 것으로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죽은 자가 새 생명을 얻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날마다 상고하며 묵상하여 자신의 삶의 빛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땅에 몇 년 더 살겠다고 영원한 소망인 하나님 나라를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끝까지 지켜나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전파하여 이 세상을 밝게 비춰 주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 앞에 설 때마다 칭찬받는 성도, 개인, 사회, 국가, 대한민국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대한민국은 연방제가 아니라 자유통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 휴전선이 무너져야 합니다. 지금 이 정부는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감히 할 수 없지만, 저는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죽고 우리 자녀들이 산다면, 나 한 사람이 죽고 우리 교회가 산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나야 합니다. 말씀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인자가 올 때 너희가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심각하게 질문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성령님은 보혜사로서 우리 곁에서 도우시려고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과부와 같이 만들지 않으려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께서 강한 믿음과 담대함을 주실 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지난 80년 동안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을 지켜왔고, 전 세계 유례없는 최고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친중으로 가면 503년간 중국의 억압을 받았던 이씨 조선처럼 될 것입니다. 다른 교회가 잠잠할지라도 우리는 일어나 말씀을 붙잡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동영상 말씀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kSOThXT1uAs

핵심 키워드:
말씀의 능력, 영적 분별, 믿음과 순종, 창조 질서, 그리스도인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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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강헌식 목사/ 본지 목회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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