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저널] 新성지행전, 바울의 바닷길 사모드라케, 사모스 » 김수길 선교사 » 그리스 이야기(38회) »
新성지행전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한국의 C방송 성탄특집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그 시절 한국 공영방송에서는 ‘꽃보다 할배’ 그리스 편이 큰 사랑을 받았다. 방영 직후, 하루에도 몇 대의 전세기가 한국과 그리스를 오가며 수많은 이들이 그리스를찾았다고 한다. 단순히 그 열풍에 편승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 방송에서는 오래전부터 바울 사도의 바닷길 사역을 영상으로 담아내기를 기도하며 준비해 왔던 것이다.
책임을 맡았던 H 피디는 이전에도 ‘바이블 르포’ 8부작, ‘크리스천 르네상스’ 4부작을 만들었다. H 피디가 다시 함께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먼저 선약된 강의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대신 우리 집 막내, 대학생이던 아이가 그 자리를 채워주었다. 이후 나는 번역과 감수를 맡아 마침내 작품을 함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다시금, 바울사도가 밟았던 섬 지역의 발자취를 되살리고 싶다. 이미 발표한 크레타와 다른 섬들을 제외 한 바울의 바닷길을 따라가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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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사도와 신비의 제전 사모드라케
바울 사도가 사모드라케 (Σαμοθρᾴκη)를 거쳐 간 일정은 사도행전 16장에 짧지만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사모드라케를 그리스가 아닌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먼저 만났다. 루브르의 대표적 작품은 생각했던 것은 기원전 220년에서 190년 사이에 만들어진 그리스의 가장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인 사모트라케의 니케(Νίκη της Σαμοθράκης)신상이다.
그리스의 어느 도시를 가도 작은 박물관 안에서 비슷한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승리의 여신상만큼은 예외다.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없어도, 사모드라케라는 섬을 몰라도, 이 조각상은 누구나 알고 있다. 기원전 190년경, 로도스 사람들이 에게해에서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며 세운 이 여신상은 원래 사모드라케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1863년, 프랑스 영사이자 고고학자였던 샤를 샴푸아소가 그것을 발견했고, 12년 뒤 루브르에 옮겨졌다. 지금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사모드라케 섬은 크레타나 산토리니처럼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찾아가는 길은 멀고, 배편도 드물다. 아테네나 데살로니키에서는 직항 배가 없어, 터키 국경 도시 알렉산드루폴리에서 카마리오티사를 오가는 정기 여객선 ‘사오스 페리’에 올라야 한다. 두 시간의 항해 끝에야 비로소 사모드라케의 항구, 카마리오티사(Καμαριώτισσα)에 닿는다.
신화와 역사가 살아 있는 섬
사모트라케(Σαμοθράκη). 에게해의 북동쪽, 트라키아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이 섬은 마케도니아 동쪽 끝, 에브로스 지역에 속한다. 성경 속에서는 사도행전 16장에 잠깐 등장할 뿐이지만, 그 짧은 언급이 오히려 섬을 더 신비롭게 만든다.
섬의 중심에는 사오스 산(Όρος Σάος), 일명 월출산 펭가리(φεγγάρι)산이 있다. 1,611m에 달하는 봉우리는 北 에게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마치 섬 전체를 품어 안은 수호자처럼 우뚝 서 있다. 사오스 산의 품에 안긴 수도 호라(Χώρα)는 원형극장처럼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다. 전통 석조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 작은 광장들, 그리고 절벽 위 해발 311m 높이에 세워진 성모 교회는 ‘에게해의 발코니’라는 이름 그대로, 방문객들에게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품는 경이로운 장면을 선사한다.
사모트라케는 아직도 상업적 관광에 크게 물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파히아 아무(Παχιά Άμμος) 해변의 금빛 모래사장은 더욱 순수하게 빛나고, 고대부터 알려진 테르마(Θέρμα) 온천은 지금도 유황 향을 품은 채 건강과 치유의 쉼터가 되어 준다. 천연 노천탕에 몸을 담그면, 바다와 산이 한눈에 펼쳐지며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영원을 함께 느끼게 한다. 섬 곳곳에 흩어진 폭포와 깊은 협곡, 그리아 바드라(Γριά Βάθρα)의 맑은 물줄기는 이곳이 ‘야생 그대로의 낙원’임을 말해 준다.
사모트라케가 단지 아름다운 자연만을 간직한 곳은 아니다. 이곳은 고대 그리스 종교의 가장 중요한 성지 중 하나였다. 바로 위대한 신들의 성소(Ιερό των Μεγάλων Θεών). 카베이로스 신비의식이라 불린 그 제의는 고대인들에게 생명과 죽음, 풍요와 구원의 비밀을 전해 준다고 여겨졌다. 전해지기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모인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가 처음 만난 곳도 바로 이곳의 신비의식 자리였다고 한다.
성경과 신화, 자연과 역사가 한데 만나는 땅, 사모트라케.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에 이 섬을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발걸음은 오늘날까지도 섬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달리하게 만든다. 인간이 갈망하던 신비와 승리의 상징이 머물던 자리, 그곳을 지나간 복음의 발자취는 역사의 빛과 어둠을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던진다.
사모트라케의 바울 흔적
여느 그리스 사람들처럼 음악과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이곳 주민들은 이들의 마을이 성경에 기록된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사도행전 16:11) 사실 사도 바울께서도 하루 정도 머물다 네아볼리로 가신 것이다.
바울사도와 관계된 유적지인 사도 바울의 스타시디(Στασίδι του Αποστόλου Παύλου)는 사모트라케 섬 북부 해안에 있는 고대 도시 팔레오폴리(Παλαιόπολη)의 유적지 근처에 위치해 있다. 카마리오티사 항구에서 약 6km 거리에 있다.
그리스어 스타시디 (Στασίδι)는 원래 교회당 안에 있는 목재로 만든 의자이다. 주로 성직자들이 앉는 자리이다. 보통은 수도원이나 정교회 성당 벽 쪽에 놓여 있는, 등받이가 높고 팔걸이가 있는 전통 의자이다. 그러나 사모트라케에서 말하는 스타시디는 좀 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곳 전승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사도행전 16:11)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네아뽈리로 가는 길에 사모트라케 섬을 거쳤다. 이때 바울이 잠시 머물렀거나 설교를 했다고 전해지는 자리가 이곳 사도 바울의 스타시디 라고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는 단순한 작은 기념비와 십자가 형태로 꾸며져 있으며, 오늘날은 아주 적은 소수이지만 기독교 순례자들로 들리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사모트라케를 바라볼 때, 단지 고대 유적이나 아름다운 자연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경 속 작은 구절을 통해 드러나는 큰 하나님의 이야기, 곧 복음이 세계로 건너간 길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섬이다. 인간이 신비를 찾아 헤매던 그 자리 위로, 참된 진리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던 곳. 사모트라케는 그 자체로 복음의 역사와 하나님의 섭리를 증언하는 신비의 섬이라 할 수 있다.
철학과 수학 그리고 역사의 섬 사모스(Σάμος)
사모스 섬은 오래전에 다녀왔기에 기억이 가물거린다. 오래 전, 나는 큰형님 같은 선배님 부부와 함께 특별한 순례의 길을 떠났다. 그분은 요한계시록을 집필 중이었고, 우리는 그 말씀의 배경이 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밧모 섬을 직접 밟아보기로 했다. 여정은 밧모에서 시작되었다. 밧모의 스칼라 항을 떠나 쾌속 여객선 돌핀 플라잉을 타고 사모스의 피타고라스(Πυθαγόρας)항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고대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동상이었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의 동상은, 단순히 학문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아니라 이 섬이 품어온 지혜의 전통을 보여주는 듯했다. 작은 항구 마을은 조용했지만, 그 속에 흐르는 평화로움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역사와 전설, 신화와 믿음이 뒤섞인 공기가 바닷바람에 묻어 있었다.
이름과 전승 속의 사모스
사모스는 고대 문헌 속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샘이 많아 ‘이드릴레(εἰδύλλιον)’라 불리기도 했고, 풍부한 식생활 때문에 ‘멜람휠로스(Μελάμφυλλος)” 와 “멜란테모스(Μελάνθεμος)’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본래 이름인 ‘사모스’는 높은 산지를 뜻하는 어근 sama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섬 중앙에는 케르케테우스(Κερκέτιος)산이 1,400m가 넘게 솟아, 섬 전체를 하늘과 이어주는 기둥처럼 세워두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사모스라는 이름은 개척자 앙카이오스(Ἀγκαῖος)의 아들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그만큼 이 섬은 신화와 전승으로 빼곡하다. 페니키아인, 펠라스기인, 카리아인, 레레게스인들이 차례로 머물렀고, 도데카네사(Δωδεκάνησα)열 두개 제도의 일원으로서 에게 해의 중요한 항해·무역 거점이 되었다.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와인과 도기를 수출하며 번영했고, 그 교역망은 이집트와 코린토스, 흑해까지 뻗어 있었다.
오늘날에도 사모스는 그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헤라이온((Ἡραῖον 헤라 신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피타고라스뿐 아니라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Ἀρίσταρχος) 철학자 에피쿠로스(Ἐπίκουρος)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우화 작가 이솝(Αἴσωπος)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은 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동시에 숲과 포도밭, 바다가 어우러진 자연의 정원이었다.
기다림의 시간
그러나 나에게 사모스는 단순히 역사와 신화를 품은 섬만은 아니었다. 순례를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가려던 날, 예상치 못한 태풍이 몰아쳤다. 배는 사흘 동안 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항구에 나가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지만, 수평선은 텅 비어 있었고,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처음엔 초조했다. 일정이 미뤄지는 것,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에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기다림 속에 묘한 평안이 찾아왔다. 마치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신 것 같았다. 여행의 목적은 단순히 성지의 돌과 흙을 밟는 것이 아니었다. 기다림 속에서, 멈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는 것이 더 깊은 순례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모스, 바울의 발걸음이 스쳐 간 섬
“그 이튿날 기오 앞에 이르렀고, 그 다음 날 사모스에 대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렀다.” (사도행전 20:15) 짧디 짧은 구절. 그러나 그 안에 바울의 발걸음이 스쳐 간 흔적이 담겨 있다. 사모스는 그가 머물러 설교한 곳도 아니었고, 교회를 세운 곳도 아니었다.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이르기 위해 서둘러 항해하던 길목에서, 잠시 배가 들렀던 기착지였다.
잠시 스쳐 지나간 섬 나는 사모스의 항구에 서서 바울의 배가 이 바다를 지나갔을 것을 생각했다. 그가 바라본 바다와 내가 바라보는 바다가 같았을까? 바울은 아마도 이 섬의 산맥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머릿속은 이미 예루살렘에 닿은 후 맞게 될 여정을 그렸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여유롭지 않았다.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그는 에베소조차 들르지 않고 밀레도로 직행했다. 사모스는 그저 지나가는 섬, 잠시 발자국이 스쳐 간 곳이었다.
지나감의 의미
그러나 나는 그 “지나감” 속에서 묵상의 여지를 찾는다. 성경에 언급된 수많은 땅들 가운데, 어떤 곳은 교회가 세워지고 편지가 쓰인 자리였지만, 또 어떤 곳은 이렇게 한 줄의 기록으로만 남았다. 머무름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진리가 있다. 복음의 여정은 머무름으로만 완성되지 않고, 지나감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이 사모스를 지나 밀레도로 향하던 길, 그는 이미 고별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설교 속에 흐르는 눈물과 경고, 그리고 믿음의 당부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모스의 해안선은 그 설교를 향한 길 위에 있었고, 잠시 들러 스쳐 간 그 흔적조차 은혜의 경로였다.
사모스는 내 기억 속에 기다림의 섬으로 남았다. 고대의 찬란한 역사와 전설보다 더 깊이 내 마음을 흔든 것은, 태풍 속에 멈추어 선 그 사흘의 시간이었다. 그 기다림은 나를 낮추었고, 동시에 내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 주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은 결코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값진 순례의 일부였다. 사모스의 숲과 포도밭, 바람과 바다는 내게 속삭였다.
“순례는 목적지에 다다르는 발걸음만이 아니라, 멈추어 기다리는 시간조차 하나님의 은혜의 길이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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