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조망] 한국은 어떻게 에너지 최빈국에서 30여년 만에 원전 최강국이 될 수 있었나? » 한-미수교 140년의 근현대문명사 리뷰-22 »
한국은 1948년 건국되었으나 2년 후에는 전국이 동족상잔으로 스스로 일어서기 어려운 최빈국이 되었다. 당시 문맹률이 80% 정도였고 1인당 국민 소득은 약 80 달러로 아프리카의 가나와 같이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으며, 산업 인프라 또한 매우 빈약하였다. 당시 한국에 온 외국인에게 한국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고 물으면 “한국의 하늘은 매우 파랬고 맑다”라고만 했다. 그 정도로 산업 시설이 없어 공해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한 국가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전력이나 당시 한국은 전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일반 가정에서도 수시로 정전되고 단전이 반복되었고, 전기 다리미마저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는 데에는 불과 30여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에너지 자립 시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는 나라의 백년대계를 준비한 이승만이라는 지도자의 결단과 추진력이 작용되었기에 원자력 발전 분야에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창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 후에는 세계에서도 그 기술력에 대해 가장 신뢰받는 원전 국가로 거듭났고, 세계 원전 시장에서도 높은 신뢰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실상 에너지 제로 그라운드(Zero ground)에서 시작하여 원전 굴기(倔起)의 국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 재정이 핍절한 가운데서도 미국으로 과학 인재들을 국비 유학으로 보냈고, 이어서 원자력 기술 도입을 위해 ‘한·미 원자력 협정’을 통해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즉, 미국의 배경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원자력을 무기 생산 분야에서 상업용 발전으로 전환시키는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었으며, 원자력 발전 기술의 원천국이었다. 이 기술을 개발해낸 기업은 ‘웨스팅하우스전력사’(Westinghouse Electric Company)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파격적인 원전 기술 도입으로 국가의 절박한 전력 생산을 돌파하기 위한 장기 정책을 이같이 추진한 것이었다.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었기에 가장 효율적인 전력 생산을 위해서는 원자력에 의한 전기 발전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당시 전력 생산 형편은 일제가 건설해 놓은 수력 발전소로는 가정용으로도 부족하였다. 전후 한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미군의 도움으로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전기 바지선 발전소를 통해 전력 공급을 보충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 수단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먼저 1953년 10월 종합 부흥 계획을 수립하고 자체적으로 가용한 에너지로 석탄 개발을 축으로 경제 부흥을 도모했다.
이 당시 단시일 내에 실용화할 수 있는 산업 발전으로는 석탄 발전소가 유용했고, 탄광지와 발전소 간의 탄광 철도도 건설했다. 1954년 11월 ‘대한석탄공사’를 설립하였고 석탄 개발과 산업 철도 건설에 군 병력까지 동원하였다. 1956년 당인리 발전소 3호기가 완성되어 전력 공급이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전후 빠른 복구 과정에서 전기 에너지는 더욱 부족하였다. 이승만은 석탄을 통한 화력 발전의 비효율성을 간파하고 원자력 발전소 개발이라는 파격적인 에너지 정책을 결정했다. 이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혜안이기도 하였다. 당시 원자력 발전은 오직 미국에서만 산업화에 성공한 첫 사례였고, 산업 후진국들로는 생각할 수 없는 고차원의 전력 사업이었다.
이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전쟁이 끝난 후에 원자력 기술을 핵무기 개발로 활용하기 위해 유학생들을 소련으로 유학 보냈다. 즉, 이승만과 김일성의 원자력 기술 도입의 목적과 수단이 이처럼 확연히 달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미네소타 프로그램’을 통해 원자력을 포함한 과학 인재 237명을 국비로 유학 보냈다. 그 유학생 중에는 유학을 마치고 1959년 서울대 원자력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국내에서도 후진 양성에 힘쓰게 한 이들도 있었다. 이승만은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행정 기구 설립과 인재 양성 프로그램 운영 등 제도와 기관을 설립하면서 정책적으로 준비하였다. 전쟁 중이던 1953년 3월 9일 문교부 ‘기술교육국 원자력과’를 설치하여 담당 행정 기구를 만들었다.
놀랍게도 1953년 12월 8일 유엔 총회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구호를 통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원전의 평화 시대를 열었다. 이에 이승만은 고무되어 1955년 8월 8일에 열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회의에 박철재, 이기억, 윤동석을 파견하였다. 동 회의에서 국제원자력기구 창설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고 국제연합(UN) 산하에 1956년 10월 26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설립되었다. 이승만은 1956년 2월 3일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협력을 위한 협정’을 맺고 원자력 활용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참으로 탁월한 결단이었고 백년대계의 준비였다.
이어서 이승만 정부는 1958년 3월 11일 ‘원자력연구소’ 설립을 위한 원자력법을 제정하였다. 당시 일반인들이나 행정 관료들도 이러한 이승만의 구상과 열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먹고사는 민생고 해결만이 국가적 중대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1959년 1월 21일 원자력 행정 기구인 ‘원자력원’이 설립되었고, 3월 1일 서울대 공과대학에 원자력원 산하의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어서 1959년 100kW급 실험용 원자로를 도입해 드디어 1962년에 가동하였다. 이같이 이승만의 준비로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준비 태세가 완비된 것이었다.
이런 토대 위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대통령도 원자력 이용을 추진하였다. 1969년 4월에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로부터 1000kW급 ‘트리가 마크-3’(TRIGA MARK lll) 원자로를 도입하고 이 회사로부터 ‘가압경수로’ 기술도 함께 도입 활용하여, 드디어 1978년 고리 1호기가 상업 운전되어 원자력 발전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약 30여 년을 진행시킨 결과물이 된 것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의 원자력 발전에 대한 비상한 비전과 주도면밀한 준비와 추진이 있었고 이어서 이 원전 정책을 승계한 박정희 정부의 원전 사업이 진행되었기에 최종적으로 세계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원전 선진국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고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부터는 한국은 원전 자립화를 추진해 ‘OPR1000’, ‘APR1400’ 같은 획기적인 독자적 원전 모델을 개발해냈다. 이는 원자력 분야의 국산화와 자립화의 결실이 된 것이었다. 그 혜택은 곧 산업 현장에 공급되어 제철, 자동차, 중화학, 조선, 반도체, 전자 제품 생산 등 모든 분야에 공급됨으로써 제품 생산 원가에도 크게 기여하여 국제 경쟁력을 높여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가정용으로도 전력이 단전 없이 공급되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어 문화생활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원자력 발전의 1킬로와트(kW)당 단가가 67원으로 가장 경제적이다. 석탄 발전 단가는 78원, 석유 발전은 109원, LNG 발전은 100원이다.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한국의 원전 기술력은 표준화 설계로 공기 단축과 비용의 최소화를 확보하여 동남아, 중동, 동유럽 국가들의 롤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그 사례로 UAE 바라카 원전 4기를 수출하였고, 이집트의 4기 건설 예약,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에도 원전 발전소를 수출했고 최근에는 체코와 루마니아에도 원전 건설에 합의하였다. 현재 한국은 원전 기술에서 설계, 건설, 운영, 정비 분야에서 경쟁국들보다 우수한 평가와 신뢰를 받고 있다.
원전의 또 한 가지 보편적 강점은 기후 변화 대응 시대에 탄소 중립 에너지원으로서 잠재력을 더 키워나가고 있기에 친환경적 에너지로 꼽히고 있다. 최근 들어 풍력이나 태양력을 이용한 전력 생산은 나라마다 그 자연환경이 달라서 안정적인 공급이 어렵고 관리비도 원전에 비해 덜 경제적이며, 최근에는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더욱 높인 기술력에 의해 유럽과 미국, 중국, 일본에서도 원전 에너지로의 회귀가 대세가 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우수한 원전 기술력은 세계 원전 시장에서 더욱 각광 받게 될 것이다. (다음 호에 이어짐)
핵심 키워드
원자력 발전, 이승만 대통령, 에너지 자립, 원전 기술 국산화, 원전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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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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