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에자 아카데미(Ακαδημία της Μίεζας)와 알렉산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오늘날 미에자 아카데미아는 나우사(Νάουσα) 근처, 레프카디아(Λευκαδία)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레프카디아’라는 이름은 곧 풍부한 물과 온천으로 유명한 곳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도 미에자에 들어서면, 누구든 발을 담그고 싶어질 만큼 맑은 물이 유적지를 휘감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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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한 여행길에서 알렉산더(Αλέξανδρος)대왕의 이야기는 언제나 빠지지 않았다.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익숙해진 그의 일대기, 그리고 열세 살 무렵부터 가르침을 받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우리 가족의 오래된 관심사였다.

역사는 아이들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만화와 이야기책으로 접했던 신화와 전설이 실제 유적과 이어질 때, 아이들의 눈은 더욱 빛났다. 마케도니아의 펠라 왕궁에서 교과서 속 바닥 모자이크를 직접 보았을 때, 아이들은 환호하며 사진을 찍었다. 글자로만 배우던 역사가 눈앞에서 살아난 순간이었다.

하지만 미에자(Μίεζας)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때는 달랐다. 아이들은 기대했던 웅장한 건물도, 장엄한 기념비도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오래된 붉은 흙 동굴의 흔적과 세워졌다가 사라진 기둥의 자취, 그리고 “여기가 바로 알렉산더와 동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움을 받던 곳입니다”라는 작은 안내판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미에자는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그것은 왕 빌립 2세가 어린 아들을 위해 마련한 특별한 배움터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곳에서 철학과 정치, 의학과 자연학,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을 가르쳤다. 더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의 틀과 지적 태도를 심어 주었다. 훗날 알렉산더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한 인물로 기억되는 것은 아마 이 시기의 교육 덕분이 아닌가 한다.

아리스토텔레스(Αριστοτέλης)의 삶과 그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테살로니키에서 동쪽 초입을 지나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할키디키(Χαλκιδική)반도 쪽으로 운전하면 만나게 되는 마을이 올림비아다 (Ολυμπιάδα)이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궁의 궁정 의사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나이 들어 낳은 아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 부모를 잃은 후 형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의학과 자연에 대한 관심을 키운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열일곱 살 무렵 그는 아테네로 유학하여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무려 20년 동안 플라톤 곁에서 수학하며 철학자로 성장했지만, 스승의 사상과는 여러 차례 대립했다. 플라톤이 이데아라는 초월적 세계를 참된 실제로 보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 속에 모든 사물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진리는 감각 너머의 그림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방법론에서도 두 사람은 달랐다. 플라톤은 수학적·추상적 사유를 통해 진리에 접근하려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과 관찰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플라톤은 나의 스승이지만, 진리는 플라톤보다 더 소중하다”«φίλος μὲν Πλάτων, φιλτέρα δὲ ἀλήθεια»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사상의 차이는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떠올리게 한다. 퇴계 이황이 도덕적 본체와 원리를 강조한 것은 플라톤의 초월적 이데아론과 닮아 있고, 율곡 이이가 현실 세계의 작용과 실사구시(實事求是)태도를 중시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론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理)와 기(氣)가 결코 떨어질 수 없듯, 두 철학자의 사상 역시 서양 학문 발전의 양축으로 함께 작용했다. 관념론(Platonism)과 경험론(Aristotelianism)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서양 학문의 기초를 함께 세운 두 기둥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와의 만남

기원전 5세기경에는 아테네에 도편추방(ὀστρακισμός)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아테네 시민들이 특정 인물을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적어 추방하던 제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는 이 제도는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도편추방을 당했을 것이다. 스승 플라톤(Πλάτων)이 사망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고향 근처로 돌아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흔이 다되어 가는 나이에 피티아스(Πυθιάς)와 결혼하여 레스보스 섬의 미틸리니(Μυτιλήνη)에서 신혼을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렵 마케도니아의 왕 빌립 2세는 오랜 친구였던 그를 불러 아들 알렉산더의 교육을 맡기고자 했다.

빌립 2세는 아들을 혼자만 가르치지 않았다. 장군과 대신들의 아들 중 또래들을 함께 모아 합숙 교육을 시켰다. 이는 훗날 알렉산더의 핵심 측근이 되는 동료 집단, 헤타이로이(Ἑταῖροι)였다. 한편 왕비 올림피아는 아들에게 “너는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신적 정체성을 심어주며,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예라 믿게 했다. 알렉산더가 후일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이 같은 신비적 교육도 한몫했다. 하지만 빌립 2세는 올림피아의 교육이 못마땅했다. 아들을 보다 이성적이고 체계적으로 키우길 원했다.

기원전 343년, 열세 살의 알렉산더는 미에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게 된다. 그때부터 학사는 ‘아리스토텔레스 아카데미’로 불릴 만큼 유명해졌다. 알렉산더와 동료들은 철학, 문학, 수사학, 과학을 함께 배우며 성장했다.

이 시절 함께 배운 친구들은 훗날 제국의 기둥이 되었다. 헤파이스티온(Ἡφαιστίων)은 알렉산더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고, 프톨레마이오스(Πτολεμαῖος)는 이집트에 왕조를 세웠다. 카산드로스(Κάσσανδρος)는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고, 셀레우코스(Σελεύκος)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에 왕국을 세웠다. 리시마코스(Λυσίμαχος)는 트라키아와 소아시아를 지배했다. 이들은 훗날 서로 제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며 후게자 전쟁인 ‘디아도코이 전쟁’(Πόλεμοι τῶν Διαδόχων)을 벌였고, 알렉산더의 죽음에 이들이 연루되었다는 의혹마저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의 만남은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철학자와 장차 세계를 정복할 왕의 만남은 곧 헬레니즘 세계의 씨앗이 되었고, 함께 배운 동료들은 제국을 이끌어가며 인류 역사의 거대한 전환을 이끌어 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과 그 영향

아리스토텔레스가 미에자에서 알렉산더와 헤타이로이들에게 전한 가르침은 플라톤식 이상주의보다는 한층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삶과 공동체, 정치와 윤리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강조했다. 이는 빌립 2세가 아들에게 기대했던, 지도자로서 필요한 실용적 교육과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알렉산더에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여러 차례 읽게 하며 영웅 아킬레우스를 본받도록 독려했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원정길에도 이 책을 늘 곁에 두었다. 또한 그리스의 비극 문학과 수사학을 통해 감정의 절제와 도덕적 통찰을 배우게 했으며, 철학적 훈련을 바탕으로 덕(aretē), 절제, 용기와 같은 지도자의 미덕을 강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복자는 단순히 힘으로만 사람을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도덕적 모범으로도 이끌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목적(τέλος)과 행복(ευδαιμονία)이었다. 모든 존재는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며,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탁월한 삶, 즉 이성적 존재로서의 행복이라고 보았다. 이를 이루는 길은 과잉과 결핍을 피하고 균형을 찾는 ‘중용(μεσότης)’에 있었다. 훗날 그의 윤리학은 아들의 이름을 붙여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 불리게 되었다. 정치 또한 자연스럽게 윤리학의 연장선으로 이해되었고, “인간은 정치적 동물(Ο άνθρωπος είναι πολιτικό ζώο)”이라는 그의 말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된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정치는 생물’이라는 정치인이 생각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세계에도 깊은 관심을 두어 의학, 지리, 동식물 연구를 제자들과 함께 탐구했다. 알렉산더는 원정마다 학자들을 대동하여 정복지에서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고, 그것을 꾸준히 스승에게 보내주었다. 이 협력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체계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알렉산더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복지의 문화를 존중하며 융합을 추구했고, 동시에 그리스의 철학과 제도를 널리 전파하여 헬레니즘 시대의 토대를 마련했다. 알렉산더의 업적 뒤에는 언제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함께 있었다. 성장기 시절의 부친과 갈등역시 좋은 스승의 가르침으로 잘 이겨내었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과 죽음

기원전 336년, 아버지 빌립 2세가 암살당했을 때 알렉산더는 겨우 스무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왕관을 쓰게 되었지만, 그 어깨 위에는 단순한 왕국의 통치가 아니라 그리스인들의 오래된 숙원,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라는 시대적 사명이 얹혀 있었다. 전쟁의 불길 속에서 자란 젊은 왕은 곧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그의 원정은 기원전 334년, 소아시아의 그라니코스 강(Granicus River)에서 시작되었다. 첫 승리의 환호는 마치 그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수스 전투(Μάχη τῆς Ἰσσού)에서 다리우스 3세를 몰아낸 순간, 알렉산더는 더 이상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이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의 주인이자, 세계를 품으려는 정복자가 되어 있었다.

티레(Tyre)의 완강한 성벽을 무너뜨리고, 나일 강의 햇살 아래 신으로 추앙받았을 때,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빌려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Ἀλεξάνδρεια)를 세웠다. 인간의 이름이 도시가 되고,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 (Battle of Gaugamela)에서 다리우스 3세(Darius III)가 다시 무너졌다. 그날 이후 페르시아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불타는 페르세폴리스(Περσέπολις)의 궁전 속에서, 알렉산더는 승리의 황홀과 함께 문명의 무게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적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그는 박트리아(Bactria)까지 다리우스의 잔당을 추격했고, 그 과정에서 록산나(Roxana)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전장의 냉혹한 칼날 사이에서도 사랑과 화해를 택한 이 젊은 정복자는, 현지 귀족들을 받아들이며 동서 융합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더는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의 비바람 속에서 다시 칼을 빼들었다. 히다스페스(Hydaspes) 강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토록 충직했던 병사들은 더 이상 그의 꿈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자.” 그들의 피로 어린 외침 앞에서, 알렉산더는 마침내 전진을 멈췄다. 그 순간 그는 정복자이기 전에 인간이었다.

귀환 후, 바빌론에서 제국을 정비하던 그는 돌연 병에 쓰러졌다. 기원전 323년, 아직 32세의젊음 속에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원인이 무엇이든,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비극적이었다. 누구도 준비되지 못한 이별이었다.

알렉산더의 제국은 곧 분열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복이 남긴 흔적은 단순한 영토가 아니었다. 헬라스(Ελλάδα)와 오리엔트(Ανατολή)가 만나서 섞이고, 그 만남 속에서 헬레니즘 문화라는 찬란한 꽃이 피어났다. 알렉산더는 짧은 생애 동안 누구보다 멀리 걸었고, 누구보다 크게 꿈꾸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이름은 여전히 “세계를 품으려 했던 젊은 왕”으로 남아 역사의 심장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알렉산더가 동방원정으로 출정 한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당 리스에움(Λύκειον)을 세우고 제자들과 함께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아마 이 시기가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다. 리스에움(Λύκειον)의 뜻은 아폴론 리키오스(Ἀπόλλων Λύκειος 늑대의 신 아폴론) 신전에 한 부분이었던 체육관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때 그는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하며 논리학(ὄργανον)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시학, 자연학, 생물학 등 여러 학문 분야의 체계적인 기초를 마련했다. 항상 제자들과 함께 걸으면서 강의를 하고, 연구한 모습 때문에 그의 학파를 뻬리빠또스(Περίπατος)산책학파, ‘걷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자기 사망하자 아테네에서 반(反)마케도니아 정서가 크게 일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아테네를 떠나 에비아(Εύβοια) 섬의 할키다(Χαλκίδα)로 피신한다. 그곳에서 기원전 322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위장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오늘날 미에자 아카데미아는 나우사(Νάουσα) 근처, 레프카디아(Λευκαδία)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레프카디아’라는 이름은 곧 풍부한 물과 온천으로 유명한 곳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도 미에자에 들어서면, 누구든 발을 담그고 싶어질 만큼 맑은 물이 유적지를 휘감아 흐른다. 오래된 기둥과 동굴의 흔적은 더 이상 폐허가 아니라, 요정들이 숨 쉬는 듯 한 신비로운 공간이 되었고, 소년들의 웃음과 땀방울이 배어 있는 배움의 터전으로 내 눈앞에 되살아난다.

나는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아카데미의 자취 속에서 배움의 힘과, 그것이 역사를 바꾸어 오늘 서구 문명의 원류인 헬레니즘의 시작이되는 과정을 다시 한번 속으로 그려보았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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