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분열의 역사

국내외를 무릇하고 아름답고 튼실하게 성장하던 교회들이 하루아침에 내부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경우를 자주 보고 들어왔다. 막연하지만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교회의 분열의 문제점에서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면 오늘 교회 분열을 막을 수 있을까?’하는 망상을 하면서 이 글을 쓴다.


[미션저널] 로마 분열의 역사 » 김수길 선교사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 (2) » 아주 작은 바늘구멍과 같은 균열이 큰 둑을 무너트리는 것처럼 교회의 분열 역시 사소한 대립과 반복 속에 교회가, 교단이, 그리고 나라가 감추었던 치부를 스스럼없이 들어내며 분열의 길을 가지 않는가?

먼 역사에서 찾을 것 없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적나하게 분열의 본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과 좌우 그리고 빈부와 남녀, 이것도 모자라서 20,30, 40,50 암호 같은 세대차이의 사분오열과 같은 결과는 같은 교단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역자이지만 서로가 다른 정치적 이념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상대를 적대시하는 현실이지 않는가? 이 같은 상황이 정말 선교적 책임은 없는 것인가를 필자는 묻고 싶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대표적인 분열인 *장(그리스도)과 *장(예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진보와 보수로, 그리스도와 예수께서 대립하고 싸우는 형상이지 않은가?
사설이 길었다.

초기 로마제국의 상황

옥타비아누스의 증손녀인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Agrippina)가 나이 많은 그녀의 삼촌인 클라우디스 황제의 세 번째 부인으로 재혼을 하게 된다. 네로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로마제국의 왕자가 되었다. 그의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였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도움으로 황제가 된 후 그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라는 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AD 14년에 사망한다. 원로원과 민회는 그를 신으로 선포하고 이후의 모든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Augustus Caesar)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네로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카리쿨라의 본명인 게르마니쿠스의 이름을 넣은 것은 아마 네로는 옥타비안가의 사람인 것을 그의 이름을 통해서 나타내고 싶었을 것이다.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로 불리는 초기 로마 원수정(元首政)체제에서, 전제 군주정제(専制政, 도미나투스 Dominatus)로 가는 과정은, 황제 혼자서 모든 의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로원의 협력과 투표의 결과를 통해 결정하는 공화정 시스템이었다. 이것은 옥타비안과 티베리우스가 완성한 공화정(프린키파투스)속의 황제가 반드시 지켜야 될 기본 군주정제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네로는 황제직속 친위근위대를 활용하여 원로원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네로는 친위대 사령관 티겔리누스(Tigellinus) 등을 이용해 이미 아무런 힘이 없는 원로원을 협박해 그의 뜻을 채워 나갔다. 수많은 정적들을 처단했고, 재판정에서 완전히 무죄로 결론 난 정적을 유배 보내는 등의 원수정 체제의 기본 원리까지 무시했다. 권모술수와 암살의 피비린내가 절여있는 로마가 싫어서 일까 ?

네로는 고린도와 이스트미아 등 에서 전차 경주의 운동선수가 되고,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가수가 되어 그의 숨겨진 자질을 마음껏 즐겼다. 고린도와 이스트미아, 새로운 신도시에서 그는 즐겼고, 로마를 고린도처럼 새로운 도시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훗날 로마 대화제도 이런 그의 기억들이 만들지 않았나 싶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네로가 로마 대화제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 당시 로마법으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던 존재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 즉 “일반 군중들이 증오하고 로마에 필요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 기독교도들에게 비인간적이고, 의도적인 비열한 술책으로 죄를 덮어씌운 사건으로 인해 네로는 오랫동안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는 결국 AD,?? 그가 무력화 시켰던 원로원에서 폐위가 결정되자 68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십자군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초기 로마 정치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네로의 자살 이후 69년, 한 해 동안 로마는 네 명의 황제가 등장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부터 로마의 분열은 시작되었다고 필자는 이해하기에 이렇게 사족(蛇足)을 다는 것이다.

네로의 죽음 이후 후계자 문제

로마의 5대 황제였던 네로는 앞서 말했듯이 AD 68년 제위를 비운 채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네로의 정책은 많은 정적과 반대파를 만들었고,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던 로마원로원은 그를 폐위하려고 했다. 결국 네로의 죽음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Julius Claudius)의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공식적인 후계자가 없었던 로마제국은 정치적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력을 가지려는 인물들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 주로 힘 있는 군단을 배경으로 한 장군들이 황제의 자리에 도전을 하게 된다. AD 69년은 로마 역사에서 네 황제의 해라 불리며, 짧은 기간 동안 네 명의 황제가 잇따라 로마 제국을 다스렸던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지금까지는 형식적이지만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 속에서 황제가 옹립되었지만 네 명의 황제 이후는 그들이 가진 군단의 힘이 황제를 선출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된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Servius Sulpicius Galba) 로마의 여섯 번째 황제

네로의 사망 직후 스페인 주둔 군대의 지지를 받은 갈바가 황제로 선포된다. 당시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네로의 폭정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황제 갈바에게 많은 기대를 가졌다.

당시 에스파니아(España)의 총독이었던 갈바는 네로 황제가 자살하면서 시작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자기가 다스리던 군단의 도움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그의 통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황제가 된 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갑작스런 개혁은 로마의 귀족들과 군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가 황제가 되면 지급하기로 한, 그를 도운 군인들에게도 약속된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보상을 기대했지만, 갈바는 재정문제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군대의 지지를 잃게 된 그는 군대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상황을 맞추기 위해 로마의 귀족들에게도 엄격한 정책을 펼쳤다. 최악의 수를 둔 그는 그나마 자기를 지지하던 친위 군대의 세력들조차 그의 정책에 등을 돌리게 상황을 직면한다.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Marcus Salvius Otho)로마의 일곱 번째 황제

오토는 네로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한때는 네로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아 성공한 사람이지만 내로의 미움을 받아 속주 루시타니아(Lusitania) 총독으로 좌천되었다.(어떤 이들은 네로가 오토의 아내 포파이아(Poppaea)를 빼앗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는 네로와 등지게 되고 오토는 갈바가 반역을 일으키자 제일 먼저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갈바에 의해 그의 후계자로 추대를 받았다. 오토는 갈바가 기대한 만큼 황제의 그릇이 아님을 알고 그를 살해하고 그가 로마의 일곱 번째 황제가 된다.

비텔리우스(Vitellius)는 갈바가 임명한 게르마니아지역 로마군방면 사령관이었다. 갈바가 앞서 말했듯이 군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게르마니아 군단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반역을 일으켰다. 로마로 진격하던 중 오토가 갈바를 살해하고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로마로 진군했다. 오토를 지지하는 도나우방면 군단(Danubian territory Corps)과 베드리아쿰(Bedriacum)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오토는 로마의 내전을 피하고 더 이상 혼란을 원치 않았기에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Aulus Vitellius) 여덟 번째 황제

비텔리우스는 게르마니아 군단이 황제로 추대하고 로마에 반역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황제에 옹위한 게르마니아 군단의 군인들을 각별히 아꼈다. 이들에 대한 지나친 혜택으로 로마 시민들의 원성을 사게 된다. 비텔리우스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면서 팍스로마나(Pax Romana)는 흔들리게 된다. 갈바의 죽음을 이해했던 그는 화해와 통합을 대신하여 그의 게르마니아 군단을 아꼈다. 자연히 소외된 도나우 군단은 비텔리우스를 대신하여 동방의 로마군단의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고 베스파시우스의 동방군단과 함께 도나우 즉 다누비안(Danubian) 군단은 로마로 진군해왔다.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비델리우스는 69년 12월 말까지 퇴위를 약속했지만 다누비안 군단은 이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결국 그들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고 만다.

혼란의 종식자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아홉 번째 로마황제

AD 69년 네 황제의 해를 마무리한 마지막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였다. 그는 비텔리우스를 처단한 후 황제로서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검소함을 통해 제국의 재정을 재건하고, 로마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네 명의 황제난립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제국을 다시금 평화와 번영의 시기로 이끌었다.
요세프스(Flavius Josephus)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열심당과 사카리派들이 발란을 일으키자 네로 황제는 평민 출신인 베스파시아누스를 유대지역 반란진압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68년 가을에 그를 임명한 네로가 죽었다. 갈바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에 전쟁을 휴전하고 그와 함께 참전한 그의 아들 티투스(Titus)를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을 명세 하는 사절로 보냈지만 티투스가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갈바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유대 지역에서는 시메온 바르 기오라(Simeon Bar-Giora)의 반란이 일어난다. 69년 오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예루살렘의 전쟁을 아들 티투스에 맞기고 그는 이집트에서 동방의 모든 로마 속주들과 군단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옹위되었다. 이때 로마에 포로가 되었던 역사가 요세프스가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기분이 좋아진 그는 요세프스를 자유의 몸으로 허락한다. 그는 로마로 돌아온 후 앞선 세 명의 황제들과는 달리 내전과 반란으로 피해를 입은 로마를 복구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다음해 아들 티투스는 마사다(Masada)에서 유대 항쟁을 진압했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황제를 힘들게 했던 유대전쟁이 끝나자 로마제국은 안정기에 접어든다. 오물이 도로에 흘러넘치는 로마에 공중 화장실을 만들고 유대전쟁이 진압된 72년에는 로마의 랜드 마크인 ‘암피테아트룸 풀라비움(‘Anfiteatro Flavio’)을 건설한다. 이 건축물이 오늘의 콜로세움(Colosseum)이다.

AD69년 네 명의 황제시대는 로마제국의 분열의 역사였다. 옥타비안이 세운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Dinastia Giulio-Claudia) 왕조가 네로의 죽음으로 무너지고 베스파시아누스를 시조로 하는 플라비우스 왕조(Dinastia Flavia)로 바뀐 시대였다. 원로원과 형식적인지만 합의를 통해 정치를 하였던 율리우스 클라디우스 왕조와 다르게 힘 있는 사람이 황제가 되는 힘의 숭배시대로 이동인 것이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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