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국군 파병과 건설 및 토목 공사 진출로 맞이한 국가 재건의 기회

한국은 군인들의 송금으로 3억6천만 달러, 건설 용역금 2억8천만 달러, 군납 수출 등으로 인한 수출금 2억 8천만 달러, 기타 8천만 달러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경제적 대가를 얻어 낸 것이다. 이 기간에 한국의 외환 보유고는 급속히 늘어나고 공업화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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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대한민국이 과거 60여년 전에는 가장 후진국이었지만 이제는 경제력이 세계 10위권 유지하고 있다. 이는 어느 나라들도 이룩하지 못한 경이로운 기적을 창출했다. 그 증거로서 최첨단의 반도체 생산과 기술력을 갖고 있고, 자동차 생산력은 세계 3위이며 최고 수준의 자동차 밧테리 제조와 세계 1위인 스마트폰 생산과 조선업에서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방산 무기 분야도 강국으로 도약하고 있다. 그 외에도 K-culture, Contents, K-food, beauty 분야에서도 세계인들을 사로잡고 있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세계화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천적 요인은 역시 제철업과 중화학 기초 산업화의 구축과 함께 지속적인 발전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적적인 공적은 결코 우리의 자력갱생으로 만 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요인이 크게 작용된 것으로서 여기에는 미국이 우방 관계 속에서 각 분야가 발전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첫 원천은 먼저 미국의 적극적인 관여로 한일 관계의 정상화가 태동되게 하였고 결실되도록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줌으로 일본과의 적대적, 대립적 관계가 정리되고 상호 산업화 관계로 이어지면서 그 발전의 토대가 형성되었다. 자본과 기술이 전무하였던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8억 달러의 유무상 배상과 산업의 발전에 필요한 핵심적인 기술 지원이 일본 기업들을 통해 지원된 것이 크게 작용된 것이었다. 그런 과정 중에 후속적으로 제2의 산업화의 확장 유발 동인(Triger)이 필요하였는데, 놀랍게도 다시 미국을 통한 베트남전쟁(월남전)의 국군 파병과 함께 진행된 한국의 건설 및 토목 공사의 진출이 병행됨으로 여타 산업에도 큰 발전을 이끄는 두 번째의 발판이 구축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베트남 파병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진행되었으며 결실은 어떠했는지 객관적으로 리뷰해 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전은 1964년부터 1974년으로 이어졌다. 즉 포화 속에서 한쪽에서는 파병 군대와 다른 한 쪽에서는 건설의 일꾼들의 땀과 희생이 있었다. 한국 전쟁 직후인 1954년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화 움직임이 있었던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안보 전략에 긴장하며 그 지역의 내전형 이념 분쟁이 한국전쟁과 같은 국제 전쟁으로 확산될 것을 경계하였다. 나아가서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이 한국전쟁의 특수를 기회로 국가 재건의 발판이 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승만과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적 빈국 상황에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려 했을까. 1960년대 초만하더라도 한국은 미국의 경제 지원으로 근근히 나라가 지탱되고 있을 뿐이었고 해가 지나면서 원조 규모는 점차 줄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와 경제 지원이 절실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의 ‘한국조사단’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이같이 보고하였다. “기회주의적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 그들은(박정권) 국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미국은 이들이 건설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때에 미국은 한국 군대의 파병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케네디가 암살당함으로 부통령이었던 죤슨이 새로이 대통령이 되었다. 죤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개입을 한국을 비롯한 세계 25개 국에 적극적으로 호소하였다. 1964년 7월에 베트남 정부는 한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로인해 9월에 한국군 파병이 가능해지기 시작하여 비전투 병력인 의무중대와 태권도 교관단이 파병되었다. 1965년에는 박정희와 죤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의해 전투부대 파병과 한국 상품의 대미 수출 확대가 결정되었다.

1966년 3월에 이르러 한국 외무장관 이동원과 주한미국 대사는 전투부대 파병의 조건을 교섭 완료하고 북한의 침공 시에는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개정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소위 ‘브라운 각서’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장비 제공, 파월 병력을 위한 장비와 경비 부담, 파월 병력의 대치 병력 훈련 재정 부담, 대간첩 활동 지원, 탄약 증산을 위한 병기창 시설 제공, 파월 장병 근무 수당 부담, 사상자 보상금 등의 ‘군수협조’ 이외에도 경제 협조에 대한 구체적인 조건이 들어 있었다. “첫째, 파월 한국 병력 동원 유지에 대한 추가 비용과 동액의 추가 원화를 한국 예산에 지불한다. 둘째, 주한 미군용 물자 대부분을 한국에서 조달한다와 베트남 건설 사업에 한국 건설업체의 응찰 자격을 부여하고 민간 기술자 고용 및 용역 제공 기회를 확대 한다와 한국의 수출 진흥에 대한 기술 협조를 강화하고 약속한 1억 5천만 달러의 차관 외에 경제 발전을 위한 추가 차관을 제공한다.”였다. 이런 조건을 제시하여 미국 측에서 이를 전적으로 수용함으로 베트남전쟁은 한국에게는 전쟁터이자 수출 시장이 함께 개척된 것이었다.

이로서 한국은 군인들의 송금으로 3억6천만 달러, 건설 용역금 2억8천만 달러, 군납 수출 등으로 인한 수출금 2억 8천만 달러, 기타 8천만 달러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경제적 대가를 얻어 낸 것이다. 이 기간에 한국의 외환 보유고는 급속히 늘어나고 공업화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파병 첫 해인 1964년에는 1억 2천만 달러에서 1972년에는 16억 2천만 달러로 무려 13.5배나 급등하였으며, 미국으로 수출도 급등하였다. 뿐만아니라 국군 파병으로 인한 지원금 중에는 공공차관으로 5억2250만 달러를 확보하고, 이를 국내 사회 간접 자본에 집중 투자했다. 파병 관련 상업 차관도 2억4천만 달러 규모였다.

이로서 한국은 1970년대 수출 산업의 중심이 된 중화학 공업 부문의 설비 투자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 외에도 미국으로부터 군사용 건설과 토목 기술 지원도 받았으며 또 무상 원조 프로그램인 ‘PL-480’인 미국내 과잉 농산물 지원과 1억7천만 달러에 상당한 면화를 지원받았다. 이를 통해 섬유류 수출국이 될 수 있었고 한국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국군 파병의 가장 큰 경제적 부수 효과는 건설업 진출이었다. 이때에 대표적 진출 기업으로는 현대건설과 삼성물산과 한진, 대림, 대우 등이었다. 이들 여러 건설 업체들은 베트남에 항만, 공항, 도로, 군사 시설 등 인프라 건설에 경험을 축적했고 미국의 선진 기술 도움도 받았다. 특히 한진은 독자적인 해운업을 구축하여 기반으로 세계 해운업에 진출하여 그후에는 해운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이들 기업들은 10여년의 베트남전쟁 중에 기술과 자본을 축적하면서 일본처럼 재벌그룹으로 발전하면서 한국 경제와 산업 발전을 주도하였다. 뿐만아니라 전투와 건설로 벌어드린 외화 획득은 금융업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산업화의 모든 분야에 놀라운 성장을 견인하였다. 이 당시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이동원은 이같이 소회하였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 후원국 지위가 퇴색하고 있다고 느낀 실용주의적 관료들은 베트남 전쟁이 국가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수출 시장일 뿐만 아니라 실업률을 줄일 수 있는 노동 수출 시장이라는 점에 큰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다. 또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달러를 직접 조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유일한 경로라는 점에서도 의견이 일치했다”라고 했다. 이같이 비약적 경제의 결실을 걷우게 된 데에는 미국 정부의 기회 제공과 국군 30만여 명의 참전과 6천여 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고 포화 속에서도 땀을 흘린 산업 일꾼들의 수고가 함께 작용된 것이었다.

외교적 측면에서는 한국이 베트남 참전으로 한미간의 군사동맹 관계가 더욱 신뢰를 쌓았고 6.25전쟁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참전국들에게는 국제적 의무를 다한 것이기도 하였다. 1975년 베트남 종전 후에도 한국은 베트남으로부터 축적한 산업 기술과 경제력으로 중동붐으로 이어지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다음 호에 이어짐)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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