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한국과 미국과의 외교사 140년을 볼 때에 전반기에 해당하는 조선 말기인 1866부터 해방 시기인 1945까지의 격변의 역사 중에 나라의 존망이 거듭되는 위기와 단절과 회복의 역사로서 애증의 관계이기도 하였다.


[시대조망]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 글 강석진 목사 »

미국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악연의 관계로 1866년 8월에 미국 국적의 제널럴 셔만호가 일방적으로 평양 대동강으로 강제 진입함으로 그 당시에 엄중한 쇠국정책을 고수하던 상황이었기에 전투로 비화되어 그 배는 조선군의 화공전략으로 불태워졌고 침몰되었다.

그 배는 미국 국적의 상선으로 미국인 선장(페이지)과 선주(프레스톤)도 사망함으로 조선과의 첫 인연은 불상사로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마국은 이에 대한 진상 조사와 사과와 배상 및 수호통상 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5년 후인 1871년에는 해군 8백여명과 군함 5척을 앞세우고 무력으로 해결코자 하였다. 이 사건을 조선 역사에서는 신미양요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최초로 서양 국가와의 전투였고 고종은 쇄국정책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조선과 미국은 이처럼 2차에 걸친 험악한 무력 충돌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 이후 미국과의 3번째 관계는 무력이 아닌 외교의 수순을 통해 순적한 대미 관계로 발전되어 강화도 신미양요 11년 후인, 1882년 5월 22일에 인천 제물포에서 양국 간의 극적인 수호통상조약을 맺음으로 선린 외교 관계가 구축되었다.

그러나 그 후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에서 자국에게 국익에 도움을 얻지 못하자 조선을 내치는 단절의 관계로 악화되었다. 미국은 조선과 활발한 상업적 통상 관계를 기대하였지만 양국 간의 통상할 수 있는 물자가 조선에는 별무한 상태였기에 명목상의 외교 관계만이 존립되다가 결국 1905년 7월에 미국과 일본은 ‘가스라.테프프밀약’으로 한성의 주한미공사관에 성조기를 내림으로 조선과의 외교 관계 23년 만에 단절되었다. 이로서 대한제국(조선)은 국제 사회의 냉엄한 국익 앞에는 영원한 우방과 적국도 없다는 쓰디 쓴 교훈을 얻게 되었고 그 반면에 미.일은 밀월 관계로 서로의 국익에 혼취 되었다.

이때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로운 외교 투쟁을 하면서 일본의 군국주의의 위험성을 알리며 미국 정부에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강력히 강구하였었다. 그러나 철저히 무시 당하고 차단되었다. 그 당시 미국은 일본의 만주국 수립(1932년)과 중국 본토의 침략전쟁(1937년)을 지켜보며 경계심을 가졌지만 활달한 통상 관계와 문화적 교류도 매우 활성화했기에 두 나라 간의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는 상상도 하질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본 정책에 대해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 의한 동아시아의 패권주의에 미국이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결국 일본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의 전쟁을 불사할 것이라는 예언서 같은 책인 <Japan in side out>이라는 저서를 1941년에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때 어느 누구도 일본의 그런 야심에 주의를 갖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이 동남아시아권의 지배력을 점차 강화시켜 나가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에게 경제 제재의 일환으로 그동안 전적으로 미국으로부터의 석유 수입을 의존했었는데 석유 수출을 중단해버렸다. 이에 일본은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는 그에 대해 굴종치 않고 오히려 전쟁을 선택하여 선제적으로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을 공격하였고 이어서 1942년 초에는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을 침공하여 석유와 지하 자원을 확보하려했다.

이승만의 그 저서는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인 ‘대동아공영권’의 야망을 그대로 적중시켰다. 그로 인해 그 책이 미정부를 움직였고 미국인들에게도 알리지면서 일본의 야욕을 알게 되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으로 40여만 명의 인명 희생과 막대한 물적 피해를 봄으로 값비싼 댓가를 치루었다. 이런 외교적 시행착오에 대해 조선의 주한대리공사관이였던 ‘알렌’(1897년부터 1905년까지 공사직)은 일찍이 1905년 초에 미국이 일본과 친밀한 우방 관계를 택하고 조선을 배척하는 외교 정책에 대해 장차 일본이 미국을 배신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가 있었다. 알렌은 미국의 조선 배제 정책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도 비난하자, 본국에서는 그의 공사직을 해임시켜 버렸다.

그 시대마다 예언자적인 통찰력 있는 선구자들의 권면은 그 당시의 통치자들에게는 자국의 국익이 선악과 처럼 보일 뿐이다. 미국과 일본과의 밀월 관계(1905~1945)은 파탄되었다. 양국은 5년간의 처절한 전쟁을 치루었고 최악의 원폭 투하와 지상과 해전에서 일본은 약 4백만 명 이상의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고 전 일본의 본토는 초토화되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전국이 되어 이에 대한 패전국 정리가 필요했다. 살아있는 신이었던 일본 천황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고 일본 본토의 수백만 명의 군대를 무장 해제시켰고 이어서 일본이 점령했던 만주의 약 70만명의 일본 군대와 한반도의 약 40만명의 무장 해제도 해야했다.

이에 소련은 미국과의 사전 협의(포츠담회담, 카이로회담 등)에 따라 소련은 1945년 8월 6일에 이북 지역에 들어와 일본 군대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하였고, 미군은 1945년 9월 6일에 남한 지역에 승전국으로 들어와 전후 처리를 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질풍같이 개성까지 진군하여 들어오자 미국은 이를 저지하려 38선을 긋고 소련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말 것을 경고하자 소련군은 순순히 개성에서 철수하여 38 이북으로 물러났다.

이때는 미군이 아직 일본 본토의 전후 처리가 끝나지 않았기에 한반도에 들어오질 못했다. 만일 미국이 일본 본토 전후 처리에만 몰두하고 한반도를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와 여력이 부족했다면 소련군은 서울 이남까지도 점령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소련군이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여 38선 이북으로 물러간 것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립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된 것이었다. 미군이 한반도 남쪽을 점령하게 된 것은 이남 지역에 약 30만의 일본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기에 이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본국으로 송환시켜야 했다. 결국은 한국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단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미국은 다시 한국과 엮어지게 되었다.

미군정국은 이남 지역의 일본군과 일본 주민들 약 2백만 명과 일본 군대를 본국으로 송환시켰고 일본에 거주하였던 조선인들 수십만 명을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양국의 본국 송환 작업을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한국 내의 일본인의 기업과 재산과 가옥 정리도 함께 함으로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정리하는 데에 미군정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인들은 한 푼의 보상도 없이 적신으로 송환된 것이었다. 만일 미국이 일본인들의 재산 정리를 하지 않고 후에 한일 정부 간에 이를 정리하려 했다면 매우 어렵고 복잡했을 것이고 양국 간의 민족적 감정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미군정국은 40년(1905~1945)의 일본 식민시대를 짧은 기간 내에 해결사 역할을 해 줌으로 차후 일본과 한국의 외교 정상화를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다. (다음 호에 이어짐)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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