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과 미국과의 외교 단절의 배경에는 그 당시 일본과 미국과 러시아와 영국간의 4강의 자국 우선주의로 인한 것이었다. 먼저 일본과 영국의 관계에서는 영국은 러시아의 동해와 태평양 진출을 막아내는 데에는 일본이 가장 실효적 파트너였고 일본으로서는 러시아제국이 동해로 진출한다는 것은 일본의 안보와 국익 차원에서 반드시 막아야하는 절체 절명의 선택일 수 밖에 없었다.
[시사리뷰] 가쓰라-테프트 밀약의 배경과 미국의 배척(하) » 한미수교 140여년 근대문명사 리뷰 시리즈 11회 » 글 강석진 목사 » 또한 일본은 필리핀 보다는 전략적 가치에서 조선반도의 지배력이 더욱 중요하였지만, 미국은 필리핀이 국익으로는 더욱 중요하였기에 필리핀을 택하는 것이 합리적이었고 실효적이었다. 그로인해 미국과 일본은 서로가 바터제로 필리핀과 조선을 맞바꾼 비밀거래(가쓰라-테프트 밀약)로 1907년 7월에 합의되었다.
일본은 곧 이어서 국제적으로 외톨이가 된 조선을 압박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을사늑약’을 그해 11월 17일에 성사시켰다. 이어서 곧 그달에 미국은 전광석같이 조선 주재(대한제국) 미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이는 미국은 이미 일본에 외교 공사관이 있었기에 구태어 이중적으로 조선에 같은 공사관 운영이 필요치 않았다. 그 동안 한성의 미국 공사관의 서양식 건축을 위해 초대 푸트 공사가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본국에서 이를 거부했고 관심도 주지 않자, 푸트 공사는 일방적으로 사직서를 내고 본국으로 돌아갔고 대신 소위 무관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만큼 조선주재 공사관은 존재 가치가 없었다.
그후 다시 알렌이 대리 전권 공사로 왔지만 달라진 것이 없을 정도로 유명무실해진 한성의 공사관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 중에 미국이 공사관 철수를 결정하자 이어서 서방의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방의 공사관들도 철수하였다.

거대한 역사의 파도에 휘말린 한반도 ◙ Photo&Img©ucdigiN
조선으로서는 냉엄한 국제 사회의 실태를 뼈저리게 절감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은 조선을 내치기 전에 이미 그 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알렌 임시 공사는 1905년 3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고종에게도 공식적 통보를 하였다.
“본인은 전권 특명대사 알렌이 대한제국을 떠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지금껏 귀 정부와의 친밀한 우정을 증진시키는 데 힘써왔던 알렌씨가 폐하에게 현재 한미간에 존재하고 있는 행복과 우정을 강화시키고 있는 우리의 진지한 소망을 전달하도록 지시를 하였습니다.”
폐하의 선한 친구, 데오도루 루즈벨트
미국은 가쓰라-테프트밀약을 교환한 후에 그 후속 조치로서 9월 9일에 일본의 고무라 전권 대사가 워싱톤에서 루즈벨트를 방문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가 인수한다고 통고하였으며 루즈벨트는 이에 찬성했고 11월 23일에 주미대한 서리공사에게 통보하였다. 이에 고종은 최후로 헐버트 선교사를 특사로 미국에 보내 고종의 친서를 전하려 했으나 거절되었다.
알렌은 그전부터 미국이 조선을 내치고 일본과 긴밀한 관계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본국 대통령에게 반박하는 호소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강하게 항의하였으나 결과는 전권공사직의 해임이었다. 알렌은 자신의 후임자로 조선 선교의 바통을 이어받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이런 말을 전하여 주었다.
“정치(외교)란 더러운 것으로서 내가 거기 발을 들여놓으려고 의도한 일은 없었습니다. 역시 그대(언더우드)가 제일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 누구도 가지기 힘든 만족감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고종과 알렌과의 관계는 21년에 걸쳐서 광혜원 의사로는 3년을, 외교 관계로는 18년을 조선의 풍전등화와도 같은 격랑기에 왕 곁에서 또는 워싱톤에서 외교관으로 조선을 자신의 조국처럼 여기며 헌신하였다. 이같은 미국과 조선과의 외교의 로정은 일방적 신뢰와 배척으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 당시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패권국가들의 식민지 국가나 약속 국가들로서 일방적인 희생을 감내해야 했고 생존해야 하는 고난과 절박함이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조선과 미국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단절되고 배척된 상황 중에도 조선 땅에 1882년에 미국과 수교된 후부터 1945년일본이 미국에게 패망되기까지 약 60여 년 동안 약 1천 3백여 명의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근대문명을 전하여 민족정신과 민주주의 사상과 인권 의식과 남녀 차별 금지와 신분제 폐지와 문맹으로부터의 문명화와 우상 숭배 문화의 배척 등 조선인들에게 가장 실제적인 근대문명화(Pre morden civilization)와 기독교화(Christianzation)에 크게 기여하게 하셨다.
그 외에 개별적으로도 미국과 조선의 교회와 다양한 민간 교류를 통해 인재 양성에도 일제의 속박 중에 진행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의 구한말 암흑기와 일제 강점기 중에도 조선을 떠나지 아니하고 헌신적으로 조선인들과 희로애락과 흥망을 함께한 선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 (다음호에 이어짐)
글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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