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라-테프트 밀약의 배경과 미국의 배척(상)

한미 140년 외교 관계의 여정은 애증(愛憎)의 질곡진 역사의 단면을 갖고 있다. 그만큼 동아시아와 조선 역사가 불안정했고 험로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는 어제의 우방이 오늘에 적국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우방이 내일에 적국이 되는 사례는 매우 흔하다.


[시사리뷰]  가쓰라-테프트 밀약의 배경과 미국의 배척(상) » 한미수교 140여년 근대문명사 리뷰 시리즈 10회  » 글 강석진 목사 »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 많은 교훈을 절실하게 각인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반도는 19세기 들어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충돌되었기에 주변 강대국의 출현과 흥망에 따라 좌우되는 험곡의 역사를 겪어왔고 그때마다 국가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고종은 1895년 일본 군부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는 비극적인 ‘을미사변’을 겪게 되자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조선을 지켜주는 우방이 없음을 체득한 후에는 러시아 공관에서 나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신을 황제라 자처하고 중립국을 선포하였지만, 사실상 어떤 나라로부터도 신뢰와 인정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외교적으로는 악수를 자초하게 되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통해 승리함으로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부터 분리시켰고,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10년 후인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다시 일방적으로 승리함으로 두 나라들의 조선을 향한 지배권은 배제시켰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당시에 세계의 패권은 영국이 독점하고 있었기에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조선 반도의 지배력을 인정 또는 승인받아야 했기에 일본은 영국과 1902년과 1905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영일동맹을 맺었다. 이같이 영국이 일본에게 조선 반도의 지배권을 인정해 준 것은 강력한 군사 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을 통해 동해와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새로운 신흥 제국인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외교 전략이었다. 이어서 일본은 조선 지배권의 승인을 받아야 할 또 하나의 나라인 미국이 남아있었다.

19세기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상상도 ◙ Photo&Img©ucdigiN

이 당시 미국은 태평양을 넘어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던 필리핀을 전쟁을 통해 지배(1902.7)하고 석유와 고무 등의 자원을 확보하였다. 일본도 필리핀 등지의 동남아 국가로부터의 석유같은 자원이 필요함으로 경쟁국이 될 수 있는 형세에 있었다. 이 때 두 나라는 외교적 흥정이 필요했는데, 일본은 필리핀보다는 조선의 지배권이 더욱 절실하였기에 두 나라간의 외교적 딜(Deal)이 필요하였다. 이는 서로간의 국익에 부합되는 것이기에 어렵지 않게 성사될 수 있었고 이런 외교적 행보는 주변 나라들의 외교적 간섭을 배제하고 은밀히 당사자간에 타협을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미국과 일본은 1905년 7월 29일 밀약같은 형식으로 필리핀과 조선을 서로 맞교환한 것이었다. 이를 일명 가쓰라-태프트밀약(Taft-Katsura memorandum)이라 한다. 여기서 밀약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그 내용을 비밀리에 부쳤고 양국간의 정식 외교적 조인 절차가 아니었고 그 내용은 20여 년 이후에나 밝혀졌고 그 형식은 사실상 조약이 아닌 협약이었으며 구속력은 없었기에 비망록 또는 각서였다.

미국측 인사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특사인 미국 전쟁부 장관 월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측은 총리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만나 성사된 것이었고 일본과 미국은 바로 그 내용을 속행하였다. 그 협약 내용은 이러하다.

1.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에 대해 어떠한 적대적 의도도 품지 안는다.
2. 일본의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과 미국과 영국이 원만한 합의를 형성하는 것이 최상이며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다.
3. 러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대한제국이며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일본에게 중요한 문제이고 러일전쟁같은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는 확실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즉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과 외교권을 확보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협약 내용에 대해 테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도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같은 미국과 일본의 밀약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일본은 대한제국이 무분별하게 외세를 끌어들여서 러일전쟁, 청일전쟁 같은 강대국끼리의 충돌을 불러왔고 전쟁을 부추킴으로 평화를 깨트린다고 자국위주의 일방적인 인식을 한 것이었다. 이런 일본의 주장에 대해 미국은 사실상 승인한 것이었고 일본의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식민지화)을 힘을 실어 준 것이었기에 서로의 국익을 도모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일본의 실질적 결과물은 그해 11월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병탄함으로 한 나라의 대외적 존재는 상실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강자들만의 국익을 도모하고 이해되는 것으로서 그 다음 해인 1906년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일전쟁 종결을 성공적으로 중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까지 하였다. 참으로 모순된 실상이었다. 그러한 러일전쟁의 뒷배에는 사실상 미국과 영국이 그에 대한 막대한 전비를 제공해 줌으로 일본을 앞세운 대리전이었고 그 포상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화 된 것이었다. (다음호에 이어짐)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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