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조망] 미국은 왜 한일국교 정상화(1965)에 영향력을 행사했나 » 한-미수교 140년의 근현대문명사 리뷰-20 »
금년 2025년이 한.일 국교정상화의 60주년을 맞는다. 오래 전부터 한.일간에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로 이어져 왔다. 이제는 가장 가까운 나라로 거듭나게 되어 가장 많은 인적 교류와 무역 거래와 상호 방위상의 전략적 가치가 어느 국가보다 높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같은 결과의 역사적 배경에는 60년 전 미국의 적극적 개입이 있었다. 그러면 미국은 왜 한.일 국교 정상화에 앞장을 섰으며 그 과정과 결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리뷰해 볼 필요가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가 매우 높음을 인식시켰다. 특히 분단된 한국과 일본이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우방국으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해 놓아야 했기에 양국을 압박하여 국교 정성화의 산파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결실이 오늘의 안정적인 한반도 정세의 확립과 무역과 문화 교류로 나타났고 그 열매를 양국이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한국의 근현대 역사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하거나 위기 때에 구원 투수의 역할을 1세기 넘게 이어 오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 진행되어 온 역사였다. 여기에는 의심할 수 없는 역사의 팩트들이 객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그 역사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근대 역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나라를 꼽는다면 미국과 일본이다. 지리적으로 미국은 지구 반대편의 가장 먼 나라이고 일본은 가장 가까운 나라이다. 미국은 19세기에 조선이 위정척사(衛正斥邪)에 매몰되어 쇄국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에 서양 국가로 최초에 1882년 ‘조.미상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로인해 영국과 독일과 러시아,이태리 등의 서방 국가들이 연이어 조선과 국교 관계를 맺었다. 그 영향으로 1884년부터 서구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서양의 기독교와 근대문명을 전수해 줌으로 개화의 시대를 열어갔다.
그러나 1905년 7월에 ‘가쓰라- 테프트밀약’으로 미국은 조선에서 공관 철수를 하였다. 이는 외교적 단절이었다. 그해 10월에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이 일본에 양도된 것이었고 5년 후인 1910년에 조선은 병탄되어 속국으로 35년을 보냈다. 그동안 미국과 일본은 밀월 관계를 이어 오다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는 중에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치루었다. 미국이 1945년 8월에 승전국이 됨으로 일본 속국으로 있던 조선도 미국의 군정 통치를 3년 받았다. 그 중에 미국은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자유선거를 통해 1948년에 유엔이 승인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독립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은 끝나질 않았다. 1950년 1월에 미국은 ‘에치스라인’이라는 태평양 방위 정책에서 한국을 배제 시킴으로 그해 6월에 북한의 남침을 유발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결국 1953년 휴전 후에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1954년 11월에 발효시켰다. 이로서 미국은 전쟁으로부터 한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가 되었다. 이뿐아니라 전쟁으로 피폐화된 한국의 정부 운영과 식량 지원과 복지 재건을 위해 여러 방면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한반도가 동아시아에서 공산 진영의 최전선으로 맞서는 충돌 지역인 것을 새롭게 인식하였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한국이 우방 국가로 묶여 질 때에 방위 측면에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3년 동안 한국전쟁에서 후방 기지로 일본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경험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미국은 제2의 한국전쟁 재발 방지와 그 외의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차단도 함께 포석할 수 있는 교두보의 역할을 기대하였다. 이와 유사한 미국의 전략이 유럽에서 실행한 바가 있었다.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전쟁으로 산업이 몰락된 서유럽의 재건을 위해 1948년 ‘마샬플랜’으로 1,350억 달러를 투입하였다. 이때 가장 주된 목적은 소련의 공산주의 영향력을 억제하여 서구의 공산화를 차단하여 자유 진영을 견고히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유럽에 이어 동아시아에도 같은 목적과 전략으로 일본을 통한 이들 나라들과의 외교 강화와 경제 지원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동아시아에서의 마지막 남은 한일 관계의 정상화는 다른 나라들 간의 사안과 매우 달랐기에 쉽지 않았다. 한국은 35년 동안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통치로 많은 상처와 피해 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수 없었으며, 그 당시에 일본에 대한 반일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또 일본이 한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위해 제안을 먼저 해 올지라도 반대 분위기가 강하였기에 용납이 쉽질 않았다. 이처럼 껄끄러운 두 나라 간에 국교 정상화를 위해서는 제 3국인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와 영향력이 있어야만 했으며 뿐만 아니라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보상 문제와 함께 수행되어야 했다.
이에 앞서서 일본은 먼저 미국의 군정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내었다. 1952년 ‘센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었다. 그 내용은 사실상 조건부였다. 즉, 일본이 동남아시아 국과들과 국교 정상화와 배상 문제에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었다. 일본은 미국과의 이 조약으로 마침내 군정을 벗어나 독립되었고 미국의 배경을 안고 급속한 경제 발전을 거듭하면서 1960년대에 들어서서 그 경제력이 선진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지난 전쟁의 피해와 강제 노동 등과 관련하여 배상 문제를 풀어가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동아시아 나라들과 일본과는 국교 정상화와 화해의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에 다 해결되었다. 인도네시아는 1958년 평화조약 및 배상 협정으로 약 2억2천3백만 달러를, 미얀마는 1954년에 다른 나라들과 같은 조건으로 약 2억 달러를, 남베트남과는 1959년에 약 3천9백만 달러를, 그 외에 태국과 말레시아와 필리핀도 경제적 배상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이로서 미국과 일본은 다음과 같은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로, 미국은 소련과 중공과의 냉전 구도하에서 일본과 한국과 동남아 국가들(비공산국)간의 화해와 협력 관계를 성사시켰다. 이는 이들 나라들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 전략과 연계되었다.
둘째로,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기를 맞아 자국의 자본과 기술을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시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이들 나라들에게도 경제와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외교 정책에는 몇 가지 차이점도 존재했다. 한국과 일본과는 근접의 지정학적 관계였기에 일본으로서는 가장 선제적으로 추진하여 결실시키려 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전쟁 종료 후부터 1964년까지 약 10여년 이상의 협상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결실된 것은 없었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과는 역사적으로 복잡하고도 깊이 뿌리박힌 민족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식민지 지배 35년의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과 독도 문제, 재일교포 지위 문제 등 복잡한 난제들이 많았다.
이에 해결사로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중재자적 역할이 절실하였다. 미국으로서는 이 문제를 두 당사자 간에 10년이 되도록 해결하질 못하였기에 무한정 방치할 수 없었다. 그만큼 한반도 정세의 안정은 곧 동아시아의 안정과도 밀접한 사안이었고 나아가서 미국으로서도 소련과 중공에 대한 신속한 견제를 위해서는 자유 진영의 불럭화 된 방위 진영이 절실하였다. 이가운데서도 미국은 일본과 가장 근접한 한반도의 절반인 한국 정부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로 한반도를 극동 지역의 전진 기지로 견고히 할 필요가 있었기에 일본과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한국의 정세가 그동안 급변되어 이승만 정권의 몰락에 이어서 1961년 박정희의 군사 구테타로 새로운 군사 정부가 들어섰다.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미국은 박정희 정부와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총리(1901~1975)와 협상을 하도록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미국 정부는 동아시아의 안보적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일본과 한국과의 협력 및 동반적 관계를 강조했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국가의 경제적 빈곤 문제를 가장 중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고 여기에는 개발 자금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다.
이에 반해 북한 김일성 공산 정권은 소련과 동구권의 경제 원조로 전쟁 복구 사업을 통해 1960년대에는 정세를 안정시켰고 남한보다 산업과 국민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 이에 위기 의식에 사로잡힌 박정희 정부는 제2의 한국전쟁 방지와 정치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경제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했다. 북한보다 앞서지 못하면 국내의 자생적 공산 세력이 기생할 수 있기에 굳건한 안보와 경제 발전을 통해 국민들의 생활 조건을 향상시켜야야만 했다.
이런 정치적,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첩경이 바로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의 경제 지원으로 한국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전략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미국은 새로운 박정권이 국가 경제 재건과 부흥이라는 시대적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한일간의 정상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
한일간의 가장 예민한 문제는 과거 식민지 지배와 강제 징용으로 인한 피해 의식이었다. 이 당시에 일반 시민들과 대학생들은 격렬한 시위로 한일간의 정상화에 반대 입장을 강변하였다. 이에 미국도 이런 심각한 한국 내의 저항으로 외교 정상화에 진전이 없을 때에 미국 국무장관인 딘 러스크(Dean Rusk)는 1962년 한국의 김종필과 일본의 외무 대신인 마사요시(1910~1980)와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간여했고 조정 역할을 하여 마침내 1965년 6월에 ‘한일기본조약’의 성사시켰다. 이렇게 되기까지 박정희 정부는 시민의 격렬한 시위와 야당의 극렬한 반대를 잠재우기 위해 1964년 6월에 계엄령을 한 달 동안 실시하여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소요와 저항을 해결하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의 성사를 위해서는 미국이 한국 정부도 아울러야 했다. 먼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며 한일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국내 기반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 구테타를 일으킨 군사 정권이라는 약점이 있었기에 이를 통해 미국 정부로부터 새로운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당시 한국은 지속적인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없이는 국가의 운영 자체가 불가하였기에 미국의 입장을 거스를 수 없었고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견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미국의 중재는 한일 양국의 내적 동기(한국의 경제적 필요, 일본의 동남아 지역 영향력 확대)와 결합되어 ‘한일기본조약’ 체결이 가능케 되었다. 이 당시 한국 정부는 빈국을 벗어나기 위한 산업화 추진에 자본과 기술이 절실하였기에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절대 조건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도 한일간의 관계 회복이 자국에게 큰 유익이 된 것이었다. 특히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공산권과 접경하고 있었기에 그 역할이 견실해야만 했다. 이로서 미국은 자국의 태평양 방위선이 1.2 차선이 확보된 것이었다.
한일간의 기본조약의 핵심인 배상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 차관 3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는 것이였다. 그 당시 이 배상금은 일본의 국가 1년 예산액의 약 8%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 배상 자금은 한국의 산업화에 필요한 마중물이 되었고 시드머니(Seed Money)가 되었다. 그 실례가 제철업과 중화학과 고속도로 건설을 착수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의 산업 기술 지원도 그에 못지않게 크게 작용되었다. 대표적으로 그 배상금으로 설립된 기업이 포항제철로서 한국 공업화의 못자리가 되었다.
외교적인 측면에서 미국은 한일국교 정상화에 산파 역할을 하여 한국은 이에 힘입어서 동아시아 국가들과도 경제 교류를 증진할 수 있었고 외교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즉 일본과의 외교 정성화가 국제상으로는 한국의 존재감을 들러내게 하여 세계 속의 한 나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었다.
무역 교류 측면에서의 그 결실은 매우 컸다. 1965년 이전에는 대일본 수출이 연간 1천만 달러, 수입 규모는 1억 달러였으나, 국교 정상화 5년 이후에는 수출이 약 2억달러, 수입은 약 10억 달러로 급성장하여 한국의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주어 일본은 한국의 수출 시장에 미국 다음가는 시장으로 급성장 되어 한국의 경제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발전하는 데에 발판이 되었다.
이 당시의 일본과의 현격한 무역 역조는 실상 한국이 수출품을 제조하여 수출하는 데에 필요 조건이었다. 그 당시 한국 기업들은 상품 제조에 기술력이 앞서질 못했기에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부품이나 소제나 원료를 가공하거나 조립하여 해외에 수출하여 무역 규모를 높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해 주었다. 그 대표적 수출 상품인 포니 자동차의 토요다 엔진 및 상당수의 중요 부품으로 조립된 제품이었고, 개발도상 시기에 피아노와 자전거 수출국 대국이었던 때에 일제의 양질 부품이 조립되어 경쟁력있는 수출품으로 세계 시장의 수출 비중을 높여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를 하여 많은 일자리들을 제공했고 일본 기업들로부터 많은 기술을 습득하는 부가의 가치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일본 기업의 기술과 경영 노하우는 한국 수출 경제의 벤치 마킹이 되었다. 예를 들어서 지금의 삼성과 LG 기업의 전자제품과 반도체 등이 일본으로부터 다양한 기술을 받았기에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제는 한국 기업이 일본과 경쟁하는 선진국이 되어 동남아 여러 국가들에게 그 모범과 벤치마킹이 되고 있다.(다음 호에 이어짐)
글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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