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으로 돌아가는 아들 – Zechut Avot(זְכוּת אָבוֹת)과 메시아의 구속-19

본 글에서는 Rabbinic 유산과 복음서 사이의 대화를 통해, 탕자의 귀환 안에 흐르는 조상들의 신실함과 메시아의 구속이 어떻게 연결되고, 다시 우리에게 어떤 회복의 길을 여는지를 묵상하려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의로운 자들의 공로로 인해 자비를 받는가? 아니면 메시아의 은혜로만 구속되는가?

[영성계발] 에덴으로 돌아가는 아들 – Zechut Avot(זְכוּת אָבוֹת)과 메시아의 구속-19 » 부제: “Rabbinic Teshuvah와 신약의 구속 이야기 속 잊혀진 공로의 기억” » “The Son Returning to Eden – Zechut Avot and the Redemption of the Messiah” » “The Forgotten Memory of Merit in Rabbinic Teshuvah and the Redemption Narrative of the New Testament” » 

Contents

<글을 시작하면서: 향유와 눈물,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랑>

“그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눅 15:20)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는 단순한 감동의 회귀담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고대 랍비 문헌과 유대적 회개의 심장인 Teshuvah, 그리고 뿌리 깊은 전통인 Zechut Avot(זְכוּת אָבוֹת) – ‘조상의 공로’라는 주제를 신약의 언어로 다시 풀어낸 깊은 이야기입니다.
본 글에서는 Rabbinic 유산과 복음서 사이의 대화를 통해, 탕자의 귀환 안에 흐르는 조상들의 신실함과 메시아의 구속이 어떻게 연결되고, 다시 우리에게 어떤 회복의 길을 여는지를 묵상하려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의로운 자들의 공로로 인해 자비를 받는가? 아니면 메시아의 은혜로만 구속되는가? 이 오래된 질문 앞에, 우리는 에덴을 떠난 아들의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신학적 통찰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먼 나라로 떠난 아들 – Teshuvah(תשובה)의 문턱에서>

어느 날, 어느 회당에서 한 랍비가 말했습니다.

“회개란 무엇인가요?
죄인임을 아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 아닙니다.
사랑받던 자였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마치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의 창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비유는 단순히 타락한 아들의 귀가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적 회개의 심장, 곧 Teshuvah (תשובה)의 본질을 아가다의 형식으로 풀어낸 거룩한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어 shuv (שוב, 돌아가다)라는 단어는 ‘회개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본래 장소로 돌아가다, 방향을 바꾸다, 마음을 돌이키다 등의 뜻을 지닙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반성 이상의 존재론적 귀향을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장 좋았던 에덴을 잃어버린 곳임으로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현재 인간의 본성과 상태는 타락과 죄악이 가득한 모습이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온전히 갖고 있는 모습으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의 모습은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며,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테슈바의 본질입니다.
랍비 요나 벤 아므나엘은 Sha’arei Teshuvah (회개의 문, שַׁעֲרֵי תְּשׁוּבָ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eshuvah는 하나님의 손에서 창조된 최고의 은총이며, 창조 이전에 창조되었다.”
— Sha’arei Teshuvah, 제1문
Sha’arei Teshuvah (회개의 문, שַׁעֲרֵי תְּשׁוּבָה)는 랍비 요나 게롤디의 유명한 윤리서 제목으로, 유대교에서 회개의 단계와 내면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고전적 문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단지 집으로의 귀가가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의 신분을 상실했지만, 기억 속의 사랑과 향기를 붙잡고 귀향을 결단합니다. 이 장면은 바로 랍비 유대교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Teshuvah me’ahavah (사랑으로 하는 회개, תְּשׁוּבָה מֵאַהֲבָה)의 구체적 예시입니다. 이 표현은 “사랑에서 비롯된 회개”라는 뜻으로, 두려움에서 오는 회개 (תְּשׁוּבָה מִיִּרְאָה, Teshuvah mi-yirah) 와 대조되어 랍비 문헌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요마 탈무드 86b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가 사랑으로부터 오면, 고의로 지은 죄조차 공로로 전환된다.”

예수님은 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 ‘잃었다가 다시 얻은 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회복이 아니라 창조적 구속(Creative Redemption)의 선포입니다. 랍비 엘리야후 드레슬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진정한 Teshuvah는 과거의 죄조차 merit(공로)로 바꾸는 창조적 역사다. 하늘의 기쁨이 그 사람 위에 머문다.”
— Michtav Me’Eliyahu

예수님의 이 비유가 신파조로 끝나지 않고, 하늘의 법정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전환되는 위대한 선언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그는 왜 집을 떠났는가?
무엇이 그를 타락하게 했는가?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는가?
그의 죄는 단지 유산을 요구하고 먼 나라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랍비 유대교에서 ‘집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고 존재의 중심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잊지 않는다.”
— 미드라쉬 베레쉬트 라바 84:2

그의 돌아옴은 단지 ‘죄를 뉘우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죄책감에 눌려 종의 신분을 자처했지만, 아버지는 달려와 입을 맞추고,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주십니다.
랍비 유대교는 이 장면을 Geulah (גְּאֻלָּה, 구속)의 선언으로 읽습니다. 테슈바와 게울라는 우리에게 카바나(Kavanah, כַּוָּנָה)’ 즉 돌아오는 자의 마음의 동기와 태도, 즉 내면적 집중의 문제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중심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다시 회복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카바나(Kavanah, כַּוָּנָה) –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길>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이 말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카바나’였습니다. 히브리어 카바나(כַּוָּנָה)는 ‘방향’, ‘의도’, ‘집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랍비 유대교 전통에서 기도는 단지 입술의 움직임이 아니라, 전 존재를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내면의 자세, 즉 카바나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אם אין כוונה – תפילתו אינה תפילה”
“If there is no kavanah, then the prayer is not a prayer.” (Yerushalmi, Berakhot 2:4)

탕자가 돌아오는 장면은 바로 이 ‘카바나’의 극적인 실현입니다. 돼지우리 속에서 그는 돌이킵니다. 단지 발길을 돌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아버지’께로 돌린 것입니다.

1. 마음의 방향과 하늘의 응답

미드라쉬 에카 라바에서는 말합니다:
“פתחו לי פתח כחודו של מחט, ואני אפתח לכם פתח כפתחו של אולם.”
“Open for Me an opening the size of a needle’s eye, and I will open for you an opening like the doorway of a hall.” (Eicha Rabbah 5:7)
“나를 위해 바늘귀만한 크기의 틈을 열어 다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위해 궁전의 문처럼 큰 문을 열어 줄 것이다.”
(에이카 라바 5:7)

이 구절은 유대 아가다 문헌인 에이카 라바 (Eicha Rabbah) 에서 발췌된 것으로, 인간의 작은 회개 행위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넘치는 자비로 응답하신다는 랍비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테슈바(תשובה)의 신학적 의미를 확장해 주는 카바나를 담고 있습니다.

이 카바나의 행위는 인간 쪽에서 작지만 진실한 시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은 그것을 훨씬 넘어서게 하십니다. 탕자가 작정한 회귀는 작지만 진실된 ‘구멍’이었고, 아버지의 환대는 그것을 넓은 대문으로 바꾸는 은혜였습니다.

2. 예수님의 윤리와 카바나의 일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반복되는 핵심 메시지는 단지 율법의 조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의 뜻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구조는 단순한 법적 해석의 수정을 넘어, 카바나의 회복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ἐκούσατε ὅτι ἐρρέθη… ἐγὼ δὲ λέγω ὑμῖν)는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반복적 구조로, 당대 유대 랍비 문헌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해석적 전환(interpretive contrast)의 어법입니다. 이 어법은 전통적 가르침이나 율법 해석을 인용한 후, 새로운 해석이나 권위 있는 설명을 이어주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어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람어 구조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어식 표현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 שְׁמַעְתֶּם שֶׁנֶּאֱמַר… וַאֲנִי אוֹמֵר לָכֶם
(Shemaʿtem she-ne’emar… va-ani omer lakhem)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라”
아람어식 표현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 שְמַעְתוּ דְּאִתְאֲמַר… אֲנָא אָמַר לְכוֹן
(Shematu de-it’amar… ana amar lekhon)
“너희가 들은 바와 같이…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라”
랍비 문헌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절 전환 방식이 발견됩니다.
미쉬나 및 탈무드식 어법

• תַּנְיָא… אָמַר רַבִּי פְּלוֹנִי
(Tanya… amar Rabbi Ploni)
“가르침에 이르기를… 아무개 랍비가 말하길”

• אָמְרוּ חֲכָמִים… אֲבָל רַבִּי יוֹסֵי אוֹמֵר
(Amru chachamim… aval Rabbi Yosei omer)
“지혜자들이 말하되… 그러나 랍비 요세이는 이르기를”
미쉬나 아보트 (아비서, Ethics of the Fathers)

• הוּא הָיָה אוֹמֵר (Hu haya omer)
“그는 말하곤 하였다…”
→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도입구로, 전통적인 가르침에 기반하여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법을 통해 단순한 전통의 반복자가 아니라 율법의 참된 해석자요, 최종적 권위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랍비들은 보통 “Rabbi X says” 또는 “It was taught…” 형태로 선대의 전통을 인용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더 강력하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ἐγὼ δὲ λέγω ὑμῖν)라고 하여 신적 권위의 직접 선언을 한 것입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는 다음과 같은 유대적 담론 흐름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어법은, 랍비 유대교 전통에서 사용되던 해석적 대조 구조와 유사한 형식을 따릅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보통 “אמרו חכמים”(아므루 하카밈, “지혜자들이 말하되”)라는 표현으로 전통을 인용한 뒤, “אבל ר’ פלוני אומר”(아발 라비 플로니 오메르, “그러나 아무개 랍비는 이르되”)라는 방식으로 전통적 권위자의 해석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랍비들처럼 선대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독자적 선언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최종 권위로 제시하셨습니다. 이는 선대 랍비 전통에 근거한 권위와 달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됨으로써 직접적인 계시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어법은 단순한 문장 구조가 아니라, 예수님의 해석 권위, 율법 완성자, 내면 윤리의 재정의라는 전체적인 메시지를 구성하는 핵심적 장치입니다.

외적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의도를 통한 참된 순종,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윤리의 핵심입니다.

3. 아가다에서 카바나를 본다 –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진실함

미드라쉬 탄후마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날, 라비 요시야가 말씀하시기를:“두 사람이 동일한 제물을 드리더라도, 누구는 받으시고
누구는 받지 않으신다. 이는 마음의 의도를 보시는 하나님 때문이라.”
(Tanchuma, Vayikra 10)
탕자는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아버지께 나아갔습니다. 재산을 되돌려달라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종이라도 좋으니 받아 달라고 합니다. 이 카바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자격’이 아니라, 은혜를 향한 철저한 의탁임을 보여 줍니다.

4. 메시아닉 유대인의 고백 – 카바나를 통해 만난 아버지

메시아닉 랍비 데이빗 프리드먼은 그의 회심기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율법에 정통했으나,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슈아의 비유 속에서 내 마음이 꺾였다. 나는 더 이상 ‘율법을 위한 삶’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삶’을 살게 되었다. 카바나는 내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Imago Dei – 하나님의 형상과 잃어버린 존엄>

“그가 돼지우리 속에서 돌아보았을 때, 그는 단지 굶주린 자가 아니었다. 그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음란하게 살다가, 결국 돼지우리에서 배를 채우려는 자가 되는 장면입니다. 이는 단지 물질적 파탄이 아닌, 정체성의 추락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자의 초상입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형상”은 צֶלֶם אֱלֹהִים (Tzelem Elohim)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 1:27에 처음 등장합니다:
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Genesis 1:27)

1. 잃어버린 형상 – 죄와 정체성의 파괴

랍비 요나 벤 아므나엘은 『샤아레이 테슈바』(שַׁעֲרֵי תְּשׁוּבָה, Sha’arei Teshuvah)에서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덮어버리고, 인간을 짐승보다 못하게 만든다.”
(Sha’arei Teshuvah 1:1)

탕자가 돼지우리 속에 있다는 것은 단지 유대인의 부정한 짐승과의 접촉을 넘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짐승과 같은 존재’로 전락했음을 암시합니다. 그의 옷은 찢어졌고, 이름은 지워졌으며, 자존은 무너졌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기억이었습니다 — 아버지의 집,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그 존엄의 흔적.

2. 하나님의 형상의 빛

『조하르』(זֹהַר, Zohar)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빛의 입김”이라 묘사합니다:
“When God created Adam, He clothed him in a garment of light, and His image rested upon him.”
(Zohar, Bereshit 23b)

이 빛은 죄로 인해 벗겨지고, 인간은 어둠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탕자는 어둠 속에서 다시 빛을 갈망합니다. 그것이 ‘돌아섬’ (שׁוּב, shuv)의 시작이 됩니다. 그는 다시 아버지의 형상을 갈망하며, 종이라도 좋으니 그 ‘집’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3. 예수님의 비유 – 아버지의 눈은 형상을 본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멀리서도 그를 알아봅니다. 그는 더 이상 아들이라는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지만, 아버지는 외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누가복음 15:24)

랍비 요세프 솔로베이치크는 말합니다:
“회복은 죄로 인해 감추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드러나는 과정이다.”
(Halakhic Man, Joseph B. Soloveitchik)

탕자는 돌아옴으로써 종이 되기를 청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다시 ‘형상의 자리’로 세웁니다.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깁니다. 이 모든 행위는 단지 자비의 상징이 아니라, 정체성 회복의 의식입니다.

4. 천사도 몰랐으나 하나님은 아셨다

미드라쉬 라바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천사들은 그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안에 여전히 남은 형상을 보시고, 그를 다시 부르셨다.”
(베레쉬트 라바 12:10)

이 장면은 탕자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아들이라 부르지 않지만, 아버지만은 그 안에 남은 ‘형상’을 보십니다. 이것이 탕자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죄는 인간을 가리지만, 형상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5. 칼빈의 통찰 – 전적 타락 가운데 남은 흔적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Institutio)에서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훼손된 채로 남아 있으며, 은혜로만 회복될 수 있다.”

칼빈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도덕성과 이성의 기능을 상실한 채 죽은 존재와 같지만, 그 안에는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이 부서진 채 남아 있는 ‘은총의 가능성’이 숨쉬고 있습니다.

6. 사복음서의 실제 – 예수님은 누구를 알아보셨는가?

마가복음 1장,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문둥병자’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마가복음 1:41)

예수님의 손길은 단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존엄을 회복하는 행위였습니다.

7. 하나님의 눈으로 본 형상

탕자의 아버지는 그 아들이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알아봅니다. 그가 보았던 것은 겉모습이 아닌, 돌아오는 마음 속에 살아난 형상의 빛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Imago Dei –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형상의 불씨입니다. 그리고 그 형상을 회복하는 길, 그것이 곧 Teshuvah (תשובה), 사랑으로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Shuv (שוב)과 Geulah (גְּאֻלָּה) – 회개의 길과 구속의 서사>

“שׁוּבָה יִשְׂרָאֵל עַד ה’ אֱלֹהֶיךָ כִּי כָשַׁלְתָּ בַעֲו‍ֹנֶךָ”
“Return, O Israel, to the Lord your God, for you have stumbled in your iniquity.” (호세아 14:1)

탕자의 귀향은 단순한 회개의 장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שוב (Shuv)”의 실현이며, “גְּאֻלָּה (Geulah)”의 서사를 예표합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길을 잃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사건일 뿐 아니라, 전 우주의 타락과 구속이라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 삽입된 하나의 축소판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심장에는 ‘돌아옴’과 ‘구속’이라는 두 개의 히브리 단어가 심연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1. Shuv – 단순한 회귀가 아닌 존재의 전환

Shuv는 물리적 귀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랍비 엘리엘 벤 샤울(R. Eliel Ben Shaul)은 말합니다:

“Shuv는 방향의 전환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성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과거를 되돌릴 수 없지만, 존재의 향방은 되돌릴 수 있다.” (Midrash Tehillim 119)

탕자의 고백은 단지 죄책감이 아니라,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정체성의 절규입니다. 그는 돌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다시’ 알아보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랍비 이스라엘 메이르 라우(R. Yisrael Meir Lau)는 그의 책 『Teshuvah and Ident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Shuv는 죄의 목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였으며 누구여야 했는지를 기억해내는 여정이다.”

2. Geulah – 잃어버린 자의 회복과 희년의 선포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종이 아닌 아들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용서의 표시가 아닙니다. 구속(Geulah)의 선언입니다.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2)

랍비 문헌에서 Geulah는 “친족 구속자”(goel) 개념과 밀접히 연결됩니다. 이는 레위기 25장에서 말하는 희년(Jubilee)의 구조 속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희년은 종을 자유케 하고, 땅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보내며, 잃었던 것을 되돌려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시공간입니다.

Tosefta Bava Metzia 1:13에 따르면,
“누구든지 자기 가족 중 가난하여 스스로 팔린 자는, 가장 가까운 자가 그를 구속해야 하며, 구속은 단지 값의 환불이 아니라, 존엄의 회복이다.”

탕자는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버렸으나, 아버지는 그에게 Geulah의 복을 베풉니다. 이는 단순한 가족재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구속 서사를 드러내는 선언적 장면입니다.

3. Geulah – 룻과 보아스, 잃어버린 자의 회복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Geulah의 강력한 실례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으로, 남편을 잃고 가난 속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자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율법이 말하는 Goel(구속자)이 되어, 그녀를 되찾고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가 너를 구속할 자가 되리라” (룻기 4:14)

이 구속은 단지 결혼이 아니라, 잃어버린 가문의 회복이며, 더 나아가 다윗과 메시야의 혈통을 이끌어내는 구속사의 실현입니다. 룻의 Geulah는 단지 그녀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Tosefta Bava Metzia 1:13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구속은 단지 값의 환불이 아니라, 존엄의 회복이다.”
보아스는 룻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며, 그녀의 존재를 다시 세웁니다. 이는 탕자의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회복시키는 장면과 구조적으로 병행됩니다.

4. 에덴 – 빼앗긴 낙원의 회복

창세기의 에덴 동산은 인간의 본래 거처였으나, 죄로 인해 상실되었습니다. 이 ‘에덴의 상실’은 단지 한 장소의 추방이 아니라, 왕국의 빼앗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가복음 4:6)

사탄은 자신이 이 세상의 소유자라고 주장합니다. 아담의 타락은 단지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창조질서 전체가 마귀의 손에 넘어간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에덴을 잃은 채 살고 있으며, 그 회복은 단지 인간의 의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Geulah는 왕권의 회복이어야 합니다.

5. Geulah의 완성 – 어린양의 구속

요한계시록 5장은 Geulah의 완성 장면입니다. 하늘의 두루마리를 펴실 자가 없을 때, 장로 중 하나가 말합니다: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그 책을 펴기에 합당하도다.”
(계시록 5:5)

그런데 그 사자는 도살당한 어린양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메시야가 전쟁의 칼로가 아니라, 희생의 피로 세상의 소유권을 되찾는다는 구속의 신학입니다.
“주는 두루마리를 취하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피로 각 족속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5:9)

예수님의 구속은 Geulah의 궁극적 성취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통해 회복되고, 에덴이 다시 회복되며, 잃어버린 이 땅이 어린양의 피로 되찾아지는 Jubilee의 선언입니다.

6. Shuv와 Geulah의 완성은 우리 삶의 여정이다

오늘 우리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 나는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가?
• 나의 Goel, 나를 구속할 이는 누구인가?
• 나는 에덴을 향해 돌아가는 길 위에 있는가?

탕자의 비유는 단지 한 개인의 눈물어린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Shuv와 Geulah, 회개와 구속이라는 거대한 드라마 속에 삽입된 시적인 서곡입니다. 룻과 보아스, 에덴과 광야, 어린양과 두루마리는 모두 하나의 음성으로 노래합니다: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노라.”

7.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이 움직인다

유대 아가다 문헌은 말합니다:
“회개하는 자가 돌아오면, 하늘에는 샤파림(Shofar)이 울려 퍼지고, 천군 천사들은 경배하며 찬양한다.” (Midrash Tanhuma, Nitzavim 1)

예수님의 아가다 안에서 우리는 바로 그 장면을 봅니다. 멀리서 그를 본 아버지가 달려갑니다(눅 15:20). 이는 단지 인간의 걸음이 아닌 하늘이 먼저 움직이는 장면입니다. 탕자의 귀환은 Shuv의 시작이지만, 아버지의 달려옴은 Geulah의 선언입니다.
랍비 나훔 람(Nahum Lamm)은 예수님의 이 비유에 대해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는 전통 랍비 문헌 어디에서도 이토록 아름답게 구속을 묘사한 예는 없다. 하나님의 구속은 조건적이지 않으며,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달려간다.”

8. 오늘날의 회복과 구속

이 비유는 단지 고대 유대인의 신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 Shuv과 Geulah를 묻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가? 나를 구속할 아버지는 누구인가?

한 메시아닉 랍비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한때 바리새인의 율법 속에 살았고, 또 한때는 세리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아들이었다.”

<שוב과 גְּאֻלָּה: 돌아옴과 구속, 그 신비의 길>

1. 길 잃음

언제부터였을까?
아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아니, 그는 ‘집’을 잃은 것입니다.

그 집은 단지 공간이 아닌 정체성의 중심, 사랑의 기원, 기억의 안식처였습니다.
하늘을 울릴 듯한 절규도, 주린 배를 움켜쥐며 잠든 들판의 바람도, 돼지 먹이통을 바라보며 느낀 비참함도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히브리어에서 Shuv (שוב)는 단순한 ‘돌아옴’을 넘어서, 존재의 방향성 자체의 전환을 뜻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렘 3:12)며 하나님의 호소를 전했고, 랍비 요나 게롤디(R. Jonah Gerondi)는 『회개의 문 Sha’arei Teshuvah』에서 Teshuvah의 본질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의지의 결단”이라 말합니다. 이 시작점이 바로 Shuv이며, 그것은 기억의 회복이자 존재의 반전입니다.

2. Go’el과 Geulah – 구속자, 그리고 되찾음

그러나 단순히 돌아온다고 모든 것이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탕자가 본질적으로 경험한 것은 Geulah (גְּאֻלָּה), 곧 구속이었습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Geulah는 누군가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종이 된 형제를, 팔린 땅을, 상실된 이름을 되찾기 위해 대신 값을 지불하는 자—바로 그는 Go’el (גֹּאֵל), 구속자입니다.

《룻기》에서 보아스는 나오미의 땅과 룻을 구속하는 Go’el로서 등장합니다.
그는 법적 책임으로 움직였지만, 그의 행동은 은혜의 구속, 메시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한 가문의 경제 회복이 아니라, 다윗의 가계를 낳고, 장차 오실 구속자 메시아 예수의 길을 여는 구속의 예표였습니다.
탈무드 Kiddushin 21a는 Go’el의 역할을 “그 집안의 이름을 다시 세우는 자”로 정의합니다.
이는 단순한 소유권 반환이 아닌 정체성과 존엄의 회복입니다.

3. 욥의 외침 – “내가 나의 구속자를 보리라”

욥은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자녀와 재산, 건강과 명예, 심지어 친구들의 위로마저.
그러나 그는 한 마디로 전 우주의 구속 신학을 울부짖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내 피부가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기 19:25–26)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는 “Go’ali chai (גֹּאֲלִי חָי)”, 즉 “나의 구속자는 살아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 일어설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신뢰합니다.
이는 단지 생존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믿음,
죽음을 넘어선 하나님의 구속 행위에 대한 선언입니다.
랍비 메나헴 레켐(R. Menahem Rekem)은 욥기의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욥은 고엘이 오시리라 확신하였다. 그는 지금 회복되지 않아도, 언젠가 하늘의 법정에서 의가 회복될 것을 믿었다. 이것이 구속의 신앙이다.”

4. 예수, 구세주이자 구속자 – Savior and Redeemer

예수는 단지 Savior (구세주)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를 Redeemer (구속자)로 부릅니다.
이는 단지 죄를 용서하는 분이 아닌,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잃은 땅, 부서진 관계, 찢긴 영혼, 끊긴 이름, 상실된 정체성을 다시 사시는 분입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우리의 생명을 속량하신 것뿐 아니라,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을 회복하는 메시아적 구속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의 구속(Redemption), 곧 죄 사함을 이루신 분이시다.” (에베소서 1:7)

요한계시록은 그분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 부르며, 그 피로 사람들을 사셨다고 말합니다(계 5:9).
이것이 진정한 Geulah입니다. 구원의 감정이 아닌, 존재와 창조 질서 전체를 되찾는 행위입니다.

5. 아버지의 달려옴 – 구속의 포옹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눈물겨운 장면은 아버지의 달려옴입니다.
아들은 Shuv하며 돌아오지만, 아버지는 Geulah로 그를 맞습니다.
탕자는 말하려 하지만, 아버지는 말보다 포옹과 입맞춤으로 구속을 선언합니다.
그는 종이 아닌 아들로 회복되고, 옷과 반지와 신을 통해 다시 존엄의 자리로 이끌려갑니다.

미쉬나 Sotah 9:15는 말합니다:
“메시아의 날에는 하늘이 먼저 움직여 죄인을 환대하리라.”

랍비 레비 이츠하크 마이어는 기도 속에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돌아가는 길을 잊었을지라도, 주는 길이 되어 우리를 맞이하시고,
팔 벌려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달려오시는 분이 아니시옵니까?”
이는 바로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길을 낼 줄 모르는 자,
돌아갈 용기도 잃은 자를 향해,
하늘을 가르고 달려오는 아버지의 구속.

메시아닉 랍비 데이비드 플로스(David Flusser)는 누가복음 15장을 분석하며, “이 비유는 단순히 죄인이 회개했다는 구도보다, 아버지가 먼저 행동함으로 인해 회개가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shuv은 언제나 하나님의 geulah로 감싸집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shuv ve geulah는 유효합니다. 삶의 실패, 정체성의 상실, 죄의 눌림 아래에서 우리는 종종 집을 잃습니다. 그러나 구속은 지금도 가능합니다.

6. Redeemed – 되찾은 자로 살아가기

Redeemed.
이 단어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은 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존재의 정체성을 되찾은 자,
하늘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자,
다시 이름을 부름 받은 자,
자유와 존엄, 소망을 되찾은 자—그가 바로 구속된 자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 구속의 드라마 속에 서 있습니다.
삶의 실패와 죄의 굴레 속에, 우리는 집을 잃고, 이름을 잃고, 하나님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Go’el이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내게로! 내가 너를 구속하였노라.” (이사야 44:22)
이제, 탕자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도 걸어야 합니다.
돌아옴의 발걸음, 구속의 포옹,
되찾은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Shuv ve Geulah,
그리고 구속의 길입니다.

<Beit Av – 아버지의 집, 잃은 자리에서 다시 찾은 자리>

“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리라…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 15:18–19)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주소지를 옮기는 일이 아닙니다.

Beit Av (בית אב)—‘아버지의 집’은 히브리 전통에서 가계의 정체성, 토라의 계승, 할라카적 삶의 토대, 공동체적 책임이 집약된 영적 중심이었습니다. 탕자의 떠남은 단지 유산을 받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 질서와 조상의 축복에서 스스로를 끊어낸 자기 단절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가정–공동체라는 삼중 구조로 이루어진 유대적 질서를 무너뜨린 존재의 유랑이었습니다.

1. 집을 떠난다는 것의 의미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장면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유대 전통에서 Beit Av—‘아버지의 집’은 단지 가족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라, 율법의 중심이요, 언약의 전통이 흐르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탈무드는 Beit Av를 토라 교육, 제사적 전통, 조상의 축복이 계승되는 거룩한 장소로 간주합니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할라카를 벗어난다는 것이고, 조상의 경계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Talmud Bavli, Pesachim 88a).

탕자는 유산을 요구하며 Beit Av를 떠납니다. 이는 단지 물질적 분리만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소속,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한 행위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기본 질서, 즉 하나님–가정–공동체의 삼중 구조에서 탈출합니다. 이 출발은 죄라기보다 자기중심적 독립에 대한 환상이며, 그 환상은 곧 무너지고, 비로소 그는 집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회상하게 됩니다.

2. 돌아가는 길, 공간이 아닌 관계의 회복

그의 회귀는 단지 고향을 향한 발걸음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향한 영적 귀환(Shuv)입니다. 유대 랍비 문헌은 “하나님은 집을 떠난 자를 맞기 위해 매일 문밖까지 나아가신다” (Midrash Tehillim 120:3)고 말합니다. 집이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품이며, 회복의 자리입니다. 탕자의 고백, “아버지,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는 Halakha적 선언이 아닌 Kavanah의 행위입니다—내면의 방향 전환, 존재의 의도적 방향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 ‘율법의 틀’로는 회복할 수 없는 ‘관계의 복원’을 드러내십니다. 이는 당시 랍비적 할라카 전통을 넘어서는 급진적 선포입니다. 당시 랍비 문헌에서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되며, 회복에는 제의적 정결과 희생이 필요하다’(Tosefta Keritot 1:5)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율법적 조건 없이, 달려가 아들을 맞이하시는 아버지를 통해 ‘은혜’의 신학을 펼치십니다.

3. 동생: 자기를 잃고 집을 찾은 자

탕자의 회귀는 공간으로의 이동이 아닌, 관계의 복원을 향한 내면의 순례였습니다. 그는 자기 정체성의 해체를 경험한 끝에, “나는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며 돌아옵니다. 유대 전통에서 이와 같은 고백은 회개(Teshuvah)의 본질입니다. Shuv (שוב)는 단순히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성을 다시금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귀환은 회개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나는 종이 되겠다”고 말하기도 전에 달려와 안고, 입 맞추며,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줍니다. 이 장면은 고대 근동의 고엘(Go’el)—가문을 대신해 구속하는 자의 전형이며, 메시아의 그림자입니다.

4. 형: 집에 있으나 멀어진 자

형은 집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버지와 멀어졌습니다.
그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 말하며 율법적 공로 중심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는 ‘아들’이 아니라, 일꾼의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에게 아버지의 은혜는 공로에 따라 분배되어야 하는 정의였고, 동생의 회복은 기준 없는 용서로 보였습니다.

랍비 문헌에서는 Beit Av를 떠난 자에게 제의적 정결과 공동체의 승인이 없이는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Tosefta Keritot 1:5). 형의 분노는 단지 질투가 아니라, 할라카적 정의감에 기반한 율법 중심적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아가다는 이러한 정의를 넘어섭니다. 그분은 Beit Av를 “관계의 은혜가 흐르는 집”으로 재정의하십니다.

5. 서구 신학의 대조: 유대인과 이방인

서구 교회사는 종종 이 비유를 형 = 유대인, 동생 = 이방인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 간의 긴장 속에서, 형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기득권을 상징하고, 동생은 ‘후에 부름받은 자’로 간주됩니다.

어거스틴은 “유대인은 복음을 거부한 형이요,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입양된 탕자이다”라고 해석하며, 하나님의 구속사가 유대인을 넘어서 열방으로 확장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자칫 반유대주의적 구조로 변질되었고, 유대인을 배제된 형으로 고정시키는 오류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반해 현대 유대교, 특히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이 비유를 유대인 전체가 아닌, ‘모든 인간 안의 이중적 갈등’으로 이해합니다.
탕자는 길을 잃은 인간, 형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적 자아, 그리고 아버지는 Shuv와 Geulah를 모두 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6. Beit Av: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시 불리는 자리

예수님의 비유는 결국 Beit Av의 재정의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유대 청중의 내면에 깊이 새겨진 ‘아버지 집’의 이미지를 재정의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아가다는 아버지의 집을 향한 다정하고 강력한 부르심이며, 단지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영적 귀향을 위한 초대입니다. 이는 메시아적 공동체의 새로운 Beit Av, 곧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집은 단지 혈연이나 율법적 소속이 아닌, 관계 속에서 다시 초대받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형도 초대받았고, 동생도 품에 안겼습니다.
그 기준은 공로가 아닌, 사랑과 구속이었습니다.

랍비 조너선 삭스(Jonathan Sacks)는 말합니다:
“Beit Av는 돌아온 자에게는 회복의 집이며, 머문 자에게는 책임의 장소이다. 그 집은 영원히 문을 닫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양자의 명분을 얻었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고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다시 아들이 된 자들입니다. 이제 Beit Av는 단지 유대 민족의 가계만이 아닌, 메시아적 공동체의 공동 유산입니다.

7. 아버지의 집, 다시 찾은 자리

Beit는 잃은 집을 되찾았고, 형은 머무른 집의 의미를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 Av는 결국 모든 인간이 잃었다가 되찾아야 할 자리입니다.
탕자님의 아가다는 단지 돌아온 자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자에게도 은혜를 가르치는 신학적 부르심입니다.
그 집은 닫힌 집이 아니라,
늘 문이 열려 있는 은혜의 학교,
소속과 정체성이 다시 회복되는 영원의 공동체,
아버지가 문밖까지 나와 기다리시는 Shuv ve Geulah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지금 이 시대에도 모든 탕자와 모든 종교적 형을 위한 초대장입니다.

탕자는 Beit Av로 돌아오지만, 형은 여전히 그 집에 머무르고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멀어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단지 돌아오는 자만의 회복처가 아니라, 머무는 자가 끊임없이 새롭게 배워야 할 ‘공동체’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Beit Av는 모든 율법이 삶 속에서 작동하는 훈련의 장이며, 하나님 나라를 작은 예표로 살아내는 장소입니다. 탕자의 귀향은 그래서 단지 개인 구원에 그치지 않고, 잃어버린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Zechut Avot(זְכוּת אָבוֹת) – 조상의 공로, 잊혀진 기억의 속삭임>

복음서에 흐르는 Zechut Avot의 재해석 – 조상의 공로와 메시아의 은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하사 그 언약을 다시 이끄신 하나님” (출 2:24)
“그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눅 15:20)

복음서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단순히 개인적인 회개와 구원을 다룬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장면에는 유대적 신학, 곧 Zechut Avot (זְכוּת אָבוֹת)—조상의 공로라는 뿌리 깊은 신학적 개념이 아련하게 스며 있습니다. 탕자가 먼 길을 헤매다 돌아왔을 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갔다는 누가복음의 서술은, 단순한 인간의 감정적 환대가 아니라, 조상들의 신실함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응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Zechut Avot의 유대적 기초

Zechut Avot()란 유대 전통에서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세운 의로움이 후손들에게까지 긍휼로 이어진다는 신념입니다. 미쉬나 아보트(Mishnah Avot) 2:2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의 공로로 광야의 물이 멈추지 않았고, 아브라함의 공로로 이스라엘은 구속되었다.”

이 전통은 출애굽기 2:24,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라는 본문에서 기초를 얻습니다. Zechut Avot는 율법적 자격이 부족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임할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이 되어 왔습니다.

랍비 문헌에서도 이 개념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Talmud Bavli, Shabbat 55a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아브라함의 공로를 기리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신다.”
즉, 자녀의 불의보다 조상의 의로움이 더 무겁게 작용한다는 믿음이 유대 공동체를 지탱해왔습니다.

2. 잃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시선

탕자의 이야기는 단지 개인적인 귀향의 감동을 넘어, 조상들의 유산, 즉 Zechut Avot의 향기를 짙게 품고 있습니다. ‘그가 아직도 거리가 먼데’라는 누가복음 15장 20절의 표현은, 아버지가 여전히 아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지 부정한 아들을 용서하는 관대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조상의 신실함에 근거하여 죄인의 회복을 기억하는 하나님의 방식을 상기시킵니다.

랍비 전통에서 Zechut Avot는 “조상이 하나님 앞에서 세운 의로움이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입니다. 미쉬나 아보트(Mishnah Avot) 2:2는 말합니다:
“모세의 공로로 광야의 물이 멈추지 않았고, 아브라함의 공로로 이스라엘은 구속되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자손을 벌하실 수 있으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공로로 인해 오래 참으시며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 유대적 신념입니다. 탕자는 그 어떤 의로움도 없이 돌아오지만, 그를 맞이한 아버지의 환대는 그가 잊고 있었던 조상의 유산 속에서 베풀어지는 은총입니다.

3. 집안의 의로움이 자손을 살린다

Zechut Avot는 탕자의 귀환과 직결되는 개념입니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를 끌어안고,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며 다시 아들로 세웁니다. 랍비 요세 벤 요에제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자녀의 죄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공로로 인해 생명의 길로 인도된다.” (Avot D’Rabbi Natan 31)

탕자의 존재는 완전히 부서졌지만, 그를 받으시는 아버지의 존재는 조상으로부터 계승된 자비와 기억 위에 서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아브라함은 돌아온 자들을 환대하는 자, 이삭은 순종과 희생의 상징, 야곱은 고난 속의 인내로 여겨집니다. 그들의 삶은 길을 잃은 후손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는 영적 DNA였습니다.

4. 신약 본문 속 Zechut Avot의 메아리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시작하는 마태복음 1장은 단지 족보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선언은 Zechut Avot—조상의 공로—를 신약의 첫머리에서 강하게 선포하는 언어입니다. 예수의 메시아적 정체성은 조상들의 신실함을 잇는 계보 위에 서 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셨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장 72절에서도 사가랴는 찬송합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이처럼 신약의 복음서는 구약적 Zechut Avot 전통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와 언약의 신실함 안에서 성취되는 구속사의 배경으로 녹여냅니다. 이 배경 속에서 탕자의 귀환은 단지 개인적 감정의 회복이 아니라,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기억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재개이며, 잊힌 계보의 회복이요, 영적 혈통의 귀환인 것입니다.

5. 예수님의 비유 속에 반영된 조상의 공로

예수님은 랍비 문학에서 흔히 사용되던 아가다적 이야기 형식으로 ‘탕자의 비유’를 전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단지 죄인이 돌아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돌아올 자격조차 없는 이가 무조건적 환대를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아버지의 환대는 단순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그 아들을 품을 수 있는 뿌리 깊은 ‘기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Zechut Avot, 잊힌 조상의 유산이 자비로 발현되는 순간입니다.

랍비 요세 벤 요에제르(Yose ben Joeze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자녀의 죄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공로로 인해 생명의 길로 인도된다.” (Avot D’Rabbi Natan 31)

예수님의 비유 속 아버지는, 형벌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품는 존재로 나타나며, 이는 유대 공동체가 기억하는 아브라함의 환대, 이삭의 희생, 야곱의 인내와 연결됩니다.

6. 복음서에 흐르는 Zechut Avot의 재해석

예수님의 비유는 랍비 전통과의 대화를 통해 깊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전환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Zechut Avot을 넘어, 새로운 언약 안에서 ‘메시아의 공로’를 통한 귀향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친히 새로운 아담이 되시며, ‘새로운 조상의 공로’를 이루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여기서 예수님은 새로운 Beit Av로의 길을 여시는 ‘메시아적 Zechut’이 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공로를 계승하되, 그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회복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탕자의 귀환은 더 이상 단지 조상의 이름을 의지한 회복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와 메시아의 사랑을 통해 거듭나는 새 생명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공로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Beit Av—하나님의 집으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유산을 이어받되,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회복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이는 단지 ‘기억된 자비’가 아니라, ‘실현된 구속’입니다.

7. 사도 바울이 말하는 Zechut Avot – 조상의 공로에 대한 신약적 재해석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 속에서 Zechut Avot(זְכוּת אָבוֹת)—즉, 조상의 공로에 대한 유대 전통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사상적 흔적과 신학적 재해석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조상의 신실함이 후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접근은 단순한 ‘공로의 상속’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의로움이라는 전환된 신학적 해석을 보여줍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로움 (로마서 4장)

로마서 4장은 바울 신학에서 Zechut Avot을 가장 명확히 재해석한 장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자랑이었던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롬 4:3)

여기서 바울은 창세기 15:6을 인용하며, 아브라함이 율법 이전에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유대교에서 조상의 공로가 후손의 구원에 긍휼을 베풀도록 한다는 전통을 바탕으로 하되, 그 중심을 행위의 공로에서 믿음의 계승으로 옮긴 것입니다. 즉, 바울에게 Zechut Avot는 더 이상 “조상이 율법을 잘 지켜 얻은 공로의 유산”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 보여준 신뢰의 유산입니다. 바울은 모든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하며, 혈통이나 율법이 아닌 “같은 믿음의 본을 따르는 자들”이야말로 참된 유산을 이은 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들인 줄 알지어다.” (갈 3:7)

(2) 바울 신학 안에서의 Zechut Avot의 전환

바울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유대 전통의 Zechut Avot 개념을 전환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 전통에서 강조되는 Zechut Avot—즉 조상의 공로에 대한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복음 안에서 그것을 신학적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첫째, 바울은 조상들의 공로가 후손에게 긍휼을 가져다준다는 유대 전통의 관점을, 조상의 믿음의 본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는 방향으로 바꾸어 해석합니다.

둘째, 유대 전통에서는 이 유산이 혈통적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바울은 믿는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셋째, 율법을 지킴으로 얻은 공로가 유산으로 전승된다는 기존 개념 대신, 바울은 믿음을 통한 칭의가 진정한 유산의 모범임을 강조합니다.

넷째,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삶을 기억하며 그 공로를 기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언약을 성취하신 메시아 예수를 중심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기억의 중심을 전환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재해석은 유대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메시아 예수 안에서 믿음과 은혜의 보편적 언약으로 재정립하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입장은 단순한 유대 전통의 거부가 아니라, 그 뿌리 깊은 신학을 메시아 예수 안에서 완성시키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할례 이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통해, 이방인 역시 그 믿음의 유산에 참여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3) 신앙의 족보, 혈통의 전환

바울에게 있어 진정한 Zechut은 더 이상 조상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낳은 아브라함의 본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9장에서 “육신의 이스라엘”과 “약속의 자녀”를 구분하며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요… 약속의 자녀가 참 씨라 인정하심이라.” (롬 9:7–8)

이는 곧 신앙 공동체로서의 ‘새로운 족보’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며, **그의 믿음의 유산(Zechut Emunah)**에 참여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Zechut Avot는 메시아의 공로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구속의 은혜 안에서 재정립됩니다.

(4) 바울 신학과 루터의 이신칭의

흥미롭게도 바울의 이 같은 해석은 훗날 마틴 루터의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루터는 바울의 로마서를 기초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절을 강조하며,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한 칭의를 주장합니다. 이는 유대교의 전통적 Zechut Avot 개념—행위의 유산—과의 갈등처럼 보일 수 있으나, 바울은 이를 미리 조율하듯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틀로 정리합니다.

(5) 바울에게 Zechut Avot는 ‘믿음의 유산’이다

바울에게 있어 Zechut Avot는 폐기된 개념이 아니라, 믿음으로 갱신된 유산입니다. 그는 이방인도 유대인도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선포합니다. 따라서 바울의 신학 안에서 Zechut Avot는 더 이상 ‘혈통의 자랑’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언약의 기억으로 자리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9)

바울은 Zechut Avot를 보편적 구원의 문으로 확장시킵니다. 그 중심에는 메시아 예수께서 계시며, 그 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새로운 믿음의 족보 속에 속한 자들로 다시 태어납니다.

8. 교부적 시각에서 본 Zechut Avot의 기독교적 전환

– 새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새로운 조상의 공로
Zechut Avot(זְכוּת אָבוֹת)의 개념은 단지 유대 전통에 머물지 않습니다. 초기 교부들—특히 이레네우스(Irenaeus)와 터툴리안(Tertullian)—은 예수 그리스도를 ‘새 아담’(Second Adam)으로 묘사하면서, 구속의 연속성과 전환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심화시켰습니다. 이레네우스는 그의 저서 『이단 반박』(Adversus Haereses)에서 “아담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전환시킨 새로운 인류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며, 예수 안에서 새로운 계보가 시작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이 망가뜨린 것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모든 인류에게 구속의 시작이 되셨다.”

이는 단지 인류 전체의 새 출발을 뜻하는 보편적 상징이 아니라, 믿음의 자녀들을 위한 새로운 Zechut—‘메시아적 조상의 공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터툴리안 또한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De Resurrectione Carnis)에서 “새 아담의 순종은 옛 아담의 타락을 이긴다”고 언급하면서, 인간의 영원한 회복은 새로운 인류의 ‘머리’인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교부들은 단지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혈통, 새로운 기억, 새로운 유산이 시작되었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곧 기독교 안에서의 Zechut Avot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 유대 전통에서 조상의 공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손에게 긍휼을 이끌어내는 기억의 언약이었다면,
• 교부들의 시각에서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을 위한 ‘새로운 조상’, 즉 은혜의 뿌리가 됩니다.

이레네우스는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유산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대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새로운 생명을 유산으로 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사도 바울의 신학과도 연결됩니다. 그는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쳤다”(롬 5:12–21)고 선포합니다. 이는 단지 죄와 구속의 대조만이 아니라, 혈통적 전환과 기억의 기원을 바꾸는 신학적 재정의입니다.

결과적으로, Zechut Avot의 기독교적 전환은 단지 유대의 기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기억과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Beit Av—새로운 아버지의 집의 시작이 되며, 그분의 공로는 모든 신자들의 새로운 기억이자 유산이 됩니다.

9. 신학사 속의 긴장 – Zechut Avot와 이신칭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sola fide)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에 비해 Zechut Avot는 조상의 의로움을 근거로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구조이기에, 정면 충돌하는 듯 보입니다. Zechut Avot—조상의 공로—라는 사상은 언뜻 보기엔 마르틴 루터가 강조한 Sola Fide, 곧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이라는 종교개혁의 핵심과 충돌하는 개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서로를 부정하기보다는, 하나님 은혜의 두 다른 측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합니다. Zechut Avot는 인간의 자격을 전제로 한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의 신학에 속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조상의 믿음과 순종을 기억하시고 자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중심적 자비의 연장입니다. 반면 루터의 Sola Fide는 인간이 어떤 조건이나 공로 없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인간 중심적 의존의 고백입니다.

이 두 신학은 다음과 같이 구별됩니다. Zechut Avot는 하나님의 자비가 선대의 신실함을 따라 흐른다는 유대 전통의 인식이며, Sola Fide는 메시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선포된 개인 구원의 길입니다. 따라서 탕자의 귀환은 Zechut Avot의 향기를 지닌 이야기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메시아의 공로로 옷 입는 Sola Fide의 서사가 됩니다. 조상의 공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역사적 기억’이 되고, 믿음은 그 기억을 개인적 구원으로 현재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 Zechut Avot는 ‘공로의 이양’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유도하는 ‘기억의 언약’으로 이해된다.
• 바울 역시 아브라함의 신앙을 언급하며, 믿음의 조상이 가진 신실함을 강조한다 (롬 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따라서 루터의 이신칭의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언약의 맥락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조상의 유산을 감사로 기억하되, 구속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신학으로 정립될 수 있습니다.

10. 학문적 고찰과 현대적 적용

현대의 메시아닉 유대인 학자 데이비드 루드(David Rudolph)는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Zechut Avot는 내 신앙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예슈아 안에서 나는 단지 조상의 자비를 잇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Zechut Avot를 통해 하나님의 길을 알게 되었지만, 메시아의 공로를 통해 그 길이 완성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신앙 여정은 전통과 은혜, 유산과 구속의 조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이와 같이 Zechut Avot는 복음서에서 새롭게 조명되며, 랍비 문헌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도 메시아의 공로라는 새 언약 안에서 심화되고 완성됩니다. 이는 단지 유대인의 신학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뿌리이자 회복의 선포입니다. 조상의 유산은 믿음의 기억이며, 그 기억은 결국 구속의 은혜로 인도됩니다.

11. 우리의 자리에서 조상이 된다

Zechut Avot는 과거 조상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후대를 위한 Zechut를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회개, 사랑과 용서는 다음 세대에게 이어질 은혜의 씨앗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잃은 자가 회복될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조상’으로 다시 서는 여정입니다.

<Halakha와 Aggadah의 통합 – 율법과 이야기의 회복>

“율법 없는 사랑은 감정에 불과하고, 이야기 없는 율법은 생명을 잃는다.”
“율법을 넘어, 그 안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라.” – 아가다적 교훈

1. Halakha와 Aggadah: 두 날개로 나는 율법의 새

랍비 유대교는 두 개의 커다란 강줄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Halakha – “길을 따르라”는 명령의 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Aggadah – “말하다, 이야기하다”에서 비롯된 설화의 전통입니다. Halakha는 행동을 규정하고, Aggadah는 그 행동에 생명과 감정을 부여합니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말합영혼이다. 뼈대만 있으면 메마르고, 영혼만 있으면 흩어진다.” (Yerushalmi Hagigah 1:8)

예수님의 탕자 비유는 바로 이 두 전통의 통합적 표현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Halakha로 세워졌고, 아들의 귀환은 Aggadah로 서술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이야기 속니다:

“Halakha는 뼈대이고, Aggadah는 에서 율법을 넘어선 회복의 윤리를 드러내십니다.

2. 잃은 자를 위한 할라카(재정의된 길)

Halakha는 길을 걷는 방식이지만, 탕자는 그 길을 잃었습니다. 그는 다시 돌아오는 길조차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 기다림이야말로 하가다 속에 숨겨진 새로운 할라카였습니다. 랍비 엘리아우 데스슬러(R. Elyaahu Dessler)는 말합니다:

“진정한 할라카는 글자 속에 갇힌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이르는 걸음이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 아버지는 할라카를 넘어섭니다. 그는 그 아들을 성문에서 돌로 치는 율법을 따르지 않고(신 21:18–21), 그를 입맞추고 옷 입히고 반지를 끼웁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적 질서 속에 아가다적 사랑과 자비가 들어온 것입니다.

3. 이야기의 힘, 율법의 영혼을 깨우다

예수님은 탕자의 이야기뿐 아니라, 모든 가르침 속에서 하가다적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할라카가 때때로 외식과 형식주의로 변해버린 시대, 예수님은 이야기로 율법의 본래 정신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예를 들어,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탕자의 이야기’는 모두 미쉬나의 구조적 논리보다 사람의 심장에 말 걸기 위한 하가다입니다. 탕자 비유는 그 중심에 할라카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구속의 드라마로 확장시킨 율법의 시적 복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아버지의 눈물, 메시아의 할라카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R. Yohanan b. Zakkai)는 성전이 무너진 후 “율법보다 중요한 것은 자비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Aggadah가 단순한 설화가 아닌, 율법의 재해석과 미래의 희망임을 간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앞서, 율법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예수님의 가르침은 할라카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감춰진 하나님의 마음을 꺼내는 하가다였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바로 그 절정을 보여줍니다. 죄인은 받아들여지고, 잃은 자는 찾았고, 율법은 사랑으로 해석되어 회복을 낳습니다.

5. 오늘날의 할라카–아가다적 삶으로의 초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율법을 정의하고도,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이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야기 없는 신학, 자비 없는 윤리, 감동 없는 복음은 마치 뼈만 남은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살아라 – 이야기를 품은 율법, 사랑이 깃든 정의로.” (미가 6:8, 의와 인애와 겸손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라)
오늘 우리는 다시 Halakha와 Aggadah의 통합을 살아내야 합니다. 율법의 길을 따라가되, 그것이 눈물과 이야기와 사랑으로 물들어야 진정한 생명이 됩니다.

<글을 맺으며>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라”

Zechut Avot는 단지 유대교적 유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의 신실함을 기억하셔서 자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성경적 신념이며, 예수님의 비유 안에서 새롭게 해석됩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 공로를 넘어, 오직 메시아 예슈아의 공로로 말미암아 새로운 Beit Av로의 귀환을 제시합니다.
루터가 강조했던 Sola Fide는 이러한 메시아적 구속을 신앙으로 받는 선언이었고, 우리는 그 구속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조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제는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자비의 유산, 믿음의 Zechut을 남길 차례입니다.
회개와 사랑, 구속과 기억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을 다시 찾게 됩니다.

2025년 7월 25일 보스톤 김종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