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아가다 – 윤리와 마음의 훈련-18

이 글은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출발점으로 하여, 산상수훈 전반에 깃든 ‘내면의 할라카’와 윤리의 재정의를 조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율법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랍비 유대교의 해석 전통 속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혁신성과 본질 회복의 여정을 따라가는 작업입니다.

[영성계발] 예수님의 아가다 – 윤리와 마음의 훈련-18 » 부제: 랍비적 아가다 전통과 내면 할라카를 통한 산상수훈의 재발견 » The Aggadah of Jesus — Ethics and the Training of the Heart » Subtitle: Rediscovering the Sermon on the Mount through Rabbinic Aggadic Tradition and the Inner Halakha » 

Contents

<글을 시작하면서: 잊혀진 해석의 창을 열며>

그 말씀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였습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나도 세리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이던 그 순간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외식이라 부르며 조롱했지만, 그가 왜 그렇게 기도했는지를 누가 말해주었을까요?
초등학교 5학년, 어른들 틈에 끼어 앉았던 어느 심령 부흥회.
그날 부흥사 목사님이 연극처럼 들려주시던 탕자의 이야기는 아직도 제 영혼 한 켠에 촉촉이 젖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던 아들이, 모든 것을 잃고서야 깨달은 아버지의 품.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회개와 용서는 그렇게 눈물로 배워졌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인천을 자주 찾으시던 신현균 목사님의 설교는 늘 탕자의 비유로 시작했습니다.
듣고 또 들어도 지겹지 않았습니다. 그 유머, 그 울림, 그 따뜻한 울분, 광대와 같은 몸짓으로 청중을 울리고 웃기면서도 놓칠 않았던 그 많은 .예수님의 이야기들…
이제 보니 그 분의 설교는 하나의 아가다였습니다.
그 분의 아가다는 이제 이야기가 되어 사람의 마음에 남았고, 그 이야기는 삶이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은 양, 삭개오, 열 처녀…
부흥회의 단골손님 같았던 그 이야기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 해졌습니다.
저도 목회 39년 동안, 선교의 길에서, 여러 민족과 언어의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때론 연극처럼, 때론 구연동화처럼.
그러던 중, 영국 대학에서 박사 과정 중 정통 유대교의 정수를 배우며 탈무드를 접한 순간,
제 마음에 번개처럼 깨달음이 내리쳤습니다.
‘이 이야기들… 예수님만 하신 말씀이 아니었구나.’
미쉬나와 게마라 속에도, 랍비들의 수천 년 지혜 속에도 그 비유의 궤적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였습니다.
저는 잊혀진 해석의 창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아가다(אגדה)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회개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열게 한다.”
— 바빌로니안 탈무드, 산헤드린 38a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이야기(story)가 아닌 아가다(אגדה)였으며,
율법의 형식이 아닌 내면의 할라카(הלכה)였습니다.
그 가르침은 겉이 아니라 속을 꿰뚫었고,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변화시켰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תָּמִים תִּהְיֶה עִם יְהוָה אֱלֹהֶיךָ”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 신명기 18:13)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Tamim’의 요구, 즉 온전함과 진실함의 소명을 다시 살려냈습니다.
박사학위를 마친 후 이제 25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늘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던 랍비 유대교의 배경을 이해함으로 더 깊고 넓게 이해하고 다가가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진리에 접근하도록 붓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수세기 동안 따라온 교회는 때때로 그 말씀의 유대적 배경을 망각한 채, 철학적 체계나 교리적 구조 속에서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 청중의 삶과 정서, 율법 이해, 그리고 아가다적 설화 형식 안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이 글은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출발점으로 하여, 산상수훈 전반에 깃든 ‘내면의 할라카’와 윤리의 재정의를 조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율법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랍비 유대교의 해석 전통 속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혁신성과 본질 회복의 여정을 따라가는 작업입니다.
언젠가는 내가 받았던 그 감동과 영감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영적 흥분과 말씀을 깨달음으로 얻었던 기쁨과 희열들…
쓰고 싶었지만 감히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롯이 따라가려면, 그 말씀이 태어난 문화와 언어, 청중의 귀와 마음,
그리고 랍비 유대교라는 해석의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교회는 그 말씀을 헬라 철학과 교리의 체계 속에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산을 오르시며, 그 정상에서 아가다의 언어로, 내면의 할라카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글은 그 길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출발점으로, 산상수훈의 내면 윤리를 밝히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 선포하신 진리, 그리고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나라—
그 모든 것을 잊혀진 해석의 창을 열며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오늘도 제가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8:9–14과 산상수훈에 나타난 내면 윤리의 혁명>

1. 의인의 기도인가, 죄인의 기도인가?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18:11, 13)

두 문장.
두 사람이 성전에 올랐고,
두 사람이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으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누가복음 18:9–14)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윤리, 신앙, 그리고 의로움의 정의를 송두리째 흔드십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적 완전함을 자랑하지만,
세리는 마음의 통회로 하나님의 긍휼을 붙듭니다.
이 비유는 아가다의 형식을 빌린 윤리적 선언이자, 산상수훈의 실천적 서곡입니다.

2. 죄인에 대한 선입견과 의인의 위선

율법 안에서 세리는 ‘죄인’으로 낙인 찍힌 존재입니다.
사회적,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이들이었고, 그들의 기도는 들려질 자격조차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율법의 수호자’였고, 공적 경건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구조를 전복하십니다.
세리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었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왜 일까요?

그 답은 예수님의 한마디에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8:14)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그 마음으로 판단하십니다.
율법적 행위는 가릴 수 있으나, 마음의 위선은 가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글을 쓰는 필자에게 가장 먼저 찔림으로 다가올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기도 그리고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기도를 알아 감으로 예수님의 아가다로서 의와 내면의 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풀어 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3. 아가다(Aggadah)를 통한 윤리적 자기 인식

예수님의 아가다는 명령이 아니라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을 흔듭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대조는 청중의 윤리적 직관을 교란시키며, 누가 진정 하나님 앞에 서는 자인지를 깊이 묻게 합니다. 바리새인은 외적 경건과 율법적 자긍심에 사로잡혀 있으며, 세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탈무드 베라코트 6b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efillah belo kavanah keguf belo neshamah”
“마음의 전념 없이 드리는 기도는 혼 없는 육체와 같다.”

이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왜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4. 할라카(Halakhah)와 예수의 내면 윤리

바리새인의 기도는 전통적인 할라카의 외적 형식—기도 시간, 자세, 방향, 말의 형식—에는 부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tzedakah, צְדָקָה)의 본질은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겸비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여기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의로움은 외적 규율이 아니라 마음의 훈련과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자세입니다.

5. 마음의 훈련과 세리의 기도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칩니다. 이는 단지 감정적 표현이 아닌 심령 훈련의 행위입니다. 히브리어로 “가슴을 친다”는 행위는 유대 예배 전통에서 회개(Teshuvah, תשובה)와 죄의 고백을 상징하는 행동입니다. 이는 욤 키푸르(대속죄일) 전통에서도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동작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Ho Elohim, hilastheti moi tō hamartōlō, Ὁ Θεός, ἱλάσθητί μοι τῷ ἁμαρτωλῷ)라는 짧은 말로 전체 율법보다 더 깊은 영적 진실을 담아냅니다. 이는 다윗의 “상한 심령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6. 예수 윤리의 방향: 인간 형상의 회복

예수님의 윤리는 단지 개인의 내면 수련에 그치지 않습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 대한 평가—“저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겉모양이 아닌 마음 중심이라는 선언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기본적 인간 이해, 즉 하나님의 형상(Tzelem Elohim, צֶלֶם אֱלֹהִים) 사상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세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겸손한 기도를 통해 공동체 윤리의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7. 랍비 유대교의 딜레마: 행위의 완전함 vs 마음의 불완전함

랍비 유대교는 율법의 세부 조항을 철저히 해석하고 규정함으로써 거룩한 행위의 완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 완전함은 종종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의 상태와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성전의 번제가 절차적으로 완벽했지만, 그 제사의 정신은 떠나버린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분리를 지적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8, 이사야 29:13 인용)
바리새인의 기도는 완전한 규범을 따랐지만,
그 마음은 자기를 의롭게 하며 이웃을 정죄하는 교만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선(hypokrisis)이며,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거듭 경고하신 태도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는 이미 너희 상을 받았느니라.” (마 6:2)

8. 예수 윤리의 중심: 마음의 훈련과 존재의 변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윤리는 단순한 ‘도덕적 계명’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마음의 훈련을 요청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이 선언은 의로움이 외적인 계율의 순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마음과 겸손한 회개에서 온다는 예수 윤리의 핵심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짧지만,
그 한 마디에 심령의 가난, 통회하는 마음, 의에 주린 심령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산상수훈의 윤리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의 삶입니다.

9. 마음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윤리

예수님의 윤리는 내면에서 시작되어 삶 전체를 뒤흔드는 새로운 의입니다.
이 의는 단지 ‘하지 말라’는 규범이 아니라,
‘이렇게 되라’는 존재론적 명령입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이 말씀은 율법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인 긍휼과 겸손, 사랑과 진실을 온전히 이루라는 요청입니다.
바리새인은 행위의 의로 충만했지만,
세리는 마음의 통회로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대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시작은 마음이며, 그 끝은 새로운 윤리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10. 예수님의 아가다 – 이야기로 심령을 깨우다

예수님의 비유, 곧 아가다는 율법과 도덕의 경계를 넘어선 심령 훈련의 언어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책망으로 꾸짖기보다는,
이야기로 부드럽게 꺾으십니다.
세리의 한 줄 기도,
그 안에서 우리의 회개가 시작되고,
바리새인의 긴 기도,
그 안에서 우리의 경계가 세워집니다.
예수님의 윤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누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누가복음 18:9–14에 나타난 내면 윤리의 회복, 두 기도자의 이야기>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한 예수님의 이 짧은 아가다는 사람의 윤리적 가치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다는 깊은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단지 행동 규범을 넘어서 마음의 훈련으로 나아가는 참된 신앙의 길을 보여줍니다.

1. 예수님의 교육 방식: 아가다를 통한 마음 깨우기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령적 율법이나 교훈의 나열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마음으로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랍비 문헌의 아가다(Aggadah)와 같은 형태를 취하지만, 보다 더 강렬한 회심을 촉발합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로 충만한 율법 전문가였고, 세리는 율법을 어긴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야기 안에서 청중의 윤리적 직관을 흔들며 진짜 의로운 자가 누구인지 스스로 생각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윤리적 훈련법이며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 자기 성찰을 유도하는 아가다입니다.

2. 윤리의 중심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

예수님은 단지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마음의 중심, 그 깊은 곳에서 나오는 윤리를 보십니다. 세리는 아무 행위도 자랑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많은 경건한 행위를 자랑하지만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이 대조는 윤리의 본질이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있다는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외적 규율을 넘어 내적 중심을 회복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3. 마음의 훈련: 예수 윤리의 핵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마 5:8)라는 선언은 단지 감정의 순수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자세와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 회개의 태도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마음 훈련의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외면을 중시했다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던 세리는 자신을 인정하고, 자복하고, 죄를 뉘우칠 뿐 아니라 마음을 깨트려서 주님 앞에 토로할 수 있는 마음 훈련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겸손히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눈을 들지 못하며, 가슴을 칩니다.
이는 단지 정서적 표현이 아니라 심령의 훈련, 즉 테슈바의 실제적 모습입니다.

4. 예수 윤리의 종말론적 방향: 형상 회복과 공동체의 윤리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실천해야 할 윤리가 단순히 ‘착한 행동’을 넘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방향성을 지향합니다.
그 윤리의 출발점은 마음이며, 그 목적지는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바리새인이 세리를 ‘경멸’할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세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그를 회복된 존재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의 아가다는 바로 이 회복의 방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십니다.
이야기를 통해 경계를 무너뜨리고,
말씀을 통해 가슴을 쳐 울게 하며,
기도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 윤리를 세워갑니다.

5. 아가다로 시작된 테슈바, 마음으로 실현된 윤리

예수님의 아가다는 단지 이야기나 교훈이 아닙니다.
그분의 비유는 사람의 마음을 찢고, 일으키고, 치유하는 내면의 훈련 도구입니다.
오늘날 제자훈련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심령 훈련입니다.
세리의 짧은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그분의 윤리는 형식이 아니라 회복이며,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며,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마음입니다.

<산상수훈에서 드러난 위선과 진실한 기도 –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의 연장선>

1. 바리새인의 기도와 ‘외식하는 자’에 대한 예수님의 고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기도의 태도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 6:5–6)

이 구절은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의 기도와 구조적으로 유사합니다. 두 기도 모두:

•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적 형식
•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자기 과시
• 타인을 낮추는 교만한 비교

이는 예수님 당시 유대 랍비 전통 내의 기도 규범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쉬나 베라코트 4:4에는 ‘경건한 자들은 기도 전에 마음을 준비하며 경외함으로 나아간다’는 규정이 있으나, 실제로는 외적 형식의 반복이 강조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형식적 경건을 “위선(hypokrisis)”이라고 규정하며, 기도가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세리의 기도는 그 본을 보여줍니다.

2. 유대 문헌에서의 기도의 형식과 회개

탈무드 베라코트 6b에 따르면, “기도는 마음의 봉헌(kavanah, כוונה) 없이는 무효하다”고 언급됩니다.
Talmud Berakhot 6b: “תפלה בלא כוונה כגוף בלא נשמה”
(Tefillah b’lo kavanah ke-guf b’lo neshamah)
“기도는 집중 없는 몸과 같다. 즉, 혼 없는 몸과 같다.”

이처럼 Kavanah (כוונה)는 ‘의도’, ‘마음의 방향성’, ‘집중된 태도’를 의미하며 유대 기도문 (Amidah, Shema)의 핵심 원칙으로 여겨졌습니다. 위에 보여 드린 베라코트 6b는 특히 기도자의 내면 태도를 강조하며, 외적 행위만으로는 기도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세리의 내면적 통회는 kavanah의 실현이며,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형적 율법의 극치로서 neshamah 없는 guf, 즉 혼 없는 몸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상적으로는 그러하나, 실천에서는 자주 무시되었습니다. 기도는 종종 외적인 형식(시간, 동작, 방향)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는 내면의 태도는 뒷전이었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이러한 문맥 속에서 랍비 전통이 추구하던 기도 이상(kavanah)을 실현한 모습입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율법적으로는 옳았으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에는 실패했습니다.

3. 산상수훈과 세리의 기도: 하나님 나라의 윤리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가르치시며 “의”의 본질을 재정의하십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이러한 구절들은 세리의 기도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 심령의 가난함: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함
• 마음의 청결함: 하나님께 긍휼을 구함
• 종교 지도자보다 나은 의: 하나님의 긍휼로 의롭게 됨

세리의 기도는 산상수훈의 내면 윤리, 마음의 의, 회개의 영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실천입니다. 바리새인은 산상수훈이 경계하는 “외식”의 대표적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의 기도: 예수의 윤리와 바리새적 경건의 해부>

1. 기도는 누구 앞에 드리는가

기도는 종교의 심장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도의 내용을 넘어서 기도를 드리는 태도와 마음을 문제 삼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14절,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랍비 전통과 율법적 경건을 해부하시고,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존재방식을 제시하신 윤리적 전환의 선언입니다. 본 글에서는 예수님의 이 아가다를 중심으로, 바리새인의 경건이 가진 구조적 위선, 그리고 예수 윤리의 근원적 내면성을 비교 분석하고자 합니다.

2. 바리새적 경건의 본질: 율법의 외면화

바리새인들은 경건의 전범이자,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모범이었습니다. 탈무드 베라코트(ברכות) 30b에 따르면, “기도하기 전, 사람은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향해 말합니다:

•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을 향해 이 비유를 말씀하시니라.” (눅 18:9)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정죄하며 자신을 높이는 경건의 연기였습니다. 그는 금식하고, 십일조를 내며, 죄인과 다르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실천에 있어 바리새적 경건은 종종 외식으로 드러납니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 6:5의 산상수훈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 “너희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기도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자신이 행한 선한 행위를 열거하며,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를 의롭다 여깁니다. 이는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고발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것이 바로 형식은 갖추었으나 진실은 빠진 바리새적 할라카의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3. 세리의 기도: 내면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

세리는 말이 많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8:13)

그의 기도는 구절로 가득한 신학적 선언이 아니라, 내면의 울음이고 존재 전체의 탄식입니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인지를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그의 기도는 짧지만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과 회개의 중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제시하신 기도의 윤리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경건의 시작, 즉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입니다.

4. 예수 윤리의 핵심: 하나님의 눈 앞에서의 진실함

예수님의 윤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마음’을 봅니다. 사람 앞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경건은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 사람에게 죄인이라 정죄받은 세리는, 하나님의 눈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눅 18:14)

여기서 ‘의롭다 하심’(δικαιόω, dikaioō)은 하나님의 법정 선언으로, 존재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평가입니다.
예수님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사람 앞에서의 연기를 위한 것이었으나,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통곡이었습니다. 이는 아가다의 형식을 빌린 윤리적 선언이며, 신앙의 핵심을 외면에서 내면으로 옮긴 급진적 선포였습니다.

5. 랍비 문헌과 비교: 형식과 본질의 충돌

랍비 전통 속에서도 내면의 태도를 강조하는 교훈이 없지 않습니다.
미쉬나 아보트 2:13 – “기도는 습관처럼 하지 말고, 간청하듯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그러나 실천에 있어, 경건은 종종 규율과 반복, 외적 형식에 머물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같은 문헌의 원리를 더욱 깊이 확장시키셨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경건을 잘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경건이란 존재 방식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의 자세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는 입술이 아닌 존재 전체의 엎드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의 원칙을 삶 전체로 확장 시켜 기도와 삶, 마음과 윤리를 일치시키십니다.

6. 하나님 앞에 선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 선 자는 누구입니까?
가르침을 많이 받은 자가 아니라, 자기 죄를 깨닫는 자입니다.
그는 율법을 암송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바리새인은 사람 앞에서는 의로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무너졌고, 세리는 사람 앞에서는 멸시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들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그 앞에 선 자는 외적인 의가 아니라 내면의 통회로 서는 자입니다. 바리새인의 의로움은 공동체의 인정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세리는 사람의 정죄를 받았으나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진정한 신앙은 그 자리에 누가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산상수훈과 세리의 기도에 나타난 ‘마음의 윤리’>

마음에서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점은 모두 산상수훈에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의 윤리적 헌장으로, 형식보다 마음의 본질을 겨냥합니다. 바리새인이 추구하는 기도의 형식보다, 세리가 심령을 통회함으로 드리는 마음의 테슈바를 더 추구합니다.

그 첫 문장,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는 누가복음의 세리의 기도와 수직적으로 연결됩니다. 세리는 자신의 심령의 빈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이며,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주의 율법의 형식을 넘어서 마음의 본질로 파고드는 이 가르침은,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의 기도와 동일한 심령의 울림을 지닙니다.

본 글에서는 산상수훈에 나타난 마음의 윤리와 그것이 세리의 기도와 어떻게 만나는지를 고찰하고자 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 세리의 기도에서 드러난 천국의 열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이 첫 번째 복은 산상수훈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예수님께서 비유로 보여주신 세리의 기도를 이해하는 가장 깊은 해석의 지점입니다.

세리는 스스로의 죄를 직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눈을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한 그는 단순한 회개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진실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은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산상수훈이 단지 예수님의 교훈이나 도덕적 설교로만 이해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상적인 윤리나 하가다적 권면으로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추상적인 명제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라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살아 있는 실천과 감동으로 보여주십니다.

이처럼 세리의 기도는 산상수훈의 첫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삶 속에 구현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단지 종교적 실패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회복의 모델입니다. 바리새인의 의로움이 아니라, 세리의 부서진 심령에서 천국은 시작됩니다. 역설적으로 세리에게는 그의 기도를 통해 용서의 길을 열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함으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실제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2. 바리새인의 기도와 하나님의 시선 – 외식과 진실의 경계에서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구제, 기도, 금식이라는 세 가지 경건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며, “외식”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를 던지십니다. 이 경고는 단지 행위의 부정이 아니라, 그 동기와 방향에 대한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강조하십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하라.”(마 6:4, 6, 18)

이 말씀은 바리새인의 기도가 단지 위선적인 겉치레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경건이 무엇인가를 대조적으로 보여 주는 해석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바리새인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즉 לִרְאוֹת לְבְּנֵי אָדָם (“사람에게 보이려는”) 경건이었습니다.

랍비 문헌에서도 외식적인 경건은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탈무드 바빌로니아 판 소타(Sotah 22b)는 “경건한 체하는 위선자”(צְבוּעִים, tzvu’im)에 대해 혹독하게 말합니다. 랍비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진심 없는 헌신을 구분했으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은 뿌리부터 잘못된 것이라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랍비 윤리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더욱 급진적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은밀함 속의 진실함’, 곧 “하나님의 시선 앞에 선 마음의 투명성”(לב טהור)으로 재정립하셨습니다. 그 중심에는 바리새인의 기도와는 완전히 상반된 세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눈을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는 이 기도는 산상수훈의 첫 복—”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의 실존적 구현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바리새인들의 외적 행위를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태도, 곧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자아 중심성과 타인을 멸시하는 교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은밀한 중에 들으시고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 아래 진실하게 서는 자들의 몫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이 경고의 전형이며, 세리의 기도는 그 반대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윤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시선 앞에 있는 마음의 진실함’을 요구합니다.

3. 의의 개념의 재정의 – 바리새인의 의 vs 예수의 의

더 나은 의”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드러내신 의의 본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20).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상승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δικαιοσύνη, tsedaqah, צדקה)에 대한 본질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이는 의의 기준을 더 높이려는 시도가 아니라, 바리새적 의의 허상을 벗기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진정한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1. 랍비 할라카가 말하는 “의” (Tzedaqah)

고대 랍비 문헌에서 “의”(צדקה)는 단순한 윤리 규범을 넘어선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안에서의 올바름을 뜻합니다. 그러나 제2성전기 후반으로 갈수록, 의는 점차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할라카적 행위로 외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쉬나 아보트 2:1에서는 “율법을 세밀히 따르고 그 길을 걷는 자가 의로운 자”라 가르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가르침을 따라 금식, 십일조, 정결례 등을 철저히 실천하며 외적인 의를 삶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2. 바리새적 의의 한계: 외식의 구조화

바리새인들의 의는 본래 선한 열망에서 비롯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행위가 자기 의로 포장되고,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 18:11–12)
이 기도는 경건의 언어를 빌리고 있지만, 실상은 자기 자랑과 타자 배제의 구조입니다. 이는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 지적하신 외식의 전형이며, 참된 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입니다.

3. 예수님의 의: 하나님 앞에서의 내면의 정직함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새로운 의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정신—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오는 진실한 마음—의 회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이 구절은 세리의 기도와 연결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오직 긍휼을 구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6):

이는 하나님의 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바리새적 자기 의가 아니라, 은혜로 받는 의에 대한 갈증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하라” (마 6:6):

기도와 의의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리의 기도에서 구현된 “숨겨진 의”입니다.

4. 의의 본질: 관계, 겸손, 회복

예수님의 의는 “율법+행위”라는 산술적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겸손과 회복을 말합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켰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졌고, 세리는 율법을 어겼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눅 18:14)는 선언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리의 기도는 산상수훈이 말하는 새로운 의, 즉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갈망하는 마음의 의를 구현합니다.

4. 유대적 회개의 재정의: 테슈바와 카바나

랍비 전통에서도 테슈바(תשובה, 회개 또는 귀환)는 핵심적인 개념이지만, 종종 제의적 절차나 율법적 조건으로 환원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속죄일(욤 키푸르)이나 고백문(וידוי, 비두이)은 공동체적이고 반복적인 회개 형식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테슈바는 자칫 외적 행위로 국한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외적 절차를 넘어서 테슈바의 내면성을 강조하십니다. 회개는 단지 죄에 대한 통회나 율법적 정결의 회복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정렬하고,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회심하는 전인격적 귀환입니다.

이러한 내면적 회개의 중심에는 히브리어 카바나(כוונה)가 놓여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서적 집중을 넘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회개 개념은 이 카바나의 영성을 회복시키고, 진정한 테슈바의 의미를 재정의합니다.

세리의 기도는 이러한 테슈바와 카바나의 결정체입니다. 그는 성전 한 구석에서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하고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탄식합니다(눅 18:13).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전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는 카바나적 기도이며, 산상수훈이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전형입니다(마 5:3).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기서 회개의 본질을 선포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는 선언은 외식적 율법 준수를 넘어서 관계적·존재론적 ‘의’, 즉 하나님을 향한 참된 방향성과 내면의 정직함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산상수훈과 비유, 기도 가르침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회개의 길이며, 외적 종교 행위가 아닌 내면의 테슈바와 카바나를 통한 회복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진정한 테슈바의 전형이며, 카바나(כוונה, 내면의 집중)의 최고 사례입니다.

5. 산상수훈의 윤리와 세리의 기도가 만나는 지점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단지 윤리적 규범의 나열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변화된 존재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는 선언입니다. 외면의 율법 준수가 아닌 심령의 정직함, 마음의 청결함, 애통함과 온유함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라는 초대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이 산상수훈의 핵심 메시지를 실존적으로 구현한 사례입니다. 그는 성전이라는 제의 공간 한 켠에서, 외적인 경건의 포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단순하고도 절박한 기도를 드립니다(눅 18:13). 이는 카바나(כוונה, 내면의 집중과 진정성)의 전형이었고,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간의 참회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는 선언으로 마무리하시며, 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십니다. 고대 유대 전통에서는 의(צדקה, Tzedakah)가 율법을 성실히 지키고 자선을 베푸는 것을 중심으로 이해되었습니다(예: 미쉬나 아보트 2:1).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적 의를 넘어서, 하나님 앞에 선 존재의 방향성과 진실성으로 의를 재구성하십니다(마 5:20).

초대 교부들 또한 이 점을 깊이 주목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산상수훈 강해』(De Sermone Domini in Monte)에서 세리의 기도를 “하늘의 시민권을 위한 기초”라 하며, 심령의 가난함이야말로 복음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본래 목적—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자비의 실현—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회복적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Rabbi Yochanan ben Zakkai)가 “하나님은 깨진 마음을 찾으신다”고 말한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탈무드, 브라코트 5b).

결국 산상수훈은 세리의 기도라는 구체적 장면을 통해 윤리적 이상을 추상적으로 선포하지 않고, 한 인간의 기도와 회개의 행위 안에 구현된 하나님 나라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제자는 누구입니까?

• 율법을 문자로만 아는 자가 아니라, 그 뜻을 마음으로 새기는 자입니다.
• 성전 외형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의 성전을 건축하는 자입니다(마 5:8; 고전 3:16).
•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은밀히 회개하고, 조용히 의로워지는 자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하나의 단순한 기도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윤리가 구체적 인간에게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사건입니다. 이 만남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물음을 던집니다:

당신의 의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하나님 앞에 선 진실한 기도로부터 시작되고 있는가?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와 할라카의 본질>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9–14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대조하심으로써 단순한 종교적 행위와 진정한 회개, 겸손,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셨습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라본 할라카(הֲלָכָה), 즉 삶에서 실천되는 율법의 길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비교함으로 율법을 대하는 두 사람의 근원적 태도를 나타내십니다. 외적으로는 완전해 보이는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위선과 거짓과 자기기만이 가득합니다. 외적으로는 죄인으로 지탄받는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아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당시의 두 종류의 사람이 어떻게 할라카를 보고 있는지를 단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17–20은 산상수훈의 핵심 전환점이며,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를 명확하게 밝히는 선언입니다. 이를 랍비 유대교적 관점에서 조명하면, 이 구절은 단순한 교리적 선언을 넘어서서, 예수님이 율법(Torah, תּוֹרָה)과 선지자들(Nevi’im, נְבִיאִים)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실현하려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하가다+할라카”적 메시지로 읽힙니다.

1. 예수님의 비유에 담긴 할라카의 해석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적으로 완전해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자아 자랑과 타인에 대한 경멸, 그리고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의 결여가 존재합니다. 반면, 세리는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기도는 회개와 절박함, 진정한 카바나(כוונה, 마음의 집중)를 담고 있습니다. 이 대비는 두 사람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느냐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예수님은 율법의 폐기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적 의도를 “완성” (plēroō, πληρόω; 히브리어 대응 가능어: לְקַיֵּם leqayyem)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완성”은 랍비 유대교에서 흔히 쓰는 표현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고, 내면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본래 의도와 정신을 실현하는 것, 즉 ‘살아 있는 할라카’를 의미합니다.

2. 내면의 할라카 vs 외면의 할라카

유대교의 할라카(Halakhah)는 단순한 율법 조항의 나열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걷는 길'(הֲלִיכָה)이라는 뜻을 지닌, 삶 전체를 향한 실천적 윤리의 여정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일상—식사, 기도, 노동, 안식일, 인간관계까지—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제2성전기 말기, 특히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할라카가 점차 ‘외형적 완전성’과 ‘율법 준수의 가시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경직되어 갔습니다. 그들은 탈무드의 미쉬나와 게마라의 토대를 두고 각종 규정(gezerah)과 울타리 법(fence laws)들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할라카는 점점 외면의 규율로 과밀화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이 경향의 전형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와 구제, 금식의 형식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며, “너희는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예배 태도에 관한 지적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외면 중심 율법 행위를 통해 자기의(tzedaqah)를 드러내려는 태도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리의 기도는 내면의 할라카, 곧 ‘마음으로 걷는 길’의 본을 보여줍니다. 그는 성전 구석에서 눈을 들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Tzidqat Elohim)를 구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카바나(כוונה), 즉 전심의 집중과 진정성 있는 하나님을 향한 방향 전환을 내포하며, 예수께서는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바로 이 ‘내면의 할라카’를 제시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는 말씀은 단지 의의 기준을 높이신 것이 아니라, 외식적인 형식 중심의 의는 참된 의가 아니며, 참된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비롯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세리의 기도 안에서 산상수훈의 윤리와 내면의 할라카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진정한 의는 외면의 형식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며, 하나님 앞에서의 통회와 겸손, 그리고 회복을 갈망하는 진정성 있는 ‘삶의 방향 전환’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윤리입니다.

3. 율법(Torah, תּוֹרָה)의 ‘폐함’과 ‘완성’에 대한 유대적 개념과 예수님의 재해석

율법(Torah, תּוֹרָה)은 유대 신앙의 중심이며,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담은 생명의 길입니다. 따라서 유대 전통에서 율법을 ‘폐한다’는 사상은 상상할 수 없는 신성모독에 해당합니다. 히브리어로 ‘폐하다’ 또는 ‘무효화하다’는 batel (בָּטֵל)은 율법을 없애는 파괴 행위로 간주되어,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나 이단 판결을 받는 중대한 죄로 여겨졌습니다. 바리새파를 비롯한 유대 종파들은 율법의 문자 뿐 아니라, 전통(masorah)과 해석(midrash)을 통해 그것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핵심은 ‘완전하게 하다’는 헬라어 plēroō입니다. 이는 단지 충만케 하다 혹은 마침표를 찍는 의미가 아니라, 히브리어 개념인 leqayyem (לְקַיֵּם)—즉 ‘세우다’, ‘지탱하다’, ‘실현하다’라는 풍성한 의미를 지닌 단어와 병렬됩니다. 랍비 문헌에서는 이 단어가 다음과 같이 사용됩니다:

• 미쉬나 마코트 3:16 — “율법을 완전케 하는 자는 그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자이다.”
• 탈무드 바바 메치아 30b — “율법을 ‘세운다’는 자는 그 정신까지 지키는 자다.”
• 메길라 14a — “선지자는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이해하게 하며 지탱하게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전통에 충실한 랍비로서, 율법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러 오신 것입니다. 곧 외적 준수에 머물러 있던 ‘할라카’(율법적 행위)의 형식을 넘어서, 내면의 정결함과 진정한 하나님 사랑으로 그 본뜻을 ‘채움’으로써 완성하십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외적 행위에 국한시키지 않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심으로써, 율법의 영적 차원을 드러내십니다. 이는 유대 전통에서도 발견되는 해석법으로, 하가다 문헌은 종종 마음의 의도(kavanah, כַּוָּנָה)를 행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결국, 예수님의 율법 완성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1. 해석적 완성 — 율법의 참된 의미를 밝히심 (drash)
2. 윤리적 완성 — 외적 행위를 넘어 내면의 성결을 요구하심 (kavanah)
3. 구속사적 완성 — 십자가를 통해 율법의 요구를 자신 안에서 성취하심 (telos)

예수님은 ‘율법을 없앤 자’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숨결과 생명을 회복시키신 하가다의 랍비, 토라의 완성자(מְשַׁלֵּם, meshallēm)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한다는 것은 율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며 ‘그분의 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렘 31:33)입니다.

바로 이 길이 율법의 완성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tzedakah)입니다.

4. 랍비 유대교의 할라카(Halakha, הֲלָכָה) 전통과 예수님의 내적 완전함 개념

누누히 언급한 바와 같이 할라카(Halakha, הֲלָכָה)는 단순한 법 규정이 아닌, ‘걸어가는 길’을 뜻하는 halakh (הָלַךְ)에서 유래한 삶 전체의 윤리적 방향입니다. 랍비 유대교에서 할라카는 율법의 세부 규정(mitzvot, מצוות)들을 일상에 적용하기 위한 상세한 실천 지침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주석과 해석, 구전과 문서화를 통해 미쉬나, 탈무드, 게마라로 이어지는 이 체계는 유대 공동체의 삶을 조직화하고 경건함을 구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체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문자적 적용, 외적 형식, 공동체 규율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그 결과 ‘마음의 진실함’과 ‘내면의 동기’라는 본래 율법의 생명력은 점차 희미해 졌습니다. 예수님의 공적 사역과 가르침은 바로 이 ‘외면적 할라카’의 기형성을 드러내고, ‘내면의 할라카’를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1) 히브리어 ‘완전함’의 신학적 의미

예수님이 요구하신 ‘완전함’(마 5:48)은 윤리적 완벽주의가 아니라, 구약 전체가 추구해온 ‘전인적 충만함’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다음의 히브리어 어휘를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Tamim (תָּמִים) – ‘흠 없는, 온전한, 완전한’:
창세기 17:1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온전하라(הֱיֵה תָמִים)”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율법을 외적으로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인격적 순종과 신뢰, 관계적 충실성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Shalem (שָׁלֵם) – ‘완성된, 평화로운, 조화된’:
이 단어는 샬롬(שָׁלוֹם)의 어근으로,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2) 외면의 할라카 vs 내면의 할라카

랍비 유대교의 외면 할라카와 예수님의 내면 할라카는 할라카의 본질과 실천 방향에서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우선, 중심 개념에서 랍비 유대교의 외면 할라카는 주로 행위와 형식, 그리고 규범의 엄격한 준수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율법의 조항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지를 상세하게 규정함으로써 공동체의 경건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내면 할라카는 마음과 존재, 그리고 내면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단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과 동기로 행하느냐가 하나님 앞에서 더욱 본질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핵심 목적 역시 차이를 보입니다. 랍비적 할라카의 목적은 주로 율법의 외적 준수를 통해 공동체 전체의 정결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유지되기 위한 경계선을 세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내면의 할라카는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 회복에 목적을 둡니다. 율법이 정결한 공동체를 위한 외적 울타리였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회개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참된 의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종교적 행위의 실천에서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랍비 유대교는 기도, 금식, 안식일 준수, 정결법 등 구체적인 실천 규례를 중심으로 경건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시각적으로 드러나며 공동체에서 신앙인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의 중심, 은밀한 중의 믿음, 그리고 긍휼과 사랑의 실천을 참된 종교 행위로 보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반복되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 하라”는 말씀은 외적 행위가 아닌 내면의 진실성을 중시하는 내면 할라카의 전형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대표 인물을 통해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눅 18:11–12)는 율법적 행위와 자신의 의를 과시하는 외적 경건의 전형입니다. 반면 세리의 기도(눅 18:13–14)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내면의 참된 회개로, 예수님은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갔다고 선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차이는 신학적 함의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이룹니다. 바리새적 할라카는 ‘보이는 의’를 통해 스스로의 의로움을 증명하려 했고, 율법 준수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 할라카는 ‘하나님 앞의 의’, 곧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구속 체험을 강조합니다. 진정한 의는 인간의 업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할라카의 근본 의도

이처럼, 외면의 할라카와 내면의 할라카는 단순히 실천의 방식만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 구원의 길,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접근 방식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은 본질을 회복하고 성취하려는 신적 선언이었습니다.예수님의 가르침은 미쉬나나 탈무드가 발전시키고자 했던 할라카의 근본 의도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회복하고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유대 문헌도 마음의 동기(kavanah, כַּוָּנָה)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미쉬나 브라코트 5:1 — “기도는 마음의 집중(kavanah)이 없으면 무효하다.”
• 탈무드 베라호트 31a — “하나님은 마음의 의도를 보시고 판단하신다.”

예수님은 이 전통의 흐름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유대 민중에게 보다 직접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적용하셨습니다.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얻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율법 중심 경건 생활이 도리어 참된 의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외면적 ‘껍데기’는 유지했지만, 그 중심인 ‘하나님의 뜻’에는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내면 할라카: 하나님 앞에서 걷는 삶

예수님은 내면의 할라카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윤리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 바리새적 외식의 탈피
• 마음의 정결함과 겸손
•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동기
• ‘율법을 완성’하려는 사랑과 극율의 실천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파괴가 아니라, 율법의 영(ruach)과 뜻(kavanah)을 회복하는 길이며, 샬렘의 상태로 인간을 인도하는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5. 내면과 외면의 할라카 대조

예수님은 세 가지 구체적인 주제를 통해 외면과 내면의 할라카를 선명히 대조하십니다.

1. 살인에 대한 계명 (출 20:13 vs 마 5:21–22)

고전적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출애굽기 20:13)는 명령을 통해 살인의 행위 자체를 금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지도 말라”(마태복음 5:21–22)고 말씀하시며, 내면의 분노와 증오조차도 살인의 뿌리로 간주하셨습니다. 전통 율법은 살인의 행위 자체를 금지하지만,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심판받는다”고 하십니다. 내면의 분노조차 살인의 씨앗으로 보신 것입니다.

2. 간음에 대한 계명 (출 20:14 vs 마 5:27–28)

전통적인 바리새적 율법은 행위로서의 간음을 금지했지만,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 5:28)고 하시며, 욕망의 시작점까지 윤리의 영역으로 확장시켰습니다. 행위 중심의 금지를 넘어서, 욕망의 출발점인 마음의 음욕까지 죄로 간주하십니다.

3. 맹세에 대한 규례 (민 30:2 vs 마 5:33–37)

고전 율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바리새인들도 이를 이용하여 맹세의 성격을 구분하곤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 5:34–37)고 하시며, 맹세 자체보다 진실한 삶과 말의 정직성을 요구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허용했으나, 예수님은 맹세가 아닌 진실한 삶 자체를 요구하십니다.

6. 예수님의 할라카: 완성의 윤리

예수님의 할라카는 폐지나 혁명이 아니라, 본래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고 인간의 마음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완성입니다. 이는 구약의 윤리적 전통, 예언자들의 메시지, 그리고 랍비 문헌에 담긴 이상적 할라카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미쉬나 마코트 3:16: “율법을 완전케 하는 자는 그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자이다.”
• 탈무드 바바 메치아 30b: “율법을 세우는 자는 그 정신까지 지키는 자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정신을 현실의 삶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자의 외적 순결함을 보여주지만, 세리의 기도는 율법의 정신을 구현한 자의 통회하는 심령을 상징합니다.

7. 율법의 완성: 사랑과 겸손으로 드러나는 의로움

예수님의 윤리는 할라카의 궁극적 목적,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 22:37–40)에 이르게 합니다. 이는 단지 외적 규율의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서는 자의 내적 변화와 삶의 열매를 요구합니다. 결국, 바리새인의 기도는 법적으로는 맞았으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실패하였고, 세리는 죄인으로 정죄 받았으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공동체의 인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세리의 기도는 사람의 정죄를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외면적 율법의 완전함보다, 하나님의 눈앞에 선 진실한 존재로의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진정한 신앙은 얼마나 많은 계명을 지켰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가다적 선포와 내적 할라카의 재정의>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아가다적 장면은 구약 율법이 규정한 외적 계명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이 마음의 상태—곧 내면의 할라카—로 확장되어야 함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윤리 선언입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는 구약의 율법이 정한 규정을 넘어서는 마음의 법(내면의 법)까지 어떻게 확장되어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산상수훈은 단순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의 본래 의도를 회복하고 청중의 심령에 내면의 전환을 촉구하는 하가다적 메시지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단순한 윤리 교훈이 아니라, 그분이 율법의 본래적 의도를 밝히시며 청중의 내면에 호소하는 하가다적 선포이자 내적 할라카의 재정의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 청중은 이 말씀을 단지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랍비 문학에서 익숙했던 “계명의 심화와 적용(פרשנות)”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1. 하가다의 화법과 예수님(speaker)의 말씀: 랍비 유대교 청중(audience)에게 익숙했던 메시지, 서구 교회가 낯설게 만든 구조

예수님의 시대, 유대 사회는 문자 율법(Ktav, כְּתָב)과 구전 율법(Torah she-be’al peh, תּוֹרָה שֶׁבְּעַל־פֶּה)이 공존하는 율법 해석의 다층적 문화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내면적 의미를 파고들어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를 하가다(Aggadah)나 미드라쉬(Midrash)의 형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지 ‘무엇을 하라’가 아니라,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카바나(כוונה, 마음의 의도)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예컨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ἐγὼ δὲ λέγω ὑμῖν; 마 5:22, 28 등)는 전혀 생소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오히려 당대 랍비들이 자주 사용하던 전형적인 하가다적 해석 구조로, 모세율법의 겉모양을 넘어 그 본래의 뜻을 풀어주는 해석자적 권위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피커로서 당대 청중에게 말씀하실 때, 단순히 새로운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익숙하게 듣고,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랍비적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전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본질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자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청중은 이 구조를 익히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해석 방식은 귀에 익숙했으며, 오히려 그 급진성과 본질적 초점 때문에 놀라워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뒤에 숨은 분노의 본질을,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 뒤에 도사린 탐욕의 시선을, 예수님은 내면의 윤리로 끌어올려 새로운 할라카(삶의 길)를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해석이 이후 서구 교회에 의해 급격히 낯설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에 접촉한 교회는 헬라 철학의 이분법적 이성과 스토아적 윤리 체계로 복음의 내용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랍비적 화법은 점차 우화나 비유, 철학적 논증으로 변형되었고, 원래 청중에게는 명확하게 들렸던 예수님의 말씀이 이방 세계에서는 해석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서구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들으려 하기보다는, 기존의 해석 체계에 맞춰 각색해 왔고, 그 결과 예수님의 유대적 맥락은 점차 지워지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복음의 핵심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해석은 랍비 문헌과의 대화 없이, 문자주의나 교리 중심으로 좁아진 신학 틀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새로운 철학자나 랍비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유대적 맥락 속에서 예언자이며 해석자였던 예수님, 그리고 그의 청중이 누구였으며 어떤 언어와 문화 안에서 말씀하셨는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1차 당시 유대인과 같은 청중의 귀로 듣는다면, 그 음성을 오늘 우리 청중에게도 본래의 의미로 다시 들려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유대 청중의 귀로 들어 보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부였기에 무지하고 배우지 못한 자들이었다는 설교를 종종 듣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유대 교육의 실상을 오해한 전형적인 예입니다. 갈릴리 지역은 오히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활발한 할라카 교육이 이루어진 곳 중 하나였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역과는 달리, 갈릴리 지역은 토라 교육에 대한 높은 열의와 공동체적 참여가 강하게 뿌리내린 지역이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나사렛 회당, 가버나움 회당, 마그달라(Magdala)의 비문과 유물들, 그리고 토라 저장 공간의 구조는 이 지역이 단순한 시골이 아니라 로마 제국 시대 유대인 교육의 중심지 중 하나였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탈무드(예: 바빌로니아 탈무드, 슈밧 16a 등)에서도 갈릴리 사람들의 율법적 열정과 토라 지식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지역 출신의 많은 랍비들이 미쉬나 편찬에도 기여한 것을 볼 때, 당시 갈릴리의 교육 수준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고상하고 난해한 이론이 아니라, 당시 청중들이—특히 갈릴리의 제자들과 군중들이—귀로 듣고 마음으로 새길 수 있도록 구성된 하가다적 선포였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언어로, 삶의 맥락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번 들었음에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기억하여, 훗날 우리에게 사복음서의 형태로 전해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부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지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랍비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토라 교육을 받은 이들이 일정 나이가 되면 생업을 병행하며 율법의 실천자로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은 율법을 배우고 익힌 뒤, 당시 유대 문화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인 ‘노동하며 토라를 행하는 삶’(Avot 2:2)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 율법 교육 시스템: Beth Sefer에서 Beth Midrash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지 종교적 메시지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 청중의 교육 배경과 율법 감수성 위에 전해진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체계적인 율법 교육 과정을 통해 성경의 문자, 율법의 내용,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 율법 교육 시스템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베이트 세페르 (Beth Sefer, בֵּית סֵפֶר, “책의 집”)

유대 남자아이는 일반적으로 5세 무렵부터 베이트 세페르, 즉 마을 회당이나 랍비가 운영하는 기초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토라(모세오경)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고 암송하며, 글자를 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 단계의 핵심은 ‘기억을 통한 교육’으로, 문자 텍스트를 통째로 암기하고 반복 낭독하며 율법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2. 베이트 탈무드 (Beth Talmud, בֵּית תַּלְמוּד, “공부의 집”)

7세에서 12세 무렵, 보다 진지한 학생들은 베이트 탈무드로 진학하여 토라 외에도 예언서(Nevi’im)와 성문서(Ketuvim), 그리고 구전 율법(토라 셰벨페, תּוֹרָה שֶׁבְּעַל־פֶּה)을 학습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문자 율법에 대한 해석과 적용, 랍비들의 전통적 설명, 미드라시 형식의 주해를 배우며, 질문과 답변, 논쟁을 통한 학습법 (pilpul, פלפול)이 발달합니다. 학생들은 여기서 논리적 사고와 율법적 추론을 익히며, 더 깊은 신앙적 사고로 나아갑니다.

3. 베이트 미드라쉬 (Beth Midrash, בֵּית מִדְרָשׁ, “해석과 연구의 집”)

탁월한 자질을 보인 일부 청년들은 이후 베이트 미드라쉬로 진입해 성인 율법학교에서 탈무드, 미쉬나, 게마라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합니다. 이들은 스승 랍비를 따라다니며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제자도(talmid)를 수행하며, 점차 랍비가 되기 위한 길을 걷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율법을 삶 속에서 적용하고 토론을 통해 공동체적 해석을 이루는 장이었습니다.
왜 이 교육 구조가 중요한가?

예수님의 청중, 특히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그리고 갈릴리 회당에 모인 평신도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교육 시스템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문자적 숙달과 해석 전통에 익숙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너희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단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기존 할라카의 심화와 내면화, 즉 랍비 교육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던 아가다적 재해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 감수성은 오늘날 독자에게 낯설 수 있으나, 당시 유대인의 입장에 서서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해석자의 언어이자, 선지자적 선포였습니다.

4. “살인하지 말라” vs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유대 율법 (출애굽기 20:13):
לֹא תִּרְצָח (Lo tirtzach) – “You shall not murder”
이 구절은 명백히 육체적 살인을 금지합니다.

랍비 유대교 문헌

• 탈무드, 바빌로니안 탈무드 산헤드린 107a: “분노는 마음속의 살인이다.”
• 미쉬나, 아보트 2:10: “화를 내는 자는 결국 죄를 범할 것이다.”

랍비들도 이미 “분노”라는 감정이 살인의 씨앗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외적 행위인 ‘살인’의 금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의 분노와 모욕감정까지 율법의 심판 범주에 포함시키십니다. 이는 단순한 율법 강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존재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윤리로 전환시키는 하가다적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내면 할라카

예수님은 외적 행위인 ‘살인’의 금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의 분노와 모욕감정까지 율법의 심판 범주에 포함시키십니다. 이는 단순한 율법 강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존재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윤리로 전환시키는 하가다적 선언입니다. 이는 당시 청중에게는 충격이 아닌 익숙하면서도 도전적인 하가다적 강화로 읽혀졌고 들려졌을 것입니다.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 – 이 말씀은 단순한 비난 이상의, 인격에 대한 경멸이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5. “간음하지 말라” vs “음욕을 품은 자도 이미 간음하였다”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 5:27–28)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

유대 율법 (출애굽기 20:14):
לֹא תִּנְאָף (Lo tin’af) –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이 율법은 주로 기혼자 간의 성적 불륜을 의미합니다.

랍비 유대교 문헌

• 탈무드, 바밧라 바트라 164b: “눈은 죄의 시작이다.”
• 탈무드, 베라코트 61a: “두 눈은 마음의 창이다. 의로운 사람은 눈을 낮추고, 음탕한 자는 눈을 치켜든다.”

랍비들도 시선과 마음의 욕망이 죄로 향하는 문임을 경계했습니다.

예수님의 내면 할라카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기준을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그 동기와 욕망의 시점까지 끌어올립니다. 내면의 정결이야말로 참된 경건의 출발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방적 내면 윤리”로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6. 외면적 계명 vs 내면의 동기: 예수님의 내면 할라카와 전통적 외면 율법의 비교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단순히 외적인 계명 이행을 넘어, 마음의 동기와 내면의 윤리를 중심에 둡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고대 할라카의 문자적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참된 뜻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심화됩니다. 대표적인 네 가지 항목을 통해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살인 금지

전통적인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는 외적 행위를 금하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 속 분노와 모욕의 감정도 살인의 뿌리”로 보시며, 인간 내면의 감정과 태도까지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마 5:21–22).

2. 간음 금지

고전 율법은 실제적인 간음 행위 자체를 금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욕망의 시선조차 간음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시며, 욕망의 출발점인 마음의 시선과 의도까지도 윤리적 평가의 대상으로 삼으십니다 (마 5:27–28).

3. 맹세에 대한 교훈

전통 율법은 거짓 맹세를 금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행위에 신성함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맹세 자체를 피하고 진실한 말로 살아가라”고 하시며, 맹세의 필요가 없는 정직한 삶을 강조하십니다 (마 5:33–37).

4. 복수와 보복의 문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고대 율법은 정의로운 형벌의 원칙을 세웠지만, 예수님은 “악을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며, 정의를 넘어선 자비와 용서의 윤리를 내면적 할라카로 제시하십니다 (마 5:38–48).

이처럼 예수님의 내면 할라카는 단순한 법률적 규범을 넘어서, 인간의 존재와 마음을 재창조하는 윤리적 초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외적인 규범의 준수에 있지 않고, 존재 자체의 회복과 공동체적 사랑의 삶에 있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조문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그 본래적 의도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성품으로 재정의하십니다. 이는 단지 윤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내면을 회복하는 회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율법 이해는 내면의 할라카 (Halakha ha-Penimit)입니다.

이제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시점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주제까지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율법 폐기가 아닌 성취 (leqayyem, לְקַיֵּם)
2. 할라카의 외면과 내면을 함께 성취
3. 청중의 이해와 율법적 감수성에 맞춘 랍비적 교훈 방식
4.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외적 규범만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까지 거룩해야 함

5. 서구 교회 해석 전통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구 교회는 초기 교부 시대부터 헬라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예수님의 유대적 배경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율법은 유대주의적 율법주의로 왜곡되었고, 은혜는 비역사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흘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이런 구조는 온전히 치유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많은 해석은 랍비 문헌과의 대화 없이 ‘기독론’ 또는 ‘구원론’ 중심의 구조 속에 갇혀 있습니다.

6. 예수님의 내면 할라카와 오늘의 교회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지 새로운 신학 이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1세기 유대 청중의 귀로 듣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랍비적이며 예언자적이었고, 내면을 향한 회개의 초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초대는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아가다 — 윤리와 마음의 훈련>

산상수훈과 미쉬나 아보트에 나타난 내면 윤리의 조명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단지 법적인 교훈이나 외적 행위의 규범을 넘어선, 마음의 동기와 의도를 겨냥한 깊은 내면 윤리를 접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랍비 문헌 안에서 발견되는 아가다 문학의 중심 사상과도 깊은 접점을 가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라는 선언은 단지 도덕적 순결이 아닌, 하나님과의 직접적 대면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훈련’을 요구합니다.

1. 아가다의 중심: 마음 중심 윤리

랍비적 지혜문학에서 중요한 가르침은 ‘마음’(lev, לֵב)의 순전함입니다. 이 개념은 단지 감정의 중심이 아니라, 의지와 결정, 신앙의 좌소(座所)를 의미합니다. 미쉬나 아보트(Pirkei Avot) 1:2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שִׁמְעוֹן הַצַּדִּיק הָיָה מִשְּׁיָרֵי כְּנֶסֶת הַגְּדוֹלָה. הוּא הָיָה אוֹמֵר: עַל שְׁלֹשָׁה דְבָרִים הָעוֹלָם עוֹמֵד: עַל הַתּוֹרָה, וְעַל הָעֲבוֹדָה, וְעַל גְּמִילוּת חֲסָדִים.”
“시몬 의인은 큰 회중의 마지막 사람들이었는데, 그는 말하기를 ‘세 가지로 세상이 유지된다. 토라와, 제사와, 자비로운 행동(헷세드)’이라 하였다.”

이 구절은 단지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자비(chesed, חֶסֶד)를 실천하는 것을 삶의 기초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태도—특히 자비, 온유, 평화, 순결—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보트 2:1에서도 비슷한 메시지가 발견됩니다:
“הֱוֵי זָהִיר בְּמִצְוָה קַלָּה כְּבַחֲמוּרָה… וֶהֱוֵי מְחַשֵּׁב הֶפְסֵד מִצְוָה כְּנֶגֶד שְׂכָרָהּ…”
“가벼운 계명일지라도 중한 계명처럼 조심하라… 계명의 손해보다 보상의 가치를 헤아려라.”

이 가르침은 외적 무게보다 마음의 태도를 중시합니다. 이는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 “작은 계명이라도 지키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 (마 5:19)고 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합니다.

2. 예수님의 마음 윤리와 하가다적 패턴

예수님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의를 넘어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마 6:4, 6, 18)을 강조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 상태와 순결을 요구하는 랍비 문헌의 중심 주제와 동일한 흐름 속에 있습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아가다 문학의 도덕적 방향성과 구조적으로 유사합니다:

“누구든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이는 탈무드 예루살렘(Yerushalmi Terumot 1:4)의 가르침과 상응한다:
“הרהור עבירה קשה מעבירה”
“죄악을 품은 생각이 실제 죄보다 더 무겁다.”

이러한 윤리적 내면성은 인간의 행동을 넘어서 마음과 의지의 방향까지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다고 보는 하가다적 사고방식의 특징입니다.

3. 아가다로서의 산상수훈: 내면의 윤리와 영성 훈련의 길

예수님의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은 단순한 도덕 규범이나 율법 강화의 선언이 아닙니다. 이는 유대 아가다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하가다적 선포로서, 외적 행위의 규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내면, 곧 마음과 동기, 영적 태도를 훈련하는 초대입니다.

랍비 유대교에서 아가다(Aggadah)는 미쉬나나 게마라에서 다루는 구체적 법률(Halakha)과는 구별되며, 인간의 마음과 성품, 공동체 윤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와 격언, 잠언, 상징, 비유 등을 통해 전달하는 형식입니다. 바벨론 탈무드(Shabbat 63a)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라카는 길을 보여주고, 아가다는 그 길을 걷게 만든다.”

즉, 아가다는 단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실존적 내면 형성의 도구였으며,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바로 그 정점에 서 있습니다.

① 구체적 실례: 원수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5:43–44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은 단순한 감정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랍비 유대교에서도 “이웃 사랑”은 토라의 핵심이었으며(레위기 19:18), 아보트 1:12에서는 “분노를 늦추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원수 사랑은 급진적인 확장입니다. 이는 아가다 전통에서 가능한 ‘윤리의 재정의’로, 율법의 정신을 심화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단지 새로운 계명을 추가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음’(Imitatio Dei)을 삶의 윤리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려 함이라”(마 5:45)는 말씀은 율법적 완전함보다 더 깊은 존재의 닮음을 추구합니다.

② 랍비 유대교의 내면 윤리 전통과 연결

랍비 유대교도 단지 규범만을 강조한 전통은 아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랍비 문헌의 예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 미쉬나, 아보트 4:1: “지혜로운 자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자다. 강한 자는 누구인가? 자신을 이기는 자다.”
• 탈무드, 소타 5b: “진정한 겸손은 율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 바빌로니안 탈무드, 베라코트 61a: “악한 충동을 이긴 자는 참된 의인이다.”

이처럼 내면의 동기와 자제력, 겸손, 인내는 이미 유대 랍비 전통 속에서도 높이 평가되던 영적 자질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이를 하가다 형식으로 재정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율법적 이행을 넘어,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적 윤리로 초청하십니다.

③ 우리에게 주는 실천적 의미: 마음의 방향 훈련

오늘날 산상수훈은 단지 성경 공부의 한 본문이 아니라, 일상의 영적 수련서로 읽혀야 합니다.

• “화를 참는 자는 살인을 멀리하는 자” – 예수님의 분노 경계는 내면의 폭력을 줄이는 실천입니다. 가정, 교회, 사회 안에서 분노의 언어를 줄이고, 축복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 산상수훈의 적용입니다.
• “욕망의 시선을 제어하는 자는 순결을 지킨 자” – 시선의 훈련, 미디어 절제, 시각적 자극에 대한 자기 제어는 오늘날 성적 윤리의 핵심입니다.
• “맹세가 필요 없는 정직함” – 계약서와 법률로 무장된 세상에서, 한 마디 말이 곧 신뢰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하가다적 이상입니다.
• “적에게까지 평안을 전하는 자” – SNS나 분열적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심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훈련은 외적 성취가 아닌 내면의 성숙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곧 하가다의 목적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부르심입니다.

산상수훈, 내면 할라카의 정수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랍비 유대교의 아가다 전통을 계승하고, 하가다의 방식으로 청중의 내면을 향해 말씀하신 선언입니다. 이는 단지 유대 율법의 강화가 아니라, 율법의 본래적 목적—곧 하나님 형상 회복과 공동체적 사랑의 실천—을 향해 나아가는 내면의 길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이들은 단지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산 위에서 들려주신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내는 자들입니다.

4. 미쉬나 아보트와의 비교: 유대 윤리의 내면 지향성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갑작스럽거나 혁명적인 것이 아닙니다. 랍비 유대교 전통에도 내면의 마음과 의도를 중요시한 윤리 가르침이 존재했습니다. 특히 미쉬나 아보트(Mishnah Avot)는 유대 윤리의 정수로 불립니다.

예:
“세 가지가 세상을 지탱한다. 토라, 아보다(예배), 그리고 하세드(인애)”
(M. Avot 1:2)
“어떤 계명도 경홀히 여기지 말고, 어떤 사람도 멸시하지 말라. 회개의 날을 미루지 말라.”
(M. Avot 2:1)

이런 가르침들은 삶과 마음의 훈련을 중시한 점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접점을 가집니다. 하지만, 아보트가 율법 아래의 윤리 훈련에 머물렀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하늘의 나라를 향한 내면의 변화를 지향합니다.

즉, 미쉬나의 윤리는 경건과 지혜의 삶을 강조하는 반면, 예수님의 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새 마음의 형성을 지향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쉬나의 윤리는 공동체 질서 안에서의 자기 절제에 더 가깝다면, 예수의 윤리는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재현하는 존재적 윤리입니다.

6. 아가다의 전환: 외면의 교훈에서 내면의 형성으로

예수님의 아가다는 고전적인 랍비 아가다(Aggadah)의 전통과 구조를 따르되, 그 안에서 중요한 전환과 심화를 이룹니다. 이 전환은 단순히 형식의 차이를 넘어서, 아가다가 지향하는 목적, 접근 방식, 율법과의 관계, 그리고 청중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 뚜렷한 변화를 보여줍니다.

첫째, 고전적 아가다의 목적은 주로 교훈의 전달과 일상 적용에 있었습니다. 탈무드와 미드라쉬에 수록된 아가다들은 설화, 일화, 격언 등을 통해 율법의 정신을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교육적 도구였으며, 실천적 도덕성을 함양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아가다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의 목표를 지녔습니다. 단지 실천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와 존재 자체의 회복을 추구합니다. 이는 바리새적 외면 윤리에 대한 내면 윤리의 회복 요청으로 연결됩니다.

둘째, 접근 방식의 차이도 분명합니다. 고전 아가다는 삶의 사례, 지혜의 격언, 혹은 우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은 내면 윤리에 대한 직접적 도전을 던지며, 청중의 심장 중심을 겨냥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자라”는 말씀(마 5:21–22)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셋째, 율법(Halakhah)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구조적 전환이 일어납니다. 고전적 아가다는 율법을 보완하거나 설명하며, 실천적 지침의 주석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아가다는 율법을 단지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밝히고 성취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오히려 완전케 하려 함이라”(마 5:17)는 선언은 아가다의 기능 자체를 율법의 심화와 완성으로 이끕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아가다의 변화는 청중에게 미치는 영향에서도 큰 전환을 가져옵니다. 고전 아가다는 주로 지식과 실천의 증가를 유도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아가다는 청중의 삶 전체, 곧 존재와 공동체의 재형성을 목표로 삼습니다. 이는 테슈바(회개)의 길, 하나님 나라의 가치, 공동체 회복의 윤리로 이어지며,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는 성경적 비전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구조적 전환은 단지 유대 문학의 한 갈래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아가다는 곧 복음 자체의 구조이며, 청중을 회개로 부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도록 변화시키는 신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아가다는 단지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이 아닙니다. 그것은 청중의 양심과 마음을 흔드는 윤리적 메타포, 다시 말해 내면의 ‘할라카’를 요청하는 선포였습니다.

7. 마음의 훈련과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한 교훈이 아닌, 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존재로 재구성하기 위한 ‘마음의 훈련’입니다. 이는 단지 도덕적 수양이 아니라, 하늘의 질서를 땅에서 구현하려는 신적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라고 하십니다. 이는 삶의 불완전함 속에서 하나님의 의(tsedaqah, צְדָקָה)를 사모하는 마음 상태를 복이라 선언한 것입니다. 단순한 공의 실현이 아닌, 하나님의 정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영혼의 갈망을 복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가다 문학의 신학과 통합니다. 예컨대, 탈무드 바바 메치아 30b는 말합니다:
“מי שרוצה להיות חסיד יקיים דברי אבות”
“경건해지기를 원하는 자는 아보트(격언들)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이 ‘경건’(chasidut, חֲסִידוּת)은 외적인 경건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제시하신 삶의 방향성은 바로 이 ‘마음의 길’이며, 아가다 문학의 윤리와 하나로 흐릅니다.

8. 왜 마음의 훈련인가?

오늘날 많은 제자훈련이 외면의 실천과 순종에 머무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아가다는 “너희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랍비 유대교는 마음과 삶이 일치되는 것을 ‘샬롬’(שָׁלוֹם)의 이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나아가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를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자로 선언하십니다 (마 5:3, 8).

예수님의 아가다는 제자의 외형을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내면을 새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윤리적 선포가 단지 지혜자의 조언을 넘어 하늘의 권세를 가진 메시아의 선언인 이유입니다.

<아가다에서 마음(lev, לב)의 자리>

랍비 유대교에서 아가다(אגדה)는 할라카(הלכה)와 나란히 존재하는 이야기, 비유, 윤리적 교훈의 체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아가다는 이 전통적 아가다의 범위를 넘어, ‘마음의 내면’을 다루는 윤리적 훈련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 청중의 마음을 꿰뚫고 훈련시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나 율법적 규정이 아닌, 존재의 중심—‘마음’(lev, לב)을 다루는 하가다의 실천 윤리로 기능합니다.

1. 산상수훈에서 나타나는 아가다적 교훈: 윤리에서 마음의 훈련으로

예수님의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은 전통적인 유대 율법의 조항들을 인용하면서도, 그 외면적 실천을 넘어선 마음의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보다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마 5:21–22)는 내면적 감정 조절로 확장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마 5:27–28)고 선언함으로써 율법의 외형을 넘어 마음의 욕망 자체를 정화하는 차원으로 진입합니다.

이러한 예수의 아가다적 가르침은 랍비 문헌에 나오는 교훈과 겉보기에는 유사하나, 그 깊이는 다릅니다.

2. 미쉬나 아보트(Pirkei Avot)의 윤리와 예수의 심화

미쉬나 아보트는 유대 윤리 문헌의 정수로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있습니다:

• “세상은 세 가지로 존재한다: 토라, 예배, 자선(גמילות חסדים)” (아보트 1:2)
• “아름다움은 율법을 배워 실천하는 사람의 것” (아보트 2:1)

여기서 강조되는 덕목은 외적 실천에 머무르지 않고 내적 인격의 수련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윤리는 더 직접적으로 “심판 이전의 마음의 반응”을 다룹니다. 즉, 내면의 감정과 의도가 이미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마 5:28).

3. 왜 ‘마음의 훈련’이 중요한가? – 제자도와 영혼의 근본 변화

현대 기독교에서는 “삶의 제자도”를 강조하지만, 삶의 실천은 내면의 동기, 즉 마음의 훈련에서 비롯됩니다. 히브리어 lev (לב)는 단순한 감정 기관이 아니라, 의지와 도덕적 판단의 중심이다. 잠언 4:23은 말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מִכָּל־מִשְׁמָר נְצֹר לִבֶּךָ כִּי־מִמֶּנּוּ תּוֹצְאוֹת חַיִּים)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청중에게 이 ‘lev’의 훈련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문화와 언어, 율법의 흐름 속에서 외적 율법보다 내면의 태도가 하나님의 기준임을 재정의하십니다.

• 예수님의 아가다 vs 유대 아가다: 핵심 차이점 비교:

유대 아가다와 예수님의 아가다 비교: 공동체 규범에서 내면 변화로
유대 전통에서 아가다(Aggadah)는 공동체의 삶과 윤리를 유지하기 위한 이야기적 해석과 교훈의 장르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아가다는 인간 존재의 내면 변화와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삶을 위한 도전과 초청의 이야기였습니다.

1. 중심 관심의 차이

유대 아가다는 역사와 공동체 규범, 그리고 전통 윤리를 강조합니다. 이는 공동체의 질서와 정체성 유지에 핵심 역할을 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아가다는 개인의 내면과 마음의 상태, 그리고 존재의 갱신에 더 깊은 관심을 둡니다. 회개와 믿음, 사랑과 용서 같은 개인 내면의 윤리적 훈련이 강조됩니다.

2. 문헌의 예시

유대 아가다는 《미쉬나 아보트(Pirkei Avot)》나 탈무드의 일화들처럼, 랍비들의 말과 사례를 통해 외적 행위와 규범적 판단을 중심으로 합니다. 예수님의 아가다는 산상수훈(Matthew 5–7), 그리고 돌아온 탕자,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비유에서 드러나며, 회개와 존재의 변화를 이야기 중심으로 선포합니다.

3. 목표의 차이

유대 아가다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동체 전통과 율법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아가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 즉 내면적 회복과 영적 재형성을 목표로 삼습니다.

4. 훈련 방향

유대 아가다는 외적 행위(마쉐, מעשה)에 무게를 두고, 율법적 순종을 강조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내면의 동기와 마음의 순결을 훈련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외적 의무를 넘어선 존재적 전환의 요청입니다.

이처럼 유대 아가다와 예수님의 아가다는 공히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하지만, 목적과 강조점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유대 아가다가 공동체 질서와 외적 규범의 계승에 중심을 두었다면, 예수님의 아가다는 마음과 존재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새 사람의 형성을 위한 영적 이야기의 혁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말씀으로 훈련되는 내면의 제자

예수님의 하가다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내면을 조각하는 하나님의 도끼’와 같습니다. 제자도는 지식의 암기나 외적 실천을 넘어서, 심령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아가다적 가르침을 통해, 점점 더 마음의 순결, 사랑, 자비,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의지로 다듬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유대 윤리의 변형이 아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훈련하는 길이며, 그 핵심은 마음의 깊은 자리로부터의 변화입니다.

<산상수훈과 하가다적 윤리의 회복>

윤리의 중심에서 마음의 중심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지 외적인 율법 실천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와 마음의 훈련을 강조합니다. 이 점에서 그분의 아가다는 고전적 랍비 아가다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보다 심화된 내면 윤리를 제시합니다. 본 글은 산상수훈(Matthew 5–7)을 중심으로 예수의 윤리적 하가다를 조명하며, 미쉬나 문헌과의 비교를 통해 예수님의 유대적 뿌리를 회복합니다.

1. 산상수훈과 아가다적 교훈: 내면의 율법을 향하여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מִצְוַת לֹא תִרְצָח, 출 20:13)라는 계명을 넘어, 마음속의 분노까지도 죄로 규정하십니다 (마 5:21–22). 이는 하가다 문학에서 나타나는 내면의 태도 강조와 통합니다:

“힐렐은 말하였다: ‘화를 자주 내지 말고, 쉬운 사람이어야 한다. 겸손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라.’” (Pirkei Avot 1:12)

예수께서는 비유적 표현을 통해 교훈을 전하셨고, 이는 전통적인 하가다적 방식—즉 이야기와 우화를 통해 도덕적 진리를 가르치는 방식과 일치합니다.

예: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마 5:22)
헬라어 원어: “Ῥακά” (raka), 아람어 경멸 표현.
주석: 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타인의 인간 존엄을 파괴하는 언어폭력을 지칭합니다.

2. 랍비 아가다의 내면 윤리와 미쉬나 아보트

Mishnah Avot (אבות), 곧 ‘조상들의 말’은 윤리의 핵심을 마음과 동기의 순수성에 둡니다.
“שִׁמְעוֹן הַצַּדִּיק הָיָה מִשְּׁיָרֵי כְנֶסֶת הַגְּדוֹלָה. הוּא הָיָה אוֹמֵר: עַל שְׁלוֹשָׁה דְבָרִים הָעוֹלָם עוֹמֵד: עַל הַתּוֹרָה, וְעַל הָעֲבוֹדָה, וְעַל גְּמִילוּת חֲסָדִים.”
“시몬 의인은 말하였다: 세 가지가 세상을 지탱한다. 토라, 제의(아보다), 자비의 실천(게밀룻 하사딤).” (Avot 1:2)

예수님은 이러한 정신을 충실히 반영하십니다. 단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ἔλεος, חֶסֶד)을 통해 법의 근본 목적을 실현하셨습니다.

3. 예수님의 윤리와 ‘완전함’(תָּמִים, τέλειος)의 의미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헬라어: “τέλειοι ἔσεσθε” (teleioi esesthe) – 성숙하고 완성된 존재.
히브리어 대응어: תָּמִים (tamim) – 창 17:1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랍비 전통에서 ‘완전함’은 결백함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온전하게 걷는 존재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종말론적 제자도의 표준이자 마음의 훈련을 통한 윤리적 성숙을 요청하는 말씀입니다.

4. 헬라 철학적 해석 vs 랍비 유대교적 해석

내면 윤리에 대한 세 가지 해석 전통—헬라적 해석, 랍비 유대교적 해석, 메시아닉 유대교 해석—과 율법 이해에 대한 비교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1. 율법의 기능 이해

• 헬라적 해석 (Origen, Augustine 등)

헬라적 전통에서는 율법을 인간의 죄와 무능을 드러내는 기준으로 이해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해석합니다. 이 관점은 특히 로마서의 바울 서신을 바탕으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나 구원은 오직 은혜로 가능하다는 구조 속에서 기능합니다.

• 랍비 유대교적 해석 (David Flusser, Jacob Neusner 등)

랍비 유대교는 율법을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로 이해합니다. 율법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삶 전체를 덮는 하나님의 규범이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 삶의 표현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제한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 메시아닉 유대 해석 (Daniel Juster, David Stern 등)

메시아닉 전통에서는 율법이 예슈아 안에서 성취되었으나 결코 폐기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율법은 성령과 복음 안에서 영적 의미로 완성되며, 공동체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지침으로 계속 유효합니다. 이는 율법의 영적 내면화와 실천을 강조하는 방향입니다.

2. 완전함의 개념 (Tamim, τελειότης, Kedusha)

• 헬라적 해석은 영혼의 정결과 철학적 절제를 통해 완전함을 추구합니다. 이는 플라톤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 물질보다는 이데아와 내면의 순결을 강조하며, 성화는 철학적 성찰과 고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 랍비 유대교는 내면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 즉 תמים (Tamim, 완전하고 온전한 삶)을 이상으로 삼습니다. 외적 행위와 내면의 정결이 하나님의 뜻에 조화를 이루는 삶이 참된 완전함입니다.
• 메시아닉 유대 전통은 마음의 갱신(히브리어 חידוש)과 공동체의 거룩함(קדושה)을 통해 완전함에 이른다고 봅니다. 이는 성령을 통한 내면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동체적 윤리 실천을 함께 포함합니다.

3. 마음의 윤리에 대한 이해

• 헬라적 해석은 이성과 감정의 절제를 중심으로 한 윤리를 강조합니다. 이는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아, 감정 통제와 자아 수양을 통한 고귀한 인간상 형성을 추구합니다.
• 랍비 유대교는 마음의 경건함(יראת שמים)과 이웃 사랑(אהבת רע)을 율법 실천의 중심으로 둡니다. 마음의 태도가 율법 준수의 동기가 되어야 하며, 내면의 훈련이 외적 계명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 메시아닉 유대교는 성령을 통한 내면의 변화와 은혜에 기초한 실천 윤리를 강조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일어나며, 이는 삶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순종과 공동체 섬김으로 연결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 전통은 모두 율법과 윤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만, 그 기능과 목적, 실천 방식에 있어 다음과 같은 구조적 차이를 보여줍니다.

1. 헬라적 해석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 예를 들어 오리겐이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율법의 주된 목적을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기능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무능을 깨닫게 되며, 이러한 자각은 영혼의 정화와 철학적 절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윤리의 중심은 이성과 감정의 절제, 즉 플라톤적 금욕주의와 내면 통제에 있습니다.

2. 랍비 유대교적 해석(예: David Flusser, Jacob Neusner)

랍비 전통은 율법을 하나님의 인도와 삶의 규범으로 이해하며, 단순한 명령이 아닌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봅니다. 완전함은 외적 행위와 내면의 일치(tamim, 온전함)을 통해 실현되며, 윤리적 삶의 중심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는 미쉬나와 탈무드, 그리고 하스카파 운동 이후의 유대 철학에도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3. 메시아닉 유대 해석(예: Daniel Juster, David Stern)

메시아닉 유대교는 예수 메시아(예슈아) 안에서 율법이 성취되었지만 폐기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율법은 여전히 공동체와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그 실현은 성령에 의한 마음의 갱신과 공동체의 거룩함으로 나타납니다. 윤리의 중심은 내면의 변화와 삶의 실천, 즉 은혜로 시작된 변화가 사랑과 순종의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비교는 예수님의 윤리와 율법 해석이 단순히 어느 한 전통에 속하지 않고, 헬라적 영성·랍비적 실천·메시아닉 성취를 복합적으로 통합하고 계승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됨을 보여줍니다.

이 비교를 통해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그분의 내면 윤리적 가르침이 랍비 전통과 어떻게 연속성과 혁신성을 동시에 가지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주해와 신학적 성찰

• 예수님의 윤리는 단지 규칙을 넘어, 존재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 랍비 유대교의 아가다는 윤리적 삶의 내면화로 향하는 통로이며, 예수는 이를 더 급진적으로 실현하셨습니다.
• 히브리어 단어인 ‘레바브’ (לֵבָב, 마음)는 율법의 중심이며,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말씀(마 15:18)은 전적으로 유대적입니다.

5. 마음의 훈련이 윤리의 훈련이다

예수님의 아가다는 단지 새로운 종교적 이야기 이상입니다. 그것은 아보트의 말처럼 “토라와 자비의 실천 위에 세상이 선다”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음은 단순한 감정의 중심이 아니라, 신학적-윤리적 결단의 중심이며, 산상수훈은 마음의 혁명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성산 선언문입니다.

<하가다적 교훈의 중심 이동과 내면 윤리의 회복>

1. 하가다의 정의와 고대 유대 교육에서의 역할

하가다(Haggadah, הַגָּדָה)는 율법(할라카)과 달리, 인간의 마음을 깨우고 감정을 동반한 윤리적 감수성을 전달하는 이야기, 격언, 우화, 역사적 일화, 해석적 교훈을 포괄합니다. 미쉬나와 탈무드는 하가다와 할라카를 쌍으로 구조화된 유대인의 사고체계로 보았으며, 랍비들은 하가다를 통해 할라카의 무게를 내면으로 전달하려 했습니다.

예: 미쉬나 아보트 2:1
“회개와 선행은 세상을 심판의 날에 구원하느니라.”

이는 단순히 규칙의 준수를 넘어서, 내면의 회개와 도덕적 회복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이 전통을 이어받되, 윤리의 무게 중심을 ‘행위’에서 ‘의도와 마음’으로 이동시켰습니다.

2. 예수님의 아가다와 유대 아가다의 비교: 구조, 목적, 특징의 전환

예수님의 비유(παραβολή, mashal)는 아가다적 서사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 아가다적 요소는 고전 유대 아가다와의 연속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그 구조와 목적, 그리고 이야기의 방식에서 본질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첫째, 구조적인 측면에서 유대 아가다는 주로 선조나 랍비 중심의 전통 해석에 기반합니다. 즉, 공동체가 기억하고 계승해 온 전통적 해석들이 아가다의 바탕이 되었고, 이야기 속 인물들도 율법 교사나 조상들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아가다는 개인의 마음과 하나님 나라를 중심에 둡니다. 이야기 구조는 전통의 반복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 실현을 향해 나아갑니다.

둘째, 목적의 전환이 분명합니다. 유대 아가다의 목적은 공동체의 연속성과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데 있으며, 공동체 윤리를 강화하고 율법의 실천을 북돋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아가다는 그 초점이 공동체의 유지보다 먼저, 개별 존재의 내면 윤리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각자의 내면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윤리적 회복을 뜻합니다.

셋째, 특징적인 요소에서도 차이가 드러납니다. 유대 아가다는 주로 우화나 격언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며, 랍비적 지혜와 교훈을 전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아가다는 회개와 은혜 중심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표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25–37), 탕자의 비유(눅 15:11–32)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지 지혜의 전수가 아니라, 죄인의 회복, 하나님의 긍휼, 그리고 은혜의 극적 선언으로 기능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아가다는 고전 유대 아가다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보다 내면적이며 회복 지향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아가다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인간 내면의 회개를 촉구하는 거룩한 이야기의 구조로 자리잡습니다.

예수님의 아가다는 내면 윤리를 요청하는 하가다, 즉 회개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가다의 정서적 구조를 지니되, 존재의 전환과 내면의 변화(μετάνοια, 테슈바)를 중심 메시지로 삼습니다.

3. 내면 윤리로의 중심 이동

예수님은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행위에는 범죄하지 않아도 내면으로 죄를 범하는 것을 매우 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하가다의 윤리 중심을 외면(행위)에서 내면(동기)으로 이동시켰습니다:

• “살인하지 말라” (출 20:13) →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살인한 자” (마 5:21–22)
• “간음하지 말라” (출 20:14)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 (마 5:27–28)
• “눈은 눈으로” (레 24:20) →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마 5:39)

이러한 윤리의 내면화는, 단지 율법의 규칙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론적 상태—“하늘 아버지를 닮은 자”로의 변형을 추구하는 윤리입니다.

4. 하가다와 회개(테슈바)의 통합

유대 하가다는 종종 회개와 회복(תשובה, teshuvah)를 강조합니다. 예: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받아들이시며, 그의 자비는 회개한 자에게 넘친다.”
(Midrash Tehillim on Psalm 32)

예수님의 하가다는 바로 이 회개의 드라마를 핵심으로 삼습니다:

• 잃은 양의 비유 – 마음이 멀어진 자의 회복 (눅 15:4–7)
• 잃은 드라크마 비유 – 잊혀진 존재의 회복 (눅 15:8–10)
• 탕자의 비유 – 자아가 무너진 자의 내면 회복 (눅 15:11–32)

예수님의 하가다는 회개한 자의 마음을 하나님의 자비로 껴안으며, 단순한 윤리적 교훈을 넘어 회복의 내면 드라마를 그려냅니다.

5. 마음의 훈련과 공동체 윤리의 재구성

예수님은 단지 개인적 성결을 넘어, 내면 윤리가 구성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을 예고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 정결함은 외부가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된다 (마 15:11)
• 위선적인 경건보다 은밀한 기도와 자비가 중요하다 (마 6장)
•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눅 14:11)

이는 랍비 유대교의 할라카 중심 공동체에서 아가다 중심 공동체, 곧 마음의 훈련을 우선시하는 공동체로의 이동을 뜻합니다.

6. 하가다의 심장은 ‘마음’이다

예수님의 교훈은 하가다 형식을 빌려 오되, 윤리의 초점을 단지 도덕적 규칙에 두지 않고, 마음의 상태, 동기, 존재의 변화에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

• 아가다의 궁극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 이 중심 이동은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예수님의 할라카와 사랑의 성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에 대한 신학적 해석

1. 예수님의 율법 해석: 중심은 사랑이다

결국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했던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식과 가식 그리고 이중성이 더 드러나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세리의 기도는 테슈바의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실례로 보여 준 셈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율법(תּוֹרָה, Torah)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7–20). 그 “완전함”(πληρῶσαι, plērōsai)이란 단어는 단지 법을 지키는 완수라기보다, 그 깊은 뜻과 목적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의 목적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cf. 신명기 6:5, 레위기 19:18)

이 말씀은 유대 율법 전체가 두 가지 축—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위에 서 있다는 고대 랍니들의 전승과 맥을 같이합니다.

2. 랍비 힐렐의 사랑 중심 율법 이해와의 비교

랍비 힐렐(Rabbi Hillel, 기원전 1세기)은 예수님과 동시대 인물로서, 율법 전체를 사랑의 원리로 요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힐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מה ששנוא עליך אל תעשה לחברך — זו היא כל התורה כולה, ושאר — פירושה הוא; לך ולמד”
“자네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그 해석일 뿐이니 가서 배우라.”
— 바빌로니안 탈무드, Shabbat 31a
이것은 레위기 19:18의 긍정 명령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וְאָהַבְתָּ לְרֵעֲךָ כָּמוֹךָ)와 연결되며, 소극적 황금률(Negative Golden Rule)로 불립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긍정적인 능동형 명령을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이것은 단순한 배려를 넘어 이웃을 향한 적극적인 자비와 사랑의 실천을 요구합니다. 힐렐과의 비교에서 예수님은 할라카를 단지 최소한의 도덕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형상을 따라 사는 삶으로 격상시킵니다.

3. 바울의 율법 이해: 사랑은 율법의 완성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율법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어졌나니”
(갈라디아서 5:14)

여기서 바울은 헬라어로 πληρόω (pleróō, 성취하다)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의 율법 완성 언어와 동일한 표현을 취합니다. 다만 바울은 율법 준수를 통한 의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율법은 사랑 안에서 성취되며…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로마서 13:10; 갈라디아서 5:22)

이러한 바울의 해석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통 유대 할라카를 넘어 성령에 의해 완성되는 새로운 생명의 윤리로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할라카에서 아가다로, 규칙에서 관계로

예수님의 율법 이해는 할라카의 규칙적 구조를 해체하지 않으면서, 그 의도를 아가다적 관계 윤리로 전환시킵니다.
예수님의 율법 이해는 고전적인 유대 할라카의 규범적 접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고전적 유대 할라카는 주로 행위 중심의 규범적 순종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의무감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신앙인의 도리이며 책임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마음과 존재 전체로 드리는 사랑을 핵심으로 하며, 순종이 단지 외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 관계 형성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순종은 의무감이 아닌, 은혜를 입은 자로서의 감사와 자발적 헌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율법을 단순한 규칙이 아닌, 사랑의 완성으로 보셨으며,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 내면 윤리와 관계 중심 신앙으로의 전환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진정한 성취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발적으로 실현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5. 사랑의 윤리와 공동체 형성

사랑은 단지 도덕적 덕목이 아닌,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중심 원리입니다. 이 사랑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습니다:

• 포괄성: 원수도 포함하는 사랑 (마 5:43–48)
• 행동성: 의도뿐 아니라 구체적 행위로 표현됨 (눅 10:25–37)
• 하나님 형상성: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 (창 1:26–27; cf. 바바 카마 92a)

이러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자, 공동체 회복의 핵심 동력이 됩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핵심은 행위 규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존재의 변화와 공동체적 실천입니다.

6. 사랑은 율법의 중심, 아가다의 심장

예수님의 할라카는 기존의 율법 구조를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깊은 정신인 사랑과 자비를 통해 율법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혁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랍비 힐렐의 가르침과 접점을 가지면서도, 적극적이며 구원론적인 사랑의 명령으로 초월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존재로의 변화,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제시하셨습니다.

<원수 사랑의 문제>

저는 지금까지 랍비 유대교와 신약성경을 비교하는 일련의 글을 집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히브리적 용법과 사상에 근거하여 재조명하고, 당시 랍비 유대교적 배경을 공유하던 청중들이 어떻게 이해했을지를 복원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을 가능한 한 그분이 실제 말씀하셨던 시대와 문맥 속에서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한 역사적 고증을 넘어,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언어적 깊이, 율법적 맥락, 그리고 하가다(אגדה)적 정서를 보다 충실히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들이 헬라어로 번역되고, 이후 헬라-로마 문화와 철학적 사유 구조 안에서 해석되며 원래의 히브리어적 의미와 의도가 희석되거나 오해되었다는 것이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거나 반대한 분이 아니라, 그 본래의 정신과 목적을 충실히 완성하신 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그분은 율법의 본질을 ‘사랑’(אהבה, ahavah)과 ‘긍휼’(חֶסֶד, chesed), ‘은혜’(חֵן, chen)로 보셨으며,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적대적 해체가 아니라, 그 궁극적 완성을 선포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마태복음 5:17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말씀을 다음의 주제들에 따라 랍비 유대교의 전통, 타나크의 핵심 사상,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호 비교하는 방식으로 고찰하고자 합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그분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이상이 아니라, 랍비 유대교와 타나크에 깊이 뿌리를 둔 히브리적 사랑의 할라카(הלכה של אהב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비교에 이어서 아래에 세 가지 주제를 구조적으로 정리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1. “원수를 사랑하라”와 레위기 19:18의 확장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타나크 배경 – 레위기 19:18
וְאָהַבְתָּ לְרֵעֲךָ כָּמוֹךָ אֲנִי יְהוָה
Ve’ahavta le-re‘akha kamokha. Ani Adonai.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9:18)

주석

• “레아카(רֵעֲךָ)”는 문자적으로 “네 이웃” 또는 “네 동료, 네 백성”을 의미합니다.
• 히브리어 רֵעַ (re‘a)는 보통 공동체 내 이스라엘 사람을 지칭하며, 외국인이나 원수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랍비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확장

예수님은 “이웃”의 범위를 공동체 내부가 아닌 외부, 곧 적대자까지 확대하십니다. 이는 윤리적 파격이라기보다, 하나님 형상의 보편성(창 1:27)을 율법의 정신으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지 philia (형제 사랑)이 아니라 chesed (חֶסֶד, 헷세드: 은혜로운 사랑)입니다.

2. 쿰란 공동체의 “원수를 미워하라”와의 비교

마태복음의 배경 문구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3)
→ 구약 율법에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시는 없습니다. 하지만 쿰란 공동체에서는 이 사상이 문헌으로 나타납니다.

쿰란 문헌 – “공동체 규칙서” (1QS 1.10–11)
לֶאֱהוֹב כָּל־בְּנֵי אוֹר וּלְשָׂנֵא כָּל־בְּנֵי חֹשֶךְ
le’ehov kol bnei or ulesan’eh kol bnei choshekh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하라”

분석

• 쿰란은 철저한 구분의 공동체였습니다. ‘우리’와 ‘그들’, 의로운 자와 악한 자를 명확히 분리하였고, 이는 “원수를 미워함”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쿰란 문화를 반박하며, 배타적 성결에서 포용적 거룩으로 율법을 재정의하는 행위였습니다.

3. 탈무드의 “하나님의 형상” 사상과의 비교

예수님의 원수 사랑은 단지 행위의 권고가 아니라, 창세기의 인간 이해 – 곧 하나님의 형상(tzelem Elohim, צֶלֶם אֱלֹהִים)을 기반으로 합니다.

창세기 1:27
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Vayyivra Elohim et-ha’adam be-tzalmo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바빌로니안 탈무드 – 베라코트 58a
מִפְּנֵי שֶׁנִּבְרָא בְּצֶלֶם אֱלֹהִים
mipnei shenivra be-tzelem Elohim
“왜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가?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미드라쉬 창세기 라바 24:7
“사람을 욕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분석

예수님은 원수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보셨고, 이는 단지 감정적 관용이 아니라 신학적 필연이자 율법의 본질적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의 “원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자 하나님 형상의 회복

히브리 성경, 쿰란 문서, 탈무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인간과 사랑, 미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사랑의 대상을 주로 공동체 내 “이웃”으로 한정하며, 미움의 정당성은 특별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존엄을 지니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반면 쿰란 공동체 문서(예: 『전쟁의 두 아들』)는 사랑의 대상을 “빛의 아들들”로 제한하고, “어둠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미워함을 정당화합니다. 이는 선민 사상과 종말론적 투쟁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탈무드는 경건한 자를 존중하고 미움보다 존경과 경계의 태도를 강조하지만, 여전히 율법 중심의 구분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사상은 그대로 존중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를 넘어서, 사랑의 대상을 “원수”까지 확장합니다(마 5:44). 미움이 아닌 기도와 중보로 대응하라는 명령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태도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예수는 사랑의 범위와 깊이를 전례 없이 확장하였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회복의 윤리를 제시합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1. 회개하는 세리는 용서와 구원의 방법을 알지만,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인은 그의 말로 정죄 받습니다. 회개는 율법을 이해하는 첩경이나 외식과 위선으로 율법의 외면만을 지키는 자가 사실은 율법의 정신을 상실한 자입니다.
2. 예수님은 율법의 파괴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자입니다 (마 5:17).
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19:18의 심화이자 보편화입니다.
4. 쿰란이나 랍비 유대교의 배경과 비교할 때, 예수님의 윤리는 배타적 구분에서 보편적 은혜로 나아가는 선언입니다.

<테슈바와 회복의 완성: 사랑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공동체>

1. 테슈바에서 시작된 여정

세리의 회개는 진정한 테슈바(תשובה, 회개 또는 귀환)의 시작입니다. 랍비 유대교에서 테슈바는 단순히 죄를 회개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되돌아가는 총체적 회복입니다. 테슈바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고, 처음 사랑으로 되돌아가며,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다시 정렬되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 테슈바의 여정을 구체적 인간의 이야기 속에 펼쳐냅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사마리아 여인, 혈루증 여인, 간음한 여인, 성전 정화, 혼인 잔치—이 모든 이야기에는 테슈바와 회복(Restorative Justice)이라는 주제가 중심축으로 흐릅니다.

2. 아가다적 테슈바: 회복의 이야기들

아가다(Aggadah)는 단지 미드라시적 삽화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 드라마를 서술하는 문학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와 치유, 대화 속에는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회복을 향한 이야기적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외에도 많은 테슈바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실례들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 사마리아 여인은 율법적 정결에서 제외된 존재였으나,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예배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요 4:23–24).
• 12년 혈루증 여인은 레위기적 부정의 상징이었으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ἡ πίστις σου σέσωκέν σε; 마 9:22)라는 선언을 통해 새 생명으로 회복되었습니다.
• 간음한 여인은 죄와 수치의 돌무더기 아래 있었지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Ἐγώ σε οὐδὲ ἐγώ κατακρίνω· 요 8:11)라는 말씀으로 새로운 길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회복은 단지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명예 회복과 신앙적 재정립을 의미합니다.

3. 예수님의 내면 윤리와 하나님 나라 공동체

예수님의 윤리는 외적 계명 준수의 할라카를 넘어서 마음 중심 윤리를 세우십니다.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다시금 강조한다면 이것은 산상수훈에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 “살인하지 말라”는 외적 계명을 넘어서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마 5:22)는 마음의 분노까지 정화합니다.
•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을 “음욕의 눈길”로까지 확대하며(마 5:28), 내면의 욕망에까지 책임을 묻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내면 할라카 (Halakhah ha-Penimit) 이며, 이 할라카는 단순한 개인 경건이 아닌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형성하는 윤리적 토대입니다.

테슈바와 내면 할라카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가요?

• 공동체 안에서 억압받은 자를 포용하고
• 죄인에게는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며
• 율법적 의를 넘어서는 자비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마 5:48)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מַלְכוּת שָׁמַיִם, Malkhut Shamayim)가 이 땅에 구현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으로 지탄받아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이 환영 받지만, 율법의 외면은 취하나 내면에는 교만과 정죄 그리고 죄악으로 가득한 외식하는 바리새인은 도리어 정죄합니다.

4. 랍비 유대교와의 접점과 초월

예수님의 윤리는 랍비 유대교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 미쉬나 아보트 1:2 – “세상은 토라, 예배, 자선(גְּמִילוּת חֲסָדִים) 위에 선다.”
→ 예수님의 말씀도 ‘자비’와 ‘정의’와 ‘믿음’이라는 본질을 강조했습니다 (마 23:23).
• 랍비 힐렐은 말한다: “네 이웃에게 싫은 것을 하지 말라. 이것이 전 토라다.”
→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심으로 윤리의 경계를 초월하십니다 (마 5:44).

예수님의 초월적 메시지

예수님은 랍비 유대교의 ‘경계 내’에 계셨지만, 그 안에서 윤리의 경계를 허무는 사랑의 초월성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 계명”(ἐντολὴ καινή – 요 13:34)입니다.

• 이 계명은 랍비적 전통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 자비와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중심 속성으로 인간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율법이 됩니다.

5. 테슈바에서 하나님 나라로

예수님의 할라카는 테슈바에서 시작해, 회복, 자비, 내면 윤리, 그리고 공동체적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하며(마 5:17), 바울의 말처럼 “온 율법은 이 한 말씀에 이루어졌느니라—‘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갈 5:14)

회개(Teshuvah)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되돌아가서, 그 나라의 윤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방향성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유대의 숨결로 다시 읽기 (Re-reading Jesus in the Breath of Judaism)>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정수를 보여 줍니다. 테슈바로부터 마음의 훈련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산상수훈은 랍비 문헌, 특히 하가다적 윤리 전통을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그 깊이가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단지 기독교 윤리의 요약이 아니라, 유대적 해석 전통의 연장선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할라카’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새로운 도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유대 전통 안에 있던 하나님의 뜻을 되살리고, 이를 삶의 중심으로 불러낸 랍비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랍비 문헌과 함께 읽을 때,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 안에서 그 깊이를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그분은 하가다의 랍비이며, 토라의 완성자이시다. 산상수훈은 단지 계명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지도를 그려 주신 하가다의 시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유대의 숨결을 느끼며, 신약의 빛 속에서 토라의 향기를 다시 맡게 됩니다.

<글을 맺으며: 진정한 회복의 길, 예수님의 아가다로 다시 듣는 기도>

많은 설교자들이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흉내 내며 신파극처럼 무대를 연출합니다. 때로는 눈물을 자아내고, 때로는 웃음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사처럼 암송되는 이 이야기 속 진정한 울림은 그저 퍼포먼스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만약 본질 없이 연기되고 전달된다면, 우리는 그 이야기의 문을 열지 못한 채 궁전 바깥에서만 머무는 셈입니다. 이 비유는, 사실상 아가다 중의 아가다입니다.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숨겨진 보물들이 가득한 궁전의 창문을 여는 이야기입니다. 창문이 열리면, 빛이 어두운 방을 비추듯 예수님의 윤리와 하나님의 마음이 내면의 깊은 곳까지 스며듭니다.

랍비 엘리에제르(Eliezer ben Hyrcanu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마다 불꽃을 뿜는다. 사람은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볼 때, 그 불빛에 타오른다.” (Avot de-Rabbi Natan, 40)

예수님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는 단지 권위의 표출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오르는 하가다의 불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마음 깊은 곳까지 새기는 선포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인간 존재의 심연을 향한 하나님의 하늘 언어입니다. 그것은 단지 규범이 아니라 회복의 초대장입니다.

메시아닉 유대인의 통찰 – 아비엘 카플란(Aviel Kaplan)의 고백

이스라엘 출신 메시아닉 랍비 아비엘 카플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유대적 렌즈로 다시 읽으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는 30년간 탈무드를 연구했고, 하가다의 깊이에 감탄했지만,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마치 내 영혼에 숨겨진 문을 열어 주었다. 그분은 율법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셨다.”

그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율법을 넘어 율법의 중심으로 가는 길, 그 길이 바로 세리의 겸손한 기도였고, 바리새인의 자기의로 가려진 진실이었습니다.

역사적 신학자의 통찰 –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현대 유대신학자 헤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면이 아니라 떨리는 내면의 동기를 듣고 계신다. 기도는 언어가 아니라 울림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울림을 회복하는 선언이었습니다. 내면을 향한 하나님과의 조우, 그것이 세리의 기도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 말씀을 ‘그들의 귀’로 듣고 있는가?

예수님의 윤리는 행위를 넘어, 심장의 동기를 꿰뚫는 내면의 할라카였으며, 그 내면은 회당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가슴의 침묵 안에서 더 선명하게 울렸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해석의 창문을 다시 열고, 예수님의 아가다를 유대인의 마음으로, 당시 청중의 귀로, 메시아닉 유대인의 깨달음으로 다시 듣는다면—그분의 말씀이 다시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불꽃’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은 그 불꽃을 피워내기 위한 한 줌의 기도이며, 시대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말하는 작은 아가다입니다.

말씀은 창문이 되어
— 아가다의 빛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듣다
잊혀진 창이 하나 있었습니다
먼지 쌓인 시간 너머로
누군가는 외쳤습니다 —
“ἐγὼ δὲ λέγω ὑμῖν”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러나 귀 기울일 자, 눈물로 듣는 자는 적었습니다
“Lo bashamayim hi” — “그것은 하늘에 있지 않다”
(신명기 30:12)
율법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우리의 입에, 우리의 마음에 있나니
לֹא בַשָּׁמַיִם הִוא
아이였던 나는
회당 벽에 새겨진 별빛처럼
바리새인의 기도에 고개를 젓고
세리의 가슴에 나를 숨겼습니다
탕자의 발자국 위로 내 삶을 놓고
잃어버린 은전 하나에도
어머니처럼 울던 설교자의 목소리를 따라
나는 울었습니다
“회개는 세상을 창조한 날보다 더 위대한 날을 만든다.”
(미드라쉬 베레쉬트 라바 21:6)
תשובה גדולה היא שמביאה גאולה לעולם
“테슈바는 세상을 구속하는 위대한 선물이다.”
그러나 어느 날, 바벨론의 먼지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탈무드의 향기와 함께 깨어났습니다
하가다였고, 미드라시였고,
마음의 숨은 길을 걷는 할라카였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다시 심장에 새기러 왔다고
헬라 철학이 지우지 못한 그 빛으로
“לא באתי להפר את התורה, אלא להשלימה”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 왔다”
(마태복음 5:17, 예수님의 선언)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는
연극이 아니라 거울이었고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들려야 할 목소리였고,
살아야 할 길이었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심기면, 그 사람은 불타는 횃불이 된다.”
(아보트 데 라비 나탄, 24장)
כשנכנס דברי תורה ללבו של אדם – הוא נעשה כלפיד בוער
이제 나도 외칩니다 —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창문을 열어, 말씀의 궁전에 들어가라
그 안에는 진주보다 귀한 아가다가 기다리고 있다
이 시는 하나의 문,
그대의 마음이 열릴 때
예수님의 음성이 예루살렘처럼 다가오리라

시어 설명

• “Lo bashamayim hi” (신 30:12):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 멀리에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있다는 유대 율법의 핵심 정신입니다. 예수님도 이 원칙 아래 내면의 율법을 강조하셨습니다.
• 미드라쉬 베레쉬트 라바 21:6: 회개(Teshuvah)는 단순한 윤리적 전환이 아니라, 세계를 회복시키는 창조적 사건으로 간주됩니다.
• 아보트 데 라비 나탄 24장: 율법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면 사람은 ‘타오르는 횃불’이 된다는 구절은 예수님 제자들의 열정적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2025년 7월 24일 이슥한 밤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