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계발] 향유를 부은 여인들: 복음서의 상호 비교와 신학적 의미-17 » “Women Who Anointed Jesus: Synoptic and Johannine Perspectives in Theological Contrast” »
Contents
- <글을 시작하면서: 향유와 눈물,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랑>
- <눅 7:36-50절의 향유를 붓는 여인>
- <하나의 사건, 두 개의 관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눅 7:36-50, 요 12:1-8)>
- <사복음서에서 중요하게 다룬 두 바리새인>
- <향유를 부은 여인을 통해 본 예수님의 할라카 이해>
- <향유 붓기의 신랑적 상징성과 자비의 율법>
- <테슈바와 회복의 완성 – 사랑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공동체>
-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 – 예수님의 아가다와 새로운 인간 공동체>
- <베다니의 마리아 향유 사건들: 사복음서의 조화와 구분>
- <향유 사건에 대한 랍비 유대교의 관점>
-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과 메시야적 성취>
- <두 기름부음 사건에 대한 신학적·역사적 재조명>
- <복음서에 나타난 향유 부은 여인의 사건 비교와 신학적 의미>
- <헬레니즘과 유대 전통 속 여성의 행위에 대한 인식 차이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향유 여인의 재해석>
- <글을 맺으며: 눈물로 드린 향유, 사랑으로 열리는 구원의 문>
<글을 시작하면서: 향유와 눈물,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랑>
예수님의 발 아래 향유를 부은 여인을 떠올릴 때, 우리는 자연스레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녀는 값비싼 나드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 붓고,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 행위는 단순한 헌신을 넘어,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비한 깊은 사랑과 신앙의 고백이었고, 세기를 넘어 수많은 설교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마태와 마가 복음서에도 또 다른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머리를 풀고,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쏟아 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가올 장례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죄 많은 여자’로만 불리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 없는 여인은 갈릴리 바리새인의 집에서, 세상의 시선과 판단을 뚫고 주님의 발 아래 나아와, 눈물과 향유로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유럽의 미술사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며, 화가들의 붓 끝에 영원히 새겨졌습니다. 티치아노(Titian), 카라바조(Caravaggio),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엘 그레코(El Greco),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와 같은 거장들은 이 여인을 회개의 상징이자 사랑의 제사로 그려냈습니다. 특히 카라바조의 『황홀경의 막달라 마리아』는 단지 회화 이상의 감동을 전하며,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깊은 내면의 회개를 형상화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향유병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그녀의 영혼이 쏟아져 나온 신앙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예술 작품과 교회 전통은 때로 오해를 낳기도 합니다. 중세 이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로부터 비롯된 전통은 이 여인을 마리아 막달라로 동일시했지만, 복음서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시간도, 장소도, 인물도, 신학적 의미도 분명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글은 누가복음,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각각 등장하는 ‘향유 사건’을 면밀히 비교하고, 특히 누가복음 7장 36절부터 50절에 나타난 이야기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 나라의 윤리, 그리고 여인을 향한 주님의 시선이 담고 있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또한 당시 유대 관습과 랍비 문헌 속에서 여인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고찰하며, 오늘날 이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주는 회개의 울림과 신앙의 도전을 성찰할 것입니다.
<눅 7:36-50절의 향유를 붓는 여인>
우리는 누가복음 7장 36절부터 50절에 나오는 잘 알려진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사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바리새인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는 장면은 흔치 않은데, 이 본문은 특별히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인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그녀는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을 들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울음을 터뜨리며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은 후,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단순한 예우의 차원을 넘어, 절절한 회개의 몸짓이며, 예수님에 대한 전인격적 경외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그에게 가까이 온 여인이 어떠한 사람인지—죄인이라는 것을—알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선지자됨을 의심하며, 여인의 과거와 정체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말할 말이 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빚을 탕감 받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다른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빚었는데, 둘 다 탕감 받았을 때 누가 더 많이 그 채권자를 사랑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시몬은 “더 많이 탕감 받은 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시몬과 여인을 대조하시며, “적게 용서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바라보시며 선포하십니다.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에 자리에 있던 자들은 수군거리며 말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사하는가?”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과거에 머물러 있으나, 예수님의 시선은 그녀의 회개와 믿음, 사랑에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장면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율법 중심의 경건에서 은혜 중심의 구원으로의 전환을 상징합니다. 죄인으로 낙인 찍힌 한 여인은 예수님의 발 앞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경건과 정결을 자처한 바리새인은 오히려 사랑의 깊이를 잃은 자로 드러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얼마나 용서받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서 있는가?”
예수님 앞에서 과거는 더 이상 정죄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테슈바, 회개’로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용서받은 자’, ‘사랑받은 자’, ‘구원받은 자’. 이 여인의 이야기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발 앞에서 눈물로 엎드릴 때, 회복과 평안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의 사건, 두 개의 관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눅 7:36-50, 요 12:1-8)>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누가복음 7:36–50 또는 요한복음 12:1–8 등)”를 두 개의 상반된 플롯으로 구성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는 구속사적 시각에서 바라본 메시아 되신 예수와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신앙적 행위를 중심으로, 두 번째는 당시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적, 형식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 동일한 사건의 왜곡된 이해를 중심으로 구성했습니다.
플롯 1: 구속사적 시각 ― 마리아와 메시아 예수
제목: “기름 부음을 받은 어린 양”
등장인물:
• 예수아: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아
• 마리아: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아 향유로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
• 제자들: 아직은 미처 다 알지 못하지만 곁에서 이 신비를 지켜보는 자들
• 유다(혹은 제자들 일부): 낭비로 여긴 이 행위를 비난하는 현실주의자들
줄거리:
예루살렘 입성 직전, 예수는 베다니에서 잔치 자리에 앉아 계셨다. 마리아는 정제된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와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는다. 이 향유는 단순한 헌신이 아닌, 장례를 예비하는 거룩한 기름부음이다. 그녀는 단지 감정적으로 충동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과 죽으심을 직감했고, 그분이 진정한 메시야, 곧 구속의 어린 양임을 믿고 행동한 것이다.
이 행위는 구약의 성별과 기름부음의 상징을 따르며, 구속사 전체의 전환점이 된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속죄제물로 드리기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이시며, 마리아는 그 구속의 길을 열어가는 기름부음의 도구가 된 셈이다. 그분의 죽으심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테슈바(회개)의 문을 여는 새 언약의 피가 된다. 마리아는 회개의 여인으로서 죄에서 돌이켜 향유로 감사를 드렸고, 그분의 용서는 곧 회복과 구원의 선포로 이어진다. 이 플롯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예수의 죽으심, 그리고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이라는 구속사적 흐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플롯 2: 율법주의적 시각 ― 바리새인의 오해와 냉소
제목: “낭비, 혹은 모독인가?”
등장인물:
• 시몬 바리새인: 의롭다고 자처하나 사랑 없는 율법의 형식주의자
• 마리아: 죄 많은 여인으로 정결치 못한 자, 율법의 경계 밖에 있는 존재
• 예수: 율법을 깨뜨리는 자로 여겨지는 자칭 선지자
• 무리들: 구경꾼이자 판단자
줄거리:
시몬은 예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지만, 마음 속에는 이미 판단과 경계가 있었다. 겉으로는 존중하는 듯했지만, 환대의 기본 예절조차 지키지 않으며 예수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때 죄 많은 여인, 마리아가 들어와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는다. 그녀는 울며 그 발을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는다.
시몬은 그 장면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이 진짜 선지자라면, 저 여인이 누구인지 알았을 터인데… 죄인 아닌가? 정결치 못한 자 아닌가?”
향유는 단지 낭비였다. 굶주린 이웃에게 나눌 수도 있었고, 성전에 바쳐야 할 수도 있었다. 한 여인의 감정적 행위가 거룩한 자리를 더럽힌다고 느꼈다.
시몬과 같은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율법의 본질인 자비와 사랑을 잃어버린 채 형식과 계급, 정결 규례에 갇힌 자들이었다. 메시아가 그 눈앞에 있음에도, 그는 오히려 마리아의 죄를 보았고, 예수의 거룩함을 보지 못했다.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신다: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자는 많은 사랑을 하거니와, 적게 사함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
그러나 시몬의 귀엔 이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의 눈엔 여전히 “죄인 하나가 낭비한 기름과 어울려선 안 될 예언자”만이 보일 뿐이다.
두 시각, 하나의 사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의 사건이지만 두 개의 시선이 존재합니다.
• 하나는 믿음과 회개의 시선으로, 구속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향유로 예비한 여인의 이야기.
• 다른 하나는 율법적 판단의 시선으로, 사랑 없이 형식만 남은 자가 기름을 낭비했다고 조롱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조는 곧 복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사랑은 판단보다 크며, 회개는 정죄보다 깊고, 향유는 낭비가 아닌 구속을 예비하는 예언적 행위가 됩니다.
<사복음서에서 중요하게 다룬 두 바리새인>
1. 예수님과 바리새인: 일반적 갈등과 예외적 긍정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은 신약 전체에서 중요한 긴장 요소로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전통을 엄격히 따르며,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사역 방식(예: 안식일 규례, 죄인과의 교제, 정결법 등)에 대해 자주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와 사도행전 안에는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대했던 몇몇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2.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가진 바리새인들
예수님의 공생애와 초기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바리새인들은 일관되게 적대적인 존재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몇몇 인물들은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거나 은밀히 따랐으며, 복음의 확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먼저,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한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한 깊은 신학적 대화를 나누었으며, 훗날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을 준비하는 데 참여했습니다(요 19:39).
또 다른 인물인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자’였습니다(막 15:43, 눅 23:50–51).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요청해 정결하게 장사 지내며, 예수님을 은밀히 지지했던 인물입니다. 전통적으로 그는 바리새인 출신으로 간주됩니다. 사도행전에도 긍정적으로 묘사된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는 존경받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박해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지켜보라고 조언함으로써, 제자들이 유대사회 내에서 완전히 배척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열심 있는 바리새인 출신(빌립보서 3:5)이었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복음의 사도로 변화됩니다. 그의 바리새적 율법 이해와 열정은 초기 기독교의 교리 형성과 변증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바리새인들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우호적이거나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단순한 적대자가 아닌 복음서 속 다층적 인물군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랍비 유대교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배경 이해
랍비 유대교는 예수 이후 형성된 문헌들(미쉬나, 탈무드 등)을 바탕으로 체계화되었고, 초기에는 예수를 이단이나 ‘민임(minim)’의 지도자 정도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완전히 악마화하지 않고 일부 가르침을 유사하게 유지하거나, 바리새인과 예수의 토론이 문학적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현대 메시아닉 유대교 및 일부 학자들(예: David Flusser)은 예수를 1세기 바리새 유대교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바리새인들과의 공통점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레위인·제사장과 달리 율법의 본질을 실천한 인물을 부각시키며, 이는 바리새적 윤리와도 일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의 위선을 꾸짖지만, 동시에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되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도 하십니다 (마 23:2–3).
4. 신학적 함의
바리새인 전체가 예수님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당시 종교 지도자들 중 일부의 기득권 세력이 예수님의 영향력을 위협으로 여겼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입니다. 일부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메시아적 가능성을 보았고, 조용히나마 따랐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후에 유대교 내 예수 운동의 씨앗이 되었으며,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로 계승되었습니다.
1. 니고데모 (Nicodemus / נַקְדִּימוֹן)
우선 니고데모에 대한 신약 성경 내 묘사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 요한복음 3:1–21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바리새인으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눕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태어나야”(헬라어: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 거듭남)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지만, 예수님은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며,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 요한복음 7:45–52
산헤드린이 예수를 체포하려는 상황에서, 니고데모는 예수에게 청문 절차도 없이 정죄하려는 행동을 지적하며 조심스럽게 그를 변호합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간접적으로 예수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입니다.
• 요한복음 19:38–42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그는 약 100리트라(약 30~35kg)의 몰약과 침향을 가져와 유대인의 장례 풍습에 따라 정결하게 시신을 준비합니다. 이는 매우 값비싼 예물로, 니고데모가 부유한 유대 귀족이었음을 시사하며, 예수님을 향한 그의 깊은 헌신과 신앙을 보여줍니다.
이 세 본문은 니고데모가 점점 더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게 되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며,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비밀스럽게 따르던 유대 고위층의 존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로 니고데모를 그립니다.
역사적 배경 및 랍비 문헌 비교
“Nakdimon ben Gurion” (נקדימון בן גוריון)이라는 인물이 탈무드(Babylonian Talmud, Ta’anit 19b–20a)에 등장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전 매우 부유한 귀족이자, 로마와의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 “Nakdimon”은 “태양이 그를 위해 멈췄다(נקד)”는 전설에서 비롯되며, 신실한 유대인으로서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고 묘사됩니다. 일부 학자들(예: Daniel Boyarin, David Flusser)은 이 “Nakdimon ben Gurion”과 요한복음의 니고데모를 동일인 또는 동일 계층 인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이 인물은 예루살렘 귀족이자 종교 지도자이며, 예수님의 신성을 탐색한 인물로 해석됩니다.
2. 아리마대 요셉 (Joseph of Arimathea / יוֹסֵף מֵהָרַמָּתַיִם)
니고데모에 이어 신약 성경 내 묘사되는 매우 친숙한 바리새인 가운데 아리마대 요셉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네 복음서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마태복음 27:57–60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이며 예수님의 제자”로 소개됩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청하여, 자신이 준비한 새 무덤에 장사합니다. 이는 그의 헌신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 마가복음 15:43–46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자”로 묘사됩니다. 빌라도에게 담대히 시신을 요구하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릅니다. 그의 믿음과 용기는 강조됩니다.
• 누가복음 23:50–53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자”로 불리며, 산헤드린의 예수 정죄 결의에 동의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시신을 수습하여 정결하게 장례합니다. 이는 그의 도덕적 용기와 독립된 신앙을 드러냅니다.
• 요한복음 19:38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따르던 자”로 언급됩니다. 그는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이는 조용하지만 실질적인 신앙 행위를 보여줍니다.
이 네 복음서의 기록은 아리마대 요셉이 단지 공회원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 이후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을 실천한 인물임을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이 단지 선한 공회원이 아니라, 산헤드린 내부에서 예수를 지지하던 인물임을 시사합니다.
역사적 배경 및 전승
아리마대(Arimathea, Ἀριμαθαία)는 구약의 라마임 초핌(רָמָתַיִם צוֹפִים, Ramathaim Zophim)과 동일한 곳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무엘의 고향으로 여겨지며, ‘라마(רָמָה, Ramah)’ 계통의 이름입니다.
• 사무엘상 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히브리어: רָמָתַיִם צֹפִים (Ramathaim Zophim)
아리마대는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담당한 아리마대 요셉의 출신지로 등장하며(마 27:57), 이 지명이 라마 계통의 고대 지명과 연결될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신약 외의 문헌에서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초대 기독교 외경이나 중세 전승에서는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Nicodemus Gospel, Acts of Pilate, Glastonbury 전설 등에서는 요셉이 영국까지 복음을 전파한 성자로 발전합니다.
랍비 문헌과의 비교
랍비 문헌에는 요셉이라는 공회원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산헤드린 내부의 다양한 의견 차이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미쉬나와 탈무드 내에서는 항상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자”들이 소수로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현대 유대학자 Jacob Neusner는 예수 당시의 유대 종교계가 단일하지 않았고, 산헤드린 내에도 다양한 해석 공동체가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 맥락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정통 유대 안에서 예수께 경의를 표하던 유력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신학적 및 문학적 함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바리새인이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두 산헤드린 인물의 대조적 헌신을 보여줍니다. 앞서 언급한 두 인물은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에 깊이 관여한 두 명의 산헤드린 의원입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자 율법 교사였던 니고데모이며, 다른 한 사람은 부유한 공회원으로 알려진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이 두 인물은 각기 다른 시점과 방식으로 예수님께 반응함으로써, 유대 종교 지도자 중에서도 진리를 추구하던 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자 율법 교사로서 유대의 고위 지도자였고, 요한복음 3장에서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γεννηθῇ ἄνωθεν, anōthen)의 의미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는 당시 율법 중심의 유대 지식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두고 내면의 신학적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니고데모는 후에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를 변호하고,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을 준비함으로써 점차 헌신의 행보를 드러냅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그를 탈무드에 등장하는 ‘나크디몬 벤 구리온’(נקדימון בן גוריון, Nakdimon ben Gurion)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반면 아리마대 요셉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직후 빌라도에게 담대히 시신 인도를 요청한 인물입니다. 그는 부자이며 공회원으로, 당시 유대 지도자들 가운데 예수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단순한 정서적 애도나 존경을 넘어, 메시아를 따르는 자의 실천적이고 공개적인 헌신을 상징합니다. 외경 문헌과 초기 교회 전통에서는 그를 사도에 준하는 인물로 존경하며, 일부 전승에서는 서방 교회의 복음 전파자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각각 유대 지식층의 회심과 질문, 그리고 신앙 고백 이후의 용기 있는 실천이라는 두 단계를 대표하며, 복음서 안에서 깊은 신학적 상징성을 띠는 인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랍비 유대교와 예수님의 사역 사이의 다리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단순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들은 1세기 바리새 유대교 전통과 예수님의 복음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율법을 잘 아는 지식인들이었으며, 동시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모든 바리새인은 예수를 대적했다”는 일반화에 대한 강한 반례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 단순히 민중 중심이 아니라 지식인, 산헤드린 공회원, 부유층까지 포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을 통해 본 예수님의 할라카 이해>
1.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의 맥락
누가복음 7장 36–50절은 단순한 사건의 기술이 아니라, 예수님의 할라카 해석과 아가다적 윤리의 절정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한 바리새인(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의 행위는 율법적 정결 규례를 넘어선 은혜와 자비의 실천을 예수님이 어떻게 평가하셨는지를 드러냅니다.
2. 정결법과 랍비 유대교의 이해
바리새파 유대교에서는 טֻמְאָה (Tumah, 부정함)와 טָהוֹר (Tahor, 정결함)의 개념이 일상적인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으며, 죄 있는 여인이 식사 중인 랍비에게 접근하는 것은 명백한 율법적 위반이었습니다. 랍비 문헌은 특히 여인의 신체 접촉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cf. 미쉬나 נדה Niddah 2:1).
3. 예수님의 내적 할라카: 행위의 동기와 마음 중심의 공정
예수님은 여인의 행위가 외적으로 부정한 것일 수 있으나, 내면의 사랑과 회개의 동기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의이며, 참된 할라카의 본질임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선언: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사함 받았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Λουκᾶς 7:47 / Luke 7:47)
여기서 말하는 “사랑함이 많음”은 헬라어 ἠγάπησεν πολύ (ēgapēsen polý)이며, 이는 히브리어 אַהֲבָה (ahavah, 사랑)의 랍비적 윤리 전통과 연결됩니다.
미쉬나 아보트 1:12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자는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라.”
(הֱוֵי מִתַּלְמִידָיו שֶׁל אַהֲרֹן… אוֹהֵב אֶת הַבְּרִיּוֹת)
4. 아가다와 테슈바의 실천: 이야기를 통한 윤리의 감화
향유 여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회개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가다적 교육 방식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논증이나 율법 해석이 아닌 이야기의 힘으로 청중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처럼 아가다는 단순한 서사가 아닌 “마음의 문을 여는 율법의 해설”입니다.
5. 공정(Justice) vs 자비(Mercy): 랍비 전통과의 차이
랍비 유대교는 מִשְׁפָּט (mishpat, 정의)과 חֶסֶד (chesed, 자비)의 균형을 강조하나, 예수님은 향유 여인의 이야기에서 “자비가 정의를 초월한다”는 하나님의 나라 윤리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는 선지자적 윤리와 일치하며, 탈무드도 이 사상을 반영합니다:
“세상은 세 가지로 서 있다: 율법, 예배, 자비”(Pirkei Avot 1:2)
6. 바리새인 시몬과의 대조: 외면의 의 vs 내면의 회개
시몬은 율법적으로는 흠 없으나, 내면에는 냉소와 판단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적게 용서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으로, 내면의 죄 인식과 자비의 실천이 참된 의로움이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향유 붓기의 신랑적 상징성과 자비의 율법>
— 유대 혼인 풍습과 힐렐의 사랑 윤리, 그리고 메시아닉 해석
1. 향유 붓기와 고대 유대 혼인 풍습의 상징성
향유를 붓는 행위는 단순한 환대나 정결의 행위가 아니라, 유대 혼인문화 속에서 신랑을 위한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기름 부음을 단순한 정결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시편 23:5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히브리어: דִּשַּׁנְתָּ בַשֶּׁמֶן רֹאשִׁי כּוֹסִי רְוָיָה
아울러 아가서는 향기로운 기름과 향유를 신랑–신부의 사랑의 표현으로 자주 묘사합니다:
“당신의 기름이 향기로워 기름 붓는 향유가 흘러내립니다…”
(שֶׁמֶן תּוּרַק שְׁמֶךָ עַל־כֵּן עֲלָמוֹת אֲהֵבוּךָ; 아가 1:3)
이러한 문맥에서 향유를 붓는 여인의 행위는 단순한 정결의식이나 회개의 표현이 아닌, 예수님을 하나님의 신랑, 메시아로 고백하는 예언적 행동으로 해석됩니다. 고대 유대 결혼식에서는 신랑의 머리에 기름을 붓거나 향기를 피우는 의식이 있었으며, 이는 왕권과 신적 선택의 상징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은 메시아 신랑을 준비하는 신부 공동체의 대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3:29에서 세례자 요한이 말한 “신랑을 맞이하는 친구”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2. 힐렐의 자비 윤리와 예수님의 연결
랍비 힐렐(Rabbi Hillel, 주전 1세기)은 바리새적 율법 해석 중에서도 가장 온유하고 자비로운 해석자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힐렐은 율법의 정수로 레위기 19:18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וְאָהַבְתָּ לְרֵעֲךָ כָּמוֹךָ)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싫은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다. 나머지는 주석이니, 가서 배우라.”
(탈무드 바빌로니아, Shabbat 31a)
이 말은 마태복음 7:12의 황금률과 평행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Ματθαῖος 7:12)
예수님은 레위기 19:18을 율법의 중심 강령으로 강조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을 율법과 선지자의 요약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마 22:37–40). 향유를 부은 여인의 사랑의 행동은 율법의 본질인 chesed (חֶסֶד, 인애/자비)를 삶으로 보여준 하가다적 실천이었습니다.
3. 메시아닉 유대인 해석: 정결법의 성취자 예수
메시아닉 유대인(Messianic Jews)은 예수님을 토라의 성취자로 이해합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그 참된 목적과 의도를 완성하셨다고 봅니다 (cf. 마 5:17: μὴ νομίσητε ὅτι ἦλθον καταλῦσαι τὸν νόμον… ἀλλὰ πληρῶσαι).
향유 여인의 행위는 예수님을 통해 정결해지고 받아들여졌으며, 이 장면은 레위기의 정결법(예: 레위기 15장, 누출에 의한 부정)과 대조됩니다. 고전적인 랍비 해석은 여인의 상태를 טְמֵאָה (Tme’ah, 부정한 자)로 간주하지만, 예수님은 내면의 회개와 사랑의 행동으로 이 여인을 정결한 자로 선언하십니다.
메시아닉 랍비인 David H. Stern는 『Jewish New Testament Commentary』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이 여인의 향유 붓기는 구약의 제사 의식과 신랑 예언, 그리고 회개와 정결의 복합적 상징을 지닌다. 예수는 단순한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랑으로 받아들여진다.”
(Stern, 1992, p. 148)
또한 Stern은 누가복음 7장을 호세아의 예언(호 2:16)의 성취로 보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신랑–신부 관계가 예수님과 회개한 여인을 통해 드러났다고 분석합니다.
4. 향유와 사랑은 율법의 성취인가?
향유 붓기의 행위는 외적 계명의 파괴가 아니라, 율법의 내면 윤리 — 곧 사랑과 자비, 신랑을 기다리는 마음 — 의 실현입니다. 힐렐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대립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메시아닉 해석은 이러한 연결고리를 성경적, 랍비적 전통 안에서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한 죄사함이나 인간 중심의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랑이신 메시아를 영접하는 이스라엘의 신부 회복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테슈바의 궁극적 목적 — 하나님의 임재와 연합 — 을 아가다적 방식으로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테슈바와 회복의 완성 – 사랑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공동체>
(The Fulfillment of Teshuvah and Restoration – Love, Mercy, and the Ethical Community of the Kingdom of God)
1. 테슈바(תשובה)의 의미와 랍비 유대교적 배경
테슈바(teshuvah, תשובה)는 단순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방향 전환을 의미하는 깊은 개념입니다. 히브리어 “שוב” (shuv)는 ‘돌아가다’, ‘회복되다’는 뜻을 지니며, 단지 개인적 회심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로의 회복을 내포합니다.
탈무드와 미드라쉬 문헌들은 테슈바를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גדולה תשובה שמביאה רפואה לעולם”
“위대한 것은 테슈바이다. 그것은 세상에 치유를 가져온다.”
— 바빌로니안 탈무드, Yoma 86a
이처럼 테슈바는 치유적 기능을 하며, 죄의 용서와 공동체의 회복을 동시에 추구합니다.
2. 예수님의 테슈바: 죄의 고백을 넘어 회복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테슈바는 감정적 슬픔을 넘어 실천적 회복을 동반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눅 7:36–50)는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녀는 단지 죄를 고백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반응함으로써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도다. 이는 그가 사랑함이 많음이라.”
(누가복음 7:47)
예수님은 율법적 정결례를 거치지 않고, 자비와 사랑의 관계 속에서 회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아가다 방식으로, 윤리와 신학, 감정과 공동체의 회복을 동시에 담아냅니다.
3. 회복(Tikkun)의 목적은 공동체
랍비 전통에서 테슈바의 궁극적 목적은 개인의 구원이 아닌 공동체의 회복(Tikkun Olam, תיקון עולם)입니다. 바빌로니안 탈무드 Sanhedrin 98b에서는 메시아가 올 때는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이라 하며, 전 인류적 회복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역시 고립된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재구성을 겨냥합니다:
•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진정한 예배자의 회복 (요 4)
•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는 정결 공동체의 회복 (막 5)
• 간음한 여인에게는 정죄 없는 자비 공동체 (요 8)
•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사는 경계 넘는 공동체 (눅 15)
이러한 회복은 모두 윤리적이고 감정적인 공동체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죄 사함”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새로운 공동체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4. 사랑과 자비: 하나님 나라 윤리의 중심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단지 종말론적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가 작동하는 윤리적 실재입니다.
그 중심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7)
이것은 중심 이동의 윤리입니다. 고전적인 율법 윤리는 의무적이고 규범 중심적으로 접근하며, 주로 외적인 정결함과 규칙의 준수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러한 틀 안에서 공동체의 경계를 지키기 위해 배제와 구분이 강조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윤리는 내적이고 관계 중심적입니다. 율법의 정신을 사랑과 자비로 해석하며, 타인과의 감정적 공감과 자발적 헌신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윤리는 공동체를 배제하기보다는 회복시키고 통합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예수님은 공동체 정결보다 자비를 우선하셨고, 할라카의 공정성보다 아가다의 회복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모든 윤리적 중심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צלם אלהים)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5. 테슈바와 하나님 나라 공동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아가다적 회복 이야기로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윤리적 특성을 지닙니다:
1. 자비 중심적 – 과거의 상처와 죄를 정죄하기보다 회복을 선포함
2. 관계 중심적 – 율법보다 사랑, 정결보다 포용을 중심으로 관계 맺기
3. 내면 중심적 – 외적 행위보다 내면의 의도와 방향 전환을 중요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테슈바를 통해 회복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단지 법적 기준이 아니라, 마음의 윤리, 자비의 문화, 사랑의 실천입니다.
6. 아가다적 테슈바, 회복된 공동체
예수님의 테슈바는 단지 “죄를 용서받는 경험”이 아니라, “자기 존재 전체가 변화되고 하나님 나라의 윤리 안에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랍비 유대교의 테슈바는 언약 공동체로의 복귀였고, 예수님의 테슈바는 은혜와 자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로의 초대였습니다.
이 회복은 곧 공동체의 회복이며, 아가다적 이야기로 풀어낸 하나님 나라의 새 이야기였습니다. 이는 단지 당시 유대인만이 아니라, 오늘의 모든 신자들에게 새로운 윤리,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삶의 중심 이동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 – 예수님의 아가다와 새로운 인간 공동체>
The Restoration of the Image of God – Jesus’ Aggadah and the New Human Community
1. 하나님의 형상 (Tzelem Elohim, צֶלֶם אֱלֹהִים)의 본래 의미
창세기 1:27은 인류의 정체성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בְּצֶלֶם אֱלֹהִים בָּרָא אֹתוֹ”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유대 랍비 문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단순히 외형이 아닌 윤리적·관계적 성품으로 해석했습니다. 미쉬나 Avot 3:18에 따르면:
“חביב אדם שנברא בצלם”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존귀하다.”
탈무드 또한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세상의 생명과 같다”고 말하며(산헤드린 37a), 인간 존엄성과 공동체 윤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설명합니다.
2. 죄로 인한 왜곡과 예수님의 회복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훼손되고 가려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 형상을 회복하는 ‘새 사람’(ἄνθρωπος καινός, anthrōpos kainos)을 세우는 사역입니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너희는 새 사람을 입으라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
(에베소서 4:24)
예수님의 아가다는 이러한 형상의 회복을 서사로 풀어냅니다. 병든 자, 정죄받은 자, 잊혀진 자를 회복시키는 이야기들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드러나는 순간들입니다.
3. 예수님의 공동체: 새로운 아담의 인간학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בן–האדם)로 지칭하십니다. 이는 다니엘서적 메시아 상징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인간의 원형(New Humanity)의 선언입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새로운 아담의 인간 공동체의 출발점으로 묘사합니다(눅 3:38 참조).
이 새로운 공동체는:
• 성별, 혈통, 계층의 구분 없이 (갈 3:28)
• 자비, 용서, 화해의 실천 안에서
• 마음과 삶이 일치하는 내면 윤리를 중심으로형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살아있는 존재’로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4. 예수님의 아가다: 회복된 형상의 이야기화
예수님의 많은 비유와 행위는 단지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서사로 담아낸 ‘살아있는 아가다’입니다.
복음서 속 예수님의 만남의 이야기들은 단순한 치유나 교훈을 넘어, 인간 존재의 형상이 회복되는 사건으로 전개됩니다.
• 향유를 부은 여인(눅 7장)은 사람들로부터 정죄받은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인해 용서받은 예배자로 회복됩니다. 그녀의 눈물과 향유는 회개의 상징이자, 사랑의 응답이었습니다.
• 혈루증을 앓던 여인(막 5장)은 율법상 정결 규범 밖에 있었던 자로 사회에서 소외되었지만, 예수님의 응답은 그녀를 “딸아”라고 부르며, 그녀의 존재를 존귀한 하나님의 딸로 재정의합니다.
• 사마리아 여인(요 4장)은 민족적, 도덕적으로 사회적 낙오자로 여겨졌으나,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로 부름받습니다. 그녀는 지역 공동체의 전도자가 되어 돌아갑니다.
•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 8장)은 종교 지도자들의 모욕과 정죄의 대상이었으나, 예수님의 자비로운 침묵과 선언 속에서 정죄 없는 은혜의 공동체 안으로 초대된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예수님이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시키시는 사역을 보여주며,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넘어서 존재의 회복과 공동체 재형성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율법의 기준 안으로 회복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 회복은 단지 죄 사함이 아니라, 존재의 재해석이며, 관계의 재정의입니다.
5. 하나님 나라 윤리는 형상의 윤리
예수님의 윤리는 단지 계명 지키기나 도덕적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는 정체성 기반 윤리입니다.
예수님의 율법 이해는 고전적 유대 할라카와는 본질적인 방향 전환을 보여줍니다. 고전적 할라카는 외적인 계명 준수와 행위의 규제에 중점을 두어,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것으로 경건함을 판단했습니다. 이는 공동체의 경계를 유지하고 정결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작동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내면적 할라카는 존재와 마음의 중심에서 출발합니다. 계명의 형식보다 마음의 상태와 정체성의 회복을 강조하며, 경계를 유지하기보다 자비와 은혜로 경계를 넘어서는 개방성을 실천하셨습니다. 이는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내면에서부터 확장시키는 방향입니다.
이것은 힐렐의 해석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실천의 최대치로 확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모든 인간을 ‘형상을 입은 자’로 인정하는 공동체입니다.
6. 형상 회복을 위한 아가다의 여정
우리가 예수님의 아가다를 따라 읽는다는 것은, 단지 한 교훈이나 메시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형상 회복의 여정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여정은:
• 테슈바를 통해 죄와 자기중심성에서 돌이키고,
• 자비와 사랑을 통해 회복의 공동체를 이루며,
• 하나님 형상의 존엄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곧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영적, 정체적 기초입니다.
<베다니의 마리아 향유 사건들: 사복음서의 조화와 구분>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향유를 부은 여인”의 장면은 깊은 감동과 신학적 상징을 품은 이야기로 네 복음서에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특히 요한복음 12장,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 그리고 누가복음 7장에 기록된 이 사건들은 서로 유사해 보이지만,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으로 세 개의 서로 다른 독립적인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1. 요한복음 12장의 베다니 사건: 사랑과 장례의 상징
요한복음 12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식사하시던 중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 여인은 내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라고 해석하십니다(요 12:7). 이는 마리아의 행동이 단순한 존경을 넘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예배적 행위였음을 시사합니다.
이 마리아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누이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일부 전통적 해석에서는 이 마리아가 훗날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요 20:1)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둘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단지 “마리아”라는 공통 이름과 예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이 동일한 성격의 인물들로서 신학적 평행성을 이루는 것으로 봅니다.
2.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의 향유 사건: 머리에 부은 기름부음
마태와 마가는 유사한 내용을 전하고 있으나, 장소는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한 여인이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며, 제자들이 낭비라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이 행동을 “내 장례를 준비함”이라 해석하십니다. 요한복음과는 다르게 발이 아니라 머리에 붓는 것이며, 여인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두 복음서는 동일한 사건을 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을 앞둔 예언적 행위이자, 왕적 기름부음의 상징으로 이해됩니다. 머리에 향유를 붓는 행위는 구약에서 왕이나 제사장을 세울 때의 기름부음을 떠올리게 하며, 예수님의 메시아직과 죽음의 영광을 동시에 암시합니다.
3. 누가복음 7장의 죄 많은 여인: 회개와 용서의 극적인 드라마
누가복음 7장 36–50절에 나타나는 향유 사건은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 이야기입니다. 장소는 갈릴리 어딘가의 한 바리새인(시몬)의 집이며, 여인은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여자”로 묘사됩니다. 이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씻은 뒤,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사랑과 회개를 인정하시며,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시간적으로도 예루살렘 입성보다 훨씬 이른 시점의 사건이며, 본질적으로 회개와 용서의 신학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여인은 이름 없이 등장하며, 전통적으로 마리아 막달라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경향도 있었지만, 본문상 그런 연결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4. 역사적, 신학적 구분의 필요성
이처럼 향유 사건은 네 복음서에 걸쳐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 누가복음 7장: 갈릴리, 바리새인의 집, 이름 없는 죄 많은 여인, 회개의 상징
• 마태복음 26장 & 마가복음 14장: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 이름 없는 여인, 예언적 장례 준비
• 요한복음 12장: 베다니, 마르다·마리아·나사로의 집, 마리아, 사랑과 헌신의 상징
문학적으로 이 세 이야기에는 공통적인 모티프—향유, 눈물, 머리카락, 예수의 수난 예고—가 있으나, 각 복음서 저자는 자신만의 신학적 목적에 따라 이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편집하고 강조합니다. 이를 단순히 동일 사건의 다양한 전승이라고 보기보다는, 각기 다른 신학적 메시지를 담은 개별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절합니다.
예수님의 발이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신비적 행동이 아니라, 각각의 복음서가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회개와 용서, 사랑과 헌신, 장례와 영광이라는 복합적 상징 속에서,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먼저 예감하고 응답한 신앙의 인물로 자리매김됩니다. 향유의 향기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도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앞에서 우리가 드리는 참된 헌신과 예배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제 복음서별로 나타난 향유 사건 비에 대한 세 가지 독립된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마태복음/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각각 다른 형태로 등장한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사건들은 장소, 등장 인물, 행동 방식, 주제와 반응 등에서 차이를 보이며, 각각의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장소
• 누가복음 7:36–50에서는 갈릴리 지역, 구체적으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 마태복음 26:6–13과 마가복음 14:3–9는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을 배경으로 합니다.
• 요한복음 12:1–8은 역시 베다니지만,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일로 기록합니다.
2. 여인
• 누가복음에서는 “죄 많은 여자”로 불리며 이름이 명시되지 않습니다.
•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도 “한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신원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 요한복음에서는 명확하게 마리아(나사로의 자매)로 등장하며, 그 정체가 분명합니다.
3. 행동
• 누가복음의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씻은 후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 마태와 마가는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 요한복음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4. 주제
• 누가복음은 죄 사함을 받은 여인의 사랑이 핵심이며, 예수님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까지 사용하십니다.
•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장례 준비를 주제로 하며, 여인의 행동이 기억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요한복음에서는 마찬가지로 장례 준비의 상징성이 강조되며, 동시에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한 복선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5. 시점
• 누가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초중반, 즉 공생애 전반부에 해당합니다.
• 마태와 마가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 예수님의 수난 직전에 해당합니다.
•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6일 전, 즉 십자가 사건 직전의 시점입니다.
6. 반응
•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의 선지자됨에 대해 의심하며, 예수님은 비유로 답하십니다.
• 마태와 마가에서는 제자들, 특히 유다가 낭비라며 반발하고, 예수님은 여인을 칭찬하십니다.
•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직접 항의하며, 예수님은 그녀를 옹호하십니다.
이처럼 세 복음서의 향유 사건은 각각 다른 시점, 인물, 장소, 신학적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회개와 용서의 감동적인 서사를 통해 예수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부각하며, 마태와 마가는 여인의 행위를 메시아의 장례 예고와 연계합니다. 요한복음은 인물의 정체를 명확히 하며, 죽음을 앞둔 예수님에 대한 헌신과 제자들 가운데의 긴장을 드러냅니다.
이 각각의 기록은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를 해석하는 복음서 저자들의 고유한 신학적 시각을 반영하며, 독자들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이 어떻게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세 가지 사건으로 보는 주된 근거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장소와 인물의 뚜렷한 차이
• 누가복음은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이야기이며,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여인이 등장합니다.
• 마태‧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인근 베다니에서의 사건으로, 나병환자 시몬의 집입니다.
• 요한복음은 마르다‧마리아‧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일로 장소와 인물의 정체가 명확히 다릅니다.
2. 행동의 차이 (머리 vs 발, 눈물 vs 향유)
• 누가복음의 여인은 울면서 예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붓습니다.
•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장면만 기록합니다.
• 요한복음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은 행위를 기록합니다. 이는 누가와 유사하지만 시점과 인물이 다릅니다.
3. 신학적 강조점이 각기 다름
• 누가복음은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며 회개와 구원이 중심입니다.
• 마태‧마가복음은 장례 준비와 복음 안에서 여인의 행동이 기억됨을 강조합니다.
•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의 탐욕과 배신을 대비시켜 헌신과 사랑의 진정성을 보여주며,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는 영적 통찰을 부각시킵니다.
학계와 교부 전통의 이해
• 교부들 중 일부는 이 세 사건을 하나의 통합 이야기로 해석하려 했습니다. 특히 서방 교회 전통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 베다니 마리아 = 죄 많은 여자’라는 동일 인물설이 형성되었습니다.
• 그러나 현대 성서학자들 다수는, 문맥‧문체‧신학적 구성‧등장인물 분석을 토대로 세 사건을 서로 다른 이야기로 분리해서 이해합니다.
세 가지 향유 사건의 구분
성경적 근거와 문맥 분석에 따라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밀한 해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적으로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사건이 다른 시기, 다른 인물, 다른 메시지로 하나님의 복음을 다채롭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풍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향유 사건에 대한 랍비 유대교의 관점>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여인의 행동—“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씻고, 머리털로 닦은” 사건—은 단순한 정서적 표현을 넘어, 랍비 유대교의 관습적 맥락, 사회적 금기, 그리고 신학적 상징성을 지닌 강력한 테슈바(Teshuvah, 회개)의 몸짓입니다. 아래에 랍비 유대교적 관점, 예수님의 반응, 그리고 신학적 통합 해석을 구조적으로 종합해 드립니다.
1. 랍비 유대교의 관점: 죄인의 회개와 여성의 행동에 대한 이해
1) 여인의 행동은 테슈바의 몸짓인가?
랍비 유대교에서 “진정한 회개(Teshuvah Sheleimah, תשובה שלמה)”는 단순한 말이나 감정 표현이 아니라, 삶 전체를 뒤흔드는 철저한 변화와 겸손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 바빌로니아 탈무드 Yoma 86b:
“위대한 죄인도 온전한 회개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회개는 죄를 공로로 바꾸기 때문이다.”
여인이 행한 향유 붓기, 발에 입맞춤, 머리털로 닦기는 고대 근동에서 최상의 존경과 비굴함, 전적인 자기를 낮춤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랍비 문헌에서 머리를 푸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수치의 상징(민수기 5장), 혹은 슬픔의 표현이었으며, 머리카락은 유대 여성의 존엄을 상징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발을 닦는 행동은 극단적 겸손과 자기를 낮추는 회개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2) 랍비 전통에서 ‘죄인’ 여인의 식사 동석은 금기
• Mishnah, Avot 1:5:
“너는 여자와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라… 이는 사람을 죄에 이르게 하며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한다.”
바리새적 경건에서는 공적인 공간에서 죄 많은 여인이 남성(랍비)의 주변에 접근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며, 향유를 붓고 발에 입맞추는 행위는 극히 부정하고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인의 행동은 당시 랍비적 기준에서는 탈경건적, 부정한, 공공연한 스캔들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 예수님의 반응: 회개의 본질과 죄 사함의 선언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율법적·의례적 경건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회개의 진실성과 사랑의 크기로 판단하셨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 (눅 7:47)
죄의 경중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돌이켰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얼마나 강하게 반응했는가가 중요하다는 신학적 기준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과 여인의 대조를 통해 율법적 경건 vs. 관계적 사랑의 차이를 드러내십니다.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 – 선지자적 권위 + 신적 권한
이 선언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갖고 있음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cf. 마가복음 2:10). 랍비 문헌에서는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권한이기에, 예수의 선언은 메시아적 정체성과 신성(θεότης)의 암시로 작용합니다.
3. 신학적 해석: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 준비의 상징
비록 누가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장례 준비”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지만, 전체 복음서 전통 속에서 이 향유 사건은 장례의 예표적 사건으로 점점 해석됩니다.
• 마태복음 26:12에서는 명확히,
“이 여인이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함이라”
• 요한복음 12:7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나의 장례를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였다.”
향유 사건의 신학적 의미 요약
이 향유 사건은 단순한 감정적 표현을 넘어, 복합적인 신학적 의미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를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회개의 실천
여인이 흘린 눈물, 그녀가 가져온 향유, 그리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은 행위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전 존재를 통해 드러난 테슈바(תשובה, 회개)의 상징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전체를 사용해 회개의 마음을 표현했고, 이것은 유대적 전통 안에서 온몸과 마음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2. 여인의 사랑
예수님은 이 여인이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욱 큰 사랑을 보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의 헌신은 계산된 행동이 아니라, 은혜에 감격한 자의 과잉된 사랑이었습니다. 향유는 매우 값비싼 것이며, 이는 사랑의 깊이와 헌신의 강도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3. 사회적 금기 극복
이 사건은 율법적 경계, 특히 바리새적 정결 규례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금기를 과감히 넘는 행위였습니다. 여인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신분이었고, 머리털로 남성의 발을 닦는 행위는 당시 문화적 금기를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외적 규례보다 내면의 회개와 진실한 사랑이 하나님 앞에서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4. 메시아의 죽음
향유를 부은 사건은 단순한 환대의 표현을 넘어, 예수님의 장례 준비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직감했거나,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5. 죄 사함의 권세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이 단지 위대한 교사나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죄의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이 선언은 청중과 독자에게 예수님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와 같이 향유 사건은 회개와 사랑, 사회적 혁신, 메시아적 예고, 그리고 예수의 신성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지닌 강력한 복음적 상징입니다.
향유 여인의 행동은 복음의 축소판입니다. 이 사건은 복음 전체의 핵심—죄의 자각 → 깊은 회개 → 전적인 사랑 → 용서의 선언 → 평안의 회복—이 응축된 장면입니다. 당시 랍비 전통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을 여인의 행동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을 보여주는 ‘모범적 테슈바’로 높이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없이 예비한 최초의 제자’이자, 메시아적 사명의 진실을 가장 먼저 체감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과 메시야적 성취>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적의 기록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 구조와 메시아적 계시가 함축된 사건으로서, 사복음서 전체에서 반복되며 다양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복음서적 분포, 유사한 예수님의 비유 및 가르침, 외경 혹은 유대적 해석 전통, 그리고 신학적 해석사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복음서에 나타난 향유 사건 비교
앞서서 이미 향유 사건을 비교했지만 메시야적 성취 사건과 연결하기 위해 한번 더 정리해 봅니다.
향유를 예수께 부은 사건은 네 복음서에 각각 다른 형태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인, 장소, 반응, 상징성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누가복음 7:36–50에서는 갈릴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름 없는 “죄인”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주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그녀를 옹호하시며, 이 사건은 죄 사함, 회개(테슈바), 사랑의 상징으로 이해됩니다.
마태복음 26:6–13과 마가복음 14:3–9은 거의 유사하게 기록되며, 베다니에서 이름 없는 여인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께 향유를 붓습니다. 제자들의 분노와 비난이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을 장례 준비로 해석하며 칭찬하십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이 행동이 “기억될 일”이라고 강조됩니다.
요한복음 12:1–8에서는 동일한 베다니에서, 이번에는 마리아(나사로의 누이)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마르다가 식사를 섬깁니다. 가룟 유다가 비난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를 장례 준비로 해석하며 마리아의 사랑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이 사건들은 서로 다른 인물과 상황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상징적 행위, 회개의 실천, 그리고 헌신적 사랑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복음서 모두 향유 부음 사건을 전하며, 마태·마가·요한은 예수의 죽음을 앞둔 장례 예식의 예표로 보고, 누가는 죄 사함과 사랑의 관계를 중심으로 조명합니다.
여인의 정체는 요한복음에서만 “마리아”로 특정되며,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름이 없는 여인입니다. 이 네 사건이 하나의 사건인지, 유사한 복수의 사건인지 학자들 간 이견이 있으나, 누가복음 사건은 시기적·신학적으로 다른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2. 예수님의 비유 및 유사한 사건 비교
예수님의 가르침 중 이 사건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복음의 내러티브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향유 사건은 여러 비유와 신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핵심 메시지와 구조적 유사성을 통해 더욱 깊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1.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11–32)
이 비유는 아버지가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조건 없는 용서를 베푸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향유 사건에서 예수님이 죄 많은 여인을 온전히 받아들이신 모습과 연결됩니다. 여인의 테슈바(회개)는 탕자의 귀환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용서를 드러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과 그의 사역이 실제로 표본으로서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2.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누가복음 18:9–14)
이 비유는 자신을 의롭다 여긴 바리새인과, 겸손히 회개한 세리를 대비시켜, 겸비한 자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진리를 전합니다. 향유 사건에서도 바리새인 시몬은 여인을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녀의 겸손함과 진정한 사랑을 높이십니다.
3. 용서받은 빚진 자의 비유 (마태복음 18:21–35)
이 비유에서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가 타인을 용서하지 않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는 다른 이도 용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는 향유 사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는 구조와 동일하며, 여인의 과잉된 사랑은 곧 용서받은 자의 응답으로 해석됩니다. 많은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나타나지만 드물게 시몬의 집에서 죄인된 여인의 향유에 대하여 탕감 받은 자의 비유를 사용하셨으며, 이로서 실제 청중들에게 이해되는 임팩트가 매우 강하게 전달되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향유 사건은 복음서의 여러 비유들과 함께 읽을 때, 하나님의 용서, 회개의 본질, 그리고 사랑의 반응을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
3. 외경과 유대문헌 속의 유사한 이야기 또는 신학적 구조
랍비 아가다에는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눈물과 회개를 받으신다”는 이야기가 여러 편 있습니다. 예: Lamentations Rabbah에서 눈물로 하나님의 옷자락을 적시는 죄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 외경 중에서는 마카베오서나 시빌의 예언 등에서 향유나 기름 부음이 종말론적 왕이나 제사장에게 예비되는 장면이 존재합니다.
4. 역사 속 신학자들의 해석
성 어거스틴 (Augustine)
이 여인을 ‘교회의 표상’으로 해석합니다. 향유는 교회의 헌신과 예배, 머리털은 가장 귀한 것으로 주께 섬김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발에 입맞추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받드는 것이다.”
마틴 루터 (Luther)
향유 사건을 통해 “의로움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받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율법주의자 바리새인과 은혜받은 여인의 대조를 강조합니다.
칼 바르트 (Karl Barth)
이 사건은 “선택받은 죄인의 신학”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해석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외적 도덕이나 규범을 넘어선 내면의 전복이라고 주장합니다.
5. 메시아닉 유대교(Messianic Judaism)의 해석
메시아닉 유대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바라봅니다:
여인은 진정한 테슈바의 모델입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향유 부음은 단순한 행위가 아닌, 기름부음(Mashiach)의 정체성에 대한 응답입니다.
• 히브리어 מָשִׁיחַ (Mashiach)는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여인의 행동은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고 경배한 선포적 행위로 해석합니다. 그녀는 “이방인들과 죄인들을 위한 메시아 왕국의 첫 열매”로 간주됩니다.
향유 여인의 사건은 복음의 모형이며 교회의 거울이다. 이 사건은 죄의 인식 → 회개 → 사랑의 헌신 → 용서 → 평안의 회복이라는 복음의 내적 논리를 드라마처럼 시각화한 사건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메시아로 기름부음을 받으시는 장면이면서, 그분이 죄인과 교회의 친구가 되심을 강력히 증언하는 내러티브입니다. 이 여인은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복음서 전체를 요약하는 ‘살아 있는 예화’로 기억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13).
<두 기름부음 사건에 대한 신학적·역사적 재조명>
1. 복음서 내 기름부음 사건의 구분
성경 내 기름부음 사건은 전통적으로 하나의 사건으로 오해되어 온 측면이 있으나, 문맥적, 지리적, 인물적, 신학적 차이를 고려할 때, 누가복음 7장과 요한복음 12장(및 마태, 마가)은 명확히 별개의 사건임이 드러납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 인물: 누가는 이름 없는 죄 많은 여인, 요한은 마리아를 명확히 지칭
• 장소: 갈릴리(누가) vs. 베다니(요한, 마태, 마가)
• 시기: 공생애 초기(누가) vs. 수난 주간 직전(요한, 마태, 마가)
• 의도: 회개의 행위(누가) vs. 감사와 장례 준비(요한 외)
따라서 신학적으로도 ‘회개’와 ‘장례 준비’라는 주제가 각각 나타나며, 두 사건은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2. 복음서 본문 비교
(1) 누가복음 7:36–50 – 죄 많은 여인의 회개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의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던 중, 한 “죄 많은 여자”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향유를 붓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이 여인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름이 명시되지 않으며, 신분은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죄인’으로 제시됩니다. 이 장면은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예수의 비유와 연결되며, 테슈바(Teshuvah, 회개)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핵심 메시지: 용서받은 자의 사랑, 회개의 외적 행위, 예수의 사죄 권세
(2) 마태복음 26:6–13 / 마가복음 14:3–9 – 이름 없는 여인의 헌신
마태와 마가는 동일한 구조를 가진 병행본문을 제공하며, 두 복음서 모두 예루살렘 입성 직전 베다니에서의 만찬 사건을 전합니다. 장소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며, 한 익명의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제자들이 낭비라며 비난하자, 예수는 “그 여인이 내 장례를 준비했다”고 말하며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고, 후대에 기억될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핵심 메시지: 메시아의 죽음을 위한 장례 준비, 예언적 행위, 제자들의 오해
(3) 요한복음 12:1–8 – 마리아의 사랑과 예언
요한복음은 베다니에서의 사건을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하며, 여인을 나사로의 자매 마리아라고 밝힙니다. 그녀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이를 비난하며 자선을 들먹이지만, 예수는 그녀를 옹호하며 다시 한 번 장례 준비를 언급하십니다.
핵심 메시지: 마리아의 헌신, 메시아의 죽음을 향한 감정적 예비, 가룟 유다의 배반 복선
3. 역사적 오류의 정정
서구 전통, 특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서 비롯된 마리아 동일인설(막달라 마리아 = 베다니 마리아 = 죄 많은 여인)은 오늘날 학계에서는 더 이상 지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결론이 합의되고 있습니다:
•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림에서 해방된 여성(눅 8:2), 매춘부였다는 증거 없음
• 베다니의 마리아는 나사로의 자매로,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성이나 “죄 많은” 자로 불리지 않음
• 누가복음의 여인은 익명의 죄인으로, 마리아들과 동일 인물로 볼 수 없음
이 오류는 성경 본문의 충실한 문맥 분석 없이 전통적 주석에 기대어 생겨난 오해입니다. 이를 정정하는 것은 성서 해석학적으로도 중요합니다.
4. 신학적 메시지 비교
중세 교회, 특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누가복음의 ‘죄 많은 여자’, 마태·마가복음의 ‘익명의 여인’, 요한복음의 ‘마리아’를 동일 인물로 보는 설교를 하였고, 이는 오랫동안 서방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았음을 바로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오해의 근원을 찾기 위해 복음서 본문을 비교해보면 이 세 인물은 신분, 장소, 신학적 주제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누가복음 7장의 여인은 갈릴리에서 등장하는 익명의 죄인이며, ‘회개와 용서’가 핵심입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의 여인은 베다니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헌신하는 자’로서, ‘장례 준비’가 중심 주제입니다.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자매 마리아가 등장하여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닦으며 ‘사랑과 예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이 세 인물은 동일인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물로 보는 것이 문헌적‧신학적으로 타당하며, 각 사건은 독립적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에 대한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향유 사건은 누가복음 7:36–50에 등장하며, 갈릴리의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이름 없는 ‘죄 많은 여자’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과 머리털로 닦는 회개의 행위를 통해 용서받은 자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 장면은 회개, 용서, 그리고 사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두 번째 향유 사건은 요한복음 12:1–8, 마태복음 26:6–13, 마가복음 14:3–9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마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준비로 향유를 붓는 행위를 통해 감사와 사랑, 그리고 장례를 예비하는 상징적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향한 예비의 행위로 해석됩니다. 누가복음은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는 테슈바의 핵심을 전달합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죽음 준비로서의 경배를 묘사합니다.
5. 신학적 분석
(1) 회개와 사랑: 누가복음
누가복음은 ‘죄 사함’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눈물과 향유, 머리털은 몸 전체로 드러나는 회개의 상징입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눅 15),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 18)와 신학적으로 연결됩니다. 죄 많은 여인은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예수 앞에 나아감으로써 테슈바의 전형이 됩니다.
(2) 헌신과 메시아의 죽음: 마태·마가·요한
다른 복음서에서는 여인의 행위를 통해 예수의 장례가 상징적으로 예고됩니다. 이는 예수의 죽음이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된 구속사의 일부임을 드러냅니다. 향유는 왕의 기름부음이자 죽음의 준비로 기능합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사랑의 극치로서의 예배가 강조되며, 유다의 배반과 대조됩니다.
6. 문헌학적 세부사항 정리
요한복음 11:2은 향유 사건이 아직 일어나기 전임에도 과거시제로 묘사됩니다. 이는 마리아가 이미 향유를 부었던 자로 알려져 있었음을 전제하는 편집적 단서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8:2의 “kai egeneto” 구문은 문학적으로 연결성을 강조합니다. 누가가 의도적으로 죄 많은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를 구분하고자 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7. 해석학적 결론
한 사건으로 보는 전통 해석은 본문을 ‘조화시키려는 시도(harmonization)’에 가깝고, 현대 성서신학은 이를 경계합니다. 오히려 복음서 저자들이 각기 다른 시기, 인물,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독립된 사건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복음서의 신학적 다양성과 통일성이 살아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향유 사건은 단순히 하나의 기적이나 여인의 감성적 반응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이 사건들은 각각의 복음서가 강조하는 신학적 메시지와 문학적 구조 안에서 독립적으로 자리하며, ‘회개’와 ‘장례 준비’라는 서로 다른 주제를 드러냅니다. 특히, 여인의 정체를 둘러싼 전통적 오해는 복음서의 본문에 대한 면밀한 문헌 분석을 통해 극복되어야 합니다. 결국, 이 사건들은 예수께 나아가는 자의 진실한 마음—회개와 사랑—을 통해 메시아의 정체와 사명을 깊이 있게 증언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향유 부은 여인의 사건 비교와 신학적 의미>
본 글은 복음서의 향유 사건을 심도있게 이해할 뿐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 있는 내용과 당시의 랍비 유대교의 배경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의미를 찾는데 있습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네 곳에서 등장하며, 각각의 사건은 장소, 시기, 등장 인물, 메시지 측면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본 글은 이미 앞서서 충분히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된 향유 사건을 분석하였고, 각 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신학적 메시지와 문학적 구조를 비교함으로써, 예수님의 정체성과 복음의 핵심을 더욱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기술했습니다.
1. 문화적 해석: 머리카락, 향유, 발 닦음
누가복음에서 여인이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는 행위는 당시 유대 문화와 중동의 규범에서 매우 파격적이고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탈무드와 미슈나의 기록에 따르면, 기혼 여성은 머리를 가리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머리를 드러내는 것은 부정하거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여인이 남성의 발을 만지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아내가 남편에게만 하는 섬김의 표현이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한 여인의 행위는 당시 관습을 파격적으로 넘어선 고백적 행위이며, 그녀의 내면에 있는 죄의 자각과 회개의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도 예수님께 전적인 사랑과 믿음을 드린 것임을 보여줍니다.
2. 신학적 메시지: 예수의 정체성과 복음의 본질
사복음서에 기록된 향유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 각각의 복음 저자가 강조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반영합니다. 누가는 회개와 용서, 믿음을 강조하며 예수님의 선지자적 권위를 부각합니다. 마태, 마가, 요한은 향유를 통한 장례 준비와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상징으로서 여인의 헌신을 조명합니다. 요한은 특별히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의 정서를 강조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영광의 길임을 드러냅니다.
3. 복음서의 다양성과 통일성
복음서마다 향유 사건에 대한 서술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사랑, 헌신, 회개, 그리고 그분의 죽음을 중심으로 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이 사건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되, 각 복음서의 고유한 관점과 신학을 존중하며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성들은 단지 상징적 인물이 아니라, 예수를 향한 헌신과 신앙의 본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인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께 향유를 부을 수 있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헬레니즘과 유대 전통 속 여성의 행위에 대한 인식 차이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향유 여인의 재해석>
1. 헬레니즘 시대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유대 관습의 대비
헬레니즘 시대의 여성들은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위치를 점유했지만, 공통적으로는 미(美), 매혹, 예술, 그리고 이로 인한 유혹성과 연관되어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여성을 에로스적 존재로, 혹은 가정의 미덕을 지키되 ‘남성에 종속된 자’로 보는 이중적 시각이 존재했습니다.
반면 유대 전통에서는 여성의 행동 규범이 더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랍비 전통에 따르면,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목소리를 높이거나 낯선 남성과 접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으며, 결혼한 여성은 머리를 가려야 했고, 모든 신체적 접촉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철저히 규제되었습니다. 미쉬나와 탈무드에 따르면, 여인의 외모와 머리카락은 남성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 있기에 공공의 정결을 위해 ‘머리 덮기’는 필수였습니다 (cf. 미쉬나, Ketubot 7:6).
이런 배경에서 보면,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은 행동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파격이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의 여인이 사람들 앞에서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을 풀어 닦았다는 행위는, 당시 유대 전통에서는 혼인관계 외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시몬 바리새인은 곧바로 예수께 여인의 죄성을 지적하며, 그녀를 부정한 자로 규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율법적 금기보다 회개의 진정성을 보셨고, 여인의 사랑과 용서를 연결 짓는 새로운 윤리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한 여인의 구원 이야기라기보다, 헬레니즘과 유대 종교문화 사이에서 신앙과 인간성을 다시 정의하려는 복음의 강력한 개입이라 볼 수 있습니다.
2. 고린도전서 11장: 바울의 여성 규범과의 신학적 대비
고린도전서 11장 5–15절에서 바울은 여성이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이를 남녀 창조 질서와 명예(honor)의 문제로 설명하며, 여성이 머리를 가리지 않는 것은 ‘머리를 미는 것과 같다’고 표현합니다(고전 11:6). 당시 고린도 교회의 헬레니즘 문화는 여성의 해방된 행동, 공개 예언, 머리 노출 등을 유도하였고, 바울은 이를 공동체의 질서와 예배의 영적 권위 문제로 보았습니다.
이와 대비해 누가복음의 향유 여인은 머리를 풀고 공개적으로 예수의 발을 씻으며, 유대-로마 문화 모두의 관점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이 여인의 행동을 죄의 회개, 사랑의 고백, 메시아의 장례 준비로 해석하며 신학적 반전을 선포합니다.
이 두 본문을 비교할 때, 바울의 규정은 공동체 내에서의 질서와 예배 규범을 강조하는 반면, 누가복음의 여인 사건은 회개와 은혜의 본질, 그리고 율법을 초월한 사랑의 능동성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두 본문은 충돌하기보다는 다른 신학적 차원에서 여성의 믿음과 행동을 조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교회 전통 속 향유 여인의 재해석
서방교회 전통에서는 중세를 거치며 누가복음의 향유 여인, 마리아 막달라, 그리고 베다니의 마리아를 동일 인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590–604)은 유명한 설교에서 이 세 여인을 하나의 회심한 인물, 곧 ‘죄에서 구원받아 예수를 섬긴 마리아 막달라’로 통합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후 중세 신학과 미술, 문학 속에 깊이 자리잡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라는 종종 붉은 옷을 입고 향유 병을 든 회개 여인으로 묘사되며, 특히 르네상스 미술에서는 관능성과 회개의 상징이 결합된 인물로 재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복음서 본문들의 문헌적 분석이나 역사적 정황과는 다소 동떨어진 신학적 종합 혹은 전통적 이미지 구축에 가깝습니다.
오늘날 학문적 신학에서는 각 복음서의 인물을 별개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누가복음 7장의 ‘죄 많은 여자’, 마태·마가복음의 ‘익명의 여인’, 그리고 요한복음의 ‘마리아’는 각각의 사건 배경, 시기, 신학적 주제가 다르며, 교회 전통 속 동일화는 후대의 해석적 산물로 간주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여성의 행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는 헬레니즘 문화와 유대 율법, 그리고 교회 전통과 신학 해석 사이에서 회개, 구원, 메시아적 고백, 그리고 사랑의 깊이를 조명하는 다차원적 이야기입니다. 여인의 행동은 문화적 금기를 넘어서고, 예수의 반응은 종교적 질서를 초월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전통 속에서 끊임없이 이 여인의 정체를 해석하고, 각 시대의 영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왔습니다. 이 모든 논의는 결국, 그리스도 앞에 선 인간의 사랑과 헌신은 언제나 체계화된 경계 너머에서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줍니다.
<글을 맺으며: 눈물로 드린 향유, 사랑으로 열리는 구원의 문>
그녀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죄인이라 지탄받던 여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집, 율법과 판단이 날을 세운 그 공간에, 한 여인이 조용히 들어옵니다. 그녀의 손에는 값비싼 향유가 들려 있었고, 두 눈에는 멈추지 않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은 여인—복음서 기자들은 오히려 그녀를 통해 복음의 본질을 가장 강렬하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도다. 이는 그가 많은 사랑을 보였음이라.” (눅 7:47)
죄의 크기는 은혜의 깊이를 드러내는 반향이 되고, 그 은혜를 입은 자의 사랑은 억누를 수 없는 헌신이 되어 넘쳐 흐릅니다. 이는 단지 감정적 격정이 아니라, 메시아를 알아본 영적 통찰이며, 구원을 향한 신앙 고백의 절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
우리는 이 여인의 발자취에서 그 말씀의 현현을 목도합니다. 그녀는 신학도, 율법의 조항도 말하지 않았지만, 눈물과 향유, 침묵과 손길,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비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여인 앞에 거울처럼 서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세상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비난을 던진다 해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그 한 걸음은 모든 것을 바꾸는 구원의 시작이 됩니다.
사랑은 말보다 먼저 행동합니다.
용서는 머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기억됩니다.
예배는 손에 든 것이 아니라 부어진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여인처럼, 침묵 속에서 눈물로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향유를 쏟는 희생, 머리털을 내어주는 겸손, 그리고 발을 붙들고 입맞추는 간절함으로, 우리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여인의 사랑은 향기로 남았고, 예수님은 그것을 영원한 복음의 일부로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막 14:9)
오늘도 향유를 준비하는 우리의 삶이
주님 앞에서 기억되기를…
아멘.
2025년 7월 23일 오후에 보스톤 김종필 목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