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언더우드의 기도를 기리며

긴 겨울의 황폐함을 딛고 부시시 대지의 풀섶을 헤치고 일어나는 봄기운이 가득한 부활 주일입니다. 여름날 무성하게 자랄 푸른 잎을 앞서서 달려온 새싹들의 키자라기 경주는 멀리 보면 난쟁이들의 키재기이지만, 그 사이를 헤집고 뛰노는 토끼와 다람쥐들 아직 겨울잠에 덜 깬 듯 굼뜬 몸놀림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영성계발] 부활주일 언더우드의 기도를 기리며 » 김종필 선교사 » 눈이 부시도록 쏟아지는 햇살은 찬란하고, 조용히 흔들어주는 샛바람은 부드러우나, 수묵화에서 수채화로 옮겨 가는 봄 그림은 나뭇가지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버드나무, 벚나무, 단풍나무에 피어 오른 꽃 망울들, 매화, 난초, 국화와 대나무만 4군자 행세하려는가 꾸짖듯 병풍치는 화가의 손놀림을 재촉합니다. 뿌연 회색 빛만 보던 과객에게 진노랑 개나리, 연분홍 진달래, 은 꽃송이 벚나무, 연둣빛 단풍나무, 마음 속 크레파스는 울긋불긋 꽃과 꽃망울로 가득 가득 채워집니다. 인생의 기다림이 값진 것은 화사한 봄날이 찾아 오기 때문인가요?

4월의 기도

내 손자 발그스레 보조개
도담도담 숨소리처럼
따사로운 4월 봄날

휘둘리는 풀섶에
가득한 새싹들의 노고지리
고개 돌린 시선마다
너울거리는 저 꽃들아

보라빛, 흰빛깔, 분홍색 히아신스
귀부인 자태 머금은 튤립
청초하며 수줍은 수선화
꽃 밭에 머물수록 다가오는 부활의 향기

이 봄날에 만끽하는 향기속에
에오라지 부흥을 위한 기도 소리
소담스런 하늘 사다리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어떤 일이든 선구자는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개척자는 대대에 걸쳐 기억되며, 최초의 인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게 각인됩니다. 죽음과 죄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리는 부활 주일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우리나라 인천 제물포 항구에 입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개신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기억해 봅니다. 바로 그 부활절날에,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가 인천 제물포 항구에 들어 오면서 드렸던 기도가 생각납니다.

언더우드의 기도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 곳,
지금은 아무것도 뵈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그들은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이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이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잖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저는 언더우드의 기도를 기억할 때마다, 1992년 1월 필리핀에 첫발을 내딛던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낯설고, 물 설은 그 땅에 뼈를 묻을 각오로 발을 내 딛던 그 땅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땅이 되었고, 그 영혼들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혼들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의 기도에 담긴 심경을 보면, 영적 어두움 (우상 숭배)과 분노가 가득한 백성들과, 백성들을 노예 대하듯 하는 조정(정부)과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과 절망감 그 무엇보다도 냉대와 무관심이 가득한 이 땅에서 일어날 부활과 부흥을 은총의 땅으로 바뀌는 모습으로 바라보는 간절함이 기도문에 담겨 있습니다. 언더우드가 바라 보았던 구한말 조선이 불과 100년 이 지나지 않아, 세계 경제 12대국이 되고, 반도체 1위 국가가 되고, 세계 군사력 5-6위를 달리며, K 드라마, K-pop등과 같은 한류를 일으키는 문화 강국으로, 스포츠, 교육, 의료, IT 산업과 세계 선교에서도 괄목할 만한 지도 국가가 된 복음 전도의 주자가 된 것을 본다면 믿지 못할 것입니다.

빛 바랜 오랜 사진속에 보여지는 구한말 인천 제물포 항에 입항한 파란 눈의 두 선교사들, 그리고 언더우드의 기도에 나타나는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는 조선의 영적, 물리적, 정신적 상태는 참담했을 것입니다. 거대한 천주교 탄압과 박해를 보며, 저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선의 임금은 한양에 입성한 선교사들에게 한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그들의 발을 묶어 둘 정도로 여행의 자유조차 보장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 교회사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사실 중국에서 사역하던 호레이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선교사가 이들보다 앞서 조선 땅을 밟고 사역하였지만, 아직도 한국 교회는 공식적 파송 선교사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구한말 조선에서 그리고 일제 식민지하에서도 사역을 했습니다. 이미 의료 선교사로 사역을 하던 알렌은 주한미국공사의 총영사 대리를 하고 있었으며, 고종의 윤허로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후에 알렌은 스크랜턴 여사와 언더우드를 초청합니다. 스크랜턴 여사는 이화학당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녀관을 세운 분으로 한국 선교 역사상 독보적인 분입니다. 언더우드는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 되는 광혜원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쳤습니다. 언더우드는 헨리 아펜젤러, 윌리엄 스크랜턴, 제임스 스코트 게일 등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을 한국어로 옮겼는데 그 기관이 바로 1887년 그리고 1893년 설립된 조선어 성경번역 위원회입니다. 1900년 5월에 신약 성경 3분 2가, 1911년에 『구약젼셔』가 출간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로 시작되는 한국 개신교회가 교회사의 시작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 제물포항에 들어 오기도 전에 의료 선교사인 호레이스 알렌이 먼저 들어 왔으며, 이들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많은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의 씨앗을 조선 땅에 뿌렸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처참하게 종교 탄압을 한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18세기 말부터 무려 100여년 동안 잔혹한 천주교 탄압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1785년 명례방 사건, 1791년 신해박해, 1795년 을묘박해, 1797년 정사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 1868년 한티 천주교 박해까지 대대적인 천주교회 박해와 탄압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와 병오박해가 참수와 옥살이와 유배 등 혹독한 탄압이 점철되어서 천주교회 4대 박해라고 말합니다.

조선 선교를 하려는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청나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조선의 쇄국 정책과 종교 탄압에 간담이 서늘해 지고, 조선땅에 들어가는 제도적 통로조차 없던 시기에도 목숨을 건 복음 전도는 결코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조선 선교의 물꼬를 튼 분은 천주교 박해가 정점에 있을 때에, 독일 경건주의 본고장인 할례에서 온 칼 구츨라프(Karl F. Gützlaff)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츨라프 성경으로 더 알려진 분입니다. 그는 조선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1832년 7월에 서해안 황해도의 백령도 근처 섬에 상륙, 관리들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구출라프 일행은 남쪽으로 내려와 충청도 홍주만 앞에 있는 고대 도에 도착하여 그 곳 관리들과 만나 국왕(순조)에게 통상을 원한다는 의사를 전달했으나 이 또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장벽 앞에 굴복하지 않고, 한문 성경과 전도책자, 주기도문 등을 조선어로 번역했습니다. 50여년 뒤에 다가 올 선교사들에게 미리 주춧돌을 깔아 주고 구한말 서구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는 물꼬를 열어준 진정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츨라프가 있었기에 로스(John Ross)와 메킨타이어(John McIntyre) 조선어 성경이 가능했습니다. 구츨라프 이후 로스 선교사와 메킨타이어 선교사는 중국의 한문 성경을 기초로 번역했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조선 땅을 밟기 훨씬 전에 조선인에 의해 교회들이 이미 세워지는 교회사 역사상 놀랍고도 진귀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하였고 그 후 스코틀랜드 선교회는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중국선교사로 파견했습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만주의 영구를 선교 베이스로 정하고 선교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의 활동이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 로스 선교사는 만주에 나와 있는 조선인들을 통해 한문 성경에서 조선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때마침 이토록 민감한 시기에, 구출라프 방문 30여년 뒤인 1866년 9월 2일, 영국 웨일즈 출신의 토마스 선교사의 평양 대동강 제너럴 셔면호 사건을 통해 조선 땅에 순교의 피를 흘린 순교자가 되었고 이는 만주를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선교사들에게 크나 큰 공포로 다가오던 시기입니다. 로스 선교사는 토마스 선교사 순교 후, 1874년 압록강 하류에 있는 평안북도 의주 건너편 중국측에 있는 “고려 문”을 방문하였습니다. 이곳은 약 3,000명의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조선과 만주의 교역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서 네 명의 조선인 청년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였습니다. 그들은 로스의 성경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결국에는 기독교를 받아 들이게 됩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조선 땅을 밟기 9년 전인 1876년에 네 명의 조선인 청년들은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기록된 최초의 개신교 크리스챤 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후예 토마스 선교사 순교와 관계된 사람들과 교류하며, 조선인들에 의해 스스로 세운 황해도의 소래교회의 중심 인물이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조선에 입항하기 전인 1882년 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전서”를 “한지 51페이지의 책”으로 엮어냈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해인 1882년 5월에 예수셩교 “요한복음전서” 3,000부를 출판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깊은 무속적 신앙 가운데 서양 양코배기를 양귀신이라고, 기독교를 서양종교라고 배척하던 구한말 조선의 모습은 암울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일어났던 의화단 사건과 같은 선교사들의 핍박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어두운 상황에서 드려진 언더우드의 기도에 묘사된 조선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며, 땅은 메마르고 척박하였습니다. 가난은 초라한 초가집 아래 무너져 내리는 툇마루보다 더 깊게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가장 어두운 것은 물리적 가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압제와 종교적 빗장과 국제적 긴장이 아니라, 이 땅에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고통인지 모르고 눈동자를 잃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암울한 민초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얼굴을 가리고 다녔고, 그리고 귀부인은 가마를 타고 가기에 복음의 접촉점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남자들은 거칠고 분노가 가득하여 언더우드는 그들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황량한 땅에서도 언더우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라 갈 것이며, 그것이 조선 땅에 일어날 미래이며 동시에 눈물로 기뻐할 날이 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이 은총의 땅으로 바뀌는 조선에 대한 청사진이 부흥의 그림이라고 믿습니다.

언더우드의 기도는 실제로 조선 땅에, 더 혹독한 일제 36년 식민지배와 한국 전쟁, 그리고 전쟁의 폐허 가운데 꽃 피웠습니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은 놀라운 경제 성장과 더불어 황금 부흥기를 경험했습니다. 특히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 80여년 후인 1970년대에는 대중전도 부흥운동, 이 시대에 복음화의 기치를 내 건 민족 복음화 운동,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1974년 엑스폴로 74 그리고 1980년에 열린 세계 복음화 대성회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인 교회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가난과 우상숭배의 깊음 속에서 깨어난 한국 교회는 민족 복음화 뿐 아니라 세계 선교에도 헌신하여 2024년 통계로 21,917명의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하여 복음 사역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제 이슬람권, 불교권, 힌두권 및 구 공산권에도 언더우드의 부활절의 기도가 퍼짐으로 각 나라와 지역들이 은총의 땅의 변화하기를 기도해 봅니다.

시편 85:1-15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보스톤에서 2025년 4월 20일 부활 주일 오후에 김종필 목사

저의 아들 사무엘은 7일 금식 가운데 오늘이 3일째입니다. 저희 가족과 온 교회가 금식의 행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PS 저의 글을 다시금 읽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다음 링크를 올려 드립니다.
두 권의 책 한 명의 저자 (창조론 대 진화론: 신앙과 과학): https://ucdigin.kr/?p=101948
하늘 덮개 같은 하나님의 은혜: https://ucdigin.kr/?p=101922
하나님의 창조와 진화론에 대한 단상: https://ucdigin.kr/?p=10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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