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계발] 창조와 안식: 하나님의 쉼과 인간의 존재 의미 » Creation and Rest: The Divine Pause and the Meaning of Human Existence » No.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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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오늘, 창조와 안식의 비밀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 글의 마지막 장을 펼칩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듯,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일곱째 날에 쉼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에 대한 기쁨의 숨 고르기 였습니다. 나 또한 분주한 일상과 고민 속에서, 안식의 의미를 배우고자 합니다. 창조의 아름다움과 쉼의 진리를 향해, 오늘 이 글을 시작합니다.
빛과 어둠을 나누신 첫째 날부터, 생명의 물결이 일렁인 여섯째 날까지, 창조의 노래는 쉼 없는 교향곡이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 하나님은 안식의 리듬을 새기셨습니다. 창조의 여섯 날을 labor(노동)로 본다면, 현대 과학의 생태계 균형과 생명 유지 시스템(예: 수면 주기, REM 수면, 에너지 재분배)이 안식의 필요성을 뒷받침합니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수면은 기억 정리, 정서 안정, 창의력 촉진에 기여하며 이는 창조적 인간의 존재 이유 와도 맞닿습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명은 생존과 번식의 기계적 과정으로 설명되며, 안식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 존 월튼(John H. Walton)의 『The Lost World of Genesis One』에서는, 창조의 7일은 고대 근동의 사원 건축과 비슷한 우주 성전의 완성으로 이해되며, 안식은 하나님이 우주의 왕좌에 앉으심을 상징합니다.
나는 오늘도 질문합니다.
“나는 단순한 유전자의 산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끝에서 빚어진 영원의 작품인가?”
그 물음 속에서, 나는 다시금 쉼의 노래를 부르며, 안식의 은총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인간은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쉼을 통해 자신을 회복하고, 창조주와의 관계를 재발견하며, 존재의 의미를 다시 써 내려갑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의 완성, 안식은 창조의 선언이자 영원한 쉼의 서곡입니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타난 안식일의 신학적, 문화적 의미를 기억하며, 안식일은 단지 창조의 기억이 아니라 해방과 자유의 선언이라는 사실도 더하여야 합니다.
<창조와 안식 – 신적 리듬의 완성>
창세기 1장의 장엄한 개벽에서 시작된 나의 탐구는 이제 창세기 2장 1–3절로 이어져, 창조의 장대한 서사가 안식이라는 신적 쉼표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함으로 향하는 아름다운 교향곡이었습니다.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물과 육지, 식물과 별들, 그리고 생명의 정점을 이루는 인간까지, 그분의 의지와 계획은 섬세한 붓질로 세상을 채워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창조가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찬란한 창조조차 끝나지 않고 쉼 없이 이어지는 진화의 흐름으로 해석한다면, 창조주의 손길은 영원히 멈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쉼 없는 창조는 결코 완결될 수 없는 이야기이기에, 하나님은 안식을 통해 창조의 완성과 그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리거나, 하나의 가구를 제작하거나, 삶의 공간인 집을 세우는 일조차도, 창조의 수고에는 에너지가 소모되고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하건대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안식을 취하셨다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을 선언하고, 창조의 질서에 내재한 리듬과 조화를 드러낸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안식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평화이며, 창조의 목적이 충만해지는 순간입니다. 과학적으로, 안식은 생태계의 균형과 생명의 회복을 의미하며, 인간의 생리적·심리적·정서적 건강을 위한 본질적 요구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쉼을 통해 재생되고, 창조의 기쁨을 음미할 때 삶의 의미와 방향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피곤하셔서 쉰다는 의미가 아니라,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며 모든 존재가 그분의 질서와 평화 안에 들어가도록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은 하나님을 닮아 창조된 인간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인간은 안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고, 삶의 리듬을 정돈하며, 창조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는 안식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생명은 끊임없는 적응과 변화, 경쟁 속에 놓여 있으므로, 안식은 단지 진화의 흐름에 잠시 머무는 순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의 관점에서 안식은 완성과 축복의 선언이며, 창조 질서의 꽃과 같은 아름다움입니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기뻐하셨으며, 그 기쁨은 곧 존재의 축제였다.”
이제, 창조의 노래를 마친 나는, 안식의 뜨락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고자 합니다.
그 안에서 내 영혼은 쉼을 얻고, 다시 새벽의 빛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안식과 안식일>
일곱째 날 쉬셨다는 것은 일곱째 날이 안식일로 정하셨다는 말씀으로도 읽힙니다. 이처럼 안식일(Sabbath) 즉 샤밧(Shabbat)은 매주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 지켜지는 휴식과 영적 성찰의 날입니다.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의 안식을 기념하고 일상의 노동과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부분이 6일 동안의 노동 그리고 7일 째의 안식 부분인데 이 노동에 관한 정의입니다.
히브리어 “Avodah”와 창조의 여섯 날
히브리어 “Avodah”의 어원은 עבד (‘avad, 일하다, 봉사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합니다. “아보다”(אֲבוֹדָה)는 “일”, “예배”, 또는 “봉사”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다재다능하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아보다”는 노동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모두 의미할 수 있습니다.이 동사는 창세기에서 인간의 노동(예: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제사장적 봉사(민수기 4:47)와 예배(출애굽기 12:25) 등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하시드 철학에서 “아보다”는 종종 신성한 봉사 또는 헌신이라는 더 넓은 개념을 지칭합니다. 역사적으로 “아보다”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희생 제사 의식과 예배, 특히 욤 키푸르에 대제사장의 예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창조의 여섯 날(창 1:1–31)을 “Avodah”의 개념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여섯 날 동안 창조라는 “노동”을 행하셨습니다. 그 노동은 무질서(토후와 보후)를 질서로 바꾸고, 생명을 창조하며,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을 존재케 하는 창조적 ‘노동’이었습니다. 히브리어적 사고에서는 ‘노동’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봉사와 섬김(예배)으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창조의 노동은 단순한 노동 이상의 거룩한 섭리적 행위(Avodah Qodesh)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Avodah”를 단순한 노동(세속적 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행위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의 일을 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노동(work)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창조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7일째 안식은 그 노동의 완성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징합니다.
특히 창 2:15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עָבַד, avad)하고 지키게 하셨다”는 구절은 Avodah의 의미를 더욱 명확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단순한 노동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적 노동을 이어가는 봉사이며, 예배적 삶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거룩한 노동, Avodah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창조를 의도나 목적이 없는 자연적 변화의 결과로 설명합니다. 질서와 생명의 풍요로움은 우연과 생존 경쟁, 자연 선택의 결과일 뿐입니다. 따라서 창조의 노동과 예배, 쉼과 안식의 깊은 의미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여섯 날을 통해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향한 계획과 목적을 세우셨고, 그 창조의 완성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선언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일곱째 날, 하나님은 스스로 안식하시며 인간과 만물에게도 안식의 리듬을 심으셨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와의 관계 속에서 봉사하고 예배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론적 Avodah의 깊은 의미입니다.
<안식이 주는 의미>
1. Judaism이 보는 창조와 안식
유대교(Judaism)에서 창조는 단순한 기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와 목적을 반영한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창세기 2:1–3). 이 창조의 리듬은 유대교 안식일(Shabbat)의 근거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하나님께서 창조를 멈추고 세상을 완성하신 날로 기념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기억하는 날로 여깁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창조의 의미, 영적 회복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2. 기독교 신학에서 안식일의 깊은 의미
기독교에서 안식일은 단순히 육체적 쉼을 넘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영적 쉼을 예표합니다. 히브리서 4장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참된 안식”에 들어간다고 설명하며, 안식일을 종말론적 완성의 표징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마태복음 12:8), 안식일의 본래 목적은 율법적 규칙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회복, 그리고 인간의 생명 존중에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안식일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과 완전한 안식을 소망하게 합니다.
3. 콘스탄틴 대제 이후 공휴일로서의 안식의 의미
콘스탄틴 대제는 321년에 Sunday(주일)을 공식 휴일로 지정했습니다. 이는 로마 황제 권력과 기독교의 만남을 상징할 뿐 아니라, 기독교의 안식일 개념이 주일(부활의 날)로 옮겨가면서 ‘공적 쉼’의 중요성을 인류 역사에 새긴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유럽과 전 세계는 주일을 일과 휴식의 리듬으로 삼게 되었고, 단순한 노동과 휴식을 넘어서 인간 존엄성과 삶의 질을 존중하는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4. 레위기의 안식년 (Shemitah)과 땅의 안식 의미
레위기 25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매 7년마다 땅을 경작하지 않고 쉬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땅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안식을 누리게 하고, 생태계의 균형을 회복하며, 인간의 탐욕을 절제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명령입니다. 또한 이는 인간이 땅의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임을 상기시키며, 창조주께 의지하는 믿음을 훈련하는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5. 희년 (Yovel)과 안식의 관계
7번의 안식년이 지난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 (Jubilee)이라 부르며, 모든 빚을 탕감하고 종을 해방하며,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명령합니다(레위기 25:8–55). 이는 단순한 사회 경제적 법규를 넘어, 창조 세계의 회복과 평등,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상징적 제도입니다. 희년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자 모든 생명의 주권자이심을 선언하며, 인간 사회의 욕망과 불평등을 정화시키는 영적 안식의 해로 여겨집니다.
구약의 안식은 창조의 질서와 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존재 목적을 기억하는 날이며, 기독교는 이를 영적 회복과 구속의 예표로 확장합니다.
콘스탄틴 이후 전 세계에 확산된 주일(공휴일) 개념은 인간의 노동과 휴식의 균형을 이루며, 창조 질서의 리듬을 반영합니다.
레위기의 안식년과 희년은 사회적 정의와 창조 세계의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실현하는 제도로, 단순한 휴식 이상의 신학적 깊이를 내포합니다.
<수면의 의미와 창조의 신비>
인간은 여섯째 날, 하나님의 창조 손길을 통해 이 땅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인간은 생애 처음으로 맞이한 그 밤, 피곤에 겨운 육체를 내려놓고, 깊은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이 첫 수면은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리듬 안에서 생명의 회복과 안식의 예표였습니다.
잠(睡眠, sleep)은 단순히 눈을 감는 행위가 아닙니다. 모든 척추동물은 잠을 필요로 하며, 이때 맥박과 호흡 등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을 제외한 모든 신체 활동이 휴면에 들어가고 무방비한 상태가 됩니다. 식물조차도 주기적으로 활동을 멈추며 자연의 리듬에 순응합니다. 잠은 신체의 피로를 해소하고, 뇌 속의 노폐물을 제거하며, 기억과 감정을 정리하고, 꿈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하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리듬을 제공합니다. 잠(睡眠 / Sleep)은 눈이 감기고 대부분의 의식 활동이 정지되는 상태입니다.
이처럼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수면의 목적은 복합적입니다.
• 신체활동의 중지를 통한 피로 해소
• 뇌 속의 노폐물 제거
• 경험 및 감정 등의 외부 정보 정리(뇌신경 휴식설)
• 꿈을 통한 욕구 해소의 장
• 꿈을 통한 명상 및 시뮬레이션
• 기억의 긍정적 편향 유도
REM 수면의 기능
REM(rapid eye movement) 수면은 인간이 잠을 자는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단계 중 하나입니다. 이 단계에서 뇌는 마치 깨어 있을 때처럼 활발히 활동하며, 기억을 정리하고 감정을 처리하며 창의성을 촉진합니다. REM 수면 중 우리는 꿈을 꾸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음의 깊은 곳까지 여행합니다. 이 과정은 마치 삶의 비밀스러운 저수지에 빛을 비추는 듯합니다. 과학적으로는 REM 수면이 학습과 기억력 강화, 창의성 발달, 정서 안정에 기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 인간의 휴식과 수면의 목적
식물은 활동과 휴식을 빛과 어둠의 리듬에 맞추어 반복합니다. 햇빛 아래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를 축적하고, 밤에는 생장과 치유를 위해 에너지를 재분배합니다. 그들의 휴식은 움직이지 않지만, 그 속에서 세포 분열과 회복, 내부 에너지의 균형이 이뤄집니다.
동물들은 낮과 밤의 주기에 따라 활동하고 휴식합니다. 포유류는 깊은 잠을 통해 뇌와 신체를 회복시키며, 파충류나 양서류는 휴면을 통해 환경 변화에 대응합니다. 철새들은 계절에 따른 장거리 비행 후 반드시 휴식을 취하며, 곤충들조차 짧은 정지의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재충전합니다.
인간의 수면은 가장 복합적이고 섬세한 과정입니다. 잠을 통해 피로를 해소하고, 뇌 속에 축적된 노폐물을 제거하며, 낮 동안 쌓인 감정과 경험을 정리합니다. 꿈은 욕구 해소와 감정 시뮬레이션의 장이며, 무의식의 창을 열어 내면의 갈망과 소망을 비추어 줍니다. 또한, 잠을 자는 동안 뇌는 중요한 정보를 강화하고 불필요한 정보를 삭제하여 기억을 정리하며, 긍정적인 감정을 유도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고 삶의 질을 높여 줍니다.
인간의 첫날 밤, 하나님이 안식을 명하신 그 순간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을 향한 깊은 숨 고르기였습니다. 인간은 창조의 질서 속에서 잠을 통해 피로를 풀고, 마음을 정화하고, 새로운 날을 준비합니다. 식물과 동물, 인간 모두가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휴식하며, 창조의 생명력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REM 수면을 포함한 복잡한 잠의 리듬은 하나님의 세심한 설계와 생명의 신비를 증거합니다.
<창조 이후 인간의 수명: 창세기의 관점>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하는 찬가로 시작합니다. 이 장들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생명”(חַיִּים, chayyim)과 “좋음”(טוֹב, tov)이 강조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어 에덴동산에 거하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창 2:16–17). 여기서 인간의 수명은 무한하고 영원했습니다. 창조의 완전함 속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죄의 결과로 죽음(מוֹת, mavet)이 들어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 3:19)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유한성과 필멸성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죽음은 창조의 본래 설계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들어온 이질적 요소였습니다.
창조와 죽음의 신학적 의미
창조는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담은 생명의 선언입니다. 창조의 일곱째 날,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선언하시며 모든 창조의 완전성을 확인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와 불순종으로 인해 이 완전성은 깨지고,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다”(롬 5:12)고 말합니다.
즉, 창조는 생명과 영원을 목표로 했으나, 인간의 불순종은 이 창조의 목표를 왜곡하고 단절시켰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선택에 따른 파괴적 결과였습니다.
죽음이 들어온 이후
창조의 새벽, 태양빛이 대지를 비추고, 별들이 노래하며, 물결과 산들이 기쁨으로 춤추던 그 순간, 인간은 영원의 존재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의 열매를 입에 댄 순간, 이 영원성은 단절되고 시간의 흐름에 갇히게 됩니다. 신학자 테오도르 브루너는 이를 두고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으나, 스스로 시간 속의 존재가 되기를 선택했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은 창조와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은 창조의 적이며, 하나님의 생명에 도전하는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조와 죽음 사이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창조, 부활, 영원한 생명이라는 약속이 이 이야기의 끝을 향해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오직 생명과 선함, 창조의 완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이후 죽음이 들어오면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가 되었고, 삶은 죄와 고통, 죽음의 그늘 아래 놓였습니다. 이처럼 창조와 죽음은 본래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공존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 창조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 곧 구속과 부활로 이 균열을 회복하십니다. 죽음은 최종적 결말이 아니며, 생명과 영원의 완성을 향한 여정의 일부일 뿐입니다.
<창조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 그리고 진화론과의 차이>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각 날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히브리어 tov)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아름답다는 감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승인과 목적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 뜻에 맞게 존재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번성할 능력을 부여 받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축복(berakhah)을 창조 세계에 생명력과 번영을 부여하는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창세기 1:28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축복하십니다.
이 축복은:
• 생명을 보전하고 번영하도록 돕는 역할을 인간에게 맡기셨음을 의미합니다.
• 자연을 정복하라는 말은 파괴나 착취가 아니라, 책임감 있는 관리(שׁוֹמְרִים, shomrim)를 뜻합니다.
• 유대교 전통에서는 안식일과 안식년(레위기 25장), 희년(레위기 25:8–55)까지 포함하여, 사람과 땅, 자연 모두가 주어진 리듬 안에서 쉼과 회복을 갖도록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이해를 이어받으면서,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회복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인간(창 1:26–27)은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라, 도덕적 책임자로서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합니다(창 2:15).
•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해 오셨으며(골로새서 1:15–20), 창조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 인간은 단순히 물질 세계를 관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창조 전체와 화해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권한의 범위와 한계>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관리할 권한을 주셨지만, 이 권한은 무제한적인 것이 아닙니다.
범위와 특권:
• 생명을 돌보고 지키는 책임: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자연을 돌보아야 합니다.
• 이름 붙이기와 연구: 창 2:19–20에서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지음은 관계의 책임과 이해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 창조 세계의 관리자: 인간은 소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로 부름 받았습니다.
한계:
• 절대적 소유권은 없음: 시편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 도덕적 책임: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이나 폭력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창세기 9:4–6에 따르면 피 흘림에 대한 심판이 따릅니다.
• 휴식과 안식: 창조는 안식으로 완성되며, 인간도 일과 쉼의 균형을 지켜야 합니다(출애굽기 20:8–11).
이처럼 창조론에서는 모든 생명과 우주의 기원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모든 피조물은 축복 속에서 존재의 목적을 부여받았다고 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특별한 위치와 책임을 부여받았고,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지키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반면,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을 우연과 자연선택의 산물로 설명합니다. 생존과 번식의 과정에서 적합한 개체만 살아남는다는 논리로, 인간 역시 다른 종과 다를 바 없이 자연의 산물일 뿐이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 관점에는 도덕적 책임이나 존재의 목적이 없으며, 생명의 의미를 자연의 적응적 과정으로만 봅니다.
결국 창조론은 하나님의 축복과 창조의 목적, 인간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반면, 진화론은 생명의 우연성과 적응의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창조론에서는 인간이 신적 설계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함을 강조하며, 진화론은 의미보다는 생존의 경쟁과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은 단순한 권한 부여가 아니라, 생명을 풍성히 하고 돌보며 창조 질서를 지켜내는 사명입니다. 이는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서 강조되며, 인간은 창조 세계를 파괴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리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반면, 진화론은 이러한 신적 목적과 도덕적 책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창조와 축복, 그리고 안식은 단순히 생명의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의 처음 창조 행위에 대한 신학적 성찰>
구약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브레쉬트 바라 엘로힘'(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는 구절에서 출발합니다. 창조는 인간의 경험처럼 하나님에게도 처음 있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만의 고유한 능력(יֵשׁ מֵאַיִן, ex nihilo, 무에서의 창조)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기에, “처음”이라는 개념도 인간의 시간성에 국한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가 가지는 생경함과 신비함은 인간의 경험과 유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랍비 전통은 창조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써 실현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식물, 동물은 하나님의 의지와 언어(דבר יהוה)로 태어났으며, 이는 인간이 부모로서 자녀를 낳는 기적과도 같은 신비로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창조 이해에서 중요한 개념은:
• 하나님은 처음으로 창조 행위를 하시면서도 그 결과를 이미 알고 계심: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너머 계시므로, 창조는 처음이지만 결과 또한 미리 아시는 전지전능한 분의 행위입니다.
• 창조의 반복성 없음: 하나님은 세상을 한 번 창조하셨고, 창조는 반복되지 않습니다(전도서 3:14).
• 인간에게도 창조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심: 인간은 생명을 낳고 가꾸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역할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는 시간 안에서 드러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설명합니다(에베소서 1:4–5). 그러나 창조의 순간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시간과 공간, 물질과 생명을 처음으로 “나타내신”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 하나님의 처음 창조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유롭고 기쁘신 선택의 결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도 새로운 기쁨과 만족(창 1장 “보시기에 좋았더라”)을 주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적 창조: 기독교 신학은 창조를 아버지의 의지, 아들의 말씀(요한복음 1:1–3), 성령의 운행(창 1:2)으로 설명하며, 이는 하나님 안에서의 풍요로운 관계를 외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봅니다.
•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하나님의 창조는 필요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 사랑과 기쁨의 넘침으로 생명을 선물하신 행위입니다(요한1서 4:8).
비록 하나님께는 시간의 제약이 없으나, 창조의 순간은 하나님께서도 “무언가 처음 선포하시고 기뻐하시는”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마치 부모가 첫아이를 보고 놀라움과 기쁨에 감격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창조된 세계를 바라보시며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신 것입니다.
창조의 ‘처음’에 대한 종합적 이해
• 구약에서는 창조는 하나님의 계획된 행위, 하지만 그 신비는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처음 경험하는 듯한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 기독교 신학에서는 창조는 영원한 계획 속의 시작, 그러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현으로 하나님께도 기쁨의 순간이자 피조물과의 첫 만남의 순간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창조의 처음은 하나님께서도 즐거워하시는 “처음 있는 행위”로 비유될 수 있으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 계획, 신비, 그리고 인간의 경험과 비견할 수 없는 창조의 깊이가 담겨 있습니다.
<자유의지: 창조의 노래와 진화의 메아리>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유의지는 마치 영원의 수수께끼처럼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이 두 흐름은 인간이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 극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창조론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히 흙에서 빚어 만든 생명체로 두지 않으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그에게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창 1:26-27)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창 1:26-27)으로 창조되었기에, 이성적 존재로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프로그램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지를 선택하도록 자유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사랑의 선물이며,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다리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 사랑은 기계적 복종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의지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거역할 수도 있는 능력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 자유의지를 가장 악한 방향으로 썼습니다. 그것은 불순종이었습니다.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은 것입니다. (창 3장) 이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아담은 선악과 앞에서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고, 그 선택은 타락과 죄,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보존하셨으며, 회개와 순종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창조론은 이 순간을 하나님의 슬픔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를 존중하신 사랑의 순간으로 바라봅니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존엄과 동시에 책임을 요구합니다.
반면 진화론은 자유의지를 다르게 설명합니다.
진화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진화적 과정에서 생겨난 뇌의 복잡한 작용과 의식의 산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의식과 선택은 유전자, 뇌 신경망, 환경 요인, 진화적 적응의 결과로 나타난 것일 뿐, 초월적 의미의 자유의지로 보지 않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인간의 선택도 결국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선택은 뇌의 보상 체계, 쾌락 중추, 환경 자극의 반응 등으로 이루어지며, 철저히 생물학적 기제에 기초한다고 봅니다.
진화론은 도덕적 선택도 진화의 산물로 봅니다.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협력과 이타성을 선택하도록 진화했다는 설명이 주를 이룹니다. 따라서 죄나 불순종이라는 개념은 종교적 개념일 뿐, 과학적으로는 특정 유전자나 진화적 압력에 의해 행동이 결정되는 것에 가깝다고 봅니다.
창조론은 인간의 자유를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적 관계의 상징으로 보지만, 진화론은 그것을 생물학적 필연성과 뇌의 산물로 설명합니다. 창조론은 아담과 하와의 선택을 통해 인간의 책임과 회복 가능성을 노래하지만, 진화론은 선택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죄와 회개의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은 결국 한 가지 공통된 진실을 말해줍니다.
인간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며, 그 선택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자 영원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는 진리에 이르는 길,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이 택한 선택이 갖게 되는 마지막 심판입니다.
창조론의 시각에서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찾는 길입니다. 인간은 그 길 위에서 비록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반면 진화론은 자유를 자연의 법칙 속 생존의 도구로 보며, 선택의 의미를 그 너머로 확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두 시선 사이에 서서 묻습니다.
“나는 나의 선택 속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유전자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물음 속에서 나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인간, 창조의 형상과 영원의 경계에서>
식물은 뿌리를 내리고, 계절마다 잎을 내밀며 순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 먹이를 찾아 헤매고, 종족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와 다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의 정점이자 하나님의 숨결을 품은 존재입니다. 그 숨결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호흡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갈망을 심어주는 영적 생명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체셀멜로킴(צֶלֶם אֱלֹהִים,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이해합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는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 살아 있는 혼)”가 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이러한 창조의 신비 속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지가 담겨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의 랍비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세계를 다스리고 윤리적 책임을 지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영원성에 대해는 기독교보다 덜 강조하며, 현세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토라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구약의 창조론을 계승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영생의 약속을 중심에 둡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아담의 죄로 인해 타락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구속의 길을 열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육신의 한계를 지닌 존재로 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영적 존재”로 이해합니다. 바울 사도는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리라”(고린도전서 15:42)라고 외쳤습니다.
진화론은 인간을 자연 선택과 유전적 돌연변이의 산물로 이해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연속선상에서 출현한 한 종으로,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나 영원의 개념이 자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진화론은 영혼이나 영원성을 부정하며, 생존과 번식, 그리고 종의 적응만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나 문화조차도 생존에 유리한 특질로 진화한 결과로 설명됩니다.
이 세 관점은 인간의 본질과 운명을 전혀 다르게 노래합니다. 유대교는 하나님과의 계약과 윤리적 책임, 기독교는 구속과 영원한 생명, 진화론은 자연의 법칙과 생존을 말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보고, 영원을 향한 여정의 일부로 이해하지만, 진화론은 그저 우연히 생겨난 생명체로 봅니다.
나는 이 질문 앞에 다시 묻습니다.
“나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인가, 아니면 영원을 향해 지어진 하나님의 작품인가?”
그 물음 속에서 나는 인간 존재의 신비와 영원의 노래를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글을 맺으며>
빛과 어둠을 나누신 첫째 날부터, 생명의 물결이 일렁인 여섯째 날까지, 창조의 노래는 쉼 없는 교향곡이었습니다. 저는 창조의 합주곡을 따라 보이지 않는 오선지에 악보를 그리듯 글을 써 내려갔으며, 그 글은 25편의 곡이 되었습니다. 일곱째 날, 하나님은 안식의 리듬을 새기셨습니다. 인간은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쉼을 통해 자신을 회복하고, 창조주와의 관계를 재발견하며, 존재의 의미를 다시 써 내려갑니다. 나는 오늘도 질문합니다. “나는 단순한 유전자의 산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끝에서 빚어진 영원의 작품인가?”
그 물음 속에서, 나는 다시금 쉼의 노래를 부르며, 안식의 은총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자 합니다.
2025년 5월 26일 보스톤에 김종필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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