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의 세 동사로 본 창조: ‘바라’ ‘아사’ ‘차르’-10

창세기 1장은 단순히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작이며, 태초부터 함께하셨던 분, 즉 인격화된 지혜, 아버지 곁에 계신 장인(잠언 8장),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 말씀(요한복음 1장)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바라, 아사, 야차르를 이해하는 것은 창조 그 이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모든 원자에 새겨진 하나님의 목적의 흔적을 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를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심장 박동을 듣는 것...

[영성계발] 창세기 1장의 세 동사로 본 창조: ‘바라’ ‘아사’ ‘차르’-10 » 창조, 형성, 그리고 만들어짐: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신학적 탐구 » Creation in Three Verbs: Bara, Asa, and Yatsar in Genesis 1: Created, Formed, and Made: A Linguistic and Theological Exploration of Genesis 1 » 

<글을 시작하면서: 창조의 창>

우리는 창문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창문들을 통해 우리는 우주의 아름다움과 신비, 그리고 깊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창문은 좁은 골목길로 열리고, 어떤 창문은 광활한 하늘을 담습니다. 하지만 그 창문들 가운데에는 다른 어떤 창문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의 창문이 있습니다. 바로 만물의 기원, 시간, 물질, 생명, 그리고 영으로 통하는 창입니다. 그 창은 바로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 1장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우주의 기원을 이해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논리, 신화, 그리고 과학을 통해 추측했고,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을 열었으며,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기반이 되는 DNA 코드를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과학적 도구도 인간의 가장 심오한 질문, 즉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창세기만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시작했는지 감히 말해줍니다.

창세기 1장은 단순히 물리적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책은 리듬, 반복, 그리고 대칭이 특징인 우아한 히브리어 산문으로 쓰인 신적 계시입니다. 이 책은 창조를 차갑고 기계적인 사건이 아닌 신적 의도의 교향곡으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창조 이야기의 핵심에는 세 가지 히브리어 동사, 즉 바라(בָּרָא), 아사(עָשָׂה), 그리고 야차르(יָצַר)가 있습니다. 각 동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고유한 측면을 드러냅니다. 이 단어들은 서로 바꿔 쓸 수 없습니다. 각 동사는 하나님의 행위의 다른 측면, 즉 무(無)에서 창조, 실체에서 형상화,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형성을 드러냅니다.

이글은 이 창조 단어들의 의미와 신학적 의의를 탐구할 것입니다. 창세기와 성경 전체에서 사용된 이 단어들을 살펴보고 창세기 이야기 자체의 문학적 구조를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창조가 단순히 우주적 기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즉 메시아의 오심과 만물의 회복으로 절정에 달하는 계획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는 과학 안내서는 아니지만, 신학적, 철학적, 문학적, 심지어 과학적 탐구를 포함한 모든 인간 탐구 분야에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현실의 근본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구원 이야기의 첫 페이지이자,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가 누구이며, 역사가 어디로 향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하는 신성한 문턱입니다.

창세기의 창을 열고, 그 말씀을 통해 창조주의 첫 행위에 담긴 신비와 지혜, 그리고 아름다움을 들여다 봅시다.

<창세기의 창문을 열며>

우리에겐 많은 창문들이 있습니다. 그 창문들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론 그 좁은 창문으로 앞뜰과 뒤뜰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창문을 여느냐에 따라 보이는 세계가 다릅니다. 때론 뒤쪽 창문을 열면 어두운 뒤안길에 모든 것이 막혀 있는 골목길을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광대한 비밀의 문을 열수 있는 창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창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창문 가운데 유일하며, 온 우주의 비밀의 문을 열어주는 창문이 있습니다. 우주와 세상만물과 생명과 물질과 영혼의 기원을 말해 주는 창문, 그 창문이 저는 창세기 1장부터 3장이라고 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그 기원을 찾으려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자연과학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만물의 기원과 의미를 찾고 설명한 것이 과학이 되었고, 의학이 되었고, 신화가 되었으며, 철학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질문과 탐구가 그리스 로마 문명을 탄생케 하였으며, 철학과 문학과 예술과 과학의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천문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시 세계를 탐구하면서 물리학과 화학을 탄생케 하였으며, 극미의 세계는 이제 분자, 원자, 원자핵 그리고 12개의 쿼크까지 밝혀 내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재를 연구하는 생물학은 DNA의 비밀을 알려 주었고,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 설계도면 이었습니다. 유전자의 전이는 생명체의 근원에 대한 인류의 지난한 탐구와 호기심을 어느 정도 만족하게 해 주었습니다.

밤 하늘에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별들을 육안으로 보고, 인간은 신들의 세계에 연결하여 별들과 은하계도 신들의 이름으로 그들을 불렀으며 그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은하수와 별들의 위치에 따라서 점성술로도, 바다의 항해자들은 문명의 이기가 발전하기 전에도 북두칠성, 북극성, 남십자성 등을 관찰함으로 드넓은 대양을 방향을 알고 항해할 수 있었습니다. 1609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이 직접 만든 망원경으로 하늘을 직접 관찰한 것이 인류 역사상 획기적인 전환기를 주었습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세계 문명사의 역사적 기원을 마련했지만, 사실 그가 망원경을 최초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 사용 1년 전인 1608년 네덜란드의 안경 제조업자인 리퍼쉐이(Lippershey)가 볼록 렌즈와 오목 렌즈를 사용해서 물체를 보는 거리를 조정하다가 우연히 더 멀리 있는 물체가 가까이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발명한 것이 굴절망원경(refra tor)입니다. 그 배율이 3배였습니다.

리퍼쉐이의 망원경 소식을 들은 갈릴레이는 독자적 굴절 망원경을 발전시켜서 배율 30배 정도로 발전시킵니다. 그는 초창기 그의 발명 망원경을 가지고 1609년 베니스 관리 앞에서 시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610년에 달 표면과 태양의 흑점까지 관측한 것입니다. 그는 나아가서 금성과 목성을 관찰하였을 뿐 아니라 목성 주위의 네 개의 위성을 발견했습니다. 심지어 달 표면에 분화구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 냈습니다. 동시대인 조선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의 참담한 전쟁을 마치고 광해군 통치로 들어간 시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달을 보며, 토끼와 계수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곳으로 인식하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성의 위성까지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1609년 8월 25일 베니스에서 관찰하던 이 망원경은 9배율 만원경 이었습니다. 인류가 수천년 동안 오직 육안에 의지하여 별들을 관찰하던 그 시기에 갈릴레오가 발명한 망원경으로 본 밤하늘은 그야말로 별천지이자 신비의 세계였습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본 일부 성운이 여러 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갈릴레오는 금성의 위성 변화를 통해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의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합니다. 전기한 바와 같이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점점 더 발전하여 30배율에 이르게 됩니다. 이 망원경은 대항해 시대에 나침반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으로 놀라운 발견을 하던 1610년 그 다음 해인 1611년에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한 망원경이 개발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케플러 망원경입니다. 독일의 케플러(Johannes Kepler)는 갈릴레이의 굴절 망원경보다 더 발전된 접안 렌즈에 오목렌즈가 아닌 볼록렌즈를 사용하여, 시야도 넓어지고, 색수차(色收差)도 적은 케플러식 망원경을 개발했습니다. 갈릴레이, 케플러에 의해 개발된 망원경은 후에 영국의 뉴턴, 스코트랜드의 그레고리의 그레고리식 망원경 그리고 1671년 프랑스의 카세그레인(Cassegrain)의 반사망원경의 개발까지 계속 발전합니다. 이처럼 망원경은 굴절망원경, 반사망원경, 반사굴절망원경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밤 하늘을 바라보며, 그 별들이 우주 전체의 별들이라고 착각하던 것을 깨닫기까지는 3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1930년 슈미트(B. Schmit)의 천체 카메라입니다. 갈릴레이 이후 380년이 지난 1990년 4월에 지구상에서 관측하는 망원경이 아닌 우주 궤도에 진입하여 관측한 망원경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허블 망원경입니다.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설령 문명의 이기인 망원경을 통해 보더라도 보지 못했던, 감마선, 엑스선, 자외선, 그리고 마이크로파를 통해 우주의 광대한 별들, 운하들, 초운하들 그리고 우주 배경 복사까지 발견함으로 천체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바, 빅뱅의 증거로 제시되었습니다. 이처럼 더욱 더 밝혀지고 발견된 우주는 우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지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의 영역도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인간이 그동안 쌓아 온 수많은 지식과 정보도 80%가 우리의 육안을 통해 관찰하여 얻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별들도 등급이 있는데, 인류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6등성 정도인데, 이를 거리로 환산하면, 1 촉광의 빛을 10 킬로 미터의 거리에서 관측할 수 있는 별의 빛의 밝기 정도입니다. 그 아래의 별들은 우리의 육안으로 관측 불가하다는 뜻입니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을 보려면, 더 많은 빛을 모아야 하는데 그 때 망원경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천체의 밝기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히파르코스(Hipparcos)이며, 별의 밝기에 따라 1등급에서 6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하늘에서 보이는 별들의 밝기를 겉보기등급(Apparent magnitude)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시등급, 실시등급 그리고 안시등급이 있습니다. 인간이 도저히 망원경을 사용하여도 볼 수 없었던 우주의 영역이 허블 망원경 그리고 제임스 웹 망원경의 등장으로 좀 더 정교하게 그리고 광대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망원경이라는 것을 통해서는 거시의 세계를, 현미경으로는 미시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창세기 1장을 통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 주십니다. 육신의 세계, 물질의 세계, 우주 만물의 기원 뿐 아니라 존재 목적 그리고 궁극적 지점까지 이르는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망원경과 같은 창문이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그러기에 창세기 1장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단순히 과학적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없음이 자명합니다. 창세기 1장은 신학적, 구속사적, 철학적, 문학적 그리고 과학적 영역의 모든 세계를 열어주는 진귀하고도 놀라운 창문입니다. 이 창문이 지니는 히브리어의 구조와 그 안에 숨겨진 깊고 오묘한 비밀의 세계가 열려진다면 창조의 의미 뿐 아니라 인류의 종착점까지 다다를 수 있는 통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창세기 1장, 만물을 여는 창문>

딤후 3:16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위의 말씀은 저를 포함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성경은 신구약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서신을 디모데에게 보낼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정경화되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바울 서신을 포함해서 그 당시에 복음서 등 많은 신약성경의 책과 서신들이 만들어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여기에서 성경은 바로 holy scripture 즉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의 앞부분을 따서 책들의 묶음을 불렀습니다. 다섯권의 모세 오경은 토라로,선지자서(대선지자서와 소선지자서)는 네비임이며 그리고 글들(Writings)은 케투빔 인데 역사서(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열왕기,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아, 그리고 에스더)와 시가서(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입니다. 위의 세 묶음의 책들 제목을 붙이면 타나크(תַּנַ״ךְ‎)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세오경이라고 부르는 다섯권의 책도 앞 글자를 따서 부릅니다. 창세기는 히브리어 그대로 베레시트(בְּרֵאשִׁית‎)입니다. 영어로는 genesis 그리고 한국어로는 창세기인데, 영어의 genesis 는 기원 또는 어떤 일을 형성하는 것의 시작을 뜻합니다. 그런데 한국어의 창세기는 창조의 시작에 대한 기록입니다. 창세기 50장 가운데 사실은 창조에 관한 부분은 1장에 집중되어 있으며, 2장은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그리고 3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에덴에서의 추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담 후예의 계보, 노아의 홍수, 바벨탑의 언어 혼잡, 아브라함의 부르심, 그리고 이삭과 야곱과 그의 12 아들 및 요셉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족장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한국어 창세기가 주는 뉘앙스가 창조에 관한 기록처럼 비춰지지만 실제로는 창조에 관한 기록은 매우 드물게, 아주 적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루시는 것이 초점이기에, 창세기에서 다루고 있는 창조에 관한 말씀은 아무리 작은 단어라도 너무나 소중하며, 이를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장은 특히 시적인 운문 형태로 기록되어 있으며, 창조에 관한 대칭적 구조와 배열을 갖고 있습니다. 6일 창조는 구조적으로는 교차 대구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내용상으로는 대응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기록의 목적은 천지창조를 포함하여, 인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족장들과 아브라함의 계보가 내려와 그 가족이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야의 나심이 어떠했는지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여호와((השם, 하 셈, 그 이름)의 영((רוּחַ, 루아흐)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며, 그의 말씀(וּמִלָּת֖וֹ, 우밀아토)이 내 혀에 있도다.” (사무엘하 23:2)

우리는 위의 말씀을 통해 성령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는 창세기 1장 2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 즉 루아흐 엘로힘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는데, 그의 말씀(אָמַר)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삼하 23:2에 그의 말씀이 바로 내 혀에 있도다는 구절이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3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만물이 말씀으로 다 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45편 1절에는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히브리어 원문에서 해석하면, “내가 왕을 위해 시를 낭송할 때 나의 레브(לִבִּי, 본질, 마음)는 고귀한 주제(말, דָּבָר טוֹב)로 감동(Rachash, רָחַשׁ)이 됩니다. 내 혀는 능숙한 작가(서기관)의 펜과 같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구절에 좋은 말(다바 토브, דָּבָר טוֹב)은 하나님이 창조시마다 하신 말씀 즉 “보시기에 좋았다” 와 연결됩니다. 이처럼 말씀으로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1-2)

그렇다면 이처럼 창세기 1장에서 히브리어 구조로 이루어진 문체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러한 문체의 연구가 주는 과학적, 신학적 그리고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러려면 먼저 창세기 1장의 히브리 문학적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신성한 구조>

창세기 1장은 엄밀한 의미의 히브리 시(시편처럼)는 아니지만, 반복, 리듬, 그리고 대구법으로 가득 찬 구조적이고 고상한 산문을 사용합니다.

주요 기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반복되는 구절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וַיֹּאמֶר אֱלֹהִים)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וַיְהִי־כֵן)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7중 패턴(7이라는 완전수가 배수로 나타남):
   o “엘로힘”(하나님)이라는 이름이 35번 나옵니다(7×5)
   o “지구”와 “천국”은 7의 배수로 나타납니다.
   o 창세기의 히브리어 1장 1절은 7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고, 2절은 14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차대구법과 병렬 구조, Chiastic and Parallel Structure]

처음 3일(형성된 틀 영역)과 두 번째 3일(틀 안에 채워진 내용물) 사이에는 명확한 병렬 구조가 있습니다. 첫째날부터 세째 날은 형성된 날 들 즉 틀(Frame)이며, 네째날부터 여섯째 날은 틀에 가득 채우는 충만한 날들입니다.

첫째 날: 빛(오르) vs 네째 날: 해, 달, 별(마오르, 광명체)
둘째 날: 하늘과 물(샤마임, 마임) vs 다섯째 날: 새(하늘), 물고기(물)
세째 날: 땅과 식물(에레츠) vs 여섯째 날: 육지 동물과 인간
일곱째 날: 하나님이 쉬시다 (시간을 거룩하게 하심)

이 구조를 틀 가설(framework hypothesis) 또는 문학적 틀(literary framework)이라고 하는데, 과학적 순서보다는 신학적 진리를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저들만의 해석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메시아적 정경인 타나크(우리의 구약 성경, 토라, 네비임, 케투빔)와 신약성경(בְּרִית חָדָשָׁה, 브리트 하하다샤)의 전체를 연결하면 창세기 1장의 의미는 완전체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가 의미하는 부분들을 힌트(레메즈), 비교 의미/할라카 원리(드라쉬), 그리고 신성한 신비(소드)를 통해 명백한(파샤트) 의미를 찾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실천적 신학(하가다 바할라카, הַגָּדָה בהצלחה)이 될 수 있습니다. 아래의 파르데스(PaRDeS, פַּרְדֵּס‎)의 성경 해석 방법은 수 천년 내려 온 이스라엘의 네가지 해석 방법으로 창세기 1장을 이해하는 큰 도움이 됩니다.

[네 가지 히브리어적 성경 해석 방법, PaRDeS, פַּרְדֵּס‎]

• 이 부분은 아래의 네 가지 해석 방법의 앞 글자를 다 합쳤을 때입니다.
   P’shat(פשט): 단순한 또는 문자적, 복잡한 내용이라 해도 단순화를 통해 말씀의 의미를 명료하게 함
   Remez(רמז): 힌트 또는 알레고리를 말함
   Drash(דרש): 찾는다 또는 연구하는 것으로 비교급 의미를 지닙니다.
   Sod (סוד): 앞의 세단계를 거쳐 말씀이 주는 신성한 신비를 발견하는 것

위의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창세기 1장을 이해하게 되면, 창세기 3장 15절에 이르는 인류 구원을 향한 메시야의 도래를 이해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역을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그림 즉 인류의 구원을 보여 주시는 과정 속에서 창조와 타락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을 창세기 1장에서부터 3장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가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더 중요한 과정에서 창세기 1장 1절은 구속사를 향한 창문을 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는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無)에서(Ex nihilo) 창조하셨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무에서 창조하시는 “바라” 그리고 이미 창조된 것을 바탕으로 만드시는 과정을 앞으로 계속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연적인 창조나 우주의 영원한 존재를 증명하려는 수많은 우주론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주의 탄생을 자연적 진화로 보는 많은 세계관과 과학적 시도는 하나님의 질서와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는 창조에 대한 광범위한 용어로 묘사되지만, 흥미로운 세부 묘사를 통해 (신성하게 계시된 본문에서 기대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단순히 그림으로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정직한 과학적, 문학적 비판에도 부합하는 역사적 기록을 제시하고자 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의 확증을 요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였습니다.

창조에 관한 기록이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이지만, 마치 마태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와 누가복음 3장의 예수님의 족보도, 창세기 전체가 보여 주는 조상 기록에 주요 인물을 나열하는 히브리어 관행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면, “아들, 아들들, 아들과 딸들, 손자, 손자, 손자, 조상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ben, b’nai”는 이 족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열방에게 하나님의 케투빔 (성서)을 전수하기 위해 선택하신 거룩한 사람들의 시작과 창조로 이어지는 역사적 기록으로 이해되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창세기 전체의 맥락은 구속사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창조에 관한 부분이 중점적인 창세기 1장 조차도 인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큰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은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 구체적인 용어로 처음 언급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레시트의 의미, 창세기, בְּרֵאשִׁית B’REISHIT]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첫 단어 베레시트(בְּרֵאשִׁית)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1:1 태초에 엘로힘께서 무(בָּרָא)에서 창조하시고, 하늘의 물을 만드시며 땅(ארץ eretz)을 만드셨습니다. 일부 창세기 영어 번역본들은 창세기 1장 1절의 첫 번째 히브리어 합성어인 “베레시트(B’reishit)”를 “하나님이 시작하셨을 때”로 번역합니다. 경우에 따라 히브리어 접두사 “Beit”가 “언제”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일반적인 의미는 “~안(in 또는 at)에”입니다. 또한 “언제”를 사용하는 더 나은 번역은 “시작했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히브리어 명사인 엘로힘(하나님)이 시작(레시트, רֵאשִׁית) 뒤에 사용합니다. 첫번째라는 뜻이 강한 레시트는 첫 열매(출 23:19), 지혜의 시작(잠 1:7)처럼 어떤 일의 최초로 시도되는 곳에 사용됩니다. 여기에서 이 구절을 연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베레시트가 사용되었을 때 시간이 창조되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베레시트의 레시트가 의미하는 것은 실제로 구약 성경의 첫 부분인 토라, 열방 가운데 첫 선민인 이스라엘, 온 우주 만물 가운데 장자(firstborn)가 되신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다음 우리가 눈 여겨 볼 것은 과학적 함축적 의미(Scientific Implications)입니다.
창세기는 과학적 안내서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현대적인 의미(예: 빅뱅, 물리학, 진화론)로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관의 틀을 제공합니다.

• 우주는 질서 있고 이해 가능하다는 것
• 자연은 신적이지 않다는 것(다신교에 대한 거부)
• 창조는 점진적이고 목적이 있다는 것

[과학과의 양립성(Compatibility with Science)]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1장이 그 문학적, 신학적 장르 때문에 과학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 그것은 기계론적이지 않지만(non-mechanistic) 질서 있는 우주를 제시하며, 이는 역사적으로 서양에서 과학적 탐구를 장려했습니다.
• 점진적인 질서(빛 → 생명 → 인간)는 일반적으로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진화 단계와 비슷하지만, 그 메커니즘은 서로 다릅니다.

그 다음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신학적 및 영적 함의(Theological and spiritual implications)입니다.

1. 신학적 확언 (Theological Affirmation)

창세기 1장은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진리를 확언합니다.

•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Bereshit bara Elohim)
• 창조는 선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반복되는 구절
• 인간 존엄성: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Imago Dei)
• 안식일 원칙: 하나님은 안식하시며 예배와 안식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2. 영적 형성

창세기 1장의 구조적이고 리듬감 있는 형식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 경외심과 경외심을 함양합니다: 시적 구조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묵상을 유도합니다.
• 질서 있는 삶을 장려합니다: 하나님께서 혼돈 속에서 질서를 가져오셨듯이, 신자는 삶 속에서 신성한 질서를 본받도록 부름 받습니다.
• 희망과 목적을 확립합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가 의도적인 것임을 제시하며, 인간의 삶에 목적을 부여합니다.

<창조의 세 단어: ‘바라(bara, בָּרָא)’, ‘아사(asah, עשה),’ 그리고 ‘야차르(yatsar, יָצַר)’ >

구약성경에서 “창조하다”라는 동사가 등장하는 곳은 거의 항상 세 가지 히브리어 단어 중 하나입니다.

바라, bara, בָּרָא

‘바라(bara, בָּרָא)’는 ‘창조하다’ 또는 ‘만들다’를 의미합니다. 이 동사에만 ‘ex nihilo’ 즉 무에서부터의 창조가 포함됩니다. ‘바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하기 때문에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지닙니다. ‘바라’는 우주적 규모의 창조와 관련된 구절 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참조: 창 2:3; 사 40:26; 42:5). “창조”를 의미하는 다른 모든 동사는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를 허용합니다. 이 동사들은 신적 주어와 인간적 주어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신약성경에서 골로새서 1:15-17에, 하늘과 땅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고, 그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셨고,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를 과학의 표현을 빌어 설명한다면,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모든 질량과 에너지 구성 요소를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보다 먼저 존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3) 이는 위의 골로새서 인용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사, asah, עשה

‘아사(asah, עשה)’는 ‘만들다’, ‘짓다’, ‘이루다’, ‘달성하다’, ‘이루다’, ‘행하다’를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 7절의 히브리어 ‘아사(asah, עשה)’는 창조의 유형을 의미하지만, 그 용어 자체가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궁창에 해당하는 라키아(돔 또는 창공)”을 만드셨을 때 ‘아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라키아(이전 글에 충분히 설명을 했음)는 “창조물”이라기보다는 댐이나 지붕처럼 “건축물”로 이해하면 됩니다. ‘아사’가 사용된 구절들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16절에서 해와 달을, 25절에서 땅에 사는 동물을 만드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 그분 자신과, 그리고 제가 그분과 대화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천사들의 신성한 회의를 만들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리고 27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1절에서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아사)”을 바라보셨습니다. 같은 단어 ‘아사’는 11절과 12절에서 또 다른 형태의 창조에 사용됩니다.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아사(asah, עשה)’를 내니… (창세기 1:11-12, 개역개정) ‘아사(asah, עשה)’는 생식을 일종의 “만들기”로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창조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히브리어 단어 중 ‘바라’만이 하나님께만 국한됩니다.

야차르, yatsar, יָצַר

‘야차르(yatsar, יָצַר)’는 ‘도공처럼 손으로 빚거나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차르(yatsar, יָצַר)’라는 단어는 창세기 2장에서 사용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 “(Adamah, אדמה)으로 사람(אדם) 을 지으시고‘야차르(yatsar, יָצַר)’,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그가 생령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7) 이 구절에서 주의할 것은 생령은 루아흐가 아닌 네퓌시이기에 사실은 살아있는 혼 또는 생혼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아담은 창세기 1장 27절의 “인류”처럼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의 질그릇처럼 흙으로 빚어졌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코에 불어 넣으시자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를 다 함께 사용한 성경 구절을 보면 비교하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 4장 13절은 바라(bara’), 아사(‘asah), 야차르(yatsar)의 차이점을 잘 보여줍니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위 구절을 나누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야차르(yatsar, יָצַר)’
바람을 창조하며 ‘바라(bara, בָּרָא)’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둠을 하며’(만드시고, 아사, asah, עשה)’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라”

위의 구절을 보시면 바라와 아사와 야차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베세시트와 창조의 세 단어를 비교할 때>

위의 말씀을 잘 설명한 구절이 바로 이사야 41장과 43장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41장 17-20절에서, 20절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 구절은 두 개의 고전적인 히브리어 시적 이중 구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행은 진술을 하고 두 번째 행은 이를 대체적이고 보통 과장된 표현으로 재진술한다와 백성이 “보고 알 것이다”를 말합니다. 즉 “관찰하고 이해할 것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셨다”, 즉 “창조하셨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 쓰인 단어가 ‘베레시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면 백성이 보고 알 것이다.함께 관찰하고 이해할 것이다. 아도나이의 손이 ‘아사(asah, עשה)를 행하셨고,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이것을 창조(바라, bara, בָּרָא)하셨다는 것을”이라고 선포합니다. 창세기 1장에 선포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관찰하고, 이해하고, 연구할 때에, 하나님이 직접 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창조 행위는 무(無)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지만, 바라의 시적 용법은 그러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43장 1절 하반절과 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성경 구절을 앞서 언급한 바라와 아사를 넣어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바라(bara, בָּרָא) 이시요,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아사(asah, עשה)’이시니라.

내 이름을 가진 모든 자,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아사(asah, עשה)’자를
내가 지었으니 ‘아사(asah, עשה)’곧 내가 만들었노라.’” (이사야 43:1)

이사야 45장 18절도 구별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bara, בָּרָא) 이시니라. 땅을 지으시고 ‘야차르(yatsar, יָצַר)’ 만드신 아사(asah, עשה)’이신 하나님이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즉, 혼돈 속에 있지 않도록], 그분은 사람이 거주하도록 그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사야 45:18)

<세 단어의 신학적 함의>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메시야를 내신 하나님의 구속사의 창문으로 여는 첫 관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을 읽고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과 설계를 깨닫은 것을 여성의인화를 통해 지혜로 설명한 말씀을 다시금 나누고자 합니다. 물론 이 시도는 과학의 용어를 빌어서 설명하고자 할 뿐입니다.

창조의 비밀은 깨달은 저 ‘지혜’는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그분의 고대 작품 중 첫 번째”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물리 법칙을 프로그램하여 그 법칙이 일어나도록 하시기 전에, 그리고 무에서 원시적 특이점을 창조하시기 전에, 저를 포함한 모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이 팽창하고 융합하여 처음에는 미분화된 에너지로, 그 다음에는 힘으로, 그 다음에는 입자로, 그 다음에는 이온, 원자, 별, 은하로 만들어지도록 하시기 전에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반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잠언서 8:22-33)

<글을 맺으며: 태초부터 구원까지>

창세기 1장은 단순히 성경의 서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언약, 구원 이야기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신성한 히브리어 동사 바라(Bara), 아사(Asah), 야차르(Yatsar)에서 우리는 신성한 창조성의 다면적인 본질을 마주하게 됩니다.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정교한 솜씨로 세상을 빚으시고, 친밀함과 목적을 가지고 인류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이 단어들은 각각 하나님 마음의 뚜렷한 측면을 드러냅니다. 바라는 그분의 주권을, 아사는 그분의 지혜를, 야차르는 그분의 가까움을 드러냅니다. 이 단어들은 단순한 언어적 호기심이 아니라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 단어들을 통해 우리는 창조가 우연이 아니라 사랑과 계획의 의도적인 행위, 즉 구원의 교향곡의 첫 악장임을 깨닫게 됩니다.

창세기부터 이사야까지, 아모스부터 복음서까지 성경 전반에 걸쳐 이 말씀들을 살펴보면,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께서 또한 우주 안으로 들어오시는 구속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흙으로 첫 인간을 지으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분은 로고스, 곧 영원한 말씀이시며, 그분을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은 단순히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작이며, 태초부터 함께하셨던 분, 즉 인격화된 지혜, 아버지 곁에 계신 장인(잠언 8장),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 말씀(요한복음 1장)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바라, 아사, 야차르를 이해하는 것은 창조 그 이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모든 원자에 새겨진 하나님의 목적의 흔적을 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를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심장 박동을 듣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연구할 때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행하고 계신 일, 즉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형성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하기 위해 행하고 계신 일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2025년 4월 21일 부활주일 다음날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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