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이승만은 5년 동안 초인적으로 죠지 워싱턴대학과 하바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마치고 1910년 10월에 고국으로 돌아와 YMCA에서 총무직을 맡으면서 조선의 지식인들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각종 개화 활동에 헌신하였다.


[시사리뷰]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 글 강석진 목사 » 한미수교 140여년 근대문명사 리뷰 시리즈 16회 »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으로 인해 1912년 3월에 다시 미국으로 도피하였으나, 미주 지역에서 1년 동안 정착치 못하다가 조선인들이 6천 명 이상 거주하고 있는 하와이에 1913년 2월에 37세 나이에 정착하였다.

1937년에 이승만은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는 신뢰만하는 방관적인 모습에 대해 일본이 결국은 태평양을 장악하게 위해 미국과 일전을 불사할 것을 예상했다. 그 당시 이승만 같은 예견은 누구도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이승만은 약 2년에 걸쳐 그 시대에 예언서 같은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부인이 된 프란체스카는 그 원고를 3번이나 타이핑하면서 손가락이 짓물었다.

드디어 1941년 영문으로된 ‘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 명저를 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세계 곳곳의 정세 분석을 통해 평화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미국은 다가오는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책에 대한 미국의 전문인들의 평가로는 “이 책이 진실이 아니라 말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오직 너무 진실인 것이 두렵다.”며 극찬했다.

이 책이 출판된지 반년 만에 벌어진 일본의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공습은 이승만을 세계적 예언자로 만들었고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어 유럽에서도 번역 출간될 정도였다.

이승만은 1941년까지 상해의 임시정부와 호놀루와 워싱톤을 순회하면서 ‘대한독립지지’를 요청하는 집회를 지속하였다. 1941년 12월에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된 후 17일에 국무부를 방문했다. 국무장관 특보 혼벡(Stanley Hombeck)의 주선으로 육군정보국 무어(Walles Moore)대령을 만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광복군 지원을 요청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혼벡을 대신한 히스(Alger Hiss)와 면담하며 이승만은 해외 한족대회 결의안을 전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했다.

한반도 분할 협상 상상 이미지 ◙ Photo&Img©ucdigiN

그러나 히스는 “임시정부 승인과 한국독립 문제는 중국, 소련, 영국과 협의를 거쳐 미국의 정책이 확정되어야 대답할 수 있다.”는 입장만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히스는 “이승만의 제안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거의 없고, 현 단계에서 한국 정부의 독립을 승인하면 북아시아에 큰 이해관계가 있는 소련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히스가 소련의 간첩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승만은 히스의 입장에 괘념치 않고 오히려 국무부를 상대로 문서투쟁을 더욱 가열차게 전개했으나 히스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련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던 간첩이었다. 당시 미국 행정부에는 소련 간첩이 무려 2백여 명이나 득실거리고 있었다. 1933년 출범한 루스벨트 행정부의 사회주의 뉴딜정책이 이들의 침투 배경이었다.

그러나 결의에 찬 이승만은 미 상원 원목인 해리스와 변호사 스태거스와 언론인 윌이암스 세 사람으로 하여금 ‘한국상황’이란 문건을 작성해 1942년 1월 9일 국무장관 헐(Cordell Hull)에게 제출토록했다. 이 문건은 2천 3백만 한국인의 해방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천명한 미국의 전쟁 목표이며,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은 회피할 수 없는 도덕적 의무라는 이승만의 주장을 반영한 문건이었다.

이승만은 줄기차게 미정부를 대상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였다. 1945년 4월부터 두 달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 연합 준비회의가 참가자인 시무총장 히스의 주도로 무산되자 이승만은 언론을 통해 3달 전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루스벨트와 처칠이 2차대전 종전 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권 안에 두기로 몰래 합의했다.”는 이른바 ‘얄타밀약설’을 터뜨렸다.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의 주류 언론이 발칵 뒤집혔다.

이 밀약이 사실이라면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이 발표한 ‘적절한 절차를 밟아(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선언은 국제적 사기극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물론 ‘적절한 절차가 일정한 기간의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냐’는 의혹은 계속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가 미국이 아닌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문제였다.

이 문제와 관련해 당시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입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있다. 임시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갔던 정한경이 1946년 영어로 출판한 문건인 (Syngman Rhee : Prophet and Stateman)에서 이같이 기록되었다. “그렇게 엄청난 문제를 제기했다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 결과가 두렵지 않습니까?라는 정한경의 질문에 이승만은 다음같이 대답했다. “증거가 없소 … 내가 바라는 것은 얄타협정에 서명한 국가 수뇌들이 그것을 공식으로 부인하는 것이었소”

이승만의 이같은 도박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945년 7월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직간접으로 참가한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이 항복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재확인하도록 만들었다. 이승만의 문제 제기는 또한 폴란드를 포함한 동구를 해방한 소련이 위성 정권을 세우는 문제에 대해 포츠담선언이 우려하는 조항을 넣는 성과도 만들었다. 이승만의 활동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2차대전의 피침략국들의 해방을 상징하기 위해 ‘유린된 나라들’이라는 시리즈로 5센트짜리 우표를 발행했다. 폴란드. 체코. 노르웨이 등 추축국에 의해 점령당한 유럽의 나라들을 알리는 시리즈 우표가 먼저 발행되고 이어서 일본 지배하의 ‘아시아 해방’을 상징하는 ‘태극기우표’가 1944년 11월 발행됐다. 이 역시 이승만이 애쓴 결과였다.

독일의 항복을 내다보던 미국. 영국. 소련은 이미 3달 전인 1945년 2월 얄타에서 전후 처리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전후 평화체제 구축에 소련의 협조를 기대하던 루스벨트는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요구를 대폭 수용했다. 덕분에 소련은 자신이 싸우던 동구 유럽 전선에서 좌우합작을 통한 적화 즉 위성국가를 세우는 일을 차질없이 수행할 수 있게 됐다.

루스벨트는 또한 일본 본토 상륙에 따른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요청했다. 사할린 등 극동 영토와 이권을 보장받은 스탈린은 당시 유효했던 ‘소일불가침조약’에도 불구하고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일본과 전쟁을 개시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때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상당한 기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합의까지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이 바뀌었다. 미국은 회담 시작 하루 전 뉴멕시코에서 비밀리에 실시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제 미국은 오키나와 상륙에 흘린 피를 일본 본토 상륙에서 반복할 걱정을 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루스벨트가 질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뒤를 이은 트루먼 대통령은 오히려 스탈린이 대일전쟁에 참전하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까지도 품게 된 것이다. 드디어 미 국무부에도 한반도 공산화를 우려하는 이승만과 같은 입장을 가진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끝까지 저항하자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하여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투하하였다.

일본은 항복 조건인 천황제 폐지 여부를 놓고 일본 내의 강경파와 온건파가 계속 대립하였다. 스탈린은 그 사이를 틈타 8월 9일에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소련은 사실상 미국이 차려놓은 잔치상에 숟가락만 올려놓은 것이었다. 소련은 한반도 진출은 전광석화 같았다.

소련 군대는 8월 9일에 만주의 일본 관동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바로 함경북도까지 진출하였다. 12일에는 청진에 당도하여 이런 점령 속도라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애초에 미국무부는 미군이 한반도와 만주까지 진출하여 점령해야 한다고 보고서를 제출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미육군은 아시아 대륙에 발을 들여놓기조차 주저하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서 1천킬로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이같이 소련이 급속하게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점령해 버리자, 미국은 급박해져 8월11일 국무부 던 차관보가 육군 작전국에 소련의 남진을 막기위해 군사 분계선을 그을 방법을 찾아보라고 요구했다. 서울과 인천은 미군 관할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대령은 지도를 놓고 고심한 끝에 북위 38도선을 찾았다. 소련이 거부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지만, 의외로 스탈린은 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개성까지 내려왔던 소련군은 38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이 당시 스탈린은 태평양과 지중해를 거처 전 세계를 적화하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으나,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는 데에 미국이 설정한 38선이 저들의 야욕을 저지한 것이었다. 미국은 드디어 일본에게 항복을 받고 20여 일 후인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38이남 지역의 일본 주둔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군대의 무장을 해제함으로 일본의 통치를 36년 만에 종식시켰다.

아울러 미군의 ‘38분계선’ 이남 지역의 한국인들에게는 공산화를 차단시키고 자유진영으로 남게 하는 놀라운 결과를 안겨주었다. 이처럼 미국은 1905년 한국을 일본에 내주었지만 다시 40년 만에 절반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다음호에 이어짐)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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