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의 역사는 전적인 하나님의 시대적 섭리 가운데에 시작되었고 진행되어 왔다. 두 나라 사이에 태평양이라는 머나먼 거리와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권이라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한 세기 반이 넘는 역사 속에 그 관계가 때로는 단절되거나 다시 회복되었던 과정은 미국의 국익 차원에 기인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 과정 속에서 지금까지 두 나라가 그같이 긴 역사를 이어 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애증(愛憎)의 역사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시대조망] 애치슨 라인 방위 정책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과 한미 관계 » 한-미수교 140년의 근현대문명사 리뷰-17 » 글 강석진 목사 »
되돌아보면 미국은 1905년 7월에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조선을 사실상 내쳐버린 것이었다. 그 당시 조선은 미국으로부터 버려진 불쌍한 나라로 전락되었다. 그 때에 고종은 미국이 조선을 포기하지 말 것을 애걸하기도 하였다.
그로인해 미국으로부터 외면당한 조선은 5년 후인 1910년에 일본에 합방되어 세계 역사 속에 사라진 나라가 되었다. 그후 역사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급변되면서 30년 후인 1941년 미.일 간에는 적대적 관계가 되어 태평양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일본이 패전국이 되었다. 일본에 속했던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 간에 합의에 의해 한국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양국(미.소)의 군정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로서 미국은 다시 한국과 엮어져 대한민국이라는 절반의 독립국이 수립되는 데에 산파 역할을 결정적으로 해내었다.
드디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 후 미국은 한반도에 미군사 고문단만 남겨두고 철수하였다. 이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트르만 대통령에게 미군정 시의 3만 명의 군대가 지속적으로 주둔하여 공산국가가 된 북한으로부터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막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하였었다. 이때에 미국은 한국과의 외교 관계는 남겨두었으므로 사실상 한국과의 관계는 국가대 국가로 병립되였었다. 그 시기에 미국의 국익적 관심사는 일본의 지배와 관리에 치중해 있었지, 한반도의 절반인 한국에 대해서는 사실상 군사적 방어 의무에서는 제외된 것이었다.
미국은 전후 정리에서 태평양권의 자위를 위한 극동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 정부는 마침내 1950년 1월 12일에 이를 위한 구체적인 외교정책을 대외적으로 발표하였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son Line)’이었다. 이는 사실상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의 전략적 오판이었고 그에 따른 댓가는 참으로 혹독하였다.
그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 방어선은 한반도와 아시아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다. 이 방어선은 일본 열도와 필리핀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대만과 한반도는 제외되었다. 그 의미는 군사적 측면에서 한반도에 전쟁 상황이 발생을 해도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국은 유럽의 2차대전과 일본과의 처절한 전쟁으로 너무도 큰 피해를 입은 당사국이었기에 그같이 전쟁에 다시 휘말리지 않으려는 방위 정책은 사실상 국익 차원에서 필요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분명한 점은 ‘애치슨 라인’ 방위 정책으로 인해 6.25전쟁이 결정적으로 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발적 요인을 제공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에치슨 라인이 선포된 그 시점에 이미 북한의 김일성은 한반도 무력 통일 야욕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1949년 3월부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스탈린(1879~1953)에게 남한을 침략하여 통일시키겠다는 의사를 두 차례에 걸쳐서 전쟁 승인과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의 전쟁 개입을 우려하여 계속 거절했다. 그 직후에 미국의 애치슨 라인 선언이 발표되자, 김일성은 이에 고무되어 스탈린을 다시 설득하여 마침내 남한 침략 계획을 승인해 주면서 중공의 마오쩌뚱(1893~1976)의 동의를 받도록 하였고 이에 중공도 자국의 국익 차원에서 동의하였다. 사실상 두 개의 거대한 공산국의 입장에서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절반이 미국의 영향권에 있다는 것이 불편한 가시같은 존재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소련은 2차대전을 혹독히 치르고 전후 복구 중이었고 중공은 1949년 10월에 공산정권을 세웠기 때문에 자국의 치리와 공산화 작업에 몰두하던 상황이었다. 즉 다른 나라의 전쟁에 자국이 침략을 받는 것도 아닌데 이런 전쟁에 승인과 동조를 했다는 것은 두 나라들 만의 거시적 국익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애치슨 라인 정책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도외시 한 것이었고 소련과 중공도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역시 오판을 하였기에 이 전쟁은 일어 날 수밖에 없은 요인이 잉태된 것이었다. 6.25남침 전쟁은 사실상 공산진영과 자유진영과의 전쟁이 되어서 3차대전이나 다름없는 세계 전쟁이 되었다. 단지 전쟁터가 한반도에서만 극한된 전쟁이었다. 이 6.25 전쟁에 공산 진영에서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소련과 중공은 병력과 군사 물자 지원을 하였고 동구권 여러 나라들은 의료와 물자 지원에 참여하였다. 자유 진영에서는 16개국인 북미,남미와 오세아니아와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권 나라들이 병력을 파병하였고 의료와 물자 지원국은 40여 개국에 이르렀다. 3년의 전쟁으로 민간인과 군인들의 희생은 약 5백만 명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애치슨 라인이라는 극동 방위정책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가져왔지만 그로인해 미국은 극동 지역에서의 광범위한 방위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으며 특히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제고하게 되었다. 나아가서 소련과 중공의 아시아권의 물리적 공산화 확산에 대해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국들이 군사적으로 대응하였다는 결연한 결기를 보여 준 세기적 교훈을 남겨 주었다. (다음 호에 이어짐)
글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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