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 과학과 신학을 적대자로 보기보다는 심오한 대화의 동반자로 여겨야 합니다. 과학은 창조의 메커니즘을 밝혀낼 수 있고, 신학은 그 메커니즘의 의미와 목적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우리를 우주에 대한 더 깊은 경외심과 창조주에 대한 더 큰 경외심으로 이끕니다. 빅뱅과 창세기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과학은 창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신학은 창조가 “왜” 중요한지 밝힙니다. 두 이론 모두 각자의 언어로 우주의 시작이 있었으며, 그 시작 뒤에는 심오한 신비가 숨겨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13번째 글의 맺음 말에서… >
- <글을 시작하면서: 경이로움의 시작: The Beginning of Wonder>
- <우연인가, 계획인가 – 인류 역사의 전환점>
- <패러다임 대전환 역사 속에서>
- 토마스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 전환
-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 (Ptolemaic paradigm)
- 그리스-로마 문명의 토대: 헬레니즘 (Hellenism)
- 아브라함 종교의 토대: 헤브라이즘 (Hebraism)
- 두 패러다임의 통합: 헬레니즘과 히브리주의, 아우구스티누스 패러다임(Augustinian paradigm)으로의 통합
- 코페르니쿠스의 패러다임 전환 (Copernican paradigm shift)
- 정상 상태 우주론에서 팽창 우주론으로의 세계관 변화 (Change in worldview from steady-state cosmology to inflationary cosmology)
- 계속되는 패러다임의 대화
- <유대인의 창조론>
- <창조에 대한 유대 학자들의 견해들>
- <창조론에 대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충돌>
-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부상과 성경적 세계관의 침식>
- <우주 팽창론이 가져온 21세기 문명세계관의 대전환>
- <다시 보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
- <신학과 과학과의 대화>
- <시간과 공간의 시작: 성경적 및 과학적 유사점>
- <과학이 묻고 신학이 답하다>
- <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 <성찰과 신학적 응답: 세속 시대의 성경적 세계관 회복>
- <예수 그리스도: 부활이요 생명>
- <과학과 신학의 화해: 진실의 통일된 지평을 향하여, Toward a Unified Horizon of Truth>
- <글을 맺으며: 깊이와 경이로움의 대화: A Dialogue of Depth and Wonder>
과학과 신학을 적대자로 보기보다는 심오한 대화의 동반자로 여겨야 합니다. 과학은 창조의 메커니즘을 밝혀낼 수 있고, 신학은 그 메커니즘의 의미와 목적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우리를 우주에 대한 더 깊은 경외심과 창조주에 대한 더 큰 경외심으로 이끕니다. 빅뱅과 창세기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과학은 창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신학은 창조가 “왜” 중요한지 밝힙니다. 두 이론 모두 각자의 언어로 우주의 시작이 있었으며, 그 시작 뒤에는 심오한 신비가 숨겨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13번째 글의 맺음 말에서… >
[영성계발] 창조론과 우주: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 » Creationism and the Cosmos: A Paradigm Shift in Human Civilization » 김종필 선교사 »
<글을 시작하면서: 경이로움의 시작: The Beginning of Wonder>
인류 역사에는 보이지 않는 발견과 성찰의 흐름이 합쳐져 문명의 흐름을 바꾸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마치 남십자성의 안내를 받으며 험난한 바다를 항해하는 마젤란처럼, 또는 과학자들이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CMB)의 희미한 잔해를 발견하는 것처럼, 인류는 호기심에 이끌려 시작의 신비에 이끌립니다. 이 글은 시간, 생각, 그리고 별들을 통한 항해, 바로 그러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는 과학과 신학, 두 언어 사이의 대화입니다. 하나는 “어떻게”를, 다른 하나는 “왜”를 탐구합니다. 하나는 메커니즘을 관찰하고, 다른 하나는 그 의미를 밝힙니다. 이 둘은 함께 기원, 목적, 그리고 운명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를 형성합니다. 고대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로마 패러다임부터 코페르니쿠스와 현대 우주론의 혁명적 전환에 이르기까지, 이 글은 창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인간의 세계관을 어떻게 형성해 왔고, 또 계속해서 재형성해 왔는지 탐구합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찬란하게 응답하는 우주가 있습니다. 이 글은 창조론과 과학의 이야기이며, 갈등이 아닌 대화의 이야기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에 대한 질문은 인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3절은 “빛이 있으라”라고 선언하는 반면, 현대 우주론은 특이점(singularity)에서 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가 격변적으로 팽창한 빅뱅을 주장합니다. 신학적인 언어와 과학적인 언어라는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되지만, 두 언어 모두 심오하고 빛나는 시작을 인정합니다. 21세기를 나는 우리는 인류의 문명사 가운데 과학이 기여한 부분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창조에 대해서는 인류는 시간이 갈수록 거부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수천년을 이어 내려 온 두개의 흐름, 인본주의적 사고에 기반한 학문과 항해와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 스스로 만들어 올린 서구 중심의 과학주의적 세계관과 아브라함을 통해,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고 온 우주만물을 친히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을 중심으로 오늘의 글을 펼쳐 나가고자 합니다.
<우연인가, 계획인가 – 인류 역사의 전환점>
역사는 종종 예상치 못한 순간, 즉 자연과 인간의 노력이 교차로에서 만나 문명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에 좌우됩니다. 이러한 순간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마치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섭리와 호기심이 함께 작용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짜여 있습니다. 거대한 파도 아래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희망봉에는 단순한 해상 통로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이곳은 전 세계의 물의 흐름을 조용히 인도하는 대양의 소용돌이가 얽혀 있는 곳입니다. 유럽 탐험가들은 무역풍과 부에 대한 희망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그 흐름을 따라갔습니다.
대서양과 인도양은 공식적으로 아굴라스 곶(Cape Agulhas)에서 만납니다. 항해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두 대양 즉 대성양과 인도양이 바다 아래에서 충돌하는 곳입니다. 이 지점에서 따뜻한 해류(ocean current)와 차가운 해류가 만납니다. 따뜻한 아굴라스 해류는 인도양 쪽으로 흐르고, 차가운 벵겔라 해류는 대서양 쪽으로 흐릅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항해의 경험이 지구촌에 바다의 시대를 열었고, 바다를 정복했던,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대영제국 그리고 초강대국 미국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한 바다의 해류를 연구한 해양학은 실제로 바다의 생태계와 바다 속 지도를 만드는 해양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아굴라스 곶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바다색이 변하는 눈에 보이는 “선”이나 만나는 지점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 지역은 강한 너울, 조류, 해류로 유명하여 항해와 낚시에 어려움을 겪는 곳입니다.
아굴라스 곶을 넘어서는 순간 이러한 보이지 않는 바다 밑 두 대양의 충돌을 넘어서는 순간 초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무역상들을 아라비아 반도, 인도, 말라카 해협, 그리고 광활한 동아시아로 이끌었습니다. “향신료 항로”로 알려지게 된 이 항로는 단순한 무역망이 아니라 문명 충돌의 촉매제였습니다. 몰루카 제도의 육두구와 정향, 스리랑카의 계피, 케랄라의 후추는 단순히 맛 뿐만 아니라 제국의 권력 구조까지 변화시켰습니다.
당시 지구촌 반대쪽으로 항해도 시작되었습니다. 향신료 섬으로 향하는 서쪽 항로를 대서양을 건너 찾던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t Magellan)이 남아메리카 끝자락의 폭풍우가 치는 해협을 항해했을 때였습니다. 대서양, 태평양, 남극해가 만나는 지점에서 소용돌이치는 바람과 충돌하는 해류는 항해를 위험하게 만들었습니다. 북극성을 잃은 마젤란은 남쪽 하늘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별자리인 남십자성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남십자성은 항해와 계시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천상의 안내자의 도움으로 마젤란의 탐험대는 지구를 최초로 일주하여 지구가 구형임을 단번에 증명했습니다. 물론 마젤란은 잘 아는바와 같이 필리핀 세부의 막탄 섬의 전투 중에 막탄 섬의 추장 라푸라푸(Lapu Lapu)에 의해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가 항해를 계속해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하게 됩니다. 역사 속 다른 순간들 역시 피할 수 없는 놀라움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의 발견(1799)은 인류 문명이 되돌릴 수 없는 이집트 문명, 소아시아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보고들을 찾아 나서도록 서구 열강이 너도 나도 식민지 각축전에 뛰어 들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에 소속된 한 프랑스 병사가 이집트 사막에 묻힌 로제타 스톤을 발견했습니다. 이 우연한 발견은 학자들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처음으로 해독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잃어버린 문명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페니실린(Penicillin)의 발견(1928)은 인류사에 의료 혁명을 일으킨 한 사례입니다.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은 우연히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이 담긴 페트리 접시를 발견했습니다. 페니실린 속(Penicillium) 곰팡이가 이 세균을 죽였고, 항생제의 발견과 의학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전파의 우연한 전송(1888)도 인류의 기술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하인리히 헤르츠는 전자기 이론을 시험하던 중 우연히 전파가 공기를 통해 전송될 수 있음을 증명하여 현대 통신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발견들은 비록 우연한 것처럼 보였지만,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단순한 과학적 또는 지리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습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이 무너지고 새로운 틀이 등장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패러다임 대전환 역사 속에서>
그렇다면 이처럼 매우 큰 흐름과 줄기에서 거시적 지구촌 세계관을 바꾼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 글에서 우리는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을, 특히 창조론과 과학의 대화와 관련하여 추적해 볼 것입니다. 마젤란의 항해가 지구의 지형을 재정의했듯이, 천문학, 우주론, 신학 역시 서로 충돌하며 우주와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재구성해 보고자 합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 전환
토마스 쿤은 그의 획기적인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ultions)』(1962)에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쿤에 따르면, 과학적 진보는 사실의 꾸준한 축적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의 혁명적인 변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패러다임은 과학적 탐구를 형성하는 이론, 방법, 그리고 기준의 틀입니다.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들이 누적되면 위기가 발생하고, 이는 과학 분야를 재정의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개념은 과학을 선형적이고 객관적인 지식 축적이 아닌 역동적인 인간의 탐구로 이해하는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 (Ptolemaic paradigm)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서기 2세기)의 지구 중심설에 뿌리를 둔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가정했습니다. 이 패러다임은 1,400년 이상 지배적인 천문 모델이었으며, 과학 및 신학 사상과 깊이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이 세계관은 지구와 인간을 중심으로 설계된 우주관을 반영했으며, 기독교를 비롯한 고대 우주론과도 공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스-로마 문명의 토대: 헬레니즘 (Hellenism)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그리스 문화와 지역 전통이 융합된 헬레니즘은 그리스-로마 문명의 지적 기반을 형성했습니다. 헬레니즘은 이성, 경험적 탐구, 아름다움의 추구, 그리고 인간의 잠재력 계발을 강조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힘을 통해 자연 법칙을 밝혀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세상을 이해했습니다. 헬레니즘은 서양 교육, 정치, 예술,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이후 과학적 탐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아브라함 종교의 토대: 헤브라이즘 (Hebraism)
히브리 성경에 뿌리를 둔 헤브라이즘은 하나님의 계시, 도덕률,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 그리고 이성적 추론보다 순종을 강조했습니다. 헬레니즘이 이성을 통해 지혜를 추구했다면, 헤브라이즘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통해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질서 있고 목적 의식이 뚜렷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현실 이해에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헤브라이즘은 역사에 대한 선형적 관점과 목적론적 운명 의식을 도입했습니다.
두 패러다임의 통합: 헬레니즘과 히브리주의, 아우구스티누스 패러다임(Augustinian paradigm)으로의 통합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헬레니즘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종합하여 중세 기독교 세계의 지배적인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플라톤 사상을 기독교 교리에 통합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한 형상에 대한 헬레니즘의 강조점을 유지하면서도 창조는 선하고, 목적이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히브리인의 확신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 “아우구스티누스 패러다임”은 천 년 넘게 서양 사상을 형성하며 우주론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패러다임 전환 (Copernican paradigm shift)
16세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태양 중심 우주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심오한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체계를 무너뜨리고 결국 과학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요하네스 케플러 같은 인물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바탕으로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천주교회의 해석에 도전하고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재정의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신학적 신념을 즉각적으로 무너뜨리지는 않았지만, 자연에 대한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했습니다.
정상 상태 우주론에서 팽창 우주론으로의 세계관 변화 (Change in worldview from steady-state cosmology to inflationary cosmology)
20세기 초, 우주론의 주류를 이루었던 모델은 정상 상태 우주론이었습니다. 정상 상태 우주론은 우주가 시작이나 끝이 없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윈 허블이 팽창하는 우주를 발견하고, 이후 아노 펜지아스와 로버트 윌슨이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를 발견하면서 빅뱅 이론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마련되었습니다. 1980년대 앨런 구스가 제안한 팽창 우주론을 포함한 추가적인 발전된 모델들은 우주가 초기 단계에서 급격한 기하급수적 팽창을 겪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주의 “시작”이라는 개념을 다시 도입했으며,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신학적 교리와 흥미롭게 공명했습니다.
계속되는 패러다임의 대화
지구 중심 우주론에 대한 고대의 믿음에서 팽창하는 우주의 계시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창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심오한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 뉴턴, 아인슈타인 등 각 패러다임은 우리의 과학적 지평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 성찰에도 도전했습니다. 창조론은 우주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로 유지되는 신성하고 의미 있는 질서임을 일깨워줍니다. 과학은 그신비, 경이로움, 그리고 그 질서의 광대함. 신학과 과학은 갈등하는 대신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왜”를 묻고, 과학은 “어떻게”에 답합니다.
토머스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은 파괴적이지만 진보를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은 역동적이어야 하며, 영원한 진리에 대한 닻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주의 팽창, 고대 별들, 그리고 DNA의 신비로운 작용은 하나님의 영광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여 예배, 겸손, 그리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새로운 발견을 할 때마다 우리는 고대의 말씀이 다시금 울려 퍼지는 것을 듣습니다. (시편 19:1)
히브리 천막에서 그리스 아카데미로, 중세 성당에서 현대 천문대로 이어지는 인류 문명의 여정은 단순한 과학적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경이로움의 순례입니다. 창조의 장엄한 태피스트리를 이해하고, 별들의 조용한 음악을 듣고, 이 모든 것 뒤에 있는 창조주를 알고자 하는 끊임없는 탐구입니다.
자 그렇다면 좀 심층적으로 헤브라이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유대인의 창조론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유대인의 창조론>
창세기의 창조 말씀은 먼저 이스라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유대인에게로 전해지면서 세대와 세대를 거쳐 전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미쉬나(Mishina)의 구전 토라를 해석하는 게마라(Gemara)에 익숙했습니다. 탈무드에도 절반 가까이 미쉬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게마라를 기초로 진리의 깊은 의미를 찾는 드라쉬(Drash, search)를 매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 미드라쉬(Midrash)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창조론이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매우 짧지만 묵상하고 찾고 그 단어의 깊은 의미를 매일 매일 주석을 달고 해석하면,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깊은 의미를 줍니다.
유대 전통이 미쉬나, 게마라, 미드라쉬를 통해 말씀, 특히 창조에 대해 주의 깊게 “묵상하고”, “탐구하고”, “주석을 달고”, “해석”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를 통해 하도록 부름받은 영적 성찰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하여 미쉬나, 게마라, 미드라쉬를 연결하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창조와 미드라쉬 (Midrash) – “창조는 말 그 이상이다”
한 가지 아름다운 예는 창세기에 대한 초기 주석서인 미드라쉬 라바(Bereshit Rabbah 1:1)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토라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시작합니다. 이는 세상이 혼돈이 아니라 지혜로 창조되었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미드라쉬는 베레시트(“태초에”)라는 단어가 “지혜를 통해”를 의미할 수 있다고 묵상합니다. 왜냐하면 레시트라는 단어가 잠언 8장 22절(“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실 때 나[지혜]를 창조하셨다”)에서 지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글 “”창세기 1장의 세 동사로 본 창조: 바라, 아사, 야차르”: “창조, 형성, 그리고 만들어짐: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신학적 탐구”에서 끝 부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혜를 여성명사의인화를 통해 얼마나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을 창조하였는지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은 창조를 단순한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심오한 신적 지혜의 행위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도 깊은 진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창세기 1장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단지 물질적인 것들의 창조만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깊은 지혜의 보고, 영적 세계의 문을 열수 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 속에도 하나님의 마음, 그분의 지혜, 그리고 그분의 영원한 계획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2. 미쉬나 (Mishna)와 창조 – “열 가지 말씀”
미쉬나 (피르케이 아보트, Pirkei Avot 5:1)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열 가지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다.”
“열 가지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창세기 1장에 반복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라는 구절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무언가가 창조됩니다. 랍비들은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가 10번 나온다고 그 숫자를 열거였으며,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따라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를 이루신 분입니다. 미쉬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에 대한 묵상은 요한복음으로 가는 길을 예비합니다!
3. 게마라(Gemara)와 창조 – “창세기의 의미 층위 (Layers of Meaning in Genesis)”
게마라(특히 차기가 11b와 같은 본문에 있는 미쉬나 주석)는 마아세 베레시트(창조 사역)를 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조 사역은 두 (학생) 앞에서가 아니라 일대일로만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창조의 신비는 너무나 깊고 신성하여,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친밀하게, 조심스럽게 가르쳐야 합니다. 기독교 진영은 너무 오랜 세월 진화론과 세속주의적 과학주의 앞에 너무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는 단순히 알아야 할 정보가 아니라, 경건하게 들어가야 할 신비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창조의 섭리를 깨닫는 작업은 모세의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서 있는 거룩한 땅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처럼 경외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4. 태양 앞에 빛을 대하는 미드라쉬 (Midrash on Light Before the Sun)
유명한 미드라쉬 (베레시트 라바 3:4)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넷째 날까지 창조되지 않았다면,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숨겨진 빛(또는 가누즈)이었습니다. 이 빛은 장차 올 세상에서 의로운 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적인 빛이었습니다.”
제가 이미 저의 글, “빛이 있으라: 창세기 1:3-5절에 대한 신학적 그리고 과학적 성찰”에서 이미 이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빛 즉 빅뱅 초기의 빛이 있다면,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첫 번째 빛은 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빛, 즉 영적이고 신성한 광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8:12) 그리고 제가 이전의 글에서 다룬 바와 같이, 빅뱅과 같은 발견을 통해 태양계가 형성되기 전에 이미 빛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음을 과학은 말하고 있습니다.
5. 창조와 미드라쉬 – 물과 땅
또 다른 미드라쉬는 창세기 1장 2절(“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운행하시니라”)에 물이 이미 존재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미드라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에 물을 창조하시고, 물로 하늘을 창조하시고, 물로 땅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물은 원초적인 물질로 여겨지며, 더욱 신비롭게도 하늘은 부분적으로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은 생명, 신비, 혼돈, 질서를 상징하며, 이는 세례, 물 위에 운행하시는 성령,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준비시켜 줍니다.
<창조에 대한 유대 학자들의 견해들>
이처럼, 하늘들(샤마임), 땅(에레츠), 물, 라키아 등 미쉬나와 게마라와 미드라쉬를 통해 깊고도 오묘한 말씀들을 우리는 더욱 깊게 깨닫게 됩니다.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하지만 기본적인 사실들을 깊게 가르치는 미쉬나, 더 깊고 깊은 Layer를 통해 창조의 신비를 파고 들 수 있는 게마라,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운 영적 성찰을 제공하는 미드라쉬를 통해 진리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 아름다움, 그리고 신성한 계획을 드러내는 끝없는 명상의 샘입니다.
창조에 대하여 언급한 주요 유대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기원전 20년–서기 50년): 토라와 그리스 사상을 연결하는 유대 철학자
필로는 창세기 1장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창조가 물리적 행위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이성적 사고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창조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마음(로고스)에서 일어났다고 설명했습니다.
“세상은 물질로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필로의 책, “창조에 관하여(De Opificio Mundi)”
필로는 유대교 주해(미드라쉬식 독해)와 철학적 성찰을 결합하는 전통을 세웠으며, 창세기는 단순한 물리적 역사가 아니라 영적인 지혜이기도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2. 랍비 아키바( Rabbi Akiva,서기 50-135년): 미쉬나와 초기 미드라쉬의 가장 위대한 현자 중 한 명
랍비 아키바는 토라의 모든 글자, 심지어 아주 작은 한 획에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창조와 관련하여 그는 창세기가 단순한 물리적 사실뿐 아니라 숨겨진 영적 진리로 가득 차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토라의 일점일획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 (미드라쉬 창세기 랍바 1:1):
랍비 아키바는 창조를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신비로운 계시로 여겼습니다.
3. 랍비 시몬 바르 요하이(Rabbi Simeon Bar Yohai, 2세기): 유대교 신비주의의 기초가 된 저서인 조하르의 저자로 추정됨
조하르에서 창세기는 신비롭게 읽힙니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 계시이며, 각각의 창조 행위는 영적인 에너지에 상응합니다.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은 장차 올 세상의 의로운 자들을 위해 숨겨져 있었다.”
조하르, 특히 베레시트(창세기)에 대한 주석.
창조는 신적인 에너지가 세상에 방출되는 우주적 드라마로 여겨집니다.
4. 랍비 사디아 가온(882–942 AD, Ha Gaon Ben Joseph Sadia, 철학자이자 성서 해석가)
그리스인들의 영원한 우주 사상에 맞서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 무로부터의 창조)를 옹호했습니다. 그는 『신앙과 의견의 책』에서 창세기 1장이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가르쳐 준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무(無)에서 우주를 존재하게 하셨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영원한 우주에 대한 믿음은 성경과 모순되며, 창조에는 시작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5. 마이모니데스(람밤, Maimonides의 이름은 Moses Ben Maimon, 이름의 앞 글자 따서 람밤이라고 부름, 1135–1204): 중세 유대인 철학자이자 신학자
마이모니데스는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원한 우주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어떻게 조화시킬지 고심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창조를 옹호했지만, 비유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것처럼 모든 부분이 문자 그대로 전달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다.”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 2부.”
그는 창세기를 원시 과학이 아닌 심오한 신학으로 여겼으며, 신학과 이성 사이의 대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창조론에 대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충돌>
고대 세계에서 인류 문명의 중심에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두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뿌리를 둔 헤브라이즘은 우주가 주권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무(無)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토라, 예언서, 그리고 구약성서의 지혜 문학을 통해 계승되었으며, 이후 미쉬나, 게마라, 미드라쉬와 같은 유대교 해석 전통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로마 헬레니즘은 이성, 형상, 그리고 우주의 질서에 중점을 두었으며, 우주가 영원하고 이성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 받는다고 보았습니다. 이 세계에서 신들은 우주에 거주했지만, 무로부터의 창조는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주는 종종 신적 또는 반신적 힘에 의해 질서를 갖춘 영원한 물질로 여겨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을 통해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어 로마 문명에 흡수되면서,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서기 100년경~170년)의 이름을 딴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이 지배적인 우주론적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 패러다임에서 지구는 우주의 부동의 중심이었고, 태양, 달, 행성, 별을 포함한 모든 천체는 복잡한 구와 주전원 체계를 이루며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인류사에 너무 중요한 일이어서 부연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체계 에서 주전원은 고대 그리스어 ἐπίκυκλος (epíkuklos ) ‘원 위에’ 에서 유래했으며, “다른 원 위를 움직이는 원”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주의는 하나님이 우주를 직접 창조하고 다스린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그리스-로마 사상의 승리는 인간의 이성과 관찰에 초점을 맞추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 중심의 우주론(지구를 중심에 두는)은 기독교 사상에도 통합되어 중세 우주관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주의의 신적 창조관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기반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근세 초기까지 서양 지성계를 지배했습니다.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부상과 성경적 세계관의 침식>
르네상스(14~17세기)는 그리스-로마 헬레니즘의 이상, 즉 인본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고전 문헌으로의 회귀를 되살렸습니다. 기독교적 맥락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명은 히브리적 뿌리인 창조론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과학 혁명(16~17세기)은 인류의 우주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태양 중심 모델을 제안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도전했습니다. 이후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관측을 통해 이를 확증했고, 아이작 뉴턴(1643~1727)은 천구를 수학적 정확도로 묘사하는 보편적인 운동 법칙과 중력 법칙을 개발했습니다.
이러한 발견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주 역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묘하게 계시에서 이성으로 초점을 이동시켰습니다. 계몽주의 시대(17~18세기)에는 르네 데카르트, 볼테르, 돌바흐 남작과 같은 사상가들이 이성, 전통 종교 권위에 대한 회의,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이 아닌 자연 법칙으로 우주를 설명하는 세계관을 옹호했습니다.
19세기에는 오귀스트 콩트(Aguste Comte,실증주의의 창시자)와 찰스 다윈(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론의 창시자)이 세속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공고히 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설계 없이 스스로 조직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한때 유럽의 지적, 도덕적, 영적 구조를 형성했던 히브리-기독교적 세계관은 점차 밀려났습니다. 헬레니즘적 합리주의는 살아남았지만, 성경적 창조에 뿌리를 둔 기독교적 세계관은 주류 학계, 철학, 그리고 이후 대중문화에서 체계적으로 버림받았습니다.
<우주 팽창론이 가져온 21세기 문명세계관의 대전환>
따라서 세속주의가 지적 세계를 지배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더 큰 현실, 곧 이미 왔고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부름 받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과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영광스럽게 하는 수단으로 과학을 되찾아 모든 원자, 모든 별, 모든 심장 박동 뒤에는 하나님의 지탱과 구원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이 천동설을 신앙처럼,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구중심설(geocentrism)의 세계관으로 인류는 오랜 세월 믿고 그렇게 따라왔습니다. 그렇다면 천동설은 철학일까요? 종교일까요? 아닙니다. 놀랍게도 과학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천문학의 영역입니다.
하늘에 있는 바다 모래와 같은 별을 보며, 인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왔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별들이 있는 우주는 무한하여, 이전에도 그러하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상우주론입니다. 중력의 법칙을 우주에 적용하던 뉴턴도, 아인스타인 자신도 고백한 바와 같이 우주가 팽창한다고 하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에드윈 허블이 은하를 관찰하고 발견했던 바뀔 수 없는 사실로 발견한 우주의 팽창은 정상이론을 폐기시켰을 뿐 아니라 더불어 천체물리학에서 정설이 된 인플레이션 이론을 낳게 됩니다.
1964년 벨 연구소에 2차 세계 대전 이후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레이더를 이제 천문학 관측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이 때 아르노 팬지어스와 로버트 우드로우 윌슨은 에코 위성에서 보내 오는 알 수 없는 잡음을 발견합니다. 새 떼들이 공중에서 분사한 배설물인 것 같아서, 레이더를 청소하였습니다. 그래도 잡음이 여전했습니다. 깨끗이 청소하면 다시금 돌아 오는 비둘기 떼를 눈물을 머금고 사냥할 정도로 잡음 제거는 절박했습니다. 그렇게 까지 모든 소음 제거를 위한 수고를 했지만 잡음은 여전했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공용 목욕탕에 갔을 때 가득한 수증기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없음에도 수증기의 열기가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주 초기에 대폭발이 있었고, 그 폭발 이후 우주는 급속도로 식어졌지만 여전히 그 뜨거웠던 우주에서 발생한 흑체복사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명명한 이름이 우주배경복사(Cosmic 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 CMB/CMBR)입니다. 이는 우주 초기의 빅뱅 이론으로 과학계는 받아 들이게 됩니다. 먼저 우주배경복사를 실제로 발견하기 앞서서 1948년 조지 가모프, 랄프 앨퍼, 로버트 허만에 의해 우주배경복사는 처음으로 예견되었습니다.
팬지어스와 윌슨의 발견도 중요하지만 이론적으로 이미 빅뱅 핵합성 이론을 완성한 거장은 조지 가모프였습니다. 그러나 벨 연구소의 관측에서 아르노 팬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초기 우주의 뜨거웠던 상태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흔적으로 특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버트 헨리 디키, 제임스 피블스, 데이비드 윌킨슨 등 이론물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논문으로 발표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알려진 이름 우주배경복사는 빅뱅 우주론의 탄생을 증명할 수 있었고, 정상우주론은 더이상 과학계 어디에서도 설 곳을 잃고 말았습니다.
영원전부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우주는 영원하며 그 상태가 일정하다는 정상우주론은 과거에 우주가 현재보다 더 균일했다는 증거인 우주배경복사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은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한 공로로 197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 이릅니다. 사실 우주배경복사의 발견이 결코 작지 않음은 천문학에서 말하는 우주 등방성(Space isotropic)에서 나타납니다.
우주를 연구하던 천문학자들이 우주에서 가장 오래 된 복사를 분석한 결과 우주는 등방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우주에는 어떤 특정한 방향성은 없으며, 우주의 어느 방향을 보든 간에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등방성(等方性)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우주의 등방성과 더불어 균질성도 유의해야 합니다. 우주의 균질성은 우주의 다른 위치에 있는 관찰자들이 동일한 관측 증거를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주배경복사는 우주 전역에서 발견되는 약 160GHz의 주파수를 가진 전자기파 복사입니다. 전자기파(電磁氣波, electromagnetic wave)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공간상으로 방사되는 파동을 일컫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빛 즉 가시광선 영역도 전자기파가 Microwave magnetic spectrum에 포함되지만 전자기파는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길고 주파수와 에너지가 낮아서 보이지 않습니다. 빛에는 가시광선 외에도 감마선, X선, 자외선, 적외선, 초단파와 라디오파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잠시 멈추어 과학과 신학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보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
매우 좁은 영역인 가시광선 일부만을 우리 인간은 빛으로 인식하지만, 동물들의 시각 범위는 인간보다 훨씬 넓으며, 색상 인식도 매우 뛰어납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빛의 영역을 확대함으로 특히 천체 물리학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과학의 발달도 발견된 많은 연구들이 인간을 놀라게 하지만 , 언제나 성경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적 탐구가 “어떻게(how)”와 “무엇(what)”이라는 물질 세계의 영역들을 밝혀 주지만 “왜(why)”와 “누가(who)”라는 것에 답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 자연 만물의 생성 목적, 우주 존재의 이유 등에 대하여 과학은 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물질의 구성이 무엇이며, 우주에 있는 천체 가운데 얼마나 많은 별들이 있는지는 탐구하지만 그 별들이 왜 있는지는 과학은 답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과학이 묻고
신학이 답하다”
“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위의 두 개의 질문 중 어느 것이 더 타당할까요?
“과학이 묻고, 신학이 답하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라는 것은 상상만 해도 어떤 답이 나올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주의 광활함을 더 발견하여도, 게놈 지도를 다 완성하여도, DNA 구조를 정밀하게 파악하여도, 세포를 만드시고, DNA를 설계하시고, 유전 정보를 심어 놓으시고, 지구와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은 성경에서 이미 답을 주고 계십니다. 문제는 과학이 그 답을 묻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답은 이미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과학 교과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묻는 질문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창세기 1장 3절의 “빛이 있으라”는 것이 빅뱅과 관련이 있다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좀 더 정교해 지기는 했지만 138억년전에 아주 뜨거운 특이점에 대폭발이 있었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빛의 창조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빛을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과학이 만약 “왜 빛을 창조하셨나요?”라고 묻는다면 답을 줄 수 있지만, 과학이 “빛의 창조가 빅뱅”이었나요?라고 묻는 다면 그것은 답할 수 없습니다. 저는 빅뱅을 믿는 것이 아니라 빛의 창조를 믿기 때문입니다. 빛의 창조의 가장 합리적인 수단으로 빅뱅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수천년 동안 관찰하고, 결국에는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하면서 도출한 과학적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빅뱅이 많은 부분에서 성경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빅뱅 이전에는 공간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으며, 시작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빅뱅은 우주의 시작점이며, 공간과 시간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시간도 공간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창조하시고 어두움과 나누신 이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라고 하는 시간의 개념으로 인류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신학과 과학과의 대화>
저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 과학이 묻고 신학이 답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구체적으로 창조에 있어서 과학이 묻고 신학이 답할 수 있는 영역은 어떤 것이며 무엇일까요?
- 만약 반대로 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한다면 그런 것들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자 첫 번째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과학이 묻고 신학이 답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과학은 본질적으로 자연 세계에 대해 “어떻게(how)”와 “무엇(what)”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매우 능숙하지만,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왜(why)”와 “누구(who)”라는 질문에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과학이 묻고 신학이 더 심층적인 답을 제공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우주는 왜 무(無)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일까요?
- 성경의 답: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과 뜻으로 창조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1; 요한복음 1:3).
-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성경의 답: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시편 19:1; 이사야 43:7). - 생명은 왜 존재할까요?
성경의 답: 생명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설계의 일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창세기 2:7; 골로새서 1:16). - 무(無)가 아니라 유(有)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답: 원인 없는 원인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를 존재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3). - 도덕 법칙과 인간의 의식은 왜 존재할까요?
성경의 답: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6-27; 로마서 2:14-15). - 우주는 왜 질서 있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답: 하나님은 혼돈이 아닌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4:33).
위의 질문 외에도 수많은 질문이 있지만 성경은 한결같이 그 질문들에게 답을 줍니다. 이처럼 과학은 메커니즘을 탐구합니다. 신학은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 가겠습니다.
- 구체적으로 창조에 있어서 과학이 묻고 신학이 답할 수 있는 영역은 어떤 것이며 무엇일까요?
과학이 묻고 성경이 답하는 방식으로 질문과 답변을 이어가겠습니다.
- 빅뱅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성경의 답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하나님은 원동력이십니다. - 근본적인 상수(중력, 전자기력 등)는 왜 정교하게 조정되어 있을까요?
성경의 답변: 하나님은 생명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주를 정확하게 설계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04편; 히브리서 1:3). - 생명은 어떻게 무생명에서 유래되었을까요? (무생명설)
성경의 답변: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것(창세기 1:20-21)이며, 불어넣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 우주는 왜 수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
성경의 답변” 창조주이 하나님은 이성적인 존재이시고, 인간도 그분의 이성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1-3). - 인간은 왜 타고난 도덕 감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성경의 답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기록해 두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5). - 우주는 왜 필요 이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까요?
성경의 답변: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기뻐하시는 창조주의 본성을 반영합니다(시편 27:4). - 인간의 의식은 동물의 본능과 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답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7).
과학이 묻고 성경으로 답하는 것이 정상적이지만, 반대로 신학이 과학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한다면 그런 것들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때로는 신학이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하지만, 과학은 그 과정과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신학은 과학에게 묻고 과학은 답합니다
- 지구는 어떻게 “생물로 가득 차 있습니까”(창세기 1:20-25)?
과학의 답변: 생물학적 과정(생식, 생태계, 생물 다양성)을 통해서입니다. - 비는 어떻게 “땅을 적시나요”(창세기 2:5-6)?
과학의 답변: 물의 순환(증발, 응결, 강수)을 통해서입니다. - “하늘의 궁창”(창세기 1:6-8)은 어떻게 유지되나요?
과학의 답변: 대기압과 기체와 액체를 지배하는 물리 법칙에 의해 유지됩니다. - “별들은 어떻게 밤을 주관하나요”(창세기 1:16)?
과학의 답변: 중력 궤도와 별의 핵융합으로 방출되는 빛을 통해서입니다. - “사람은 어떻게 흙에서 나왔나요”(창세기 2:7)?
과학의 답변: 과학적으로 인간은 지구 지각에도 존재하는 원소(탄소, 산소, 질소), 즉 “땅의 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동물은 어떻게 종류대로 번식하나요? (창세기 1:24-25)
과학의 답변: 생물학적 생식과 유전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과학이 묻고 성경으로 답하는 부분에는 익숙하지만, 반대로 성경으로 묻고 과학으로 답변하는 부분에 대해서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과학은 메커니즘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만, 신학은 여전히 의미와 목적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과학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합니다. 신학은 그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과학은 때때로 그 과정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신학을 대체할 수는 없고, 신학이 과학을 대체할 수도 없습니다. 이 두 렌즈는 올바르게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의 진리의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이제 지금까지 제가 전개한 내용을 토대로 좀 더 구체적인 질문들을 던져 보고자 합니다.
- 빅뱅 이전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었다면, 창세기 1장 2절의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매치될까요? 아니면 다를까요?
- 빅뱅에서 만들어지는 빛이 138억년 전 특이점에서 최초의 양성자와 광자가 만들어지고 그 빛이 우주 공간으로 나가기까지 38년이 걸렸다면 그 과정은 어떤 것인가요?
- 빅뱅 초기의 특이점에 폭발하고, 빛이 발생했다면, 물질 세계 즉 성운,별들, 그리고 은하 및 은하단, 초은하단의 구성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나요?
- 빅뱅 이후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인플레이션 이론은 어떤 것인가요?
- 빅뱅 이후 별이 계속 태어나고, 자라고 다시금 죽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나요?
- 성경은 6일 창조 가운데 4일 날 별들과 태양을 창조했다고 했는데, 빅뱅 이후의 별의 형성과 비교할 때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요?
- 지금도 관측되는 초신성 폭발을 성경은 무엇으로 답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질문 하나씩 물어 보고 답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빅뱅 이전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었다면, 창세기 1장 2절의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매치될까요? 아니면 다를까요?
- 과학적 관점: 현재 물리학에 따르면 빅뱅 이전에는 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빅뱅은 이러한 차원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시간 자체가 빅뱅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미의 “이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신학적 성찰: 창세기 1장 3절은 1장 2절이 아니라 “빛이 있으라”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혼돈과 어둠을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는 우주의 시작에 에너지(빛 포함)가 출현했다는 개념과 개념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빅뱅을 과학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조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을 선포합니다.
- 따라서: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강력한 신학적 공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공간과 시간과 빛과 물질을 불러내어 존재하게 하셨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빅뱅 이론과 유사합니다.
두 번째 질문을 나누고자 합니다.
빅뱅에서 만들어지는 빛이 138억년 전 특이점에서 최초의 양성자와 광자가 만들어지고 그 빛이 우주 공간으로 나가기까지 38만년이 걸렸다면 그 과정은 어떤 것인가요?
- 빅뱅 직후(약 138억 년 전): 우주는 매우 뜨겁고 밀도가 높은 플라스마, 즉 쿼크, 글루온, 전자, 그리고 광자로 이루어진 “수프”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광자(빛 입자)는 존재했지만, 자유 전자에 의해 끊임없이 산란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 재결합 시대(빅뱅 38만 년 후): 우주가 팽창하면서 약 3000켈빈(약 2700°C)까지 식었습니다. 전자는 양성자와 결합하여 중성 수소 원자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중성화로 인해 광자는 처음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최초의 빛”은 현재 우리가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CMB/CMBR)로 감지하는 것입니다.
- 중요: 빛(광자)은 태초부터 존재했지만 재결합 이후에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은 우주의 암흑 조건 이후에 나타난 “최초의 가시광선”이라는 개념과 신학적으로 부합합니다.
세 번째 질문을 나눕니다.
빅뱅 초기, 뜨거워진 특이점이 폭발하고, 빛이 발생했다면, 물질 세계 즉 성운,별들, 그리고 은하 및 은하단, 초은하단의 구성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나요?
- 재결합 단계 이후: 물질 분포의 미세한 밀도 변동은 중력으로 이어졌습니다. 다른 영역보다 약간 더 밀도가 높은 영역은 더 많은 물질을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 수백만 년에 걸쳐: 물질은 뭉쳐 수소와 헬륨(원시 원소)의 구름을 형성했습니다. 이 구름은 중력에 의해 붕괴되어 최초의 별(종족 III 별)을 형성했습니다. 별들은 은하로 모였습니다. 은하는 성단과 초성단을 형성했습니다.
- 과정 요약:
중력 불안정성 → 물질 덩어리
가스 구름 → 원시별 → 별
별 → 은하
은하 → 성단 및 초성단 - 우주 그물: 오늘날 물질은 필라멘트와 공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우주 그물” 구조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로 인플레이션 이론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빅뱅 이후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인플레이션 이론은 어떤 것인가요?
- 인플레이션은 빅뱅 직후 1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약 10⁻³⁶초에서 약 10⁻³²초) 동안 발생한 우주의 매우 빠른 팽창입니다.
- 우주는 기하급수적으로, 즉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팽창했습니다(공간 자체가 팽창했기 때문에 상대성 이론에 위배되지 않음). 우주의 구조를 매끄럽게 만들었습니다(우주 배경 복사가 균일하게 보이는 이유). 우주의 먼 곳들이 비슷한 온도를 갖는 이유는 지평선 문제 때문입니다. 지평선 문제(horizon problem) 는 균질성 문제(homogeneity problem)으로도 부릅니다. 이는 대폭발 이론 즉 빅뱅 이론 내에서 물리 우주론의 미세 조정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초기 상태가 균일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인과관계가 없는 지역 간에 균질성이 관측되면서 이를 지평선 문제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지평선 문제는 1956년 볼프강 린틀러가 처음 제의하였습니다. 로버트 디케(Robert Dicke)와 짐 피블(Jim Peebles)에 의해 이론은 정립되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없었다면, 관측된 우주의 많은 특성들은 쉽게 설명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성경은 별들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데, 지금도 별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후 별이 계속 태어나고, 자라고 다시금 죽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나요?
- 별의 수명 주기는 수십억 년 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최초의 별(종족 III) → 단명(수백만 년) → 초신성 폭발. - 이 폭발로 우주는 더 무거운 원소들(탄소, 산소, 철)로 가득 찼습니다. 후대의 별들(종족 II와 종족 I)은 이렇게 풍부한 물질로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오리온 성운과 같은 별의 육아실(성운)에서 별의 형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별의 탄생과 빅뱅 이후의 별의 형성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6일 창조 가운데 4일 날 별들과 태양을 창조했다고 했는데, 빅뱅 이후의 별의 형성과 비교할 때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요?
- 창세기: 넷째 날(창세기 1:14-19), 해, 달, 별들이 시간(낮, 밤, 계절)을 지배하도록 창조됨.
강조점은 기능적입니다. 즉, 천체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 과학: 별은 물질이 중력에 의해 뭉친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진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우리 태양은 약 46억 년 전에 형성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별보다 훨씬 늦습니다.
- 주요 차이점: 창세기는 기능적이고 신학적 목적, 즉 하늘을 “지배”하는 빛을 제시합니다. 과학은 물질적이고 연대기적 과정, 즉 자연적 붕괴와 핵융합을 제시합니다.
- 가능한 신학적 해석: 일부 기독교 학자들은 창세기 4일이 반드시 천체의 물리적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대기가 맑아진 후 천체의 출현과 역할 할당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초신성 폭발 관측에 대해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지금도 관측되는 초신성 폭발을 성경은 무엇으로 답을 줄 수 있을까요?
- 과학적 관점: 초신성은 거대한 별의 죽음입니다. 초신성은 무거운 원소를 우주로 흩뿌려 미래의 별과 행성 형성의 씨앗을 뿌립니다. 생명에 필요한 일부 원소(철과 칼슘 등)는 초신성에서 생성되었습니다.
- 신학적 성찰: 성경은 초신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19편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초신성은 우주의 경이로운 힘과 창조의 순환을 보여줍니다. 초신성은 하나님의 설계를 반영하는데, 우주의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이 설계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성경적 주제를 반영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시작: 성경적 및 과학적 유사점>
물리학에 따르면 빅뱅 이전에는 시간이나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빅뱅은 시공간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는 무(無)로부터 창조를 제시합니다.
창세기 1장 1-3절은 그 메커니즘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존재를 낳았음을 전달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우주 최초의 관측 가능한 에너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반영합니다. 과학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개념적으로는 일치합니다. 둘 다 무(無)에서 구조화되고 빛나는 무언가로의 창조를 설명합니다.
역사를 통틀어 과학과 신학은 존재의 가장 큰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과학은 경험적 관찰과 실험에 의존하는 반면, 신학은 신적 계시와 철학적 성찰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방법론은 다르지만, 두 학문은 많은 동일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룹니다. 종종 서로를 보완하며 현실에 대한 더욱 풍부하고 완전한 이해를 제공합니다. 이 섹션에서는 각 분야가 제기하는 핵심 질문들과 어떻게 다른 분야가 의미 있는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과학이 묻고 신학이 답하다>
과학은 어떤 질문들을 던지고 신학은 답을 줄 수 있을까요?
무(無)가 아닌 유(有)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학은 존재의 “방식”(예: 빅뱅, 우주 급팽창)을 설명할 수 있지만, 존재 자체가 “왜” 시작되었는지는 답할 수 없습니다. 신학은 우주를 존재하게 하신 목적을 가진 창조주(창세기 1:1)를 가리킴으로써 답을 제공합니다.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과학은 우주의 복잡성과 광대함을 드러내지만, 그 목적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신학은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시편 19:1) 존재하며, 생명과 창조주와의 관계를 위한 거처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물리 법칙은 왜 질서 있고 합리적인가요?
과학자들은 우주가 일관된 법칙에 따라 예측 가능하게 움직인다는 가정에 의존합니다. 신학은 이러한 질서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히브리서 1:3) 하나님의 합리성과 불변성을 반영한다고 설명합니다.
우주는 왜 생명의 존재를 위해 미세 조정되어 있을까요?
과학적 발견은 근본적인 상수의 사소한 변화조차도 생명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학은 이러한 “미세 조정”을 지적 설계, 의도성, 그리고 생명을 염두에 두고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사야 45:18)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우주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과학은 인류의 신체적 발달과 생물학적 복잡성을 연구하지만, 궁극적인 의미를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창세기 1:27) 창조되었으며, 창조물에 대한 관리권을 부여 받았다고 밝힙니다(창세기 1:28).
<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이제 반대로 과학이 답할 수 있는 신학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별과 은하는 어떻게 형성되고 소멸할까요?
신학은 하나님이 별을 창조했다고 주장하지만, 과학은 그 과정을 설명합니다. 별은 가스와 먼지 구름(성운)이 붕괴하면서 형성되고, 질량에 따라 살다가 백색 왜성, 중성자별, 또는 블랙홀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지금도 진행되는 별의 생성과 성장, 쇠퇴와 소멸 그리고 재탄생은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만드신 창조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종 씨 맺는 식물과 동물들을 창조하시고, 이 시스템이 작동함으로 식물과 동물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DNA는 어떻게 생명을 암호화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창세기 1:21-27), 과학은 그 메커니즘을 밝혀냅니다. 생명의 복잡한 언어인 DNA는 유기체의 발달과 기능에 필수적인 유전 정보를 암호화합니다.
지구와 우주의 나이는 얼마일까요? 그리고 신학은 시간의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까요?
성경은 창조를 이해하는 신학적 틀을 제공하지만, 방사성 연대 측정, 빛의 속도 측정, 우주 배경 복사 관측과 같은 과학적 방법들은 지구의 나이를 45억 년, 우주의 나이를 138억 년으로 추정합니다.
이 점을 되새기면서 저는 종종 이런 의문을 품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든, 45억 년이든, 아니면 우주가 138억 년 동안 존재했든,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일까요?”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수십억 년조차도 한 순간처럼 짧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올람 하바(Olam Haba, 다가올 세상)와 올람 하제(Olam Hazeh, 현 세상)라는 개념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 하나님께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저는 이 개념을 심층적으로 예전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우주의 광대한 역사와 장엄함을 아는 것은 제 신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을 더욱 깊어지게 합니다.
자연 과정은 시간에 따라 어떻게 작용할까요? 그리고 자연계의 탄생 그리고 죽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무엇일까요?
신학은 하나님을 창조의 유지자로 선언하는 반면, 과학은 중력, 열역학, 생물학적 진화와 같은 자연 법칙의 작용을 자세히 설명하여 우주와 생명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발전하는지 설명합니다. 이처럼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우주는 일관되고 관찰 가능한 과정을 통해 작동합니다. 중력은 은하와 행성계를 형성합니다. 열역학은 에너지 흐름과 물질의 불가피한 붕괴를 지배합니다. 생물학적 진화는 적응과 변화를 통해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합니다. 방사능 붕괴는 암석과 원소의 노화를 통해 오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찰과 신학적 응답: 세속 시대의 성경적 세계관 회복>
히브리주의에서 헬레니즘으로, 창조론에서 합리주의로,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우주에서 자급자족하는 우주로의 여정은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심오한 변화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현대 세계를 형성해 온 문화적 세력을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되며, 세속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1. 신성의 상실을 인식하기
첫 번째 단계는 우주의 세속화가 창조 세계의 신성함을 약화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던 곳(시편 19:1)에서, 현대 세계는 종종 별을 단순한 가스 덩어리로, 인간을 우주적 우연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 세계가 그 자체를 넘어 창조주를 가리키는 창조의 비전을 되찾아야 합니다. G. K. 체스터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경이로움이 부족해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움이 부족해서 굶주릴 것이다.”
2. 진리의 통일성을 받아들이기
아서 F. 홈즈가 강조하고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되뇌었던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과학과 신학은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적이 아니라 동반자입니다. 우주의 광활함, 생명의 복잡성, 그리고 자연 법칙의 복잡성에 대한 과학적 발견은 우리를 더 큰 예배로 이끌어야지, 더 작은 예배로 이끌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번 반복하지만 우리는 다음의 차이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과학은 “어떻게?”라고 묻습니다.
신학은 “왜?”라고 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인 의미, 목적, 그리고 운명이 오직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면서 과학의 정당한 발견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3. 환원주의 (Reductionism)에 저항하기
세속적 합리주의는 인간을 생물학적 기계로, 우주를 무의미한 물질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으며 우주는 “매우 좋았다”(창세기 1:31)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존재를 단순한 물질적 과정으로 축소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합니다. 앨빈 플랜팅가가 주장하듯이, 자연주의는 그 자체의 신뢰성을 훼손합니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맹목적인 진화적 힘의 산물이라면, 왜 그 힘이 진리를 낳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까? 기독교 유신론은 이성, 도덕성, 그리고 의미에 대한 일관된 토대를 제공합니다.
4. 창조 신학의 회복
기독교 신학은 과학과의 교류에서 후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확고한 창조 신학을 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십니다. 피조물은 하나님과는 다르지만, 그 존재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시간, 공간, 물질, 그리고 생명은 우연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피조물은 질서 있고, 목적이 있으며, 생명의 번영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이 신학은 예배, 예술, 교육, 그리고 공적 담론을 통해 표현될 수 있으며, 모든 현실의 신성함을 세상에 일깨워 줍니다.
5. 세속주의 속에서 희망을 품고 사는 삶
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3)께서 당신의 창조 세계로 들어오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과 쇠퇴의 저주가 뒤집히고 새로운 창조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것처럼,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소망은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8:19-21)
실험과 측정을 통해 관찰 가능한 이러한 과정은 지적인 법칙에 따라 지배되는 질서 있는 우주를 반영합니다. 과학은 우주의 점진적인 전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메커니즘의 이면에서 신학은 하나님이 우주를 감고 버리는 수동적인 시계 제작자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창조의 존재와 질서를 끊임없이 유지하십니다(골로새서 1:17: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 안에 함께 섰습니다.”). 따라서 자연의 과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유지하시는 섭리의 표현 그 자체입니다.
자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쇠퇴와 죽음을 드러내지만,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심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올람’(עוֹלָם)은 “영원한”, “끝없는 지속”, “인간의 시야 밖에 숨겨진 시간”이라는 개념을 표현합니다. 시편 90:2: “산이 생기기 전, 온 세상을 조성하기 전, 영원(올람)부터 영원(올람)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지속적으로 쇠퇴하는 창조된 우주(이사야 51:6)와는 달리, 하나님의 존재는 시간을 초월하고, 경계가 없으며, 무한합니다. 그러나 이 쇠퇴하는 우주에 하나님은 희망을, 비록 유한하지만 인간이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이요 생명>
물리적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과는 엔트로피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악순환에 근본적인 주장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님은 생명이라는 개념, 히브리어로 ‘하야’(חָיָה)를 사용하셔서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정복하는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셨습니다. 과학이 모든 육체적 생명의 불가피한 쇠퇴를 관찰하는 반면, 예수는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필멸이 최후의 심판이 아님을 보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은 유한한 자연사에서 벗어나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생명으로 나아갑니다(디모데후서 1:10: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느니라.”).
믿음과 과학: 통합된 비전
따라서 과학은 수십억 년에 걸쳐 전개되는 자연적이고 관찰 가능한 과정들을 묘사하는 반면, 신학은 더 깊은 의미를 선포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실재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강력하지만 승리하지 못합니다. 자연 법칙은 물질을 지배하지만, 신의 사랑은 운명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자연과 생명과 우주 탐험 너머에는 예배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운명이 쇠퇴가 아니라 창조주와 함께하는 영원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경외심과 희망으로의 부름
자연 과정은 물질이 어떻게 노화되고 생명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신학은 만물을 지탱하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만물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한한 존재는 무한함을 입게 되고, 필멸의 존재는 하나님의 영원(올람)으로 초대됩니다. 과학은 창조의 리듬을 설명합니다. 신학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의 춤(하야)으로 초대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선포했듯이,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뇌는 어떻게 사고와 감정을 생성하는가(과학적으로)?
신학은 인간이 영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임을 확증합니다. 신경과학은 뉴런, 시냅스, 뇌 화학 반응이 어떻게 사고와 감정에 기여하는지 보여주어 인간의 의식이 작동하는 “하드웨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과학과 신학의 화해: 진실의 통일된 지평을 향하여, Toward a Unified Horizon of Truth>
인류 문명의 광활한 태피스트리를 가로질러, 우리 태초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경이로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신에 대해 처음으로 노래했던 히브리 두루마리부터, 단 한 번의 불꽃에서 팽창하는 우주의 메아리를 기록하는 현대 물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존재의 의미를 좇아왔습니다.
패러다임은 변화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굴복했고, 정상 상태에 대한 꿈은 우주 배경 복사 앞에서 무너졌으며, 고전 과학의 확실성조차 양자장과 팽창하는 시공간이라는 기묘한 현실 앞에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변화 너머에도 영원한 진실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성적인 창조주께서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셨기에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우주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설명하지만, 신학은 우주의 존재 이유를 밝힙니다. 천문학은 별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지만, 성경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선언합니다. 진화론은 돌연변이와 적응을 통해 생명의 길을 추적하지만, 창세기는 모든 생명체 뒤에는 신성한 예술가의 손길이 있어 “그 종류대로” 그들을 빚으셨다고 확언합니다.
결국, 창조 이야기는 단순히 고대 문명의 유물이 아닙니다. 과학 이론은 비인격적인 우주의 냉혹한 명령이 아닙니다. 둘 다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한 현실의 장엄함을 인식하려는 인간의 시도입니다. 따라서 최종적인 지평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입니다. 하늘을 펼치시고 어둠 속에서 분자를 짜신 하나님께서 또한 인류 역사에 들어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니시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1: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는 유한성과 영원, 먼지와 신성 사이의 간극을 메우십니다. 창조, 과학, 신앙, 그리고 이성은 적이 아니라 진리로 가는 길의 동반자입니다.
모든 원자, 모든 별, 그리고 모든 숨결 속에서 우리는 경외심으로 초대받습니다. 모든 질문과 발견 속에서 우리는 예배로 인도받습니다. 그리고 흥망성쇠하는 모든 패러다임 속에서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말씀은 영원히 서 있습니다.
<글을 맺으며: 깊이와 경이로움의 대화: A Dialogue of Depth and Wonder>
과학과 신학을 적대자로 보기보다는 심오한 대화의 동반자로 여겨야 합니다. 과학은 창조의 메커니즘을 밝혀낼 수 있고, 신학은 그 메커니즘의 의미와 목적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우리를 우주에 대한 더 깊은 경외심과 창조주에 대한 더 큰 경외심으로 이끕니다. 빅뱅과 창세기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과학은 창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신학은 창조가 “왜” 중요한지 밝힙니다. 두 이론 모두 각자의 언어로 우주의 시작이 있었으며, 그 시작 뒤에는 심오한 신비가 숨겨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의 렌즈를 통해 보든 과학의 망원경을 통해 보든 창조의 빛은 무작위적인 혼돈이 아니라 질서, 아름다움, 그리고 목적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탐구해 나갈수록 우리의 경이로움은 더욱 깊어지고,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분의 영광을 더욱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조는 단순히 멀리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영혼을 통해 울려 퍼지는 신성한 선율입니다. 문명이 흥망성쇠하고, 패러다임이 지구 중심설에서 태양 중심설로, 정상 상태 모델에서 팽창하는 우주로 변화하는 동안에도 한 가지 진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경외심과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우주에 우리가 둘러싸여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이 우주의 장엄함, 그 규모, 질서, 그리고 섬세한 불변성을 드러냅니다. 신학은 우주의 기원, 목적, 그리고 궁극적인 희망을 밝혀줍니다.
이성과 계시를 종종 대립시키는 세상에서, 우리는 둘 다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탐구 없는 신앙은 정체되고, 신앙 없는 탐구는 맹목적입니다. 하지만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과 신비 앞에서 겸손함을 유지하는 과학은 함께 더 깊은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태초에 터져 나온 빛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라고 선포하신 그리스도의 빛을 묵상할 때, 우리는 창조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약속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목적에 대한 약속, 구원에 대한 약속, 그리고 영원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우리 머리 위의 별들은 고대 폭발로 탄생한 원자들로 타오르지만, 우리 마음은 우리의 이름을 아시는 창조주에 대한 소망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은하계를 들여다보는 망원경과 신성한 숨결을 속삭이는 성경 사이에서, 우리는 모순이 아닌 부르심을 발견합니다. 그러니 경외하고, 경배하고, 눈을 크게 뜨고 창조된 모든 것의 신비와 위엄, 그리고 의미 속으로 나아갑시다.
2025년 4월 26일 아침에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씀
PS 이 글은 금식 이틀 째 썼습니다. 저의 아들 사무엘이 7일 금식을 마치고, 제가 그 금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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