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계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랍비 유대교의 성전신학-10 » 부제: 신약성경 속 성전의 재해석과 랍비 문헌 속 성전 신학의 충돌과 연결 » Jesus’ Temple Cleansing and the Rabbinic Theology of the Temple Reinterpreting the Temple in the New Testament in Light of Rabbinic Literature
Contents
- <글을 시작하면서: 성전을 둘러싼 숨가쁜 전환기, 그리고 정화의 순간>
- <유대교 문헌 속의 성전>
-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성전>
- <성전 정화가 주는 의미>
- <성전 정화의 배경>
- <성전 이전의 기도와 회당 예배의 형성>
- <제1성전과 제2성전 시대의 제사 제도의 비교와 AD 70년 이후의 변화>
- <랍비 문헌에 나타난 성전이란?>
- <히브리서의 성전신학: 예수 안에서 완성된 영원한 제사>
-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에 나타난 임재 신학의 전환>
- <랍비 문헌 속 성전 신학>
- <‘거룩함의 경계’를 넘는 예수님의 성전 이해>
- <성전 파괴 이후 랍비 유대교의 대응과 재구성>
- <하나님의 나라와 새로운 성전>
- <예수의 성전 정화와 인류 종말의 청사진: 성전 파괴, 회당 유대교, 그리고 오순절 교회의 분기점>
- <만민이 기도하는 집”: 예수님의 성전 정화, 초대교회, 그리고 제도화된 교회의 기도 회복 신학>
- <다니엘의 70이레(weeks)와 제3성전 건축 운동 및 신학적 관점>
- <글을 맺으며: 성전이 없는 시대, 우리는 어디서 예배하는가?>
<글을 시작하면서: 성전을 둘러싼 숨가쁜 전환기, 그리고 정화의 순간>
성전은 단지 한 시대의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자신 사이의 거룩한 긴장과 만남의 장소였고, 시대마다 그 의미는 더욱 깊어 졌습니다. 이 글은 그 성전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정화되고, 또 어떻게 랍비 전통 속에서 다시 구성되었는지를 신학적·역사적으로 추적하고자 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자 인류의 구속 역사 속에서 가장 깊은 상징 중 하나였습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였으며, 백성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기준, 민족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언약의 공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시내산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불과 구름으로 나타났고(출애굽기 19장), 그 임재는 회막(Mishkan)이라는 이동 가능한 성소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회막은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움직이는 동행의 상징이었고, 그 구조와 질서, 제사 체계는 모두 하늘의 형상대로 지어진 것이었습니다(출 25:9, 히 8:5).
그 회막은 이후 성막, 그리고 솔로몬 성전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솔로몬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카보드)이 실제로 임한 최초의 영구적 성전이었고(왕상 8:10–11),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정치적, 신학적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백성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인해 결국 파괴되었고(예레미야 7장),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귀환한 백성들은 스룹바벨을 통해 제2성전을 재건했으나, 그 성전은 이전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학개 2:3). 구름도 불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언약궤도, 시은좌도, 영광의 현현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신학과 문헌 속에서 깊은 아쉬움과 종말론적 기대를 낳게 됩니다.
그 위에 덧씌워진 화려함은 이방인 헤롯 대왕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 정치적 환심의 산물이었고, 성전의 중심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제사장 계급과 로마 당국 사이의 정치 거래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과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성전이 더럽혀졌던 기억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성전을 모독 당한 그 치욕은 단순한 종교적 충격이 아니라 민족의 모멸과 신앙의 상실을 뜻했습니다. 그 상처는 아직도 유대인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더럽혀질 수 없었습니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렇기에 예수님 당대의 성전은 외관은 화려했지만 내면은 긴장으로 뒤틀려 있었습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열심당, 에세네파 등 각 분파는 성전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과 신학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제사장 가문들조차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은 거룩함의 중심이기보다,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술수의 교차점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혼돈의 시대 속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걸어 들어가십니다. 그것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울려 퍼진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 전체를 짊어지고, 무너진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한 메시아의 걸음으로 성전을 향해 가셨습니다.
<유대교 문헌 속의 성전>
미쉬나 Middot (מִשְׁנַת הַמִּדּוֹת, Treatise of Measures), Tamid(תָּמִיד), 탈무드 Yoma (יומא), Sukkah (סוכה)등 유대 문헌은 제2성전의 구조와 제사 순서를 마치 여전히 존재하는 성전처럼 기술하며, 이는 단순한 역사적 회상이 아니라, 장차 올 메시아 시대에 다시 회복될 성전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하나님의 임재는 율법을 공부하는 자 가운데 거하신다”고 선언하며, 회당과 학문 중심의 임재 신학을 제안하였지만, 탈무드와 미드라쉬는 여전히 세 번째 성전의 회복, 메시아의 도래, 그리고 희생제사의 재개를 열망합니다. 즉, 유대 문헌은 성전 없는 시대를 인정하되, 그것은 일시적 결핍이며, 회복될 성전은 과거보다 더 크고, 더 거룩하며, 더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Tanchuma, Nasso 11).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성전>
그런데 바로 이 유대인의 상실과 갈망, 그리고 예언적 긴장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십니다. 예수는 단순한 랍비나 예언자가 아니라, 자기 몸을 성전이라 부르신 분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요 2:19)
제자들은 그가 자신의 육체를 성전으로 지칭하신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고(요 2:21), 바울은 고린도전서 3:16에서 믿는 자들, 곧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선언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성전의 기능과 본질을 완전히 성취하고 새롭게 하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참된 임재의 중심, 참 대제사장, 참 희생 제물, 그리고 새로운 성전 자체로 드러내셨습니다(히브리서 9–10장). 즉, 성전은 단지 건축물에서 신학으로, 그리고 신학에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태어난 성령 공동체인 교회는 더 이상 특정 공간이 아닌, 삶과 역사와 온 세상 가운데 흩어진 하나님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성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 예배, 공동체 정체성의 중심이었습니다. 시내산과 회막 시대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구름과 불로 나타났고, 회막은 이동식 성소로서 하나님과의 동행과 언약의 시작을 상징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실제로 임한 고정된 성전으로, 국가적 예배의 중심이 되었고, 제사의 체계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에는 성전이 사라지고, 대신 기도와 율법 중심의 회당 예배가 부상하면서 임재의 재구성과 분산이 이루어졌습니다.
제2성전기, 특히 헤롯 대왕 시대의 성전은 외관은 화려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부재한 시대로, 유대인들의 마음은 종말론적 성전 회복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성전이라 선언하시며,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 건물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성전이 자신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의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임재가 임한 보편적 성전이 되었으며, 성전은 이제 건물이나 민족이 아니라 삶 속에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단지 하나의 충돌 사건이 아니라, 성전이라는 신학이 옮겨가는 정점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새롭게 자리 잡는 전환점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과 인류 역사의 중심에서 ‘거룩함이 머무는 장소’가 어디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성전 공동체의 탄생을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성전 정화가 주는 의미>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후반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신 사건 중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는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마태복음 21:13, 마가복음 11:17, 누가복음 19:46). 이 장면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신학적 선언이자 종말론적 행동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닌, 그분의 공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종말론적 메시지와 왕적 자기 선언의 절정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예루살렘에 가신 것이 아니라, 절기적, 예언적, 신학적 타이밍에 맞춰 계획적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있었던 예루살렘 방문의 의미를 세 가지 차원에서 풀어 보고자 합니다.
성전 정화: 임재의 종말인가, 새 시대의 시작인가
예수님의 공생애 후반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신 사건 중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이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외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마 21:13; 막 11:17; 눅 19:46)
이 장면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신학적 선언이자 종말론적 행동, 그리고 왕적 자기 계시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절기적, 예언적, 신학적 타이밍에 맞춰 계획적으로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거룩한 역사의 정점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장소를 넘어 확장되어야 할 시간이 왔음을 알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건이 지닌 복합적인 의미를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1. 절기적 맥락 – 유월절과 구속의 상징성
2. 공생애 구조적 맥락 – 사역의 절정에서 이 사건이 위치한 의미
3. 신학적·종말론적 맥락 – 임재의 전환과 새로운 성전 시대의 개막
1. 절기와 성전 정화 사건의 연결성: 유월절의 맥락
성전 정화 사건은 유월절을 앞두고 벌어진 일입니다 (마 21:12; 막 11:15; 요 2:13).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자, 이스라엘 민족 정체성의 핵심 기념일입니다. 이 시기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 속박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의 상징:
예수님은 성전이 상업과 권력의 중심이 된 현실을 정화함으로써, 거짓된 종교 체계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십니다.
• 어린 양의 희생을 준비하는 절기:
유월절은 희생 제물이 준비되는 시기이며,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어린 양임을 예언자적으로 암시하십니다.
• 예언자적 심판의 상징적 행동:
예레미야 7장을 인용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성전을 단지 물리적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즉, 유월절이라는 시기는 예수님의 사역 목표—해방, 희생, 심판, 구속—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때이며, 이때 성전 정화가 일어난 것은 의도적인 상징 행위입니다.
2. 예루살렘 방문의 시기적 구조 속 성전 정화 사건의 위치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공생애 대부분을 보내시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분은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을 반복적으로 방문하셨습니다. 세 차례 이상의 절기 순례가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랍비적 전통에 맞는 행동이자 왕적 메시아의 상징적 순례입니다.
중요한 예루살렘 방문:
1. 첫 번째 유월절 – 성전 정화 사건 (요 2장)
2. 초막절 – 예수님의 자기 계시 “나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요 7장)
3. 수전절(하누카) – “나는 아버지와 하나이니라” (요 10:22–30)
4. 마지막 유월절 – 십자가 죽음 전 입성과 성만찬 (공관복음)
성전 정화 사건은 첫 방문(요한복음 전통) 혹은 마지막 방문(공관복음 전통)에 배치됩니다, 그러나 모든 전통은 이 사건이 예루살렘 입성과 유월절 죽음이라는 구속적 클라이맥스를 위한 서곡임을 보여줍니다. 이때 예수님의 행위는 단순한 개혁이 아닌, 왕의 권위로 성전의 기능을 심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언입니다.
3. 공생애 3년 반 사역에서 성전 정화 사건이 차지하는 위치적 의미
예수님의 공생애는 약 3년 반으로 추정되며, 그 구조는 다음과 같은 흐름을 가집니다:
• 초기 갈릴리 사역: 기적과 권위 있는 가르침
• 중기 갈릴리-예루살렘 병행 사역: 바리새인들과의 충돌, 제자 훈련
• 후기 예루살렘 집중 사역: 종말론, 성전 비판, 십자가 죽음
성전 정화 사건은 이 흐름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 초기일 경우 (요한복음):
사역의 첫 선언이 바로 성전 정화라는 것은, 예수님의 전체 사역이 곧 새 성전 건설과 종교 체제의 재편을 위한 것임을 명확히 합니다.
• 후기일 경우 (공관복음):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직후 성전 정화를 실행했다는 것은, 성전 파괴를 예언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선포하는 예언자적 행동입니다.
어느 쪽이든,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전체 사역이 제도 개혁이 아닌 신성 공간의 재구성, 즉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는 성전 건물이 아닌 예수 안에, 그리고 제자 공동체 안에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여러 신학적 요소가 종합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절기적으로는 유월절 직전에 발생했으며, 이는 출애굽의 해방과 희생, 구원의 상징 속에서 예수 자신이 참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오셨음을 나타냅니다. 장소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유대 민족과 예배의 중심지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자, 새로운 임재의 시대를 여는 상징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요한복음에 따르면 공생애 초기, 공관복음에 따르면 마지막 유월절 직전으로, 각기 메시아적 자기 계시 혹은 종말론적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성전의 기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선언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님과 그 제자 공동체로 이동했음을 선포하는 중요한 신학적 전환점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전 제도를 넘어 새롭게 임한다는 핵심 메시지로 요약됩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모든 절기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이고 신학적인 유월절을 배경으로, 공생애에서 가장 치열하고 상징적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옛 제도의 종결을 선포한 메시아적 행동이었습니다.
<성전 정화의 배경>
제2성전은 기원전 516년에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된 이후, 헤롯 대왕에 의해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거치며 유대 민족의 종교적 중심지로 기능하였습니다. 이 성전은 단순한 예배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Shekinah, שְׁכִינָה)가 머무는 곳이자,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은 제사, 속죄, 절기, 경계 구분(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 제사장/평민 등)의 구조로 세심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이는 할라카(Halakha)에 따라 엄격히 운영되었습니다.
1. 성전에서의 상업 활동과 구조적 타락
성전의 외곽 공간인 이방인의 뜰(Court of the Gentiles)은 이방인들이 경배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었지만, 당시에는 제사를 위한 희생 동물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업자들이 이 공간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지 예배의 방해를 넘어서, 성전이 특정 계층의 상업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랍비 문헌인 미쉬나(Mishnah, tractate Shekalim, שְׁקָלִים)와 탈무드(Talmud, tractate Yoma)에서도 성전의 부패와 제사장 집단(특히 가야파와 안나스 계열)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발견됩니다. 요세푸스는 제1세기 예루살렘 성전의 실상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대제사장직의 세속화와 부패, 성전이 경제적 거래의 중심지로 전락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의 성물을 마음대로 다루었고, 도둑질하고 강탈하며 이익을 추구했다. 성전은 더 이상 경건의 장소가 아니라 상업의 중심이 되었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6.285–287)
이러한 묘사는 예수께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신 맥락을 설명해 줍니다. 특히 요세푸스는 대제사장 가문(안나스, 가야바 등)이 로마 권력과 결탁하여 권력과 부를 독점했으며, 성전 안마당은 이방인의 뜰조차 상업적 공간으로 더럽혀졌다고 전합니다. (유대고대사 20.9.2)
이러한 기록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단순한 종교 개혁이 아니라, 전체 제사장 체제와 성전 권위에 대한 메시아적 심판이었음을 뒷받침합니다. 성전은 본래 ‘기도의 집’이었으나, 예수 당시에는 경제적 착취와 종교 권력의 결탁 장소로 기능한 측면이 존재했습니다.
2. 예수님의 행동: 예언적 상징행위
예수님은 상인들과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이 행위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던 방식과 유사합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이 외형적 신성만을 유지한 채 하나님을 떠난 것을 책망하며 “이 집이 너희 눈에는 강도의 소굴로 보이느냐?”(예레미야 7:11)고 외쳤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성전의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전 정화 사건은 단지 일시적 정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성전 제도와 그 권력 구조를 넘어 새로운 형태로 도래하고 있다는 종말론적 선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제사 중심, 성전 중심, 장소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요한복음 4:23)를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 민중 사이에는 메시아가 오면 성전을 정화하고,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종말론적 기대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특히 열심당(Zealots)은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고 무력 저항을 통해 정결케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어떤 자들은 성전 정화와 로마 타도를 위해 하나님이 곧 일하실 것이라 믿고, 무장한 자들처럼 성전을 점거했다.” (유대전쟁사 2.117–118)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단순한 도덕적 개혁이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자기 계시이자 구속사의 분기점입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열심당처럼 무력과 정치 혁명이 아니라, 속죄와 기도의 회복을 통한 거룩함의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를 중단시키기 위해 상인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새로운 제사장이요, 성전이며, 희생제물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함의 공간이 아니라, 거룩함을 대신할 실체가 온 순간에 기능을 상실한 건물이 되었습니다.
3. 요한복음의 재해석: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공생애 초기(2장)에 배치하며 독특한 신학적 진술을 추가합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요 2:19)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부활 이후에야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성전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물리적 성전은 파괴될 것이고, 참된 임재는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단순한 예배 개혁이 아닙니다. 이는 예언자적 심판 선언이자, 하나님의 나라가 성전 제도를 넘어 확장됨을 보여주는 종말론적 상징 행위입니다. 또한, 랍비 유대교가 성전 파괴 이후 어떻게 대응하고 신학을 재구성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랍비 유대교의 성전 신학과 그 진화 과정에 대해 탐구할 것입니다.
<성전 이전의 기도와 회당 예배의 형성>
1. 회당과 기도의 기원에 대한 논쟁
회당(synagogue)과 정형화된 유대인의 기도 체계는 흔히 AD 70년 성전 파괴 이후의 랍비 유대교에서 제도화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기원은 훨씬 더 이른 시기, 곧 바벨론 포로기(Babylonian Exile, 기원전 586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본 장에서는 기도와 회당의 전사적 발전 과정을 문헌적·역사적·신학적으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2. 바벨론 포로기: 성전 없는 시대의 신앙 실천
(1) 성전의 부재와 신앙의 위기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그들의 신앙 중심이었던 성전 제사는 중단되었습니다. 이때 공동체의 회집과 말씀 중심 예배, 그리고 기도 중심의 영적 대체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2) 다니엘의 기도: 포로기 기도의 초기 형태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창을 열고 기도하였습니다(단 6:10). 이는 정규화된 하루 세 번의 기도 전통(샤하릿, 민하, 마아립)의 전형이 되는 예이며, 장소로서의 성전이 아닌 방향성과 시간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개념이 출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3) 에스겔의 환상과 하나님의 임재 재해석
에스겔 1–11장의 환상은 포로지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밖으로 이동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이방 땅 바벨론에도 임할 수 있음을 계시합니다. 이는 신앙의 장소적 개념이 시간적·영적 차원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귀환 이후: 성전 중심과 회당 중심의 병존
(1) 스룹바벨 성전과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귀환한 유다 공동체는 스룹바벨에 의해 제2성전을 재건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율법 낭독과 공동체 회집을 통해 성전 제사 외의 예배 형태를 강화하였습니다 (느헤 8:1–8). 이때 율법의 공적 낭독과 회중 중심의 경건 모임은 회당의 원형(proto-synagogue)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회당의 초기 기능
• 기도와 찬양
• 율법 교육
• 공동체의 결정과 회의
회당은 제사 없는 예배 공간이었으며, 성전이 존재하던 시기에도 함께 존재하며 보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3) 사해문서(Qumran)와 기도 체계
쿰란 공동체의 문서(예: 1QS, 1QH)에서도 정형화된 기도, 하루 세 번의 기도 시간, 공동체 중심의 찬양이 관찰됩니다. 이는 회당 예배의 발전이 이미 성전 파괴 이전에 상당히 구조화되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4. 제도화의 진전: 세 정기 기도와 시두르의 기원
(1) 샤하릿, 민하, 마아립
• 샤하릿 (아침기도): 아브라함의 기도(창 19:27)로부터 유래한다는 전통 (탈무드 베라코트 26b)
• 민하 (오후기도): 이삭의 기도(창 24:63)
• 마아립 (저녁기도): 야곱의 기도(창 28:11)
랍비 유대교는 이러한 기도 전통을 성전의 아침·오후 제사에 상응하는 영적 제사로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초는 이미 포로기와 귀환기부터 존재했습니다.
(2) 테필라와 아미다 기도의 구조화
아미다 기도(18개 축복문)는 바빌로니아와 예루살렘 두 전통에서 발전되었으며, 후에 시두르(Siddur, 유대 기도서)로 편찬됩니다. 아미다의 중심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의 찬양
• 회개의 간구
• 구속과 메시아 대망
• 예루살렘과 성전 회복의 기도
이 모든 요소들은 성전 없는 예배 구조로서 회당에서 완성됩니다.
5. 신학적 함의: 성전 없는 신앙의 형성과 하나님 임재의 재정의
(1) 장소에서 시간으로: 예배의 전환
성전이 무너지자, 유대 신앙은 공간 중심에서 시간 중심, 그리고 율법과 기도 중심의 내면화된 예배 구조로 옮겨갔습니다. 이는 단순한 임시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 밖에서도 지속됨을 체험한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2) 성전과 회당의 병존과 긴장
회당은 성전을 대체하지 않았으나, 점점 말씀과 기도 중심의 예배 공동체로 신앙의 새로운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예수 시대에도 두 구조가 병존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4:16 등). 예루살렘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된 이후, 회당과 기도의 체계는 비로소 랍비 유대교 안에서 완전히 제도화되었지만, 그 기초는 이미 포로기와 귀환기부터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왔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서 시작된 기도 생활, 다니엘의 하루 세 번 기도, 에스라의 율법 낭독, 느헤미야의 공동체 회집, 그리고 쿰란의 정형화된 기도 등은 모두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했던 신앙의 역사적 증언입니다.
이 흐름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성전의 중심성과 회당의 기능, 예배의 진화와 영성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깊이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성전 이해와 신약의 성전 신학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 더욱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제1성전과 제2성전 시대의 제사 제도의 비교와 AD 70년 이후의 변화>
1. 성전은 같지만 구조는 다르다
많은 이들은 제1성전(솔로몬 성전)과 제2성전(스룹바벨–헤롯 성전)을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하지만, 실제로 두 시대의 제사장직 구조, 제사 체계, 정치적 역할, 신학적 인식은 크게 달랐습니다. 본 글에서그 차이를 규명하고, AD 70년 이후 제사 제도의 소멸과 그에 따른 신학적 재구성의 흐름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제1성전기: 다윗-솔로몬 체계의 원형성과 이상
(1) 건축과 구조
• 제1성전은 다윗의 준비와 솔로몬의 건축(열왕기상 6–8장)에 의해 성립됨.
• 모세 성막의 설계 원리에 따라 설계되었으며, 하나님의 임재(Shekinah)가 구름으로 충만히 임했습니다(왕상 8:10–11).
• 제사장은 사독 계열로 정통성을 인정받았고(대상 24:3), 예언자와 왕권과 함께 신정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2) 제사의 성격
• 매일 번제, 속죄제, 유월절, 속죄일 등 다양한 제사가 엄격히 시행되었습니다(레위기 1–7장).
•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언약적 행위였으며, 죄 사함, 공동체 정결, 축복의 매개체로 여겨졌습니다.
(3) 성전의 신학
• 성전은 곧 하나님의 보좌, 거처, 그리고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시편 132편, 이사야 6장).
•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형식주의와 우상숭배로 타락했고,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성전의 심판과 임재의 이탈을 선포했습니다.
3. 제2성전기: 정치화되고 제도화된 성전 체계
(1) 스룹바벨 성전과 그 한계
• BC 516년, 바벨론 귀환자들이 제2성전을 재건했으나, 솔로몬 성전과 비교해 임재의 회복은 없었습니다. 구름도, 불도 임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왔다는 표현도 없었습니다(학개 2장 참조).
• 이는 유대인들에게 상실감과 종말론적 기대를 동시에 불러일으켰습니다.
(2) 제사장직의 정치화
• 제사장은 바벨론 이후 사독 계열의 후손이 아닌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후기에는 로마와 결탁한 정치 귀족화된 제사장 가문(특히 가야파, 안나스 가문)이 지배하였습니다.
• 요세푸스(『유대 고대사』, 『유대 전쟁사』)는 제사장이 부패하고 성전이 세속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3) 헤롯 성전과 경제화된 예배
• 헤롯 대왕은 정치적 목적(유대인의 지지 확보)을 위해 성전을 대대적으로 확장·재건(BC 20년경 시작)하였습니다.
• 외형은 위대했으나, 속은 상업화되었고, 환전상, 동물상들이 이방인의 뜰을 차지하였습니다(마 21:12–13).
• 예수님은 이를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며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4) 제사의 종말성과 비판
• 예언자들은 반복적으로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를 경고했습니다(사 1:11–17, 미 6:6–8).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사 자체의 종결이자 새 언약의 피로 대체된 희생제사의 완성으로 해석됩니다(히 10:1–18).
4. AD 70년 이후: 제사 없는 유대교와 신학의 대전환
(1) 성전 파괴의 의미
• 로마 제국의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짐으로써 제사의 장소 자체가 사라집니다.
• 사두개인과 제사장 중심 체계는 붕괴되고, 랍비 중심의 유대교(Rabbinic Judaism)가 부상합니다.
(2) 대체 체계의 발전
• 기도, 회당, 토라 학문, 자선, 금식이 제사를 대체하는 영적 예배로 자리 잡습니다.
• 탈무드는 “이제는 입술의 제사(tefillot sefateinu)가 희생제사보다 크다”고 선언합니다(호세아 14:2 인용, 탈무드 Berakhot 26b).
• 아미다 기도, 시두르(Siddur), 미쉬나 및 탈무드의 체계화는 성전 없는 시대를 위한 새로운 언약적 응답이었습니다.
(3) 신약과 초대교회의 해석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 성막을 통과하신 분, 자기 피로 단번에 속죄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히 4–10장). 특히 히브리서 9–1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구약의 성전 제사 체계를 완전히 성취하고 종결했음을 선언합니다.
• 히 9:11 – 예수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오셨다.” → 성막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키는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합니.
• 히 9:12 –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 반복적 제사와 대조되는 단번에 이룬 속죄입니다.
• 히 10:1–4 –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며, 동일한 제사를 해마다 드려도 죄를 온전히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 히 10:10, 14 –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거룩하게 하셨다.”
히브리서는 제사장직, 희생제사, 성소 구조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명확히 합니다. 이로써 성전 중심의 구약 체제는 종말론적으로 종결되었고,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로 재구성된 성전임을 강조합니다.
성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 성령이 임한 공동체 자체가 성전임을 선언합니다. (고전 3:16, 요 2:19).
5. 성전의 역사와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회당
이스라엘의 성전 역사는 제1성전기, 제2성전기, 그리고 AD 70년 이후라는 세 시기를 통해 그 기능과 의미, 그리고 신학적 중심축이 크게 변화해왔습니다. 먼저, 제1성전 시대에는 사독 계열의 제사장직이 중심이었으며, 예언자들과의 긴밀한 협력 구조 속에서 제사와 예배가 유지되었습니다. 성전은 출애굽기의 성막 구조를 계승하여 건축되었고, 하나님의 임재는 구름의 현현을 통해 실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기의 제사는 언약 회복과 속죄에 초점이 있었으며,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시는 신학적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제2성전 시대로 넘어가면 상황이 크게 달라집니다. 제사장직은 더 이상 예언자와 협력하는 성직자적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점차 세속 귀족화되고 정치 권력과 결탁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성전은 헤롯 대왕에 의해 웅장하게 확장되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임재는 거기 없었습니다. 제사의 본질은 퇴색되었고, 형식적으로 유지되는 가운데 정치적·경제적 목적과 얽히게 되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중심이기보다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상징적 도구로 기능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AD 70년 성전 파괴 이후, 제사장직은 사실상 폐지되었고, 그 역할은 랍비 중심의 율법 학문 공동체로 이양되었습니다. 성전이 사라진 이후 유대인 공동체는 회당 중심의 신앙 구조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제사의 의미는 기도와 율법 준수로 대체되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영적 제사와 공동체 중심의 예배 구조, 즉 하나님의 임재를 삶 속에서 실현하는 내면화된 신앙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제1성전에서의 제사는 언약과 임재의 중심,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자리였습니다. 제2성전은 그 외형을 모방했지만, 신학적 깊이와 임재의 실체는 점차 상실되었고, 결국 종말론적 심판과 메시아적 대체로 나아갑니다.
AD 70년 이후 유대교와 기독교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으나, 둘 다 성전 없는 시대에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의 신학적 고민을 공유합니다.
<랍비 문헌에 나타난 성전이란?>
1. 성전 파괴 이후의 신앙 재구성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된 이후, 유대 공동체는 신앙의 중심을 급격히 재편해야 했습니다. 제사장 중심 체계가 무너진 자리에 랍비들이 등장했으며, 랍비 문헌(Tosefta, Mishnah, Talmud)은 성전의 기억과 기능을 대체하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의 산물입니다. 랍비 유대교는 성전이 없어진 현실을 단지 ‘결핍’으로 보지 않고, 기도, 율법, 공동체 실천을 통해 새로운 임재의 형태를 모색하였습니다.
2. 성전의 ‘기억’과 ‘재현’
(1) 미쉬나 Middot, Tamid
이 문헌들은 제2성전의 구조와 제사 절차를 마치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세부적으로 기술합니다.
이것은 단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종말론적 재건을 준비하는 문서로 이해됩니다.
(2) 탈무드 Yoma, Sukkah
• 성전에서 이루어졌던 속죄일(Yom Kippur), 초막절(Sukkot)의 의식들이 상세히 언급됩니다.
• 동시에 이 절기들이 기도, 자선, 금식으로 대체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예: “오늘날 자선과 회개는 속죄일보다 더 큰 제사다.” (Tosefta Sukkah 4:1)
3. 성전 기능의 대체와 영적 승화
랍비 유대교는 성전의 세 가지 중심 기능을 각각 다른 형태로 대체하였습니다. 랍비 유대교는 제2성전이 파괴된 이후, 이전에 성전이 담당하던 세 가지 중심 기능을 새로운 형태로 대체하며 신앙 체계를 재구성했습니다.
첫째, 성전에서 드려졌던 희생 제사(Korban)는 기도(Tefillah)와 회개(Teshuvah)로 대체되었습니다. 탈무드 Berakhot 26b에서는 기도가 과거 성전에서 드렸던 제사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설명하며, Avot 1:2에서는 세상이 세 가지에 의해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토라, 예배(기도), 자선.” 여기서 예배는 제사를 대신하는 영적 행위로서의 기도를 뜻합니다.
둘째, 성전에서 이루어진 율법 강론은 예시바(Yeshiva)와 같은 학문 공동체와 토라 중심 예배를 통해 계승되었습니다. Pirkei Avot 3:6은 “세 사람이 함께 앉아 토라를 공부하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거처가 이제 토라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셋째, 성전의 공동체 예배 기능은 회당(Beit Knesset) 중심의 집회를 통해 대체되었습니다. Megillah 29a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회당 안에 있다”고 명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성전이라는 고정된 장소에만 제한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모이는 공동체 안에 임하신다는 신학적 재해석을 보여줍니다.
4. 종말론적 소망
미쉬나와 탈무드는 미래의 성전 재건을 기대하며, 메시아 시대에 회복될 성전에서 완전한 제사가 재개될 것이라고 전합니다.
• 예: “셋째 성전은 불에서 내려올 것이다.” (Midrash Tanchuma, Nasso 11)
<히브리서의 성전신학: 예수 안에서 완성된 영원한 제사>
1. 성전이 아닌 하늘 성소
히브리서는 신약에서 가장 정교한 성전 신학과 대제사장론을 담고 있으며, 제사의 영원한 완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과 하늘 성소 입장을 통해 선포합니다.
2. 성전의 모형성과 한계
(1) 지상의 성전은 “그림자와 모형”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 8:5)
히브리서는 모세의 성막, 솔로몬과 헤롯의 성전을 진짜가 아닌 예표(τύπος, skia)로 간주합니다.
(2) 반복되는 제사의 무능력
“이러한 제사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할 뿐이요 온전하게 할 수 없음이라.” (히 10:1–4)
3. 예수님: 새롭고 살아 있는 길, 참된 성전
(1) 예수님은 대제사장
• 그는 자신의 피로 단 한 번의 제사를 드리셨고, 이는 속죄의 완성입니다 (히 9:12).
• 그는 지성소에 들어가신 참 대제사장으로서,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효력을 가져옵니다 (히 10:10).
(2) 그의 육체는 휘장이다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20)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은 이제 예수의 몸으로 대체되며,
그를 통해 누구나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3) 하늘 성소
예수는 하늘에 있는 참 성소에 들어가셨으며, 땅의 성전은 이 영원한 성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히 9:11–24).
5. 신학적 요약: 랍비 전통과 히브리서의 비교
랍비 전통과 히브리서는 모두 성전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며, 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 관점은 본질적으로 상이합니다. 성전에 대한 이해에서 랍비 문헌은 성전을 기억하고 대체하며, 미래에 회복될 것을 희망합니다. 반면, 히브리서는 성전을 모형으로 간주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가 완성되었고 종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제사의 기능 역시 랍비 전통은 기도와 회개를 통해 희생제사를 대신하려 하지만, 히브리서는 예수의 단 한 번의 속죄가 영원한 효력을 지닌 참된 제사라고 강조합니다. 제사장직에 대해서 랍비 유대교는 현재는 사라졌지만 메시아 시대에 회복될 것을 기대하는 반면,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하늘 지성소에서 중보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선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에 대한 관점도 다릅니다. 랍비 전통은 회당, 학문 공동체, 또는 장차 회복될 성전을 임재의 장소로 삼는 반면, 히브리서는 하늘 지성소에서 예수 안에 실현된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이해합니다. 랍비 문헌과 히브리서는 모두 AD 70년 이후 성전 없는 현실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문서입니다. 그러나 방향은 서로 다릅니다. 랍비 전통은 성전을 기억하고 대체하며, 미래에 회복될 것을 기대한 반면, 히브리서는 예수 안에서 성전의 의미가 영원히 성취되었으며, 더 이상 제사나 건물이 필요하지 않음을 선포합니다.
히브리서의 성전관은 성전 파괴가 아니라, 새 창조의 시작으로 읽으며, 모든 예배와 중보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 흘림, 그리고 성령의 임재 안에서 재구성합니다.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에 나타난 임재 신학의 전환>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단순한 성전 부패에 대한 비판이나 사회 개혁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는 성막(회막)에서 시작되어 솔로몬 성전, 회당, 그리고 오순절 이후의 교회 공동체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적 이동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광야 회막에서부터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거쳐 교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가지는 의미 즉 하나님의 임재 방식의 새 시대 개막 선언임을 밝히고자 합니다.
1. 회당(Synagogue)의 등장과 기능
• 포로기 및 귀환기 이후, 율법 낭독과 기도 중심의 공동체 모임이 성전 제사와 병행되기 시작합니다.
• 누가복음 4:16에서 예수님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신 모습은, 당시 회당의 말씀 중심 예배가 이미 정착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 제2성전(헤롯 성전)의 타락
• 요세푸스와 탈무드 문헌은 제2성전의 제사장직이 정치화되었음을 지적합니다.
• 성전이 상업과 환전의 중심이 되었고, ‘이방인의 뜰’이 성별과 계급의 벽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3.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임재의 전환점
1) 행위의 상징성
• 마태복음 21:12–13에서 예수님은 상인들을 쫓아내며, 이사야 56장과 예레미야 7장을 인용하십니다.
• 이 말씀은 단순한 부패 비판이 아니라, 성전 기능의 종결과 새로운 임재 체계의 선언입니다.
2) 예언자적 심판과 메시아적 행위
•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배의 본질 회복을 외쳤듯, 예수님은 종말론적 예언자이자 메시아로서 성전의 전환을 선포하십니다.
• 요한복음 2:19: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 자기 몸을 성전으로 선언입니다.
4. 오순절과 교회의 탄생: 임재의 공동체화
1) 성령의 임재와 새로운 성전
•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불의 혀 같은 것이 제자들 위에 임합니다 → 임재가 공간에서 사람으로 옮겨집니다.
• 성령은 이제 지정된 장소가 아닌 믿는 자들의 삶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입니다.
2) 베드로전서와 바울의 성전 이해
• 벧전 2:5: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교회 공동체 = 새로운 성전입니다.
4. 거룩함의 이동과 새로운 임재 신학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회막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임재 여정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순간입니다. 성전은 이제 물리적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 그리고 성령이 임한 공동체(교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경의 구속사적 흐름 안에서 형태와 장소를 달리하며 지속적으로 이동해왔습니다. 이 변화의 흐름은 단순한 구조적 전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 안에서 신학적 의미의 심화와 확장을 보여주는 여정이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인 회막(Mishkan)은 구름과 불의 임재로 가득 찼으며, 이는 이동 가능한 거룩함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특정한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백성과 함께 광야를 지나며 동행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인 성전(Temple)은 예루살렘에 고정된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졌고, 이는 국가적 신앙과 종교 중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종교·문화 정체성을 통합하는 거룩함의 정착이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시적으로 구현하는 장소였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회당(Synagogue)으로, 성전이 없는 시대에 등장한 율법 중심의 공동체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서는 희생제사가 아닌 토라 낭독과 가르침, 기도가 중심이 되었고,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내면화된 말씀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줍니다.
네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성전 제도와 기능에 대한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기존 성전 체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의 선포라는 종말론적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예수 자신의 성전됨을 통해, 거룩함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오순절 사건입니다. 성령이 불의 혀처럼 각 사람 위에 임하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건물에 갇히지 않고 공동체 가운데 임하시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곧 성전이 되는 새로운 전환점으로, 공동체 자체의 성전화가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는 교회(Church)입니다. 성령이 임한 교회는 단순한 제도나 건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전(living temple)으로 선언되었고, 이는 곧 하나님의 임재가 전 세계와 모든 믿는 이들 가운데 실현됨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보편적이고 흩어진 임재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여정은, 하나님의 임재가 점점 더 국가적 공간에서 공동체적 삶으로, 외적인 구조에서 내적인 실재로, 제한된 장소에서 보편적 관계로 확장되어 가는 신학적 발전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 참고문헌
•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The Jewish War
• Mishnah: Middot, Tamid, Berakhot
• Babylonian Talmud: Yoma, Sukkah
• N. 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 Jacob Neusner, The Idea of the Temple in Rabbinic Judaism
• Richard B.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Gospels
• Craig A. Evans, Jesus and the Temple
• Hebrews 8–10 (성전의 모형성 및 예수의 제사론)
<랍비 문헌 속 성전 신학>
1. 성전 파괴 이후의 충격과 유대교의 전환
서기 70년, 로마 제국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대 민족에게 닥친 충격은 단순한 물리적 붕괴를 넘어 신앙의 중심이 무너진 사건이었습니다. 성전은 단지 제사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죄, 절기, 공동체 정체성을 모두 상징하는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충격 속에서 유대교는 놀라운 방향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부상입니다. 랍비들은 성전이 없는 현실 속에서도 신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토라 중심의 신앙, 회당 중심의 공동체, 기도와 학문 중심의 경건 생활로 구조를 재편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탈무드와 미쉬나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2. 미쉬나와 탈무드의 성전 대체 신학
랍비 문헌은 성전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전을 기억하고 재해석하며, 기억의 장소로서의 성전을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미쉬나 Tractate Middot에서는 파괴된 성전의 구조와 제의 절차를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훗날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랍비 문헌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성전 기능을 대체하고 영화시킵니다:
1) 기도 (תפילה, tefillah)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 대신, 매일의 기도는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으로 전환됩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Berakhot은 ‘기도는 희생 제사를 대신한다’고 선언하며, 기도를 영적 제사로 인식합니다.
2) 토라 학습 (תורה, Torah)
성전이 파괴된 이후 랍비들은 학문을 곧 예배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학문의 자리는 성전의 대체물로 여겨졌으며, “세 사람이 함께 앉아 토라를 배우면,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Pirkei Avot 3:6)는 말은 이를 반영합니다.
3) 자선과 선행 (צדקה, tzedakah; גמילות חסדים, gemilut chasadim)
랍비 문헌은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자선과 사랑의 행위를 성전에서의 제사보다 더 큰 공로로 간주하였습니다. Tosefta Sukkah 4:1는 “자선은 죽음을 이기는 제사다”라고 말합니다.
3. 경계와 거룩함의 재정의
성전은 철저한 ‘경계의 장소’였습니다. 제사장/일반인, 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 등 다양한 구분과 금지 규칙이 있었고, 이는 할라카적 질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없는 현실에서 랍비 유대교는 ‘거룩함’의 개념을 공간에서 시간으로, 제사장에서 개인 경건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안식일(שבת), 율법 준수, 가정의 식사와 기도는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구현하는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거룩함은 특정 장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자체로 옮겨졌던 것입니다.
4. 성전 파괴에 대한 신학적 반응
탈무드는 성전 파괴의 원인을 신학적으로 성찰합니다.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 탈무드 Gittin 55b–58a는 성전 파괴의 원인으로 근거 없는 증오(sinat chinam)를 제시하며, 사회적 정의와 공동체적 사랑을 강조합니다. 또한 일부 랍비들은 성전 없는 시대에조차 “예배는 멈추지 않았다”는 입장을 피력하며, 영적 성전의 개념을 정립합니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Rabban Yochanan ben Zakkai)는 로마의 파괴 직후 야브네(Yavne)에 학문 중심 공동체를 세우며, 성전 없는 유대교의 생존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는 로마 총독에게 “성전 대신 학문과 율법 중심의 공동체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는 랍비 유대교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랍비 유대교는 성전의 파괴를 단순한 상실이 아닌 신앙의 재구성의 기회로 보았습니다. 성전을 대체하는 기도, 토라, 자선은 새로운 형태의 예배이며,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 더 이상 성전 건물 안에 국한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맞물려, 성전 신학의 전환은 랍비 유대교와 신약성경 모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거룩함의 경계’를 넘는 예수님의 성전 이해>
Jesus’ Vision of the Temple: Crossing the Boundaries of Holiness
1. 성전과 거룩함의 경계 구조
제2성전은 물리적 구조 자체에 ‘거룩함의 등급(hierarchy of holiness)’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탈무드 Kelim 1:6–9은 성전의 공간을 10단계의 거룩함으로 나누는데, 가장 외곽은 이방인의 뜰, 그 다음은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성소, 지성소 순으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공간 구분은 누구나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성전의 문턱은 곧 율법적 정결/부정의 경계, 사회적 계층, 성별, 출신의 경계를 유지하는 장치였습니다. 이러한 경계는 ‘거룩함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였으나, 동시에 특정 집단에게만 하나님과의 접근을 허용하는 제한의 구조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성전 이해는 급진적인 도전을 제기합니다.
2. 예수님의 ‘경계 허물기’: 이방인의 뜰을 회복하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단지 내부 정결이나 부패 척결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상인들을 내쫓으신 장소는 바로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분노는 단지 상업 행위 때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유대인 엘리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한 데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56:7을 인용하여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서의 문맥은 분명합니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성전 안에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성전의 기능이 민족과 혈통의 경계를 넘어선 보편적 예배의 장소가 되어야 함을 선언하셨습니다.
3. 율법의 중심에서 임재의 중심으로
랍비 유대교는 성전과 할라카의 경계 규정을 통해 거룩함을 ‘지켜야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거룩함을 ‘전이되는 임재’(transferred presence)로 이해합니다. 즉, 성전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며, 그 임재는 예수님 안에 있으며, 더 나아가 제자들 가운데도 임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18:20, 요한복음 14:23).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나 혈루증 여인처럼 ‘부정한 자들’에게 접촉을 통해 오히려 거룩함을 전염시키셨습니다. 이는 할라카의 ‘접촉을 통한 부정 전염’과는 정반대 개념입니다. 이러한 임재의 전이는 성전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성전 공동체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합니다.
4. ‘성전의 기능’의 재정의: 제사에서 제자도로
예수님은 성전의 제사 기능보다 자비, 회개,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제자도의 삶을 더 중요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호세아 6:6, 마태복음 9:13)를 인용하시며, 성전 예배보다 더 본질적인 가치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공동체에서는 제사장, 성전, 피 제물 없이도 회개와 회복이 가능하며, 새로운 성전은 제자들의 삶 자체가 됩니다. 베드로는 후에 교회를 “산 돌(living stones)”로 묘사하며, 믿는 자들이 함께 지어져 가는 거룩한 성전이라 말합니다(베드로전서 2:5).
5. 하나님의 임재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 4:21–23).
이 선언은 성전과 장소 중심 예배의 종말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물리적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예수님의 몸(성전)과 성령을 받은 공동체 안에 있다는 신약의 핵심 선언입니다. 랍비 유대교는 성전의 경계를 통해 거룩함을 지키려 했고,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그 경계를 율법적, 시간적, 개인 경건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경계를 근본적으로 넘어섰고, 이방인, 여인, 부정한 자, 사회 주변인을 포함한 새로운 성전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성전은 이제 물리적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사람들, 곧 제자 공동체입니다.
<성전 파괴 이후 랍비 유대교의 대응과 재구성>
1. 70년 성전 파괴 이후: 신앙의 붕괴인가, 재구성의 기회인가
서기 70년, 로마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불태우면서, 유대인의 신앙 중심이었던 제2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재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가 상주하는 곳, 속죄와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소, 민족 정체성의 중심 상징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전이 사라진 이 위기 속에서, 일부 유대 지도자들은 절망 대신 재구성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중심에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Rabban Yochanan ben Zakkai)가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포위 속에서도 비밀리에 야브네(Yavne)로 탈출하여 새로운 학문 공동체를 조직하였고, 성전 중심의 신앙을 랍비 중심의 학문 공동체로 전환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2. 야브네와 새로운 유대교의 출현
야브네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발원지로 간주됩니다. 이곳에서 율법 해석, 예배 형태, 경전 정리, 기도 순서, 절기 이해 등이 새롭게 정비되었습니다. 랍비들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전환을 단행하였습니다:
• 희생 제사 대신 기도 (תפילה)
“오늘날 우리의 입술의 열매가 송아지를 대신합니다” (호세아 14:2)라는 구절은 성전 제사의 부재를 기도 행위로 보완하는 신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속죄의 새로운 방식: 회개(תשובה), 자선(צדקה), 금식(תענית)
탈무드는 속죄를 위한 3요소로 테슈바(Teshuvah), 쯔다카(Tzedakah), 타아니트(Taanit)를 제시합니다. 이는 속죄의 중심이 제사에서 인간의 삶과 행동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합니다.
• 율법 학문이 예배의 정수로 전환됨
성전이 사라진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남아 있었으며, 말씀을 연구하는 행위 자체가 예배가 되었다. 이 전환은 탈무드 전체 구조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3. 탈무드적 성전 이해: ‘기억 속의 성전’
성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랍비 문헌은 그것을 기억 속에서 보존했습니다. 미쉬나 Tractate Middot는 성전의 구조를 마치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기록하며, Tractate Tamid는 매일의 제사 순서를 기술합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종말론적 희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성전이 다시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그 설계도와 의식을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현실 속에서 대체 체계를 구축하는 것과 동시에 존재하였습니다.
4. 성전 없는 신앙: 새로운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성전 파괴 이후 랍비 유대교는 ‘성전 없는 성전 신앙’을 구축하였습니다. 중심은 이제 세 가지로 옮겨졌습니다:
1) 회당 (בית כנסת, Beit Knesset) – 공동체 예배의 중심이 되는 장소
2) 가정 (בית, Bayit) – 안식일 식사와 말씀 나눔, 일상의 예배 공간
3) 학문 공동체 (ישיבה, Yeshiva) – 율법의 심화와 계승의 중심지
랍비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앉아 토라를 공부하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Pirkei Avot 3:6). 이 말은 하나님이 더 이상 지성소에만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는 공동체 안에 임재하신다는 고백입니다.
5. 기도문과 절기: 성전 기억의 영속화
아미다(Amidah) 기도는 매일 세 번, 성전의 제사 시간을 대체하며 드리는 중심 기도입니다. 특히 그 중간의 기도에서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다윗 왕조의 재건”, “성전의 재건”을 간구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과거의 성전을 기억하며, 미래의 성전을 기대하는 현재적 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절기는 본래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 체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AD 70년 성전 파괴 이후, 랍비 유대교는 절기를 기억과 상징 중심의 예전 체계로 전환시켜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월절(Pesach)은 더 이상 성전에서 희생양을 잡아 제사드리는 절기가 아니라, 가족 중심으로 모여 출애굽을 회상하며 무교병과 쓴 나물, 포도주 등을 함께 나누는 상징적 식사로 변화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막절은 성전의 물 붓는 제사 대신 에트로그와 룰라브를 흔드는 상징 행위로 남았습니다. 초막절(Sukkot)은 성전에서의 물 붓는 제사와 찬송이 중심이었으나, 성전의 부재 이후에는 랍비 유대교 전통 안에서 네 가지 식물(ארבעת המינים, Arba’at haMinim)을 흔드는 행위로 대체된 것입니다.
특히 이 네 가지 중에서 중심이 되는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에트로그 (אֶתְרוֹג):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레위기 23:40)의 해석으로, 전통적으로 향기 나는 시트론(citron) 열매로 여겨집니다.
• 룰라브 (לוּלָב): 종려나무 가지로서, 기쁨과 승리, 생명력의 상징으로 흔들며 찬양합니다.
랍비 전통은 이 두 가지를 비롯한 네 가지 식물을 네 방향(동, 서, 남, 북)과 하늘과 땅으로 흔들며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와 구원을 기념하게 했고, 이 상징 행위는 초막절의 핵심 요소로 남았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대체가 아니라, 성전이 없는 시대에도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구축하고자 한 랍비 유대교의 해석적 신학적 창조였습니다. 그러나 이 상징 행위는 희생 제사와 하나님의 실제 임재가 동반된 성전 예배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대체적 예식이라는 점에서 신학적 차이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랍비 유대교는 성전 파괴를 신앙의 종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재구성과 재창조의 기회였습니다. 성전의 기능은 기도, 학문, 자선, 공동체로 분산되었고,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성전 건물에 갇히지 않고, 흩어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재현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성전 재해석과도 맞닿아 있으며, 다음 장에서는 신약 성경 속 ‘새로운 성전’의 실현 방식, 특히 예수님의 몸과 제자 공동체에 대한 성전적 언어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새로운 성전>
1.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다: 요한복음의 신학적 전환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성전 정화 사건 직후 유대 지도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2:19)
유대인들은 이 발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며, 46년 동안 지어진 이 성전을 어떻게 사흘 만에 다시 세우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곧바로 해석을 제공합니다:
“예수는 자기 육체의 성전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21)
이 짧은 문장은 신약 성경 전체의 성전 이해를 새롭게 규정합니다. 이제 더 이상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성전 시대가 열립니다.
2. 성전에서 공동체로: 제자들의 몸이 성전이 되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 이후, 사도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 공동체 안에 임한다는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1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사용된 단어 ‘성전’(ναός, naos)은 성전 전체가 아니라 지성소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곧, 가장 거룩한 곳—the Holy of Holies—에 해당하는 임재가 이제는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전을 중심으로 질서가 형성되던 유대교적 세계관을 뒤흔드는 선언이며, 성전의 ‘분리’ 구조가 아닌 ‘임재의 확산’ 구조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3. 오순절 사건과 성전의 분산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할 때, 제자들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구약의 성전(시내산, 성막, 솔로몬 성전) 위에 임했던 하나님의 불과 동일한 상징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는 건물에 한정되지 않고, 사람 개개인 위에 임합니다. 오순절 사건은 곧 ‘성전의 분산화’이며,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이 공동체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이 함께 구성하는 초월적 성전입니다(갈라디아서 3:28).
4. 에스겔의 성전 환상과 요한계시록의 성전 없는 예배
에스겔 40–48장은 종말에 지어질 이상적인 성전의 환상을 보여줍니다. 이 성전에는 생명수가 흘러나오며(47장), 성소로부터 온 땅이 치유됩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이 환상을 ‘미래의 성전’으로 해석하였으나, 신약의 저자들은 이 환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종말론적 비전으로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새로운 예루살렘이 내려오며, 이렇게 선언됩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2)
이 구절은 기독교 종말론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성전은 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고 그들의 임재 자체가 성전입니다. 이 장면은 랍비 유대교가 기다리는 성전 재건과는 다른 방향을 보여줍니다: 성전은 더 이상 물리적으로 필요하지 않으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임재의 교제가 궁극의 성취입니다.
5. 교회, 새로운 성전 공동체의 실현
초대 교회는 이러한 신학을 토대로 ‘산 돌’(living stones)로 지어진 새로운 성전 공동체를 자처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5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이 선언은 교회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영적 공간, 곧 새로운 성전이라는 신학적 자기 인식입니다. 그 중심에는 희생제사 대신 자신을 드리는 삶,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와 제자도, 그리고 만인을 향한 복음의 확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선포하셨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 공동체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 성전은 랍비 유대교가 갈망하던 재건된 성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민족, 성별, 장소, 시간의 제한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모든 곳이 성전이 되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건물과 제도 속이 아니라, 영과 진리, 회개와 제자도, 사랑과 정의 속에 임하십니다.
<예수의 성전 정화와 인류 종말의 청사진: 성전 파괴, 회당 유대교, 그리고 오순절 교회의 분기점>
1. 단지 성전 파괴인가, 아니면 인류의 종말적 경고인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단지 예루살렘 성전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거나, 로마에 의해 AD 70년에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한 행동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사건은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 제사 체계, 구속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전환되고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종말론적 행동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울며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마 23:37–39)
이 외침은 단순한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예언자적 심판 선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지 않음을 선포하는 종말의 서곡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성전 정화와 성전 파괴 예언: 예루살렘의 심판
(1) 정화 사건의 신학적 성격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규정하셨습니다 (마 21:13; 렘 7:11 참조). 이는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예레미야 시대와 같은 멸망의 선고였습니다. 히브리어 me‘arat peritsim (“강도의 소굴”)은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의 거처가 아니며, 폭력과 착취의 공간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전이 기능적으로 폐지될 운명임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2) 십자가와 성전 파괴의 연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여정은 성전의 기능을 자기 몸 안에서 대체하는 여정입니다(요 2:19–21).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였고, 이제 참 성전이신 예수까지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예언은 정확히 성취됩니다.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AD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와 성전 소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이전에 없던 참혹한 재앙”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단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회복 불가능한 종결이었습니다.
3. 회당 유대교의 부상: 예수와 무관한 종교적 대체물
(1) 랍비 유대교의 기원
AD 70년 이후, 랍비 유대교는 성전이 없는 현실에서 신앙을 재정비하고자 했습니다. 주요한 대안은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 기도와 회개(Tefillah, Teshuvah)
• 율법 중심 학문 공동체(Yeshiva)
• 회당 예배(Beit Knesset)
이는 탈무드와 미쉬나 안에서 체계화되며, 성전 없는 시대를 위한 영적 구조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2) 신학적 단절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재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몸이 성전이 되는 새로운 시대”(요 2:21)와 본질적으로 충돌합니다.
랍비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 구속과 임재를 배제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기도와 예배는 기술적으로 유사해 보일지라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무관한 대체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4. 오순절과 교회의 탄생: 참 성전의 실현
(1) 성령의 임재와 성전의 재구성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불의 혀가 각 사람 위에 갈라져 임하며, 이전 시대의 임재가 이동된 사건임을 나타냅니다 (출 40:38과 대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지만, 교회는 흩어진 성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성전이라면, 성령은 그 몸을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며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시대를 여셨습니다 (고전 3:16, 벧전 2:5).
(2) 고고학적 발견의 신학적 뒷받침
• 쿰란 문서: 메시아적 성전 회복에 대한 기대는 유대 내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임재 신학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 텔락이쉬, 마사다 발굴: 전쟁 이후에도 회당과 요새 중심의 저항 공동체는 존재했지만, 성전 중심 체계는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문헌적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 교회의 성전 신학이 근본적으로 랍비 유대교의 패러다임과 다르며,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임을 입증합니다.
5. 종말론적 단절과 교회의 구속사적 위치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단순한 정결 행위가 아니라, 종말론적 단절과 신학적 대전환의 선언이었습니다. 랍비 유대교는 예수 없이 회당 예배를 통해 새로운 경건 체계를 구축했지만,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 성령 강림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과 단절된 길이었습니다.
반면, 교회는 예수 안에서 성전이 되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참 공동체로 탄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눈물과 심판 선언 속에 담긴 인류 구속사의 청사진이며, 성전 정화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예언자적 경고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예수님의 성전 정화, 초대교회, 그리고 제도화된 교회의 기도 회복 신학>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으며 외치신 말씀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구속사 전체를 꿰뚫는 신학적 선언이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사 56:7; 마 21:13)
이 선언은 성전의 원래 목적을 회복하려는 메시아의 심판적 선언이자, 동시에 새로운 성전 공동체—곧 기도하는 교회—의 탄생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 성전의 기도: 회막에서 성전, 회당, 그리고 교회로
• 회막에서의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세와 아론, 백성들이 서는 직접적 만남의 공간이었습니다.
• 솔로몬 성전은 성전 기도의 제도화된 형태였으며, 특히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절기 중심으로 드려졌습니다.
• 바벨론 포로기 이후, 다니엘의 하루 세 번 기도는 성전 없는 시대에 “시간의 성전화”를 시작하였습니다(단 6:10).
• 회당 예배는 말씀 낭독과 공동체 기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탈무드는 이를 영적 제사로 대체하였습니다(Berakhot 26b).
• 그러나 예수님 당시 성전은 상업화된 공간으로 전락하며, 기도의 집이라는 본래 목적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2. 신약 속 “기도하는 교회”: 성전 기능의 완성과 공동체화
1)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선언의 실현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 가운데 외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마 21:13, 사 56:7 참조)
이 말씀은 단순한 분노의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본래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선언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정체성은 바로 기도의 집입니다.이 선언은 단지 성전 제도에 대한 심판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기도하는 교회—의 시작을 예고하는 종말론적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선언 이후 탄생한 오순절날의 교회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점을 이어받은 기도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기도는 단순한 경건 행위가 아닌 신약 교회의 구조적 중심 요소였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를 단순한 말씀 선포와 교제의 공간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로 시작되었고, 기도는 신약 교회의 구조적 중심 요소였습니다.
사도행전은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을 매우 명확하게 그립니다:
• 사도행전 2:42 – “그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사도행전 3:1 –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새…”
• 사도행전 10:9 –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이 본문들은 모두, 유대교의 시간 기도 전통(샤하릿–민하–마아립)이 초대교회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3. 회당에서 각 집으로: 기도의 장소 전환과 계승
예수님 시대에는 회당이 유대 공동체의 공식적 기도와 율법 강론의 중심지였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사회에서 점차 분리되거나 박해를 받는 상황 속에서, 공공 회당 대신 각자의 집이나 옥상에서 기도 처소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개인적·소규모 기도 장소들의 예로 베드로가 옥상에서 기도하던 모습(행 10:9), 바울이 빌립보에서 기도할 곳을 찾던 모습(행 16:13)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 전용 건물이 실제로 등장한 것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부터이며, 그 전까지는 대부분의 예배와 기도 모임이 가정 교회(도메스틱 교회)나 숨겨진 장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시몬 피장의 집 옥상에 올라가 정오기도(민하)를 드리다 환상을 보게 됩니다 (행 10:9).
고넬료 역시 정해진 시간에 기도 중 천사의 방문을 받습니다 (행 10:3).
이방인 여신도들과 함께 바울은 빌립보에서 회당이 없자 기도처를 먼저 찾습니다 (행 16:13). 이는 회당 없는 이방 도시에서 기도의 장소 확보가 가장 우선적 선교 전략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행 16:13)
이 모든 장면은 기도가 단순한 신앙 습관이 아니라, 공동체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사역이 일어나는 중심 공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 예수님의 기도 선언과 교회의 연결
예수님의 성전 정화 선언은,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의 중심이 될 수 없음을 선포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 성령이 강림하신 교회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경험하는 새로운 성전 공동체로 태어났습니다.
• 기도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구약의 회막–성막–성전–회당을 잇는 기도의 연속선 위에 있으면서도,
성령의 임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임재와 거룩함을 가진 성전이 되었습니다.
5. 콘스탄틴 이후 교회의 제도화와 기도의 상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는 공인되고 제국 종교로 편입되면서, 예루살렘 성전 모델을 제도 교회가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기도 공동체적 정체성은 점차 성직자 중심, 주일 중심, 건물 중심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초기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하루 세 번 기도(샤하릿, 민하, 마아립) 전통은 점차 소멸하거나 수도원 내에서만 제한되었습니다.
제도화된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과 동일한 오류, 즉 기도 없는 예배 구조, 형식화된 의식, 정치 결탁의 모습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6. 오늘날을 향한 적용: 회복되어야 할 기도의 교회
콘스탄틴 이후 교회는 제도화되며 기도의 중심성을 상실했고, 오늘날 많은 교회는 사도행전의 기도 중심 교회와 단절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메시아닉 유대교 공동체나 초대교회의 유산을 계승한 일부 공동체에서는 매일 세 번 기도하는 전통을 회복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전통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연결과 임재의 회복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의 선언대로 교회는 본래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며, 그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이끌고,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복음 선교를 가능케 하는 구속사의 핵심 행위입니다. 기도 없는 교회는 성전처럼 껍데기만 남은 껍질이 될 수 있으며, 기도로 충만한 교회야말로 성령의 성전으로 회복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7. 랍비 유대교 회당 기도의 한계: 구속사적 불완전함
AD 70년 이후 성전이 파괴된 뒤 랍비 유대교는 회당 기도를 정착시켰지만,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닙니다:
• 속죄 없는 기도: 아미다 기도 속 “희생 제물의 회복” 간구는 실제 제사의 부재로 인해 구속사의 종결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 성령 임재의 부재: 신약 교회는 성령 강림을 통해 기도와 임재가 실제로 이어지는 공동체였지만, 랍비 회당 기도는 이를 포함하지 못합니다.
• 의례화된 반복 기도는 때로 내면적 변화 없이 외형만 유지되는 경건의 모양으로 남는 위험이 있습니다.
8. 메시아닉 공동체와 기도의 회복
21세기 들어 부상하는 메시아닉 유대교 공동체들은, 초대교회의 유대적 뿌리와 기도 중심의 생활을 회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의 기도(샤하릿, 민하, 마아립)를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공동체로 기능합니다. 회당과 교회의 연결점으로서의 ‘기도의 집’ 회복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전 기능의 완성된 회복을 예시합니다.
9.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 교회는 회복된 성전이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단순한 분노의 표현이 아닌, “기도 없는 예배 구조”에 대한 신적 심판이자 새 창조의 서막입니다.
• 신약 교회는 ‘기도의 집’으로서의 본질을 회복한 성전입니다.
• 성전의 역할은 예수님의 몸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이제 기도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그 기능을 계승합니다.
• 오늘날 제도화된 교회가 사도행전의 교회처럼 기도로 충만한 성전 공동체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성전처럼 심판받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70이레(weeks)와 제3성전 건축 운동 및 신학적 관점>
1. 다니엘의 70이레(weeks) 예언 해석
다니엘서 9장 24–27절에서 나오는 “70이레(weeks)” 예언은 다음처럼 구조화됩니다:
• 총 70이레 = 490년으로 해석 (day year 원칙 적용) samstorms.org+14en.wikipedia.org+14gotquestions.org+14
• 시작은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페르샤 왕의 칙령 시점(대략 BC 457/444년)에서부터 계산
• 첫 69이레(483년): 예수님의 메시아적 입성(약 AD 30경)과 십자가 죽음 시점에 정확히 도달 davidjeremiah.blog+10gotquestions.org+10en.wikipedia.org+10
• 70번째 이레(7년): 예수님의 죽음 중간 시점에 제사와 희생이 중단될 것이며, 그 끝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서게 될 것이라 예언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와 함께, 최종 7년 환란 기간, 그 중심의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일명 적그리스도—등, 종말론적 사건이 임박했음을 나타냅니다.
2. 예수님의 감람산 설교와 종말론적 맥락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산에 서는 것을 언급하시며, 다니엘 9장 예언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이 설교는 성전 정화를 넘어서 장작한 멸망과 환란, 종말을 알리는 경종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예루살렘의 운명—곧 포위와 멸망—을 눈물로 예고합니다 (마 23, 눅 21장). 이 모든 설교는 다시 다니엘 예언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3. 제3성전 건축 운동: 현재 상황과 신학
(1) 역사적 상황
• AD 70년 이후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제3성전 건축에 대한 희망과 준비는 끊이지 않음 gotquestions.org+4faith.edu+4lifehopeandtruth.com+4
• Temple Institute (1987년 설립, 라비 아리엘 주도)는 의복, 제사 도구, 빨간 암송아지까지 복원하며 구체적 준비 진행되고 있습니다.
(2) 고고학과 정치 상황
• 2010년대 이후, “템플 마운트 순례”와 정부·경찰의 공식적 허용 범위 확대가 이루어졌고,
• 2021년 기준, 국회의원 30여 명이 제3성전 지지 발언을 하는 등 정치적 분위기도 변화 중입니다.
(3) 신학적 관점
• 유대교 정통파는 대부분 “메시아 출현 후 신이 건설할 일”이라 보며 직접 행동은 제한적
• 그렇지만 일부 기독교 종말론자(크리스천 시오니스트 포함)는 제3성전 건축을 재림 전조로 보며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
• 반면, 전통적 메시야닉 사상은 “참 성전은 예수님의 몸과 성령 안의 교회 공동체이며, 물리적 성전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관점을 유지합니다.
4. 연결 요약: 종말론과 신앙적 분기점
이스라엘의 성전과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현대의 종말론적 관심은 하나의 신학적 흐름 속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관점별 해석을 통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다니엘서의 예언은 총 70이레(주간)로 구성되며, 그중 69이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까지를 포함하는 구속사의 완성 구간으로 해석됩니다. 마지막 70번째 이레는 종말적 환란과 멸망의 시기로 간주되며, 이 때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표현은 궁극적인 심판과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설교, 특히 성전 정화 이후에 이어지는 감람산 강화(마태복음 24장)는, 성전의 타락 → 정화 → 종말 예언 →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예언적 전개 순서를 따라 진행됩니다. 예수님은 단지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정화 행위를 통해 종말론적 심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한편, 현대 이스라엘 내 Jerusalem Temple Institute(성전 연구소)는 제3성전 건축을 위해 모든 기구와 예복, 제사장 훈련 등을 준비해 두었으며, 이를 통해 물리적인 성전 임재의 회복과 더불어 평화 시대의 도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메시아적 성전 회복을 역사 속에서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이를 추진합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는 제3성전의 재건을 긍정적인 회복이라기보다는 종말과 심판의 상징, 또는 예수 재림을 앞둔 전조 현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특히 계시록 11장에서의 “성전 측량”이나 “두 증인” 사건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구절로 자주 인용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론적 관점에서 볼 때는 더욱 근본적인 선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듯이, 참 성전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성령이 임한 공동체—곧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완성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히브리서, 고린도전서, 베드로전서 등을 통해 신약성경 전체가 강조하는 핵심 신학입니다.
이러한 연결은 우리로 하여금 단지 역사적 성전이나 종교적 건축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성전 신학과 종말의 지혜를 새롭게 해석하게 하는 이정표가 됩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단순한 과거의 도덕적 정화가 아니라, 다니엘 예언을 성취하며 단절적 종말론을 촉발하는 사건입니다.
제3성전 건축은 유대교 내 정치·종교적 현실 속에서 계속 추진되고 있으며, 기독교계 안에서도 실천적 지지와 신학적 반대가 공존하는 민감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면, “참 성전”은 이미 예수님과 성령 안에 완성되었으며, 교회는 보편적 성전으로 이미 건립되었다는 신학적 확신이 이 시대를 지켜야 할 핵심입니다.
<글을 맺으며: 성전이 없는 시대, 우리는 어디서 예배하는가?>
랍비 유대교와 신약성경의 성전 신학은 70년 성전 파괴라는 동일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각각의 고유한 방식으로 응답했습니다. 랍비 유대교는 성전을 기억 속에 보존하면서, 회당과 가정, 율법 학문과 경건한 실천을 통해 성전 없는 신앙을 재구성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함을 공간에서 시간으로, 제사에서 말씀으로, 장소에서 공동체로 이동시키는 신학적 전환을 이루어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성전의 중심성과 경계를 해체하시고, 자신의 몸을 새로운 성전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가 고정된 장소가 아니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디서나 임하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단지 타락한 제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장소를 초월해 임하심을 알리는 예언자적 상징 행위였습니다. 그분은 이방인의 뜰을 회복시키시고, 사회적·종교적 경계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는 예배의 문을 다시 여셨습니다.
사도들은 그분의 몸이 부활과 함께 새로운 성전이 되었음을 선포했고, 성령 강림 이후의 공동체는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이동하는 성전, 살아 있는 성전, 산 돌로 지어진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신학적 통찰과 실천적 도전을 준다. 우리는 ‘성전’ 없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랑과 회개, 정의와 자비로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제 어디에 있는가?”
답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그리고 예배하는 자의 삶 속에 있습니다.
이 흐름을 통하여,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과연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소명을 회복하고 있는가? 성전 없는 시대를 살았던 유대 공동체의 상징이 회당이었다면, 성전된 몸으로 세워진 교회는 오히려 예배의 중심, 기도의 삶, 구속사의 최종 드라마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2025년 6월 18일 저녁에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씀
◙ Now&Here©ucdigiN(유크digital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