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계발] 지금, 여기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테슈바의 아가다 그리고 올람 하바의 재정의-9 » “요한복음 4장과 랍비 문헌을 통해 본 예언적 회개와 예배의 재정의” »Now and Here: The Samaritan Woman, the Aggadah of Teshuvah, and the Redefinition of Olam Haba » Subtitle: A Prophetic Reimagining of Repentance and Worship through John 4 and Rabbinic Literature
Contents
- <글을 시작하면서>
-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가지는 신학적 구속사적 의미>
- <유대인과 이두메인 그리고 사마리아인 등 주변 이방인들이 주는 의미>
- <사마리아인과 예루살렘 성전주의의 충돌: 역사, 정체성, 문헌적 증거>
- <사복음서에 나타난 사마리아인의 존재와 신학적 전환점>
- <사마리아인의 메시야 사상과 예수의 계시: 경계에서 피어나는 구원의 이야기>
-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 경계의 시작점에서>
- <사마리아의 우물가의 조우가 주는 의미>
- <양동이 버려둠의 의미: 실천으로 나타난 테슈바의 전환>
- <그가 나의 모든 일을 말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선포와 공동체의 회복>
- <올람 하바의 현재성: 예수께서 여신 미래의 문>
- <하할라(Halakhah)와 새로운 길: 삶으로 드러나는 올람 하바>
- <예언자의 전통 안에서 본 사마리아 여인: 물동이를 버리고 전도자가 되다>
- <참된 예배와 새로운 공동체: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의 신학적 통합>
- <사마리아 여인의 행동과 올람 하바의 현재적 실현>
- <글을 맺으며>
<글을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대명천지 백주대낮에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사건은 복음서 안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전환점이자, 유대-사마리아 경계를 넘어서는 신학적 ‘지금’의 선포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 사회에서 이방인만큼이나 배척 받았고, 사마리아 여인은 종교적·성적·사회적 이중 배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여인을 찾아가셨고, 물을 달라는 요청에서 시작된 대화는 곧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졌습니다. 본 글은 요한복음 4장의 이 대화를 중심으로 랍비 유대교와 신약의 시공간적 이해, 예배의 본질, 테슈바와 삶의 전환을 비교하며, 올람 하바(내세)의 개념이 지금 여기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가지는 신학적 구속사적 의미>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복음서 전체에서 보면 생뚱맞은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나는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보냄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방문하시고 한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인류 구원을 향한 거대한 청사진을 제자들 뿐 아니라 온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이점이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이후 유대인 중심의 교회에서, 이제 교회가 유대인적 교회가 아니라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서 사마리아에도 전해지고 그 중간 지점이 온 열방에 퍼지는 연결점이 됨에 매우 중요한. 스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신약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 단지 한 지역적 사건이 아니라 구속사적 전환점이자, 유대인 중심의 신앙에서 열방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선교의 서막을 여는 결정적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4장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Sychar)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유대 랍비의 일반적 관행을 보면, 유대인 남자가 대낮에 여인, 그것도 사마리아인과 공공장소에서 말하는 것은 율법적·사회적 금기였습니다. 특히 그녀는 결혼을 다섯 번 했고 지금 남편도 아닌 사람과 살고 있는 여인으로 종교적·도덕적으로 이중의 경계 바깥에 놓인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이중 경계를 무너뜨리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 (요 4:22) — 그러나 사마리아를 통해 열방으로 넘어간다!
이 장면은 복음서 안에서 매우 이례적이며, 오히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마 15:24)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모순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선교 구도 안에서 계획된 경계 넘기였으며, 이는 다음과 같이 확장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앗시리아의 포로 정책(열왕기하 17장)으로 혼혈되고, 유대인에게는 배교자 혹은 이방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느헤미야·에스라 시대 성전 재건 시 협조 요청을 거절당하면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균열은 깊어졌습니다(느 4:1–3).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은 세 가지 면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 계시적 예표:
• 예수님은 자신을 “생수”, “참된 예배의 대상”, “예언자적 메시야”로 계시하십니다.
•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기대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 18:15)를 만난 것으로 반응하며, 즉시 마을로 달려가 전도자가 됩니다.
2) 경계 넘기와 회복의 선교적 패턴 제시:
• 복음은 유대인 경계를 넘어 사마리아로 향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10장의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에게 가지 말라”는 명령이 나중에 뒤집히는 복선이 됩니다.
• 오순절 이후 복음의 확산은 예루살렘 → 유대 → 사마리아 → 땅끝으로 이어지며 (행 1:8), 사마리아는 단순한 중간지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험대입니다.
3) 참된 예배 개념의 전환:
• 성전 중심 예배가 아닌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선언되며,
• 이 선언은 성막, 성전, 지리적 거룩함을 해체하고, 모든 민족과 장소에서 예배 가능성을 여는 선포로 확장됩니다.
4) 사마리아의 종말론적 위치: 사도행전 1:8의 구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 이 구절은 단지 지리적 차원이 아니라 선교 신학적 확장구조입니다.
• 사마리아는 유대교와 이방 사이의 전이공간으로 기능하며,
복음이 민족적 경계(유대)와 종교적 경계(사마리아)를 넘어 문화적 경계(땅끝)로 향하게 되는 문턱입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보기 드문 이질적 만남처럼 보이지만, 요한복음 4장은 오히려 복음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설 것이라는 상징적 선포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한 여인의 회심이 아니라, 복음이 뿌리 깊은 편견과 경계들을 무너뜨리며 시작되는 전 지구적 여정의 출발점입니다. 유대인의 독점적 종교 구조를 해체하고, 복음이 사마리아와 이방으로 향할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님의 선교 전략의 선포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구원의 통로”로서 유대인을 사용하셨지만, 그 구원이 결국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명확히 하셨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이 말하는 “참 빛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메시야(요 1:9)의 선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두메인 그리고 사마리아인 등 주변 이방인들이 주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사회는 단순히 유대인만의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 이두메인(에돔 후손), 로마인, 사마리아인, 이방인들이 얽힌 복잡한 다민족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복합성의 한 축을 이루는 이두메인, 즉 에돔계 후손인 헤롯 왕조는 정치적으로 유대 땅을 지배하면서도 혈통적, 종교적으로 유대인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헤롯 대왕은 로마의 후원을 받아 유대인의 왕으로 즉위했으나, 그는 이두메 출신으로 다윗 왕가와는 무관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화려하게 재건한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아들들 (아켈라오, 헤롯 안디바, 헤롯 빌립, 헤롯 아그립바 등) 은 로마에 의해 각각 유다, 갈릴리, 이두레, 사마리아 지역 등을 분할 통치했습니다. 이들은 분봉왕(Tetrarchs)이었고 로마 총독들과 함께 복합적 지배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마 2:2)이라는 선언으로 시작되며, 이는 헤롯의 정치적 불안과 살육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장면은 야곱과 에서의 갈등(창세기 25–27장)을 신약시대에 반복시키는 상징적 재현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경계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확대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로서 이방 법정(가이사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기를 요청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보호가 아닌, 복음이 로마 제국의 공적 영역까지 진출한다는 상징적 사건이 됩니다(사도행전 25–28장).
1.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비교와 사도행전 1:8의 신학적 확장
예수님 당시,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전역—특히 예루살렘, 유다, 갈릴리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약 50만에서 100만 명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수치는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 와 요세푸스(Josephus) 의 기록을 토대로 후대 인구학자들이 재구성한 자료에서 비롯됩니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Jewish War, II.14.3)는 제1차 유대 전쟁 이전 예루살렘 성전 축제 때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모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세겜(현대의 나블루스) 및 그리심 산(Mount Gerizim) 을 중심으로 정착하며, 인구는 예수 시대에 약 수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사마리아인의 문헌인 탈굼 사마리타눔(Targum Samaritanum) 및 사마리아 자체 연대기들에서 언급되는 숫자들과, 로마 제국 통치 문서에 기록된 인구 비율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21세기 현재까지도 사마리아인의 후손이 살아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걸쳐 약 800명 이하가 남아 있습니다. 이 중 일부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적 메시아로 받아들이며, 그 믿음을 유지하고 있는 ‘기독교-사마리아계’ 소규모 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언어적으로, 유대인은 당대 팔레스타인에서 아람어를 일상어로 사용했고, 성경적‧종교적 문서에서는 히브리어를, 또한 헬레니즘 영향 아래에서는 헬라어(Koine Greek) 를 널리 활용했습니다. 신약 성경 자체가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로마 제국 전체의 공용어이자 문화언어로서 헬라어의 위상을 반영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체 언어인 사마리아 아람어 방언을 사용했으며, 그들의 성경(사마리아 오경)은 히브리어를 사마리아 문자체로 표기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문자는 고대 히브리어 문자와 비슷하지만, 유대인의 ‘바빌로니아 히브리어’와는 형태적으로 다릅니다. 현존하는 사마리아 오경(Pentateuch of the Samaritans) 사본과 관련 유물은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은 예수님 출생 당시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의해 ‘유대인의 왕(King of the Jews)’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두메계 출신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모두에게 정치적 불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의 사후 왕국은 세 아들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s),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헤롯 빌립(Herod Philip) 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고, 이후 아켈라오의 무능과 잔혹성 때문에 그의 영토는 로마의 직할령(Judaea Province) 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와 같은 로마 총독이 파견됩니다.
사마리아는 초기에는 안티파스의 통치 아래 있었으나, 유다 지방과 함께 점차 로마 총독의 관할 아래로 병합되며 행정적으로 로마 직할령의 일부가 됩니다. 고고학적 증거로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 동전들, 행정 문서 조각들, 심지어는 로마의 군사 기지 및 도로 유적도 있습니다. 이 모든 요소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정치‧사회적 경계와 그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 유대-사마리아 간의 사회적 장벽, 종교적 논쟁, 그리고 인종적 편견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여기서 ‘예배의 장소’에 대한 논쟁은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 새로운 예배,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심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1:8의 신학적 구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는 단순한 지리적 순서가 아닌, 복음 확장의 신학적 로드맵입니다.
1. 예루살렘: 유대인의 중심, 전통적 성전 신앙의 상징.
2. 유대: 종교적 정체성의 확장된 경계.
3. 사마리아: 경계선에 있는 ‘이웃 중 타자’. 같은 신을 섬기지만 다른 방식, 같은 혈통이지만 다른 종교.
4. 땅끝: 완전한 이방, 로마, 그리스, 바르바로이(비문명인)까지 포함하는 보편적 확장.
사마리아는 그 사이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가 단순히 ‘먼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신학적 경계를 넘는 회복적 선교임을 뜻합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과 땅끝 사이의 지리적 위치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신학적 관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하겠는지라’(요 4:4)고 하셨고, 이는 단순한 경로 선택이 아니라 의도된 하나님 나라 선교의 방향이었습니다.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는 땅끝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선교 전략이며, 오늘날 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경계 넘는 복음”의 모델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예루살렘 성전주의의 충돌: 역사, 정체성, 문헌적 증거>
예수 시대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은 단순한 종교적 차이를 넘어서, 민족적, 인종적,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 뿌리를 지닌 깊은 분열이었습니다. 이 분열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로 압축되어 나타나지만, 그 배경에는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충돌과 상호혐오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본 글은 요세푸스의 사료와 랍비 문헌,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이 충돌의 본질과 신학적 함의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1. 역사적 배경과 사마리아인의 기원
사마리아인은 본래 북이스라엘 왕국의 후손들로,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이 멸망한 후 이주민들과 혼혈을 이루며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혼혈 민족으로 간주하며 ‘순수한 아브라함의 혈통’을 지닌 자신들과 구분했습니다. 이는 에스라-느헤미야 시대부터 유대인의 할라카적 정결주의를 통해 제도화되었으며, 성전 재건 과정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성전 건축에 참여조차 거절당한 집단으로 기록됩니다(느 4:1–3).
2. 예루살렘 vs. 그리심 산: 두 성전의 충돌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정통 이스라엘 신앙의 계승자라 주장하며, 그리심 산에 별도의 성전(기원전 5세기경)을 건립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이를 불법적이고 이단적인 성소로 간주하였고, 요한 힐카누스(Hasmonean John Hyrcanus)는 주전 128년에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이는 물리적 충돌이자 신학적 정통성 전쟁이었습니다.
3.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와 사마리아
요세푸스(Josephus)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혈통을 따라야 할 때는 유대인 행세를 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외국인이라 한다.”
― 『유대 고대사』 11.341–347
요세푸스는 사마리아인들을 기회주의적이며, 종교적 정체성이 불분명한 집단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유대인의 시각에서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경계인, 민족적 배신자로 본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4. 탈무드 내의 사마리아 논의
랍비 문헌에서 사마리아인은 “쿠팀”(כּוּתִים), 즉 앗수르에서 이주한 이방인으로 취급되며, 정통 유대교 밖의 집단으로 규정됩니다.
• 미쉬나(Bikkurim 1:3)에서는 “쿠팀은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명시합니다.
• 예루살렘 탈무드(Yerushalmi Avodah Zarah 5:4, 44d)는 사마리아인을 “이교적 행위를 하는 위선자”로 간주합니다.
• 바벨론 탈무드(Babylonian Talmud, Hullin 6a)에서는 “그들의 음식, 결혼, 율법 해석은 신뢰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랍비들 중 일부는 사마리아인이 율법(토라)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부분적 수용을 주장했으며, 랍비 메이르(Rabbi Meir)는 사마리아인을 “율법의 행위자”로 인정했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이는 유대 내부에서도 사마리아에 대한 복잡한 시선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5. 고고학적 발견
텔 마운(그리심 산 근처)에서 발견된 사마리아인들의 성소 유적과 사마리아 오경 필사본(기원전 1세기 경 추정)은 사마리아인들이 고유의 예배 체계와 문헌 전통을 오랜 세월 유지해왔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며, 그 안에 그리심 산을 유일한 예배처로 명시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 20:17의 위치 변조 등).
6. 신학적 함의
예루살렘 성전 중심주의는 공간적 독점성, 민족 정결성, 제사장 중심주의를 전제로 합니다. 반면 사마리아인의 종교는 오경 중심, 계시 중심, 예배 중심의 신학 구조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는 선언은 이 두 체계를 모두 넘어서는 제3의 신학, 곧 하나님의 임재가 공간·민족·의식의 경계를 초월한다는 복음적 전환을 시사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순한 이웃이나 이단이 아니라, 예루살렘 중심 종교 질서에 도전한 ‘경계적 타자’였습니다. 이들의 정체성과 신학은 유대교 내부에서도 긴장과 충돌의 대상이었고, 탈무드와 요세푸스의 기록은 이 긴장이 얼마나 체계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경계 바깥에 있는 여인을 통해 가장 깊고도 급진적인 계시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이며, 예루살렘과 그리심 산 사이에 ‘지금, 여기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사마리아인의 존재와 신학적 전환점>
사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혹은 “사마리아인”은 언급 빈도는 적지만, 극히 중요한 신학적,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존재들은 단순한 주변인이 아니라, 복음이 경계 바깥으로 확장되는 선교 신학의 핵심 전환점으로 작용합니다.
1. 마태복음: 선교의 제한과 이후 확장의 암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복음 10:5–6)
이 구절은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서 사마리아 선교가 제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배제가 아니라, 선교의 점진적 확대(마 28:19-20, 사도행전 1:8)의 전략적 전조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유대적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먼저였고, 이후 만민을 향한 확장이 예비된 것입니다.
2. 누가복음: 사마리아인을 통한 경계 허물기
• 누가복음 9:51–56
사마리아 마을의 거절과 야고보, 요한의 반응(“불을 내리자”)은 당시 유대인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꾸짖으며 폭력을 거절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포용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경계 확장을 보여줍니다.
• 누가복음 10:25–37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 비유는 예수님이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로 전환시키는 아가다적 장치입니다. 랍비 문헌에 나타나는 ‘이웃’(רֵעַ) 개념을 뛰어넘는 해석으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는 신학을 제시합니다.
• 누가복음 17:11–19 – 나병환자 중의 사마리아인
열 명 중 한 명만이 돌아와 감사하는데, 그가 사마리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하시며, 유대인보다 더 나은 신앙의 모델로 사마리아인을 제시하십니다.
3. 요한복음: 사마리아 여인과 예배의 본질
• 요한복음 4장 – 수가 성의 사마리아 여인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깊은 신학적 대화 중 하나입니다. 예수는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다”고 하며, 예배의 장소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강조하십니다. 이는 유대-사마리아-이방의 경계를 넘어선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선교의 서론입니다.
• 요한복음 8:48
유대인들은 예수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조롱하며 귀신들렸다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은 당대 유대 사회에서 경멸과 차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4. 문헌학적 · 유대 문헌적 배경
• 유대 문헌인 미쉬나와 탈무드는 사마리아인을 “고임(Goim)”와는 다른 혼합 민족으로 보았고, 종교적으로 ‘이방인보다 더 불결하다’고 간주하기도 했습니다(M. Niddah 4.1).
• 반면,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의 참된 후손’임을 주장하며 사마리아 오경과 탈굼 사마리타눔을 통해 자신들의 전통을 유지했습니다.
• 랍비 전승에서는 사마리아인의 회당, 언약, 계보를 부정하며 혼혈 민족으로 간주했습니다.
5. 신학적 확장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8은 사마리아를 단순한 지리적 대상이 아니라, 복음 확장의 ‘전략적 연결지점’으로 제시합니다. 예루살렘(유대) – 사마리아 – 땅끝이라는 구조는 구원의 중심이 유대인에게서 시작되어 경계를 넘어 전 인류로 확장됨을 뜻합니다.
사복음서에서 사마리아는 단순한 주변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드러내는 극적인 무대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이방인이었지만 신앙의 중심으로 초대받았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방 선교의 신학적 정당성과 본질을 조명합니다. 예수님은 경계를 넘어선 메시아였고, 사마리아는 그 보편적 복음의 첫 번째 시험장이자 확장 모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메시야 사상과 예수의 계시: 경계에서 피어나는 구원의 이야기>
1.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경계의 분열과 신앙의 차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북왕국 멸망(기원전 722년) 이후, 앗수르의 혼합정책에 따라 외래 민족과 혼혈되어 형성된 집단으로, 율법(토라)은 수용하였으나 예루살렘 성전, 유다 중심 신앙을 거부했습니다. 그리심 산을 유일한 예배처로 삼았으며,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모두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지만, 여러 핵심 요소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 예배의 중심지에서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며, 그곳을 유일한 거룩한 장소로 여겼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 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린다”고 말한 대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요한복음 4:20).
둘째, 경전에 대한 수용 범위에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모세오경뿐 아니라 역사서, 예언서, 시가서 등 전체 성문서(타나크)를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한 정경으로 인정하며, 나머지 예언서나 성문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셋째, 메시야 사상에 있어서도 그 기대가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다윗의 혈통을 이은 왕적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자유케 할 구속자로 기대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신명기 18:15–18에 언급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즉 “너희 가운데 한 예언자를 세우리라”는 모세의 말에 기반한 것으로, 다윗 계열 왕으로 오실 분이 아니라 모세 같은 ‘타아베(ta’abeh)’, 즉 예언자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이 예언자적 메시야는 구속자라기보다는 계시자와 랍비(교사)적 성격을 지닌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이러한 사상은 사마리아인들의 전통 문헌인 탈굼 사마리타눔(Samaritan Targum)과 그리고 탈굼 네오피티(Targum Neofiti)속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점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과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리는 사마리아인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당 주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학술 자료는 Reinhard Pummer의 연구로, 그의 논문 “The Samaritans’ View of their History and Relationship to Judaism” (출처: Journal for the Study of Judaism)는 사마리아인의 메시야 사상, 특히 “타헤브(Taheb)” 사상에 대해 중요한 역사적·문헌학적 정보를 제공합니다.
사마리아인의 메시야 사상에 대한 문헌 및 고고학적 자료
1. 문헌적 근거
• 신명기 18:15–18은 사마리아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 개념의 중심입니다.
o 그들은 이 구절을 다윗 계열의 왕적 메시야가 아닌, 모세와 같은 예언자적 메시야 ‘타헤브(Taheb)’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합니다.
• 탈굼 사마리타눔 (Samaritan Targum) 은 사마리아인들이 사용하는 아람어 번역/해석본으로,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사마리아 전통에 기반합니다.
o 이 문헌에서 메시야는 계시자, 율법의 해석자, 영적 회복을 위한 교사로 묘사됩니다.
• 탈굼 네오피티(Targum Neofiti) 는 유대 아람어로 된 오경 해석본으로, 사마리아인의 탈굼과는 다르지만 비교 연구의 중요한 대상으로 사용됩니다.
2. 고고학 및 역사적 자료
• 세겜(Shechem) 근처의 그리심 산 발굴에서 나온 유적들은 사마리아인의 종교 중심지를 보여주며, 1세기까지 사마리아인의 예배가 지속되었음을 입증합니다.
• 로마 제국의 문서들 중에는 사마리아인을 유대인과 별개의 민족-종교 집단으로 규정한 것도 있으며, 이는 메시야 기대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와 요세푸스(Josephus)는 모두 사마리아인의 예배가 그리심 산 중심이었음을 증언하며, 다윗 왕조를 부정하고 율법 중심 신앙을 고수했음을 나타냅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연구는 Pummer 뿐 아니라 여러 학자들이 많이 연구했습니다. 매우 중요한 참고 문헌 세 개를 소개합니다.
• Reinhard Pummer, “The Samaritans’ View of Their History and Relationship to Judaism”, Journal for the Study of Judaism, JSTOR Link
• John MacDonald, The Theology of the Samaritans, SCM Press, 1964.
• James Purvis, The Samaritan Pentateuch and the Origin of the Samaritans.
넷째, 종교 문헌에서도 유대인은 미쉬나, 토세프타, 탈무드와 같은 풍부한 랍비 문헌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전통을 사마리아 오경과 탈굼 사마리타눔(Targum Samaritanum)—즉, 사마리아 방언으로 번역된 오경—을 통해 계승해 왔습니다. 그들은 랍비 유대교의 구전율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그리고 사도행전에서의 사마리아 선교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며, 예수께서 사마리아인을 포용하신 사건들은 당시 사회적, 종교적 경계를 넘어서는 급진적 행보로 평가됩니다.
2. 사마리아인의 종교 문헌과 메시야 기대
사마리아인의 대표적 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 사마리아 오경 (Samaritan Pentateuch): 히브리어 토라와 유사하지만, 예배 중심지를 ‘그리심 산’으로 기록한 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 탈굼 사마리타눔: 사마리아 공동체의 아람어 번역 경전으로, 신명기 18장의 메시야 예언이 강조되며, “그(메시야)는 오면 영원히 계실 것이다”와 같은 해석을 포함합니다.
• Memar Marqah (마르카의 말씀): 사마리아인 철학자 마르카(Marquah)의 사상서로, 모세 같은 구속자가 장차 올 것이라 기대합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말,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4:19–25)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사마리아 정체성과 종말 신앙의 고백입니다.
3. 고고학과 역사 문헌의 증언
(1) 고고학적 발견
• 그리심 산 성전터: 사마리아인의 성전 유적이 발굴되었고, 제의적 기물과 함께 모세 중심 제사 전통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 사마리아 동전과 인장: 헬레니즘·로마 시기에도 사마리아인의 종교적 정체성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예배용 금속기물에는 모세 상징이 자주 새겨져 있습니다.
(2) 로마 문헌
• 요세푸스(Josephus): 『유대 고대사』(Antiquities)에서 사마리아인을 “혼합된 자들”로 불리며 유대인들로부터 경계와 혐오의 대상으로 묘사합니다.
• 필로(Philo): 사마리아인을 신학적 혼합주의자들로 간주했으나, 오히려 유대교의 순수성을 더 강조하기 위한 반대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것이 단순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민족적·신학적 경계를 뒤흔든 사건이었음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해 줍니다.
4. 예수와의 대화: 종말론적 충돌과 통합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금이 곧 그 때라”(요 4:23)는 유대교와 사마리아 신앙 모두에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경계를 넘어, 올람 하바(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이고 우주적인 실제로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언은 가장 낮고 주변부에 있는, 바로 그 여인을 통해 퍼져나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은 단순한 회심이 아니라, 경계 없는 예배 공동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녀가 물동이를 던져 버린 것은, 옛 신앙 질서의 상징적 해체이며, 예배가 더 이상 장소나 민족, 성별, 과거의 상태에 매이지 않는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녀는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마리아적 종말 신앙과 예수께서 선언하신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하나로 잇는 선지자적 증언자가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당신은 선지자시군요”라고 말하며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의 기대 속에는 유대인과는 다른 ‘예언자 메시아’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처음으로 “내가 그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메시야 사상에 대한 충돌이 아니라 경계 너머로 건너가신 구속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 경계의 시작점에서>
1.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역사적 갈등
예수께서 수가라 불리는 사마리아의 한 성에 도착하셨을 때, 이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경계선, 종교적 단절, 신학적 차별을 넘는 급진적인 접근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깊은 적대감은 단순한 민족적 갈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순수성, 예배의 장소, 그리고 율법 해석을 둘러싼 깊은 역사적 분열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함락된 이후 이방 민족과의 혼혈과 이방식 예배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영적으로 불결한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유대 랍비 문헌인 탈무드(예: Mishnah Sotah 9:14)에 따르면, 사마리아인은 율법을 부분적으로만 수용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거부하며 그리심 산에서의 예배를 고수한 민족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한낮에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시작한 것은 단지 경계를 넘은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경계를 해체하고,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2. 율법과 사회 규범을 깨뜨린 ‘대화’
요한복음 4장에 따르면, 제자들이 자리를 비운 틈에 예수께서는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온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이 장면은 당시 할라카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미쉬나 아보트(Avot 1:5)에서 유대 랍비 요세 벤 요에제르는 “여자와의 대화는 삼가야 하며, 공공장소에서 여인과의 대화는 삼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언급합니다. 특히 여성과는 둘만이 아닌 공동체 내에서 대화해야 했고, 이 여인이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복잡한 혼인 관계의 당사자였다는 점은 사회적 불결함 즉 투마(tumah)의 판단을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회적·율법적 판단을 넘어섭니다. 오히려 그 여인 안에서 테슈바(회개)의 가능성과 올람 하바(내세, 다가오는 세상)를 향한 갈망을 보십니다. 이는 랍비 문헌이 종종 아가다적 이야기로 강조하는 “말로 하는 경건”을 넘어서 “삶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극률이 임한다는 사상과도 통합니다(예: Avot de-Rabbi Natan 25).
3. ‘물이 아닌 생명’ – 메시아의 시간 선언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요 4:14)고 하신 말씀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이는 유대 문헌 속 ‘생명의 물’(מים חיים, mayim chayyim) 개념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서 2:13에서도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이 여인의 대화 속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생명의 근원이며, 이제는 예루살렘도 그리심 산도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새로운 시대, 곧 올람 하바의 실재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제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다”라는 신학적 선포를 넘어, 지금 여기가 메시아적 시간(Now of Redemption)이라는 카이로스(kairos) 선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달려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친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실제적인 행위로 옮겨진 테슈바, 즉 아가다와 하할라를 동시에 체현한 회개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우물가의 조우가 주는 의미>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 4장은 예수께서 유대 땅을 지나 사마리아 수가(Sychar)의 야곱의 우물에서 한 여인과 나눈 대화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공간적 전환이 담긴 아가다적 드라마입니다. 이는 ‘올람 하바’(Olam HaBa, 올람 하바)의 실현과 ‘테슈바’(Teshuvah, 회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존재적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1. 유대와 사마리아의 경계, 그리고 하가다의 전환
예수께서 굳이 사마리아로 가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랍비 전통에 따르면,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부정한 자로 간주하여 함께 길을 걷거나 음식을 나누는 것을 피했습니다. 토세프타(Tosefta)와 미쉬나(Mishnah)는 사마리아인의 정결 여부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편견을 넘어서서, 한 여인과 정오 대낮에, 그것도 홀로 대화하십니다. 이는 전통적인 유대 랍비의 행동범위를 넘어선 급진적인 하가다적 전환(derashah)입니다.
2. 물 길으러 온 여인: 하할라와 테슈바의 긴장
이 여인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예수께서 지적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히 윤리적 정죄가 아니라, 그녀의 삶에 대한 하할라적(halakhic) 판단과 동시에 회복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테슈바의 부름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를 폭로한 뒤에도 정죄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녀를 진정한 예배자로 초청하십니다.
그녀는 “메시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라고 말하고, 예수는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라고 응답하십니다. 이는 출애굽기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אֶהְיֶה אֲשֶׁר אֶהְיֶה)라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연결됩니다. 즉, 예수의 자기선언은 하할라의 경계를 넘어서 존재론적 계시로 확장된 것입니다.
3. 물동이를 버리고 떠난 여인: 하할라에서 실천으로
예수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들어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단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차원을 넘어, 실천적 테슈바의 행위, 즉 율법의 본질을 따르는 신앙적 응답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우물의 물을 찾는 자가 아닌, 생명의 물을 전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이 여인의 변화는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보였던 외적 의식이나 제의적 정결을 강조하던 전통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올람 하바의 표징이 됩니다.
<양동이 버려둠의 의미: 실천으로 나타난 테슈바의 전환>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와의 대화를 마치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는 장면은 단순한 행동을 넘어선 깊은 신학적, 상징적 전환을 내포합니다. 본 장에서는 이 장면을 아가다적 시각과 랍비적 유대교 문헌, 그리고 예수의 메시아적 자기계시의 맥락을 보여 줍니다.
1. “물을 길러 왔으나 물을 버리다”: 상징적 탈출
요한복음 4:28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이는 단순한 무심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유대-헬레니즘 문헌 전통에서 그릇(κἀδρος, 물항아리)은 존재론적 수단 또는 일상의 정체성을 상징하며, “그릇을 버리다”는 것은 삶의 목적이 변화했음을 드러내는 메타포적 행동입니다. 랍비 전통에서도, 회개의 첫 단계로서 “익숙한 것을 포기하는 행위”는 테슈바의 시작으로 간주됩니다(바빌로니안 탈무드, Yoma 86b).
2. 테슈바의 실제: 행동 없는 회개는 참회가 아닙니다
랍비 문헌 미쉬나 아보트(1:17)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이 많고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무익한 향기 없는 꽃과 같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이끌어내며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닌 행동으로 표현된 테슈바를 긍정하셨습니다.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로 달려간 행위는 “하할라적 실천”의 전환점입니다. 테슈바는 단지 죄를 후회하는 감정이 아닌,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는 고립된 여인이 아닌 공동체를 향한 사도적 존재로 변화됩니다.
3. 예언자적 전환: 예수의 하가다적 이야기 구도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하나의 완결된 하가다입니다. 예수는 이 여인의 과거를 드러내되, 정죄가 아니라 재정의로 접근하셨습니다. 랍비들의 하가다 전통에서도 여인들이 회심을 통해 공동체에 다시 통합되는 구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예: 룻기의 랍비 해석 Midrash Rabbah on Ruth 2:1–7).
특히 이 장면은 호세아서의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광야에서 그녀를 만나 다시 말로 유혹하리라… 그녀는 거기서 응답하리니 마치 애굽에서 올라올 때와 같으리라.” (호세아 2:14–15)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로서 바로 이 호세아적 회복의 언어를 실현하십니다.
4. 여성, 예언자, 메시아의 대화
랍비 문헌은 일반적으로 여인과의 종교적 논쟁이나 공개 토론을 금기시합니다(예: 미쉬나 소타 3:4). 특히 대낮에 남성과 여성이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금기를 깨시며, 그녀를 한 명의 신학적 대화자로 존중하십니다.
이 장면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요 3장)와 의도적으로 병렬되며, 랍비 유대교적 권위자보다 “무명의 여인”이 메시아를 더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는 역전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는 오히려 사마리아 여인이 예언자적 통찰과 공동체적 사명을 부여받는 전환점이 됩니다.
5. “올람 하바”로의 실천적 진입
랍비 유대교에서 올람 하바(עולם הבא, 내세)는 단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닌, 하할라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준비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는 이 여인을 통해 “지금이 바로 예배할 때”임을 선언하셨고(요 4:23), 이는 하할라적 미래 대신 지금의 회개와 순종을 강조하는 예언자적 선언입니다. 그녀는 올람 하바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 속으로 들어간 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물동이 버림”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아가다, 하할라, 테슈바, 예언적 순종, 그리고 올람 하바가 모두 교차하는 사건입니다. 이 장면은 랍비 유대교적 전통 속 테슈바 개념과 신약의 메시야적 회복 개념이 만나는 자리를 보여줍니다.
<그가 나의 모든 일을 말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선포와 공동체의 회복>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외친 말은 짧지만 충격적이고 깊은 영적 울림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29)
이 외침은 단지 개인적 체험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는 예언자적 메시지이며, 공동체 안에 던지는 회개의 촉구,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공적 증언입니다.
1. “모든 일을 말하다”: 회개를 향한 공개적 정직
랍비 유대교에서 진정한 테슈바는 히타누트 (הִתְוַדּוּת, 자백/고백)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앞에서의 진실한 자기 개방을 포함합니다. 바빌로니안 탈무드(Berakhot 12b)는 말합니다:
“회개는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되돌리는 문이요, 자백은 그 문을 여는 열쇠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은 이 히타누트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녀는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을 드러내며 메시아적 깨달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께서 그녀의 삶을 꿰뚫은 것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었습니다.
2. 랍비 문헌과의 연결: “이웃”의 정의와 공동체의 확장
랍비 전통에서 ‘이웃’(רע, רעֶךָ)은 동일 민족, 동일 율법을 따르는 자들로 제한되곤 했습니다. 미쉬나의 상징적 정의에 따르면, 사마리아인은 이웃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증언이나 재판에서도 제외되곤 했습니다(예: 미쉬나 Avodah Zarah 4:3).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의 외침과 이에 반응한 공동체의 반응(요 4:39)은 이 경계를 깨뜨립니다. 예수의 공동체 안에서 이웃의 정의는 “가까운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자”로 재정의 됩니다. 예수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과도 연결되며, 진정한 이웃은 율법적 정체성이 아니라 자비와 행위로 드러나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3. 공동체, 예배, 그리고 새로운 경배자들
요한복음 4장의 핵심은 예배의 전환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요 4:23)
예배의 중심이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산이 아닌, “영과 진리”로 옮겨갑니다. 이는 랍비 전통이 고수하던 성전 중심의 하할라와 대조됩니다. 이제 예배는 시공간의 제약이 아닌, 삶으로 드러나는 테슈바와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으로 구현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자로서, 공동체를 예배로 초청하는 최초의 “여성 전도자”이며 “예언자”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녀의 행위는 랍비 유대교에서 허용하지 않았던 여성의 공적 종교 참여를 급진적으로 넘어서는 사건이었습니다.
4. “그들이 예수를 믿으니”: 공동체의 신앙과 올람 하바
요한복음 4:39-42에 따르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더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랍비 문헌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과는 상반됩니다. 랍비 전통에서 메시아는 유대의 경계를 지키고 토라의 수호자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의 예수는 이방과 혼혈된 공동체 가운데서 메시아로 인정받습니다.
이는 예수 안에서의 올람 하바가 혈통이나 율법이 아닌, 믿음과 테슈바를 통해 열리는 세계임을 보여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새로운 하늘과 땅, 새로운 예배, 새로운 공동체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서 사마리아 선포자로”
사마리아 여인은 단순한 죄인이 아니다. 그녀는 메시아를 만난 증인이며, 경계를 넘은 회복의 통로입니다. 물동이를 버린 순간부터, 그녀는 과거의 수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이 변화는 사적인 구원이 아닌, 공동체적 회복을 동반하며,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의 방향성을 드러냅니다.
<올람 하바의 현재성: 예수께서 여신 미래의 문>
랍비 유대교에서 올람 하바(עולם הבא, “오는 세상”)는 종말 이후에 도래할 미래의 세계이며, 의인들이 거할 장소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올람 하바는 단순히 미래의 현실이 아니라 현재 속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로 드러납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께서는 이 미래의 현실을 지금 여기에 가져오십니다.
1. “지금이 바로 그때라”: 시간의 파열과 종말의 현재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요 4:23)
이 구절은 시제적으로도 매우 급진적입니다. 예수께서는 “때가 오나니”라고 말한 뒤 곧바로 “곧 이 때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유대교 종말론의 전통적 시간 구조—현재-죽음-부활-올람 하바—를 깨뜨리고, 미래의 거룩한 현실이 지금 여기에 임하였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올람 하바를 선언적 사건(declarative event)으로 만드셨고, 이 선언은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이는 한 여인의 개인적 변화를 넘어,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구속사의 축소판입니다.
2. 예수의 언어와 랍비의 언어: 종말의 언어와 시간의 신학
랍비 전통에서 “지금”(עַכְשָׁיו, akhsav)은 본질적으로 준비의 시간입니다. 즉, 올람 하바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의 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서는 지금을 구원의 성취 시점으로 제시합니다.
이 대비는 언어에서도 드러납니다. 히브리어에서 “지금”과 “오는 세상”은 종종 대비적으로 쓰이지만, 예수께서는 그 둘을 통합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며,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3. 사마리아 여인과 새 예배자들: 예루살렘도 그리심도 아닌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유대인의 성전 예배 모델, 곧 하할라 중심의 장소적 거룩성을 해체합니다. 이는 2차 성전기 당시 중심지 예배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음을 고려할 때, 매우 급진적인 선포입니다.
랍비 문헌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재건된 세계를 꿈꿨으나, 예수는 그 중심을 사람의 마음과 공동체의 진실함으로 옮기셨습니다. 올람 하바는 더 이상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에게 열리는 하늘의 문입니다.
4. Derashah와 하가다의 구조로 본 예수의 전환
예수님의 선언은 고전적인 Derashah(유대 설교 형식)와 하가다의 전환 구조를 따릅니다.
• 텍스트: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할 때가 오나니” (예언자적 시점)
• 전환: “곧 이 때라” (현재의 성취)
• 신학적 핵심: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새로운 정체성과 공동체의 윤리)
이 구조는 랍비적 교육의 중심 방식 중 하나였으며, 예수께서는 이를 차용하되 그 내용을 율법이 아닌 은혜와 진리로 대체하셨습니다. 이는 아가다적 전환의 정점입니다—과거의 율법과 미래의 기대가 지금 여기서 충돌하고, 새롭게 열리는 것입니다.
5. 사마리아 공동체의 반응: 예배에서 선교로
요한복음 4장 마지막 장면은 예수의 머무심, 말씀하심,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라는 삼중 구조를 가집니다: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아노라” (요 4:42)
이것은 단순한 메시아 고백이 아니라, 세상의 구주(ὁ σωτὴρ τοῦ κόσμου)라는 전 지향적 선언입니다. 즉, 유대 민족 중심의 종말론에서 세계 선교적 비전으로의 이동이 여기서 일어납니다. 올람 하바는 민족의 경계를 넘고, 성전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는 세상(Olam Haba)”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는 “오는 세상”을 단순한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여셨습니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녀는 그 세계의 첫 증인, 첫
예배자, 첫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물동이를 버린 것은 단지 물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종교 구조와 사회적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간 행위였습니다. 그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하할라(Halakhah)와 새로운 길: 삶으로 드러나는 올람 하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보여주신 삶의 전환이 어떻게 할라카(Halakhah) — 즉 유대교의 ‘걷는 길’, 윤리적 실천의 체계 —와 대조를 이루며, 새로운 영적 윤리와 공동체 윤리를 제시하는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지 영적 이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천으로의 초대였으며, 이것은 올람 하바(오는 세상)의 실제적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 할라카(Halakhah): 율법의 길, 기준의 공동체
랍비 유대교에서 ‘할라카’는 단순한 율법의 집합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규정한 길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 규칙 중심: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지시
• 구분 중심: 정결과 부정, 이방인과 유대인, 남성과 여성, 성전과 일상 등 다양한 이분법
• 경계 유지: 공동체의 거룩을 위해 엄격한 규칙과 사회적 배제를 동반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인물은 이 체계 안에서 철저히 배제된 존재입니다. 그녀의 성별, 출신, 종교적 중심의 이탈, 그리고 그녀의 과거는 모두 할라카 공동체의 경계 밖에 존재합니다.
2. 예수의 윤리: 길에서 사람으로
예수님의 행위는 기존의 ‘길’(할라카)을 뛰어넘어 사람을 살리는 길로 바꾸는 급진적 윤리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그의 윤리는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로 요약됩니다:
• 은혜 중심의 윤리: 규칙이 아니라 자비가 공동체의 기준이 됨
• 수용과 회복: 배제된 자를 공동체 안으로 다시 불러냄
• 관계적 할라카: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순종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정확히 아셨음에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율법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은혜의 부르심으로 전환된 판단입니다.
3. 하할라에서 할라카로, 그리고 카리스(χάρις)로
히브리어 Halakhah는 “걷다”(הלך)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예수는 이 걷는 길을 단순한 율법의 실천 경로가 아닌, 하나님과 함께 걷는 관계의 길로 바꾸셨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표현에서 ‘성령 안에서 걷는 삶'(갈 5:16)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길은 헬라어로 카리스(χάρις), 은혜의 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는 더 이상 “율법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를 따라 걷는 것”입니다.
4. 새로운 공동체 윤리: 올람 하바가 요구하는 삶
올람 하바는 단지 도래할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의 가치와 윤리를 오늘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할라카적 공동체와 근본적으로 대조적인 특징을 보입니다. 할라카 공동체가 정결, 민족, 성별 등 외적 경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예수의 공동체는 회개와 믿음에 기초한 수용성과 포용을 중심에 둡니다. 율법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는 것을 중시하던 공동체에 비해, 예수님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을 더 큰 율법의 완성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또한 배제와 구별로 정체성을 지켜 나가던 유대 종교 공동체와 달리, 예수님의 공동체는 회복과 화해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정결 의식과 제의 중심의 종교성을 넘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이웃과의 화해를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닌, 삶의 방식으로 요구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새 공동체의 씨앗이었고, 예수께서는 그 씨앗을 통해 수많은 사마리아인을 구원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이 장면으로 삶으로 열리는 올람 하바의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라카는 길을 규정했지만, 예수는 그 길에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더 이상 율법이 주체가 아니라, 그 길을 걷는 사람, 특히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열어주신 올람 하바는 윤리적 선언이자, 실천의 초대입니다. 이 길은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자들을 주체로 삼으며, 자비와 진리가 공존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걸음입니다.
<예언자의 전통 안에서 본 사마리아 여인: 물동이를 버리고 전도자가 되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단순한 사적 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언자적 소명과 회개,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담은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 장에서는 이 사건이 어떻게 구약의 예언자 전통 속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지, 또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가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갖는지 살펴봅니다.
1. 예언자적 메시지로 본 예수의 대화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단순히 정보를 교환하거나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예언자적 책망과 회개의 초청,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예언자적 전형들이 드러납니다:
• 실상의 폭로: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요 4:18)
이는 아모스나 예레미야가 사용한 도덕적 심판 언어를 떠오르게 합니다.
• 참된 예배의 회복: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요 4:23)
이것은 이사야나 미가 선지자가 외친 외식적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과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율법을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율법의 본질적 회복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담론이자 하가다(Derashah)적 방식입니다.
2. 여인의 행동: 물동이를 버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8)
이 짧은 문장은 깊은 상징성을 내포합니다. 유대적 전통에서 물은 생명과 정결, 동시에 율법적 요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중의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 육체적 갈증보다 영적 목마름의 해갈: 이제 그녀의 중심은 더 이상 물을 긷는 것에 있지 않음
• 율법적 정결에서 벗어난 은혜의 정결: 율법의 요구보다, 은혜의 경험을 우선하게 됨
• 새로운 정체성의 선언: 더 이상 부정한 여인이 아니라, 메시야를 만난 자, 즉 증인
이는 엘리야나 엘리사에게 부름받은 자들이 삶의 도구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따랐던 장면(왕상 19:21)을 연상케 합니다.
3. 여인의 전도와 선지자적 사명
놀라운 사실은 이 여인이 공동체의 중심 인물로 다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께로 나아갑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합니다:
• 메시야 선포자: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요 4:29)
• 증인 역할: 그녀는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의 권능과 정체를 드러냄
• 중보적 존재: 이방 공동체와 유대인 예수 사이에서 다리를 놓음
이 구조는 예레미야, 호세아, 또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 사역과 매우 유사합니다. 특히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음녀 고멜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하게 하셨듯, 이 여인 역시 회개와 회복을 드러내는 예언적 표징 인물로 기능합니다.
4. 선지자들의 회복 예언과 올람 하바
사마리아 여인을 통한 복음의 확장은 유대의 경계를 넘어선 예언 성취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이 사건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유용합니다:
• “그 날에는 사마리아 에브라임도 여호와께로 돌아오리니…” (호세아 14:1)
• “멀리 있는 자들을 내게로 이끌어 오리라” (이사야 57:19)
•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와 열방에 퍼지리라” (미가 4:2)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는 선언은 단지 개혁적 가르침이 아니라, 예언 성취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는 단순한 구조의 전환이 아니라, 올람 하바의 예배 방식, 다시 말해 다가올 세상에서 드려질 온전한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한 개인의 회복을 넘어서 공동체 전체의 구속사적 전환을 이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Teshuvah), 마음의 열림, 그리고 행위의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여인은 이제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녀는 말과 삶으로 복음을 전한 최초의 ‘이방 사도’이자, 올람 하바의 삶을 오늘 이 자리에서 실현한 사람입니다.
<참된 예배와 새로운 공동체: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의 신학적 통합>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개인적 회복에 그치지 않고, 예수께서 도래 시키신 새로운 공동체의 모델이자, 참된 예배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발전합니다. 이 장에서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 담긴 예배의 재정의, 경계의 해체, 올람 하바의 실현이라는 세 가지 핵심 주제를 통합적으로 조망합니다.
1. 예배의 중심 전환: 장소에서 존재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 “이 산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입니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요 4:21–23)
이 말씀은 예배 장소에 대한 고정 관념을 해체하고,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선언입니다. 이는 제사 중심의 성전 예배를 넘어, 인격적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드리는 예배, 즉 하할라적 예배에서 아가다적 예배로의 전환입니다.
• 하할라(Halakhah): 규범적 예배, 정결과 절차 중심
• 아가다(Aggadah): 이야기와 경험, 마음 중심의 예배
예배는 시간과 공간에 갇히지 않으며, 예배자의 삶 전체가 ‘영과 진리 안에 거하는 예배’가 됩니다. 이는 올람 하바의 예배, 즉 다가올 세상에서의 예배 방식을 미리 살아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2. 경계의 해체와 포용적 공동체
사마리아 여인은 그 민족적, 종교적, 윤리적 경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방식을 통해 경계의 벽을 허무십니다:
• 민족의 경계 해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오랜 적대
• 성별의 경계 해체: 당시 라삐가 여인, 특히 낮에 외부 여인과 말하는 것은 금기
• 정결의 경계 해체: 남편 다섯이라는 윤리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대화
이는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공동체, 즉 올람 하바의 예표로서의 공동체가 은혜, 회복, 포용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공동체에서는 “첫째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역전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3. 올람 하바의 선취: 지금 여기에서 드러난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말씀, “지금이 바로 그 때다”는 선언은 단지 시간적 현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올람 하바(עולם הבא), 곧 다가올 세상이 이미 이 여인의 삶 속에 도래했다는 의미입니다.
• ‘지금(Now)’은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종말론적 충만성의 현재입니다.
• 예수님은 공간적으로 성전이 아닌 사마리아의 우물가, 시간적으로는 종말이 아닌 현재, 사람으로는 랍비가 아닌 사
마리아 여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십니다.
이 사건은 “하늘의 때”가 땅에서 실현된 순간, 즉 케로스(Kairos)의 개입이며, 여인의 증언과 공동체의 반응은 그 나라의 확장을 보여주는 증표가 됩니다.
4. 새로운 신학적 틀: 올람 하바와 공동체 윤리
사마리아 여인의 회심은 단순한 개인적 변화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의 재구성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유대 전통적 관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제시하셨습니다. 유대 전통은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에 집중했지만,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영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태도와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셨습니다. 이웃에 대한 정의 역시 민족적 정체성과 율법 준수를 기준으로 삼던 유대 관념과 달리, 예수님은 자비를 행하는 모든 자를 이웃으로 여기며 포용의 경계를 넓히셨습니다. 정결 역시 외적 상태와 의식에 초점을 두던 기존 관점과 달리, 예수님은 마음의 변화와 회개,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내적 정결을 강조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임재는 성전이나 제도, 지리적 조건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과 사람과의 만남 가운데 나타나는 것으로 재정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단지 유대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적 전통의 심층에 자리한 예언자적 회복과 공동체적 정의를 성취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올람 하바의 문이 유대인의 중심지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멸시하고 배척한 사마리아에서 열렸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인종주의와 혐오의 벽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은혜가 경계 밖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단지 복음을 처음 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통해 올람 하바를 미리 경험한 증인, 예배와 공동체의 새 길을 행위로 보여준 첫 제자, 그리고 당시 유대 질서가 배제했던 자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먼저 임했다는 표징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이 율법의 경계를 넘어 어떻게 회개, 회복, 공동체, 예배를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며, 이방 세계에서부터 하늘의 예배와 삶의 일치를 실현한 첫 열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행동과 올람 하바의 현재적 실현>
1. 물동이를 버리고 간 여인의 행위: 하할라에서 아가다로의 전환
요한복음 4장 28절에서 “그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이르되”라는 구절은 단순한 서술 이상의 신학적 함의가 있습니다. 물동이는 그녀가 사마리아 전통에서 물을 긷기 위해 왔던 하루 일상의 할라카적 삶의 상징이며, 율법과 전통에 따른 규칙적 경건함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 이후 그녀는 그 물동이를 버립니다. 이는 마치 할라카에서 아가다로, 경전 해석에서 생명의 말씀으로의 전환을 나타냅니다. 그녀는 이제 규범의 길을 넘어서 살아 있는 하나님의 계시, 메시아를 만난 자로 변모한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랍비 문헌이 있습니다:
“율법은 물과 같고, 예언은 포도주와 같으며, 아가다는 꿀과 같다. 율법은 규범을 지키게 하지만, 아가다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이르게 한다.”
— 바빌로니안 탈무드, 소타 11a
그녀는 물동이(율법)를 버리고, 아가다의 꿀을 담아 마을로 나아갑니다.
2. 공동체로의 복귀: 배제된 자에서 선포자로
랍비 문헌에서는 종종 사마리아인을 이스라엘 백성에서 제외된 이방 집단으로 간주합니다. 다음은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다. 그들은 율법을 거절한 자이며, 성전의 기억을 왜곡한 자이다.”
— 미쉬나 ‘하루요트(Haruyot)’ 3:2
하지만 예수는 이 배제된 자를 올람 하바의 첫 번째 선포자로 세우십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구속사적 4단계 전개를 보여 줍니다. 각 단계는 구약과 랍비 전통 속 상징과 연결되며, 신약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첫째, ‘대화’는 신적 만남의 시작입니다. 이 장면은 단지 물을 요청하는 인간적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접촉하시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셨고, 지금은 예수께서 우물가 여인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는 신적 자기계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둘째, ‘물동이를 버림’은 종교적 질서의 해체를 상징합니다. 구약 제사 규정에서 정결과 의식이 강조되었으나, 여인은 물동이를 버림으로써 그러한 율법적 전통으로부터의 이탈과 새 질서의 수용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예배가 장소나 형식이 아닌 영과 진리로 드려질 것을 상징하는 전환점입니다.
셋째, ‘동네로 향함’은 선지자적 소명을 보여 줍니다. 여인은 개인적 만남을 통해 공동체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욜 2:28)—의 실현이며, 신약에서 여인이 ‘복음의 증인’으로 최초로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넷째, ‘그리스도라 하시는 이’를 소개함은 메시야 고백의 절정입니다. 여인의 입술에서 나온 “그리스도라 하시는 이”라는 말은 신명기 18:15–18에 등장하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의 성취입니다. 이는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닌, 메시야의 현현을 통한 계시 완성의 선언입니다.
이처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점진적인 계시의 완성 구조를 따르며, 한 개인의 내적 변화가 공동체의 구속사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이끌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마리아 여인의 사역은 할라카적으로 볼 때 완전히 비정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여성, 이혼 혹은 부정한 이력, 그리고 사마리아인이라는 삼중 경계를 가진 그녀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점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내는 아가다적 전환입니다.
3. 진정한 예배자, 그리고 올람 하바의 현재적 실현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 혹은 그리심 산 중심의 장소 기반 성소신학에 대한 급진적 도전이었습니다.
랍비 유대교의 예배관은 명확히 성전 중심, 시간(안식일·절기), 공간(예루살렘) 중심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선언은 랍비 유대교의 예배 이해의 대조됨을 보여 줍니다. 이와같이 예수남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요한복음 4장)는 당시 랍비 유대교의 예배 이해에 대한 급진적인 재정의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예배 장소에 있어서 랍비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공간 중심의 제의 중심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선언함으로써 존재 중심, 즉 하나님의 임재와 진정성에 무게를 둡니다.
둘째, 예배의 주체는 랍비 유대교에서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남성 위계질서에 있었으나,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누구든지, 특히 여성조차도 예배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셋째, 경계의 설정은 유대교에서는 유대인 중심이며 정결법에 근거한 민족적·종교적 선민의식이 강했지만, 예수는 민족과 성별을 뛰어넘는 보편적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정결 기준이나 혈통이 아닌 믿음과 진실한 마음이 중심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예배의 시점에 대해 랍비 유대교는 ‘올람 하바’(Olam HaBa)라 불리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 도래를 기다렸지만, 예수는 “지금 여기(Now)”, 즉 현재의 순간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이러한 비교는 단순한 예배 관행의 차이를 넘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접근방식에 있어 전환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단순히 새로운 제도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를 성전화하고, 예배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회개, 회복으로 전환시키신 것입니다. 이는 곧 올람 하바의 현실화이며, 사마리아 여인은 그 첫 번째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 장면은 예배, 정체성, 선포, 회개라는 모든 구조 속에서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
예수는 랍비 유대교의 경계 안에서 배제된 자를, 그 경계를 넘어 올람 하바의 중심에 서게 하십니다. 그녀는 더 이상 이방인도, 여인도, 죄인도 아닙니다. 그녀는 예배자이며, 선지자이며, 메시아를 본 첫 증인입니다.
<글을 맺으며>
요한복음 4장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선언은 단지 사마리아 여인을 위한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성전 중심의 할라카 공동체를 넘어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라는 말씀은 단지 종말론적 미래의 도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 임재의 현실성을 말합니다. 경계는 무너지고, 성별과 민족, 정결과 부정의 구분은 사랑과 자비, 회복과 진리로 대체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고했던 회개의 길, 그리고 랍비 전통 속에서 반복되던 테슈바의 외침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사마리아였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인종주의와 경계로 나뉜 세계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자 합니다—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경계를 넘어 시작됩니다.
2025년 보스톤 이른 새벽 세시에 김종필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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