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 탈무딕 유대교의 경계를 넘어선 회복의 손길-8

본 글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의 이야기를 단순한 병 고침의 기적으로 축소시키는 해석에서 벗어나, 히브리어 원어와 랍비 유대교의 정결 법체계, 미드라쉬 전승과 메시아 사상의 맥락에서 재조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는 단지 육체의 치유가 아니라, 정결과 부정, 고립과 회복, 배제와 통합이라는 경계를 넘는 신학적 전환의 사건...

[영성계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 탈무딕 유대교의 경계를 넘어선 회복의 손길-8 » 부제: tzitzit(צִיצִית), niddah(נִדָּה), kanaf(כָּנָף)를 통해 본 마가 복음서의 유대적 재해석 
» The Woman Who Touched the Hem of Jesus: A Healing Beyond the Boundaries of Talmudic Judaism: A Jewish Reinterpretation of the Gospel of Mark through Tzitzit (צִיצִית), Niddah (נִדָּה), and Kanaf (כָּנָף)

Contents

<글을 시작하면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가복음 5장에 기록된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의 치유를 단순한 기적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이 이야기를 제2성전기 유대교의 정결법(tumah), 여인에 대한 사회적 규정(niddah, zavah),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언약적 상징(kanaf, tzitzit)을 통해 재조명합니다. 이 여성은 단순히 육체의 고통을 겪은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배제되고 예배로부터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순간, 그녀는 단지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유대 사회의 중심으로 회복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할라카의 경계를 초월함을 입증합니다. 본 글은 바로 그 회복의 선언이 어떻게 랍비 유대교적 질서 속에서 파격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12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는 복음서 독자들에게 익숙한 기적 서사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이 즉시 나음을 입었다”는 이 사건은 단순한 치유의 기적으로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서구적 신학’이 그리스 로마 문화의 바탕에서 이해하고 해석한 주해의 결과이며, 유대 랍비 전통의 심층 구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해석학적 오해의 한 사례이기도 하다.
 
본 논문은 유대인의 시각에서 “tzitzit (צִיצִת), kanaf (כָּנָף), niddah (נִדָּה)”와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가진 신학적·사회적 의미를 회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특히 ‘옷자락’으로 번역된 헬라어 κρᾶσπεδον (kraspedon)이나 라틴어 fimbria는 본래 히브리어가 지닌 신성성과 율법적 맥락을 삭제하고 단순히 ‘물리적 접촉’의 사건으로 축소시켰습니다. 이는 단지 서구 언어의 번역의 한계 뿐 아니라, 유대 율법 구조와 정결 규례, 신성 공간의 이해에 대한 결여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신약 본문의 원래 메시지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본고는 이 사건을 랍비 유대교의 문헌적·제의적 구조 안에서 재조명하고 합니다. 미쉬나, 토세프타, 탈무드 등 제2성전기 후반의 구전 전통과 문헌들, 그리고 구약의 정결 규례(레위기 15장)를 배경으로, 혈루증 여인의 행위는 단순한 ‘치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정결의 경계를 넘는 급진적인 신학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음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본 글은 복음서 안의 예수님의 행위를 랍비 유대교의 심층 구조 속에서 위치시키는 동시에, 현대 신학과 번역학, 성경 해석학이 회복해야 할 ‘히브리어 원어의 문맥적 신학성’을 제시하려 합니다. 이것은 단지 고대 문헌의 언어학적 분석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와 독자들에게 본문의 살아있는 의미를 회복하는 ‘해석학적 회복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A라고 쓰고 B라고 읽었던 일본 문자의 경우>

백제가 우수한 문명을 일본에 전한 것은 문자 뿐이 아닙니다. 백제가 일본에 전한 문명은 단지 한자 뿐만이 아니라 정치, 종교, 건축, 음악, 학문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일본 고대 문화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문자와 언어 체계에서 한자(漢字) 뿐 아니라 이두와 구결도 포함됩니다. 일본의 만요가나(万葉仮名) 및 가나 문자체계(히라가나, 가타카나)의 발전을 준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가타카나(カタカナ), 히라가나(ひらがな)의 직접적인 기원은 일본 내 문자 발전 과정이지만, 한자 운용 방식과 음가 해석 방식은 백제와의 교류 속에서 영향을 준 것입니다. 
 
백제가 일본에 전해준 문자체계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깊고 강력한 영향으로 남아 있는 현상은 “훈독(訓読, Kun’yomi)”과 “음독(音読, On’yomi)”의 병존 현상입니다. 특히 한자를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 매우 일본적인 방식, 즉 표기와 독음이 분리되는 이중 독서체계는 바로 이 백제의 문자 전래 과정에서 비롯된 구조적 유산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뫼 산(山)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일본식 독음으로는 やま (yama)이며 훈독으로는 ‘군요미(Kun’yomi)라고 합니다. 중국식 독음으로는 さん (san)이며 음독 으로는 온요미(On’yomi) 입니다. 
 
같은 글자 山을 일본에서는 ‘산’이라고 쓰고 ‘야마’라고 읽는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이중 독음체계는 일본 고유어(훈독)와 중국식 한자음(음독)이 함께 존재하면서 생긴 것이며, 백제나 고구려 계통의 한자 전래 당시, 이중 해석 및 해독 방식이 전달된 결과로 학계에서도 평가됩니다. 그중에서도 백제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한자는 중국에서 왔지만, 일본에 들어와 실제 어떻게 읽히는지는 백제의 음운체계와 지도에 따라 정착되었다”는 것이 일본 고대 문자사 연구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영향은 지금도 이어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자 ‘大山’을 훈독으로 おおやま (Ōyama)이지만, 음독으로는 だいさん (Daisan)입니다. 같은 글자지만 문맥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히며, 현대 일본인조차 이 글자가 “오오야마”인지 “다이산”인지 문맥 없이 알 수 없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일본의 대표 국어학자인 하라다 시게미츠(原田茂光)와 다카하시 도오루(高橋徹)는 “이중 독서 체계의 뿌리는 한반도 문명 전래기에 있고, 그 중 백제계 학자들의 영향력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분석합니다. 일본 내 고분기 한자음 중 “고한음(古漢音)”이라 불리는 계통은 실질적으로 백제어계 고유 음운의 흔적을 간직한 음독입니다.
 
이처럼 일본에서 한자는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 현상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백제를 통해 도입된 문자 교육의 구조적 결과물입니다. 훈독은 일본 고유어의 수용이고, 음독은 백제(및 고구려)를 통해 유입된 고대 한자음의 반영이며, 이 둘이 공존함으로써 일본은 지금까지도 “읽을 수 있으나 정확한 원음을 모르는 문자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A를 서구 신학은 B로 읽었다: 문자와 의미의 전이 속 상실된 깊이>

문자란 단순한 표기 기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어 공동체의 세계관과 신앙, 신비, 정체성의 총체적 결을 담아낸 ‘의미의 그릇’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히브리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학적 우주이며, 토라의 정신이 숨 쉬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어가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 등 유럽 중심의 번역 언어를 거치며, 그 고유의 뿌리와 상징성이 때로는 축소되거나 오독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이 현상은 마치 백제가 일본에 한자를 전하면서 생겨난 이중 독음 체계, 즉 ‘訓讀(Kun’yomi)’과 ‘音讀(On’yomi)’의 병존 구조와도 유사합니다. 한자를 A라고 쓰고, 일본인은 B라고 읽는 이 방식은 원래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보다, 전승자의 문화적 언어 구조 속에서 해석되며 새로운 용례로 정착된 것입니다. 그 결과, 같은 문자를 보아도 원음의 맥락을 잃은 채 다른 문화적 층위로 이해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대표적인 사례는 כָּנָף (kanaf), צִיצִית (tzitzit) 그리고 נִדָּה (niddah)입니다. 저는 본 글에서 히브리어가 지닌 깊은 의미와 서구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그 깊은 의미를 담지 못함으로 초래한 여러 해석학적 오해와 문제에 대하여 하나씩 비교하고 분석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어 단어의 유럽어 번역은 문자적 충실성의 손실일 뿐 아니라, 신학적 전이의 왜곡을 초래하였습니다. 서구 기독교는 종종 히브리어 본문의 상징과 율법적 콘텍스트를 배제하고, 은혜·보편·심리·윤리 중심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 속에 담긴 랍비적 맥락, 정결법적 충돌, 공동체적 긴장과 같은 깊은 층위는 서구 기독교의 신학에서 ‘A라고 쓰고 B로 읽는’ 방식으로 대체된 셈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히브리어 본문으로 돌아가 원래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 구조와 깊이를 회복하려는 신앙적 과제입니다. 히브리어는 다시 ‘읽혀져야’ 하고, 그 언어 안에 담긴 언약의 리듬과 율법의 정서는 단지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 본문의 서사 구조와 신학적 중요성>

1. 마가복음 5장 25–34절의 배경

마가복음 5장 25–34절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병을 고침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본문은 공관복음 모두에 등장하며(마 9:20–22; 눅 8:43–48), 세 복음서 모두에서 동일한 구조적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은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에 기록된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이야기 안에 삽입된 이중 구조의 본문이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한 병 고침 이야기나 여인의 용기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 사회의 율법 구조, 정결 규례, 공동체 배제 메커니즘, 그리고 예수의 급진적 율법 재해석을 암시하는 복합적인 텍스트로 보아야 합니다.

2. 마가복음의 문학 구조와 삽입구조 기법

혈루증 여인의 본문은 야이로의 이야기 사이에 끼워 넣어진 삽입 구조(intercalation)의 대표적 예로, 마가복음이 즐겨 사용하는 서술 기법이기도 합니다. 이 구조는 단순한 이야기의 장식이 아니라, 두 이야기의 주제를 상호 해석하게 하며 하나의 복합적 메시지를 형성합니다. 즉, 죽어가는 딸을 살리러 가는 길목에서, 예수님은 ‘이미 죽은 자처럼 여겨지던’ 한 여인에게 생명을 회복시키는 사건을 통해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깊고도 오묘한 예수님의 치유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본질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나타내는 점진적 계시의 모습을 자세히 나타냅니다. 

3. 본문의 주요 신학적 주제들

본 본문은 다음과 같은 주요 신학적 주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정결과 부정, 믿음으로 받는 치유 그리고 공동체와 회복이라는 점층적 계시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 정결과 부정: 레위기 15장의 정결법에 따르면, 혈루증 여인은 지속적인 부정 상태에 있으며(레 15:25), 접촉하는 사람이나 사물까지 부정하게 만듭니다. 이 여인은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접근 불가한 존재’입니다.
 
• 믿음과 치유: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고 선언함으로써, 율법적 조건이 아닌 믿음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는 단순한 신유의 사건을 넘어, 율법 중심의 정결 시스템을 넘어서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 공동체와 회복: 예수는 치유된 여인을 찾아내어 ‘딸아’라고 부르십니다(마 9:22; 눅 8:48). 이는 단지 육체의 회복이 아니라, 배제되었던 여인을 다시 공동체의 중심으로 회복시키는 선언입니다.

4. 여인의 손길과 예수의 옷자락

본문의 중심은 여인이 믿음으로 내민 “손”과 “예수의 옷자락” 사이의 접촉에 있습니다. 이 짧은 접촉은 당대 유대 사회와 율법 전통 안에서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 접촉을 통해 율법의 ‘부정이 전이되는 질서’가 전복되고, 오히려 ‘거룩이 전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단지 기적이 아닌, 율법 해석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신학적 성명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는 단지 병이 나은 치유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이 당시 랍비 유대교의 정결 질서, 공동체 규범, 율법 이해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본문에 등장하는 히브리어 및 헬라어 용어들, 특히 tzitzit, kanaf, niddah 등의 개념과 그것이 헬라어, 라틴어 및 기타 유럽 언어로 번역되면서 생긴 오독의 역사적 맥락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다시 읽는 마가복음 5장: ‘옷자락’의 본원적 의미>

1. 본문 관찰: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예수와 탈릿(Tallit): 마가복음 5장과 유대 율법의 맥락에서 본 tzitzit 접촉의 의미
 
마가복음 5:27–30의 본문 해석: ‘옷에 손을 대다’는 의미
“그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곧 혈루 근원이 마르며…” (마가복음 5:27–29)
헬라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καὶ ἥψατο τοῦ ἱματίου αὐτοῦ “and she touched His garment.”
 
여기서 ἱμάτιον (himation) 은 헬라어로 ‘겉옷’을 의미하지만, 예수께서 단지 로마식 또는 그리스식 외투를 입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1세기 유대인의 종교적 현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유대 율법에 따라, 예수는 일반 유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칮칮(tzitzit)이 달린 옷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수기 15:38 및 신명기 22:12에 따르면, 유대 남성들은 옷 네 모퉁이에 술(tzitzit)을 달도록 명령 받았으며, 이는 계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삶에 새기기 위한 표지였습니다.

2. 탈릿(Tallit)의 형태와 역사

탈릿은 유대교 전통에서 기도용 숄(prayer shawl)로 자리 잡았으며, 다음 두 가지 주요 형태로 나뉩니다:
 
• 탈릿 카탄 (tallit katan): 작은 탈릿. 일반적인 속옷 또는 겉옷 아래에 착용하며 tzitzit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신실한 유대 남성은 이 옷을 매일 착용합니다.
• 탈릿 가돌 (tallit gadol): 아침 기도(샤하릿, Shacharit), 안식일, 그리고 욤 키푸르(Yom Kippur) 같은 주요 절기에 사용하는 큰 기도 숄로, 겉옷 위에 걸쳐 입습니다.
 
탈릿은 베게드(beged)라고 불리는 천으로 만들어지며, 보통 면이나 양모가 사용되나, 특별한 경우에는 실크로 만들기도 합니다. 탈릿의 네 모서리에 칮칮(tzitzit)이 부착되며, 이 실에는 고유의 매듭 방식과 흰색 및 파란색 실(tekhelet)이 포함됩니다.

3. 예수님의 탈릿 착용 여부

예수님이 나오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우리는 탈릿을 두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성으로서, 율법에 따라 tzitzit가 부착된 탈릿을 착용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도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는 장면이 반복되며(마 9:20, 눅 8:44, 막 6:56), 이는 그의 tzitzit를 만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대교 배경에 비추어 가장 타당합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경건한 유대 남성은 아침 기도(Shacharit), 낮 기도(Minchah), 저녁 기도(Ma’ariv)를 드릴 때 탈릿 가돌(Tallit Gadol)을 입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기도나 절기의 경우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직접적 언급은 없지만, 간접적인 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마태복음 6:6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 탈릿은 개인적 기도의 골방 역할을 하며, 유대인들은 이를 머리 위로 덮고 쉐키나(שכינה,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 탈릿을 머리 위로 덮고 기도하는 모습은 오늘날까지 정통 유대인들에게 남아 있는 기도 관행이며, 예수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 누가복음 22:39–46 겟세마네 기도 장면에는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내용은 있으나 탈릿을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 전통상으로는 탈릿을 두르고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그 전통을 지키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4. 겟세마네 동산 기도: 탈릿을 두르셨는가?

겟세마네는 유월절 전날 밤으로, 매우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유대 남성은 이 절기 동안에는 특히 율법적 정결과 기도에 더 철저하였으며, 기도 시 탈릿을 착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였습니다. 복음서가 직접적으로 “탈릿을 입으셨다”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유대인으로서의 종교적 삶과 문화를 고려할 때, 겟세마네에서 탈릿을 두르고 머리를 덮고 기도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5. 요한복음 13:4–5 —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때 사용한 수건은 무엇인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요 13:4–5)
 
여기서 사용된 수건은 헬라어로  “렌티온 (λέντιον, lention)”이며, 이것은 servant towel (종이 허리에 두르는 수건)을 의미합니다. 이는 탈릿(tallit)이 아니라 일상 노동용 또는 손님을 접대할 때 발을 씻기는 데 사용하는 일반 수건입니다. 당시 중동 지역에서는 집에 들어올 때 하인이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역할을 하셨다는 점은 ‘종의 자리’에 자신을 두셨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탈릿은 경건함과 기도, 율법의 기억과 관련이 있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취하신 도구는 일상의 겸손함과 섬김의 표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탈릿을 머리에 두르고 기도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율법과 기도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임재 아래 머물기 위한 상징으로 탈릿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때 사용한 수건은 전혀 다른 실용적 도구로, 기도 탈릿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6. 바울(Paul)과 탈릿 그리고 텐트메이커

바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의 유대인으로, 가말리엘 문하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행 22:3, 빌 3:5). 그는 율법 준수를 강조하며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밝히고 있으므로(빌 3:5), 율법에 따라 tzitzit이 달린 탈릿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도행전 18:3에 따르면 바울은 “장막 만드는 자”(σκηνοποιός, skēnopoios)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스케네(σκηνή)”는 ‘장막(tent)’ 혹은 ‘거주 천막’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동식 천막을 제작하고 그의 선교 활동을 지원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단어가 단지 유목민 텐트를 뜻하기보다는 기도용 숄(Tallit)을 포함한 특수 직물 제작자일 수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작은 탈릿보다 큰 탈릿 두개에 막대를 세우면 임시용 천막이 되기에 일부 학자에 따라 바울이 이러한 천막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고고학자들과 유대 랍비 전통 일부에서는 바울이 텐트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탈릿이나 tzitzit 제작자, 즉 “Prayer garment artisan”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와 기독교 고대 전문가들은 skēnē(“천막”)가 기도 숄(탈릿)과 같이 직물로 만든 의복을 포함할 수 있으며, 기둥이나 가장자리를 임시 천막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동식 천막이 탈릿일 가능성은 유대인 의복의 휴대성과 다용도성을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휴대용 직물 품목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특히 문화적 적합성 여행을 위한 실용적인 무역 탈릿 제작은 유대교 의식 및 일상생활과 일치합니다.  바울의 교육 세속적인 장인 정신 종교적 의복은 바리새파와 할라카 전통을 만족시키는데 그 이유는 랍비 유대교에서는 세 교육을 마친 후 반드시 직업을 갖도록 하는 바리새적 교육 철학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행 22:3; 빌 3:5).

7. 탈릿 착용의 나이와 시기

Tallit katan은 보통 유대 남자 아이들이 3세 전후부터 착용하기 시작하며, 평생 착용합니다. Tallit gadol은 전통에 따라 다르며, 일반적으로 Bar Mitzvah (13세) 이후 착용하기 시작합니다. 아슈케나지 공동체에서는 결혼식 이후 착용하는 전통이 강합니다. Sephardic 공동체는 더 어린 나이부터 착용을 허용하거나 권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의 행동은 단순한 병자 치유 요청이 아니라, 당시 유대 율법과 메시아적 기대 속에서의 상징적 고백이자 행위였습니다. 이 사건은 신명기와 민수기에 명시된 tzitzit의 신학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서구 번역과 신학은 이러한 히브리어적 배경과 랍비 전통을 간과함으로써, 본문이 담고 있는 더 깊은 메시야적 상징성과 율법적 함의를 놓치게 됩니다. 따라서 원어와 유대교 전통에 입각한 본문 해석은 신약을 더욱 풍성하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히브리어 ‘옷자락’: Kanaf(כָּנָף)와 Tzitzit(צִיצִת)>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고 번역되지만, 이때 헬라어 “κρασπέδου” (kraspedon)는 일반적인 옷자락이 아니라, 민수기 15장과 신명기 22장의 ‘술’(tzitzit)을 의미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깊은 의미는 종종 서구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축소되거나 오해되기 쉽습니다. 특히 신약 성경의 본문을 해석할 때 중요한 구약 히브리어 단어들이 본래 지닌 신학적 함의가 무시되거나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세 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카나프 (כָּנָף, kanaf)

영어 성경에서는 흔히 corner, hem, edge, 혹은 wing으로 번역됩니다. 문자적으로는 ‘날개’ 또는 ‘끝’, 성경에서는 옷의 ‘자락’, ‘덮음’, ‘보호’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kanaf는 단지 의복의 끝자락이 아니라, tzitzit가 달리는 곳이며, 이는 하나님의 명령과 언약을 기억하도록 명시된 장소입니다. 말라기 4:2에서는 “공의로운 해가 그 날개(kanafav)에 치유를 가지고 떠오르리니”라고 선언되며, 이 표현은 메시아적 보호와 치유의 상징으로도 이해됩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은 이러한 상징을 거의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옷자락”(룻기 3:9), 혹은 “모퉁이, 구석”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kanaf는 하나님의 언약적 보호와 권위의 상징입니다. 이런 상징성은 번역에서 빠지기 쉬우며, 결과적으로 ‘날개’ 또는 ‘옷자락’이라는 표면적 의미만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칮칮(צִיצִית, tzitzit)

영어에서는 보통 fringe 또는 tassel로 번역되며, 단순히 장식적인 술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민수기 15:38–40에 따르면 tzitzit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지키게 하기 위한 율법적 기호입니다. 이 단어의 번역에서 그 신성하고 율법적인 목적이 생략되면, 그것은 단지 외적 복식 요소로 격하되고 맙니다.
 
영어 성경에서 보통 “tassel”, “fringe”, “decorative cord” 등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민수기 15:38–39와 신명기 22:12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순종하기 위해 반드시 의복 네 모서리에 달아야 하는 율법적 요소입니다. 그러나 서구 번역은 이를 단순 장식용 술(tassel) 정도로 간주함으로써, 이 율법적 상징성—즉 하나님의 계명을 항상 눈에 두고 기억하라는 상징—을 축소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3. 베게드(בֶּגֶד, beged)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옷’, ‘의복’이라는 뜻이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beged가 종종 율법적 또는 제의적 규정의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 성전 내 의복 규례, 또는 제사장의 복장과 같이 단순한 옷 이상의 함의를 가집니다. 하지만 영어 번역에서는 주로 “garment” 또는 “outer garment”로만 번역되어, 율법적 함의를 갖는 문맥이 사라지고 일반적인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옷자락’이라는 단어가 유럽어에서는 다양한 단어로 번역되며 원어의 메시아적, 율법적 배경이 지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 영어 NIV: “cloak”
• 라틴어 불가타: “fimbria vestimenti”
• 독일어 루터역: “Gewand”
• 프랑스어: “vêtement”
• 현대 일본어 성경: “衣の端” (이노하시, 옷의 끝)
 
→ 대부분 tzitzit 혹은 kanaf라는 개념은 설명 없이 누락되며, ‘단순한 옷’으로 환원됩니다.
 
이처럼 히브리어 성경에서 ‘옷자락’ 또는 ‘끝단’을 지칭하는 가장 중요한 두 단어는 특히 말라기 4:2에서 메시아에 대한 상징으로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그 날개(כְנָפֶיהָ)에는 치료하는 능력이 있으리라”고 할 때, ‘날개’는 ‘kanaf’로, 메시아의 tzitzit을 지칭한다고 보는 랍비 해석이 많습니다. 이 여인이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댔다는 것은 단순히 옷에 손을 댄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권위’를 상징하는 tzitzit, kanaf에 믿음을 가지고 다가갔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히브리어 원어를 본래의 성경적·언약적 맥락 안에서 읽는 것은 텍스트의 깊은 신학적 구조와 예수님의 가르침 및 행동의 의미를 회복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잘못된 번역이 신학적 오독을 낳을 수 있기에, 히브리어 단어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은 단순한 언어학적 작업을 넘어 해석학적·신학적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구약은 신학적으로 메시아가 ‘날개(kanaf)’ 아래에서 백성들을 덮고 보호할 것이라 하며, 이와 같은 표현은 시편, 말라기, 에스겔 등 여러 구절에서 반복됩니다. 그러나 서구 번역자들은 헬라어와 라틴어 번역의 유산을 따라 그것을 문자적 외피로 전환하였고, 메시아적 상징은 신학적 해석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 문제를 넘어 신학의 틀 자체를 바꿔 놓은 문제이기도 합니다.

<‘Niddah’와 여성 정결법에 대한 오독: 정결, 금기, 신성의 재해석>

마가복음 5장의 사회적 맥락: 12년 혈루증 여인의 ‘부정함’
 
마가복음 5장 25–34절은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당시 유대교 할라카(Halakha)의 기준에 따르면, 여인은 단순한 병자가 아니라 ritually impure (부정한) 상태였습니다. 레위기 15:19–30은 niddah(נִדָּה) 규례를 통해 이 문제를 명시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의학적 질환이 아닌 제의적, 공동체적 경계 위반의 문제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여러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막 5:26)
이 여인은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사회적·종교적으로 배제된 자였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옷을 만지는 행위로 정결법을 위반할 위험을 감수했고, 이는 공동체를 ‘오염시킬 수 있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의법과 정결법은 단순한 종교 의례를 넘어, 공동체의 질서와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를 유지하는 신학적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히브리어 용어들이 영어와 그 외 유럽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깊은 의미가 축소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Niddah’는 단순히 생리 중인 여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용어는 히브리어 ‘nadad’(흩어지다, 멀어지다)에서 유래하여 제의적 경계, 신성과 속됨의 구분, 질서의 보호라는 기능을 갖습니다.
 
레위기와 민수기 등 구약의 율법서에는 정결과 부정에 대한 다양한 규정이 등장하며, 이는 단순한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응답이자 공동체 안에서의 제의적 경계를 형성하는 신학적 구조입니다. 특히 여성의 생리적, 의학적 상황과 관련된 다음 세 용어는 그 함의가 매우 깊습니다:

1. 니다, (נִדָּה, niddah) 

“니다”는 문자적으로 ‘분리됨(separation)’ 또는 ‘밀쳐짐’이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주로 여성의 정상적인 생리 주기와 관련되어 사용되며, 이는 레위기 15장과 18장, 에스겔 36:17 등에 등장합니다. Niddah는 단순히 ‘월경 중인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일정 기간 분리되어야 할 의무와 함께 제의적 부정을 상징합니다. 이는 죄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생명력 주기에서 나타나는 의례적 경계이며, 성전 접근 금지 등 여러 제한이 동반됩니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단지 의학적 상태 이상의 복합적 사회·정결·종교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유대 공동체에서 niddah 상태는 가정, 제의, 성생활 등 공동체 질서 전반에 영향을 주는 요소였으나, 영어 번역에서는 이러한 맥락이 대부분 사라집니다.

2. 자바(Zavah, זוָה)

“자바”는 여성에게서 비정상적으로 지속적인 출혈(레위기 15:25–30)을 의미합니다. Niddah가 정상적인 생리 상태와 관련된다면, Zavah는 병리적이거나 비정기적인 혈루와 관련되어 더 강한 제의적 부정 상태를 형성합니다. 이 단어는 특히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그녀는 단순히 부정한 여성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 있던 자였습니다.

3. 투마(Tumah, טֻמְאָה)

“투마”는 부정 그 자체, 즉 “부정성(impurity)”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개념어입니다. 이는 단지 특정한 의례적 규칙 위반이 아니라, 죽음이나 생명력 상실과의 접촉, 또는 생명과 관련된 경계 상태로부터 오는 전반적인 ‘하나님의 거룩함과의 거리’를 의미합니다. Tumah는 Niddah나 Zavah와 같이 구체적 사례에서 파생된 개별적 부정 상태를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성소에 접근하거나 공동체 예식에 참여하기 전 정결의 과정을 요구합니다.
 
이 세 용어는 모두 고대 이스라엘의 제의와 일상생활에서 정결과 거룩함,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개념입니다. 특히 신약에서 예수께서 이러한 부정 상태에 있는 사람들—예를 들어 Zavah 상태에 있는 혈루증 여인—에게 직접 다가가고, 오히려 정결케 하시는 장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정결법 자체를 재정의하는 신학적 전환점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처럼 히브리어 원어의 정확한 이해는 성경 본문 해석에 깊이를 더해 줍니다.
 
레위기 15장과 탈무드 Niddah tractate는 이러한 정결법이 단순한 위생 규범이 아닌, 하나님 앞의 성별된 공동체 질서 유지를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관점은 여성을 비하하기 위한 규범이 아닌, 성스러움과 생명에 대한 경외의 체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결법이 문자적으로 해석되고 강화될 때, 여성은 ‘위험한 존재’ 또는 ‘공동체 정결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었고, 이는 마가복음의 이야기에서 이 여인이 얼마나 사회적 금기를 넘었는지를 드러냅니다.
 
서구 번역자들은 ‘niddah’를 ‘unclean’, ‘impure’로 번역했지만, 그 안에 담긴 종교적 상징성, 공동체 경계, 생명 신학은 거의 번역되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대표적인 세 가지 히브리어 용어에 대한 분석입니다:
 
1. נִדָּה (Niddah) – 일반적으로 영어 성경에서는 “unclean woman(부정한 여자)”로 번역되며, 월경 중인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 niddah는 단순히 ‘부정’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제의적 분리(separation)’를 의미하며, 이는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을 보호하려는 제도적 기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unclean’으로 번역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공동체적 신학이 사라지게 됩니다.
 
2. זוָה (Zavah) – 영어로는 보통 “discharge(유출)”로 번역되지만, 이는 매우 일반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어 zavah는 정상이 아닌 병리적 유출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이 지속될 경우 제의적 ‘부정함의 연속성’을 갖습니다. 이 용어는 레위기 15장에서 상세히 다루어지며, ‘질병’으로서의 의학적 판단과 ‘부정함’이라는 제의적 판단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단순히 ‘discharge’라고 번역될 경우, 그 신학적 무게는 거의 사라집니다.
 
3. טֻמְאָה (Tumah) – 흔히 “impurity(부정)”로 번역되지만, 이 역시 매우 제한적인 표현입니다. Tumah는 단순한 도덕적 불결함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 성결과 부정 사이의 전이적 상태를 지칭하며,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공간(예: 성전)과의 단절을 뜻합니다. 따라서 tumah는 정결 예식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주는 핵심 개념입니다. 단순한 ‘impurity’는 그 복합적 신학 구조를 담기에 너무 평면적인 번역입니다.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는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해석과 기독론, 공동체 윤리의 문제로까지 확장됩니다. 신약에서 예수께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신 사건은, 이 용어들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단순한 치유 기적으로만 오독되기 쉽습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회복은 곧 신학적 깊이의 회복입니다.
 
‘부정한(unclean)’이라는 단어는 성경 번역사에서 사회적 낙인을 강화시켰고,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신학적 정당화에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며 공동체로 복귀시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
 
이는 단순한 육체의 치유가 아니라, 율법이 배제한 자를 다시 포용하는 메시아적 회복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이 ‘자비’(חֶסֶד, chesed)와 ‘회복’임을 드러내며, 오히려 율법을 재해석하고 성취하신 셈입니다.
 
“그 옷에 손을 대니 곧 혈루 근원이 마르매…”
여인의 병이 나은 것은 단순히 tzitzit을 붙드는 것이 단순한 기적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과 메시아의 치유 능력이 만나는 접점임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말라기 4:2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그 날개(kanaf)에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예수님은 단순한 기적을 베푼 것이 아니라, 율법과 예언자들의 언약을 자신의 몸으로 성취하고 계셨습니다.

<몸과 공동체의 회복: Niddah와 정결법과의 관계>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병치유를 넘어서 사회적 회복과 종교적 경계 허물기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단지 고통받는 개인이 아니라, 랍비 유대교의 정결 규례에 의해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존재였습니다. 그녀의 병은 육체적 고통일 뿐 아니라, 율법과 문화 속에서 ‘부정’(טָמֵא, tamé)의 상태로 규정된 지속적 고립이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Niddah(נִדָּה, 월경기 여인)에 대한 유대교적 이해를 토대로, 신약 본문이 어떤 급진적 전환을 이루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Niddah는 레위기 15:19–30에 근거한 정결 규례로, 여성의 생리 기간과 관련된 의식적 부정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인이 유출을 하여 그 몸에 피가 있으면 칠 일 동안 부정할 것이요… 누구든지 그것에 닿으면 부정할 것이며…”
 
이 규정은 ritual impurity (טֻמְאָה, tum’ah)에 속하며, 도덕적 죄가 아니라 성전 접근과 공동체 예배 참여에 제한을 두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주는 법적·사회적 규제로 작용하였습니다.
 
• Niddah는 배우자와의 성관계 금지, 타인과의 접촉 회피, 식사 공동체 참여 금지 등 일상생활에 중대한 제약을 동반했습니다.
• 특히 유출이 7일 이상 지속되면 “Zavah Gedolah”(큰 유출)로 분류되며, 성전 정결 제사와 더 엄격한 규례가 필요했습니다 (레위기 15:25–30).
 
혈루증을 12년이나 앓은 여인은 단순한 Niddah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Zavah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사실상 영구적인 공동체 격리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1. 부정함에 손을 대신 예수님

랍비 전통에 따르면,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은 정결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만듭니다.
“부정한 것은 정결한 자를 오염시킬 수 있으나, 정결한 자는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할 수 없다.” (Mishnah, Kelim 1:6)
하지만 예수는 이 질서를 거꾸로 뒤집으십니다. 여인이 예수의 tzitzit에 손을 댔을 때, 그는 부정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정결법의 신학적 전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그 율법의 목적과 중심을 드러내며 완성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7). 예수에게 있어서 정결은 외적인 규례가 아니라, 치유와 회복,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2. Niddah와 신학사에서 나타난 번역들

Niddah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ἀκάθαρτος (akathartos, “부정한”) 혹은 단순한 “bleeding”으로 번역되며, 그 율법적·사회적 함의는 거의 소실됩니다. 서구 독자들은 이 여인을 ‘피를 흘리는 병자’ 정도로 이해하지만, 유대 공동체 안에서 그녀는 종교적으로 추방된 자였으며, 가족과 사회로부터 고립된 자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 속 히브리어 정결 용어는 단순한 질병 묘사를 넘어 제의적, 공동체적, 신학적 맥락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서구어 번역 과정에서는 그 복합성과 율법적 무게가 축소되거나 제거되어 본문의 의미가 오독될 위험이 큽니다. 대표적인 두 용어를 아래와 같이 분석할 수 있습니다:
 
1. נִדָּה (Niddah) – 히브리어 niddah는 ‘제의적으로 부정한 상태에 있는 여인’을 지칭하며, 레위기 15장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여성은 성전에 접근할 수 없고, 공동체 예배에서 격리됩니다. 그러나 서구 성경에서는 흔히 “bleeding woman” 또는 “unclean”으로 번역됩니다. 이러한 번역은 단지 신체적 질환 또는 청결 문제로 축소시켜, 율법적 격리 규정, 성소 접근 제한, 그리고 공동체와의 단절이라는 신학적 무게를 놓치게 만듭니다.
 
2. זוָה (Zavah) – 이 용어는 비정상적이고 장기적인 유출을 겪는 여성을 의미하며, 일반적인 생리 기간을 넘는 경우로 구분됩니다. Zavah는 단순히 출혈하는 환자가 아닌, ‘지속적 부정 상태에 있는 자’로서 성전과 공동체로부터의 철저한 격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에서는 보통 “hemorrhaging woman(출혈하는 여인)”으로 표현되어, 유대 율법 안에서의 의례적 정결 문제와 공동체 질서 파괴의 문제를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번역상의 함의 상실은 단지 언어의 차이로 그치지 않습니다. 신약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러한 여성들과 접촉하신 사건은 단순한 병 고침이 아니라, 율법적 금기를 돌파하고 공동체와의 단절 상태를 회복시키는 메시아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원어의 정확한 이해는 예수의 사역을 제대로 해석하는 신학적 열쇠가 됩니다.
 
이로 인해 서구 설교와 주석에서는 종종 이 여인을 “불쌍한 병자”로만 그리며, 예수님이 오히려 사회적 금기를 어긴 위대한 치유자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유대적 배경에서 예수는 단순한 금기 파괴자가 아니라, 율법의 핵심을 선포하는 메시아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3. 몸의 회복, 공동체의 회복

치유는 단지 육체의 회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여인은 병 나음과 동시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 5:34)는 선언을 듣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3중 회복을 의미한다:
 
1. 신체의 회복 – 혈루 근원이 마름
2. 정결 회복 – 성전에 접근 가능한 존재가 됨
3. 공동체 회복 – 다시 가족과 이웃의 일원이 됨
 
예수는 단순히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niddah의 정결법 아래 사회적으로 추방되었던 여인을 이스라엘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율법이 지향하는 회복과 공동체의 본질을 그의 몸으로 실현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립되었던 여인을 복음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정결함보다 사랑이 먼저이며, 법보다 생명이 우선임을 선언하십니다.
 
이 사건은 niddah와 정결법이 단순한 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임을 알려주며, 그 거룩함은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으로 초대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아가다와 미드라쉬로 본 여인의 믿음: 랍비 전승과 예수의 해석 방식>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가복음 5:34)
 
이 말씀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예수의 해석 방식—신적 통찰로 중심을 꿰뚫고 본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말도, 기도도, 경배도 없이 접촉만으로 믿음을 표현했고, 예수는 그 행위를 통해 그녀의 믿음을 알아보셨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예수님의 인식 구조가 랍비 유대교 내 아가다와 미드라쉬 전통과 어떻게 연결되고,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1. 아가다적 전통: 믿음은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아가다(Aggadah)는 랍비 문헌에서 율법(Halakhah)과 대조되는 내러티브, 비유, 설화, 윤리적 가르침을 담은 문학 형태입니다. 여기에는 믿음, 지혜, 하나님 사랑, 회개 등이 다양한 우화와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예를 들어, Babylonian Talmud, Berakhot 5a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승이 전해집니다:
“의인은 고통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고통을 통해 정금같이 연단된다.”
 
이러한 내러티브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되는 구조는, 예수 시대에도 회당에서 낭독되고 전수된 신앙 교육의 일부였습니다. 여인의 병은 연단된 믿음의 상징이 되었고, 예수는 그 내러티브를 몸소 읽고 해석하며,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2. 미드라쉬적 해석: 은유와 상징 속 믿음의 힘

미드라쉬(Midrash)는 성경 본문에 대한 랍비적 해석 전통이며, 은유와 상징, 유추 등을 통해 본문을 “다층적으로” 해석합니다. 믿음은 종종 ‘붙잡음’, ‘접촉’, ‘닿음’의 상징으로 표현됩니다.
“그분의 날개 끝을 잡는 자는 그분의 보호 아래 거한다.” (Midrash Tehillim 91:4)
 
랍비적 전통에서는 말라기 4:2의 “치유의 날개”를 메시아적 징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 미드라쉬 테힐림(Midrash Tehillim) 146:8에서는 여호와의 긍휼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며, 병자를 치유한다는 맥락에서 메시아의 치유 능력이 율법을 따르는 자에게 임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 랍비 엘리에제르의 전승(Pirkei DeRabbi Eliezer 29장)에서는 메시아가 율법을 온전히 이행한 자로 묘사되며, 그의 tzitzit에 신적 능력이 깃들어 있다는 랍비적 상징이 언급된다.
 
이러한 미드라쉬 해석은 신약복음서, 특히 마가복음 5장과 마태복음 9장에서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κράσπεδον, kraspedon)을 만져 치유받는 사건에 깊은 유대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녀는 예수의 tzitzit을 메시아의 kanaf로 믿고 만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혈루증 여인은 kanaf—예수의 옷자락을—붙잡음으로, 문자 그대로 메시아의 날개를 붙잡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는 말라기 4:2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서 “치유하는 광선”은 종종 메시아의 옷자락 끝에서 흘러나온다고 해석되었습니다 (Targum Jonathan on Malachi 4:2).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이 전통 위에서 해석하며, 그녀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믿음으로 따른 것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3. 쿰란 (Qumran) 문서 4QMMT와 정결법의 강조

Qumran 공동체(에세네파)의 문서인 4QMMT (Miqsat Ma’ase Ha-Torah, “율법의 어떤 행위”)는 제2성전기 유대교 할라카 전통이 정결/부정의 경계를 얼마나 엄격히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문헌입니다. 이 문서는 레위기 11–15장을 중심으로, 부정한 자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합니다:
 
“사람이 부정에 닿았거나 피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와 접촉했을 때, 그는 회중에 들어올 수 없다… 성소의 도구들조차 간접 접촉으로 부정해질 수 있다.” (4QMMT C 27–31)
 
이러한 문맥 속에서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접촉은 공동체 할라카상 큰 위반이며, 예수께서 이러한 부정한 접촉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치유로 반전시키셨다는 것은 Qumran의 할라카 관점에서 보면 전복적 행위입니다. 즉, 예수님의 행동은 Qumran과 랍비 유대교의 공통된 정결 패러다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거룩이 오히려 부정을 삼키고 정화하는 능동적 거룩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4. 말보다 행동: 비유를 해석하는 방식의 전환

랍비 유대교에서는 비유와 이야기의 해석이 학문적 토론과 질문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비유를 해석할 때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녀는 어떤 공식적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녀는 율법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외면받던 존재였습니다.
• 그러나 그녀는 침묵 속에 다가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행위를 단순한 ‘접촉’으로 보지 않고, 믿음의 고백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이는 미드라쉬의 다층적 해석 전통과 유사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그 해석을 현실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예수의 방식은 더욱 급진적이었습니다.

5. 믿음의 선언, 정체성의 회복

예수님은 여인을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유대 전승 내에서도 매우 특별한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딸’은 이스라엘 백성, 혹은 지혜를 따르는 자로 사용됩니다 (cf. Proverbs 1:8; Lamentations 2:13). 여기서 예수님은 여인의 신분을 다시 선언하십니다:
 
• 사회적으로 추방당한 자 → 하나님의 딸
• 부정한 몸 → 믿음으로 정결한 자
• 율법에 갇힌 자 → 해석을 통해 자유롭게 된 자
 
예수의 해석은 단지 텍스트의 주해가 아니라, 삶의 선언이며 존재론적 회복입니다.

6. 아가다적 예수, 미드라쉬적 메시아

예수님은 아가다의 이야기꾼이자, 미드라쉬의 해석자이셨습니다. 그는 단지 병을 고친 치유자가 아니라, 율법과 전승을 새롭게 해석하고 실현하는 말씀의 성육신(로고스)이었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단지 한 여인의 치유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랍비 전통 안에서 어떻게 급진적 메시지를 구현하셨는지를 봅니다. 그분의 말 없는 해석, 그녀의 말 없는 고백,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믿음의 언어는 오늘날 우리가 신약 성경을 랍비 문헌의 배경 속에서 재해석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말라기 예언의 성취와 Tzitzit: 예수와 메시아적 상징의 재구성>

말라기 4:2은 유대인 메시아 사상에서 중심적인 구절 중 하나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 그 날개(kanaf)에 치유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여기서 “날개”(히브리어 kanaf)는 단지 새의 날개가 아니라, 탈릿(Tallit)의 네 귀퉁이에 달린 칮칮(Tzitzit)을 가리킨다고 앞서서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 특히 메시아를 기다리던 많은 이들은 “그의 옷자락 끝에서 치유가 흘러나온다”는 이 예언을 문자 그대로, 혹은 신비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 여인은 이 신앙의 맥락에서 예수의 tzitzit를 만졌으며, 이는 단순한 신유 사건이 아니라 메시아 사상과 그 상징의 재구성이었습니다.

1. Tzitzit와 Kanaf: 랍비적 배경

Tzitzit는 민수기 15:38–39과 신명기 22:12에 명시된 규례로, 이스라엘 자손이 옷 네 귀퉁이에 푸른 끈(tekhelet)을 달도록 한 것입니다. 랍비 문헌에서 kanaf는 은유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아래 거함을 뜻합니다 (cf. Ruth 3:9 “당신의 날개로 덮으소서”). 따라서 여인의 행동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메시아의 권위 아래 들어가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혈루증 여인은 그의 옷자락을 만졌고, 예수는 능력이 나간 것을 느끼셨습니다. 이는 말라기 예언의 구현적 성취이며, 신약 내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간접적으로 계시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4:36에서도 사람들이 예수의 옷가 만지기를 구하였고, 만진 자마다 나음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메시아적 기대의 반복적 성취였습니다.

2. 날개와 보호에 대한 재해석

히브리어 kanaf는 문자적으로는 ‘날개’ 혹은 ‘옷자락’, ‘모퉁이’를 의미하는 다층적 개념으로, 구약과 신약에서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내포합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 과정에서 해당 어휘가 지닌 메시아적, 언약적, 보호적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거나 문맥과 분리되어 해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은 대표 본문을 중심으로 분석한 내용입니다. 히브리어 kanaf는 말라기 4:2 외에도 나오는 성경 구절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난함을 상징합니다.
1. 말라기 4:2 (Malachi 4:2)
o 히브리어: kanaf
o 영어 번역: “wings” (NIV, ESV)
o 의미 손실 또는 전환: 영어 성경은 이를 단순히 “날개”로 번역하지만, 본래 히브리어의 의도는 메시아의 옷자락(탈릿, Tallit) 끝단에 있는 tzitzit에서 치유의 능력이 발산된다는 랍비적 해석을 반영합니다. ‘날개’로 번역되며 메시아적 치유 상징성이 희미해졌습니다.
2. 민수기 15:38 (Numbers 15:38)
o 히브리어: kanaf
o 영어 번역: “corners” (KJV), “edges”
o 의미 손실 또는 전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옷단의 ‘모퉁이’(kanaf)에 술(tzitzit)을 달라고 명령하십니다. 단순히 ‘corners’나 ‘edges’로 번역될 경우, 이 구절이 가지고 있는 율법적 기억과 언약적 순종의 상징성이 약화됩니다.
3. 시편 91:4 (Psalm 91:4)
o 히브리어: kanaf
o 영어 번역: “feathers”, “wings”
o 의미 손실 또는 전환: 하나님의 보호를 ‘날개’로 표현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단지 새의 날개를 말하기보다는 성소적 보호와 언약적 피난처를 암시합니다. 이 의미는 번역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4. 룻기 3:9 (Ruth 3:9)
o 히브리어: kanaf
o 영어 번역: “cover me with your cloak”
o 의미 손실 또는 전환: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외투 덮기의 요청이 아니라, 보호와 결혼 언약을 요청하는 전통적인 청혼 표현입니다. 영어 번역은 이 함축적 의미를 생략한 경우가 많습니다.
5. 마태복음 9:20 (Matthew 9:20)
o 헬라어: kraspedon
o 영어 번역: “fringe” (ESV), “edge” (NIV)
o 의미 손실 또는 전환: 혈루증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행위는 민수기 15:38과 말라기 4:2의 메시아적 치유 예언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은 단순한 ‘술’(fringe)로 처리되어, 그 상징성이 약화되며 예수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연결된 상징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kanaf와 관련 어휘들은 단지 외형적 표현이 아니라, 언약, 보호, 치유, 신적 권위 등 깊은 신학적 층위를 내포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번역본에서는 문맥이나 신학적 함의를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 번역에 그쳐 본문의 핵심 메시지가 축소되거나 왜곡될 수 있습니다. 원어의 맥락을 회복하는 것은 단순한 언어적 작업을 넘어,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해석을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열쇠가 됩니다.
 
이러한 전통을 예수는 자기 몸으로 구체화하셨습니다. 그는 예언자도, 왕도, 율법 교사도 아닌 구약의 메시아적 이미지 전체를 자신의 몸과 사역을 통해 구현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tzitzit는 단순한 유대 남성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의 완성, 메시아적 권위, 말라기 예언의 성취, 하나님의 보호 아래 들어오는 은총의 통로였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손끝에서 발현된 이 사건은, 메시아적 상징들이 실체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사건을 기적 내러티브로만 소비하지 말고, 유대적 상징과 메시아 사상 속에서 재조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단지 기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전통이 어떻게 예수 안에서 충만히 성취되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율법, 여성 — 랍비 유대교와 복음서 해석을 다시 읽다>

1. 히브리적 문맥으로 복음서를 다시 읽다

복음서를 히브리어적 뿌리와 랍비 유대교적 문맥 속에서 읽는 시도는 단지 “성경의 깊이를 더하는 학문적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활동하셨던 실제 역사적·문화적 세계를 복원하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이 던진 급진적 의미와 도전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2성전기 유대교, 특히 할라카 중심의 종교 규범과 제의적 정결의 세계 속에서 활동하셨고, 여성, 이방인, 병자, 죄인과 같은 주변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도주의가 아니라, 율법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메시아적 개혁이었습니다.

2. 예수, 랍비 전통의 재해석자로서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마 5:17). 이 말씀은 그분이 율법의 외형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본질과 목적을 다시 회복하셨음을 뜻합니다. 특히 여성의 정결 규례(niddah), 병자에 대한 접촉 금지, 안식일 규례에 대한 예수의 해석은 당시 랍비적 전통의 안에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재해석의 사례로 보아야 합니다.
 
혈루증 여인의 사례는 그러한 예수의 해석학의 결정적 예시입니다. 그녀는 율법적 부정자였으나, 믿음으로 메시아에게 다가갔고, 예수님은 그녀를 “딸아”라고 부르심으로써, 율법의 외형보다 믿음과 관계의 회복이 본질임을 선언하셨습니다.

3. 공적 공간과 여성의 위치 전복

1세기 유대사회에서 여성이, 특히 niddah 상태의 여성이 공적 공간에 들어온다는 것은 파문 혹은 사형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여인을 질책하기는커녕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메시아의 선언을 합니다. 이 장면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신학적 반전이 담겨 있습니다:
 
• 공간적 반전: 성전이 아닌 길거리에서 정결과 구원이 선언됨
• 권위의 반전: 율법의 제사장이 아닌 예수가 정결 여부를 선언함
• 사회적 반전: 부정한 여인이 하나님의 자녀(“딸”)로 선포됨

4. 랍비 유대교의 긴장과 서구 신학의 축소

1세기 랍비 전통에서는 여인의 신체, 부정, 정결을 철저히 구분했습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예수의 행위는 종교 질서의 전복이며, 메시아에 대한 신학적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서구 신학은 이 본문을 ‘믿음의 본보기’ 혹은 ‘예수의 능력 전시’로만 해석하며, 그 안의 유대적 구조와 파격성을 놓쳤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사건은 구약 율법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 기대를 구현하며, 정결의 주체로서 예수를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병의 치유가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종말론적 왕국 도래의 신학적 사건입니다. 여인의 손은 tzitzit를 만졌지만, 그녀의 영혼은 메시아의 날개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정결과 부정의 신학: 구약과 랍비 문헌의 전통 속에서>

1. 정결 규정의 뿌리

구약의 정결법은 단순한 위생 규칙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언약적 규정이었습니다. 레위기 전체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는 선언으로 귀결됩니다. 정결과 부정은 물리적 상태를 넘어, 신적 임재 앞에서의 인간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근본 틀이었습니다.

2. 레위기 15장의 구조

레위기 15장은 성적 유출과 월경으로 인한 부정을 자세히 규정합니다. 여성의 경우, 유출이 지속될 경우(혈루증), 그녀는 매일을 부정한 상태로 간주 받으며 다음의 규례가 적용됩니다:
 
• 접촉한 자도 부정하게 되며
• 그녀가 앉거나 눕는 자리도 부정하며
• 7일 간 정결 기간 후에 제사를 드려야 회복됩니다
 
즉, 이 규정은 ritual impurity의 일환으로, 제의 참여의 자격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였습니다.

3. 부정의 전이와 사회적 경계

“접촉(נגע, naga‘)”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제의적 전이 행위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혈루증 여인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행위는 사회적, 종교적 금기를 동시에 넘는 행위였습니다.

4. 랍비 문헌과 정결 관념

미쉬나와 토세프타의 Niddah 규정
 
• M. Niddah 4:1: “한 여인이 혈루증으로 고통받는다면, 매일 밤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하며…”
 
• Tosefta Niddah 2:3: “그녀가 성전 지역에 들어오거나, 정결한 자를 만진다면, 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 시대 유대교 내 구전된 규범들이 여인의 행위를 중대 위반으로 여겼음을 보여줍니다.
탈무드의 해석
 
• b. Shabbat 13a: “혈루 여인은 단지 의례적 부정이 아니라, 죄인으로까지 간주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실제 현실에서 여인이 얼마나 배제되고 소외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5. 치유와 정결의 패러다임 전복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한 전체 구조를 전복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눅 8:48)
 
이 선언은 다음의 세 가지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 정결 선언의 주체가 제사장이 아닌 예수
• 성전이 아닌 공공 장소에서의 정결 선언
• 율법 규범을 넘어선 은혜 중심의 구원 선포
 
예수님은 기존 율법의 구조를 파괴하거나 무효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본질적 목적(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을 급진적으로 드러냅니다.

<회복의 공동체와 여성의 신분 회복: 혈루증 여인 사건의 사회적 신학>

12년간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단지 병든 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랍비 유대교의 규례에 따라 종교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완전히 ‘경계 밖’의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지 육체적 회복이 아니라, 그녀를 공동체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신분 회복의 선언이었습니다.

1. 랍비 유대교와 여성: 부정, 침묵, 주변화

여성과 Niddah 규정
 
레위기 15장에 따르면, 생리 기간 또는 장기적인 출혈을 겪는 여성은 부정한 자(טָמֵא, tame)로 간주되며:
 
• 침상과 앉은 자리는 모두 부정함
•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금함
• 제사와 성전 출입이 금지됨
 
탈무드와 여성의 위치
 
• 탈무드 b. Berakhot 24a: “여성의 목소리는 음탕함이다”(קול באשה ערוה)
• Mishnah Kiddushin 1:7: “여성은 율법을 배울 의무가 없다”
 
이러한 규범 속에서 여성은 종교적 권리 주체가 아닌, 법적으로는 수동적 객체로 존재했습니다. 12년간의 출혈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추방의 삶을 의미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은 단순한 질병 이상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유대 사회 전반의 구조 안에서 다층적인 고립과 소외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종교적으로, 그녀는 성전에 접근할 수 없었고, 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는 그녀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도 멀어졌다고 여겨지는 심각한 제의적 단절을 의미합니다.
 
가족적으로, 그녀는 결혼과 임신이 불가능했고, 심지어 가정 내에서도 ‘부정한 자’로 여겨져 고립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오랜 치료를 위해 많은 비용을 지출했지만, 오히려 의사들로부터 더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가난을 넘어 희망의 상실을 보여줍니다.
 
정서적으로, 그녀는 수치심과 고립감을 안고 살았으며, 사람들로부터 이름 없이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녀의 삶은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으로 철저히 배제된 상태였으며, 예수님과의 만남은 단지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이러한 모든 영역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이름조차 없이 기록됩니다. 이는 곧 기억에서조차 지워진 자였음을 나타냅니다.

2. 예수님의 선언: “딸아”

예수는 그녀를 “딸아”(θυγάτηρ)라고 부르십니다.
 
• 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부를 때 사용되던 표현(예: “딸 시온”)
• 공동체적 수용과 정체성 회복을 선언하는 메시아의 음성
• 여성의 신분을, ‘부정한 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전환
 
이 호칭은 그녀를 새로운 회복 공동체 안으로 포함시킵니다.

3. 회복 공동체로서의 교회

예수의 사역은 병자와 죄인을 단지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역입니다.
 
초기 교회 안의 여성들
 
•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예수의 사역을 물질로 지원 (눅 8:1–3)
• 사마리아 여인: 예배의 개념 전환 (요 4)
• 마르다와 마리아: 신학적 대화를 나눈 대상
 
이는 유대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존재로서의 인정’이었습니다.
 
바울의 선언 (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혈루증 여인의 회복은 단지 과거의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사회적-신학적 원형이 되었습니다.

4. 유대 공동체와 예수의 회복 공동체 비교 요약

유대 사회에서는 여성은 부정하고 침묵해야 할 존재로 간주되어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공동체에서는 여성을 ‘딸’이라 부르며 회복과 수용의 대상으로 존엄하게 여깁니다. 또한 유대 사회에서 병자와 죄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인식되었으나, 예수의 공동체에서는 그들이 치유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대상으로 변화됩니다. 유대 공동체는 율법, 경계, 정결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예수님의 공동체는 은혜, 회복, 용납을 원리로 삼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5. 부정한 여인에서 하나님의 딸로

혈루증 여인은 단지 병든 자가 아니라, 종교 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소외된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치유보다 먼저 정체성과 신분의 회복을 선포하셨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윤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본받아야 할 것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기적이 아니라, 경계 밖의 존재를 존엄하게 회복시켜 공동체 안으로 다시 초대하는 예수의 방식입니다.

<거룩함과 접촉: 유대 정결법 속 ‘magga(접촉)’와 서구 신학의 오해>

1. 누가 누구를 오염시키는가?

마가복음 5장의 혈루증 여인은 ‘부정한 상태’였기에 타인을 만져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의 몸을 만졌고, 예수님은 오히려 그녀를 책망하지 않고 구원하십니다. 이는 당시 랍비 유대교의 정결법 관점에서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서구 신학은 이를 단순히 ‘은혜로운 접촉’ 또는 ‘기적적 치료’로 해석하지만, 유대교적 정결 규례 안에서는 매우 깊은 율법적·신학적 대전환의 사건입니다.

2. Magga(מַגָּע): 유대 율법에서 ‘접촉’의 개념

1. 정결법의 배경
• 레위기 15장: 유출병(혈루 포함)은 부정한 상태로 간주되며, 접촉 대상도 부정하게 됨
• 접촉에는 두 가지 차원 존재:
 
1. 의도적 접촉 (magga be-kavanah)
2. 우발적 접촉 (magga she-lo be-kavanah)
3. ‘터치(touch)’를 단순한 접촉으로만 해석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용된 주요 개념 중 접촉(Magga), 부정함(Tamei), 정결함(Tahor)은 단순한 물리적 또는 위생적 행위가 아니라 깊은 율법적, 제의적,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이 서구어로 번역되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왜곡되거나 상실되었습니다.
2. Magga (מַגַּע) – 접촉
히브리어로 ‘접촉’은 단순한 터치(touch)가 아닌, 율법상 정결 또는 부정 상태를 전이하는 중요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서구 번역에서는 ‘touch’로 축소되면서 오염성, 제의적 함의가 무시되기 쉬워졌습니다. 영어 성경의 번역은 대개 “touch” 또는 “pressed against”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magga는 단순한 피부 접촉을 넘어 종교적, 의례적 의미가 있습니다.
3. Tamei (טָמֵא) – 부정함
‘Tamei’는 생명으로부터의 거리를 상징하는 제의적·영적 개념입니다. 하지만 영어의 ‘unclean’으로 번역되면서 마치 도덕적 타락이나 불결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쉽습니다. 이는 랍비 유대교의 정결법에서 말하는 구별(set-apartness)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4. Tahor (טָהוֹר) – 정결함
‘Tahor’는 단순히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갈 수 있는 제의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clean’이라는 영어 번역은 위생적 상태(cleanliness)로 전락시키며, 본래의 제사·성소 접근성이라는 신학적 차원을 잃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신약 성경에서 접촉을 통한 정결·부정의 전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큰 혼란을 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에게 접촉 당했을 때의 사건은 레위기의 정결법을 전제로 이해해야만 진정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단순한 ‘기적’이나 ‘감동적인 순간’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의적 질서와 정결법을 넘어서시는 분으로서, 부정함보다 더 크신 정결의 근원이심을 보여주는 메시야적 계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3. 랍비 문헌에서 본 ‘거룩함의 전염’

랍비 전통에서는 보통 부정이 정결을 침범하지만, 메시아의 시대에는 거룩함이 오히려 부정을 정화할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했습니다.
 
• Midrash Tanchuma (Tazria 9): “장차 오실 메시아는 오염된 자를 만지되, 그로 인해 오히려 정결함이 그에게 흐를 것이다.”
• 예수님의 행동은 바로 이러한 예언적 메시아적 전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정결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혈루증 여인은 단순히 병을 고침받은 여인이 아닙니다. 그녀는 율법적 부정함 속에서 메시아를 신앙으로 붙잡음으로써 정결함을 입은 첫 사례이며, 예수님의 거룩함이 당대 율법의 경계를 재정의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터치는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는 선언이며, 정결과 부정의 개념을 메시아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글을 맺으며: 메시아의 날개 아래 회복된 여인>

본 글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의 이야기를 단순한 병 고침의 기적으로 축소시키는 해석에서 벗어나, 히브리어 원어와 랍비 유대교의 정결 법체계, 미드라쉬 전승과 메시아 사상의 맥락에서 재조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는 단지 육체의 치유가 아니라, 정결과 부정, 고립과 회복, 배제와 통합이라는 경계를 넘는 신학적 전환의 사건입니다.
 
레위기와 미쉬나, 탈무드에 따르면 이 여인은 Zavah이자 Niddah 상태로서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존재였습니다. 그녀가 예수의 tzitzit—곧 옷자락의 술, 즉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을 만졌다는 행위는 단지 절박한 시도가 아닌, 메시아에 대한 신앙 고백이며 언약에의 접근이었습니다. 이는 말라기 4:2의 예언, 즉 “그 날개(kanaf)에 치유하는 광선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접촉을 부정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라는 선언으로, 그녀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시고 공동체의 중심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이는 단지 신체적 회복이 아니라, 신학적 정결의 역전이요, 공동체 질서의 재구성이며, 예수의 메시아적 권위의 실현입니다.
 
본 논문은 또한 서구 신학이 오랜 세월 간 오독하고 축소시켜 온 히브리어 단어들—tzitzit, kanaf, niddah, zavah, tumah—의 본래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신약 성경의 깊은 신학적 층위와 랍비 전통 속에 숨겨진 정결법의 본질을 밝혀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드러내시고 성취하셨습니다. 치유는 단지 육체의 일이 아니라, 거룩함의 회복이며, 잃어버린 딸이 아버지의 날개 아래 돌아오는 구속의 서사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독자들은 이 본문을 기적 이야기로 소비하기보다, 예수께서 정결과 부정, 공동체와 배제라는 랍비 유대교의 심층 구조 속에서 던지신 급진적 메시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옷자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회복과 구원의 빛을 온전히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손이 닿은 것은 옷자락이 아니라, 메시아의 날개였으며, 그녀는 그 날개 아래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2025년 6월 16일 월요일 늦은 밤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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