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bridge University에서 의학박사 과정을 밟았던 저희 딸 샬롬은 모든 과정을 마치고 이제는 Boston University에서 Post-Doctorate Research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리고 2년의 리서치가 끝나면 하버드 의대 병원에서 독자적인 연구소(Lab) 을 개설하여 근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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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부부는 1992년 8월 바토바토라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필리핀의 작은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전기도, 수도도 없지만 제일 심각한 것은 위생이었습니다. 물을 딱히 길어올 곳도 많지 않아 빗물을 받아서 생활하는 곳입니다. 판자와 녹슨 지붕 조각을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집에 이와 빈대와 벼룩, 바퀴벌레와 쥐가 공생하는 곳이었습니다. 딸은 때때로 피부병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말할 나위없이 위생 문제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팔뚝과 다리를 보면 성한 사람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곳 저곳 벌레 물리고, 쥐에게 물려서 늘 피부병을 달고 다녔습니다. 저희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한국에서 가져 온 피부 연고와 후시딘을 발라 주면서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딸은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나 이 다음에 크면 피부과 의사가 되어 필리핀이나 필리핀 보다 더 열악한 아프리카로 가서 그들을 치료해 줄 거예요”
이 기도가 딸의 첫번째 약속이자 서원 기도였습니다.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갈 때 세계 최초로 한국인 선교사 자녀 학교인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가 세워졌습니다.
17개 교단 선교부와 선교 단체가 연합하여 세웠다고는 하지만, 교사 수급, 학교 재정, 학교 건물, 교과목 설정, 언어 선택(한국어로 강의할지, 아니면 영어나 필리피노)등 산적한 당면 과제들이 참 많았습니다. 학교가 시작된 것은 가정 집을 렌트 한 산 후안(San Juan), 그리고 또 다른 가정집을 빌린 부룩사이드,그리고 학교 건물을 갖게 된 안티폴로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안티폴로에 세워질 학교가 쓰레기 더미 장소여서 내 자녀들을 이런 곳에 보낼 수 없다는 학부모 선교사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들은 심하게 반대할 뿐 아니라, 반대 데모는 물론, 자신들의 자녀들을 보낼 수 없다고 다른 학교로 전학 시키는 바람에 학교는 절반의 인원 미만으로 줄어 들었습니다. 특히 12명이 넘었던 딸의 반은 두세명으로 줄어 들었습니다.
딸은 한국 아카데미에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올라갈 때까지 한국어 과목 중심으로 몇 개 과목을 추가하는 한국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영어 과목은 필리피노 교사들이 담당하였습니다. 저는 초기부터 운영이사 그리고 교목으로 한국 아카데미를 섬겼습니다. 이러한 내홍을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특히 1학년때부터 정들던 아이들이 하나 둘씩 떠나 이제는 두 세명 밖에 안되는 풍전등화와 같은 한국 아카데미를 보며 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엄마 아빠, 제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제가 다닌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로 돌아와서 교사로 섬길 거예요!”
모든 것에 “최초”라는 단어가 붙으면 명예도 있겠으나, 그 “최초”라는 단어가 커다란 성과를 내기까지는 많은 시련과 도전이 있기 마련입니다. 딸이 다녔던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는 어린 딸이 보기에도 너무나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산 후안에 집을 빌려 학교를 시작했을 때에는 극심한 교통 체증에 적어도 4-5시간 많으면 6-7시간이 걸렸습니다. 새벽 네 시에 준비해서 보내고 파김치가 되어 제대로 서지도, 않지도 못하는 딸을 이끌고 비가 오나 태풍이 오나 매일 저녁 기도회에 갔습니다. 하지만 부모들이나, 교사들이나, 선교사들이 보지 못하는 가장 큰 어려움을 본 딸은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를 위해 자신이 느끼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후배들을 돕기를 원했습니다.
한국에 공부하러 가는 아이들에게는 한국어로 쓰고, 읽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이 아이들이 유럽이나 미국에 온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문제가 되었습니다. 커리큘럼이 그러하고, 영어로 진행되지 않는 수업이 그렇고, 미국이나 유럽에는 당연히 있는 카운슬러(상담자가 아니고 공식적으로 대학 진학을 담당하는 정식 교사, 매우 중요한 교사) 조차 없어서 우리 선교사 자녀들이 한국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저희 딸은 첫번째 약속인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 교사로 와서 섬기겠다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영국에서 중학교 1학년으로 시작해서, 미국에서 한 학년을 낮추어 SAT를 보고, Northeastern University에 생물학(Biology, 의과대학 가기 위해)으로 합격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2년 반 만에 마치고(원래는 5년 과정) 딸은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로 돌아와 교사로 섬겼습니다. 지금은 이 아이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많이 공부하고 있지만 딸이 한국 아카데미로 돌아와 섬길 때만 해도 그야말로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한국 과목이 아닌 미국 SAT 나 AP 는 어떻게 쓰는지, Essay는 어떻게 작성하는지, Extracurricular 활동은 어떻게 하는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학생들을 지도해야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 교사 내지는 미국이나 유럽 교육을 받을 교사가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아카데미가 세워진 십수년만에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 학생이 교사가 되어 돌아 온 것도 처음입니다.
딸은 무척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 영어 교사와 카운슬러(진학 상담 교사) 역할을 흡족해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20여 년의 긴 여정 속에 딸이 자신이 말한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딸의 두 번째 약속은 “피부과 의사”가 되어 선교지에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한국-필리핀-영국-미국에서 여정 가운데 당연한 의사로의 의과대학에 가기 위해 먼저 4년제Pre-Med course를 대학에서 해야 합니다. 통상 생물학이나 화학 그리고 물리학과 같은 과목을 전공으로 합니다. 좋은 GPA를 얻어야 합니다. 대학 졸업 후 MCAT 를 치뤄야 하고 기타 요청 사항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레지던트의 과정을 마치고, 의사면허 시험을 보고 그리고 의사(MD)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저의 딸의 Northeastern에서 공부하는 동안 생물학을 전공으로 했지만 성적은 아주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딸은 어느 날 저에게 이렇게 애기를 했습니다.
“아빠, 나 의사 되는 것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왜?”
“내가 학비 버느라 하루에 두 개씩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생긴 현상인데 손이 떨려서 수술 같은 집도를 하지 못할 것 같아요”
“딸아 굳이 외과의사 만 있는 것 아니고 다른 길도 있잖아?”
하지만 딸의 의견은 너무나 확고했습니다. 하루에 13-4시간 씩 일을 한 딸은 너무나 많은 접시를 나르느라 직업병처럼 손 떨림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어렵게 번 돈으로 학비를 내고 다니는데, 저는 딸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습니다.
딸은 대학 다닐 때 이러한 연유로 전공을 세 개를 했습니다.
생물학, 영문학, 언어학
대학 마지막 학년에 열린 언어학은 딸을 또 다른 학문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옆동네인 Birmingham 그리고 그곳이 바로 영국의 중심지역(Middle country)이었기에 그곳에 살면서 영어의 본고장, 그리고 영문학의 대 문호인 셰익스피어 같은 순수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철학, 역사, 언어학, 종교, 사회과학, 인문학 등에 관심이 많았지만 딸이 문학에 관심이 이토록 지대한지는 몰랐습니다. 실제로 딸은 미국의 흑인 문학에 깊게 심취해 있었고, 미국 문학과 영어가 아무리 미국에서 사용된다 해도 그 뿌리가 되는 영국과 유럽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딸의 발걸음을 움직이면서, 영문학을 위해서는 옥스포드에서, 언어학을 위해서는 하버드에서 공부하고자 입학 서류를 제출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옥스포드는 6-8개월 뒤 에야 신청할 수 있다고 하여, 먼저 하버드 대학에 냈고 저의 딸은 하버드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학 역사상 그 누구도 풀지 못했던 언어학의 난제를 딸이 풀게 되면서 이 분야 최고의 교수는 딸을 제자가 아닌 동등한 학자로 대우하면서 콜롬비아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권유했습니다. 콜럼비아 대학에서 심리학, 언어학, 의학이 함께 하는 Interdisciplinary 과정으로서의 postbaccalaureate in psychology 과정을 밟게 됩니다. 딸은 콜럼비아에서의 시간이 꿈만 같다고 했습니다. 매주 주일 밤에 차를 타고 뉴욕으로 가서 친구 집 지하방에서 기거하면서 공부하고, 주말이면 보스톤으로 돌아 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공부했습니다. 특히 행동과학에서 정신과학, 심리학과 의학을 접목한 통합학문과목을 진행하는 콜롬비아 대학의 과정은 의학 뿐 아니라 심리학, 뇌과학 그리고 언어학 통전적으로 접목되며, 각 분야에 매우 깊은 전문 지식을 요구합니다. 매주 마다 함께 하는 딸과의 대학은 제가 마치 학생이 되어 새로운 학문 영역을 탐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콜롬비아 대학 이후 딸은 하버드 의대 병원 부속 연구실(Harvard Medical School Labs)에서 연구 조사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스톤에 소재한 하버드 의대 병원(Mass General Hospital)과 같은 계열인 Mass General Hospital Institute of Heath Profession에서 Speech-Language Pathology를 졸업하게 됩니다. 미국 신문에도 기사가 날 정도로 딸의 모습은 군계일학과도 같았습니다. 딸이 졸업생 2,500명 가운데 오직 한 사람에게만 주는 최고의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졸업생 중에 하버드 의대 병원에 근무한 사람이 딱 두 명인데 그 중에 하나가 저희 딸이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하버드 의대 병원인 Mass General Hospital Boston에서 Speech-Language Pathologist로 두 해를 근무하면서 동시에 하버드 의대 연구실의 연구 과정도 병행하게 됩니다. 이때의 딸의 팀은 이 분야 세계 최고의 팀이었고, Director는 하버드 의대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석학이었습니다. 그의 추천으로 영국 캠브리지 대학 의학박사 과정에 합격하여 2024년 가을에 의학박사(PhD in Medical Science) 훌륭한 성적으로 마친 것입니다.
저의 딸이 캠브리지 대학 의학박사 과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수많은 사람들 중 12명만을 장학생으로 선발하는 빌 게이츠가 창설한 Bill and Melinda Gates Found의 장학금을 수여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의대 최고의 교수가 추천한 바와 같이, 치매, 알츠하이머, 뇌 과학 및 신경의학 분야의 통합 학문의 유럽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캠브리지 대학 교수에게서 PhD 를 하게 된 것은 정말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기회이자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학비와 생활비 모두를 빌 게이츠가 세운 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세계 유수의 왕과 수상과 대통령과 지도자를 배출한 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의 파워는 어느 대학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 그곳 출신들의 지구촌 네트워크와 교제가 앞으로의 학문 연마와 세계 지도력에도 좋은 통로가 될 것입니다. 지금 미국 부통령의 부인인 Usha Vence도 빌 게이츠 재단의 장학금으로 저희 딸이 공부한 Claire College, Cambridge University에서 동일한 학문 분야에서 PhD를 마친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졸업식을 참여하고 난 다음 딸이 어렸을 때 했던 두 번째 약속을 상기했습니다.
“피부과 의사가 되어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선교사가 되겠다!” 던 딸이 피부과 의사가 아니라 뇌과학과 신경외과 그리고 치매 및 언어 치료를 하는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분명 피부과 의사는 아닙니다. 그런데 딸이 그 어렸을 때 기도했던 것과는 다른 면들이 많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은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최고의 뇌과학과 의학 및 관련 학문의 최고의 전문가들 포진하다 못해 넘치고 있습니다. 딸이 치매와 알츠하이머 및 불치병 치료의 새 길을 연다면, 피부병 치료는 다하진 못할지언정 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잠언서 16장 9절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첫 번째 약속인 마닐라 한국 아카데미 교사의 사역은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두 번째 약속인 피부과 의사로서 섬기겠다고 한 것은 더 크고 광대하게 그리고 지구촌 전체에서도 소수 몇 명의 전문가들에게만 속한 영역에서 더 많은 환자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봅니다.
저의 딸 샬롬은 보스톤 Mass General Hospital에서 연구했던 치매 및 알츠하이머 그리고 frontotemporal dementia병에 대한 것들을 기초로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이 분야에 대한 집중 연구 했으나며그의 연구는 박사 학위 논문으로 입증이 되었으며, 세계의 권위있는 학술 논문지에 지속적으로 논문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특히 샬롬의 연구를 통해 치매 및 알츠하이머나 frontotemporal dementia병으로 인한 언어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샬롬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여러 곳에서 이루어진 학술대회에서 많은 상을 수여했습니다.
Cambridge University에서 의학박사 과정을 밟았던 저희 딸 샬롬은 모든 과정을 마치고 이제는 Boston University에서 Post-Doctorate Research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리고 2년의 리서치가 끝나면 하버드 의대 병원에서 독자적인 연구소(Lab) 을 개설하여 근무하게 됩니다. 그러면 세계 의학계에 놀라운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특히 Brain science, Alzheimer disease, neurology, 치매, 파킨슨 disease와 같은 영역에 PPA(Primary Progressive Aphasia) 독보적인 의료 발전을 이룩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딸의 연구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많은 의학자들과 연구를 진행했던 Cambridge University hospital 의 임상 실험이 Boston University의 2년의 Post-doctorate research 이후에 독자적 Lab(연구소)이 한 팀을 이루어 자료 수집 및 진단(data collection and diagnosis )을 이룩하여 치매 치료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물론 MGH (하버드 의대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하버드 의대에서도 계속 가르칠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딸의 인생을 돌이켜 보니, 화락연불소 월명애무면 (花落憐不掃月明愛無眠)이라는 말이 떠 오릅니다. 꽃이 지면 가없어서 치우지 못하고, 밝은 달을 보니 사랑스러운 마음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는 것처럼 저에게는 딸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왠 은혜인지 또 한 명의 아들과 손자를 저희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1987년 저의 생일 3일 뒤에 태어난 딸은 꽃처럼 예뻤고, 달처럼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 딸이 손자 임신 소식을 알린 후 태어난 아이를 볼 때, 딸 보다도 몇 배, 몇 십배로 가늠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자식이 성장할 때 키우는 기쁨보다 큰 것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필리핀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헌 옷을 골라서 입혀도 고마워하고, 학교 다닐 때 간식 및 도시락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도 불평하나 없었으며, 영국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세 개, 네 개를 해도 그 모든 돈을 저에게 준 딸이기도 합니다.
초음파 사진으로 딸아이의 사진을 볼 때, 그토록 작은 생명체가 움직이고 심장을 박동질하는 모습을 볼 때, 자신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감격을 부모는 쉽게 잊지 못할 것입니다.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조심 조심 키우던 그 작은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고, 결혼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 인생사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다 느껴봅니다.
캠브리지 대학 박사 과정 중 어느 날 보스톤을 갑자기 방문한 딸이 전해 준 손주 소식에 저는 3일 동안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 그토록 내 인생에서 이런 감동이 있었는지 설명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딸의 박동질 하는 초음파 사진을 볼 때의 감격을 훨씬 더 능가하는 감동이 손자의 사진을 보면서입니다.
또 하나의 감격은 저희 부부가 아들을 입양할 때 입니다. 홀트 아동복지회 사무실에서 온누리 교회 어느 집사님이 모든 아이들을 전부 다 지체부자유만 입양하면서 모두 행복한 얼굴을 한 사진을 보며, 저는 “주님 소경이어도, 다운증후군이어도,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선물로 여기고 잘 키우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준수한 아들 사무엘을 저희 가정에 주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지체부자유 아이들만을 키우는 집사님 부부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에 발 밑에도 못 미치는 것 같아 늘 빚진자의 마음이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시작한 지 1년 뒤 딸은 놀라운 임신을 하였고, 그로부터 1냔 뒤 자연분만을 고집하던 딸이 산고의 고통은 깊어지고 하루를 넘어가도 산모의 생명이 위협까지 받는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 “모겐”은 또 하나의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 어떤 아이어도 좋습니다.
딸 아이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이 아이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온전히 주님의 형상을 닮은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그렇게 난산과 난산 끝에 태어난 아이 모겐은 그야말로 딸아이와 아빠를 꼭 빼어 닮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손자의 얼굴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인형 같은 얼굴에 유럽인들에게 보이는 기품이 있고, 존중을 할 줄 알고 존중을 받을 줄 아는 손자는 마냥 귀염둥이만은 아닙니다. 어엿한 인격체로 자존감을 갖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지혜와 판단력이 있습니다.
60, 70을 살면 인생을 마무리하고, 80이 되면 주님 앞에 더 가까이 서는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길지도 않은 인생사 가운데 3대가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손자와 딸 부부와 사무엘, 그리고 저희 부부의 삶은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난한 선교사의 딸로 풍족함을 모르고 살았던 딸, 엄마와 함께 처절한 선교현장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 받은 아들 사무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의 유전적인 계승 뿐 아니라 영적 유산까지 물려 받은 손자 모겐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빠! 캠브리지 대학에 와 보니 모두 다 천재 수재들만 다 모인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너무나 평범하고 평범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예요.
저는 교만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요”
그런 딸은 교수들이나 세계적인 저명한 학자들이 즐비하게 경연하는 학술대회 6곳에서 모두 최고의 상을 수상했습니다. 하나 하나 그 상의 이름을 설명해야 할 정도로 이름있고 세계의 영향력을 주는 것이지만 한결같이 딸아이는 가장하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은 진정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저의 기도도 주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저의 딸이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그렇게 사람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필리핀에서 금식중인 아내가 그 먼 길을 돌아 영국 캠브리지로 왔습니다. 저도 어렵게 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의 주머니는 마치 맨손만 쥐고 갔던 1992년 1월 필리핀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축하하러 갔건만 경제적으로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지만 저희 가족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학들 가운데 1300년대부터 시작된 졸업식의 모습을 유일하게 간직하고 지금도 동일하게 하고 있는 곳은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포드 대학 뿐이라도 들었습니다. 어떤 사진 촬영도 허락되지 않고, 어떤 동영상도 찍을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구촌에 알리고 싶지만 이 전통을 700년 이상 캠브리지 대학은 지키고 있습니다. 엄숙하지만 모든 고관대작들이 마치 질서를 지키고 조정의 일을 보이는 것처럼 적어도 졸업식장의 모든 모습들은 700년 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만 알기에는 안타까워서 동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Senate House라고 불리우는 Regent House의 졸업식은 아직도 중세식으로 Congregation of the Regent House입니다. 박물관에서 볼법한 웅장한 건물에 8개의 colleges들이 함께 졸업식을 했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Claire college는 설립 연도가 무려 1326년도 메이플라워호가 오기 300년 전이고, 하버드 대학 설립 연도로 해도 300여년 전의 대학입니다. 각 대학 졸업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는데 대부분 몇명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일대일 또는 소수의 정예 엘리트들을 최고의 석학 아래 최고의 학문을 사사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클레어 대학의 교수님의 인도로 그 누구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도서관을 방문했습니다. 아이작 뉴튼의 초고본이 전시되어 있었고, 수백 년 동안 인류 문명을 이끌었던 대단한 저서들이 서가에 빼곡히 들어서 있었습니다.
여러 번 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 아이도 언젠가는 내가 공부한 곳에서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동의합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스탠포드 등이 즐비한 미국이지만 인류 문명의 중심에 있었던 학문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유럽 그리고 그 중에서 영국의 캠브리지나 옥스포드를 보면 저절로 이해가 되곤 합니다.
매우 짧지만 딸아이가 캠브리지에서 공부하고, Senate House 내부의 모습, Claire 대학의 모습, 그리고 클레어 대학에 전시되어 있는 아이잭 뉴튼의 초고본과 도서관 그리고 저의 설명 등이 이 짧은 동영상에 담겨 있습니다.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셔서 오직 하나님께 만 영광을 돌리도록 이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 (빌립보서 1:6)
보스톤에서 김종필 선교사 올립니다.
유튜브 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jMCFhqZC5Aw&t=3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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