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Constantine and the Cross)

지금까지는 콘스탄타누스 1세 즉 콘스탄틴 대제(大帝)가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해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로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등장으로 교회가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로 바꾸어지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이다. 그는 로마제국에서 최초로 대제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이기도 하다. 라틴어로는 위대한 (마그누스 Magnus) 콘스탄티누스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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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황제 콘스탄티누스1세를 그리스어로 부를 땐 ‘오 메가스 콘스탄티누스’ (O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라고 사람들은 그를 불렀다. ‘위대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렇게 평가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래전 성탄절과 고난주간이 오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벤허와 같은 기독교 영화를 재방, 삼방, 우려먹기 곰탕 식으로 한동안 방영해주었다. 그 중의 한편인 ‘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Constantine and the Cross)는 기독교 영화에 자주 등장한 코넬 와일드(cornel wilde) 가 주연한 영화이다. 영화라는 주제를 가져온 것은 짧은 지면에 한사람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기에 영화라는 요소를 통해 하고 픈 콘스탄티누스의 공(功) 과(過)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다.

영화 속에서 동로마와 서로마제국의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로마로 불러서 후계자로 임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는 로마 교외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암살하려 한다. 하지만 비밀리에 집회를 열던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그는 무사히 로마에 입성한다.

콘스탄티누스를 연모하던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Fausta)와 사랑에 빠진다. 이어지는 영화는, 기독교인들의 재판 과정 속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헬레나(Helena)라는 여인을 만난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 밥으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에게 청원한다. 이 청원으로 헬레나를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의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그의 처남이자 정적인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죽이려고 한다. 위기를 피해 로마를 떠나 그의 아버지 클로루스 콘스탄티누스(Chlorus Constantini)에게 피신한다. 그의 아버지가 얼마 후 전사한다. 죽기 전 클로루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에 대해 ’너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라 알려준다. 후에 콘스탄티누스는 헬레나가 자신의 생모임을 알게 된다.

영화는 황제이자 인간으로서 겪는 고뇌와 갈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부모와 가족까지 죽이는 비열함까지도 잘 묘사했다. 영화의 구성은 탄탄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스토리를 전개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의 가족사는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막장에 막장을 넘어선 수준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대제)의 출생과 가족사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ucdigiN

그는 황제가 되기 위해서 당시 많은 로마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본처(미네르비나 Minervae)를 버리고 황제의 딸(파우스타)과 재혼한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도 같았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 콘스탄티누스의 생모이자 조강지처인 헬레나와 이혼하고 292년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장녀 테오도라(Theodora)와 재혼했다.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장인 막시미아누스와 처남 막센티우스를 죽였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 (콘스탄티나 Constantina)의 남편인 리키니우스(Licinius)를 반역 죄인으로 살해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의 장남 플라비우스 크리스푸스(Flavius Crispus)는 부제로 갈리아를 통치했다. 그는 그의 장남이 계모인 황후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죄명으로 심한 고문을 가한 후 죽였다. 그는 아버지를 위해서 아버지의 정적인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의 결과 이두정치 체제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유일한 황제로 만든 아들이기도 했다. 이 같은 아들에게 로마시민들의 인기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느꼈다. 마치 조선의 인조가 볼모 에서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손주를 살해한 협의를 받는 것처럼, 그에게 계모와 간통 혐의를 씌운 것이다. 황후인 파우스타 역시 장남을 살해한 몇 개월 후 간통 혐의로 뜨거운 욕탕에서 처형시킨다.

막장의 끝 판 왕인 그의 가족사이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정교회(Ανατολική 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와 네스토리우스의 동방교회(Ανατολική Εκκλησία)에서 성인으로 추앙된 사람이기도 하다. 이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독교를 공인한 것 때문이다.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자유

밀라노 칙령은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밀라노 칙령은 로마 제국의 서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와 로마 제국 동부지역 황제 리키니우스(Licinius)가 313년에 공표한 문서이다. 리키니우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의 여동생 콘스탄티나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 밀란 에서 만났다. 그 때 두 황제는 세계사에 너무 잘 알려진 밀라노 칙령 이란 포고령을 선포했다.

“콘스탄틴 아우구스투스(콘스탄티누스1세)와 리시니우스 아우구스투스(리키니우스)는 좋은 전조 아래 밀라노로 와서 공익 및 복지와 관련된 일들을 고려하면서, 무엇보다 이 일들이 모든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배 하는 일에 대한 것을 먼저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로 시작되는 밀란 칙령은 기독교에 관한 관용 정책이다. 기독교는 그때부터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법률 앞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음지에서 고난과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칙령으로 인해서 황제의 보호를 받는 상황으로 반전 된 것이다.

몰수 되었던 교회 재산이 반환 되었고 로마제국이 교회를 보조하고 성직자에겐 시민으로 져야 할 공적인 의무가 면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성지를 순례 하면서 교회를 건축 하기 시작한다, 로마에는 베드로 성당 예루살렘에는 성 분묘 교회 등 수없이 많은 교회를 건축 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5년에는 십자가 처형을 폐지 시켰다. 그리고 일요일을 그리스도인의 예배일로 공인하였고 국법에 의해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정했다.

그리고 박해 기간 동안 몰수 당했던 교회의 재산들을 반환 시켰고, 부득이한 경우는 정부가 보상 해 주었다. 이와 더불어 교회가 상속권을 갖는 법까지 제정함으로써 당시 신실한 신자들은 재산과 유산을 교회에 헌납하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교회는 수많은 재산의 축적으로 인해 많은 부를 소유하는 단체가 된다.

앞서 말한 어마 무시한 행적 외에도 성직자들에게 군역과 부역 및 교회 자산에 대한 세금이 면제 시켰다.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시 공인된 모든 종교의 사제들이 누렸던 것이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최초의 아프리카 성직자들에게 부여했고 그 후에 319년에는 국가 전역에 있는 성직자들에게 확대 적용하였다. 기존에는 성도들의 헌금에 의지하던 성직자들의 급여를 정부의 지원을 통해서 가장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주교들에게 사법적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때 까지 신자들의 다툼 문제는 교회에서 처리를 하였다. 교회의 판결은 자의적인 믿음과 복종 아래에서 효력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교의 이러한 판결이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인정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타 종교가 가지고 잇던 법적 중재권과 법적 권리를 차단당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권리를 중재하는 권한까지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어받았다. 나아가 당시 고위 공무직인 정무관(政務官)들이 가지고 있던 노예 해방의 권한을 교회 성직자(주교)들에게도 부여한 것이었다. 교회 권한의 강화는 교회 조직을 체계화 시켰다.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에게 공적 권한이 부여됨으로써 성직자는 자연스레 세속적인 계급화 되었다.

칙령 외에도 여러 평가들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것 외에 제국 안에서 법률을 강화 한 것이다. 그가 직접 법률을 재정 한 것이 아니다. 기존의 법률(옥타비아누스의 법률 Octaviani Leges)을 강화 시킨 것이다. 사실 옥타비안 시대의 로마 법률은 오늘의 법률과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바울 사도가 로마 시민권자로서 그의 권리인 로마 총독에게 자신을 항소했다.

로마에는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이 오지 않았다. 하여 바울은 감옥이 아닌 일반 주택에서 2년을 지낸 후 완전한 자유를 회복한다. 이 사건은 빌립보 서신이 옥중 서신인가? 하는 질문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한국 헌법 재판소의 판결에 많은 사람들이 불신을 가지며, 탄핵 반대와 찬성으로 나누어져 시시비비에 싸인 우리의 법률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당시 무거운 세금으로 출생할 때 내는 세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빈곤 계층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차라리 아기를 살해했다. 이 같은 상황을 접한 콘스탄티누스는 칙령을 내린다. 나아가 빈곤 때문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을 가난하다는 것을 행정관에게 입증하면 즉시 구제 기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즉흥적인 방법이었기에 결과적으론 실패에 가까웠다. 하지만 많은 빈민들로 부터는 큰 호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포플리즘(political populism)의 많은 요소가 가미 된 것 이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그의 법령은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지금까지 그의 공(功)적인(?) 부분이었다면 과(過)는 무엇인가?

교회에 나타난 콘스탄티누스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강렬하였다. 칙령이 발표되기 전 까지 교회는 세속과 구별된 거룩함을 생명으로 지켜왔다. 하지만 칙령이 발표된 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순결함과 거룩함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황제의 보호와 권력 아래서 빼앗겼던 시민권을 되찾았다. 몰수 당했던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고, 나아가 국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다 보니 교회는 자연스레 세속화 되었다.

교회가 처음에는 핍박을 받지 않은 것이 은혜였다면 칙령 이후는 황제의 보호를 받지 않은 것 그 자체가 은혜이며, 거룩함인 것이다. 교회에 나타난 콘스탄티누스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칙령이 발표되기 전 까지 교회는 세속과 구별된 순결함을 죽음으로서 지켜왔다. 그러나 칙령 이후 교회는 성결함과 거룩함은 사라지고,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교회가, 믿음과 아무런 관계없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로 채워졌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이교적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옷만 입은 세속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갔다. 요즘 선교 적 용어인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 도래한 것이다.

세속적인 권력에 맛이든 교회들은 은혜로운 보호자(?) 콘스탄티누스를 칭송하고 그의 모든 허물들을 눈감아 주었다. 한걸음 나아가 ‘황제의 축제일’까지 만든 교회는 앞서 말했듯이 그를 부를 때 ‘오 메가스 콘스탄티누스’ (O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라고… .

십자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필자의 본 뜻과 다르게 로마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독자들에게 작은 혼란을 초래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앞으로 몇 번은 더 로마의 이야기를 한 후에 십자군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표지 그림/ 밀라노 왕궁터/ 밀란 칙령의 성화©ucdigiN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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