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 1 첫 창조는 끝이 아닙니다. 구원의 시작입니다. 말씀과 성령,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통해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계약금이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성이 될 것입니다… <맺는 글 중에서>
- 2 <글을 시작하면서: 영광으로 향하는 문, An Entry door into Glory>
- 3 <창세기 1장이 주는 심원한 의미>
- 4 <에레츠로 풀어 보는 물질 세계>
- 5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 6 <하나님의 신의 운행하심: 어린 새 위에 서 있듯>
- 7 <영과 질서의 힘: 혼돈에서 우주로>
- 8 <하나님의 신의 운행하심에 대한 신학적 공명: 하나님의 영과 우주의 조화>
- 9 <하늘들에 대한 고찰>
- 10 <하늘 위의 물과 궁창의 구조>
- 11 <창조에 있어서의 땅 에레츠, ארץ>
- 12 <하나님의 영과 삼위일체적 창조의 형상>
- 13 <로고스 그리스도 – 창조의 시작과 끝>
- 14 <새 창조, 부활, 그리고 창조의 윤리>
- 15 <계시, 구원, 그리고 소명으로서의 창조>
- 16 <글을 맺으며: 성전으로서의 우주, 희망으로서의 창조>
첫 창조는 끝이 아닙니다. 구원의 시작입니다. 말씀과 성령,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통해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계약금이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성이 될 것입니다… <맺는 글 중에서>
[영성계발] 하늘들, 땅, 그리고 하늘 위의 물: 창조, 구원, 그리고 우주의 조화에 대한 다층적인 신학 » Heavens, Earth, and the Waters Above: A Multilayered Theology of Creation, Redemption, and Cosmic Harmony » 김종필 선교사 »
<글을 시작하면서: 영광으로 향하는 문, An Entry door into Glory>
이 세상에는 문들이 있습니다. 어떤 문들은 우리를 닫힌 세계로 인도합니다. 어떤 문들은 편견과 오해와 선입견으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온 우주를 향해 열리는 신성하고, 유구하며, 영원한 가장 중요한 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문은 창세기 1장입니다. 이 문을 통해 우리는 소리 이전의 원초적인 고요함, 시간 이전의 찬란한 섬광,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한때 머물렀던 깊은 물을 들여다 봅니다. 저는 수십 년 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의 순수한 신비에 가슴이 두근거리던 젊은 청년으로로서, 학도로서 이 문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한 구절이 여러 권으로 펼쳐질 수 있는 두꺼운 주석서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심오한 진리는 학문적 분석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본문의 시적인 리듬, 신학적 공명, 그리고 영적인 무게 속에도 있습니다.
이 글은 평생에 걸친 열정과 떨리는 경외심에서 탄생했습니다. 히브리인의 시각, 과학적 겸손, 철학적 깊이, 그리고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창세기 1장을 읽고자 합니다. 이 책은 과학 대 신앙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쿼크에서 퀘이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조의 요소가 신성한 지혜의 위대한 합창에 합류하는 하나의 노래, 신학적 교향곡입니다.
창세기 1장은 역사 그 이상의 것입니다.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며, 불가역적인 선포의 말씀입니다. 우주론 그 이상의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호흡이 없는 세계에 생명과 호흡을 불어 넣으시는 생명 창조의 세계입니다. 심연 위에 머무르시는 성령부터 어둠 속으로 빛을 전하시는 말씀까지, 우리는 시간의 경계에서 춤추는 삼위일체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우연이 아닌 신성한 설계에 의해 혼돈 속에서 드러나는 구조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우주가 기계가 아니라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광자, 모든 양성자, 모든 생명의 숨결은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창조주를 증거합니다.
이 글은 마치 하늘 그 자체처럼 층층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단어인 바라(bara), 아사(asa), 야차르(yatsar), 샤마임(shamayim)과 에레츠(eretz)의 의미, 물 위의 성령의 움직임, 빅뱅 이후 우주의 과학적 구조, 그리고 이러한 신비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해석을 탐구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그리고 하나님의 영과 우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이 주는 심원한 의미>
이글이 단순한 학문적 성찰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행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시작을 묵상할 때, 우리는 끝, 즉 새 창조, 부활, 그리고 이미 우리 세상에 스며들고 있는 영원한 영광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창세기 1장을 읽기 어렵다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놀라운 창조의 말씀이 그곳에 쓰여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는 말씀, 에덴 동산과 인류 최초의 타락과 추방이 쓰여져 있습니다. 이 놀라운 말씀 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큰 숙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였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히브리적 구조와 몰이해는 그리스 로마 문명권이 서구 신학과 철학 체계에 많은 오해와 잘못된 용어 사용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어의 구조와 하나님의 계시 말씀인 창조에 대하여 과학적 시각에서도, 신학적 시각에서 그리고 종합적인 시각에서 한번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레츠로 풀어 보는 물질 세계>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창조의 히브리적 용어 사용에 대하여 연구해 왔습니다. 청년 시절 저의 젊은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매우 두툼한 주해서들을 읽으면서 저는 밤낮을 바꾸어 살았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1절을 천페이지가 넘는 주해로 채운 수많은 책들을 읽다가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세월이 40-50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흥분을 잠재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연구 저작물들을 뒤로 하고 아주 단순화하는 단계 즉 히브리적 사고의 첫 단계인 P’shat (פשט)으로 저의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앞서 제가 쓴 10편의 글에서 자주 말한 바와 같이 창세기 1장은 대칭 구조(키아스틱 Chiastic structure 구조)이며, 첫째 날에 빛과 어둠이 나뉘고, 둘째 날에 물과 궁창이 나뉘고, 셋째 날에 땅에 다양한 식물이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조(프레임)를 바탕으로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이 구조는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넷째 날에는 태양계와 빛을 내는 별들이 창조되었고, 다섯째 날에는 바다와 하늘에 있는 생물들이 만들어졌으며, 여섯째 날에는 땅에 있는 생물들과 사람들이 창조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보편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각 날에 해당하는 창조 사건이 없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선언적인 진술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에 서서 출발 신호를 듣고 달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6일간의 창조를 각각 알리는 선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전체 그림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물 이후에 빛을 창조하셨지만, 빛이 창조되기 전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그 이후에 시작되는 창조 과정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물론 신학에서는 1절과 2절 사이의 간격 이론(gap theory)을 수천 년 동안 주장해 왔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1절에 나오는 천지 창조 이후에 아무런 사건이 없었다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1절 이후에 천사장 루시퍼가 하늘의 창조, 그리고 천사의 삼분의 일이 반역했다고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는 6일 창조가 시작되기 전, 실재하는 독립적인 창조 행위(무로부터)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강력한 신학적, 주해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세기 1장 1절은 분명하고 우주적인 창조 사건입니다. 지구적 관점이 중대하지만 전체 그림은 우주적 창조입니다. 이 구절은 절대적인 시작, 즉 시간, 공간(하샤마임), 그리고 물질(하에레츠)이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된 사건을 묘사합니다. 앞서 제가 언급했던 바라, 아사 그리고 야차르에서 동사 “바라”(בָּרָא)는 완료 시제로, 완료된 행위를 암시합니다. 유대교 및 기독교 학자들(예: 라시, 칼빈, 웬햄, 브루스 월트키)은 종종 1절을 3절에서 6일 구조가 시작되기 전의 요약 또는 독립적인 행위로 간주해 왔습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최초의 신적 행위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2 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토후 바-보후)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토후 바-보후”(תֹהוּ וָבֹהוּ)는 황량한, 공허한, 질서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깊음”을 말하는 히브리어 테홈 “tehom” (תְּהוֹם)은 원시적인 물을 나타냅니다. 이는 지구의 바다나 우리가 말하는 H2O와 100%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인류에게 물처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할 다른 방도는 분명히 없어 보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의 이미지에서 다른 곳에서 사용됩니다 (에누마 엘리쉬, 시편 104:6-9 참조). 그리고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 (루아흐 엘로힘)이 임재하시는 것은 신성한 질서와 생명에 대한 기대를 의미합니다.
1장 1절과 2절 사이에 간격 이론 즉 Gap theory는 루시퍼의 타락과 원래 창조 세계의 부패와 같은 대격변이 일어났다는 신학적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19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토머스 찰머스, 스코필드 참조 성경이 아주 단적이 예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와 초기 교회 사상에 간격이론은 더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이 대격변 이후의 초기 상태라기보다는 아직 형태가 갖춰지지 않은 창조의 상태를 묘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무질서와 어둠이 타락한 천사의 영향이나 우주적 혼란을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은 타당하며, 특히 다음 구절들과 조화를 이룹니다.
o 이사야 14장
o 에스겔 28장
o 요한계시록 12장
그렇다면 창세기 1장 1-2절의 세 구성 요소인 하늘들, 땅, 그리고 물과 첫째 날 창조된 빛은 네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창세기 1:1 = 우주 창조(공간 + 물질)
• 창세기 1:3 = 기능적 질서의 시작(빛으로 시작)
과학적-신학적 유사점:
• 창세기 1:1 = 특이점, 시공간-물질
• 창세기 1:2 = 원시 혼돈, 깊은 어둠
• 창세기 1:3 = 우주 배경 복사?, 빛의 출현(광자 시대?)
이처럼 빛은 첫째 날(3절)에 천지 창조(1절) 이후에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만물을 존재하게 하시고(창 1:1), 그 후 구조와 생명을 주는 질서를 시작하셨습니다(창 1:3의 빛으로 시작). 신학적으로 빛은 하나님의 임재, 생명, 진리를 상징합니다. 단순한 광자가 아니라 우주의 방향, 리듬, 그리고 계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다루는 빛의 영역은 광대하며 다양합니다. 제가 이전 글 예히 오르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빛은 천지 창조 이후에 물질 우주에서 신성한 질서의 첫 번째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실재하는, 창조인데 이는 공간, 시간, 물질의 무(無)로부터의 창조입니다. 아래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를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절은 파괴된 상태를 반영할 수 있습니다. 토후 바보후(tohu va-bohu)는 문맥상 천사의 반역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었던 옛뱀이 사탄이며 또한 루시퍼임을 암시하는 간격 이론은 1절과 2절 사이의 하늘의 천사들의 일부 반란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수천년을 이어져 왔습니다.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창세기의 첫 구절에서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 심오한 진술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창조된 모든 질서를 포괄하는 포괄적인 선언입니다. “천지”라는 구절은 쌍극자를 통해 전체성을 표현하는 문학적 기법인 메리즘(merism)으로 기능합니다. 성경 우주론에서 이는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 광활한 공간, 그리고 만질 수 있는 물질과 생명의 세계를 포함합니다.
라시(Rashi)와 같은 유대교 학자들은 이 구절을 창조의 실제적 시작, 시간, 공간, 그리고 물질적 실체의 시작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헬레니즘 유대교적 관점에서 글을 쓴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이 구절을 혼돈에 질서를 가져오는 신성한 이성(로고스, λόγος) 또는 말씀의 행위로 보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가 이 시작을 시간적 순서가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연결 지어 해석했습니다. 이 개념은 후대 신학에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로 다시금 강조되었습니다.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는 서구 기독교 신학의 근간을 이룹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그의 저서 『고백록』(12권)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당신께서 만드시지 않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부터 천지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들은 당신의 독생자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이 창조하지 않은 어떤 물질로부터도 천지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무(無)로부터 물질 자체를 창조하셨습니다.”
— 『고백록』, 12권, 7.7장 Confessions (Book XII), Augustine writes:
“For what did not exist at all, could not be made, unless it were made by you. You made heaven and earth not from yourself, for then they would be equal to your only-begotten Son… nor from any matter not created by you. You created the matter itself from nothing.”
—Confessions, Book XII, ch. 7.7
그는 특히 위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조가 이미 존재하는 물질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일부 그리스 철학자들의 견해)을 거부합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며, 다른 모든 것은 그분의 의지를 통해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언급된 “형태 없는 물질”조차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영원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Rejects the idea that creation came from pre-existing matter (a view held by some Greek philosophers).
Insists that God alone is eternal, and everything else began to exist through His will.
Emphasizes that even the “formless matter” mentioned in Genesis 1:2 was itself created by God—not eternal.”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creatio ex nihilo는 서양 신학의 근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하나님의 무에서부터의 창조를 제1원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중세 신학 뿐 아니라 존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에서도 이 논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신조와 신앙고백(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유일한 원인이십니다. 창조는 하나님과 공존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그분의 뜻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는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의 우연성을 확증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의 운행하심: 어린 새 위에 서 있듯>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인 merachefet(מְרַחֶפֶת)은 모성적 이미지가 풍부합니다. 신명기 32장 11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로, 하나님을 둥지 위에 서 있는 독수리처럼 부드럽게 퍼덕이며 새끼를 품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이 이미지는 부드럽고, 세심하며, 강력합니다.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관심과 의도, 그리고 준비를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생명과 질서를 잉태시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늘들과 물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들이 히브리어로는 그곳에 있는 물(There water or there is water)입니다. 이 물 표면(히브리어는 얼굴을 뜻하는 페네이) 에서 마치 부화하려는 알 위에 서 있는 새처럼 수면 위를 덮고 계십니다. 이는 곧 태어날 생명, 혼돈에서 일어나는 질서, 어둠 속으로 불려 들어오는 빛에 대한 비전입니다. 이 초기 운행에서 우리는 이미 성육신과 구원의 고동을 듣습니다. 창조물을 품으시는 바로 그 영이 언젠가 마리아에게 내려와 그녀를 감싸 안으실 것이며(누가복음 1:35), 그리스도의 잉태를 통해 새 창조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창세기의 품으시는 영과 복음서의 감싸 안는 영은 하나이며 동일합니다.성경 전체에서 이 모성적이고 새와 같은 이미지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시편 91편 4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깃털로 우리를 덮으시고 그분의 날개 아래 피난처를 제공하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두고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하나님의 영의 머무름은 수동적인 관찰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기다림이며, 하나님의 말씀 앞의 고요함, 곧 출산을 앞둔 시간의 자궁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은혜의 모습입니다.
과학적인 의미에서도 이 이미지는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혼돈스러운 에너지와 잠재력으로 가득 찬 초기 우주는 중력, 약력, 전자기력, 핵력 같은 질서의 힘이 자신을 형성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영의 맴돌이는 것은 복잡성, 의식, 그리고 생명의 출현 뒤에 숨겨진 신성한 조율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자연에서 맴돌았던 하나님의 영은 그 안에서 보호하고, 양육하고, 준비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 맴돌았던 영은 우리 삶의 혼돈 위에 맴돌며 어둠에서 빛을, 공허에서 생명을 이끌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바로 그 영입니다.
창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 깊은 생각에 잠긴 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은하의 장엄함과 원자의 신비 뒤에는 마치 새가 새끼 위를 맴돌듯 깊은 곳에서 아름다움을 돋아내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과 질서의 힘: 혼돈에서 우주로>
창세기 1장 2절에서 우리는 신비롭고 시적인 장면을 만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순간은 단순히 원시 혼돈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신학적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영(루아흐)은 깊음을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위에 운행하십니다. 힘으로 혼돈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임재하심으로 질서를 가져오십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이 이미지와 공명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주는 약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순간,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가 특이점에서 폭발하여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혼돈에서 네 가지 근본적인 힘에 의해 유지되고 지배되는 질서가 점진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천체 물리학에 따르면, 빅뱅 직후, 우주는 뜨겁고 밀도가 높으며 불투명했습니다. 그러나 몇 분 만에 원자핵이 형성되었고, 수십만 년 만에 우주는 원자가 생성될 수 있을 만큼 식어 빛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 그 순간부터 이러한 힘들의 상호작용은 우주의 거대한 구조로 이어졌습니다. 별들이 불타올랐습니다. 은하들이 나선형으로 솟아올랐습니다. 행성계가 형성되었습니다. 화학 반응이 전개되어 생명의 구성 요소가 탄생했습니다. 이 놀라운 정밀성은 우연이 아닙니다. 중력이 조금이라도 약하거나 강하다면, 강력이 10의36승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어긋난다면, 우리가 아는 우주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잠시 과학자들이 말하는 빅뱅 이후 우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네가지 힘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주의 네 가지 기본 힘
중력(Gravity)
중력은 네 가지 힘 중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거리에서 작용합니다. 우주의 형성, 물질을 끌어당겨 은하, 별, 행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중력은 형태 없는 것을 깊은 구조와 형태로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물을 바다로, 땅을 형상으로 모으는 손과 같습니다.
전자기력 (Electromagnetic force)
이 힘은 대전된 입자 간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며 원자와 분자를 결합시킵니다. 빛, 전기, 화학 결합을 담당합니다. “빛이 있으라”(창세기 1:3)라는 말씀은 우주의 냉각되는 플라즈마에서 전자기 복사(빛)가 발생하여 우주를 가시화하고 구조화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더욱 심오해집니다.
강핵력(Strong nuclear force)
이 힘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극히 짧은 아원자 거리에서만 작용합니다. 이 힘은 원자핵 내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시켜 같은 전하를 띤 양성자 사이의 자연스러운 반발을 극복하는 힘입니다. 강핵력이 없다면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붕괴될 것입니다. 이 힘은 창조의 내적 응집력으로, 물질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들을 상상할 수 없는 강도로 하나로 묶어줍니다. 마치 존재의 중심에 있는 신성한 접착제와 같습니다.
약핵력(Weak nuclear force)
이 힘은 방사성 붕괴를 지배하며, 태양을 움직이는 핵반응을 포함한 핵반응에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반응을 통해 태양은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이는 지구를 지탱하는 생명의 빛과 열입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는 창조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유지하는 메커니즘입니다.
빅뱅 이후 성령의 활동과 질서의 출현을 고려할 때, 기독교 신학이 현대 우주론의 함의에 대해 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신학자와 과학자들이 빅뱅, 네 가지 근본 힘, 그리고 창세기 1장 사이에 깊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이에 대한 유보적인 견해나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합니다.
위와 같은 글을 통해서 주지한 바와 같이 빅뱅과 네가지 우주의 힘에 대한 과학적 견해에 대하여 기독교 창조론은 네가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YEC, Young Earth Creation)
젊은 지구 창조론은 빅뱅에 대한 관점을 거부합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우주가 약 6,000년에서 10,000년 전에 문자 그대로 6일(24시간) 동안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빅뱅이 성경과 모순되며 자연주의적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가지 힘에 대한 관점은 긍정하지만 젊은 지구창조론(YEC)자들은 빅뱅을 거부하는 반면, 창조 주간에 구현된 하나님의 창조 설계의 일부인 네 가지 근본적인 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오직 성경을 문자적 역사로,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최근의 창조 행위로 받아 들이고 있기에 빅뱅과 같은 이론을 진화론적이고 장구한 시대 우주론으로 보고 거부합니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OEC, Old Earth Creation)
빅뱅 관점을 수용합니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OEC) 지지자들은 일반적으로 빅뱅을 무(無)로부터의 창조로 봅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행위의 순간으로 긍정한다는 뜻입니다. 네 가지 힘에 대해서도 신적 미세 조정의 증거로 긍정되고 고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의 정밀함은 의도적이며, 하나님의 유지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래된 창조론자들은 창세기에 대한 비유적 또는 시대적 해석을 통한 성경과 과학의 일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적 설계(ID, Intelligent Design)
빅뱅 관점에 대해서는 혼합적인 견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부 지적 설계(ID) 지지자들은 빅뱅을 우주 설계의 증거로 긍정하는 반면, 다른 사상가들은 신중하며 확답을 피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힘에 대한 관점은 강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적 설계 이론은 네 가지 힘이 불가능할 정도로 미세하게 조정되어 생명체의 존재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지적 설계의 명확한 신호로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설계가 자연에서 감지 가능하다고 보기에 이러한 하나님 설계를 설명하고 찾는 것이 지적 설계 창조론자들의 견해입니다. 지적 설계는 유물론적 설명에 대한 비판적이지만 다양한 시간선에 대한 개방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진화론적 창조론, Theistic creationism)
빅뱅에 대한 관점에 대하여 유신론적 창조론은 어떤 견해보다도 훨씬 더 완전히 긍정하고 있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빅뱅을 하나님이 선택한 창조 방법으로 받아들입니다. 창세기를 신학적으로 읽을 때 그들은 창세기와 우주론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봅니다. 네 가지 힘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적 설계의 일부로 완전히 긍정합니다. 이러한 힘은 하나님의 질서를 반영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 법칙을 통해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론 또는 진화론적 유신론은 하나님은 자연 과정을 통해 일하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성경과 과학은 상호 보완적인 진리를 제공합니다. 진화와 우주의 발전은 신적 지혜의 표현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저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수많은 저자들이 대부분 이 견해를 지지하거나 표명하고 있습니다. 지적 설계에 대해서도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시키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젊은 지구론과 오래된 또는 오랜 지구론이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6천년이라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입증하는 방법에 대하여 많은 견해차가 있습니다. 오랜 지구론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창조를 말합니다. 이 안에서도 Gap theory와 Day Age 론으로 역사상 수천년 동안 창조의 기간과 지구의 나이에 관한 논의가 있어 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 기회에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어째튼 이 네 가지 입장은 성경, 과학, 신학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반영합니다.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 네 가지 입장을 하나로 묶는 것은 우주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신적 의도의 결과라는 확신입니다. 즉각적인 명령, 인도된 과정, 또는 지속적인 설계를 통해 하나님은 만물의 기원이자 유지자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것을 해석하고 받아 들이는 입장에 따라 나타난 신학적 그리고 과학적 견해가 매우 큰 견해차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성령의 임재는 현실의 기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심오한 신학적 의미로 해석되면 실재적 적용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즉, 빛과 물질의 형성 뿐만 아니라 생명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법칙과 힘의 출현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의 운행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신의 운행하심에 대한 신학적 공명: 하나님의 영과 우주의 조화>
물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질서의 신성한 조율을 예고합니다. 빅뱅 이후 나타난 물리적 상수와 힘은 단순한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그것은 합리적이고 창조적이며 지속적인 현존의 징표입니다. 운행하시는 영은 우주의 힘의 미세 조정에 대응합니다. 혼돈스러운 물은 원초적인 에너지와 물질에 대응합니다. 창조적인 말씀은 깊은 곳에서 구조와 생명을 가져옵니다. 기독교 신학이 확언하듯이,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 1:17)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별들을 형상화하고, 원자를 안정시키고, 시간의 흐름을 지배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과 성경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하며,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심오한 일치, 지혜, 그리고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갈 필요성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물질 세계를 다룹니다. 철학과 인문학과 문학과 역사와 예술은 사람의 감성과 지성을 다룹니다. 즉 정신세계를 다룹니다. 신학은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와 영적 세계를 통전적으로 다룹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시작점이지 완결점이 아닙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시작점이며, 족장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통한 구속사의 시작을 알리는 단서로 제공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통로이자 메시야의 나심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을 뿐 아니라, 물질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세계의 완성을 위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육신을 벗어나 온전케 된다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 후서 3:17-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 후서 4:16-18)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린도 후서 5:1-10)
창조의 시작에서 하나님의 신의 운행하심(성령님)과 말씀하시는 하나님(예수님)과 그곳에서 질서를 세우시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성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더불어 우주를 하나님의 집으로 세우시는 과정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 거하게 될 우리가 육신의 몸에서, 썩어질 몸에서 썩지 않은 몸으로 변화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린도 후서 15: 39-51)
다시 글을 이어 나가겠습니다.
<하늘들에 대한 고찰>
하늘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샤마임(shamayim)은 ‘샴(sham, 거기)’과 ‘마임(mayim, 물)’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시적 구성은 우리에게 하늘의 영적, 물리적 속성을 재고하도록 권유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원시적인 장면은 형태는 없지만 강력한 창조물, 역동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의 질서를 기다리는 존재를 암시합니다. 궁창 위와 아래의 물의 구분은 우주에 대한 이러한 다층적인 관점을 더욱 강화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과 전통을 바탕으로 “세 하늘”(고린도후서 12장 2절)이라는 우주론적 틀을 언급합니다.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가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1. 첫째 하늘 (First Heaven) – 구름이 형성되고 새가 나는 대기.
2. 둘째 하늘 (Second Heaven) – 해, 달, 별이 있는 우주의 영역.
3. 셋째 하늘 (Third Heaven) – 하나님의 초월적인 거처.
이 삼부 모델(tripartite model)은 창세기 1장과 공명하며 창조를 이해하는 데 영적인 토폴로지(topology)를 제공합니다. 또한 고대 세계관과 현대 과학적 발견을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과학적 관점에서 초기 우주는 우주론자들이 빅뱅이라고 부르는 것, 즉 공간, 시간, 물질이 무차원점에서 출현한 특이점(singularity)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몇 초 만에 아원자 입자(subatomic particles)가 형성되었고, 몇 분 만에 수소와 헬륨 원자핵이 나타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력은 은하, 별, 그리고 결국 행성을 형성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주는 오늘날에도 계속 팽창하고 있습니다.
일부 창조론자들은 천체 물리학자들의 과학적 관점과 일치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래된 지구론자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빅 뱅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신학적 개념을 일치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천체물리학에서 시작이 있는 우주를 암시하는데, 이는 성경적 세계관과 자연주의적 가정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확증하는 데 일종의 논리적 합리성을 제공합니다. 더 나아가,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원인을 함축하는데, 많은 신학자들은 이를 영원한 하나님이 신적인 의지와 이성을 통해 행동하시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미 수십, 수백권의 책들이 특히 창조론자(creationists)들에 의한 빅뱅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이 있으라(예히 오르, 이 부분에 관한 이해는 저의 지난번 글을 참조하시기 바람)”와 연결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1장은 과학 교본이 아니라 신적 영감을 받은 우주론적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는 광자가 우주를 자유롭게 여행하기 시작한 순간, 소위 “우주의 초기 상태”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룹니다. 빅뱅과 관련해서는 주제의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하여 나중에 깊이 있게 따로 다루어 볼 것입니다. 하늘(샤마임)과 땅(에레츠)의 창조는 공간과 물질적 실체, 즉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모두를 상징합니다.
“바람”과 “숨”을 모두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영)를 살펴보면 생명의 기본 물질과의 강력한 연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과 숨의 원소인 산소와 수소는 생명 유지에 가장 중요한 원소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었고, 창세기 1장 2절에서 성령이 바람처럼 물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성령의 수면 위의 운행은 우연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 1장을 다층적인 창조 신학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셋째 하늘: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보좌.
• 둘째 하늘: 빅뱅 이후 형성되고 별들로 가득 찬 우주 공간.
• 첫째 하늘: 지구의 대기, 바람, 구름, 숨의 영역.
• 에레츠: 땅, 바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 즉 만질 수 있는 생명의 영역.
이러한 각 층위는 하나님과 창조 세계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이자 모든 질서의 근원인 신적 초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둘째 하늘은 창조 세계의 광대함과 그 설계의 정밀성을 드러내며, 시편 19편 1절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를 상기시켜 줍니다. 첫 번째 하늘은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생명, 공기, 그리고 날씨의 지속 가능한 체계에 주목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상 거주지인 에레츠는 구원의 무대,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곳이 됩니다.
이 층들은 함께 우주의 구조 뿐만 아니라 창조에 내재된 의도적이고 영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조화를 드러냅니다. 창세기 1장은 단순한 시작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구원적 목적을 들여다보는 창입니다.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요한복음 1:3), 우주는 그 근원과 구조,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를 발견합니다.
<하늘 위의 물과 궁창의 구조>
창세기 1장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고 종종 간과되는 주제 중 하나는 하늘 위의 물과 궁창(raqia” (רָקִיעַ) : 라키아)에 대한 개념입니다. 창조 둘째 날, 하나님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창세기 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이라고 부르신 이 궁창(רָקִיעַ)은 아래 물(결국 바다로 모이게 됨)과 위 물(신비로운 위 영역)을 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라키아(רָקִיעַ)’라는 용어는 역사를 통틀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제가 쓴 “하늘 덮개 같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글에서 이미 라키아(רָקִיעַ)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고대 근동 우주론에서는 견고한 돔이나 공간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유대인의 깊은 성경적 해석은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 단어는 “펼치다”, “망치질하다”, 또는 “늘리다”를 의미하는 동사 라키아(raqia)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부 초기 해석자들은 궁창을 그 위에 있는 천상의 바다를 지탱하는 둥근 하늘로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우주의 바다가 세상을 둘러싼다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우주론을 생각나게 합니다. 고대 근동에는 이러한 세계관이 파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적 계시로 이루어진 라키아(רָקִיעַ)에 관한 말씀은 다신론적 그리고 범신론적 세계관을 깊게 갖춘 근동 신화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 시기적으로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와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도 동일하거나 매우 유사한 서사시가 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후에 그리스 호머의 일리아드(Iliad)와 오디세이(Odyssey)로 그리스 로마 문명 즉 서양 문명의 가장 큰 토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 그 중에서도 창세기 1장의 신학은 독특한 반전을 더합니다. 바로 위의 물(물이 얼마나 깊게 하늘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은 혼돈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억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라키아는 단순히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물 사이의 공간은 빛과 천체, 그리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의 무대가 됩니다.
과학적으로, 이러한 다층적인 관점은 물, 수증기, 그리고 대기가 초기 지구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이해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질 수 있습니다. 대기가 안정되기 전에 지구 표면은 수증기와 녹은 암석으로 덮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구가 식으면서 물이 응축되어 바다가 되고 하늘이 맑아졌습니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분열과 질서의 이미지를 반영합니다. 따라서 궁창은 생명의 필수 조건인 숨 쉴 수 있는 공간의 출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하늘 위의 물은 성경의 묵시록적 이미지와도 공명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 6절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묘사하는데, 이는 거룩하고 영원한 형태의 우주의 물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편 148편 4절에서 “하늘 위의 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름을 받는데, 이는 그 물들이 우주적 예배에서 계속 존재하고 역할을 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하늘의 구조는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오한 상징성을 지닙니다. 궁창은 창조 속 하나님의 질서, 혼돈에 대한 그분의 방벽, 그리고 구원을 위한 우주의 준비를 나타냅니다. 위의 물은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우연하거나 공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의 신비와 위엄, 그리고 의미로 가득 차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창조에 있어서의 땅 에레츠, ארץ>
하늘들은 물이 있는 곳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Shamayim이며, 그 하늘들이 지구 대기권을 가리키는 하늘과, 우주 공간으로서의 둘째 하늘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셋째 하늘에 대해서 간략하게 앞서서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물위에 운행하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습니다. 하늘들과 땅들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한국어의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뉘앙스와는 매우 다름을 봅니다. 하늘들이 그냥 하늘이 아니고 물이 있는 곳이며, 이 물은 우리가 말하는 물보다는 Fluidic materials인 것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물은 가스 (gas)와 수증기와 같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속에 있을 때에,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성령님이 우주의 질서를 잡으시고 우주 공간 안에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이전 글에 충분히 다른 바와 같이 “빛이 있으라(예히 오르, יהי אור) 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시작이 되었으며, 우주 안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집이 만들어졌습니다. 첫번째는 에덴 동산이며,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이스라엘을 통해 보이셨고, 진실로 그 몸이 거룩한 교회로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창세기 1장이 없었다면 구속사의 시작과 완성에 있어서 입체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을 흙 즉 땅의 흙(에레츠)으로 지으셨습니다. 이제 하늘들과 물과 성령님의 운행하심과 관련된 땅을 다루고자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지구는 히브리어로 에레츠(eretz)로 표기됩니다. 이점에 있어서 에레츠는 국소적 의미에 적용됩니다. 광의의 의미에서 에레츠가 물질이나 별, 행성, 위성을 포함한 모든 우주의 물질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물질(matter, material)의 창조를 에레츠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땅”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אֶרֶץ(‘eretz)는 성경 우주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retz’가 단순히 지구 뿐만 아니라 별, 행성, 위성을 포함한 물질적 우주 전체를 의미할 수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언어적, 성경적, 신학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로 “에레츠”는 무슨 뜻인가요?
히브리어 אֶרֶץ(‘eretz)는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일반적으로는 에레츠는 땅(Land), 흙(ground), 토양 (soil)을 가리킵니다. 또한 국토를 말하는데 특정 땅이나 국가(예: 에레츠 이스라엘)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에레츠는 하늘과 대조되는 우주의 가장 중요한 물질인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시적으로 예언적 텍스트로 그리고 때때로 은유적으로 물리적 세계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늘들과 대비되는 에레츠입니다. 따라서 에레츠는 현대 천문학적 의미에서 엄밀히 지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에레츠는 우리 아래의 땅, 눈에 보이고 거주할 수 있는 세계, 또는 더 넓게는 인간 삶의 영역을 지칭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1절과 “하늘과 땅”이라는 구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Bereshit bara Elohim et hashamayim ve’et ha’aretz,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이 히브리어 구절 “הַשָּׁמַיִם וְאֵת הָאָרֶץ(ha-shamayim ve’et ha’eretz)”는 메리즘(Merism), 즉 무언가의 전체를 지칭하기 위해 두 가지 극단을 사용하는 비유법입니다. “하늘들과 땅”은 단순히 “하늘들과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완전체로 지칭되는 하늘들과 땅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 창조된 전체 질서
• 공간(하늘)과 물질(땅)의 전체
현대 우주론적 언어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간, 시간, 물질을 포함한 전체 우주를 창조하셨다.”
에레츠는 일반적으로 땅(earth), 땅(ground) 또는 세상(world or cosmos)을 의미하지만, 특히 영적인 영역이나 천상의 영역과 대조적으로 물질적인 영역 전체를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예들을 보겠습니다.
1. 이사야 45:18
“하늘(shamayim)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eretz)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지으셨느니라…”
o 여기서 에레츠는 물리적 세계, 즉 생명이 존재하는 영역, 즉 흙 뿐만 아니라 세계 체계를 포함합니다.
2. 시편 24:1-2
“땅(eretz)과 그 안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자들은 여호와의 것이로다.”
o 시적 용법에서 에레츠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유지하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하나님의 소유가 지닌 우주적 범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3. 출애굽기 20:11
“이는 여호와께서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라…”
o 여기서 에레츠는 물질적 창조를 요약한 것으로,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도록 확장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별, 행성, 그리고 우주적 구조물이 포함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에레츠는 물질 우주인가, 물질적 우주인가?
히브리어에는 과학적 의미의 “물질”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가 없지만, 창세기 1장에서 에레츠는 다음을 나타냅니다.
• 창조의 물질적 측면
• 샤마임(하늘)과 대조되는 것
따라서 에레츠가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를 명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창세기 1장 1절의 맥락에서 합리적으로 다음을 포함합니다.
• 물리적 영역
• 물질적 요소
• 하나님께서 현실의 “땅 쪽”에 존재하게 하신 모든 것
자 그렇다면 물질세계를 다루는 과학과의 관계에서 학자들은 어찌 보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현대 창조론자들와 신학자(존 월튼, 휴 로스, 브루스 월트키, 고든 웬햄 등)는 종종 창세기 1장 1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주적 선언 – 하나님께서 만물, 즉 하늘(공간)과 땅(물질)을 창조하셨다는 것
따라서 이 해석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Shamayim = 공간/시간
• Eretz = 물질/에너지(물리적 실체)
이는 빅뱅이 다음의 시작을 나타내는 과학적 우주론과 아름답게 일치합니다.
• 공간
• 시간
• 물질
위의 내용들을 볼 때 단순히 하늘을 그저 공간으로 보는 것도 너무나 국소적이지만 지구의 땅 만을 에레츠로 보는 견해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제한하는 것으로도 될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에레츠는 히브리어적 용례와 사용에 있어서 특히 창세기 1장은 더 넓은 함의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늘들 즉 Shamayim에는 눈에 보이는 대기권 하늘, 광대한 우주의 하늘, 상층 영역 보이지 않는 그리고 영적 또는 우주외적 공간인 천상 영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Eretz는 흙과 땅과 대지와 물질과 같은 지상 물질적이고 거주 가능한 영역 물질, 물리적 우주, 가시적 세계를 다 함포 합니다. 그러므로 하샤마임 베하레츠 (HaShamayim vehaEretz, הַשָּׁמַיִם וְאֵת הָאָרֶץ)는 “하늘들과 땅”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우주 전체 창조물과 우주 안에 있는 공간, 시간과 물질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eretz는 대부분 현대 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처럼 기술적으로 “물질”이나 “우주”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광의의 의미에서 우주와 물질세계를 표현해 줍니다. 이를 대체할 다른 용어가 없을 정도입니다. 에레츠는 기능적으로는 물질적 영역, 즉 하나님께서 형성하고, 형상화하고, 채우신 세계의 고대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샤마임과 결합하면 별, 행성, 그리고 모든 물리적 실체를 포함한 모든 창조물을 포괄하는 포괄적인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과 삼위일체적 창조의 형상>
창세기 1장 2절은 가장 강력하고 신비로운 창조의 주체 중 하나, 곧 하나님의 영(히브리어: 루아흐 엘로힘)을 소개합니다. 이 영은 깊은 물 위를 떠다니며, 마치 새가 둥지를 맴돌듯이(신명기 32:11 참조) 있습니다. 제가 이전 글에도 설명 드렸지만 다음 섹션에서 부연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이는 심오한 기대의 순간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했던 우주가 신적인 변화의 직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풍부한 의미 범위를 포괄합니다. 바람, 숨결, 공기, 또는 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호성은 의도적이며 신학적으로 중요합니다. 루아흐는 단순히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라, 창조 세계에 생명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임재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바람과 숨결은 생명력의 원천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생명을 주고, 형상을 만들고, 유지하시는 분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 성령은 후에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 즉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하신 분으로 계시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가 창세기 1장을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다시 읽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성부는 말씀하시고, 말씀은 이루시고, 성령은 운행하십니다. 교부들이 자주 확언했듯이, 모든 신적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는 권능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교제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더욱 확고해집니다. 거기서 로고스(말씀)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느니라.”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6-17절에서 그리스도는 창조의 행위자이시며 유지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생명을 주고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숨결이십니다. 시편 104편 30절에서 시편 기자는 “주의 영을 보내시매 저희가 창조되고 주께서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성령의 창조적인 역할은 초기 우주의 조직력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혼돈 속에서 질서를 가져오듯이, 현대 물리학은 중력과 전자기력과 같은 힘이 입자를 원자로, 원자를 은하로 어떻게 조직했는지 설명합니다. 성령을 물리적인 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이러한 비유는 현대 독자들이 과학적으로 관찰 가능한 세계 안에서 신적인 행위의 일관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령은 또한 생명과 인격과 깊은 연관을 갖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아담을 산 영혼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숨결(니쉬마트 하임, Breath of Life, (נִשְׁמַ֣ת חַיִּ֑י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채우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혼돈스러운 물 위에 운행하셨던 바로 그 성령이 이제 교회 위에 운행하시며 질서와 생명과 변화를 가져오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단순히 물질적인 기원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선포입니다. 태초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숨결이 창조적인 기쁨으로 부어졌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성령의 운행으로 시작된 것은 계시록에서 성령의 강림으로 끝납니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로고스 그리스도 – 창조의 시작과 끝>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틀로 이 우주적 기원을 반영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여기서 사도 요한은 영원한 로고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 당시에 현존하실 뿐만 아니라 창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신다고 밝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창세기를 재해석하는 것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심오한 연속성을 드러냅니다. 창세기의 창조주가 복음서의 구속주이십니다.
요한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창조 행위에 부차적인 존재나 사후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이와 동일한 확언이 골로새서 1장 15-17절에도 나타납니다. 바울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좌와 주권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셨고 “만물이 그 안에서 함께 섰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우주적 건축의 중심에, 창조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그 목표이자 지탱하는 원리로 자리매김합니다. 유대 사상과 헬레니즘 철학 모두에 존재하는 고대 로고스 신학은 신성한 지혜, 말씀, 그리고 임재를 구현하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는 잠언 8장의 지혜이시며,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말씀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창조의 시작과 끝을 하나로 묶으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요한계시록 22:13)으로 소개합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세상을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이사야 65장 17절에 예언되고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다시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최종적인 실현입니다.
이처럼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성경 신학의 책받침처럼 기능합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좋게 만드셨는지 알려주고,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다시 좋게 만드실 것인지 알려줍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정원을 만드시고, 요한계시록에서 그 정원은 도시가 됩니다. 창세기에서 강은 에덴에서 흘러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생명의 강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옵니다. 창세기에서 창조 세계는 죄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은혜로 치유됩니다.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보는 것은 시간과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또한 변화시킵니다. 창조주는 자신의 사역에서 분리되지 않으십니다. 성육신을 통해 사역에 참여하십니다. 그분은 육신을 입으시고 자신을 통해 창조된 것을 구속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역사의 중심점이시며, 시작과 끝을 모두 이해하게 하십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우주가 인과관계의 닫힌 체계가 아니라 신적인 의도, 지혜, 그리고 임재가 깃든 창조물임을 확증합니다. 별들을 존재하게 하신 말씀은 우리 영혼에 평화를 말씀하시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분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분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는 단순한 신학적 추상 개념이 아닙니다. 그는 창조의 이면에 있는 이유이며, 창조의 주체이며, 존재의 유지자이며, 운명의 주인이십니다. 세상의 기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만 그 의미를 발견합니다.
<새 창조, 부활, 그리고 창조의 윤리>
그리스도께서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시라면, 그분의 부활은 새 창조의 중심축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고립된 기적이 아니라, 새롭게 된 우주의 첫 열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기록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안에서 죽음의 권세가 깨어지고 창조의 미래가 시작됩니다.
영광스럽지만 육신을 지닌 그리스도의 부활된 몸은 모든 창조물의 회복을 위한 본보기가 됩니다. 그분의 몸이 변화되었지만 실체화되었듯이, 세상 또한 버려지지 않고 새롭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은 창조물 자체가 종살이 아래 “신음하며” “썩어짐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묘사합니다. 이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과 변화에 대한 성경적 종말론을 확증합니다.
이러한 비전은 우주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새 창조 신학을 낳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라, 새 것이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해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될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징이 됩니다. 우리의 변화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이 새 창조 신학은 기독교 윤리와 선교에 심오한 의미를 지닙니다. 물질 세계가 새롭게 될 운명이라면, 우리가 창조 세계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중요합니다. 청지기 직분은 환경적 감상주의가 아니라, 창조 세계의 선함과 종말론적 운명에 기반한 신학적 사명입니다. 지구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우리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며 영광을 위해 예정되었다면, 정의, 자비, 그리고 연민은 그 믿음의 필수적인 실천이 됩니다. 기독교 선교는 영혼을 구원하는 데 국한되지 않습니다. 육체를 치유하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보호하고, 취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새 창조가 옛 창조와 만나는 과정에 참여합니다.
예배에서 새 창조는 이미 창조된 것과 아직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 기념됩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음을 선포합니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즉, 우리가 옛 세상의 죽음과 새 세상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충실한 순종의 행위, 치유를 위한 모든 기도, 모든 찬양의 노래, 모든 환대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어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날을 기대하게 합니다.
이렇게 창세기 1장은 고대 우주론의 유물이 아니라 기독교적 소망의 토대입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을 보여주고, 우리를 구원 이야기로 초대하며, 새 창조의 대리자로 파송합니다. 창조, 타락, 구원, 그리고 회복은 하나의 곡선을 이루며, 그 중심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서 계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요한계시록 21:5).
<계시, 구원, 그리고 소명으로서의 창조>
창세기 1장은 단순한 시작을 넘어, 신학적 지도이자, 전례적 비전이며, 예언적 창입니다. 그것은 혼돈이나 우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형상화되고, 성령으로 불어넣어지고, 질서와 아름다움과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우주를 드러냅니다. 하늘과 땅, 물과 하늘, 땅과 생명, 시간과 빛, 이 모든 것이 신적 말씀의 교향곡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적 질서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적론적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를 지향합니다. 물 위를 맴돌던 숨결부터 신자들 안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숨결까지, 성령은 역사를 하나의 구속의 태피스트리(tapestry)로 엮어냅니다.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말씀부터 “세상의 빛”이신 말씀까지, 로고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적이고 지속적인 중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새 창조를 구현하라는 부르심을 실천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이야기의 모든 측면, 즉 그 구조, 진행, 다층적인 우주론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신적 계시와 만물의 궁극적인 회복을 예고합니다.
결국,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고대 과학에 대해 추측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배하라고 요구합니다. 기술 설명서처럼 해석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성한 시, 우주의 예배, 그리고 신적인 부르심으로서 그 안에 거하라고 초대합니다. 우리를 위로는 하나님의 보좌로, 밖으로는 광활한 창조 세계로, 안으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로 이끕니다.
창세기 1장을 읽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기계가 아니라 성소로 보는 것입니다. 바람 속에서 창조주의 음성을 듣고, 별 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고, 폐 속에서 그분의 숨결을 느끼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어둠 속에 빛을 말씀하시며, 우리를 그 빛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는 소망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글을 맺으며: 성전으로서의 우주, 희망으로서의 창조>
창조는 차가운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드라마입니다. 별들은 단순히 백열하는 기체가 아니라 찬양의 등불입니다. 물은 단순한 화합물이 아니라 생명의 자궁입니다.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실험실 보고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줍니다. 그것은 우주가 창조주께 드리는 첫 번째 시편입니다. 우리가 입자와 은하를 더 깊이 탐구할수록, 우리는 혼돈이 아니라 질서가 만물의 근원임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중력은 기도가 영혼을 휘감듯 공간을 휘감습니다. 강력은 계약이 사람들을 붙잡듯 원자를 붙잡습니다. 전자기력은 말씀이 마음을 밝히듯 세상을 밝힙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신성한 지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자 우주는 순종했습니다. 그 빛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으며, 어둠은 그것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태초에 임재하셨던 성령께서 지금도 나라들, 마음들, 시간 그 자체 위에 임재하시며 새 창조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첫 창조는 끝이 아닙니다. 구원의 시작입니다. 말씀과 성령,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통해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계약금이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창세기 1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여는 찬송가입니다. 그것은 소망의 청사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연구하고, 울고,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빛이 있으라(예히 오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생명이 있으라. 사랑이 있으라. 영원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보라, 그것들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2025년 4월 23일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씀
PS 저의 글을 다시금 읽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다음 링크를 올려 드립니다.
두 권의 책 한 명의 저자 (창조론 대 진화론: 신앙과 과학): https://ucdigin.kr/?p=101948
하늘 덮개 같은 하나님의 은혜: https://ucdigin.kr/?p=101922
하나님의 창조와 진화론에 대한 단상: https://ucdigin.kr/?p=10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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