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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저의 일을 나누면서>
저는 이 글을 쓰면서 40여년 전 20대를 보내며, 세상의 모든 학문을 논한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저는 스스로 1년에 책 10권씩 쓰겠다고 작정했는데, 수백편의 논문을 썼지만, 정작 매년 10권씩 책을 쓰겠다는 저 자신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는 글을 받고 저 자신에게 채찍을 가해서라도 쓰려고 했습니다. 오늘이 5일째이며 벌써 다섯 번 째의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하루에 한 편 씩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다른 일도 하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 하루 지나면 장거리 여행을 가야 합니다. 글을 쓰다가, 다시금 인류 본연의 문제 앞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영성계발] “은하에서 창세기까지: 과학과 창조주의 설계의 조화” » 김종필 선교사 » 제일 큰 문제는 창조의 문제이지요. 보이는 이 모든 세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지으셨지만, 육신의 눈 만을 갖고 있는 우리의 시각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두 번째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만물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구가 점점 더워지고, 기후에 변화가 일어나고, 수면이 상승해서 조사해 보니, 지구에 CO2가 증가해서 일어난 문제임을 보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 화성 이주를 꿈을 꿉니다.
더 넓은 우주로 나가보려 하니 태양계는 너무나 작습니다.
우리 은하를 건너가려면 빛의 속도로 얼마나 걸릴까요? 무려 10만 광년입니다. 빛의 속도로 10만년이 걸려야 우리가 속한 은하 건너편에 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초속 3십만 킬로 미터로 달릴 경우입니다. 우리 은하(Milky way galaxy)에서 가장 가까운 인공 은하라 할 수 있는 Canis Major Dwarf Galaxy 만 해도 25,000 광년이 걸리고, 안드로메다 은하만 해도 253만 광년이 걸립니다.
우리가 사는 은하를 빛의 속도로 가도 10만 년 걸리고, 안드로메다 가는데도 250만 광년이 걸리지만 우주 전체에서 보면 미세한 점보다 작게 보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류가 창조를 보는 시각이 이렇다고 봅니다.
우리는 너무 작은 일에 집착하고 매달리면서 큰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생물학이 되었든, 물리학이든, 또는 천체 물리학이든 대부분으로 지엽적인 것에 대해서 연구하고 알고 있습니다.
정작 정확한 답은 우리 앞에 있는데 말입니다.
이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이, 내가 왜 우주를 만들었고, 어떻게 만들었고, 무슨 목적으로 창조했다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그 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들을 통해, 지구를 통해, 땅과 생명과 물질을 통해 하나님을 알만한 모든 것들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 인데, 이를 20절 먼저 그리고 19절을 읽고자 합니다.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과학을 연구해도, 별을 관찰해도, 물질을 조사해도, 그 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 속에 보임으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오늘 제가 쓰는 글은 무엇보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가장 큰 간격 때문입니다.
‘과학(科學)’이라는 단어가 동양권에서 사용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난학을 통해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만든 조어인 과학은 중국과 한국에서도 그 이후 널리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떤 단어를 썼을까요?
학문(學問)입니다. 어떤 분야를 묻고 배워서 익힌다는 뜻입니다.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헬라 문명에서 과학과 철학과 신화는 모두 학문 영역이었습니다.
영어는 학문과 과학도 모두 “science”로 사용하지만 독일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동양의 학문(學問)에 해당하는 단어는 “Wissenschaft”이고, 이는 지식의 창조(Knowledge creation) 또는 지식의 추구(Peruse of knowledge)로 동양적 개념과 비슷합니다. 학문이 말 그대로 배움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은 Naturwissenschaften, 인문학은 Geisteswissenschaften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신학과 철학과 역사와 영적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포함됩니다. 독일어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모두 합친 단어가 바로 Wissenschaft 입니다. 오늘 제가 쓰고자 하는 과학이라는 단어가 영어권에서 자연과학 영역에만 국한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자연과학을 비롯한 모든 과학인 Naturwissenschaften, 형이상학과 신학 그리고 사회과학 및 인문과학을 포함하는Geisteswissenschaften를 합친 동양적 개념인 학문에 해당하는 독일어 Wissenschaft는 제가 대학 졸업논문 “학문 통합”을 논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이야기입니다.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 이 모두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성경은 특별계시의 영역이지만 그 외의 우주와 자연과 만물과 생명과 인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 주신 하나님의 DNA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숨겨진 DNA를 찾아가는 여정을 가고자 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하에서 창세기까지: 과학과 창조주의 설계의 조화”
<글을 시작하면서>
우주는 지구의 자전에서 은하계 군집의 중력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과학적 계산을 초월하는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각 궤도와 필라멘트, 모든 초은하단과 우리 은하의 나선팔은 너무나 광대하고 질서 있고 역동적이어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우주를 보여줍니다. 이 글은 우주의 과학적 규모와 구조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실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함, 지혜, 의도를 가리키는지도 살펴봅니다. 과학과 신앙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경외심과 이성이 같은 호흡 속에 존재할 여지가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을 탐색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세상 사이의 조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1부: 움직이는 우주(The Universe in Motion)
<우리 은하 속에서의 지구와 태양계의 움직임>
지구는 태양계 안에 있는 하나의 행성이지만, 태양계안의 모든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면서 그 별들이 또한 자전합니다. 태양 주위를 도는 시간은 다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태양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태양계에는 태양을 비롯해 내행성, 외행성, 위성, 혜성, 카이퍼 벨트, 오르트 구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한 체계 안에 움직입니다. 태양계는 여러 다른 별들과 함께 우리 은하(Milky way galaxy)를 돌고 있습니다. 우주에는 원반형, 나선형, 솜브레노(멕시코 모자)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리 은하는 나선형입니다. 태양계는 나선 모양의 밀키 웨이 은하에서 비교적 가장자리 가까운 소용돌이(vertex)부분에 다른 행성들과 함께 돌고 있습니다. 이 속도를 보면 태양계는 은하를 향해 시속 70,000Km의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태양계는 이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며, 2억천년 마다 은하 중심으로 한 바퀴 돌고 있습니다. 이를 속도를 계산하면 초속 227킬로 미터의 속도로 이동합니다. 태풍의 속도가 초속 17미터, 시속 평균 20 킬로미터이고, 범위는 시속 15-30 킬로이니 과히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의 이동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다시금 말하면, 태양계의 은하 궤도 속도는 227km/s 또는 800,000km/h 이상입니다. 지구의 기상 현상과 비교하면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 처녀자리 성단에서 은하수의 위치>
하지만 우리 은하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주에서 수많은 은하수들이 그룹을 이루는데 우리 은하는 처녀자리 은하단에 속해 있습니다. 지구와 처녀자리 은하단의 거리는 6,400만광년 거리에 있으며, 처녀자리 은하단은 은하수들의 집합체입니다. 처녀자리 성단 자체는 회전하고 있으며, 최대 2,147,200 km/h의 속도로 수많은 다른 은하계들을 중력적으로 끌어 당기면서 돌고 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구의 자전속도: 시속 1,600km
지구의 공전속도: 시속 1만 6624km
태양을 도는 지구의 궤도 속도: 107,000 km/h
태양이 은하를 향해 이동하는 속도: 시속 70,000Km
은하수를 도는 태양의 궤도 속도: 828,000km/h
은하가 안드로메다를 향해 이동하는 속도: 시속 24만 km (안드로메다와 지구의 거리: 2백만 광년)
우리의 우주가 있는 장소 자체가 처녀자리 은하단 방향으로 움직이는 속도 : 시속 160만 km(지구와 처녀자리 은하단의 거리: 6400만 광년)
처녀자리 은하단이 주변의 은하들을 끌어당기면서 미지의 공간으로 가는 속도 : 시속 214만 7200km
(처녀자리 은하단이 주변의 은하들을 끌어당기는 속도: 시속 1000km)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내에서의 처녀자리 성단의 운동>
하와이 대학 천문대 팀을 이끈 브랜트 털리(Brend Tully)는 전파 망원경을 사용하여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을 발견했습니다. 처녀자리 은하단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이 바로 라니아케아 초은하단(Laniakea Supercluster)이며, 처녀자리 은하단은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에 속해 있습니다.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은 160 메가 파섹(광년으로 5억 2000만년) 만큼 길게 늘어져 있고, 100,000개의 은하들이 그 속에 포함되어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라니아케아는 하와이 언어로 “헤아릴 수 없는 천국”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이 초은하단을 발견한 곳이 2014년 브랜트 툴리의 하와이 대학교 천문학 팀이 하와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의 크기는 5억 2천만 광년에 걸쳐 있으며, 속박(결합) 질량은 대략 10의 17승태양질량으로, 이를 환산하면 태양의 10경배가 됩니다.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에는 총 세개의 은하단이 속해 있는데 처녀자리 은하단, 바다뱀자리-센타우루스 초은하단, 그리고 공작자리-인디언 자리 초은하단입니다.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에 속해 있는 이 은하단들은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며,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안에는 우주 물질 뿐 아니라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들이 있어서 천문학자들의 초미의 연구 대상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거대한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조차도 우주에서 더욱 더 거대한 필라멘트의 한 부분입니다.
< 우주 필라멘트와 그 규모>
지금도 세계의 천문학자들이 공동으로 우주의 지도를 그리고자 하고 있는데 매우 극소수의 작은 부분의 지도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우주에는 태양계와 같은 항성계, 그 항성계가 속한 은하, 그리고 그 은하의 중심에 엄청난 중력을 유지하는 블랙홀, 그리고 그 은하는 다른 은하들과 함께 은하단을, 그리고 그 은하단은 더 거대한 초은하단과 그룹을 이루고, 그 초은하단은 엄청난 규모의 필라멘트 구조 안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놀라운 것은 필라멘트에 속한 초은하단이 이 거대한 구조에 네트워크를 이루는 것이 바로 중력적 속박 때문이며 이를 Great attracter라고 부릅니다. 이 거대한 중력적 속박이 주변의 많은 은하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조차도 우주 필라멘트 구조라고 알려진 훨씬 더 큰 웹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은하 필라멘트는 지금까지 우주에서 밝혀진 구조 중에서 초은하단의 규모를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가장 큰 거대한 구조입니다. 은하 필라멘트의 길이가 50에서 80 메가 파섹이니 이를 광년으로 환산하면, 1억 6,300만 광년에서 2억 6,100만 광년의 거리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은하 필라멘트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머리털자리(코마) 필라멘트
페르세우스자리-페가수스자리 필라멘트
큰곰자리 필라멘트
살쾡이자리(린스)-큰곰자리 필라멘트
CIG J2143-4423
오늘날에도 전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우주를 지도화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는 일부만 지도에 표시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 태양계와 같은 항성계가 은하를 형성하고, 은하는 성단을 형성하고, 성단은 초은하단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은하단은 은하 필라멘트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은하 필라멘트는 우주의 골격을 형성하는 거대하고 상호 연결된 구조입니다.
우주에는 네가지 기본 힘이 있는데 이를 중력, 전자기력, 약력 그리고 강력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도 중력은 태양계와 같은 항성계, 그리고 그 항성계들이 모여 성단을 이룬 은하, 그리고 은하 크기의 규모에 따라, 은하단(Galaxy cluster), 은하군(Galaxy group), 은하(Galaxies)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또한 움직이게 합니다. 중력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은하단들이 모여서 초은하단이 되고, 초은하단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은하 필라멘트이며 이 모두 중력적 작용 안에서 움직입니다. 아직도 발견할 것이 많고, 실제로는 우주의 끝을 가보지도 못한 우리가, 이 거대한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에 대하 경외와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2부: 창조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God’s Power and Wisdom Revealed in Creation)
저는 여기에서 저의 글을 전개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이렇게 거대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라면, 시간도, 공간도, 자연도, 바다도, 지구의 대기권인 하늘도, 생명체도, 그리고 인간을 지으시는 것이 어려우셨을까?라는 것입니다. 은하계의 움직임에서 초은하단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광대함과 복잡성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창조물을 성찰하게 되면 믿지 않던 천문학자나 과학자들도 자연스럽게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과 경배심이 생깁니다. 성경적 통찰력, 과학적 성찰, 과학자와 신학자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전능한 권능과 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주 속의 하나님의 전능한 권능과 지혜>
성경적 관점: 창조물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권능
시편 19:1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선포하도다.”
이사야 40:26 –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욥기 26:7,14 –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로마서 1:20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유명 과학자들의 성찰
종교적이든 아니든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조차도 우주의 경이로움에 충격을 받았고 창조주나 존재의 신비에 대한 경외심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우주에 대해 말했습니다.
1. 아이작 뉴턴(1643–1727) –
“태양, 행성, 혜성의 이 가장 아름다운 체계는 지적이고 강력한 존재의 조언과 지배에서만 나올 수 있었습니다.” (Principia Mathematica, 1687)
독실한 기독교인인 뉴턴은 과학이 하나님의 설계를 보여준다고 믿었습니다.
2.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
“우주에 대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이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과학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우주의 법칙에 영이 존재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인간의 영보다 훨씬 우월한 영입니다.”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고,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목입니다.”
전통적으로 종교적이지는 않았지만, 아인슈타인은 종종 우주의 합리적 아름다움에 대한 경의를 표했으며, 때때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3.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 –
“나는 단지 하나님의 생각을 그분을 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앞서서 여러 번 언급했던 케플러는 천문학에서의 자신의 작업을 예배 행위로 보았고, 창조의 신성한 질서를 발견했습니다.
4. 막스 플랑크(1858–1947), 양자 이론의 창시자
“종교와 과학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시작에 있고, 물리학자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고려 사항의 끝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잘 알려진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천문학은 우리를 독특한 사건으로 이끕니다. 무에서 창조된 우주, 생명을 허용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정확히 제공하는 데 필요한 매우 섬세한 균형을 가진 우주입니다.” — 노벨상 수상자 물리학자 아르노 펜지아스
“자연을 더 많이 연구할수록 창조주의 작품에 더욱 경탄하게 됩니다.” — 미생물학의 아버지, 루이 파스퇴르
우주와 만물과 땅과 생명, 물질 세계와 생명 그리고 인간을 아는 지식을 다 하나로 모을 때, 그 속에는 하나님의 힘과 지혜가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지구가 시속 1,600km로 회전하고, 태양은 시속 107,000km로 공전하며, 은하계는 시속 828,000km로 질주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은하계 전체가 광대한 우주의 춤의 일부인 반면, 이 모든 것을 설계한 지혜와 힘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주는 혼돈스럽지 않고 물리 법칙에서 은하계의 나선팔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질서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원자의 구조보다 더 깊습니다. 그의 힘은 광년을 넘어 뻗어 있습니다.
시편 147:4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우주의 모든 것을 지으셨으나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눅 12:7)
3부: 창조와 인간 (Creation and the Humanity)
<진화론과 창조론을 대하는 출발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그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는 전제와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많은 신들 가운데 한 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창조주입니다. (히브리서 11:3).
• 창조에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목적 그리고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록 피조물의 특권과 은총이 많아지고 깊어집니다.
•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생명체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은 최고의 걸작품이며 영적 존재입니다.
• 창세기의 창조는 양자 역학이나 DNA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우주적 질서를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에 방어적으로가 아니라 존중심을 가지고 임해야 합니다.
• 창세기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 신학적 서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 과학과 성경이 아직 화해되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받아들입니다.
• 성경과 과학 사이에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과학을 무시하지도 말고, 더불어 성경적 진리를 지엽적 인간의 해석에 타협해서도 안됩니다.
• 두려움에 빠지거나 믿음을 거부하는 대신, 기독교인은 진리와 이성을 모두 통합하고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증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성경과 과학적 이해에 충실할 수 있을까요?”
과학은 지구와 생명체 그리고 태양계와 우주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실험을 통해 답을 구하고 또한 그에 대한 결과로 가설이나 이론 그리고 법칙을 말하곤 합니다. 동일한 방법으로 모든 질문과 궁금한 상황에 대하여 답을 주는 것이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였고, 세상을 통해, 인류의 창조를 통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하십니다. 그런데 과학자의 입장에서 하나님 창조 질서와 의문 사항에 대하여 답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에 반할 수도 잇습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신학, 철학, 과학을 이끌어 온 질문과 탐구는 아무리 지식이 증가하여 그 간극은 줄어들지 않고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지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관계의 장소>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태양계 안에 있는 수많은 행성들(planets)과 성단(constellations)을 연구함으로 물질 세계의 구조와 생명의 진화(?)를 밝혀 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수많은 별들 즉 항성들, 행성들, 은하계들 가운데 왜 지구가 특별한 곳이며, 지구에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지를 밝혀 주십니다. 지구는 하나님의 의도가 가장 충만하게 표현되는 중심 지점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은 지구를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우주를 연결하는 관계의 장소로 볼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거주하는 곳이 바로 지구입니다. 하나님은 물질과 에너지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를 인지하여 경외하고 사랑하고, 반영하도록 우리 인간의 존재를 창조하셨습니다.
두번째로 왜 지구가 먼저인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창세기는 지구 중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태양계보다 더 거대한 항성계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속한 은하계보다 더 광대한 은하계가 수도 없이 많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눈과 귀는 이 작은 행성 지구에 쏠려 있으며, 창세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관심과 목적을 어떤 부연 설명 없이 “좋았더라” 그리고 “아주 좋았더라”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의 기록에서 창조는 지구 중심의 관점에서 설명됩니다. 반드시 연대순이나 천체물리학적 순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설명됩니다.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생겨났는지가 아니라 사물이 순서대로 존재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창조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는 지구에서 시작하는데, 죄의 기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입문서 같은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순서는 기본(빛, 하늘, 땅)부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환경(식물, 태양, 달, 동물)을 준비합니다.
마지막으로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인간이며, 모든 동물처럼 호흡이 있고 생명이 있지만 인간은 그냥 동물과 같은 생명체가 아니라 생령이라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영적인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서로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구 우선”이라는 관점은 과학적인 의미에서 사물이 만들어진 시점이 아니라 목적의 우선순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구가 연대순으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창조에 대한 이해는 사실은 신비의 영역입니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 대한 쉐퍼, 레녹스 그리고 데이비스의 견해들>
과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하여 세계적으로 매우 저명한 복음주의 과학자들인 Dr. Henry Schaefer, Dr. John Lennox, Ted Davis의 핵심 요점은 모두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과학과 신앙을 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말하기를 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갈등보다 조화 과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인식된 갈등은 교회 안팎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학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보다 미묘하고 통합된 관점이 드러납니다. 세 명의 저명한 목소리(Dr. Henry Schaefer III, Dr. John Lennox, Dr. Ted Davis)는 과학적 발견과 성경적 신앙 사이의 조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시합니다.
1. 소명으로서의 과학
Dr. Henry Schaefer III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자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인 Dr. Schaefer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중적인 “갈등 모델”에 도전합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소명입니다. 그는 아이작 뉴턴과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같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다수가 과학적 연구를 신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으로 여겼던 신자였다고 강조합니다. 셰이퍼는 또한 성경과 과학이 현실의 다른 측면에 대해 말한다고 확언합니다. 성경은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를 다루는 반면 과학은 자연 세계의 메커니즘을 탐구합니다.
2. 이성과 계시
존 레녹스 박사 수학자이자 변증가인 레녹스 박사는 기독교가 이성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합리적인 세계관의 기초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과학적 법칙이 사물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지만 존재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여 신과 과학 사이의 잘못된 선택을 해체합니다. 레녹스에 따르면 성경적 창조 이야기는 우주의 이해 가능성과 설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틀을 제공합니다. 그는 또한 도덕성, 의미, 의식과 관련하여 과학적 탐구의 한계를 강조함으로써 자연주의(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를 비판합니다.
3. 역사와 조화
테드 데이비스 박사 과학 역사가 테드 데이비스는 복음주의가 과학에 관여한 잘 문서화된 역사를 제시합니다. 반지성주의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과학 연구와 교육에 깊이 관여해 왔습니다. 데이비스는 성경과 자연이 모두 신의 계시로 여겨지는 “조화 모델”을 옹호합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과학에 두려움이 아닌 분별력과 신의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접근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은 겸손과 신의 계시에 대한 신뢰에 뿌리를 둔 신앙과 과학 간의 대화에서 주도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론 이러한 사상가들은 함께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합니다. 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적대자가 아니라 동맹입니다. 각각은 신의 진리의 다른 차원을 드러냅니다. 신의 계시를 통한 성경과 그의 창조물에 대한 연구를 통한 과학입니다. 신앙은 합리적 탐구의 기초를 제공하고 과학은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을 더욱 깊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거부하기는 커녕,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통일성을 계속해서 증거하는 사려 깊은 참여의 풍부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4부: 과학과 신앙 (Science and Faith)
<균형 잡힌 관점이란: 과학과 신앙 사이>
과학은 본질적으로 관찰 가능하고 측정 가능하며 반복 가능한 자연 법칙과 과정을 연구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초자연적 진실을 긍정합니다. 무에서 창조, 기적, 하나님의 계시,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연 법칙 밖 또는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엄격히 과학적인 관점에서 기적과 하나님의 행위는 종종 “초과학적” 또는 “믿을 수 없다”고 분류됩니다. 비논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시험 방법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학과 신앙은 화해는 가능할까요?
화해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를 다른 하나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과학과 기독교가 서로 다른 종류의 질문에 답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가능합니다.
과학은 기독교에게 묻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작동합니까?” “왜 존재합니까?”
“무엇이 이것을 일으킵니까?” “이것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자연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누가 법칙을 썼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관찰하거나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무엇이 계시되었습니까?”
과학이 자연적 탐구의 경계 내에 머무르고 신학이 계시와 목적에 기반을 두는 한, 그들은 공존하고, 서로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심지어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과학의 위치>
르네상스 이후 자유로운 사고와 과학적 가설, 이론 및 실험들이 종교적 교의에 메이지 않고 사고하는 자유로운 사상가 및 과학자들을 배출함으로, 도리어 이들의 그러한 지식과 과학적 발견은 전통적 기독교 교의를 공격하거나 반격하는데 사용되기에 이릅니다. 계몽주의, 합리주의 및 자유주의 사상의 도래는 반기독교적 정서와 이론으로 무장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에는 기독교는 반지성적이며, 미신적이며, 신화적이며 비과학적이라는 인식으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지식의 발달에 따라 기독교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프톨레미우스적 세계관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바르게 인식하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습니다. 철학과 과학의 발전이 기독교 창조에 대하여 수많은 질문을 던질 때 지동설과 같은 이론을 기독교화 시켜서 교회의 권력과 교리적 정죄를 통해 무력화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은 기원후 2세기에 그리스-로마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였던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가 개발한 지구 중심 우주 모델을 말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지구 중심 모델):
• 핵심 아이디어: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천체(태양, 달, 별, 행성)는 복잡한 경로로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합니다.
• 이 관점은 1,400년 이상 서양 사상을 지배했는데, 특히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 기독교 신학적 신념(예: 창조에서 인간의 중심성)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 이 모델은 행성의 겉보기 역행 운동(역행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작은 원형 궤도)을 주원(더 큰 원형 궤도)에 사용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 전환>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은 결국 도전을 받았고 16세기에 태양 중심 모델(태양 중심 우주)을 제안한 코페르니쿠스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의 작업을 통해 완성된 이 전환은 철학자 토마스 쿤이 나중에 “과학 혁명” 또는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부른 것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가속화된 정교분리는 더이상 세상의 학문과 과학이 교회의 교리적 강요에 굴복하지 않게 됩니다. 이에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성경의 창조를 믿거나, 아니면 세상이 말하는 빅뱅과 진화론을 믿어야 하는 선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에 기독교가 적절히 세상의 과학과, 이론 그리고 진화론과 여러 학문적 발달에 대한 답변을 주지 않기에 발생하는 그리스도인의 물음에 외면한 결과가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부분은 “과학”과 “신앙”과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론에 대하여, 그리고 창조론을 부인이하는 과학에 대하여 창조론 대 진화론, 신앙 대 과학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창조론(Creationism) 대 진화론(Evolution)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응(Christian Response)>
1. 논쟁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
• 창조론은 일반적으로 우주와 생명이 창세기, 특히 창세기 1-2장에 설명된 대로 특정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Young Earth Creationists, 지구의 나이가 약 6,000~10,000년이라고 믿는 사람)와 늙은 지구 창조론자(Old Earth Creationists, 지구의 나이는 더 오래되었지만 직접적인 창조 행위는 여전히 믿는 사람)가 있습니다.
• 진화론, 특히 다윈의 진화론(Darwinian evolution)은 수백만 년 또는 지구 나이만큼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자연 선택을 통해 생명이 점진적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이론은 빅뱅 우주론(Big Bang cosmology)과 결합하여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발전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제공합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이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했는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는 신앙에서 출발하는 기독교와 물질 세계와 생명 그리고 우주를 관찰하고 발견한 사실과 가설에서 출발하는 과학 사이에서 인식된 정보와 지식 그리고 해석으로 일어난 갈등은 때론 화해하기 힘든 기독교와 과학 사이에 일치하기 힘든 간극을 초래합니다.
2. 과학과 신앙 사이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합니까?
A.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먼저 “어떻게?” 대 “왜?”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과학은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즉 메커니즘, 법칙, 과정을 묻습니다.
• 신앙과 신학은 목적, 의미, 도덕성, 하나님의 의도를 묻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유형의 질문에 답하고 서로 모순되기보다는 보완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과학은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탐구와 관찰에서 출발하여 답하는 것이라면, 계시 종교인 기독교는 존재하는 물질 세계와 생명에 대한 존재의 의미,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답해 주고 있습니다.
B.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물질 세계와 생명에 대한 성경적 해석이 중요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반면, 다른 그리스도인은 과학 교과서가 아닌 시적이고 신학적 이야기로 읽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계시에 대한 인간의 해석학적 차이가 극명함을 말합니다.
<글을 맺으며>
가장 작은 아원자 입자(subatomic particle)에서 가장 큰 우주 필라멘트에 이르기까지, 우주는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지혜와 권능을 말해줍니다. 과학적 발견은 신앙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경외심을 더욱 깊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이 만드신 세상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면서, 우리는 과학과 신앙이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데 있어서 동반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많이 이해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존재하게 하신 분을 더욱 영광스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이 여정은 과학과 성경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존중할 만큼 큰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씀
PS 저의 글을 다시금 읽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다음 링크를 올려 드립니다.
두 권의 책 한 명의 저자 (창조론 대 진화론: 신앙과 과학): https://ucdigin.kr/?p=101948
하늘 덮개 같은 하나님의 은혜: https://ucdigin.kr/?p=101922
하나님의 창조와 진화론에 대한 단상: https://ucdigin.kr/?p=101941
사랑한다 정말이다 찬양: https://www.youtube.com/watch?v=pE7ZfdUo2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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