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와 경쟁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솝 우화 속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보면 그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토끼는 경주의 대상이 거북이라고 생각했다. 거북이만 이기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거북이와 경쟁을 시작했다. 자신의 빠른 속도에 대해 확신했고, 거북이를 무시해도 된다고 여겼다. 이런 마음이 교만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경주 도중 여유롭게 놀며 가다가, 심지어 한숨 자고 간다고 했다가 시합에 패하고 말았다.
[목양저널] 예수를 바라보자! » Aufsehen zu Jesus! » 글 한은선 목사 » 히12:1-3/ 주일설교 새벽묵상 »
그러나 거북이는 달랐다. 거북이는 애초에 토끼를 경쟁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토끼가 잘 달리든, 조롱하든, 자신을 “느린보”라 놀리든 개의치 않았다. 그는 위에 있는 목표 지점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신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경쟁보다 중요한 것은 성실함이라고 믿었고,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냈다.
결국 그는 경기에서도 승리했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겼다. 토끼와 거북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라보는 목표의 방향과 경주에 임하는 태도의 차이이다. 토끼는 거북이를 이기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거북이는 토끼를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완주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둘은 출발선은 같았지만, 바라보는 방향과 마음가짐이 달랐다. 토끼는 거북이와 경쟁했지만, 거북이는 경주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경쟁과 경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경쟁은 타인을 의식하고 비교하는 데서 시작되지만, 경주는 스스로에게 충실한 여정이다. 왜 달리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끝까지 완주할 수 있다. 뛰는 목표와 이유가 거룩해야 삶도 거룩해지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세상이 아니다. 누구와 경쟁하여 앞서느냐가 우리의 가치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그 앞에 서게 될 날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앙망하라”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예수를 바라보라”하셨다.
▮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예수를 목표로 바라보고 살아가되 삶의 방법이나 자세는 경주하는 것처럼 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담은 선악과를 바라보다가 범하여 실낙원 했으나, 바울은 뒤엣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감으로 이방인의 대 사도가 되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러므로”로 시작되고 있다. 히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를 기억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 믿음의 경주를 잘 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2절 “믿음의 주요..”라고 하였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믿음의 주와 대상이 되신다. 예수만이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도 믿음이다. 나를 향한 그의 크고 많은 은혜로 믿게 된 것이기에 믿음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마1: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셨다. 인류역사 가운데 인간의 영혼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 분은 예수님이 유일하다.
미국 아칸소 주의 리틀록이란 곳에서 매우 심각한 백인과 흑인 사이에 폭동이 일어났을 때, 미전역이 흑백전쟁으로까지 번져갈 무렵, 이런 보고를 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질서를 잡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건의를 묵살하고 “내가 직접 그 곳으로 가겠소”라고 말한 뒤, 그곳에 혼자 가서, 한 흑인학생의 손목을 잡고 교문을 들어가자, 경비를 서던 백인 청년들도 막을 수 없어,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죄인은 누구도 천국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손을 붙잡고 천국으로 들어가시는 중보자가 되신다.
▮ 예수님은 우리의 승리자이시기 때문이다. 2절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실패자를 따르면 실패한다. 그러나 부활로 사망도 이기신 주님을 따를 때 이기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예수님을 끝까지 바라보기 위해서 뛰어 넘어야 할 것은, 1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엡4:22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셨다. 우리가 얽매이기 쉬운 죄는 “물질, 오락, 명예, 권세, 세상 염려와 근심 등 끝이 없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기치 못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완주해야 한다. 회당장 야히로는 자신의 딸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딸을 살리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 모시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혈루병 환자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었고 결국은 자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망이나 불평이 없다. 그저 묵묵히 주님만 바라볼 뿐이다. 사실 혈루병 환자가 얼마나 밉고 원망스러웠을까? 그럼에도 그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다가 결국은 딸을 살리게 된다.
▮응원군과 함께 : 1절,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응원하는 구름 같은 증인들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라톤 경기에서 주전 선수를 위한 파트너가 있다. 일정구간동안 페이스에 맞춰 뛰면서, 다른 선수들의 방해를 막아주거나 견제하면서 주전선수가 최적의 페이스로 뛸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면, 마지막 코스에서는 주전 선수가 단독으로 전력질주 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주의 자녀들을 위하여,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인생경주에서 끝까지 완주하도록 도와주신다. 최후 승리자의 삶이란 주님을 바라보는 눈길을 떼지 않는데 있다.
필자 한은선 목사/ 독일 베를린한인선교교회 담임, 유럽 코스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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